제3권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 동양에서 본 서양 · 제5장

동서양 패러다임의 전환: 국가경쟁에서 범세계적 문제로

약 29분 · 주 23개

1) 국가간의 경쟁: 동양의 고립주의 vs 서양의 해외진출

15세기말 동서양은 폐쇄와 개방이라는 반대되는 대외정책을 추구하게 된다. 콜럼버스와 바스코다가마로 대표되는 서양의 해외 진출과 정화제독에 관한 모든 정부자료를 폐기하면서 해금-쇄국 정책을 추구하는 동양의 고립주의가 그것이다. 앞서 있던 해양기술을 가진 동양의 고립주의는 동서양의 상대적 위치를 전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결국 19세기 서양의 동양침략으로 이어졌다. 중세 천년 동안은 앞서가던 동양 문물이 서양에 전해지던 시기다. 서양의 해외진출과 동양의 고립주의에도 불구하고 18세기에도 동서양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동서양의 균형은 18-19세기 서양의 산업혁명으로 파괴된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서양의 우위는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나무 대신 철로 배를 만들고, 바람에 의지하는 돛 대신 스팀 엔진으로 동력을 써서 자유자재로 방향과 속도를 내며, 파괴력이 막강한 대포로 무장한 서양의 함대들이 등장한 것이다. 동양은 산업혁명이전의 과학, 무력, 경제력의 상태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서양의 진출과 정복, 착취에 속수무책이었다. 소위 서양세력의 동양 점령, 즉 서세동점의 현상이 시작된 것이다.

동양은 서양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국의 경우 해금 정책은 14세기말부터 민간에게 모든 해외무역을 금지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지만, 1479년 에는 정화의 대 해양원정에 대한 모든 기록을 불태우면서 해금정책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뒤이어 일본도 쇄국 정책을 채택하게 된다. 동양은 해금 또는 쇄국이라고 부르는 고립 정책으로 집단이나 개인의 외부와의 접촉을 체계적으로 막으면서, 국가가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결국 개인의 자율과 창의성, 호기심을 죽이고, 국가 전체로서는 외부의 사상이나 변화, 발전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마음이 굳게 닫힌 것이다. 누구의 장점이든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항상 배우겠다는 열려있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로마제국이 서양을 지배할 때, 당나라의 대외정책, 징기스칸이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면서 취한 자세가 바로 그러했다.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어떠한 한가지 이론이나 도그마의 포로가 되지 않고, 다른 나라로부터 배울 것은 모두 배워 활용한다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이러한 자세와 정 반대의 입장에 선 것이 동양의 해금-쇄국 정책이었다.

동양의 해금-쇄국정책은 몇 가지 이유에서 시행되는데 정권을 그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로부터 보호하자는 고려가 가장 중요했다. 명나라의 경우 일본의 왜구(倭寇)에 대한 대책이 그것이다. 해금정책은 명에 이어 청나라 에서도 시행된다. 해금정책은 해안지역에 거주하던 주민에 대하여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으며, 이들은 동남아 지역으로 대거 이민을 떠나며 생계를 유지하는 길을 찾게 되었다. 또 일부 사람들은 왜구 해적과 세력을 합쳐 같이 해적이 되었다. 사실 명나라 이후 일본의 해적으로 알려진 왜구에는 명나라 사람이 많이 포함되어 결국 왜구는 명나라와 일본의 합작품인 경우가 많았다.

명나라 출신 왜구 해적 지도자들도 많이 나왔다. 정성공 (鄭成功, 1624-1662, 네덜란드어로는 콕싱아 Koxinga이고 일본에도 고쿠센야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의 경우가 그 좋은 예다. 정성공은 아버지가 중국인 어머니가 일본인이다. 아버지가 일본에 체류할 때 얻은 부인이다. 당시 대만 등 섬은 일본 왜구의 세력권 하에 있었다. 정성공은 17세기 중반 샤먼섬과 진먼섬을 근거지로 하여 중국, 일본, 필리핀, 베트남을 연결하는 무역과 해적을 겸하며 커다란 세력을 결성한다. 한때 남경공략까지 기도하게 된다. 2차에 걸친 남경 공략에 실패한 후 대만을 점령, 본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1662년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해금정책은 국가 내에 적대세력과 결탁하고자 하는 가능성을 없애고자 하는 목적이 컸다. 동서양 관계에서 이러한 해금-쇄국 정책은 곧 서양세력의 침투를 막자는 것이었다. 당시 서양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탐험과 정복에 이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까지 손을 뻗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 해양제국의 식민정책에 대하여 동양은 잘 알게 되었다. 일본에서 도꾸가와 막부가 쇄국정책을 펴게 되는 이유도 집권세력의 안보가 최우선 고려사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쿠가와 막부는 지방 다이묘 들이 해외 기독교 세력의 영향을 받거나 세력을 합치는 것에서 집권세력에 대한 위협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실제로 1613년 일본 센다이 번의 다이묘 다데 마사무네(伊達政宗, 1567-1636)가 다데 마루라는 선박을 만들어 휘하 가신180명으로 사절단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멕시코, 스페인과 로마를 방문하였다. 이때 다데 마사무네의 목적은 스페인의 힘을 빌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패권에 도전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양이 왜 해금이나 쇄국정책을 펴게 되었는지 하는 문제는 동양에서 “외교”라는 어휘의 기원을 찾아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외교의 어원은 예기(禮記) 교특성(郊特性)편에 나와있다. 즉 “위인신자무외교 부감이군야 (爲人臣子無外交 不敢貳君也, 남의 신하 된 자는 외교를 하지 않는다. 두 가지 마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외교는 신하가 군주 몰래 남의 나라와 통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인신무외교(人臣無外交)” 가 일찌감치 군주가 피지배자의 외국과의 인적 왕래와 문화적 교류를 견제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정립된다. 310

외교와 관련 “인신무외교” 라는 생각은 중국과 조공관계를 오래 경험한 우리나라와 특별히 관계가 깊다. 서세동점의 시기에 1840년 중국에 대한 아편전쟁, 1854년 일본에 대한 페리(Perry) 제독의 흑선 도래에 이어, 서양은 한국에게 통상을 요구하였을 때 조선의 입장은 특이하다. 조선은 183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인신무외교”의 명분을 걸어 청나라의 허가가 없기 때문에 서양과 직접 외교를 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311 명목상으로 청나라의 외교부인 예부(禮部)에서 조공국인 조선의 외교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과 전통에 의하여 동양에서는 군주를 제외하고는 외부와 접촉이 자유롭지 않았으며, 군주는 아주 쉽게 신하와 백성에게 외부와의 접촉을 금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금-쇄국정책의 또 다른 목적은 집권세력이 해외무역을 독점내지 통제하고자 하는데 있었다. 이러한 욕구는 중국보다도 특히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경우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차원에서 본 일본이 취한 쇄국 정책은 동시기 서양이 취한 중상주의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집권세력에 의한 재정의 확대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나가사키를 통한 서양과의 무역을 직접 관장하면서 커다란 재정적인 이득을 보는 것을 목격한바 있었다. 나가사키는 일본의 서양과의 무역 못지않게, 왜구에 대한 해금정책으로 중국과 일본 간 직접적인 해외무역을 금지시킨 중국과의 포르투갈 상인에 의한 중-일 중계무역 항구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를 도요도미에 이어 도쿠가와 세력이 독점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처럼 해금-쇄국 정책은 당시 군주들에게 정권의 안위와 이익의 독점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모두 달성시켜주는 측면이 있었다.

19세기에 있었던 동양의 강제적 문호개방은 서양 제국의 현상타파적인 각개약진에 의한 부국강병의 추진과 동양의 중국을 중심으로 한 책봉-조공 체제 내에서의 현상유지 정책의 충돌이다. 서양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결과, 서세동점이 시작되는 19세기 중반 동양사회는 천지개벽하는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3천년을 이어온 중국을 중심으로 하던 “천하질서”가 서양제국을 포함하는 “국제질서”로 바뀌게 된 것이다.312 이에 따라 3천년간 “천하”라는 개념으로 써온 세상이 이제는 “동양”이라는 지리적 개념과 언어로 바뀌게 되었다.313

그러나 동양은 동양문명이 중시하던 윤리 면에서 여전히 서양의 정복의 문명에서부터는 배울 것이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게 된다. 그래서 19-20세기 동양에는 동양의 윤리 중심의 문명을 지키고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이용하자는 입장을 취한다. 동도서기(한국), 중체서용(중국), 화혼양재(일본) 같은 구호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에서 한국은 동도서기, 중국은 중체서용이라는 사상으로 집약된다. 반면 일본만은 동양문명을 지키자는 화혼양재와 서양문명을 따라가자는 탈아입구 라는 두 가지 길을 열어놓고 있었다. 명치유신 정부는 끝내 탈아입구 쪽으로 길을 택하여 서양식 점령과 착취의 태도를 이웃 아시아 국가에 대하여 채택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불교, 도교, 유교를 동아시아 국가들과 공유하면서 동양적인 문명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314

동양의 고립주의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초기에는 많은 서양 사상가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동시에 서양의 식민제국주의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이들은 “동양의 고립주의가 스스로를 보호하자는 동양 국가 차원에서는 올바른 정책이지만 서양의 통상적 이해관계와 전통에는 방해가 되는” 정책이라고 보았다. 볼테르는 “동양 국가들이 자국 내에서 서양 종교를 배타적으로 수용할 것을 요구하는 선교사들을 쫓아 낸 것”은 잘한 일이라고 평가하였다.315 칸트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서양의 식민제국주의와 착취 자세를 비판하면서 동양의 서양에 대한 해금-쇄국 정책을 정당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중국과 일본은 처음에는 서양인들을 자유롭게 받아들였지만 이제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유럽국가 중에서 네덜란드만 해안에 접근을 허용 받고 있다.”316 아담 스미스도 서양의 식민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있었다:

유럽인들이 야만적으로 세계도처에서 만행을 자행하고 있다. 군사력 면에서 서양이 절대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그들은 세계 구석 구석에서 모든 종류의 불공정한 행위를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계속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317

그러나 서양의 식민착취제도, 즉 제국주의에 대하여 서양에서 도덕적으로 반대의견을 표명하는 것과 제국주의에 의하여 피해 국가들이 당하는 실질적인 희생은 전혀 다른 문제다. 결국 반대의견은 소수화하고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철학이 서양사상가들 대다수의 지지를 받게 된다. 특히 서양의 동양지배는 문화적으로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다.

산업혁명 이후 힘의 충돌에서 동양은 서양에게 굴복하게 된다. 서세동점이 시작되고, 20세기 중반까지 동양의 수모의 한세기가 시작된 것이다. 서양의 무력과 과학기술에 압도되면서도 동양은 사상 면에서 서양에게 경도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서양 중에서 이러한 국가주의 즉 지배자의 이기심 내지 탐욕을 제도적인 장치를 고안하여 효과적으로 극복한 것은 서양이었다. 동양은 지배자의 이기심과 탐욕을 정확히 문제점으로 지적한 사상을 발달시켰지만, 제도 면에서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었다. 특히 서양이 제도 면에서 장족의 발전을 하는 동안 수백 년 계속된 해금-쇄국정책으로 새로운 문물과의 접촉을 스스로 포기하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극도의 무기력을 보이며 당시까지 힘을 발휘하고 있던 국가주의 앞에 아무런 제도적인 혁신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산업혁명과 서양의 세계지배

18세기 후반부터 서양은 산업혁명의 결과로 15세기말 그들의 선조들이 시작한 세계 탐험을 계속 추구하여 동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정복함으로써 세계 정복으로 완성하게 되었다. 동아시아는 산업혁명이전에는 세력균형으로 정복이 불가능하였고, 아프리카는 말라리아 라는 질병을 퇴치할 의약품의 개발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산업혁명은 서양의 군사력에 기동력과 파괴력에 있어서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도약을 이루게 되었다. 서양은 증기선과 신식대포로 무장하여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서양세력에 저항하던 범선과 구식대포로 무장한 동양에게 무적불패의 세력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아편전쟁에 대하여도 후에 영국의 대 정치가가 된 글래드스톤(William Gladstone 1809-1898)은 의회연설에서 아편전쟁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나는 아편전쟁 보다 더 정당화되기 어렵고 영국을 앞으로 더 수치스럽게 만들 수 있는 전쟁이 또 있을지 알지 못한다.318

서양은 동양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19세기에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들이 익숙한 정복문화를 내세웠다. 민본사상과 윤리라는 철학에 익숙했던 동양사람들에게, 민본사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서양의 정복문화가 그대로 동양에 다가왔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신식 서양 군대에 구식 동양 군대가 맞설 수 없었다. 서세동점의 시대가 열리며, 서양 정복국가들의 무자비한 동양 침략을 본 동양사람들은 서양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서양문명이 동양문명과 크게 다르며 국가들이 다른 국가를 취급할 때 문명국으로 가져야 할 윤리 같은 것은 전혀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 아편전쟁 등을 관찰한 동양사람들은 서양문명을 그저 약육강식을 따르는“금수의 문명”으로 보았다.

서양이 산업혁명의 덕분에 동아시아를 정복하기 이전에 그들은 지중해 아랍해적에게서도 산업혁명이전에는 세력균형을 이루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서양이 중세 시대를 거쳐 근세 에도 상당시간 동안 지중해 아랍해적의 피해를 입었다. 지중해 북아프리카 아랍 해적세력인 바바리해적(Barbary Corsairs)들로 부터였다. 유럽인들은 북아프리카의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지역을 바바리 지역(Barbary)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이 지역에 살고 있던 베르베르족(Berbers)을 지칭하는 데서 나온 명칭이다. 바바리 아랍해적은 중세기과 근세 수세기 동안 유럽국가들을 자유자재로 공략하고 수많은 포로를 잡아와서 노예로 삼거나 배상금을 낼 때까지 붙잡고 있었다:

17세기 전반기동안, 바바리해적- 북아프리카 지역에 있는 해적들인데 이 지역 중앙정부로부터 기독교 국가들의 배를 공격하도록 허락받고 있었다-들은 영국의 각지역을 자주 습격하고 있었다. 그들의 갤리선이나 범선들은 서양 선박을 공격하고, 선원을 잡아서, 때로 노예로 팔았다. 영국의 해군본부는 기록을 남겼는데, 이때 아랍해적들이 영국배를 마구잡이로 노획했으며, 1609-1616 사이에 무려 466척의 영국선박을 노획했다. 플리머스 지역에서만 1625년에 27척의 선박을 노획했다. 319

사실 중세 시절 수 백년 동안 지중해 연안의 유럽국가들은 아랍해적들의 습격을 받고 살았다. 이들은 특히 이태리 지역에서는 “사라센 망루”(Saracen Tower)를 연안 지역 곳곳에 세워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다. (지금은 이태리 해변지역에 세워진 사라센 망루를 관광식당으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 많다). 또 스스로 보호할 방법이 없을 때는 연안지역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도 취했다:

스페인의 말라가 지역에서부터 이태리 베니스 지역까지 연안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연안에 살지 못하고 이 지역을 떠났으며 이들은 비참하게 살게 되었다. 이들은 계속 아랍 해적의 습격을 받고 많았고 가난속에서도 노예로 잡혀간 사람들의 포로 배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최근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320

재미있는 것은 당시 많은 유럽서양인들이 아랍해적과 힘을 합쳐서 해적행위를 하였는데 이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하거나 포로로 잡혀서 해적행위를 하도록 합의한 사람들이었다. 마치 동양에서 일본해적 역할에 중국인들이 가입하여 함께 해적행위를 한 것과 같은 방법이다. 이들은 서양선박에 실려 있은 물건들을 탈취하였다. 또 스페인, 프랑스, 영국, 이태리의 마을이나 도시를 습격하여 약탈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점차 포로를 노예로 삼아서 배상금을 가지고 오면 풀어주는 방법을 자주 택했다. 유럽국가들은 배상금을 지불하고 노예로 잡혀 있는 친척들을 데려오곤 했다:

유럽인들은 간헐적으로 노예로 잡혀 있는 친척들을 데려오곤 했었는데, 배상금제도가 1640경에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배상금제도가 생기자 아랍해적들은 노예획득에 집중하였다.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 정부에서도 배상금 지불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배상금지불-노예해방 활동은 성직자들이 수행했는데, 그들은 배상금 모금, 바바리 국가들을 방문하는 것, 그리고 노예를 데리고 있는 주인들 과의 협상하는 것까지 관여했다. 321

유럽과 아랍해적 간의 균형과 이를 이용한 아랍해적의 활동도 18세기까지 유지되었다.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Cervantes)는 스페인 해군에 근무하다가 1575년에 아랍해적에 납치되었다. 5년간 잡혀 노예로 있다가 배상금을 내고 풀려난 사람이다. 돈키호테 제1부가 출간된 것은 1605년이다. 영국의 다이넬 디포가1719년 출간한 소설의 주인공은 로빈슨 크루서(Robinson Crusoe)다. 소설 초기에 크루서는 그의 선박이 아랍해적에 습격당하고 아랍해적에 잡혀 2년간 노예로 있다가 탈출한 이야기가 나온다. 볼테르가 1759년 출간한 깡디드(Candide)는 유명한 철학적 풍자소설이다. 여기에도 주인공 중의 하나가 아랍해적에게 잡혀 가서 고생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처럼 16-18세기의 유럽인들에게는 지중해 아랍해적이 자주 등장한다. 수천명이 노예로 잡혀 가서 그들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데려오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중세, 근세에 수없이 일어난 해전에서도 유럽 해군이 바바리 해적을 이길 수 없었다. 사실 많은 경우 바바리 지역의 국가들이 개인선박을 무장시켜 해적으로 사용하였다. 유럽국가도 마찬가지 였다. 개인선박에 무장을 하도록 하여 적국의 상선을 습격 포획하는 현상을 사략선(私掠船, privateering)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획득한 것들은 개인선박 주인과 정부가 나누어 가졌다. 유럽과 아랍에서 유행하던 제도다.

그러나 산업혁명이후에는 유럽 해군들이 증기선과 신식대포로 무장하여 마음대로 북아프리카의 아랍국가들을 공격하고, 아랍의 범선들을 자유자재로 파괴하였다. 이로서 중세로부터 시작된 오랜 기간을 이어온 아랍 해적의 역사가 종결되었다. 산업혁명 이전과 이후 유럽-아랍 간 해전의 차이가 이를 증명해준다: 1669년 산업혁명 이전의 영국과 아랍 간의 해전 322 과 1816년 산업혁명 이후 영국 해군의 아랍 알제리 항구와 선박 포격323 하는 그림들이 이를 표현하고 있다.

미국도 아랍해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18세기 말까지 미국은 아랍해적에게 보상금 및 배상금을 막대하게 지불하였다. 예를 들면 1790년에 알제리의 바바리 해적은 11척의 미국선박을 포획하고 100명이 넘는 선원들을 포로로 삼고 배상금 지불을 요구하였다. 1796년 미국은 알제리에게 642,000 달러를 지급하고 알제리에게 매년 보급품 등 공물을 바치기로 하고 포로들이 풀려났다. 이어 미국은 트리폴리 바라리 해적단과도 미국선박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160,000달러와 매년 보급품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미국이 19세기에 들어와서 산업혁명을 이용하면서 바바리 해적과의 관계가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은 산업혁명의 결과를 이용하여 증기선과 장거리 대포로 무장한 해군을 결성한 후에 아랍 바바리 해적을 공격하였다. 1815년 미국 해군은 알제리 바바리 해적으로부터 모든 미국 포로를 돌려받고 알제리 정부로부터 10,000 달러의 배상금을 받는데 성공하였다. 이어 미국은 트리폴리에 있는 바바리 해적단에게도 접근하여 유사한 성과를 거두었다. 324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기계혁명은 인간의 경제력을 급격히 증가시켰다. 처음으로 인간은 대량생산, 원료의 급격한 수입증가, 교역의 폭발을 경험하게 된다. 국가간의 교역의 기하급수적인 신장은 산업혁명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1760년 산업혁명 직전에 영국은 약 1천톤의 목화를 수입하였다. 1백 년도 흐르기 전에 목화 수입량은 200배 증가하였다. 이러한 팽창은 인류 역사상 산업혁명이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우선 목화 생산국에서 거대한 자본의 투입으로 목화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해야 한다. 동시에 목화수입국에서 산업혁명의 힘을 이용하여 직물생산력이 급격히 증가해야 한다. 다른 나라에 목화와 직물 등 거대한 물량을 실어 나르는 증기선이 등장해야 한다.

이를 통제하는 군사력을 기준으로 한 평화가 세계적으로 또는 지역적으로 유지되야 한다. 이러한 생산과 소비 패턴은 인류가 그 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었다. 폭발하는 원료와 시장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나아가 파생되는 새로운 환경, 개발, 그리고 윤리의 문제를 인류는 다루어야 한다. 결국 산업혁명은 인류의 모든 사회분야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경제, 사회, 정치, 이념, 그리고 진화 문제까지 포함하는 산업혁명의 파생 효과는 거대하다. 아직 우리는 산업혁명이 인류사회에 몰고 오는 결과를 충분히 체득하지 못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산업혁명은 우선 두가지 결과를 인류에게 가지고 왔다. 전쟁과 교역에 미친 결과다. 전쟁에서는 산업혁명을 시작한 서양의 세계적 우위를 확보해 준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이러한 기술적 문제는 다른 문명에서 따라갈 수 있다. 그래서 서양의 군사적 우위는 몇 세기만에 평준화의 길로 가게 되면 국제관계에서 문제는 없어진다. 단 핵무기의 개발은 인류에게 위험을 가져오지만 핵무기 때문에 “상호궤멸”(Mutual destruction)이 가능하기 때문에 전쟁의 부담은 커지지만 동시에 전면전쟁의 가능성은 작아진다.

산업혁명이 인류에게 가져온 문제는 전쟁보다 교역에서 일어난다. 산업혁명은 이윤의 크기를 기하학적으로 팽창시킨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인류가 생활에서 많은 긍정적인 효과를 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윤의 크기의 기하학적인 팽창으로 인류가 이러한 속도전에 끌려들어가면 인간의 경제활동이나 교역은 이윤의 추구가 아니라 결정적으로 탐욕의 추구의 차원으로 돌입하게 된다.

21세기에 대부분의 사람 그리고 모든 국가 전체가 탐욕의 추구라는 악순환에 돌입하게 되고, 인간본성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악순환에서 인류가 벗어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인류는 개인이나 국가의 미래가 아니라 인류자체의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할 수 있다. 인류 전체가 초국가적문제로 시달리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지구온난화, 팬데믹, 개도국의 인구팽창, 빈부격차의 증가 등 초국가적 문제가 바로 산업혁명의 결과로 인류가 “탐욕추구”라는 거대한 함정에 빠지게 되었고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나 하는 가능성을 찾지 못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2) 뉴 패러다임의 등장: 국가간의 약탈에서 교역으로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인간본성에 비추어 볼 때, 초기의 항해자 들은 가능한 대로 약탈을 하였고, 어쩔 수 없을 때만 교역을 하였을 것이다.” 우리에게 타임머신, 투명인간 등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저술가 겸 사상가 웰스가 남긴 명언이다. 인류의 본성과 역사의 흐름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우리가 숙고해 보아야 할 명제다.

인류가 집단생활을 시작한 이후 수천, 수만 년 동안 인류는 그것이 부족, 항해자, 국가 인가를 막론하고 가능 하기만 하면 다른 부족, 항해자, 국가를 습격, 약탈, 탈취, 정복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것이 가장 손쉽게 소속 집단의 이익을 확보하는 방법이었다. 공격자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자산을 늘리는 방법이고 최상의 비즈니스가 되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습격을 하고자 했지만 상대편이 무장을 잘하고 있고 따라서 습격이나 전쟁으로 수탈하기가 쉽지 않았을 때만 교역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국제관계는 약육강식과 전쟁의 패러다임이 지배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부족과 국가를 위하여 전쟁과 약탈에서 승리하여 영토와 노예, 그리고 자원의 노획해 온 사람들은 영웅으로 숭배되었다. 또 그들은 대부분 그 나라의 지도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정복한 영토가 크면 클수록, 수탈한 자원이나 노예로 삼은 규모가 크면 클수록, 더욱 위대한 영웅, 위대한 지도자로 숭배되었다. 이것이 역사의 흐름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알렉산더, 씨저, 아틸라, 샤를마뉴, 징기스칸, 메흐메드 II, 코르테즈, 나폴레옹, 이들은 모두 약육강식, 전쟁 패러다임의 영웅이고 지배자들인 것이다.

동양의 오랜 역사도 궁극적으로 결국 전쟁 패러다임 속에서 흘러갔다. 그러나 부족이나 국가간의 약육강식을 당연한 것으로 보았던 서양문명과는 달리 국제관계에서도 윤리를 강조한 동양문명 덕분에 동아시아 국가들은 역사적으로 전쟁 패러다임의 피해를 비교적 덜 입고 살수 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은 19세기 중반 이후 약육강식의 패러다임에 익숙한 서양 열강의 쇄도와 함께, 또 일본이 명치유신의 성공 이후 탈아 입구의 기치를 내걸고 이 대열에 참여하게 됨에 따라, 근 100년 동안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 제국은, 말라리아 약을 개발한 덕분에 드디어 아프리카 내륙지방까지 진출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아프리카 전 대륙을 식민지화하는 경쟁적 열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아프리카 전 대륙이 유럽 열강에 예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이 현상을 역사적으로 아프리카 쟁탈전 (the Scramble for Africa) 이라고 부른다.

유럽제국은 그들의 전쟁 패러다임을 확장할 마지막 프런티어인 동아시아와 아프리카 공략을 끝내자, 그 모멘텀을 타고, 드디어 그 들 간의 전쟁을 벌이게 된다. 제1, 2 차 세계 대전이 그것이다. 독일의 히틀러는, 유태인 학살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데 더하여, 당시 이미 시대착오적이 되어가고 있었던 약육강식의 기치를 내걸고 무자비한 자국의 확장을 도모한 마지막 주자로도 볼 수 있다.

돌이켜 보면, 20세기 전반은 인류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모든 열강들이 막강한 군비를 앞세워 전쟁 패러다임에 전력 질주하였기 때문이다. 수천 년 아니면 더 길게 수만 년을 이어온, 부족과 국가의 약육강식의 습관이 대서양 시대, 특히 산업혁명 이후에는 더욱 급속히 전세계로 퍼지며, 20세기 전반에는 그 빈도와 밀도에서 극에 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극필반, 무력을 앞세운 약육강식은 20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국제사회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이후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쿠웨이트 점령을 시도한 경우 등을 제외하고는 군사력을 앞세워 무력으로 영토 확장을 시도하고, 자원을 수탈하려고 한 나라가 없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과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은 역사에 기인하는 예외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20세기 전반 모든 나라가 영토확장과 자원 수탈에 뛰어 들었던 것과 커다란 대조를 이룬다.

우리는 20세기 후반 영토 확장이 아니라 오히려 자국이 차지한 영토를 전쟁 없이 포기하는 역사상 전혀 새로운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소련과 베트남이 그 예이다.

교통 통신과 과학 기술의 발전 혁명적 발전으로 전 지구차원에서 투명성이 증가되어 노예 착취나 자원 수탈이 불가능해진 점을 들고 있다. 아마도 보다 중요하게는 국가들은 이제 무역을 통하여 대부분의 자원이나 노동력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약육강식적인 수탈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일 것이다. 천연자원이 중요할 때 필수적이었던 영토 확장이나 인간의 근력에 의지할 때 또 노예로 사용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인구수의 증가가 불필요해진 것이다. 동시에 핵무기의 등장과 확산으로 인하여 전쟁이 확대되면 핵무기 사용의 위험이 커지는데, 이 경우 승자에게도 전쟁은 이득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공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새로운 국면의 전개도 역설 적으로 전쟁 패러다임의 종식의 이유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물리적 환경의 차원에서 전쟁 패러다임 종식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20세기에 국제사회가 열린 세계 (open and expanding world)에서 닫힌 세계 (closed and circumscribed world)로 전환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5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약 5세기에 걸친 대서양 시대에 서양은 지구 구석 구석의 탐험과 함께 세계정복을 완성하였다. 그 결과로 국제사회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정복지, 탐험지가 없는 닫힌 세계 속에서 살게 된 것이다. 전쟁 패러다임을 적용할 미지의 세계, 새로운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된 것이다. 지구촌이라는 좁은 공간에서는 전쟁과 정복이라는 노골적인 이윤 착취 행위가 불가능하며, 웰스가 간파한 대로 물리적 힘에 의지한 강제적 수탈 보다 세련된 무역에 의하여 국가들이 상호작용을 하게 된 것이다. 약달에서 교역으로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 지게 된 것이다.

교통통신과 과학기술의 혁명적인 발전, 그리고 열린 세계의 닫힌 세계로의 전환, 민주주의의 확산 등은 필연적으로 국제관계에 전쟁 패러다임의 종식과 함께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을 예고하게 된다. 20세기 후반부터 전개되고 있는 국제관계의 새로운 패턴을 간추려 이야기하면, 지구 전체에서 무역에 의하여 자원을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영토의 확장이나 자원의 착취가 더 이상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영토 확장이나 자원의 착취는 곧 현지민과의 갈등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들이 가뭄, 흉작, 등 어려움을 겪을 때 책임을 지고 먹여 살려야 한다는 부담까지 의미하게 된 것이다.

수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이제 국가들은 전쟁이나 정복대신, 경제력 확장과 무역에 의하여 경쟁하고 승부를 결정하게 된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식민지를 확장하는 나라가 부유한 나라가 되는 대신, 탄탄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무역을 확장하고 상호의존을 깊게 하는 나라가 부유한 나라가 되는 새로운 현상에 접하게 된 것이다. 국가들이 군사력을 앞세운 정복전쟁을 포기하고 경제력과 무역으로 승부를 하게 된 상황은 21세기에 더욱 명확해 질것으로 보인다.

전쟁 패러다임 하에서 부국강병은 하나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군사력이 강한 나라는 이를 이용하여 영토를 넓히고 인구를 늘려 부를 쌓을 수 있었고, 부가 있는 나라는 이를 이용하여 강병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역 패러다임 하에서 이제 부국과 강병은 분리되게 되었다. 경제와 무역을 무시하는 강병 정책은 이제 시대 착오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련과 북한이 비근한 예이다. 독립과 강병을 내걸고, 군사력 확장에 집중해도 이제는 영토의 확장이나 자원의 획득이 불가능 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정책은 나라의 경제를 왜곡시키고, 피폐시켜 결국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현상을 유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국가행태의 변화와 국제사회 관심의 초점 이동 현상은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오늘날 국제관계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는 한 마디로 전쟁에서 무역으로의 전환으로 볼 수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거부하거나, 변경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뉴 패러다임에 적응하느냐 적응하지 못하느냐의 문제로 결론이 나게 되었다. 개인이든 국가든 뉴 패러다임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 도태되는 것이 패러다임 전환의 의미이다. 소련과 동독이 구 패러다임에 집착하다가 소멸하였고, 이제 북한만이 계속 구 패러다임에 매달리면서 소멸을 기다리고 있다.

전쟁에서 무역으로의 패러다임의 전이에 따라 21세기의 세계는 과거와 전혀 다른 세계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이를 예고해 주는 사건과 이벤트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2025년에 들어서서 세계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휘두르는 관세전쟁 속에 매달려 있다. 이는 바로 국가간의 경쟁이 약탈에서 교역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보여준다. 되풀이하지만 무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초점이 바뀌고 있다. 인간이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을 포함하여 수천년간 계속 하여 온 무력에 의한 약탈의 시대는 지나 갔다. 무력은 국제경쟁에서 최선에서 약탈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역을 보호하고 지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교역이 무력 보다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간의 경쟁에만 몰입하는 것은 21세기에는 앞을 전혀 내다보지 못하는 눈이 먼 경쟁을 하는 것이 된다. 이제 국제사회는 국가간의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다루는 동시에 무역 패러다임하에서 새롭게 닥친 전대미문의 문제, 즉 범세계적 문제와 씨름해야 한다. 범 세계적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 라는 상황에 인류 전체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산업혁명의 전파 이전에는 인간이 자연을 해 칠수 없다는 대 전제하에 인간의 경제행위가 이루어졌다. 동서양의 정치경제사상은 이러한 테두리내에서 두개의 패턴을 구성하면서 각자 장단점을 발휘하면서 발달하였다. 그러나 산업혁명이후 2백년이지난 지금,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산업혁명이 인간에게 가지고 온 문제와 처음으로 직접 부딪치고 있다. 그것은 범세계적 문제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함께 인간은 이에 대한 대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에 접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혁명이후 발생한 범세계적 문제의 등장은 동서양 정치경제사상의 패턴, 즉 사익과 공익을 수렴하는가 아니면 충돌하는가 하는 문제와 함께 인류에게 두 가지 본질적인 정치경제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교역은 서로 유익하게 물건을 교환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산업혁명이후에는 발달된 기술과 과학을 이용하면서 인간과 자연, 그리고 국가간의 관계가 혁명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우선 인간은 지구상의 자원을 대량으로 활용하여 지속불가능 한 상태로 급격히 몰아가고 있다. 다른 어떤 동물도 갖지 못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탐욕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에서도 자원이나 물품들이 상호이익이 되는 국가간의 교환을 넘어서서 탐욕의 대상이 되는 관계로 접어들었다. 더구나 후진국의 급격한 인구증가, 선-후진국 사이의 빈부 격차의 증가, 지구온난화, 이로 인한 팬데믹의 발생이 모두 인간 만이 가지고 있는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산업혁명과 시장경제가 세계 전체를 무대로 삼으면서 인류는 과거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상황에 접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수천년간 교류는 약탈과 비교하여 문화적이고 상호이익을 주는 것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이후에는 거대한 자본과 이를 뒷받침하는 힘을 가진 국력이 합쳐서 세계로 뻗어 나가면서 무자비한 이윤 추구가 가능해진다. 즉 교류와 약탈의 차이를 살펴보는 과정에 인류가 들어서게 된다.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은 이러한 거대 담론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보이게 되는지 하는 문제가 핵심사안으로 떠오르게 된다. 특히 서양 문명과 궤를 달리하는 동양 문명에 대하여 이 문제가 던지는 의미가 크다.

3) 교역은 이윤추구인가 탐욕추구인가?

교역은 전쟁과 달리 상대방의 궤멸이 아니라 쌍방의 이윤추구라는 원칙에 기초할 수도 있어서 좋은 점이 있다. 그러나 인류는 교역이 가져오는 이점을 즐기기도 전에 전 지구적 문제에 부딪쳐 인류전체의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매달리게 되었다. 교역이 급격히 확대되고 전 지구를 “착취”의 대상으로 하는 상황에 인류가 부딪쳐 있기 때문이다.

교역은 쌍방 간의 이윤추구가 아니라 일방적인 이윤추구, 즉 탐욕으로 변질되기 쉽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산업혁명의 결과로 이윤추구에서 탐욕추구로 이행하는 과정이 쉬워지고 그 크기가 천문학적으로 확대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탐욕추구라는 욕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본성에 내재해 있다. 그러나 탐욕 추구라는 문명적 기조는 서양문명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그들의 세계정복시대(Age of Discovery)의 과정을 돌아보자.

서양은 1452년 콘스탄티노플과 지중해 제해권을 오토만 제국에게 잃어버린다. 천년 동안 베니스가 독점한 지중해를 통한 아시아 향신료 수입이 중단된 것이다. 서양 각국은 그들의 식생활에 꼭 필요하였던 향신료를 찾아 15세기말 대서양과 인도양 두 방면으로 진출하며 유럽에서 동남아의 향료 생산지로 가는 직항 해로를 결사적으로 개척하게 된다.

서양은 미지의 세계로 과감하게 진출하여1493년 콜럼버스가 대서양 횡단에 성공하고, 1497년 바스코다가마가 인도양 직항로 개척에 성공한다. 콜럼버스와 바스코다가마의 해양 원정은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이윤추구” 였다. 그 들은 향신료와 노예, 식민지를 찾아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무자비한 이윤을 추구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무라드 2세의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계기로 서양인의 식생활에 꼭 필요했던 향신료를 직접 항로를 개설하여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서양인들은 향신료 개척과 따라오는 노예 수입이 최대의 이윤추구의 원천이 되었다.

5백년 전만해도 서양에서 후추는 계피, 정향나무(cloves), 너트메그나무(nutmeg) 등과 함께 아주 비싼 물건이었다. 그래서 이 향료들이 서양각국을 경쟁시켰다: 이들은 향료 생산지 오리엔트를 찾아 직접 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넓은 바다를 헤쳐 나갔다. 향료는 상인들이 지구를 돌며 찾아내는 중요한 상품이었지만, 이를 통하여 서양은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유럽을 위하여 거대한 대륙을 찾아 개척하면서 세계제국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만약 세계 근대사를 시작한 하나의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향료를 찾기 위한 서양각국의 경쟁으로 불붙기 시작하였다고 역사가는 기록하고 있다. 325

콜럼버스, 바스코다가마는 향신료를 찾아 대 항해에 나섰지만, 노예를 많이 획득하기 위해 현지인의 기독교화 하는 것을 늦추는 행위도 하였다. 포르투갈의 서아프리카에서의 노예 획득은 서양의 대서양 노예 무역의 시작이었다. 이때 로마 교황 (Nicholas V) 이 1452 교서를 포르투갈의 알폰소 왕에게 보내 “모든 비 기독교인을 모두 종신 노예로” 삼는 것을 허락하였다.

새로 정복한 섬, 육지, 항구 그리고 해양 들은 모두 알폰소 왕과 그 후손에게 귀속된다…… 그래서 앞으로 더 많은 획득이 열심히 추진되기를 바란다…… 이것은 가장 신앙심이 깊고 고상한 행동, 즉 영혼을 구원하는 행위가 된다. 326

결국 서양의 세계 정복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의 이름으로 또 종교의 이름을 빌어 서양인들 사이에 최선의 방법이고, 성스러운 일로 되어버린 것이다.

서양의 서아프리카 정복은 종교의 이름으로 성스러운 일로 둔갑되었다. 원주민의 노예화는 그들의 영혼의 구원이 되어버렸다. 그들의 판매행위는 정의로운 일이 되어버렸다. 서양인의 정복은 결국 십자군 전쟁의 정신을 가장 지독한 경지도 확대한 것이 되었다. 327

이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가 BC 4세기 페르시아를 정복하러 떠나는 자신의 제자 알렉산더 대왕에게 “그리스인에게는 지도자로서, 비 그리스 야만인들에게는 폭군으로 처신하고, 그리스인은 친구나 친척처럼, 비 그리스인은 동식물 다루듯이”하라고 한 것과 비슷한 이윤추구, 노예 획득의 목적이 컸던 것이다.

바스코다가마는 인도양 원정을 떠나며 포르투갈 왕족을 비롯한 투자자들과 맺은 계약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 원정의 목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방법은 무역, 전쟁, 해적행위, 노예획득 등 모든 수단이 정당화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바스코다가마는 준비가 되어있는 나라와는 무역도 하였지만 가는 곳 마다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빼앗고, 점령하는 것을 서슴지 안았다. 상황에 따라 가장 좋은 이윤창출 방식을 사용하였다. 즉 인간의 이기심, 이윤 추구라는 탐욕이 개인, 집단, 국가의 차원에서 모두 만개하여 있던 것이 당시의 서양 문명이었다. 특히 15세기말의 서양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대한 관심을 높이면서 무력의 행사와 이를 통한 물자, 노예, 영토의 획득이라는 탐욕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추구하고 있었다.

콜롬버스와 바스코다가마에 이어 1522 년 마침내 마젤란과 엘카노 가 3년에 걸친 항해 끝에 대서양 태평양 인도양을 거쳐 지구를 한 바퀴 도는 항해에 처음으로 성공한다. 1519년 마젤란은 5척의 선박과 240명의 선원을 데리고 필리핀으로 항해를 시작하였는데, 마젤란이 1521년 필리핀에서 도착한 후 전쟁에 휘말려 죽는다. 우여곡절 끝에 4척의 배를 잃어버리고 220명 이상의 선원이 죽거나 중도 하차하였다. 결국 엘카노가 배 한 척 빅토리아 호와 17명의 선원을 이끌고 1522년 스페인에 귀환한 것이다. 빅토리아 호에는 동남아에서 실은 향신료가 가득 차 있었다. 당시 향신료는 서양에서 금과 대등한 무게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투자자들은 수십배의 이익을 올렸다. 이러한 막대한 이익이 걸려 있었으므로, 서양인 모두가 이를 차지하기 위하여 대서양과 인도양을 향한 교역에 불 같은 의지에 싸여 임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대서양과 인도양, 그리고 태평양을 향한 지구상 미지의 영역을 용감하게 개척한 것이다.

동양의 문명은 이와 대조적이다. 서양이 대서양 시대를 열기 전에 중국은 인도양을 거쳐 대 함대를 아프리카까지 진출시킨다. 정화(鄭和, Zheng He, 1371-1433)제독의 함대는 1405-1433 간 총7회 소말리아까지 가는 대 선단을 이끌었다. 선단 규모는 300척의 배, 선원 총 30,000명 (수병, 기병대의 말을 태운 선박, 의사, 군인, 학자, 관료들 포함)을 포함하였다. 선박건조기술, 항해술, 괴혈병 치료 등에서 서양에 크게 앞서 있었다.

명나라 초기에 1405-1433 년간 중국은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그리고 신비한 진취적인 해양 모험을 하였다. 정화 제독이 이끄는 대규모의 기술적으로 최정예의 선대가 쟈바, 인도, 페르시안 걸프, 그리고 아프리카 북동부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정화의 함대가 인도양을 갔을 때, 아직 서양의 탐험은 시작되기 이전이었다. 이때 정화의 함대는 서양의 능력이 따라가기 힘든 기술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선박의 크기, 내용의 충실도, 그리고 선박의 총 척수 같은 것은 150년이 지나서 출현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색하게 할 정도였다. 328

아메리카를 개척한 콜럼버스 (1492) 와 인도양을 개척한 바스코다가마 (1497)의 함대는 작은 배 4척, 선원 총 170이 전부였다. 그러나 콜롬버스와 바스코다가마는 미지의 항로를 처음 개척한 것이고, 정화는 실크로드에 따른 기존의 해양 항로를 따라 항해한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콜럼버스와 바스코다가마가 개척한 항로 를 따라 서양은 세계 정복시대를 열기 시작하였고 불과 4세기만에 세계를 모두 정복하게 되었다. 그러면 정화제독은 거의 90년 이상 앞선 해양원정에서 무엇을 추구하였던 것일까?

서양이 대서양 시대를 연 것은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에 기초한 가치관이 달랐기 때문이다. 정화제독이 대 원정을 떠날 때 영락제가 준 지침은 “먼 나라에 있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정화제독은 7차례에 걸친 대 해양원정에서 외국의 땅을 점령하여 명나라의 영토를 넓히거나, 노예를 획득하거나, 물자를 수탈한 적이 없다. 단지 명나라와 당시 명의 황제 영락제의 권위를 사방에 떨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이러한 패러다임이 국제관계에 있어서 서양의 문화와 가장 대조를 이루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왜 7차례에 걸친 정화의 대 해양 원정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해양 실크루트에 따라 이미 알려진 항로와 지역들을 계속 다녀온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정화의 해양원정은 이윤의 추구가 아니라 권위의 추구였던 것이다.

명나라 영락제와 정화의 해양 진출은 아무런 경제적 이득이 없는 장사였다. 모든 비용이 국고에서 지출되고, 원정에서는 아무런 상업적 이익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리고 정화 제독의 항해는 바스코다가마와는 달리 이미 알고 있던 지역을 왕복한 것에 불과하였다. 결국 국고의 낭비를 피하기 위하여 영락제와 정화가 죽은 후 해양원정은 중단되었다. 명나라는 밖으로 펼쳐 나가는 대신 가진 것을 관리하는데 중점을 두고, 안으로 위축되는 해금(海禁) 정책을 더욱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은 명나라, 청나라로부터 외국과의 접촉을 금지당했고, 일본은 해금과 유사한 쇄국(鎖國)정책을 펴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영락제가 정화에게 준, “먼 나라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라”는 지침은 서양 문화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바스코다가마가 개척한 해로를 따라 실제로 동양에 와서 오래 살게 된 예수회 소속 신부인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 1552-1610)는 서양에 보낸 보고서에서 바로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황제도 신민도 아무도 이웃을 침략하거나 정복하려는 전쟁 계획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것에 아주 만족하고 있고 그래서 이웃나라 정복의 욕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점에서 중국인들은 유럽 사람들과는 아주 다르다. 329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보살피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긴다”는 자소사대(字小事大) 사상은 춘추전국시대 이후 이미 동양에서 국제질서를 지지하는 기둥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외교철학의 배경에는 농업국가인 중국이 광대한 유목국가들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거나 직접 통치할 수 없었던 배경이 작용했다. 대신 거대한 경제적 이점으로 이들을 관리하고자 하는 논리에서 국제질서를 수립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결국 서양이나 중국이나 모두 자기보존(self-preservation)철학을 따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철학적으로도 중국의 외교논리에 스며들어 자리잡게 되었다. 자소사대 사상은 전국시대 맹자에서도 중국내 국가들 간에서도 명확히 하고 있다:

대국이면서 소국을 섬기는 자는 하늘을 기쁘게 하는 자이고,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기는 자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이다. 하늘을 기쁘게 하는 자는 천하를 지키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는 나라를 지킨다.330

이러한 사상의 틀 안에서 천하에서 제일 크다고 자처하는 명나라가 다른 작은 나라를 점령한다거나, 그런 나라사람을 노예로 잡아오거나, 착취하는 대상으로 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스로 국제질서를 깨고, 자신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자소사대 사상은 실제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있어서 책봉-조공으로 그리고 조공에서는 진상-회사로 나타난다. 진상(進上)은 책봉을 받은 소국이 대국에게 바치는 예물이고, 회사(回賜)는 대국이 진상을 받고 소국에 내리는 선물이다. 당연히 회사의 선물이 진상의 예물보다 값지고 많은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스코다가마의 서양문명에서 강대국이 약소국에 대하여 물질적으로 손해를 보는 국제관계를 상상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이유로 정화의 해양원정에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착취하는 국제관계를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동서양 간의 비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수천 수백 년 전의 역사적인 사실을 논하면서 도덕적인 평가를 배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동서양이 모두 나름대로의 국익을 추구한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즉 15세기에 서양이 인간의 탐욕을 앞세운 정복과 착취에 나서고 동양이 인간의 이기심을 관리하는 문화로서 국제사회에서 윤리를 앞세운 것은 모두 자기보존 원칙에 의한 것이지, 서양이 악하고 동양이 선하다거나, 서양은 나쁘고 동양은 좋았다는 식의 평가는 적실성이 없다. 왜냐하면 똑 같은 본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동양인이 서양과 같은 지정학적 상황에 처하여 문명을 발전시켜 나왔다면 서양인들과 똑같이 정복과 착취에 나섰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정화제독과 바스코다가마의 예에서 보듯이 15세기 동서양의 인도양 진출이라는 현상에서 표출된 동서양 문명은 패러다임 측면에서 전혀 다르게 행동하였다. 동양은 이기심의 자제 내지 관리의 패러다임을 철학으로 삼고 있었고, 서양은 이기심 방임 내지 촉진의 패러다임을 철학으로 삼고 있었다. 우리가 앞에서 검토한 동양의 관계주의와 서양의 개인주의 철학이 그대로 국제관계에 적용되고 있었다. 개인주의 철학이 그대로 국제관계에 적용되면 이는 곳 철두철미한 탐욕추구로 전환된다.

4) 범 세계적 문제의 등장은 인간본성에서 비롯된 것임

국가간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자가 모든 것을 취하는 탐욕추구는 특히 서양의 세계정복 시대에 각광을 받았고 서양의 세계지배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세계정복이 끝나고 교역이 전세계적 탐욕추구로 이어지며, 인류는 전례가 없이 갑자기 등장한 범 세계적 문제에 휩쓸리게 되었다.

산업혁명은 인류 생활을 편안하게 하고 미래에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동시에 우리는 모두 산업혁명이 촉발한 탐욕의 길로 들어섰다. 과거 우리는 세계가 모두 함께 발전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관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의 탐욕 때문에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걱정하는 상황에 사로 잡혀있다. 갑자기 등장한 지구적인 문제의 심각성 때문이다.

지구온난화 등으로 인류가 멸종의 길로 가게 될 것인가? 네안데르탈인, 로디지아인, 솔로인 등은 추위 등 주위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너무나 지나치게 특수화했기 때문에 멸종하였다. 현생인류의 번영을 가능하게 한 지능과 이를 이용한 문화의 창조, 과학의 발달도 진화의 차원에서 보면 마냥 즐거워할 수 많은 없다. 발전과 함께 닥쳐온 심각한 지구적 문제가 탐욕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본성의 표현이라면 인간에게는 미래가 없다.

생물 진화학적 시간의 차원에서 보면, 언젠가는 인류가 사라질 것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피할 길은 없다. 문제는 그것이 언제인가 하는 데 있다.331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이기심 방임에서 비롯된 이윤추구 현상이 쉽게 탐욕으로 변하는 과정에 끝을 모르고 빨려 들게 된다. 인간이 인간의 체력과 짐승의 힘을 행사 할때는 인류의 활동이 제한적이고 이윤추구로 남는 면이 크다. 그러나 산업혁명이후 기계의 힘을 이용하면서 이윤추구는 탐욕의 세계로 쉽게 진입한다. 성공한 자산가들은 자기재산이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계속 더 많은 자산을 추구하는 현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 현상이 계속되면서 좁은 지구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인류는 지구적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동물계에서 유례가 없는 호모 사피엔스의 엄청난 지능은 종족 번성과 함께 동시에 최초로 자멸의 방법을 동시에 갖추도록 하였다. 인류의 오만과 무분별이 인류를 스스로 파괴할지도 모른다. 그 경우 인류의 진화는 지구 진화 역사상 가장 큰 생물학적 실수가 될 것이다.332

제한 없는 부의 축적 즉 탐욕이 바로21세기 범 세계적 문제 즉 기후변화, 팬데믹, 빈부격차심화, 인구급증을 야기하는 원인이다. 이들 문제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한가지 문제가 다른 한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팬데믹은 기후변화에서 영향을 받고 있으며, 기후변화는 세계자원의 무자비한 착취에서 오고, 세계자원의 무자비한 착취는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빈부격차의 심화는 후진국의 인구 급증으로 이어지고, 인구급증은 팬데믹으로 이어진다. 결국 현대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인간본성, 즉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인간의 정체성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인구급증은 선진국이 인구정체 또는 감소 현상을 겪고 있기 때문에 선진국 언론에서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지만, 지구적으로는 2050년 90억명, 2100년 100억명을 상회하는 인구 급증현상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중대한 문제를 앞두고 인류는 대처 방안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 하면 인간은 궁극적으로 인간본성의 기본문제와 씨름하게 된 것이다. 교역은 이윤추구인가 아니면 탐욕추구인가 하는 아주 기본적인 문제에 인류가 직접적이고 긴급하게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세계정복과 산업혁명은 근세 현대사를 규정하는 두개의 현상이다. 이 두가지 현상이 결합되면서 결국 서양의 시장경제 철학과 탐욕의 철학이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서양의 시장경제 철학은 15-18세기 동안 서양의 민족국가들이 국가가 총동원되어 벌린 신세계 발견, 이에 따른 해적행위와 노예획득을 근간으로 하는 착취행위에 뒤이어 생성되었다. 서양의 개방적인 시장경제체제는 그것이 철학적으로 “진리”를 따라 형성된 것이 아니다. 국제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개방이 보호무역보다 좋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의 선진국이 현재의 개방적인 시장경제체제가 국익에 불리할 경우 언제든지 보호무역주의로 귀환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자기보존 철학을 따라 체제나 원칙은 변하게 되기 때문이다.

서양의 개인주의는 보이지 않는 손을 믿고자 하며 계속하여 교역은 이윤추구라는 철학을 따르고 있다. 동양의 관계주의는 붙잡는 손을 경계하며 교역은 탐욕추구로 쉽게 타락할 수 있으며 경계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서양이 선진국 함정에 빠져서 몰락하게 되면 이러한 결과는 서양이 개인주의를 신봉하고 교역이 이윤추구라는 허상을 믿으며 몰락하는 경우가 된다. 만약 서양이 스스로 빠져 있는 선진국 함정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또는 동양이 다가오는 선진국 함정을 피하게 된다면 이것은 산업혁명이 촉발한 인간성의 한계를 직시하고 이를 21세기 정치경제에 적용하여 문제를 풀어 내는 것이 된다. 이러한 과정은 교역이 이윤추구에서 쉽게 탐욕 추구로 탈바꿈한다는 생각을 견지하는 정치경제 철학을 자각하는 데서 가능하다.

인간의 선택은 여기에 있다. 교역을 이윤추구로 간주할 경우 인간은 개인주의에 집착하게 되고 끝없는 탐욕 추구에 우리의 미래를 맡기게 된다. 지구온난화 같은 지구적인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교역이 쉽게 탐욕 추구로 변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할 경우, 탐욕에 대비하기 위하여 탐욕을 관리하게 되고 인간은 우리에게 닥친 4대 지구적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된다. 이제 인류는 수천년간 익숙해온 국가간의 경쟁의 차원을 떠난 별도 차원의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지구적 문제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게 된다. 그 미래는 우리 스스로가 인간본성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달려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범세계적 문제를 다루면서 인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인간본성과 씨름하게 된다. 우리는 “교역은 이윤추구인가 아니면 탐욕추구인가” 라는 딜레마에 부딪쳐 있다. 이 딜레마는 인간본성을 우리가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인류가 세계적인 교역이 탐욕으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범세계적 문제를 해결에 집중할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교역이 탐욕추구로 흐르게 된다는 인간본성론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우리는 교역은 이윤추구 라는 철학을 강조하는 인간본성론에 얽매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인류는 국가간의 경쟁에 집중하면서 범세계적 문제를 외면하게 된다.

인류는 이제 인류사적인 문제와 부딪쳐 있다. 국가간의 경쟁에서 승리할 것인가 아니면 범 세계적 문제를 해결에 집중할 것인가 라는 딜레마와 씨름하고 있다. 이 딜레마는 결국 인간본성에 따라 결정된다. 인간본성이 미래를 내다보고 대비할 능력이 있는지, 아니면 눈앞의 이득을 앞세워 미래를 희생할 것인지, 그것이 문제다. 인간본성은 인류를 어느 쪽으로 몰고 갈 것인가?

  1. 310

    Ibid p.150 제5장 19세기 조선의 외교개념, 김수암.

  2. 311

    Ibid p.512

  3. 312

    Ibid 19-26 쪽. 동아시아 질서 개념의 역사적 변환: 천하에서 복합까지, 하영선

  4. 313

    121쪽, 손열, 지역공간의 개념사: 한국과 동북아시아

  5. 314

    일본도 일찌감치 동양의 특성인 제설종합주의적 입장을 분명히 보이기 시작하였다. 일본에서는 융합을 습합(習合)이라고 표현한다. 7세기 대륙을 통하여 불교와 유교가 일본에 활발하게 전래될 시기이다. 일본의 지도자 쇼토쿠 태자는 일본의 신도, 중국의 유교, 인도의 불교 사상을 융합하여 17개 조항으로 된 대 개혁안을 선포하였다. 소위 신불유습합(神佛儒習合)의 본보기 인 것이다. 쇼토쿠 태자의 17개 대 개혁안의 1조, 2조, 3조가 유교와 불교의 사상과 함께 도교의 영향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1조, 화(和)를 중요시하고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하라. 사람에게는 모두 당(黨)이 있지만, 현자는 적다. 이에, 군부(君父)에 순응하지 않고, 또는 이웃사람과 싸운다. 하지만 위아래가 온화하고 의좋게 지내고, 일의 시비를 가려 합의가 이루어지면 사물의 도리는 저절로 통한다. 성취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2조, 삼보(三寶)를 독실하게 공경하라. 삼보는 불법승(佛法僧)을 이른다. 즉, 모든 살아 있는 것이 다다르는 곳이고 모든 나라의 궁극적인 가르침이다. 어느 시대, 누구든 이 법을 존중하지 않겠는가? 사람 가운데 극악한 사람은 적고 잘 가르치면 따른다. 삼보에 귀의하지 않고 무엇으로 사악함을 바르게 할까? 3조, 조칙을 받잡으면 반드시 삼가 따르라. 군(君)은 하늘이고 신(臣)은 땅이다. 하늘은 덮고 땅은 받친다. 그리하여 사계가 순환하고 만물이 생성한다. 땅이 하늘을 덮으려 하면 만물은 파멸할 것이다. 따라서 군이 명하면 신은 받잡고, 위가 행동하면 아래는 따른다. 때문에 조칙을 반드시 삼가 따르라. 삼가 따르지 않으면 스스로 멸할 것이다.”

  6. 315

    Walter Demel, “China in the Political Thought of Western and Central Europe, 1570-1750,” in China and Europe: Images and Influences in the Sixteenth to Eighteenth Centuries, ed. Thomas H. C. Lee(Hong Kong: The Chinese University Press, The Chinese University of Hong Kong, 1991)

  7. 316

    Immanuel Kant, Perpetual Peace: a philosophical essay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17),140-141.

  8. 317
  9. 318
  10. 319

    Robert Davis, British Slaves on the Barbary Coast, BBC British History, http://www.bbc.co.uk/history/british/empire_seapower/white_slaves_01.shtml

  11. 320

    Ibid, Davis, British Slaves

  12. 321

    Ibid, Davis, British Slaves

  13. 322
  14. 323
  15. 324

    wikipedia.org/wiki/First_Barbary_War

  16. 325
  17. 326

    Bauer, Susan Wise (2013-09-23). The History of the Renaissance World: From the Rediscovery of Aristotle to the Conquest of Constantinople (Kindle Locations 10818-10822). W. W. Norton & Company. Kindle Edition.

  18. 327

    Bauer, Susan Wise (2013-09-23). The History of the Renaissance World: From the Rediscovery of Aristotle to the Conquest of Constantinople (Kindle Locations 10818-10822). W. W. Norton & Company. Kindle Edition.

  19. 328

    Kissinger, On China, 1.

  20. 329

    Matthew Ricci, China in the Sixteenth Century: The Journals of Matthew Ricci: 1583-1610, trans. Louis J. Gallagher (New York: Random House, 1953), 54-55.

  21. 330

    맹자 양혜왕 장구 하편. 하영선, 손열 지음,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2, 창비, 2012, 22쪽, 동아시아 질서 개념의 역사적 변환: 천하에서 복합까지, 하영선

  22. 331

    Richard E. Leakey, 앞의 책, p.125.

  23. 332

    Richard E. Leakey, 위의 책, p.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