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仁)-이웃사랑은 모든 사상을 뛰어넘는 윤리
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것이 BC 3천년 전쯤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2천여 년이 지난 다음 인간사회는 곳곳에서 놀라운 문명의 꽃을 피기 시작한다. 이러한 문명이 폭발하는 시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 불과 몇 백 년 사이에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공자, 노자, 소크라테스, 석가, 그리고 예수가 연이어 태어나는 시기이며, 얼마 후 마호메트도 태어났다. 이들은 인간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는 원천적인 문제에 집중하였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각자 해답을 제시하였다. 기독교의 이웃사랑(love your neighbor), 유교의 인(仁, empathy), 불교의 자비(compassion), 이슬람교의 형제애(brotherly love)가 그것이다.
이러한 해답은 잘 살펴보면 한가지로 통일된다. 이들이 인류에게 제시한 것은 동일한 윤리다. 표현 방식은 차이가 있지만 모두 “이웃사랑”을 의미한다. 왜 이웃사랑일까? 그것은 인간본성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강력한 이기심과 약소한 이타심”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를 조화시켜야 인간사회는 유지된다. 그러면 강력한 이기심을 약소한 이타심으로 포용해야 한다. 그 방법이 이웃사랑이다.
인간은 재산에 대한 탐욕과 명예에 대한 욕망이 가장 강력하고 이를 위하여 남 보다 앞서고자 경쟁하게 된다. 일부 탁월한 사람은 이타심을 이해하고 이를 인생에 적용하여 지도자(君子)가 된다. 그러나 대부분 인간(小人)은 이기심에 휩싸여 일생을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존재가 된다. 지도자도 본성에서는 소인과 차이가 없다. 즉 군자나 소인이나 모두에게 적용되는 가장 강력한 인간본성은 이기심, 즉 탐욕이다. 이러한 탐욕은 이성에 의하여 조정되고 관리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이성에 의하여 더욱 확대되고 더욱 강력 해진다. 결국 탐욕의 관리가 윤리의 핵심이다.
탐욕의 관리는 이성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인간본성에서 이성의 역할은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만 제한 되어있다. 이성은 발광체로서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이성은 반사체일 뿐이다. 이것이 인간본성에서 이성에 주어진 영역이다. 만약 이성이 본능에 내재 되어있는 행동 영역을 벗어나 발광체로서 행동을 하려고 하면, 인간에게 치명적인 위험을 안기게 된다. 이성을 활용하여 탐욕 추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윤리를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윤리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성의 일탈을 제어하는 것이 윤리다.
인간-인간 관계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는 동양의 유교와 서양의 기독교를 통하여 비교하면 잘 들어 난다. 우리는 공자와 예수의 가르침은 인仁, 즉 이웃사랑이라는 깊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한 출발점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서양에서는 계율(법치)로, 동양에서는 윤리로 인간관계를 풀어나가려고 하였다. 예수는 공자처럼 인류 공통의 윤리, 즉 이웃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쳤다. 유교에서 인간 간의 최대의 가치로 설정한 仁을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예수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우리에게 남겼다. 믿음이나 종족과 관계없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보편적 윤리관을 남긴 것이다. 동양문명은 자연의 道와 이에 입각한 인간사회의 仁이라는 중심사상을 굳게 지켜왔다. 모든 종교나 종족, 과학적 사고를 뛰어 넘는 보편적 윤리관인 것이다. 반면, 서양문명은 종교적 교리에 따라 행위(윤리)와 믿음(종교) 사이에서 갈등과 방황을 거듭하게 된다. 기독교의 영향아래, 믿음과 사랑을 조화시키려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역사 속에서 종교는 행위보다 믿음을 중시하여 왔다. 자기보전 원칙이 작동한 것이다.
서양의 역사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이 선한 행위를 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인간을 평가하는 중요 기준으로 삼아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양은 20세기 중반 이후에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족 중심의 지배적 윤리관, 그리고 종교 중심의 지배적 윤리관에서 벗어나 종족이나 종교와 상관없는 보편적 윤리관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상황에 도달해 있다. 다행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 실천해온 지배적 윤리관의 유산이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다. 이것은 서양철학과 사상체계에 속속들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서양 철학자들이 20세기 초까지 서양인이 생물학 적으로 동양인 보다 월등하여 서양이 월등한 문명을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원인을 규명할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서양인이 동양인 보다 생물학적으로 우월하여, 서양 문명이 동양문명보다 우월하게 되었다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나 동서양인이 진화단계에서 호모사피엔스로서 같은 유전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면 문제는 다르다. 동서양 문명의 차이는 인종적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서양 문명의 차이는 인간과 주변 환경 간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다시 말하면, 주변환경 즉 문명의 차이에서 온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동양문명에서는 종교 없이 윤리 자체가 문명의 핵심이 되고 있으므로 종교적 교리 속에 포함된 윤리를 강요할 필요가 없다. 도교의 성인과 백성, 유교의 군자와 소인으로 구분하면서 윤리를 정치철학으로 삼고 있다. 성인과 군자가 바로 윤리정치의 표현이다. 서양문명에서는 윤리문제는 선악문제와 연계되어 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다. 선악과를 먹기전의 인간은 에덴 동산의 낙원에서 일하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다른 동물과 함께. 그러나 선악과를 먹으면서 낙원에서 추방된다.
이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자심의 탐욕을 끝없이 추구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종교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은 선악과- 이성을 가지게 되면서 탐욕 추구를 위하여 다른 동물과 다르게 인간은 계속하여 일을 하여야 한다.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인간은 이성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성이 있음으로써 선악을 가리게 된다. 그러나 이성이 선악을 자유자재로 가리고 마음대로 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면 많은 경우 神과의 약속을 어기는 결정을 하게 된다. 이성의 한계와 여기에 숨겨진 함정이다. 본능에 잠재해 있는 탐욕을 이성이 선한 쪽으로 이끌 수 있지만 악한 쪽으로 이끌어 나갈 수도 있다. 여기에 선악과와 관련된 인간에 대한 경고가 있다. 이 경고는 윤리의 필요성이다. 즉 십계명의 존재이유다.
그러나 역사는 많은 경우 윤리면에서 그 가르침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이웃사랑을 파괴하는 도그마들이 형성된다. 그러나 이런 도그마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시대적 공간적으로 한정된 가치를 지닐 뿐이다. 절대진리가 아니라 자기보전 원칙에 충실할 뿐이다. 종교에서 신앙으로 포장된 도그마들이 있다. 유교에도 엄격한 조상숭배 방법 등 도그마들이 있다. 불교는 초기 가르침과 무관한 지옥-극락이라는 도그마 등이 도입되어 있다. 그러나 도그마들로 이웃사랑을 덮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이웃사랑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의견이 다르고, 교조나 교리가 다르다고 해서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을 박해하는 자야 말로 안티크리스트(ante-Christ)라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167
모세의 십계명은 유대인들이 나라를 세우고 흥기할 때, 곧 정의를 주장할 수 있을 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신앙만을 주장하여 생존에 도움을 줄 수 있었던 환경에 기인한다. 그러나 예수가 살던 시대는 유대인이 정의를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유대민족은 로마에 정복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당시의 지중해 지역은 헬레니즘의 사상이 퍼져 있어서 유대교도 시야를 유대민족에서 전세계인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기독교의 탄생의 원인이다.
예수 시절에는 헬레니즘이 시대 사조가 된다. 헬레니즘은 그리스 사상이 세계로 퍼진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이집트, 페르시아와 인도 정벌 이후 이루어진다. 알렉산더 사후 그의 장군들이 지중해, 페르시아, 이집트, 인도 일부에 여러 나라를 건설하면서 그리스 문명이 정복 지방의 문명을 흡수하여 태어난 것이 헬레니즘이다. 헬레니즘은 지정학적으로 세계주의 성격이 강해지고,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절대진리를 추구하는 시현론이 퍼지던 때와 시기를 같이한다.
기독교도 神이 이제는 유대교의 부족주의적 성격을 벗어나 세계주의로 뻗어야 하는 시점에 생겨났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의 율법처럼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정의를 주장할 수는 없었다. 이보다는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 빰을 맞으면 왼 빰을 내대라”, “겉옷을 취하고자 하면은 속옷까지 벗어주라”는 새로운 윤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율법의 상대성을 파악하고 이를 초월하도록 말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나라를 보존하고 법을 세우러 보내진 것이 아니라 단 하나뿐인 보편적인 법을 가르치러 보내졌다.” 168 구약성서에는 神의 계율로,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예수의 가치는, 부족국가의 유지를 목적으로 유대교의 정의를 주장하는 흐름과, 힘이 정의로 통하는 로마 전성시대 속에서 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시공을 초월하는 윤리관을 발견한 데 있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할 것인가? 내가 나 만을 위한다면 나는 무엇인가?” 하는 탈무드의 수수께끼 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은 예수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 아닐까? 공자도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데 예수와 같은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새와 짐승 들하고 떼 지어 살 수 없으니, 내가 사람들 사이에 끼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무엇인가”? (논어, 18장 微子篇) 유교에서는 부모의 사망후에 3년 상을 주장하여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논어에도 3년상을 주장하는 글이 등장한다. 그러나 공자의 인(仁)은 예수의 이웃사랑(Smartian Love)과 다름이 없다. 공자는 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제자가 仁에 관해서 물어보았다. 공자는 대답하였다. 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논어, 18장 微子篇). 사마우(司馬牛)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남들이 다 형제가 있는데 나만 없다”고 말했다. 자하가 말하기를 “내가 들은 말에,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고 부자가 되고 귀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 했소. 군자(君子)가 조심하여 실수하는 일이 없고, 남과 접촉하는데 공손하고 예의가 있으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의 형제들이오. 군자가 어찌 형제 없는 것을 근심하겠소.” (논어, 12장 顔淵篇). 공자의 깊은 뜻은 결코 무조건적인 충효나 경직된 부자·군신 관계를 가르친 것이 아니다.
공자가 최고의 이상사회로 그린 것은 “자기 어버이만을 어버이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 대동사회(大同社會)이다. 169 정치도 대동사회를 지향한다: 정치란 왕은 왕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역할을 하는 것이다 170 이런 맥락에서 맹자는 백성을 저버린 왕은 의와 인을 깨트린 잔적(殘賊) 되므로 그런 왕은 제거해야 한다 고 역설하였다. 맹자는 동·서양을 통틀어 통치자에 대한 국민의 권리를 주장한 최초의 철학자일 것이다. 서양에서는 18세기 루소에 와서 처음으로 유사한 철학이 등장한다. 맹자는 정치의 중요성과 통치자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사람을 죽이는 데 창으로 죽이는 것과 칼로 죽이는 것에 차이가 없듯이, 칼로 죽이는 것과 정치의 잘못으로 죽이는 것도 차이가 없다.171 서양사람으로서 공자의 참뜻을 이해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헤겔이 그렇듯이 대부분 그저 고답적인 조상숭배나 주장한 사람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172
불교의 자비사상 vs 니르바나
이웃사랑에 집중하는 현실적인 자세가 불교에서도 그대로 들어 난다. 석가가 전통 힌두교의 초월적 자세, 곧 형이상학적 취향을 부정하고, 현실적인 인생문제, 곧 너와 나의 문제를 중시하였다는 것은 마지히마니카야(Majihima-Ni Kaya) 경(經)에 소개된 일화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마치 칸트의 이율배반(antinomy)처럼, 세계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세계는 무한한가 유한한가, 영혼과 본능은 동일한가 떨어져 있는 것인가, 성자(聖子)는 죽어도 사는가 죽으면 그만인가 등의 문제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는 말룬캬푸타(Malun-kyaputta)에게 부처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말룬캬푸타, 종교의 생활은 세계가 영원이니 아니니 하는 독단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한 독단론이야 있든 말든, 내가 없앴으면 하는 이승의 여러 가지 고통, 즉 태생(生)·노(老)·사(死)·애(哀)·비탄(悲嘆)·불행·절망은 그대로 남을 것이니까·····.173
불교는 유대교나 브라만교와는 달리 정신과 물질의 대립관계를 상정하지 않는다. 정신작용은 다른 신체부위의 작용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한 기능으로 파악된다. 부처는 브라만교의 핵심을 이루는 아트만(atman)에 대하여 설법하지 않는다. 어떤 영구불변의 형이상학적 실체에 대하여 설명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공자처럼 스스로를 하나의 인간으로 간주하였을 뿐이다. 그들은 神 또는 어떤 초월자의 능력에 의지하지도 않았다. 불교는 유교와 마찬가지로 현세를 개선하고 인간에게 좀더 나은 삶을 사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불교는 도교, 유교와 마찬가지로 시현론의 종교가 아니라 불현론에 입각한 윤리철학이 된다. 절대자나 초월자를 만들고 스스로를 그와 동일시하는 것은 결국 자기보전을 위한 이기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며, 나와 너를 구분하는 길에 이르는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모든 개개인의 심리 속에는 두 가지 뿌리가 있다. 자기보호와 자기보존 본능이 그것이다. 자기보호를 위하여 인간은 신에게서 그것을 찾게 되었다. 자기보존을 위하여 인간은 영원히 사는 아트만, 곧 영혼불멸설을 생각해 내였다. 무지·허약·두려움 및 욕망 속에서 인간은 이 두가지를 믿고 위안으로 삼으며 안심하곤 한다. 이것이 인간이 이 두 가지에 매달리고 광신적 정열을 보이는 이유다.174
부처가 살던 시대의 본능과 정신의 구분을 거부하고 나와 너의 차이를 부정하는 것은 가히 혁명적 태도이다. 부처는 예수처럼 자신의 가르침이 거대한 반대에 부딪힐 것을 예견하였나 보다. 형이상학적 사고에 반대하였던 부처는, 형이상학적 사고가 흔히 결론으로 도출하는 독선적 태도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것 만이 진리이며 다른 것은 모두 허위다 라고 독선적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한 인간은 신념을 가질 수 있다. 만약 그가 이것이 바로 나의 신념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신념만이 옳다고 절대적인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 누구도 이것 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허위라고 말할 입장에 서있지 않다.175
고행의 관습과 결별하고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부처는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거부하였다. 브라마니즘(Brahmanism)을 배척함으로써, 부처는 너와 나의 분리를 거부하였다. 부처의 가르침은 피아(彼我)를 동일시하라는 깊은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사이의 관계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자비에 의하여 다스려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부처의 자비사상은 공자의 인(仁), 예수의 사랑, 마호메트의 형제애와 본질을 같이한다. 예수와 공자의 경우처럼, 부처도 가르침을 글로 남기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은 인도인들에 의해 3에서 7세기 사이의 회상 편집되었다.176 그러므로 부처의 가르침의 진수와 그의 제자들이 전한 것 사이에 진위를 가리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런 과정에서 대중불교는 니르바나(nirvana; nir는 無·空의 뜻, vã는 氣의 뜻)를 크게 중요시한다. 열반에 들면서 인간은 고통과 번뇌, 윤회의 고리를 완전히 끊고 해탈에 이른 상태를 의미한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니르바나가 불교의 핵심인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또 부처가 니르바나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자신도 니르바나에 도달하기 위하여 불교를 믿기도 한다. 그러나 부처는 니르바나에 대하여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부처는 무(無) 또는 공(空)으로 니르바나를 정의한 외에 별 설명이 없다. 니르바나는 기독교의 천국, 그리스인의 행복과 괘도를 같이한다. 매력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 형이상학적인 좌표다.
예수, 공자, 부처, 마호메트 들이 남긴 이웃사랑의 윤리관은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 (love you neighbor as you love yourself)는 말을 줄인 것이다. 인간윤리의 기본은 모든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이웃사랑” 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웃사랑이 결국 인간의 단 하나의 윤리가 된다: “신약성서는 모든 율법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단 하나의 율법으로 귀결됨을 가르치고 있다 177 매일매일 서로서로에게 되풀이해 이야기하자. “모럴은 하나뿐이며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도그마는 각기 다르며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라고.178 벌써 오래전에 명쾌하게 설명된 이런 윤리에 대하여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밥 딜란 (Bob Dylan)이라는 가수는 인간은 결국 남을 위하여 일 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칸트의 철학을 닮았다). 그래서 노래를 작곡했다. “남을 위해서 일 하자” (You’ve gotta serve somebody) 라는 제목을 붙여 히트 송을 내놓았다. 여기에 대하여 비틀즈의 존 레논(John Lennon)은 윤리적인 허구성을 보았다. 인간이 자신을 위하여야 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본 것이다. 레논은 밥 딜란을 비웃으며 “자신을 위해서 일하자” (You’ve gotta serve yourself)라는 노래로 답하였다. 또한 히트 곡이 되었다.
이런 실화는 인간이 공자와 예수의 윤리학을 아직도 오해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나와 남의 사랑은 철학적으로 같은 것이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것 이므로, 무엇을 하던 자신을 위하고 남을 위하는 것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탈무드의 진리가 나온다. 탈무드는 “내가 남을 위하기만 한다면 누가 나를 위하는가? 내가 나 만을 위하기만 한다면 누가 남을 위하는 가?” 라는 말은 남겼다. 예수가 네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남을 사랑하라는 말을 남겼다. 공자의 인(仁)도 관계주의 적인 이웃사랑을 뜻한다.
2) 神에 대한 숭배와 이웃사랑이 이율배반을 피하는 길은?
우리는 왜 사는가? 라는 문제에 대한 단순한 대답은 진보를 위한 헌신일 수 있다. 비전을 쫓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찾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진보는 이성이 앞장서서 추구하는 비전을 목표로 하게 된다. 비전의 추구는 계시종교로부터 20세기 이데올로기 시대에 이르기 까지 서양 문명의 특성이다. 문제는 비전의 추구는 모두 당초 설정하였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데 있으며, 그 과정에서 윤리를 상실하게 된다. 계시종교에서 비전은 신의 교리를 전파하고 따르는 것인데, 여기서 이웃사랑을 해치게 될 수 밖에 없다. 소위 윤리와 비전 사이의 갈등을 유발한다.
유교와 기독교가 이웃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윤리를 제시하는데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공자와 예수의 경우 논어와 성경에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공자의 경우 그 가르침은 분명하고 뚜렷하다. 공자는 인간 사이의 관계정립을 방해하는 어떤 다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인간의 힘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깊은 인본주의를 고수한다. 곧 철두철미 현실세계에만 관심을 두고 있을 뿐 저 세상이나 죽음, 神에 대한 어떠한 역할이나 존재를 거절한다. "仁에 있어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논어, 위령공 35)는 공자의 가르침이 이를 의미한다. 仁의 뜻은 좋은 스승을 만나거나 좋은 동료를 만나서 함께 깨쳐야지, 경전의 가르침이나 스승의 주입이나 神의 명령이나 강요로 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동양이 인간사회에 제시하는 단 하나의 윤리는, 정치윤리에서도 “같지는 않지만 협력한다” 라는 “화이부동”(和而不同)에도 잘 표현되고 있다. (논어 13:23, 君子和而不同,小人同而不和).
그러나 예수의 경우 제자들이 남긴 가르침은 공자의 경우처럼 뚜렷하지 않다. 이 세상과 저 세상, 생과 사, 사람과 神에 모두 관심을 두는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타난 교훈은 신앙과 사랑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전심전력을 다한 여호와 숭배”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두 가지라고 〈마태복음〉 22장, 〈마가복음〉 12장, 〈누가복음〉 10장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동시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웃사랑의 가르침은 사도 야고보에 의하여 명확히 전달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이니라···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 라.” (야고보, 2장). 결국 기독교에는 두가지 절대적인 가르침이 있다. 이웃사랑과 하나님의 숭배이다. 윤리와 신앙을 모두 가르치고 있다. “이웃사랑” (love your neighbor)과 “神에 대한 숭배” (obey your God)가 그것이다. 곳곳에서 “神에 대한 숭배가 첫번째 법이고 이웃사랑이 두번째 법”이라고 명령하고 있다. 동양의 화이부동과 대립되는 사상이다.
신앙과 윤리가 상호 배반 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神의 문명의 특성이다. 신앙(율법)과 윤리(사랑)가 이율배반이 되지 않는 단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을 神의 단 하나의 율법으로 믿는 것이다. 이 경우 이웃사랑은 신앙과 동일한 것이 되며 따라서 사랑은 어떠한 경우에도 멀리하여서는 안되는 절대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에서 본 신앙은 서양인들이 생각해온 신앙의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 기독교를 전파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 사도 바울도 ‘신앙’과 ‘사랑’ 가운데서 어떤 때는 신앙을, 어떤 때는 사랑을 주장함으로써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3 장)
그런 즉 믿음·소망·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장).
이러한 교리는 기독교 포교 과정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서》에 기록된 神의 율법이 인간이 상상한 (또는 神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한) 율법이며, 기적으로 포장되었다고 기술한 사상가도 많다. 실제로 예수의 역사적 생애와 사도들이 기록한 신약상의 예수의 생애 사이에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끼리 그린 예수의 생애에도 차이가 있다. 실제로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과 관계없이 이집트 아이시스(Isis) 여신이나 그리스의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의 영향을 받아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는 등 역사적으로 변천을 거듭한 것처럼179, 복음서도 지중해 각 지방에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그 지방의 토속신앙이나 신화를 많이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교리가 사람들의 귀에 거슬리지 않도록 사도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 구미에 맞도록 가능한 많이 각색하였고, 그 시대에 가장 널리 알려지고 받아들여진 기초 위에 교리를 세워놓았다 180
사실 예수의 윤리에 대한 중요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보여주는 기독교는 “전심전력을 다한 여호와 숭배”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 이 두가지 사명을 오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웃사랑이 인류의 단 하나의 윤리이기는 하지만, 각 종파, 단체는 이웃사랑 보다는 자신의 자기보존의 원칙을 따라가는 형상을 보였다.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라는 기독교 교황청의 교리는 이웃사랑 보다 자기보존 원칙이 우선함을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내의 각 종파도 그렇다. 역사적 기독교는 각 종파가 세워졌다. 그것은 각 종파가 자기보존을 위하여 각기 다른 형식을 내세우며 서로 옳다고 주장했다. 볼테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모든 종파는 어떤 것이든 간에 잘못과 의혹의 산물이다. 둔스스코투스(Duns Scotus)학파, 토마스(Thomas)파, 실제론자, 명목론자, 교황파, 칼뱅(Calvin)파, 몰리나(Molina)파, 얀센(Jansen)파 등은 모두 전쟁의 명칭에 불과하다. 기하학에는 종파가 없다. 아무로 “유클리드 파”니, “아르키메데스 파”니 하고 주장하지 않는다. 진리가 분명할 때는 파벌이나 분파를 만들 수 없다. 아무도 정오에 환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181
이런 신앙과 윤리의 이율배반의 상황은 동양의 道 문명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연을 창조한 절대자의 위치가 없고, 자연자체 가 道 로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윤리의 받침이 되기 때문이다. 왜 道의 문명에서는 仁, 즉 이웃사랑이 철학적으로 최고의 윤리로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仁은 해자를 하면 두 사람을 뜻한다.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간섭할 아무런 권위나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다른 것이다. 仁의 윤리관에 간섭하는 어떤 실체나 가치를 모두 부인하는데 동양 道의 문명의 특성이 있다. 성경에도 동일한 철학이 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종족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사마리아 인에 대한 사랑(Samaritan Love)을 명시한 것도 그렇다. 그러나 성경에는 가족 관계에서도 神에 대한 숭배를 먼저 생각하도록 명령하고 있는 것도 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 (마태복음 제10장)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제13장)
神의 문명에서는 자기보존을 위하여 神에 대한 숭배라는 율법이 꼭 필요했고, 또 인류의 유일한 윤리인 이웃사랑도 꼭 필요했다. 그런데 서양문명에서 종교와 윤리 이 두가지 가르침이 모순되는 경우를 역사가 보여준다. 모순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절대진리가 표현되면 모순으로부터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표현의 “비오류성”(infallibility)를 주장해야 한다. 서양 종교에서 성경과 교회의 비오류성이 주장되는 근거다. 그러나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즉 “道라고 표현하면 영원한 道가 아니다” 라는 논리에 의하면 절대진리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비오류성은 도그마가 되어 결국 현실에서 부정되는 길을 걷게 된다. 세상에 단 하나의 절대절명의 진실은 어떻게 인간에게 전해질까? 그것은 선지자에 의하여 神과 인간이 연결되면서, 神과 선지자 그리고 인간에게 전해진다. 유일신 사상에는 율법이 중요 해지며, 이는 인간이 神에게 절대 복종한다는 시작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현실 생활에 문제가 제기된다. 역사상 그러한 유일신이 단 한 명이고 절대절명의 능력과 진리를 대표한다면 문제가 없다. 그런데 2, 3 천년의 인간 역사는 다른 현실을 제시한다.
유일신이 여러 명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유일신 간의 투쟁으로 나타난다. 지금까지 어떤 유일신이 다른 유일신을 제거한 일이 없다. 또 유일신 내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하나의 종교에서 다른 해석이 나오면 이들 간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각자의 해석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들 간의 자기보존의 투쟁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일신론에서 여러가지 종파가 생기면 종파 간의 투쟁은 다른 종교와의 투쟁 못지 않은 격렬한 투쟁을 유발한다. 한 국가내에서 내전처럼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이 생긴다. 종교개혁시대에 일어난 신교와 구교 간의 무시무시한 투쟁이 이를 증명한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시현을 받은 사람을 선지자로 모시며 절대 절명의 복종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선지가의 말이 神의 말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역할은 유대교의 율법을 뛰어넘는 윤리에 있지만, 역사에서 볼 때 기독교는 율법에 더 집착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의 다신체제에서는 다른 神을 섬기는 것을 용인하였다. 그러나 4세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서양에서 법으로 기독교가 아닌 다른 神의 형태, 석상들은 광범위하게 파괴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지구상의 종교 가운데 가장 배타적이고 불 관용적이었다.182 그리고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형이상학자들은 중세 기독교 신학자들의 불관용적인 태도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헤겔을 거쳐 마르크스에게서 극도의 불관용적 표현을 얻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 세계를 선악론적 흑백의 논리로 보았고,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으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였다. 역사적으로 “증명”된 프롤레타리아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반대자 들에 대한 박해는 꼭 필요한 조치로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이 세계를 흑백의 논리로 보았고,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으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자신이 누구 편에 서는가를 명확히 인식하였고, 자신은 그들을 위해 싸울 것과 그들이 최후로 승리하리라는 것은 확신하였다”.183
스피노자가 갈파한 대로 인간을 포함하여 우주 만물은 자기보존을 위하여 존재한다. 다른 모든 설명은, 道와 神을 포함하여 정신의 역할, 윤리와 법의 역할 등 모두, 자기보존이라는 포괄적 원칙에 포함될 뿐이다. 동서양인은 같은 인간, 호모사피엔스 로서 자기보존을 위하여 존재하고 행동할 뿐이다. 그 자기보존의 원칙에 따라 동서양인 은 다른 문명을 만들어내어 자기보존을 위하여 노력하였을 뿐이다. 자기보존 원칙은 철학적으로 보면 자신의 이익과 이웃의 이익을 모두 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이익만 보는 자기보존 원칙에 오랫동안 젖어 있었다. 자신의 이익만 보는 자기보존 원칙은 神의 문명에서 神의 개념을 자주 활용하였다. 그리고 이런 목적을 추구하면서 중요한 것은 “정신”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神의 문명이 그러한 상황을 자주 보여준다. 정신의 역할이 강조되면 정신과 본능의 분리가 일어난다. 초자연적 神을 믿는 것은 정신과 본능의 분리에서만 가능하다. 정신과 본능의 분리는 인간과 자연의 분리와 표리관계에 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너와 나를 분리하게 된다.
그러므로 “전심전력을 다한 여호와 숭배”는 궁극적으로 신자와 비신자, 즉 너와 나의 분리를 뜻한다. 실제로 전심전력을 다하여 여호와를 숭배하는 사람들과, 전심전력을 다하여 알라를 숭배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전쟁이 중세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반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너와 나를 분리하지 말라는 주장이다. 2천년 기독교 역사도 신앙과 윤리는 서로 조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인간이라는 존재에서 정신의 본능에 대한 우월적인 위치는 神에게서 유래한다. 기독교 교리에서 정신은 神에게서 인간 만이 받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이로서 神의 존재와 인간정신의 존재를 동일시하는 철학이 서양의 神의 문명에 팽배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 간의 윤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정신능력이 보편화하고 절대화하면 그 결론이 신앙, 형이상학적 진리, 이데올로기로 전환되기 쉽다. 그러면 그 결론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고 절대진리가 된다. 그 절대진리 앞에서는 윤리 라든가 다른 고려사항은 희생되어야 한다.
올드 브레인이 대표하는 즉 인간의 조건인 숙명안에서의 뉴 브레인의 자유를 따르겠다는 전제조건을 받아들이고 그 기초위에 윤리를 세우면 신앙과 윤리의 충돌의 문제가 없다. 이 경우는 인본주의가 성립된다. 이웃사랑은 범할 수 없는 윤리가 된다. 그러나 숙명을 인정하지 않으면 윤리는 무너지고 인본주의는 인간주의로 타락한다. 동양은 본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본성의 범위내에서 윤리와 교육에 의해 사람을 사람 되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윤리다. 서양의 백지론은 윤리를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고, 동양은 윤리에 기본을 두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된다. 종교와 형이상학,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따르면 때로 인간의 가장 중요한 윤리인 “이웃사랑”을 무시하거나 뛰어넘게 된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인은 종교를 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그대로 배운 것이다. 제국주의, 공산주의, 파시즘도 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모와 학교에서 배운 것이다. 종교전쟁이나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이웃사랑”의 윤리는 무시된다. 이들 모두 이웃사랑 보다 상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천당이나 유토피아를 우선시할 것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사상과 윤리의 갈등이 불가피하다.
진보사상은 정신능력의 절대화로 이루어진다. 서양문명의 특징이다. 서양문명에서는 정신적 능력을 인류의 생물학적 기능의 하나로 보는 대신, 특별한 능력으로 취급하여 다른 모든 육체적 능력과 구분하려는 경향을 띠게 되며 정신과 본능을 분리하게 된다. 정신과 본능의 분리의 외적 표현은 인간과 자연의 분리이며, 거꾸로 인간과 자연과의 분리의 내적 표현은 정신과 본능의 분리인 것이다. 정신과 본능을 분리한 정신적 문화의 산물인 만큼 본능을 부정하고, 무시하고, 죄악시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구교에서는 원죄설을 주장함으로써 이성에 대해서 본능을 부정하였고, 신교에서도 표현을 바꾸었을 뿐 여전히 이성과 본능의 구분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구분은 인간-인간 관계에서도 신자와 무신론자를 구분함으로써 너와 나를 구분하는 성향을 유발하였다. 칼뱅이나 루터에서 보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는 것을 죄악시하거나 금하였는가 하면, 칸트에게서는 철학적이 표현을 얻어 나를 사랑하는 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184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너는 사랑하지 말라”, 또는 간단히 “네 이웃만 사랑하라”로 변질된 것이다.
결국 신앙을 포함한 비전의 추구와 윤리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것은 神에 대한 숭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만든 조직이 자기보존 원칙을 따라 살아남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웃사랑이 神에 대한 숭배와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이루면 결국 인류의 보편적 윤리와 神을 지키는 사제계급사이의 자기보존 이익의 충돌이 생긴다. 교회가 자기보존을 위하여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라는 교리를 내세운다. 탐험의 시대(age of Discovery)라고 서양이 부르는 서양의 세계정복 시대에 서양은 교황의 이름으로 “전세계에서 비기독교인들은 노예로 삼아야 한다”는 칙령을 선포하였다. 수백 년간 서양인들은 그 칙령을 환영하였다. 그것은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의 이웃사랑이라는 윤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보다는 교권이나 국권을 확립하고 확장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반면 동양의 道의 문명에서는 이러한 사례가 일어나지 않는다. 사제계급이나 神을 지키는 계급이 없기 때문이다. 불현, 무위, 음양 사상에 의하여 윤리와 자기보존이 충돌하지 않는다.
3) 윤리는 神의 명령인가 자연의 권고인가?
우리는 앞에서 동양 윤리의 원천이 자연철학에서 나온 자신을 위한 권고임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동양의 인성론에 기반하고 있는 윤리관이 최근 서양의 계시종교나 합리주의에 기반하지 않은 “자연주의” 사상가들에게서 철학적 지원을 받고 있음도 살펴보았다. 이에 비하여 서양철학은 계몽시대 이후에도 윤리의 근원이 신의 명령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유지하고 있다.
이웃사랑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 중의 하나다. 서양인에게 이웃을 사랑하도록 한 것은 神의 명령이다. 서양 윤리의 근거가 된다. 이웃사랑은 자기자신의 이기심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서양인 들은 이타심은 자신을 희생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윤리는 자신을 희생하는 데서 나온다고 서양철학은 생각한다. 서양 철학 체계에서는 이타심(이웃사랑)과 이기심을 인성론의 측면에서 조화시킬 근거가 미약하다.
神이 없다면 자기 자신의 이익을 희생할 필요가 없어진다. 서양문명에서 윤리는 神의 명령이기 때문에, 神이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신이 명령한 윤리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神이 없다면 왜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면 종교를 버린 서양인들이 왜 윤리를 유지해야 하는지 의문을 표시하게 된다.
유럽과는 달리 중국 같은 데서 종교적 회의론이 어떻게 윤리적 회의론을 유발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185
이신론 이후에도 서양 사상가들은 신앙과 윤리에 관하여 난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콩트는 신학과 형이상학을 부정하면서 “한 가지 절대적인 것은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라고 외치며,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신이 죽었으면 모든 일이 허용된다”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태도를 보여주었고, 니체도 스스로를 무신론자로 선언하였다.
‘신’, ‘영혼의 불멸성’, ‘구원’, ‘저 세상’, 이런 것들은 내가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개념들이다. 이런 것들에 대하여 나는 어린시절에 조차도 전혀 시간낭비를 하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이런 것들을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던 것일까? ·······무신론은 내게 어떤 것의 결과가 아니며 내 생애에서의 중요한 사건은 더군다나 아니다. 나에게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본능적인 것이었다.186
러셀은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공언하고 있고, 중국문명의 일면을 서양에 소개한 임어당도 “나는 무신론자”라고 공언하고 있다.187 이러한 태도는 스피노자가 그렇게 명쾌하게 설파한 기독교의 본질도, 공자가 애써 남겨놓은 인(仁) 사상의 본질도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콩트,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러셀, 임어당 등은 동양사상적 측면에서 보면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현론자가 될 수도 있다. 서양의 무신론자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은 시현론과 불현론의 차이를 생각하지 못한 사상가들의 자세이고, 서양적인 시현론 입장에서만 세상사와 철학사를 분석하자는 자세에서 나온 서양만이 간직하고 있는 특유의 거대한 윤리 문제가 된다.
러셀 같은 위대한 철학자도 동서양 문명의 본질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동양의 자연철학에서 나온 인성론을 이해하지 못하면 윤리가 자신을 위한 이기심의 발로인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러한 문제는 서양의 자연론자들에 의하여 풀리게 된다. 그들은 계시종교과 윤리의 절대적인 연관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윤리는 신의 명령이 아니라 자연의 권고임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킨즈(Richard Dawkins)도 서양 계시종교에서 주장하는 종교가 윤리에 미치는 역할에 대하여 의문을 표현하고 있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흔히 종교가 없이 사람 들이 어떻게 선할 수 있는지, 왜 선해져야 하는지 의심한다 188
이신론은 윤리의 근원을 어디서 찾아야 하나 라는 심각한 문제를 서양인들에게 제시한다. 형이상학이 중세 신학에 의해 이미 타격을 입은 기독교적 神을 부활시키지 못하고 결정적인 몰락을 재촉하자 유럽인들은 모든 절대적인 것을 부정하기 시작하였다. 윤리의 실종은 시현론의 문명에서 살아온 서양인 대다수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다. 18세기 이신론(理神論), 19세기 다윈의 진화론, 그리고 20세기 이데올로기의 횡포를 경험한 서양인들은 윤리면에서 갈 길을 잃고 있다. 이신론에서 신은 존재하지만 계시가 아니라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이해 될 수 있으며 이성을 통해 도덕과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명제 하에, 윤리의 근원으로 칸트(1724-1804)의 정언명령을 내세우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형이상학적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루소 (1712-1778)는 인간이 원래 선하게 태어났는데 인류의 문명이 선한 인간성을 나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원래의 인간본성의 표현인 감수성 (sensibility)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인간은 감수성에 따라서 행동하면 모든 것이 좋다는 가설을 내세워 서양 전체에서 커다란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자신의 감수성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윤리를 무시하고 행동해도 원래 선한 인간이 하는 행동이니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 된다. 결국 인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감수성과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것이 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로맨티시즘” 이라고 부르는 낭만주의 경향을 유럽인들에게 불어넣었다. 이들은 새로운 자유를 맛보며 인간을 나쁘게 만드는 문명과 관련된 것이라고 무시하게 되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회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 주장한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유럽에는 독특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루소의 감수성을 실제로 실행한 사람이 그들이다. 루소, 사드 백작(Marquis de Sade, 1740–1814), 바이런(Lord Byron, 1788–1824), 그리고 셸리 (Percy Bysshe Shelley, 1792–1822) 등이 그들이다.
루소 자신이 자신의 자식들을 모두 육아원에 맡기면서 자신은 감수성에 따라 편한대로 살아도 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나쁜 일은 모두 인간이 그간 만들어낸 문명의 탓이므로 자신의 감수성만 쫓아가자는 삶을 살자고 주장했다. 이들은 모두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고 돌려주지 않은 것을 당연시하였고, 모두 난잡한 연인관계를 가지고 배반을 일 삼았으며, 본인의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며 성실성 같은 약속을 지키는 것을 멸시하였으며, 사회가 지키고자 하는 윤리라는 정서에 반항하였다. 루소는 이성과 열정 중에서 이성을 멀리하고 열정편에 확실히 서게 되었다. 그리고 루소는 종교를 이성이 아닌 감수성 측면에서 중요시하며 감정, 가슴, 경외심, 신비주의 등으로 종교를 지지했다.
루소 이후에는 이성의 시대가 이데올로기 시대 (Age of Ideologues) 로 접어들면서 이신론이 이데올로기로 대체되었다. 윤리는 이데올로기의 하수인이 된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인간들이 협력해서 이상향, 유토피아를 세상에 건설한다 믿었다. 곧 다가올 유토피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당분간” 윤리를 희생하자는 것이다. 윤리의 기본 방향을 무시하고 무자비한 독재와 전쟁을 정당화해주는 논리가 된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이 그 예다. 공산주의에는 칼 마르크스가 주장한 10계명의 독재규범이 있다. 성경의 십계명을 본 딴 숫자다. 독재규범에는 모든 생산수단의 국가귀속, 이민자와 배신자의 모든 재산 몰수, 모든 교통수단의 국가귀속 등등이 포함 되어있다. 성경에서 윤리의 규범이 되어 서양 사람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윤리를 지키게 한 10계명이 독재 10계명으로 대체된 것이다. 히틀러도 폴란드 분할, 뒤이은 폴란드 침공, 소련 공격 등 자신의 생각 대로 행동하였다. 히틀러는 이런 행위를 그의 유토피아 달성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자랑했다. 유대인의 인간청소도 같은 유토피아 달성을 위해서 꼭 필요한 조치로 강조했다. 문제는 이들 행동자체가 지극히 반 윤리적인 행동들이기 때문에 인류의 선지자들이 제시한 “이웃사랑”를 위배하는 것이 된다. 현실적으로도 유토피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유토피아가 이루어질 때까지 “당분간” 이 “영원해지면서” 윤리적인 문제가 최대 문제로 부각된다.
이신론 이전에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가장 중요한 윤리가 神에 대한 숭배와 윤리의 충돌로 일부 손상을 가져왔으나, 이신론 이후에는 神이 없는 세상이 되면서 윤리가 없는 상황을 유발하게 되었다. 神이 율법으로 제정한 십계명이나 이웃사랑이 개방적으로 손상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대신한 새로운 윤리, 유토피아 달성을 위한 “반 윤리”가 “윤리”로 둔갑하는 기막힌 세상을 이데올로기 시대가 만든 것이다. 독재와 인종청소가 그들의 “윤리”가 된 것이다. 이들은 식민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이 세개의 이데올로기가 서로 얽혀서 죽도록 싸우는 세상을 만든 것이다. 서양인들은 이를 위하여 20세기에 두 차례 세계대전을 불사 했다. 그 다음에도 냉전으로 세계를 몰고 갔다.
이신론의 출현 이후 서양의 많은 사상가들이 윤리의 기원을 찾아 헤매고 있다. 윤리는 어디서 와야 하는가? 우리가 분석한 것처럼 칸트는 윤리를 이성에 입각한 “초월적인 도덕적 의무론”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도스토예프스키(Dostoyevsky, 1821–1881)는 “神이 없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외치며 神을 되살리고자 노력했다. 니체는 수퍼히로(super hero)라는 의미가 아닌, 도덕적으로 기독교의 교리에 억매이지 않는 자신의 내부의 의지로 만들어낸 도덕적 초인간을 지향하고자 했다.
동양의 철학은 도교와 유교에서 보듯이 당초부터 윤리를 기초로 한 현실참여를 목표로 하고 있다. 나를 바르게 하는 첫째 조건에 이기심과 이타심의 조화를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가정과, 나라, 세계를 다스릴 수가 없다: “나를 바르게 하고, 가정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편안하게 한다.” (대학 8장). 동양에서는 2천년 전 이미 이러한 철학에서 완성되었다. 인간사회는 기본적으로 이타심이 아니라 강력한 이기심이 원천적인 힘을 불어넣게 된다. 그러나 인간본성에 있는 약소한 이타심을 반영하여야 사회는 유지된다. 결국 우리의 모든 철학은 인성론과 연계된다.
만약 이타심이 건전한 사회를 구성하는 결합점이라면, 인간사회는 자연과는 거리가 먼 존재가 된다. 그러나 한가지 이런 딜레마를 벗어나는 방안이 있다. 그것은 일견 보기에는 이타심으로 보이지만 이것이 다위니즘의 시각에서 볼 때 “이기적” 일 수 있는가? 즉 개인의 희생이 결국은 자신의 유전인자 연속성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이런 대립된 명제에 대한 답은 Yes다. 189
서양의 神의 문명이 이신론 이후 인간의 이성이 神을 대체하고 난 후 윤리는 사라져 버리게 된다. 이신론이 서양신학의 대세를 이룰 때 서양에서 최초로 인간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게 된다. 이신론 이전에는 인간에 대하여 전혀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 인간은 神의 모습을 따라 만들어진 것 이므로 神에 대한 연구를 하면 그것이 인간에 대한 연구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죄를 지고 태어나서 고생을 하면서 세상을 살다가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神이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을 믿게 되면서 서양인들은 처음으로 인간이 무엇인지 하는 생각을 자연철학의 차원에서 하게 되었다.
서양에서는 유신론자가 절대 다수였는데 최근에는 교회를 다니는 유신론자들이 소수가 되었다. 그렇다고 서양사람들이 무신론자가 되어버린 것은 아니다. 상당히 많은 무신론자들이 스스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불현론에 속하는 사람이 있다. 즉 스피노자처럼 본인은 결국 神을 믿는 유신론자라고 선언하는데 교회의 율법 차원에서 무신론자로 취급되는 사람들이다. “우주에는 神이 없다”를 저술한 데이비드 밀스, “만들어진 神” 또는 “神, 만들어진 위험”의 리처드 도킨스, “神은 위대하지 않다”의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은 서양에서는 무신론자지만, 동양에서는 불현론자가 될 수 있다. 절대진리를 믿고 있지만 계시종교에서 처럼 선지자를 통하여 시현된 신앙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서양에서는 시현론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지만, 동양에서는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수 있다.
神이 없는 세상에서 윤리는 어떻게 지켜야 하나 하는 문제가 서양에는 계속 많은 사람들의 과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 해답은 절대진리를 주장하는 시현론이 아니라 불현론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도덕경 8장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사귈 때는 인자한 사람과 사귄다. 말할 때는 믿음을 가지고 말 한다. 다스릴 때는 올바르게 다스린다. 일할 때는 최선을 다하여 일한다. 움직일 때는 때를 가려서 움직인다.” 神의 계명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누구나 찾을 수 있는 道의 윤리다
神이 없어도 자연철학에 의하여 “자신과 남의 이익을 위하여” 윤리가 저절로 생길 수 있고 유지된다는 것이다. 남과 자기자신을 위한 “계명된 이기심”이 윤리의 원천이다. 중요한 것은 윤리의 원천이 神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인간본성에 내재해 있는 자기보존(self-preservation)의 원칙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4) 서양, 삶의 영원한 행복 추구 vs 동양, 삶의 현실적 의미 추구
계몽시대 이후의 서양에서 이성이 신을 대체하면서 윤리의 근본을 찾는 철학에 집중한다. 이신론의 체계내에서 칸트는 인성내부에 윤리를 찾는 본성이 존재한다는 철학을 내세운다. 이러한 칸트의 “이성”에 의한 윤리 의무론은 계시종교에서 신이 명령한 “율법”에 의한 윤리 의무론 보다 설득력이 훨신 약하다. 따라서 윤리의 의무가 약해진 서양인들은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서양인들이 집중하고 있는 것이 행복론이다. 이성에 의한 “의무론” 보다 생의 “행복론”에 더 집중하는 성향을 보이게 된다.. 벤탐은 인성은 결국 행복을 찾게 되므로 행복을 찾는 데서 윤리라는 목적이 생긴다고 보았다. 190 서양에서는 인생의 목적을 행복의 추구에서 찾는 오랜 전통이 있다. 탈레스, 소크라테스에서 부터 에피쿠르스를 이어 근세의 벤탐의 공리적 윤리론으로 이어진다. 탈레스는 “가장 행복한 사람은 건강한 몸 풍부한 정신, 잘 길들여진 성품을 가진 사람이다” 라고 행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은 행복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인간의 잘못은 무지에서 온다. 지식은 미덕이다. 미덕은 행복이다”.
서양인들의 행복에 대한 집착은 유별나다. 그들은 존재론에 입각하여 행복이 간헐적이고 임시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이 가능하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양의 변화론에 의하면 행복에 대한 정의가 달라진다. 행복은 중요하지만 이것도 우주의 모든 것 처럼 간헐적으로 인간에게 찾아오고 임시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동양사상에서는 한시적인 “행복”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취급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인간사에서 가족, 친구, 배움, 자연에 찾는 현실적인 삶의 “의미”를 중요시하게 된다.
그리스 철학자 중에서 행복론을 주장한 사람 중에서는 에피쿠로스가 유명하다. 에피쿠로스의 행복론은 동적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 평온”(ataraxia)으로 이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욕망을 절제하고 우정과 신뢰를 중시하면서 지혜로운 삶을 통하여 정신적 평온을 이루며 행복에 도달하자고 주장했다. 행복에 대한 서구의 강박관념은 동양문명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 에서 에피쿠로스까지, 그리고 제러미 벤탐과 제임스 밀은 인간과 사회의 존재 이유로 행복론을 내세웠다. 그들은 사회전체의 행복을 주장하면서 행복의 지수를 정치적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자연은 인간을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인의 지배 아래 두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적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오직 고통과 쾌락 이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원인과 결과 라는 사슬의 갈 길을 정한다. 그들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 말하는 모든 일, 생각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가 이들의 예속을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은 그들의 지배를 입증하고 확인하는 노력일 뿐이다. 191
벤탐(Bentham, 1748-1832)은 공리적 이유 때문에 도덕성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벤탐은 목적에 따라 윤리가 생긴다고 본 것이다. 공리적 윤리는 “도덕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목적으로 한다. 밀(Mill,1806-1873)은 같은 공리주의자 면서 벤탐과 차이를 보인다. 밀은 벤탐의 “양적쾌락주의 ”라는 주장에 대하여 “직절쾌락주의”를 주장한다: “배부른 돼지 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가 그의 주장이다.
이들은 정의, 용기, 성실, 진실과 같은 미덕이 “개인”의 행복(또는 개인이 합친 공리적인 행복)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인의예지 같은 미덕은 동양에서도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이러한 미덕은 “개인” 홀로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또는 자연 과 인간의 “관계”에서 추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동양은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관계의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을 모색한다. 삶의 의미는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친구, 배움에서 상대방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동양의 삶의 의미는 관계적(relatonalistic)이다. 인생에서 자연이나 상대방과 함께 하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반면 서양의 행복은 개인적(individualistic)이다. 혼자 행복하게 된다. 그리스인이 정의한 최선의 행복은 신 처럼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은 서양인들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있다. 동양에도 퍼지고 있는 개념이다. 진리, 돈, 명예, 사랑 등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으면 그 당시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행복은 다분히 순간적이고 특히 개인적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동양인은 인생을 보람 있게 즉 의미 있게 살기를 원한다. 나 개인이 아니라 남과 함께 한다는 의미를 느끼자는 것이다. 나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나와 관련된 사람들, 가족, 친구, 동료 그리고 자연과 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무엇을 함께 달성하였는지가 중요하다. 거기서 인생의 보람을 느낀다. 여기서 윤리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와는 다르게 의미를 추구하는 관계주의는 비전의 실현이 아니라 윤리에 의하여 평가를 받는다. 그러므로 동양의 의미를 추구하는 삶은 서양의 시현론에 입각한 이상향의 세계를 실현하고자 하는 비전과는 거리가 멀다. 이상향을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은 쉽게 윤리를 무시한 인간주의로 빠지게 된다.
행복은 순간적이다. 행복의 느낌은 계속되지 않는다. 행복을 찾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느낀다. 다분히 제로섬 게임이다. 의미를 찾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배움에서 이를 측정한다. 의미의 추구는 계속적이고 단계적이다.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행복의 추구는 제로섬이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쉽게 마약이나 외부에서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게된다. 의미를 찾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배움의 성과로 측정을 하게 되므로 내부에서 의미의 성과가 측정된다.
서양과 동양의 마약문제의 현황이 행복추구의 문제를 노정하고 있다. 서양인들은 법과 단속의 차이 그리고 밀수와 공급망의 차이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서양 특히 미국은 마약을 사용하는 내부가 문제의 근원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오는 마약의 “공급”에서 문제의 해결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동양에서 법과 단속이 서양 보다 약해서 또는 밀수와 공급망이 열려 있다고 해서 서양처럼 마약문제가 커지지 않는다. 동양인은 개인의 행복이나 불행이 아니라 가족, 친구, 배움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기 때문에 이것이 부족하면 가족이나 대인관계를 개선하고 배움의 성과를 높이는 것에서 해결 책을 찾는다. 마약으로 이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동서양을 구분하는 개인주의와 관계주의 라는 철학체계의 차이다.
서양의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은 인간 전체를 위한 비전을 쫓는다. 종교의 전파와 이데올로기의 추구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일견 위대하고 웅장한 면을 담고 있다. 그러나 모든 포교와 이데올로기 전파가 그렇듯이 현실성이 없다는데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 특히 이데올로기에서 추구하는 비전들은 모두 인간본성을 왜곡하고 구성되었다. 영혼, 정신, 이성을 인간의 본질로 취급하는 인성론에서 문제가 있다.
서양이 추구하는 의미는 결국 개인주의 라는 철학에 의거하고 있다. 개인과 神, 개인과 이데올로기의 관계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보다 중요해진다. 동양의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은 불현론과 관계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道는 끝이 없다” “삶에는 끝이 있는데, 앎에는 끝이 없다” “道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仁에 관한한 스승이 없다” 라는 도교와 유교의 고백이 이를 가르친다. 윤리적인 측면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은 비전의 추구가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으로 인간사회의 조화를 추구한다. 왜냐 하면 동양의 의미는 동양의 관계주의 라는 철학에 의거하고 있다. 관계주의는 변화론에 입각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조건은 시기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게 된다.
서양 문명은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 창달을 위한 법률과 제도에 집중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인간 사이의 “관계주의”에 입각한 윤리가 문명의 핵을 이룬다. 윤리는 인간본성에 내재한 이기심에 대한 경계에서 온다. 이기심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탐욕에 대하여 관계주의의 윤리를 체득하여 사회생활에서 조화를 이루자는 것이다. 동양의 도교는 성인을 목표로 하였다. 유교는 군자를 목표로 하였다. 성인이나 군자나 모두 “지도자”라는 목표로 귀결된다. 서양에서 스피노자 등 서양의 불현론자들은 “현인”을 목표로 삼았다.
이웃사랑은 “남에 대한 배려” 즉 컴페셔니즘(compassionism)이다. 정확히 인(仁)과 같은 뜻이다. 성경과 논어에서 말하는 이웃사랑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로 정리된다. 윤리나 이웃사랑은 혼자 서는 달성 할 수 없는 “관계적”이다. 동양에서 인간사이의 관계는 인(仁)의 핵심 요소다. 인(仁)을 해자하면 두 사람을 뜻한다. 행복이 개인주의에 기반한다면 인(仁)은 관계주의에 기반한다. 관계주의는 상대에 대한 배려심을 중요시하는데 행복이 아니라 인생에서 “의미있는 삶” 또는 “가치있는 삶”(worthiness 또는 worthwhileness)를 추구하게 된다. 이웃이 불행하면 혼자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양문명이 원천적으로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개인적” 이라는 용어에만 익숙하다. 동양문명에서 중요시하는 인간사이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관계적” 이라는 개념은 서양문명에는 없는 개념이다. 개인적의 반대말은 서양문명에서는 그리고 영어로는 “전체주의적” 이라고 표현된다. 인(仁)의 핵심은 그런 뜻이 아니다. 서양의 개인주의에 대비하여 동양의 관계주의를 의미한다. 관계주의는 서양 패러다임에 익숙한 문명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고 단어가 된다. 서양문명에서는 친척의 범위를 벗어나서 모든 인간에게 통하는 “관계적” 이라는 개념이 없다.
동양의 맹자나 순자의 윤리관은 행복이나 쾌락과는 관계가 멀다. 맹자는 道의 문명에서 태어난 사상가로서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나 쾌락을 추구하는데 있지 않다고 보았다. 동양문명에서 사상가들은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정치윤리를 추구하며 “지도자(君子)”를 잘 고르자는 데 있다. 이점은 유교의 특징으로 공자, 맹자, 순자 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던 목표다. 도교에서는 원래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피하고 자연의 道를 파고드는데 목적이 있지만, 그래도 도교 조차도 인간을 성인(聖人)과 백성으로 나누면서 성인의 지도력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유교의 군자-소인의 구분과 도교의 성인-백성의 구분은 궁극적으로 모두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피력하고 있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동양의 의미를 추구하는 삶은 관계주의에 입각하여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함께 하자는 윤리를 중심으로 한 인본주의에 입각하게 된다. 이것은 피아(彼我, 상대와 나)를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이기심의 희생이 아니라 계명된 이기심의 표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