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우리는 어디로 가나? · 제2장

동서양의 민족국가 출현과 정치경제 출범

약 31분 · 주 30개

1) 민족국가는 민본주의를 지향

동서양 문명 비교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민족국가(nation state)의 구성이다. 동양이 민족국가의 구성에서 서양 보다 2천 년 앞서 있다. BC 3세기까지 이어진 춘추전국시대에 동양에서는 민족국가가 생겨났다. 서양은 고대 정복국가, 중세 종교국가로 수천 년을 보냈으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나 민족국가의 탄생을 보게 된다. 민족국가의 구성이 앞섰다고 해서 지혜가 발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 지식의 방향이 결정될 뿐이다. 철학도 지식의 결정체이지 결코 지혜가 관련된 것은 아니다. 서양의 이데올로기 시대가 이를 방증한다.

민족국가의 탄생은 문명 차원서 새로운 사상과 철학을 요구한다. 민족국가 탄생에서 자연철학을 존중하는 철학적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국민을 중심으로 하는 민본사상이 태동하게 된다. 민본사상은 정치경제체제에서 개인의 경제적 자율을 뜻하며 이는 성공하는 정치경제의 핵심이 된다. 자연철학을 중심으로 하여 민본사상과 경제적 자율이라는 펀더멘털이 문명내에 있으면 경제는 발전하고, 그렇지 못하면 경제발전은 불가능하다.

동서양에서 민족국가(nation state)는 언제 형성되었는가? 서양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민족국가”, 즉 “민주주의 민족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산업혁명이후 서양에서 출현한 민주주의를 갖추고 있는 국가여야 한다. 헌법, 3권 분립 등 견제와 균형 제도를 갖추고 있어야 비로소 민족국가의 구성 요소가 된다. 동양에서는 특히 전통 왕조의 폐지가 중요하다. 중국의 1911 신해혁명, 일본의 1868 메이지 유신, 한국의 1897대한제국 성립을 민족국가의 출현으로 보자는 것이다. 서양 중심적인 세계관과 역사관에 기인한 견해다.

그러나 이러한 서양 중심적 방법으로는 동서양의 문명은 비교할 수 없게 된다. 서양에서는 민족국가의 출현과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성립이 거의 동시에 17-18세기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민족국가는 BC 3-5 세기에 이루어졌고, 민주주의는 19-20세기에 이루어졌다.

민본사상은 서양에서 근세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는 노예가 필수적인 정복국가 시대였다. 시민-노예를 나누는 체제에서는 민본사상이 불필요 했다. 중세시대는 인간이 아닌 神의 명령을 따르고 연구하는 종교국가 시대였기 때문에 자연주의적 인성론이나 민본사상이 역시 불필요 했다. 따라서 서양에서 근세이전에는 서양에서 국가내의 모든 인간, 국민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경제철학이 불필요 했다.

반면 동양에서는 민족국가의 형태를 갖추면서 발생하는 민본사상은 서양 보다 2천 년 앞섰다.

민족국가의 출현은 한 문명의 철학적 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태동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의 생존을 위한 “자연철학” 체계를 따르게 된다. 민족국가는 정복자나 선지자 등 지도자들의 명령이 아니라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민본주의”로 생존을 추구하게 된다. 계시종교가 아니라 자연철학 체계를 국가 운영의 중심으로 삼는 과정을 밟게 된다. 생존, 즉 자기보존본능이 국가의 최우선 정책이 된다.

키신저는 동양의 민족국가의 출현이 서양보다 약 2천 년 앞서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중국에서 전국시대는 250년 계속되다가 진시황의 통일로 종말을 고한다. 이 동안 봉건제국은 자치권을 획득하여 독립된 국가로 변모하게 된다. 서양에서는 이와 같은 유사한 경험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제2 차 세계대전으로 이르는 그 시기에 가지게 된다. 유럽 국가들이 세력균형 속에서 주도권을 쟁취하려고 싸우는 과정이 그것이다.403

미국 정치학자 후쿠야마도 국가간의 수백 년간 지속된 전쟁이 국가의 형태를 변형시킨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민족국가가 동서양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 설명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동양에서 이러한 수백 년의 전쟁상태를 겪었으면서 민족국가가 탄생하였다. 서양에서는 천 년 이상 뒤에 유사한 전쟁 상황을 겪으며 중앙집권적인 민족국가가 태어나게 된다:

중국에서 민족국가들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계속되는 전쟁속에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동서양비교에서 아주 흥미로운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동양보다 천 년 이상 늦게 형성된 민족국가 설립에서 서양은 아주 유사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중국과 유럽에서 민족국가의 형성은 모두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노력에서 비롯됐다. 전쟁준비를 통하여 봉건영주들의 영토가 한 국가의 영토로 점차 통합되고, 국가통치권력이 중앙집권화 되고, 근대식 독립적인 행정체제가 태어나게 된다.404

민족국가가 형성되면 이들을 통치하기 위한 행정체제인 관료주의, 국내 경제를 운영하기 위한 정치경제사상, 국내정치를 운영하기 위한 민본주의 정치윤리사상 등이 생겨나게 된다. 동양에서는 이러한 체제가 기원전 전국시대에 이미 이루어졌다.

서양에서 민족국가는 베스트팔렌 조약(1648) 이후에 시작되었다면, 그 이전의 서양국가들은 도대체 어떤 형태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정복국가 체제였다. 피정복국가 사람들은 노예다. 그리스와 로마 같은 정복국가들은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과 잡아온 노예로 구성된다. 스파르타는 시민수 보다 노예가 훨씬 많았으며, 아테네는 노예가 절반을 넘었고, 로마는 1/3 정도가 노예였다. 노예들은 전쟁, 약탈에서 잡아오거나 노예시장에서 구매로 보충되었다. 카이사르는 고울 지방을 정복한 영웅으로 서양사에 알려져 있지만 고울 지방을 정복하면서 수많은 노예를 팔아서 부를 축적하였다. 한번은 그의 군대가 전쟁에서 이긴 날 한 번에 5만 명의 노예를 잡고 팔아서 카이사르와 로마군단병들에게 커다란 부를 안겨주기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서 보았듯이 노예를 영혼이 없는 동물과 같은 존재로 보았다.

그리스 도시 정복국가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해서 금은 보화와 노예를 잡아오는 것이 국가의 경제를 지키고 크게하는 최선의 방안이다. 로마도 정복국가 체제였다. 노예기반의 정복국가에서는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경제이론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로마 시대 이후 서양은 중세 천 년 이상 기간 동안 종교국가였다. 로마 교황청이 절대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神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나 교황청이 중심이었다.405 지방영주나 왕들은 제한된 권한만 행사하였기 때문에 민족국가내에서 백성 전체를 상대로 하는 정치경제사상이 태어날 수 가 없었다. 중세기간동안 서양은 교회와 국가가 공존하는데 교회가 국가운영 체제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특히 계시종교의 종말론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16세기까지 서양의 기독교 역사는 한 마디로 기다림의 역사였다. 즉 인간역사의 종말이 언제 다가오는지 하는 것을 기다리며 그 종말의 기다림이 계속 연기되는 상황을 기다리는 것이 그들의 역사였다. 비록 기다림의 구체적 유형은 상황에 따라 바뀌어 나갔지만, 종말을 기다린다는 것은 항상 동일하였다.406 … 루터는 종말이 수년내에 다가온다는 것을 자주 인용하였으며, 그때가 올해 일지도 모른다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종종 神은 선택된 자들을 위하여 종말의 시점을 앞당길 것이라고 언급하였는데 “시간의 흐름에서 앞으로의 100년은 10년처럼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407

그러므로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나 국가들은 종교와 처음으로 구분되어 하나의 정치체제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정복국가도 아니고 종교국가도 아닌 민족국가들이 처음으로 서양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자신이 지배하는 곳에 각자 스스로의 종교를 가진다” 라는 개념은 국가 지도자의 주권을 지지하는 표현이다. 지도자가 어떤 종교관을 가지던 간에 그가 지배하는 지역안에서는 종교 위에 국가가 선다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런 개념은 30년 전쟁이 끝나갈 무렵 에나 가능 해졌다. 독일인들이 평화를 수립하는데 종교는 이제 전쟁-평화 문제와 관련하여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원칙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 해졌다.408

민족국가가 생기면서 드디어 서양에서 국가가 종교적 선악의 판단이 아닌 정신에 의한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러한 철학체계는 정복자나 계시종교의 연역적 명령체계에서 독립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민족국가들은 당연히 연역적인 명령체계에서 벗어나 스스로 발견할 수밖에 없는 귀납적인 자연철학의 체계를 따르게 된다.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필연적이 아니라는 생각은 곧 종교가 당연히 행사하여야 할 권한을 제한해준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개념은 선악의 선택에 있어서 하나의 조건 만을 허락한다. 그러나 정치가는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선악이 아니라 최악과 차선의 악을 판단하는 선택에 있어서 종교가 아닌 도덕적 판단을 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리슐리외(Richelieu)는 국가운영에서 선견지명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선견지명을 가져야만 정치가는 국가에 다가오는 악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은 한번 시작되면 점점 더 피하기 어렵게 된다.409

민본사상은 어떻게 태동되는가? 춘추전국 시대에 형성된 민족국가와 함께 발현한 민본사상은 국가 생존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민본주의에 의해서만 민족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민본사상은 정복 지도자나 계시 종교의 지침이 아니라 백성이 국가에 가장 중요하다는 사상이다. 민본 사상은 춘추 전국시대 이후 위민(爲民), 보민(保民), 목민(牧民), 애민(愛民) 등 여러 가지 표현으로 쓰여 지고 있었다. 맹자는 BC 4세기에 이미 민본사상의 본질을 밝혔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장 가볍다”(맹자, 진심 하). 맹자는 적극적으로 백성의 중요성을 전면에 내세운 철학자중의 하나다. 그런 이유는 간단하다. 민본사상이 국가와 국민의 “생존”에 필요했던 것이다. 맹자 이전에도 공자, 그리고 도덕경 등에서 벌써 민본주의가 동양 자연철학의 핵심 주제로 등장하고 있었다.

서양의 민본사상은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루소에 이르러 철학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 이전에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정복시대”와 중세 “교권시대”가 수천 년간 이어지며 민본주의가 서양에서 생성될 수 없었다. 서양에서17세기에 비로소 민본주의가 필요한 민족국가들이 탄생하였고, 민주적으로 지도자를 교체하는 민주주의 제도와 모델이 19세기에 서양 각국에 전파되게 되었다. 동양도 이러한 제도와 모델을 수입하였고 이에 적응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동양이 이미 가지고 있던 민본주의 사상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동양이 서양의 민주주의 제도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문명적으로 동양의 민본사상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문화는 어머니, 제도는 그 아이들” 이다. 문화가 없으면 제도가 적응하지 못한다.

루소의 국민중심사상은 서양에서는 전혀 새로운 시각이다. 이에 커다란 감명을 받은 것이 독일 철학자 칸트다. 칸트는 루소를 읽기 전 까지는 “국민”(people)의 중요성을 몰랐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칸트 이전의 서양사상가들은 정복시대의 정복지도자나 교권시대의 종교지도자를 중시하는 서양문명 체제내에서 2천 년 이상 살았다. 그러나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서양에서는 정치윤리사상의 테두리가 달라진다. 민족국가의 출현 이후에 비로소 서양에서 처음으로 “국민”전체가 국가 생존에 필요해지게 되었고 이를 주장하는 사상가들이 나타나게 된다.

민본사상은 국가나 민주주의가 당연히 중요시하는 이데올로기나 철학적 개념이기 때문이어서 발전되어 나온 것이 아니라 민족국가의 성립이라는 테두리에서 자생적으로 나온 것이다. 전쟁이 횡행하는 시기가 계속되면, 국가안에서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도자나 귀족이 아니라 국민 전체가 노력해야 국가를 지킬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철학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본성의 자기보존 본능에서 나온다. 이러한 필요성에서 자연철학 체계가 비로소 생겨나게 된다.

민본주의 vs 민주주의

“동양의 민족국가 구성이 서양의 민족국가 구성보다 2천 년 앞섰다”, 이런 현상은 민족국가 구성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민본주의”의 태동이 동양이 서양보다 2천 년 앞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본주의가 앞섰다는 주장은 “민주주의” 체제가 동양에서 서양보다 앞섰다는 그런 뜻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법률과 제도에 의한 “지도자의 평화적 교체”가 포함한다. 특히 지도자의 평화적 교체를 헌법에 수록하고 이러한 목적을 견제와 균형이 반영된 정치 제도에 반영시키는 것은 서양에서 18세기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것들은 동양의 민본주의에서는 발전시키지 못한 현상이고, 모두 서양에서 배워온 것이다.

동서양을 비교할 때 “자연철학”, “민본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경제체제”의 태동은 민주주의의 출현이 아니라 “민족국가”의 출현에 집중하여야 한다. 민본주의는 동양에서 일찌감치 발전된 정치경제 이념이다.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맹자는 BC 4세기에 역성혁명론이라는 왕조 교체설을 주장하였다. 서양이 17세기 절대왕정 시대까지 주장한 왕권신수설 보다 2천 년 앞선 동양의 민본주의 사상의 출현이다. 민귀군경(民貴君輕)사상은 백성을 존중하고 백성의 삶을 보살펴야 정치경제가 발전하고 국가의 보존과 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철학 체계다.

맹자 이전에도 서경에 민유방본(民惟邦本) 사상을 펴고 있다. 즉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며 백성이 안정되어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사상이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뜻은 지도자가 백성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백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나라가 안정된다는 사상이다. 민유방본 사상은 BC 10세기 전후 주나라 초기에 정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민유방본이나 민귀군경 같은 민본사상은 전국시대의 민족국가의 출현 이전에 이미 중국 문명에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맹자는 전국시대의 계속된 전쟁속에서 민유방본 사상에서 한걸음 나아가 무능한 지도자는 교체해도 된다는 역성혁명을 주장한 민귀군경 사상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동양은 19세기까지 지도자는 죽을 때까지 지도자로 남는다는 종신제 제도와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능한 지도자가 출현할 경우 그를 계속 섬겨야 하는지 또는 그를 바꾸어야 하는지 하는 윤리적 문제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2천 년을 넘은 종신제 제도에 혁명적인 평화적 지도자 교체의 제도를 수립한 것이 서양의 민주주의다. 17-18세기 영국의 명예혁명과 프랑스의 시민혁명이 서양에서 민주주의를 수립한 계기가 되었다.

민주주의의 실현은 시현론에 입각한 서양의 철학체계내에서 생겨났다. 서양사상가들 중에서 중세 천 년을 지배한 교권과 새로이 등장한 왕권 사이의 세력다툼에서 “견제와 균형” 제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결국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기초가 수립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 사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보자는 “이상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은 서양의 시현론적 사유에서 민주주의의 출범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동양 불현론의 사유에서는 민본주의를 혁명적인 민주주의로의 탈바꿈을 이룩하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 발전이 서양에서 이루어진 것은 윤리에 입각한 동양의 사유와 법률에 입각한 서양의 문명적 사유의 차이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동양의 지도자의 평화적 교체를 이룩한 것은 19세기 이후에 와서 서양의 민주주의 철학에 입각한 제도를 수입한 이후에나 가능 해졌다.

이렇게 동양의 민본주의 출발점과 서양의 민주주의 이전의 민본주의의 출발점을 비교하게 되면, 우리는 동서양 문명비교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간극의 차이에 대하여 이해하게 된다.

동서양 문명을 비교할 때 민족국가의 출현을 감안하여 우리는 동서양 사상가들 사이에 2천 년의 간격을 두게 된다. 동서양 문명비교에서 도교 vs 이신론, 유교 vs 자연철학, 무위사상 vs 자유방임주의, 한비자 vs 마키아벨리, 손자병법 vs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등등의 개념이나 사상가 사이의 비교가 2천 년의 간격을 보이게 된다. 도교, 유교, 무위사상, 한비자, 손자 등은 모두 기원전의 인물이거나 그 시점에 이루어진 사상들이다. 이에 대비되는 서양인물이나 사상은 이신론, 자연철학, 자유방임주의, 마키아벨리, 클라우제비츠 등이 포함되는데 이들은 모두 서양의 근세에 세워진 사상이나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 계시종교 체계가 아니라 자연철학 체계를 따르고 있다. 이들이 출현함으로써 비로소 동서양의 자연철학 체계간 사상과 인물의 비교가 가능하게 된다.

동양에서는 민족국가라는 개념은 너무나 당연하여 새롭게 생각해야 할 개념이 아니다. 동양은 수천 년 전부터 민족국가를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국가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앞서 본 대로 서양에서 민족국가는 근세에 처음 경험하기 시작한 개념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정복국가에서 시민과 각종 노예 등으로 구성된 여러 민족이 같이 사는 국가였다. 중세 천 년 이상의 기간 동안은 서양은 종교를 중심으로 국가를 나누게 되었기 때문에 국가내에는 여러 민족이 같이 사는 그런 형태였다.

로마 교황이 기독교 국가운영에 깊이 관여하였고, 종교개혁 시기에는 구교와 신교로 국가들이 나누어져서 성립되었다. 구교 국가내에는 구교를 믿는 여러 민족이 같이 살고 있었고, 신교도들은 살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신교국가내에는 신교를 믿는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고, 구교도들은 살수가 없었다. 그런 형태가 17세기 신-구교 간의 장기적인 전쟁을 치르면서 결국 생존을 위하여 종교와 무관한 민족중심의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즉 한 국가내에 같은 민족으로 구성된 신구교를 믿는 사람들이 같이 살게 된 것이다. 드디어 수백 년간의 전쟁 끝에 민족국가가 출현하고 새로운 국가운영체제가 태동된다. 여기서 서양은 비로소 자연철학과 민본주의 정치경제 철학 체계를 수립하게 된다.

서양의 민족국가 수립은 17세기에 이루어졌다. 자연철학을 외친 사상가가 등장한다. 서양에서 자연철학과 경험주의를 강조한 베이컨이 그 시대 사람이다: “인간은 자연의 하인이며 해석자다”. 베이컨에 이어 스피노자가 자연철학을 한걸음 더 나아가 주장하게 되었다. 앞서 보았듯이 그는 神과 자연은 하나다 라고 외친다. 자유방임 정치경제를 외친 프랑스의 케네와 영국의 아담 스미스도 이들의 뒤를 이었다: “자유방임과 자유통행, 그러면 세상은 저절로 돌아간다” 가 그들의 철학이 된다. 동양 자연철학의 무위사상의 영감을 받았다.

2) 동양의 민본 정치경제: 관자, 순자, 한비자, 사마천, 그리고 도덕경

민족국가는 생존을 위하여 당연히 민본주의 정치경제 철학에 의존하게 된다. 근대 이전의 서양 사상가들은 민족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민족국가에서 발생하는 정치경제사상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17세기에 비로소 서양에 민족국가가 탄생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18세기에 프랑스에서 중농주의라는 정치경제사상이 생겨났다. 이어 영국의 아담 스미스가 서양의 정치경제사상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그리스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분야에 걸쳐서 이론과 철학을 설명하였으나 그들에게 정치경제사상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이들은 정복시대의 문명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해낸 “정치경제사상”은 인간이 사회에서 어떠한 재산을 가져야 옳은 가 하는 정치윤리 문제에 대한 일부 견해에 국한되어 있다. 그들은 국가 또는 폴리스 내의 모든 사람 즉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경제에 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민족국가내에서 생존을 위하여 국가내의 모든 “국민”에 관심이 가장 중요해진다. 국민을 어떻게 경제활동에 활용하는가 하는 것이 국가의 힘과 국가 생존의 중대한 목적이 된다. 바로 민본사상의 발현이 필요한 이유다. 이에 따라 민본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처음으로 정치경제 사상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BC 6-3 세기 전국시대에 동양 사상가들이 정치경제사상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첫 발걸음은 바로 정치경제사상의 기반이 되는 인간본성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자연철학에 의거한 인성 확립이다. 이들은 이를 기반으로 정치경제철학의 핵심을 수립해 나가고 있었다. 관자(管子), 순자(荀子), 한비자(韓非子), 사마천의 사기(史記), 그리고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살펴보자.

관자(管子, 춘추 전국시대에 쓰여진 책). 관중(管仲)은 전국시대 이전 봉건제도가 민족국가로 이행되어 나가는 시대인 춘추시대의 인물이다. 685-645 BC 동안 즉 40년간 제 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한 정치가다. 그의 사상과 유사한 철학을 공유한 많은 사람들의 철학사상을 열거한 책이 바로 “관자(管子)”다. 이는 동서양을 아울러 최초의 정치경제서적으로 꼽힐 만하다. 관자는 춘추시대에 시작하여 전국시대의 백가쟁명 사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면서 전국시대에 편집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관자에 적힌 철학 중에서 특히 국가내의 모든 백성에 대한 경제정책적 사상이 많이 담겨있다. 동양의 민본주의는 서양의 민주주의와 다르다. 서양의 민주주의는 인간이 기어코 달성해야 하는 비전이나 이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동양의 민본주의는 모든 나라나 개인이 투쟁해야 하는 이데올로기적 사상이 아니다. 그 보다 아주 현실적인 목표가 있다. 전국시대에 국가나 개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다. 즉 “자기보존”이라는 아주 현실적인 목표가 있다. 그것은 국력을 키워 나가야 전국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백성 전체를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보고 활용해야 한다는 원천적인 현실론에 입각해 있다. 민본은 민족국가의 생존 철학의 기본이 된다.

국가가 부유하면 사람들은 멀리서도 찾아온다. 국토를 구별 없이 누구 나에게 경작할 수 있도록 하면 사람들은 정착하게 된다. 곡식이 가득하여 백성들이 먹을 수 있으면 그들은 절제되고 겸손하게 된다. 옷과 식량이 넉넉해지면 백성들은 존경심과 부끄러움을 알게 된다. (관자 1:1)410

이러한 민본사상은 무위사상과 연결된다. 인간을 가리지 않고 포용하는 지도자의 철학은 자연의 철학을 따라하는 무위사상에서 근거를 찾자는 것이다.

“당신은 우리 가족이 아니다” 라는 말을 하지 말라. 그러면 이를 듣는 사람들은 귀하의 말을 듣지 않게 된다. “당신은 우리 구역 사람이 아니다” 라는 말을 하지 말라. 그러면 이를 듣는 사람들은 귀하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된다. “당신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다” 라는 말을 하지 말라. 그러면 이를 듣는 사람들은 귀하를 따르지 않게 된다. 대지와 같이 행동하라. 하늘처럼 행동하라. 대지나 하늘은 특별히 누구를 구별하지도 않고 누구만 중요시하지도 않는다. 태양과 같이 행동하라. 이것이 진정한 지도자의 행동지침이다. (관자 1:5)

관자는 소금과 철의 유통을 국가독점으로 만들어 제 나라의 국부를 크게 증진하였다. 그리고 곡식과 다른 제품의 유통의 크기에 따라 동전(화폐)의 량을 조절하는 경제정책을 정착시키는데 활용했다. 통화정책을 국부를 관리하는 데 조직적으로 활용하는 최초의 사례로 보인다.411 관자는 곡물가격이 폭락하면 화폐를 풀어 곡물을 매입하여 가격을 끌어올리며, 곡물가격이 폭등하면 곡물을 내다 팔아서 가격을 안정시키는데 활용하였다. 기근이나 전쟁 등 유사시에는 화폐를 추가로 발행하거나 물자를 팔아 재정을 확보했다. 그는 제나라와 주변국의 특산품의 생산과 유통을 제나라의 금이나 화폐를 활용하여 사고 팔면서 제나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활용하였다. 관중은 모든 세금과 공공사업의 대가를 현물이 아닌 화폐로 받거나 주면서 재정정책과 금융정책을 연계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는 관자에서 “경중”(輕重) 정책 편에서 설명된다. “천하의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는가” 라는 환공의 질문에 대한 관중의 답은 경중지술이었다. 경중지술(輕重之術)은 물자가 많아지면 가격이 내려가고 물자가 적어지면 가격이 올라간다는 시장경제의 원칙이며 이러한 경제환경을 화폐를 활용하여 이재(理財: 국가 재정을 잘 운영한다는 의미)를 추구한다는 뜻이다.412 이를 기반으로 관중은 제 나라 환공(桓公)을 춘추5패의 최초의 패자로 만들었다.413

순자(荀子, c 310-235 BC)는 그의 책 순자 제10장 부국(富國, wealth of nation)편에서 아담 스미스의 18세기의 국부론(國富論, wealth of nation)처럼 국가의 경제를 어떻게 운영하여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순자는 부국편에서 백성이 부유해지지 않으면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거둘 수 없으며, 백성을 보호하지 않으면 백성을 일하게 할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국가의 경제를 건전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지출을 검소하게 하고, 백성들을 부유하게 해야 하며, 여유분을 잘 보관하는 것이다. 국가의 지출을 검소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예산을 줄이는 것이며 국가운영을 잘하여 백성을 부유하게 할 수 있다. 백성이 부유해지면 국가의 재정에 여유가 생긴다.414

그리고 특히 재미 있는 부분은 아담 스미스가 유행시킨 “보이지 않는 손”의 개념은 순자에 의하여 2천 년 전에 유사하게 설명되고 있다. 각자 자신을 위하여 만들지 않아도 그 생산품들은 결국 전체의 이익에 기여한 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사익이 공익을 창출”한다는 서양식 이론을 내세운 반면, 순자는 “유통”에 의하여 “각자의 노력이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이득”을 만들어 나간다는 설명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유통에 의하여 스스로 생산하지 않아도 국내외의 여러 가지 제품을 사용하게 된다. 해변에 사는 사람들은 목재로 된 용기를 사용하고, 산속에 사는 사람들은 해산품을 소모한다. 농부는 자신들이 만들지 않는 목재나 진흙을 사용하여 목공이니 석공이 만든 제품들을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장인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농부들이 생산하는 각종 곡식을 스스로 농토에서 만들지 않으면서 즐기게 된다 (순자 9:12)

순자는 유통에 의하여 모든 사람이 즐기게 되는 물품을 사용하게 되는데, 여기에 아담 스미스와는 다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유통이 공익을 창조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순자는 유통도 개인의 탐욕에 의하여 손상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인간본성과 감정은 방임하면 무질서와 폭력을 낳게 된다; 인간본성과 감정은 윤리에 의해서 관리될 수 있다. 훌륭한 스승과 원칙을 따라야 한다. (순자 23:1)

인간본성에 따라 사익을 그대로 방임하면 공익이 훼손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공익을 위하여 인간본성은 법과 윤리에 의하여 관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한비자(韓非子, BC 3세기 후반)는 자신의 책 한비자에서 정치경제사상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밝히고 있다. 특히 공익과 사익을 구분하는 철학이 눈에 뜨인다: “고대에 단어를 만들어 나갈 때 원을 그리고 이것을 개인의 것이라고 불렀고, 원 밖에 있는 것은 공공의 것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미 개인의 것과 공공의 것, 그것들이 충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하들이 사익을 추구하지 않고 공익을 추구하는 것은 지도자가 현명하고 능력이 있을 때 그렇게 한다. 신하들이 공익을 추구하지 않고 사익에 매달리는 것은 지도자가 우둔하고 능력이 없을 때 그렇게 된다. (한비자 19편 식사(飾邪))

한비자의 사익-공익 충돌론은 국가를 운영하는 지도자에게 술치(術治)가 핵심중의 하나라는 철학과 연계된다:

법률과 행정조치는 신하들이 사익을 추구하는 방법을 없애는 방법이다. 법과 행정조치가 성공하면 사익 추구가 사라진다. 사익은 법을 위반하는 단서가 된다… 만약 지도자가 개인의 취향에 따라 신하를 활용하면 신하들은 공익이 아니라 지도자의 취향을 만족시키는데 헌신하게 된다 (한비자 45:6)

한비는 국가의 생존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백성의 노력에 의하여 국부를 스스로 크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안임을 설명한다. 그는 그의 정치경제철학의 시작으로 인간의 노력은 모두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며 국가의 정책은 이를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농장주가 농토를 개간하고 씨를 심고자 노동자 고용하고자 음식을 주고 돈을 주는 것은 농장주가 노동자를 사랑해서가 아니고 관대하게 음식을 주고 돈을 주는 것이 노동자가 일을 잘하게 하기 위함이다. 노동자가 최선을 다하여 농토를 개간하고 씨를 심는 것은 농장주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열심히 일을 하면 좋은 음식과 돈이 지불되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415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기회의 균등을 지켜야 하며, 결과의 균등을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밝히고 있다:

개인이 가난한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게으르거나 돈을 함부로 써서 그렇게 된다. 반대로 개인이 잘 사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열심히 일하고 돈을 절약해서 그렇게 된다. 만약 지도자가 잘 사는 사람에게서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면, 이것은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는 사람에게서 빼앗아서 게으르고 돈을 함부로 쓰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과 같다. 그러면 인간들은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지 않아도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한비자 50:3)

한비는 공익-사익 충돌론에 입각하여, 공공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국가와 지도자의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 한비는 이미 전국시대 말기의 인물이기 때문에 민족국가내에서 이미 관료체제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관료체제내에서 지도자와 신하의 이익 추구 방식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바로 술치(術治)의 핵심을 가르치고 있다.

사기(史記, 91 BC 전후)는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책으로 서양의 최초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의 책과 비교할 수 있다. 특히 사기의 열전(列傳) 부분은 당시 동서양 영웅들의 인생기록이라는 면에서 플루타크 영웅전과 아주 비슷하다. 그러나 사기에는 헤로도토스나 플루타크 영웅전에는 전혀 없는 정치경제사상이 담겨 있다. 사마천이 살던 시기에는 동양에서는 이미 민족국가 형성이 완성되어 정치경제사상이 국가운영에서 전쟁 못지 않게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사기 열전 69장은 화식(貨殖)열전으로 명명되어 있다. 화(貨)는 재산을 뜻하며, 식(殖)은 증식을 뜻한다. 즉 재산이 왜 중요한지, 재산을 늘려 부자가 되는 방법, 그리고 재산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에 관한 기록이다. 여기서 정치경제사상을 설명하는 인간본성에 대한 사마천의 탁견이 담겨 있다. 인간본성에서 이익과 재산이 인간을 움직이는 원천적인 이유임을 밝히고 있다:

천하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찾아오는 것은 모두 이익을 얻고자 함이고,

천하사람들이 무너지듯 흩어지는 것도 이익을 찾아가는 것이다. (사기 129-2)

사마천은 역사와 인간의 마음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결국 자신의 이익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간파하고 있다. 관료들이 공익을 위하여 일하도록 하지 않으면 사익을 추구하게 되는 상황은 일반인들이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동일한 인간본성에 있다고 보았다.

대체로 사람들은 상대방의 재산이 열 배가 되면 헐뜯고, 백 배가 되면 두려워하고, 천 배가 되면 그 사람의 일을 해주고, 만 배가 되면 그 사람의 노예가 된다. 이것은 만물의 이치다. (사기 129-29)

관료들은 행정명령을 왜곡하고, 도장을 훔쳐 사용하고, 죄를 짓는 행위를 하는데 그것은 돈을 착취하는데 목적이 있다. 농부, 기술자, 상인, 목동들은 모두 자신들의 일을 하면서 더 많은 돈을 취하려고 노력한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매일 자신들의 능력과 기술을 활용하여 좀 더 많은 금전적 이익을 취하려고 노력한다. (사기 129-27)

인간본성이 이러할 진데, 정부나 지도자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국가주의 탐욕”이다. 즉 지도자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백성과 다투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국가를 운영하는 최선의 방안은 백성들로 하여금 원하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가장 나쁜 것은 국가 지도자가 백성과 같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그들과 다투는 것이다 (사기 129-1)

사마천은 순자나 한비자가 설파한 것처럼, 또 2천 년후에 케네와 아담 스미스가 노력한 것처럼 국가 경제 운영에서 무위사상(서양에서는 자유방임주의)을 기초로 하는 것이 최선의 방안임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농업은 먹을 것을 생산하고, 대지는 여러 가지 물품과 물자를 생산하며,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물건들을 만들고, 상인은 이런 것들을 움직여 돌게 한다. 이러한 일들은 정부가 규제하거나 강요하거나 빼앗아 대신하는 일 없이 저절로 일어난다. 백성 모두가 각자가 원하는 것을 취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할 뿐이다… 그렇게 하라고 요청하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난다. 즉 道를 따라갈 뿐이다. (사기 129-3)

그는 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 경제를 살리는 길임을 설득하고 있다. 이는 국가의 개입이 아니라 시장경제의 유용성을 가르치고 있다.

상품이나 화폐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사기 129-5)

도덕경(전통적으로 BC 6세기): 관자, 순자, 한비자, 사기 등은 서양보다 2천 년 앞서서 정치경제사상의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정치경제철학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고전은 노자의 도덕경이다. 특히 정치경제철학을 도덕경의 행동지침인 무위사상과 함께 제시하고 있다. 관자, 순자, 한비자, 사기 등이 모두 무위사상을 공유하고 있지만, 근원은 도덕경에 있다. 무위사상은 인간본성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이해하면서 그런 기반위에 제시하고 있다. 아래는 도덕경에 명시되어 있는 정치경제철학의 일부분이다.

민생중시(도덕경 53장): 조정은 화려하나, 논 밭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곳간은 텅 비었다. 그런데도 한쪽에서는 비단옷을 걸쳐 입고, 날카로운 칼을 차고, 음식은 물릴 정도고, 재물은 쓰고도 남는다. 이것이 도둑이 아니고 무엇인가?

간명한 법규(도덕경 57장): 금하고 가리는 것이 많을수록 백성은 더욱 가난해진다. 백성들이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다룰수록 나라는 더욱 혼란해진다. 사람 사이에 잔꾀가 많을수록 괴상한 일이 많이 생긴다. 법이나 명령이 요란할수록 도둑이 더 많아진다.

작은 정부(도덕경 58장, 75장): 다스림이 간단 할수록 백성에게는 득이 된다. 다스림이 복잡 할수록 백성에게는 해가 된다…백성이 다스리기 힘든 것은, 위에서 너무 많은 정책을 만들어 간섭하기 때문이다.

민간 주도(도덕경 65장): 자신의 계획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지도자는 국가에게는 해악이다. 자신의 계획을 국민에게 강요하지 않는 지도자는 국가에게 축복이다.

적은 세금(도덕경 75장):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위에서 세금을 과도하게 거두어 자신만을 위하여 쓰기 때문이다.

사회균형(도덕경 77장): 하늘의 道는 많은 것을 가진 자에게서 취하여 없는 자를 돕는다. 인간의 道는 없는 자에게서 취하여 많은 것을 가진 자를 돕는다. 지도자 중에 누가 잉여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 道를 이해하는 자 만이 할 수 있다.

지도자의 청렴(도덕경 81장): 지도자는 자신의 부를 추구하지 않는다. 남을 위하여 일하는 데서 기쁨을 찾는다. 따라서 남에게 주는 것이 많을 수록 자신은 더욱 부유하게 된다.

도덕경과 모세오경이 정치경제에 대하여 가지는 관심을 비교하여 보자. 성경에는 정치경제 활동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아직 민족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에 완성된 성경에는 출애굽기, 신명기, 민수기 등에 일부 정치경제 활동에 대한 직접적인 “율법”이 예시되어 있기는 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네가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를 세어 인구 조사를 실시할 때, 사람마다 자기 목숨 값으로 주님에게 속전을 바쳐야 한다. (출애굽기 30:11-12)

너는 마땅히 매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 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신명기 14:22-29, 23:24-25)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 분의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민수기 5:6-7)

동서양 비교에서 중요한 것은 서양의 제한적인 정치경제에 관한 생각들이 모두 율법, 즉 법의 형태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서양의 神은 정치경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모세오경에 나오는 경제활동에 관한 것도 정치경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켜야 하는 또는 위반할 경우 벌을 받는 “법” 이라는 성격에 중점을 두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로마 문화는 노예 제도를 기반으로 하면서, 전쟁, 정복, 약탈을 주 수단으로 하는 이기심을 적극적으로 신장하는 전통과 문화 위에 세워진 것이다. 개인의 이기심의 방임이라는 측면에서 서양의 근-현대 정치경제 사상은 아테네-로마 시대의 고대사상과 닮은 데가 있다. 민본사상에 입각한 정치경제사상은 아직 태동하기 이전의 상태다.

서양의 계몽시대에는 동양의 관자, 순자, 한비, 사마천 등 사상가들의 책이나 철학이 서양에 소개되기 이전이다. 계몽시대에 유교와 도교의 서적들 만이 서양에 소개되고 서양 사상가들이 감명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도교의 정치경제철학은 도교의 핵심 행동원리인 무위사상과 함께 이때 형성되기 시작한 서양의 정치경제사상의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민족국가의 구성은 결국 국가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을 시작하게 된다.

3) 서양의 민족국가 출현: 중상주의에서 자유방임주의로

서양은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를 대항해시대(Age of Discovery)로 부른다. 이것은 서양의 세계정복 시대를 가리킨다. 서양 제국은 전세계를 무대로 한 식민지 개척, 금-은, 향신료와 노예획득 경쟁을 시작하였다. 그 방법으로 주로 개척, 해적행위와 탈취에 의존하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콜럼버스와 바스코다가마의 대서양과 인도양 개척을 필두로 이에 제일 먼저 성공한 나라다. 포르투갈이 선두에 섰었지만 인구가 너무 작아 스페인에게 밀리게 된다. 스페인은 소위 코르테즈(1485-1547)와 피사로(1471-1541)같은 콘키스타도르 들의 활약으로 아즈텍 과 잉카 제국의 금과 은을 탈취한다. 콘키스타도르는 스페인어로 정복자를 뜻한다. 아메리카로부터 얻은 막대한 금과 은을 국내로 들여와 스페인은 유럽 최대 강국으로 부상한다.

영국은 이러한 스페인의 금과 은, 그리고 향신료를 실어 나르는 배를 습격하여 이를 탈취하는데 집중하기도 한다. 유명한 드레이크(1540-1596)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러한 드레이크의 해적행위에 투자하여 어떤 해에는 왕실 수입의 절반쯤을 이로부터 확보할 정도였다.416 드레이크는 해적, 탐험가, 해군제독, 기업인, 정치가 로서 활약하였으며, 작위도 받았고 1588 스페인의 무적함대와의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는 등 특출한 인물이었다. 영국인에게는 둘도 없는 애국자, 스페인에게는 자국선의 대서양 항해에 가장 위험한 해적 두목으로 커다란 현상금이 걸린 사나이였다.

이러한 스페인과 영국간의 경쟁은 해상 곳곳에서 소규모 충돌이 빈번해지다가 결국 전면전쟁으로 이어진다. 서양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1588년 영불해협에서 벌어진 해전(the battle of Gravelines)에서 스페인 무적함대의 궤멸과 영국 해군의 승리로 두 나라의 운명이 갈린다.417

유럽 국가들은 해운의 발전, 해외식민지의 개척과 함께 국제무역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들은 식민지와 영토확장을 추구하고 국제무역의 관리를 통하여 국부를 증가시키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러한 행태는 “중상주의” (重商主義 Mercantilism)라고 불리게 되었다. 중상주의라는 어휘는 라틴어 mercans에서 왔는데 이는 물건을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유럽제국은 중상주의정책을 추구하며 국가간의 거의 무제한적인 전쟁의 상태로 돌입하게 된다. 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무려 300년 가까이 이러한 중상주의를 숭배하는 상태가 계속된다. 스페인 처럼 식민지에서 금과 은을 확보하여 강국으로 부상하자는 것이다.

이들이 취한 중상주의라는 국가경제 정책은 상업을 진작하여 민생을 도모하거나 세계질서를 유지하자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철학이 아니다. 이는 최강의 국가로 살아남고 군림하는데는 남을 정복하고 필요한 물자를 탈취하거나 자국에 유리한 교역조건에 의하여 국익을 확보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경쟁수단으로 삼았다. 이것이 중상주의다. 이 정책은 어떻게 해서든지 국제교역에서 무역흑자를 달성하고 이를 통하여 국가의 재화, 즉 금과 은의 소유를 극대화하자는 것이다. 당연히 극도의 보호무역주의가 성행하게 된다. 보호무역주의 기치아래 서양 각국은 무역수지의 흑자 달성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중상주의 정책은 아래와 같이 표현된다:

우리는 외국으로부터 우리가 판매하는 것보다 더 많이 수입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정책을 견지해야 한다. 왜냐 하면 이를 어기면 우리는 가난해지고, 상대방은 부유해지기 때문이다.418

그래서 모든 나라가 수출을 극대화하고 수입을 극소화하는 정책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 따라 유럽 각국은 해외 식민지 확보와 제국내의 무역 통제를 위한 경쟁을 하게 된다. 중상주의는 대서양 3각 무역의 패턴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즉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면화, 설탕, 담배 등이 유럽으로 수출되고, 유럽에서는 이를 가공한 섬유나 사탕수수로 만든 술 럼(Rum)주 같은 공산품을 아프리카나 다른 식민지로 수출하고, 아프리카에서는 노예를 아메리카로 수출하는 무역을 유럽 각국이 앞장서서 추구하게 된 것이다.

전매와 독점은 중상주의 정책의 일반적인 패턴이 된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 등 근대 경제학자들은 중상주의를 국가권력, 제조업자와 상인이 결탁하여 소비자에게 손해를 끼친 거대한 경제체제로 보았다. 실제로 중상주의자들은 정부관료나 상인들이 대표하였다. 실제로 상인들은 외국의 경쟁을 배제한 국내 시장에서 독점권을 가지고 막대한 이윤을 취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노무자와 소비자의 입장을 희생한 결과다. 또 국가는 높은 관세를 물리고 상인들이 지불하는 세금을 독점할 수 있었다. 중상주의자들은 당연히 근로자들을 저임금으로 묶어 두는 것을 국부를 위하여, 국가의 생존을 위하여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노무자나 하위계급에게 교육, 여가제공, 최저임금이상의 임금제공 같은 것을 국가를 나태와 악으로 이끄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국내에서는 무역 경쟁력을 높이기 위하여 노임의 증가를 적극적으로 억제하게 되었다.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초기 식민-착취 정책과 중후반기 보호무역 정책을 모두 관통하는 하나의 현상은 국가주의(statism)로 표현될 수 있다. 서양의 식민-중상주의 정책은 정치경제측면에서 볼 때 결국 국가주의로 귀결된다:

중상주의는 17-18세기 유럽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그것은 국가주의의 한 종류였는데 오류에 가득 찬 경제논리를 이용하여 제국주의적 국력을 키우고, 또 국가가 선택하는 집단이나 개인에게 독점권을 주거나 보조금을 주는 제도였던 것이다.419

중상주의 정책을 추구하며 각국의 군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국가의 경제, 통상 정책을 강력히 통제하고자 하였다. 물론 당시 군주들은 거듭되는 전쟁과 긴박한 경쟁 속에서 국가의 안보와 부, 즉 부국강병을 앞세운 면도 있었다. 당시는 국가와 군주의 구별이 없었다.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 라는 선언으로 유명하다.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과 국가주의를 통한 개인의 이기심 내지 탐욕 추구와 구분이 없는 상태였다.

서양 정치경제가 이러한 질곡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서양에서 민족국가의 설립이 우선되어야 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하여 드디어 서양에서 민족국가가 출발하면서 서양 정치경제에 커다란 변화가 다가오게 된다. 민족국가는 정복국가 와는 판이하게 다른 사상체계에 눈을 뜨게 된다. 생존을 위해서다. 정치경제면에서는 이는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국민의 경제적 자율을 확보해서 국익을 키우자는 생각에 서양의 사상가들이 눈을 뜨게 된다. 이로써 3세기간 서양을 지배하던 정복시대의 중상주의가 퇴출하면서 자유방임주의가 드디어 서양 정치경제에서 개화하게 된다.420

정복시대에 서양의 정치경제를 지배하던 당시 사상은 국가주의였다. 왕정을 유지하면서 국왕의 생존과 국가의 생존을 동일시한 때에 살아남기 위한 방안이다. 그러나 17-18세기 서양은 민족주의 도입으로 국가 경제를 국가주의에 더 이상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 생존을 위하여 과감한 국가개혁을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과도기에 서양에서 혁명이 빈발하고 각종 사상이 팽배해지게 된다. 특히 정복국가적인 중상주의 제도를 벗어나야 만했다. 민족주의 출범으로 민족국가에 필요한 새로운 사유체계가 필요해졌다. 민족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다. 서양에서 18세기 민족주의는 정치경제면에서 국가주의 대신 자유방임주의를 시도하게 된다.

4) 자유방임주의는 도교 무위사상에서 영감

근대 계몽시대에 서양은 중상주의라는 철저한 국가통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치고 있었다. 중상주의에 제일 처음으로 사상적으로 도전장을 던진 사람들은 프랑스의 중농주의자(Physiocrats)들이었다. 이들은 중상주의라는 슬로건 아래 국가들이 정복과 착취에 무한의 경쟁을 벌이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국력을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식민지를 포함하여 자국내의 농지를 최대한 활용하여 농업생산을 늘림으로써 국가의 부를 증가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들은 동양에서 농업이 높은 생산성을 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배경을 이루는 무위사상에 깊이 매료된다.

서양 사상가들이 국민의 경제적 자율을 주장하게 되는 시점에 동양의 무위사상이 서양에 알려지게 된다. 정부를 포함하여 인위적인 간섭을 배제하자는 무위철학이 서양에 도입되면서 이 철학은 서양 사상가들에게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철학으로 다가오게 된다.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들은 정치경제철학의 핵심인 개인의 자율에 집중한다. 이들은 무위사상과 맞닿은 자유방임(laissez-faire) 사상을 서양에 퍼트리게 된다. “레세페르”라는 말은 그 전부터 프랑스 상인들 사이에 쓰이던 말이지만, 중농주의자들이 도교의 “무위사상”을 이 말에 담아 퍼뜨렸다고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421 “레세”는 내버려 두라는 뜻이고, “페르”는 하다를 의미하므로 “레세페르”는 “하도록 내버려 두라” 즉 무위라는 뜻이다. 레세페르는 서양에서 중상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혁명적인 사상으로 대두된다. 아담 스미스도 프랑스에 와서 중농주의자를 만나서 이를 배우게 된다. 영어 권에서 중요한 이러한 사상을 도입하면서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내지 않고 프랑스어인 레세페르를 그대로 영어로 사용하게 된다.

정치경제 철학은 서양보다 훨씬 먼저 동양에서는 민족국가의 형성과 함께 발전된 철학이다. 도교의 무위라는 핵심 사상이 정치경제 철학에 적용된다. 무위사상은 유위에 대한 경계를 주장하며 개인과 지도자가 행동원리로 삼아야 할 만큼 중요한 정치, 경제, 윤리적인 사상이다. 도교의 행동원리인 무위사상은 후에 서양에서는 자유방임(laissez-faire)주의로 번역될 만큼 중요한 경제성을 내포하고 있다. 무위사상은 인간적 간섭을 최소화하자는 것이고, 자유방임주의는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무위사상은 경제를 포함하면서 인간의 행위 전체에 관한 것이고, 자유방임주의는 인간의 경제행위에 국한되어 있다.

중농주의자들에게는 어떻게 국가의 간섭을 작게 하고 개인의 생산적인 능력을 키우는데 집중한다. 개인의 노력이 경제에 중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 뒤에는 해외정복으로 금과 은을 확보하는 것보다 자연과 농업을 중시하여 국부를 키우자는 철학이 깔려 있다. 이를 어떻게 표현하고 체계화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때 도교의 무위사상이 프랑스 중농주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중농주의자들이 어떻게 무위사상에서 새로운 개념인 자유방임주의 사상을 서양에 전파하였는지 최근에 서양인들에 의하여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서양의 철학자 듀란트는 “우리가 동양에서 받은 유산”(Our Oriental Heritage)이라는 책에서 자유방임주의의 생성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들은 그들의 자유방임(laissez-faire) 학설에서 노자와 장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422

정치경제 차원에서 프랑스의 중농주의 철학자들이 중국의 농업제도와 이를 운영하는 정부의 윤리적인 역할, 그리고 이에 담겨 있는 경제철학인 무위사상에 심취하였다. 이를 자유방임주의라는 사상으로 묶어서 서양의 계몽시대에 유행시키게 되었다:

현명한 지도자는 정치를 할 때 상당 부분이 그대로 내버려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요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철학은 바로 동양 도교의 무위(無爲, wuwei)사상에 내재 되어있다. 이것을 프랑스 사람들이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로 번역하여 서양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 무위사상이 케네를 감동시키고, 케네에게서 배운 아담 스미스를 통하여 서양 근대 정치경제학의 기초를 이루게 된다.423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들은 국가의 부가 농업에서 온다고 보고, 농업은 정부의 간여 없이 자연의 섭리를 따라 또 시장의 메커니즘을 따라 인간이 일할 때 가장 커다란 효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하였다. 중농주의(Physiocracy) 라는 어휘는 “자연적” 그리고 “관리” 라는 뜻의 합성어다. 국부를 농업처럼 자연에 의지하여 관리하자는 생각이다.

프랑스 중농주의: 케네, 드구르네, 쁘와브르

18세기 서양의 정치 문화적 중심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에서 서양역사에서 처음으로 정치경제를 생각하는 철학자들이 등장하였다. 케네는 국가내의 경제의 움직임을 살피는 “경제표”(Economic Table)를 1758년 발표한다. 그는 서양 최초의 정치경제 철학자가 된다. 케네는 프랑스 중농주의의 태두로서 18세기 서양에 근대경제학의 기초이념인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를 중국의 무위사상과 이어 퍼뜨린 인물로 꼽힌다. 『동양의 계몽』을 쓴 클라크(J. J. Clarke)는 “무위”가 프랑스어로는 “레세페르”로 옮겨진다고 하였다.424 자유방임주의는 서양의 정치경제사를 뒤흔든 개념이었고 프랑스에서 생성되었기 때문에 영어에서도 프랑스 어휘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케네 (1694–1774)는 프랑스 중농주의자를 대표한다.425 정부의 간섭으로 부터 정치경제를 해방시키자는 생각이 그들을 지배했다. “정부가 간섭을 많이 할 수록 백성은 힘든 생활을 하게 된다” 라는 동양의 무위 철학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당시 자유방임이라는 새로운 사상에 기초를 둔 케네의 이러한 주장은 혁명적이었다. 프랑스 중농주의 사상가들이 내세운 레세페르라는 사상은 영국으로 전파되었다.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의 자유시장 경제체제에 직접적이고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426 실제로 아담 스미스는 1760년대에 파리로 케네를 방문하여 자유방임사상에 대하여 협의를 가진 바도 있다.427 자유방임이라는 개념은 케네 이전에도 17세기말 18세기 전반에 프랑스 사업가들 사이에 일부 사용되기도 하였다.428 그러나 자유방임 사상이 퍼진 배경에는 도교의 무위사상에서 받은 연관성은 부인하기 어렵다.

프랑스 중농주의 사상가들은 중상주의자들처럼 꼭 남의 것을 빼앗아 와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진 농토에서 많은 작물을 생산하는 것이 국부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혁명적인 발상이다. 중상주의는 군사적 정복을 통한 식민지에서 금과 은을 최대한 확보하여 국부를 키우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중상주의라는 개념에 담긴 뜻을 확대해서 보면 알렉산더, 카이사르, 중세의 샤를마뉴, 스페인의 중남미 정복, 영국과 유럽국가들의 식민지 정복 등이 모두 중상주의와 핵심 개념을 같이 한다. 많은 금과 은을 차지하는 국가가 강국이 된다는 것이다. 즉 국가의 다른 나라의 정복 역할이 국부를 위하여 최대한 중요해진다. 국가내의 개인의 생산력은 아무런 개별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서양의 고대, 중세, 근세 정복국가들의 정치철학적 개념이다.

드구르네 (1712 –1759)는 케네와 같은 시대의 경제사상가이며, 자유방임주의를 서양에 널리 전파한 인물이다. 케네와 드구르네 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중국의 발달된 농업과 이를 운영하는 정부의 자유방임 정책, 그리고 도교의 자연주의 철학 개념들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프랑스 사상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들의 영향으로 도교 사상과 통하는 “지나친 통치는 금물!”(다르장송) 이라는 모토나 “자연에 맡겨라!”(부아길베르) 라는 구호가 널리 프랑스 지식인 사이에 유행하였다. 이에 의거하여, 또 케네와 뜻을 같이하여, 드구르네는 자신의 신념인 상업과 산업에 대한 국가의 규율을 제거하기 위하여 “자유방임, 자유통행!” 라는 슬로건을 열심히 유포하였다. 그의 슬로건은 “자유방임, 자유통행, 세상은 저절로!” 라는 보다 발전된 형태로도 프랑스 사상계에 유행하게 되었다.

드구르네가 외친 중농주의 철학인 “자유방임! 자유통행! 세상은 저절로 돌아간다!”는 정복국가나 중상주의가 정부의 역할을 강화하자는 정치철학을 근본적으로 전환하자는 뜻이 담겨있다. 그의 중농주의 철학은 도교의 철학, “자유방임 함으로써 백성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와 같은 내용이다 (도덕경 57장). 중농주의 철학의 주장인 “자연에 맡겨라!” 는 구호는 도교의 “하늘의 道는 이롭게 할 뿐, 해롭게 하지 않는다”는 철학과 그대로 들어 맞는다 (도덕경 81장). 중농주의의 슬로건인 “지나친 통치는 금물!” 이라는 주장은 도교에서 “자신의 계획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지도자는 국가에 해악을 가져온다” 라는 생각과 같은 표현이다 (도덕경 65장). 무위사상은 유교에서도 공감하고 있는 철학이다: “하늘이 무엇을 말하랴? 사시(四時)가 운행되고 만물이 잘 자라는데 하늘이 무엇을 말하랴?” (논어 17:19)

쁘와브르(1719-1786)는 드구르네에 뒤이어 무위사상을 서양에 퍼트린 또 다른 중요 인물이다. 그는 4년간 중국 지방을 광범위하게 여행하였다. 서양보다 발달된 농업경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부의 자유방임정책과 역할을 경험하고 이를 프랑스에 알린 인물이다. 실제로 케네와 프랑스 중농주의자들은 중국의 농업과 그 철학적 기둥인 유교-도교사상에서 서양 정치경제의 미래와 모델을 보았다. 케네는 쁘와브르에게서 많은 정보를 입수하고 그와의 접촉에서 서로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쁘와브르는 중국의 농업과 도교 사상에 관하여 목격자로서의 생생한 정보와 생각을 케네에게 주었으며, 케네는 쁘와브르를 중농주의 철학자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쁘와브르는 원예농업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젊은 시절 천주교 선교사로 중국에 파견되어 광주와 마카오 지역에서 일하게 된다. 쁘와브르는 북경에 거주하면서 유교에 집중한 다른 예수회 신부들 과는 달리 원예농업에 관심을 가지고 두 번에 걸쳐 4년간 지방을 널리 여행하면서 농업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는 이어 동남아, 아프리카, 중미에서도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정리하여 “한 철학자의 여행”(Voyages d’un Philosophe) 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쁘와브르는 이 저서에서 중국의 농업경제를 관찰한 후 이를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리고 유럽의 농업상황과 비교하면서 모두 중국의 효율적이고 생산성 높은 농업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결론 지었다.429 그는 농업예찬론자였다. 그는 당시 중상주의 테두리 안에서 유럽 제국이 생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통상에 의한 경쟁에만 집중하여 정치경제정책을 운영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면서, 농업에 의하여 생산량을 크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점에서 쁘와브르는 중농주의 사상가 케네와 뜻이 통하게 된 것이다.

쁘와브르는 그의 저서에서 “중국은 나라의 기간인 농업의 번성은 간명한 윤리와 규정의 덕분인데 이 윤리와 규정은 자연과 정신이 명하는 바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기술하였다. 당시 서양의 규범적인 정부정책을 중국의 자연적이고 방임적인 정부정책과 비교하여 비판하면서 중국의 이러한 정부 자연적인 정책과 국민의 활발한 근로의식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백성들이 다른 사람을 속이고자 하는 교활한 자들이 만든 의도가 숨어있는 의심스러운 규정이나 정책을 따르는데, 이는 중국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430

그는 중국의 농업과 사상체계가 자연을 본받아 자연의 길을 따르고 있으며, 이러한 방식이 정부의 지지를 받아 정부는 개개인의 경제활동에 가능한 대로 최대한 간섭을 삼가고 세금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러한 중국의 정치경제 사상이 도교의 道와 무위개념에 응축되어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군주가 국민경제에 간섭하거나 이를 지도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백성들은 스스로의 길 즉 道를 따르도록 하는데 집중하고 있다고 관찰하였다.431

프랑스의 중농주의 사상가들은 매년 봄에 중국의 황제는 백성의 근로의식을 함양하기 위하여 솔선수범하는 차원에서 파종의 시범을 보이는데 이것은 자연을 존경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동양문명에서 자연에 대한 존경은 서양의 종교처럼 자연이 신성하거나 성스러운 것이라는 함의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중국 사상체계 내에서는 초자연적인 것을 신성시하는 철학을 존경하지 않았고 오히려 경멸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동양문명은 자연에 존재하는 법칙에 따라 작용하는 스스로를 규율 하는 체계가 최선의 방안이라고 보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두에게 최대한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지배자는 백성을 위하여 솔선수범하는 것 외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최상의 지배방법인데 이것이 바로 무위사상이다.

계몽시대 사상가들에게 무위사상의 중요성은 케네, 드구르네, 쁘와브르 등 중농주의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들은 법률과 정치경제 사상이 모두 자연철학과 무위사상을 본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역사학자 바실 가이(Basil Guy)의 말대로, 이들에게는 “입법자와 법이 모두 자연 질서의 원칙을 인정해야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인들의 통치 이론에 늘 영감을 주어 온 중국의 이상, 곧 무위를 따르게 되었다.”432

주

  1. 403

    Kissinger, Henry (2011-05-17). On China (p. xvii). Penguin Group. Kindle Edition.

  2. 404

    Fukuyama, Francis (2011-04-12). The Origins of Political Order: From Prehuman Times to the French Revolution (p. 105). Farrar, Straus and Giroux. Kindle Edition.

  3. 405

    특히 6세기말에 기독교에서 십일조 헌금이 법제화된 이후 교회의 재정권이 막대해지게 되었다. 종교개혁시기에도 신교 지도자들은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배척하였지 십일조 의무는 문제삼지 않았다. 중세시기에 외적이 침입하면 그들은 교회를 약탈대상으로 삼았으며,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시기에 시민들은 부유한 교회를 약탈하기에 이르렀다.

  4. 406

    Koselleck, Reinhart (2005-01-22). Futures Past: On the Semantics of Historical Time (Studies in Contemporary German Social Thought.) (p. 11). Columbia University Press. Kindle Edition.

  5. 407

    Koselleck, Reinhart (2005-01-22). 위의 책 p. 12

    주 406

    Koselleck, Reinhart (2005-01-22). Futures Past: On the Semantics of Historical Time (Studies in Contemporary German Social Thought.) (p. 11). Columbia University Press. Kindle Edition.

  6. 408

    Ibid., p. 14

    주 406

    Koselleck, Reinhart (2005-01-22). Futures Past: On the Semantics of Historical Time (Studies in Contemporary German Social Thought.) (p. 11). Columbia University Press. Kindle Edition.

  7. 409

    Ibid., p. 18

    주 406

    Koselleck, Reinhart (2005-01-22). Futures Past: On the Semantics of Historical Time (Studies in Contemporary German Social Thought.) (p. 11). Columbia University Press. Kindle Edition.

  8. 410

    A Study and Translation by W. Allyn Rickett, Guanzi 管子, Political, Economic, and Philosophical Essays from Early China, Volume 1, C & T Asian Translation Services, 2001, Boston

  9. 411

    A Study and Translation by W. Allyn Rickett, Op.cit., p3.

    주 410

    A Study and Translation by W. Allyn Rickett, Guanzi 管子, Political, Economic, and Philosophical Essays from Early China, Volume 1, C & T Asian Translation Services, 2001, Boston

  10. 412

    그리스 로마 고대 시대에 서양에서도 화폐를 경제활동에 활용한 예가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대부분 화폐의 금, 은의 함량을 줄여 국고를 충당하는 방법이었다. 함량을 낮추면 당장은 국고가 늘어나지만 결국 인플레이션을 촉발하여 국가 경제는 피폐되기 마련이었다. 중국 민족국가에서처럼 화폐를 경중지술에 활용하여 물가를 조절하는 방법과 달랐다. 이러한 경제정책은 근대에 이르러 서양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민족국가의 출범 이후에 가능해진 것이다.

  11. 413

    W. Allyn Rickett, Op.cit., p.9

    주 410

    A Study and Translation by W. Allyn Rickett, Guanzi 管子, Political, Economic, and Philosophical Essays from Early China, Volume 1, C & T Asian Translation Services, 2001, Boston

  12. 414

    Xunzi: The Complete Text. Princeton University Press. Kindle Edition. P.84

  13. 415

    韓非子 外儲說左上篇.

  14. 416

    See Wikipedia, Francis Drake, https://en.wikipedia.org/wiki/Francis_Drake

  15. 417

    이 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영국 함대에 의한 공격보다도 강한 폭풍에 의하여 패배하였다는 측면도 강하다. 당시 영국이 만든 기념 메달에 그러한 문구가 새겨졌다: “神이 바람을 보내주셨고, 적은 흩어졌다 (God blew and they were scattered)”. 마치 13세기 몽고 대함대의 일본 침공 시 “神이 보내준 폭풍, 즉 신풍, 가미카제”에 의하여 그 함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사례와 비슷하다.

  16. 418
  17. 419
  18. 420

    최근 우리는 정치경제, 즉 political economy라는 용어에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경제 철학은 서양이 17세기 이전, 침략과 약탈 시대 동안에는 사용하지 않던 개념이다. 민본주의라는 정치적 장치가 선행되어야 정치경제라는 철학적 영역이 생겨난다. 민본주의가 정치경제 철학의 저변에 깔려 있는 장치가 된다. 자유방임주의라는 개념이 서양에 생겨나기 이전 서양은 정부가 개인의 경제활동에 절대적으로 관여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중상주의로 인하여 개인의 경제적 자율을 주장하는 정책과는 정 반대되는 정부의 간섭체제가 서양을 수백 년간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국가주의를 대체한 것이 바로 자유방임주의다. 그리고 자유방임주의와 함께 서양에서 “정치경제” 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19. 421

    무위사상과 중농주의의 레세페르를 잇는 연구로는 J. J. Clarke, Oriental Enlightenment (London: Routledge, 1997), p. 50; Christian Gerlach, “Wu-Wei in Europe: A Study of Eurasian Economic Thought”, LSE Global Economic History Network Working Paper 12/05 (2005)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말 자체는 케네보다 앞선다. 케인즈는 이 말을 중농주의자들, 특히 드구르네와 케네에게 돌리는 전승이 “이 학파의 저술에서 거의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하였다(J. M. Keynes, The End of Laissez-Faire, 1926).

  20. 422

    Durant, Will (2011-06-07). Our Oriental Heritage (Kindle Locations 15169-15185). Simon & Schuster, Inc. Kindle Edition.

  21. 423

    Clarke, J.J. (1997-04-17). Oriental Enlightenment: The Encounter Between Asian and Western Thought (p. 50). Taylor and Francis. Kindle Edition.

  22. 424

    Clarke, J.J., op. cit., 50쪽

    주 423

    Clarke, J.J. (1997-04-17). Oriental Enlightenment: The Encounter Between Asian and Western Thought (p. 50). Taylor and Francis. Kindle Edition.

  23. 425

    케네는 동양사상에 심취하여 서양사상가들 사이에 “유럽의 공자(孔子)” 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동양사상을 높이 평가하였다. 케네는 1767년에 발간한 저서 “중국의 전제주의(Le Despotisme de la Chine)” 라는 책에서 중국의 앞선 정치경제상황을 설명하면서, “합법적 전제주의”(despotisme légal)를 주장하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여기서 전제주의 라고 한 것은 당시 케네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비판적인 함의를 가지고 사용한 것이 아니고 계몽군주의 뜻으로 미래지향적이고 긍정적인 뜻으로 쓰인 것이다. 당시 국민위에 군림하는 유럽의 여러 군주들에 비하면 중국의 황제는 아주 “계몽된” 전제군주로 표현되었다. 케네는 중국의 과거제도에 연유하는 교육중시와 성과주의를 당시 유럽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귀족 혈통제도와 비교하였다. 그는 이러한 중국의 교육제도와 함께 간명하고 효율적인 세금제도를 찬양하였다. 즉 중국의 정치윤리, 일반화된 교육제도, 레세페르-무위사상, 단일화된 세제에 매료되고 이를 서양에 도입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케네는 당시 프랑스의 군주 루이 15세와 가깝고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며, “루이 15세의 두뇌”(The Thinker of Louis XV) 라고 불렸다. 또 케네는 루이 15세의 주치의였다. 이러한 지위를 활용하여 중국의 황제들이 하는 것처럼 왕이 직접 봄에 경작시범을 보일 것을 주장하여 루이 15세가 밭에 나가서 경작을 하도록 진언하였고 이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24. 426

    Clarke, J.J. (1997-04-17). Op.cit., p.49

    주 423

    Clarke, J.J. (1997-04-17). Oriental Enlightenment: The Encounter Between Asian and Western Thought (p. 50). Taylor and Francis. Kindle Edition.

  25. 427

    From François Quesnay, Le despotisme de la Chine (1767), [translation by Lewis A. Maverick in China, A Model for Europe (1946)] p.1

  26. 428

    자유방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중상주의의 가장 중요한 실천자중의 하나로 치부되는 루이 14세의 재무상인 콜베르가 1681년 프랑스의 중요 사업가인 르장드르(Le Gendre)를 초치하여 가진 협의에서 있었다고 한다. 이때 콜베르 재상은 르장드르에게 프랑스 정부가 어떻게 하면 사업가들을 도와줄 수 있겠는가 하고 묻자, 르장드르는 “우리가 하게 하라(Laissez-nous faire, Let us do)”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 회합의 내용은 1751년 파리에서 출간된 경제잡지에 소개되었다. 프랑스 계몽사상가이자 정치가인 다르장송 (d’Argenson)의 논문에 의해서다. 다르장송은 이 논문에서 “자유방임(laissez-faire)” 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이 개념이 최초로 언론에 소개된 경우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상황들이 1774년 발간된 자유무역주의자 훼틀리(George Whatley) 가 작성하고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이 수정한 논문 “무역의 원칙(Principles of Trade)”에서도 소개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아래 문건에 소개되어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Laissez-faire

  27. 429

    “한 철학자의 여행, Voyages d’un Philosophe”, Paris, Hautbout, l’An V. 78-103 쪽

  28. 430

    Ibid, 88쪽

    주 429

    “한 철학자의 여행, Voyages d’un Philosophe”, Paris, Hautbout, l’An V. 78-103 쪽

  29. 431

    Clarke, J.J. (1997-04-17). Oriental Enlightenment: The Encounter Between Asian and Western Thought (p. 50). Taylor and Francis. Kindle Edition.

  30. 432

    Basil Guy, The French Image of China before and after Voltaire (1963), 350쪽; Clarke, op. cit., 50쪽에서 재인용.

    주 431

    Clarke, J.J. (1997-04-17). Oriental Enlightenment: The Encounter Between Asian and Western Thought (p. 50). Taylor and Francis. Kindle Ed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