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양의 관계주의 vs 서양의 개인주의
서양에서는 “개인주의”(individualism)라는 철학이 문명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이다. 개인주의는 대립, 독립성이 강하다. 개인주의 어휘의 반대말로 서양문명에서는 “전체주의”(totalitarianism) 또는 “집단주의”(collectivism)를 사용한다. 때로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표현은 모두 서양철학 체계에서 개인주의 중심으로 분석한 서양적 표현들이다.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측면에서 개인주의 반대로 전체주의나 집단주의를 사용한다.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정권이 전체주의다. 전체를 위하여 조화를 위하여 개인의 독립성을 포기한다는 차원에서 공동체주의를 사용한다. 스파르타 식 운영이 바로 공동체주의다. 이들은 모두 집단주의에 속한다.
집단주의는 집단을 위하여 개인을 희생하는 철학이다. 역사적으로 집단주의는 집단을 지배하는 자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로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치 독일과 소련 공산주의가 역사적 실증을 제시하고 있고,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이 이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상황을 감안한 서양의 사상가들은 개인주의의 문제점을 감안하여 새로운 사회철학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공동체주의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인간사회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철학이다. 공동체주의는 공동의 이익이나 목적이 인간사회에 가장 중요하다는 철학이다. 문제는 공동체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하면 공동의 이익이 중요해지고 개인의 이익은 덜 중요해진다. 집단주의는 역사적으로 공산주의의 실천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개인주의를 파괴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주장한 10계명은 모두 개인주의를 파괴하는 집단주의의 원칙이다. 스파르타식 소규모 공동체주의가 국가전체로 세계로 확대된 형식이다.
서양식 집단주의 사상은 동양문명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동양문명을 대표하는 도교, 유교, 불교의 철학 체제가 모두 집단주의를 반대하고 “관계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서양 사람들은 특히 개인주의가 아닌 것은 모두 집단주의로 통칭하는 경향이 있다. 관계주의라는 개념이 서양문명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양문명에서 서양의 개인주의의 반대말이 관계주의라는 것은 서양문명의 틀을 벗어나서 동서양 문명을 비교할 수 있어야 이점에 착안하게 된다.
동양 관계주의의 핵심이 서양 개인주의 핵심과 반대철학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동양사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애석하게도 대부분 서양 사상가들은 아직도 개인주의의 반대 개념은 집단주의로 이해하고 아직도 그렇게 학교에서 언론에서 가르치고 쓰고 있다. 서양이 헤겔리아니즘에서 벗어나야만 동서양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다.
동양의 관계주의는 상대에 대한 배려를 통하여 나의 이익을 지킨다는 뜻이다. 관계주의는 보완, 조화성이 강하다. 나와 남을 함께 배려하는 것이 핵심이다. 중요한 것은 서양의 공동체주의와는 다르게 관계주의는 개인의 독립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유교에서 내세운 윤리인 인(仁)은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인은 나를 지키면서 남을 생각하는 관계주의를 의미한다. 나 라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 라는 나와 남을 함께 고려하는 인간-인간 “관계”를 지칭한다.
서양의 개념에 관계주의라는 어휘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서양의 관계주의는 인문적인 표현이라기 보다는 과학적인 표현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관계주의라는 개념은 서양에서는 양자 물리학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다. 서양 물리학에서는 이미 백 년 가까이 사용하고 있지만, 서양의 철학적 개념으로 서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마치 양자역학에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이론이나 보어의 상보성이론이 양자역학에서만 표현되고 아직 서양 철학에서는 표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서양 물리학에서 표현하자 하는 관계주의는 동양철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관계주의와 아주 유사하다. 동양문명에서는 불확정성 이론이나 상보성 이론이 동양사유의 핵심인 관계주의라는 개념에서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다. 닐스 보어가 도교의 음양을 상징하는 태극도를 그의 가문 문장에 그대로 사용하면서 관계주의를 중시한 것이 그 한 예다.
이점은 서양의 현대물리학에서 대립론을 대체한 보완론이라는 개념들이 과학적으로는 정착되었으나 인문적으로는 아직 서서히 침투되고 있는 현상과 비슷하다. 동양의 관계주의는 개인주의에 치중하고 있는 서양 철학 체계에서 인간사와 관련하여 사용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서양 단어에 동양 인간사의 핵심인 관계주의를 표현하는 철학적 개념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이 개인주의라는 개념에 포괄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내가 중요하고, 내가 관련된 종교적 신념, 철학적 진실, 이데올로기적 진리의 관계를 중시하는 의미를 가진 개인주의가 중요하다.
동양 관계주의와 서양 개인주의는 서로 다른 철학적인 관점에서 사회와 개인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서양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철학이다. 대립과 독립의 성향이 강하다.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 개념은 서양 사회의 역사적, 경제적, 정치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동양 관계주의는 개인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속한 집단의 일원으로서 인식한다.
관계주의는 개인의 권리나 이익을 전체에 소속된 부속적으로 보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음양론에 입각하여 나와 남을 합친 모두의 권리나 이익을 나의 이익과 함께 관리하자는 사상이다. 개인의 행동은 그들이 속한 집단에 대한 영향력을 고려해야 한다. 거꾸로 집단의 행동은 개인에 비치는 영향력을 고려해야 한다. 이는 인간관계에서 상호 의존성을 중시하며, 개인과 집단적 관점에서 음양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완성과 조화성이 강하다. 이 개념은 동양 문화와 철학의 핵심인 음양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118 따라서, 개인주의와 관계주의는 각각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비롯된 철학적인 전제에 따라 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주의는 서양의 계시종교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서양은 神을 축으로 하는 문명을 발전시켰다. 神과 나는 개인적으로 직접 연결되어 있다. 神을 믿는 개인은 인간사의 다른 관련사를 모두 뛰어넘는 神과 나 사이의 관련성이 가장 중요하다. 고대 그리스·로마, 그리고 기독교 문명으로 이어지는 神 중심의 세계관은 “개인주의”를 지향한다. 인간과 세계를 神의 창조와 섭리 속에서 이해하고, 종교적·합리적 탐구를 통해 神의 문명을 만들어 나갔다. 따라서 서양 문명은 내가 믿는 신앙, 절대적 진리, 초월적 존재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서양의 개인주의에 대하여 동양은 관계주의를 사유로 하는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관계주의는 유교, 도교, 불교에 모두 퍼져 있으며 동양 문화 내부에 깊고 넓게 스며들어 있다.119 서양에서 사회의 운명을 개인주의를 창달하는 법률, 제도에 집중하고 있다. 서양사회에서 “윤리는 사회 각분야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etiquette)” 정도로 취급된다. 동양문명에서 법률보다 중요한 것으로 취급하는 “윤리”에 대한 배려는 서양문명에는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동양에서는 무위, 근검, 절약, 무욕 같은 윤리가 인간의 마음속에 중심으로 자리 잡게 만드는 문화가 있다. 이는 모두 관계주의라는 철학체계에서 나온 윤리다. 동양의 근로윤리는 이기심에 대한 관리에서 온다. 인간은 사회생활에서 교육과 자기수양을 통하여 근검절약을 추구해야 하고, 이기심이 탐욕으로 발전하는 것에 대비하여 동정심과 겸양을 체득해야 한다.
관계주의와 개인주의는 동서양이 파악하는 우주론에서 표출된다. 우주를 보는 인간의 사유는 이원적인 상황에 익숙하다. 우리는 자연과 인간사를 두개의 개념인 이원(二元)으로 표현하게 된다.120 양지와 음지, 남과 여, 해와 달, 여름과 겨울, 좌우, 상하, 전후, 과거와 미래, 정신과 본능 등이 표시하는 이원성이 그것이다. 동양의 변화론은 이원적 요소에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보완성”을 부여한다. 서양의 존재론은 이원적인 요소에 각자가 가지는 “대립성”을 부여한다. 道와 神의 체계를 따르는 보완과 대립, 이원성에 대한 분석 방식에서 동서양의 차이가 명확하다. 동양의 변화-보완론과 서양의 존재-대립론은 인간사에서 두 문명을 가르는 원리로 작용하게 된다.
이원보완론과 이원대립론에 철학적이나 도덕적 관점을 포함시키면 동서양 문명은 “음양보완론”과 서양의 “선악대립론”으로 구별된다. 두 원리는 충돌하는 경우도 많지만, 인간은 두 원리를 모두 필요로 한다. 변화론은 동적 시스템을 이해하는데 적합하며 윤리, 우주의 움직임, 현대 물리학을 설명하여 준다. 존재론은 정적인 시스템을 이해하는데 적합하며 법 체계, 수학적 법칙, 고전 물리학을 설명하여 준다.
이러한 차이는 동양문명을 “음”의 문명, 서양문명을 “양”의 문명으로 파악하면 아주 적절한 구분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동양의 개념을 사용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서양의 개념을 사용하면 음의 문명은 음양보완론, 양의 문명은 선악대립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음양론에서는 인간이나 물질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를 보완 내지 조화의 개념으로 접근하고, 선악론에서는 이러한 모든 관계를 대립 내지 독립의 개념으로 접근한다.
동양문명은 수용적-자율적-우회적, 상대적-관계적-관용적, 내향적-수비적-포용적인 특성을 보인다. 서양문명은 능동적-간섭적-적극적, 절대적-개인적-역동적, 외향적-배타적-진취적인 면의 특성을 보인다.
수용적-자율적-우회적 동양 vs 능동적-간섭적-적극적 서양
동양의 수용적이고 자율적이고 우회적인 특색과 서양의 능동적이고 간섭적이고 적극적인 특성은 동서양의 골든 룰에서도 잘 나타낸다. 공자의 가르침은 수용적이다. “남이 너희에게 하기를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 (논어 12장 안연 편). 예수의 가르침은 적극적이다. “너희가 남이 너희에게 하였으면 하는 대로 남에게 하라” (마태복음 7장).121 동서양은 남에 대한 태도가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서도 대조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서양에서는 성경에 나와있는 것처럼 사람이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이 적극적이고 행동주의적인 삶을 가르친다. 반면 동양에서는 도덕경에 나와 있는 것처럼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고 창과 문으로 방을 만들지만, 실제로 쓸모가 있는 것은 빈 공간”이므로 행동주의적인 삶을 경계하고 수용적인 삶을 권유하고 있다. 동양 사상은 물처럼 부드럽고 양보하는 성질을 권유한다. 도덕경에서도 물의 장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이는 물이 결국 강하고 힘있는 것을 이겨내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양의 수용과 우회성, 서양의 능동과 적극성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잘 나타난다. 동양에서는 잘 듣는 능력을 중요시한다. 부모가 자식들을 가르치는데 항상 선생님이나 남의 말을 잘 들어라 라는 교육이 첫째 번이다. 반면 서양에서는 잘 말하는 능력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말을 잘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을 나타낸다. “유창한 말과 멋있는 행위는 인(仁)과는 거리가 멀다.” “확고하고, 오래가며, 간단하고, 어눌한 언행이 인(仁)과 가깝다.” 는 논어의 가르침이 있다. 도덕경에서는 “성실한 언행은 세련되지 않았으며, 세련된 언행은 성실하지 않다. 선한 사람은 남과 다투지 않으며, 남과 다투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 아는 사람은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며, 지식이 많은 사람은 아는 것이 없다” 라는 가르침을 전한다. 도덕경은 같은 맥락에서 “양보하면서 극복하라, 굽히면서 꼿꼿이 서라, 비우면서 채워라, 낡아지면서 새로워져라, 작게 가지면서 가득 채워라, 많이 소유하면 혼란이 온다” 라고 조언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서양의 적극적인 성향에 대비되는 우회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 유위 보다 무위를 추구하는 동양에서는 서양처럼 당장의 효과가 아니라 때를 기다리는 행동 방법을 권하고 있다. 우회적이라는 표현은 행동을 즉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세(勢)의 움직임을 보고 때를 기다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소위 싹이 트는 때에 미리 행동을 하여 미래에서 뒤늦은 행동을 하지 말고 미리 예측한 결과를 기다린다는 행동 방법이다. 소위 위무위(爲無爲)의 행동 방법을 선호하게 된다.
도덕경과 성경 모두 겸손과 양보를 가르치고 있다. 성경의 산상교훈 중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문구가 있으며, 이는 겸손과 겸양, 그리고 핍박받는 자에 대한 위로가 된다. 마찬가지로 도덕경도 “치욕을 품위 있게 소화하라, 득실에 연연하지 말아라, 불운은 모든 인간에게 닥쳐오는 것이다... 만사를 겸손하게 받아들여라, 그러면 모든 것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겸양과 양보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주의도 함께 가르쳐지고 있다. 성경은 백 배의 결실을 맺는 씨앗(마태복음 13:8)과 가루 서 말을 온통 부풀게 하는 누룩(마태복음 13:33)의 비유로 적극적인 확장을 가르친다. 이러한 행동주의는 도덕경에는 없다. 자율과 자제력의 함양에 집중하고 있다.
도덕경과 성경 모두 물질적인 부를 경계하고 있다. 도덕경에서는 물질적인 부는 인성을 파괴할 수 있는 요소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성경에서도 “부자가 천당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경각심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이와 함께 “부를 지상에 쌓아 놓지 말고 천국에 쌓아 두라”라는 말로 물질적인 부에 대한 적극적인 행동주의도 요구하고 있다. 도덕경이나 유교에서 부를 쌓아서 좋은 일을 하도록 하자는 행동주의를 요구하는 글은 없다. 이재(理財)는, 개인이 부를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다스려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윤리 차원에서 취급되고 있다.
상대적-관계적-관용적 동양 vs 절대적-개인적-역동적 서양
불현론의 철학체계를 따르는 동양문명은 상대성과 조화의 특성을 강조하게 된다. 공자는 논어에서 “생각이 다르다고 이단으로 공격하면 손해가 되어 돌아온다” 라는 상대적이고 관용적인 견해를 펴고 있다. 시현론을 따르는 서양은 확실한 교리와 선악론을 제시하여 인간사에 이를 시행하도록 하고 있다.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라”. 이를 강조하면서 서양은 성경이나 교회는 잘못될 수 없다는 “무오설”을 주장하면서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특성을 보이게 된다.
결국 서양 문명에서는 각종 종교 분파가 생기고, 모두 절대성과 무오성을 주장하게 되면서 교리에 따른 투쟁이 불가피해진다. 유럽은 16-17세기 신구교 간에 전쟁에 돌입하게 되고 결국 잔혹한 전쟁 중 하나로 꼽히는 30년 전쟁을 치르게 된다. 비슷한 시기 동양에서는 청나라의 강희제가 1692년 용교령(容教令)을 내려 기독교의 포교를 허용하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서양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종교의 자유를 선언한 강희칙령을 너무 관대한 조치로 평가하고 있었다.
강희칙령은 동양 역사에서는 예외가 아니라, 오히려 전통적으로 유교, 불교, 도교 등 모든 종교의 유용한 가르침을 나라의 운영에 사용한다는 철학체계를 따른 것이다. 이는 결국 동양 문명이 보여주는 융합주의(syncretism)라는 철학적인 태도를 통해 잘 드러난다. 융합주의, 혼합주의, 혹은 절충주의 표현 등이 있지만, 장점들을 포함 한다는 의미에서 융합주의가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융합주의는 한 가지 결론에 모든 것을 걸고 그 진리를 추종한다는 시현론과 다르다. 이러한 융합주의의 특성은 절제를 강조하는 도교의 자세에 나타나 있다. “성인은 지나침, 극단, 너무함을 피한다”는 도덕경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이러한 융합주의 적인 동양의 태도는 서양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대륙인 미국을 건국한 청교도들 이후에 일어난다. 18세기에 드디어 미국 수정헌법 제1조에서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게 된다. 국교를 수립하는 것을 금지하고 자유로운 신앙과 종교행위를 보장하게 된 것이다.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것은 4세기였다. 1,400년이 지난 후에 서양에서 드디어 종교의 자유, 즉 “용교령”이 허용된 것이다.
“동양의 관계적 vs 서양의 개인적” 특성을 강조하는 문화적 차이는 일상 생활에서도 잘 나타난다. 동양에서는 개인의 주소를 쓸 때 나라 이름, 도시 이름, 구역 이름 순으로 쓴다. 개인의 이름을 쓸 때도 가족을 대표하는 성을 먼저 쓰고,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맨 나중에 쓴다. 전체 속에서 관계적으로 나를 찾아가자는 것이다. 개인은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유교에서 내세운 윤리인 인(仁)은, 두 사람을 가리킨다는 합성어(人+二)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나를 찾자는 뜻은 결국 상대의 사정을 이해한다는 컴패션(compassion)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동양의 “관계주의” (relationalism)의 핵심이다.
관계주의와 개인주의 라는 사유체계는 동서양의 문명속에 깊고 넓게 반영되어 있다. 서양에서는 개인의 주소를 쓸 때 구역 이름, 도시명, 국가명의 순으로 쓴다. 개인의 이름을 쓸 때도 개인의 이름을 먼저 쓰고 가족을 대표하는 성을 나중에 쓴다. 전체라는 융합체보다 개인의 존재가 중요시된다. 관계는 개인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이것이 바로 서양의 “개인주의” (individualism)의 핵심이다.
서양에서는 개인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자신의 이익과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시된다. 이에 따라 개인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법적, 사회적 제도가 만들어진다. 반면 동양에서는 개인은 전체와 개인의 관계로서 존재하며, 그 개인의 행동이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게 된다. 이는 개인의 개성뿐만 아니라, 개인의 소속과 상호관계도 중요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음양론에 따라서 전체와 개인이 모두 중요하다는 윤리를 추구하게 된다. 동양에서는 명함을 주고받는 것이 중요하며, 자신의 소속을 밝히는 것은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는 것과 함께, 전체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문화의 특성은 시간을 볼 때도, 동양에서는 전체적인 맥락과 상황을 고려하여 년도, 달, 날짜 순으로 시간을 파악한다. 관조적인 경향이 강하다. 이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당장의 행동이 아니라 전체적인 상황과 전후 관계를 고려하여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는 도교의 무위(無爲)사상과 관련이 있다.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그 테두리안에서 현재 할 일을 하자는 생각이다. 반면 서양에서는 당장의 행동과 순간적인 결정이 중요시된다. 이를 위해 날짜를 먼저 파악하고 그 다음에 월이나 년도를 따지면서 해당 날짜가 가지는 의미와 전체적인 상황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게 된다. 서양의 이러한 특성은 동양의 무위에 대하여 서양의 유위(有爲)적인 당장의 행위가 중요하게 된다는 사유에 근거한다.
내향적-수비적-포용적 동양 vs 외향적-배타적-진취적 서양
동양 문명의 내향적이고 서양문명의 외향적 특성의 대비는 일상적인 무의식적인 행동에서도 나타난다. 동양에서는 숫자를 셀 때, 펴진 손에서 손가락을 안으로 굽히면서 하나에서 열까지 센다. 반면 서양에서는 숫자를 셀 때, 꽉 쥔 주먹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펴면서 하나에서 열까지 숫자를 센다. 또 동양에서는 멀리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신호를 할 때 손을 아래로 젓는다. 반면 서양에서는 손을 위로 젓게 된다. 또 국이나 수프를 숟가락으로 떠 마실 때, 동양에서는 밖에서 안으로 숟가락을 움직여 국을 먹는다. 반면 서양에서는 안에서 밖으로 숟가락을 움직여 수프를 떠 마신다.
이러한 동양의 내향성은 구심력으로 서양의 외향성은 원심력으로 역사 속에서 표현된다. 서양은 외부환경이 항상 열려 있고, 확장되는 환경 속에서 민족이나 나라가 커진다. 서양문명이 동 지중해의 에게 해에서 출발, 지중해, 북해, 대서양, 태평양으로 진출하면서 정복과 확장을 거듭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마찬 가지로 서양의 모든 제국들은 외부로의 확장을 통하여 성장하고 소멸하였다. 반면 동양에서는, 특히 중국의 경우, 인구가 늘어나고 영토가 확장된 것이 외부 세력과 민족을 중국내부로 끌어들이는 구심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때가 많다. 몽골의 원나라와 만주족의 청나라가 그 좋은 예다. 이러한 차이는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미시적인 일상생활에서도 내향성과 외향성이 습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양에서는 수용적인 태도가 핵심으로 강조된다. 도덕경에는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은 지혜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맑음이다” 라고 주장한다. 왕양명의 철학에서도 “산 속의 도적은 깨뜨리기 쉬우나, 마음 속의 도적은 깨뜨리기 어렵다”는 것을 강조한다. 동양에서는 어려움이나 문제가 생기면 우선 자기를 돌아보고 문제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으려고 한다. 서양에서는 문제의 원인을 우선 외부에서 찾으려고 한다. 서양에서는 인간은 神을 본 따서 창조된 것이므로 문제는 다른 사람, 다른 나라에 있다고 생각한다. 동양에서는 인간은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모두 같으므로 문제가 있으면 자신이 문제의 소지를 없앨 수 있는지 살펴보고 그렇게 문제의 소지를 없애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해결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동서양 간의 내향적-수비적 vs. 외향적-진취적 대비는 스포츠에서도 나타난다. 동양의 전통 스포츠는 태권도, 유도, 쿵푸에서 보듯이 자기 방어, 자기 제어, 자기 통솔을 목표로 한다. 반면 서양에서는 그리스-로마의 검투사 시합에서부터 현대의 권투, 검술시합과 같이 진취적인 공격에 의해 상대방을 제압하는 승리를 목표로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1914년 벌어졌을 때 대부분의 유럽사람들은 전쟁의 발발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였다. 영국과 독일 국민들은 광장을 몰려나와 전쟁선포를 환영하였다. 이들은 모두 자기네 국가가 수개월내에 승리할 것으로 확신하였다. 수년간 승리 없이 전쟁을 치를 것으로는 상상하지 않고 있었다.122 동양에서는 전쟁, 특히 제국주의적 전쟁은 탐욕의 결과로 본다. 전쟁은 평화를 지키지 못하는 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고 보고 있다. 당연히 동양에서는 전쟁 발발보다 전쟁 종식을 기념한다.
2) 과학과 철학: 고전물리학-서양 사상 vs 현대물리학-동양 사상
동서양의 철학적 사유는 과학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나? 과학과 철학은 어떤 관계에 있나? 물리학은 고전 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으로 구별된다. 현대 물리학은 20세기의 양자역학에서 새롭게 발견된 사상 체계를 따르는 물리학이다. 이는 고전 물리학과는 전혀 다른 사상 체계 위에 구성된다. 고전 물리학은 인과율(causality)을 따른다. 현대 물리학은 개연율(probability) 위에 성립된다. 인과율과 개연율은 단순한 물리학 개념을 넘어 우주의 본질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한다. 인과율은 서양 철학의 기본을 형성하는 존재론, 대립론, 절대성을 구성하고 있다. 반면 개연율은 동양 철학의 기본을 형성하는 변화론, 보완론, 비확정성을 구성하고 있다.
뉴턴의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인과율은 우주의 상태를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기술할 수 있다고 본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어떠한 우연도 끼어들 틈이 없다. 현재의 상태를 정확히 알면 미래의 모든 사건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고전물리학에서는 우연이나 확률은 인간의 무지나 정보부족에 기인하는 것이며, 자연의 법칙은 완전히 인과적이라고 보았다. 고전물리학에서는 개연은 물리의 법칙이 아니라 통계적 수단에 불과했다. 개연율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입장이다.
양자 역학에서 중요시하는 개연율은 인과관계 없이 우연히 연속해서 일어나는 변화론적 현상을 자연현상으로 인정한다. 변화 즉 “흐름”이 자연 현상이다. 개연율은 불확실성과 우연성을 인정하는 세계관에 근거한다. 필연이 아니라 경향 또는 세(勢)의 흐름을 중요시하는 세계관이다. 인과율은 세계관에서 100%의 결정론을 주장하지만, 개연율은 70%나 80%의 확률로 결과가 나타난다는 세계관을 주장하고 있다. 개연율과 인과율이라는 과학적 사유는 동서양의 우주론에서 도출된다. 동양의 변화론은 개연율을 도출하고, 서양의 존재론은 인과율을 도출하게 된다. 존재론이 “무엇”을 추구한다면 변화론은 “어떻게 되어가는가”를 추구한다.
현대물리학에서는 고전물리학에서 주장하던 인과율, 대립론, 절대성을 부정한다. 인과율, 존재론, 대립론, 절대성에 의거하는 고전 물리학 대신 개연율, 변화론, 보완론, 비확정성이 새롭게 현대 물리학의 핵심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20세기 서양의 현대물리학의 과학적 발견이 바로 동양 철학에서 핵심으로 여겨온 사유인 개연율, 변화론, 보완론, 비확정성과 정확히 일치한다.123
우주의 변화론과 존재론은 바로 동양의 道와 서양의 神의 핵심 개념이다. 동양 철학에서 우주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역(易), 즉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 그 자체다. 서양철학에서는 우주는 고정된 실체인 존재로 표현된다. 서양의 인과율은 “A는 항상 B로 귀결된다”라는 불변의 법칙을 추구한다. 그러나 동양의 역 사상에서 주장하는 변화론에서는 A가 결과인 B를 낳는 과정에 수많은 변수, 즉 시간, 장소, 세의 움직임, 인간의 행위가 개입하므로, 필연적이기보다 개연적인 그럴듯한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역이 주장하는 변화가 기본값인 세계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완벽한 인과적인 예측이 아니라, 변화를 읽고 대응하여 미래를 가늠하자는 것이다. 주역의 괘를 풀이하는 것은 반드시 이렇게 된다는 예언이 아니다. “예언”은 신탁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주역에서는 현재 이러한 변화가 항상 움직이고 있으니, 미래에 이에 의거하여 이러한 개연성이 높다는 “조언”을 제시하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의 사유는 개별요소의 존재에 근거하는 속성이 아니라 전체적인 변화를 살피면서 정해진 인과적인 답보다는 유연한 개연성에 기초하는 변화성을 살피는 것에 초점을 둔다. 동양 사유의 핵심인 개연율은 무질서가 아니라 우주의 거대한 변화 위에 성립된다.
서양의 존재론(Being)은 “존재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과 神의 철학에 담긴 창조라는 존재에 입각하고 있다. 세상은 혼란스럽게 변하는 것 같지만 그 배후에는 영원 불변하는 실체인 존재(神)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은 플라톤의 이데아를 거쳐, 중세 신학, 근세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으로 이어지면서 서양사유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반면 변화론(Becoming)은 “모든 것은 흐름이다”라는 세계관을 주장한다. 변화는 동양 역(易) 사상의 핵심이며, 서양 헤라클리투스의 철학이다. 헤라클리투스가 간파한대로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인과-서양 기하학 vs 개연-동양 대수학
고대 과학의 사유 체계를 거시적으로 조감하면 결국 “형태와 논리의 기하학”과 “수량과 관계의 대수학”이라는 두 거대한 원천으로 집결된다. 이는 단순히 수학적 분과를 넘어, 인류가 우주의 질서를 파악하기 위해 선택한 두 가지 근본적인 인지적 경로로 귀결된다. 서양은 기하학을 통하여 공간적 존재론의 원천을 추구하였다. 고대 기하학은 세계를 정지된 공간 속에 놓인 완벽한 구조로 파악하려고 시도했다. 플라톤 등이 주장한 불변의 이데아가 그 철학적 표현이다. 눈에 보이는 사물은 변해도, 그 배후의 피타고라스 정리 등 기하학적 원리는 영원하다는 믿음이다. 이는 곧 서양문명의 핵심을 이루는 존재론의 기초가 되었다. 법과 증명을 통해 누구나 거부할 수 없는 보편적 진리를 세우려 했으며, 이는 서양의 합리주의와 인과율을 낳았다. 천문학을 천구의 기하학적 운동으로 해석하고, 물리적 세계를 입자의 기하학적 배치로 이해하는 근대 과학의 토대가 되었다.
동양은 대수학을 통하여 시간적 관계론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고대 대수학은 세계를 “변화하는 수치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였다. 이로써 동양은 역동적 변화론을 추구하게 된다. 대수학적 방정식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좌변과 우변의 균형을 맞추며 미지의 값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는 세상의 변화를 읽는 “변화론”과 맞닿아 있다. 변화론에서는 정적인 증명보다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절차와 술(術), 즉 알고리즘을 중시했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맥락을 수용하는 개연적 사고를 키웠다. 절기(시간)의 흐름을 계산하고, 사회적 자원(조세, 토지)을 분배하며, 만물의 유기적인 세(勢)를 파악하는 대수학이 동양적 과학의 원천이 되었다.
현대 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기하학’으로 우주의 인과율을 설명하고, 양자역학은 ‘대수학’으로 미시 세계의 확률적 개연성을 설명한다. 인지 인류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뇌는 세상을 형상으로 인식하는 기능과 순서와 관계로 인식하는 기능을 동시에 발전시켜 왔다. 결국 고대 과학이 기하학과 대수학으로 집결된다는 것은, 인간의 인지 구조가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뽑아낼 수 있는 최선의 두 가지 추상화 도구가 바로 그 두 가지 구도였음을 의미한다.124 서양의 기하학=인과율=존재론과 동양의 대수학=개연율=변화론이라는 도식은 동서양의 문명의 특질을 이해하는 방안이다. 서양의 기하학이 존재의 본질을 ‘정의’하여 불변의 법(Law)을 세우고자 했다면, 동양의 대수학은 변화의 맥락을 ‘운용’하여 유동적인 道(Way)를 찾고자 했다.
존재론은 인과율과 함께 대립론으로 연결된다. 변화론은 개연율과 함께 보완론으로 연결된다. 인과율은 도약을 배격한다. 그래서 서양은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라는 사유를 자연현상과 과학의 진리로 파악하게 된다. 도약하지 않는 것은 결국 존재 사이에 대립론을 주장하게 된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경구를 도출하여 근세 서양 철학 사상의 중심의 하나로 삼게 된다. 반면 동양의 변화론은 개연론과 함께 보완론을 주장하게 된다. 고정되어 있는 개체가 아니라 변화하는 개체는 서로 보완하면서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이는 동양 철학 사상이 주장하는 제반 사상의 융합주의와 음양 보완론으로 나타나게 된다.
서양의 과학, 특히 고전 물리학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 시기 전체를 걸쳐 인과율의 철학 체계 위에 세워져 있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그 철저한 인과론으로 뉴턴의 역학체계를 구성하는 고전물리학의 기반을 구성하게 된다. 뉴턴은 그의 고전물리학을 구성하면서 유클리드 기하학의 인과율에서 영감을 얻었다. 반면 동양은 기하학 대신 대수학에 집중한다. 서양의 기하학은 인과율과 연역적 필연성을 주장하면서 결정론적 사고를 문명의 주축으로 삼는다. 동양의 대수학은 개연율과 역동적 관계성을 주장하면서 불확정적인 사고를 문명의 주축으로 삼는다. 대수학은 정지된 기하학적 도형보다는 변화하는 수(數)와 그 계산 과정인 술(術)에 주목하게 된다.
서양의 과학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항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기하학에서 출발하였다. 서양 문명은 항해에서 생사를 가늠하는 기하학의 인과율을 따르게 되었다. 동양의 대수학은 민족국가의 중심인 생활 문제 즉 토지 측량, 조세 계산, 천문관측 등을 해결하기 위한 귀납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에 집중한다. 고정적인 진리보다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수치들 사이에 상관관계와 조화를 중시하는 개연적 사고와 맞닿아 있다.
서양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에 비견할만한 동양 대수학의 원전으로 “구장산술”(九章算術)이 있다. 이 책은 기원 전후 한나라 때 여러 학자의 지식을 모아 완성되었다. 후에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등에서도 산학(算學)을 가르치고 관리를 뽑는 시험의 교재로 쓰였다. 분수 연산, 비례, 방정식 등 다양한 수학적 주제를 다루었다. 구장산술의 마지막 장인 제9장에서는 직각삼각형, 피타고라스 정리 같은 문제도 다루었는데, 이는 대수학을 다루는 구장산술의 마지막 9장에서 다루었을 뿐, 서양의 기하학처럼 동양 사고의 중심개념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동양 과학의 핵심은 여전히 대수학이었다.125
그리스 기하학이 공리적, 연역적, 법적 성격을 중시했다면, 중국 대수학은 실용적, 귀납적, 알고리즘 중심으로 문제 해결에 강점을 보였다. 대수학에 집중한 구장산술은 추상적인 증명보다는 세금 계산, 토목 공사, 면적 측정 등 국가 통치와 실생활에 필요한 실무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초점이 있었다. 동양 대수학에서는 서양보다 1,500년 이상 앞서 음수(마이너스 숫자)의 개념을 사용하고 방정식을 풀었다.126 증명과 법적 성격을 가진 그리스의 기하학과는 달리 동양의 대수학은 알고리즘적 접근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문제를 풀기 위한 단계별 절차를 제시하고 있었는데, 이는 현대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알고리즘 개념과 맞닿아 있다.
서양에서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 역학체계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절대적으로 증명되는 철칙이라고 여겨졌다. 절대성에 의하여 이를 증명하는 방법으로 인과율이 설정되었다. 원인을 알면 결과가 필연적으로 예측된다는 논리다. 이러한 절대성과 인과율에 대한 인간의 신뢰는 특히 산업혁명 이후 19세기의 서양에서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인간의 정신과 이에 바탕을 둔 경이로운 과학의 발전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달성하자고 꿈을 키우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양의 긍정적인 인과율적 낙관론은 20세기 현대 물리학의 등장으로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현대물리학에 이어 인공지능(AI)도 서양의 인과성이 아니라 동양적 사유에 가까운 개연성과 대수적 구조를 따르는 관계성의 수학으로 설정되고 있다. 서양의 과학자들은 그 동안 인과율, 대치성, 절대성을 자연의 불변의 원칙으로 믿어왔지만, 양자역학에 기반을 둔 현대물리학의 과학적 발견으로 인해 이러한 가치들이 불완전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은 뉴턴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모든 주요 개념들을 산산조각 내어버렸다. 그 주요 개념들이란 절대공간·절대시간·최소입자라는 개념과 물리적 현상에 엄밀하게 적용되는 인과율, 자연에 대한 객관적 묘사가 가능하다는 생각 등이다.127
현대물리학에서는 철학 체계로서 개연성, 상보성, 불확정성을 주장하게 된다. 상보성은 보어가, 불확정성은 하이젠베르크가 주장하게 된다. 덴마크의 핵물리학자 보어(1885-1962)는 양자역학 분야의 “상보성 원리”(Complementarity Principle)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22년 원자 구조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서양의 과학과 철학이 중요시했던 인과론에 기인하는 대치성을 버리고, 개연론에 기인하는 상보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수립했다. 보어는 동양의 태극도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즉, 서양의 분리와 대결 같은 개념과 대칭되는 동양의 조화와 상보 개념을 음양의 태극도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128 그는 1947년 덴마크 코끼리 훈장을 받을 때 음양의 태극도를 자신의 문장(紋章)으로 삼았으며, “대칭되는 것은 상보적이다”(Contraria sunt complementa)라는 경구를 문장에 써넣었다.

문장에 그가 사용한 모토 Contraria sunt complementa (대칭되는 것은 상보적이다)가 들어있다
보어의 이러한 철학은 동양 태극도의 음양론을 따른 것이다
서양은 수천 년간 인과율에 기초한 “대칭되는 것은 대립적이다”라는 기본 개념을 자연과학과 인문학에서 철칙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양은 인과율, 존재론, 대립론에 의지하여 과학으로 자연을 정복하자는 기도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질서 이론”(chaos theory, 혼돈이론이라고도 부름)에 의하여 인간이 자연세계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꿈도 접어야 했다. 이 분야는 특히 기후의 예측과 관련하여 우리의 한계를 명확히 해주었다.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인간이 컴퓨터의 발달로 고도의 계산이 가능해졌고 복잡한 경우의 수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기후를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무질서의 가능성을 간과한 개념이라는 것이 곧 드러나게 되었다. 기후변화에서는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 이론, 즉 북경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워싱턴의 기후가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 기후 변화에서 단기 예측은 가능하지만 장기 예측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간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모든 과정 곳곳에서 항상 새로운 방향으로의 변화의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1901-1976)는 1932년 양자역학을 창시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고,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로 잘 알려져 있다. 양자 내의 움직임을 관찰한 결과 확정적인 위치를 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동시에 관찰자의 개입이 이러한 위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서양과학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인과론에 기인하는 절대성 같은 확정적인 개념을 버리고 개연성에 기인하는 불확정성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확립했다. 상보성과 불확정성 원리는 우주를 구성하는 물리적 실재의 근본이 비결정성을 의미할 수 있다는 세계관과 연계되어 있다.
뉴턴의 물리학은 완벽한 인과율 위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서양의 양자론은 수십 년 동안의 고민 끝에 서양인들이 그토록 소중히 간직해온 인과율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서양의 과학자와 형이상학자들이 자연 법칙으로 받들던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는 격언이 파괴되었다. 전자(電子)들이 실제로 기초상태(基礎狀態: ground state)와 여기상태(勵起狀態: excited state) 사이를 도약(quantum jump)한다는 놀라운 발견 아래 인과율은 포기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129 곧 서양문화를 떠받들던 강력한 기반인 점진성이, 전자들이 불연속적 에너지(discrete energy)를 가진다는 사실 아래 무너져버렸다. 이러한 전자의 움직임에 대한 발견에 입각하여 새로운 광선 레이저(laser)가 개발된다. 서양인들이 오랫동안 고민하던 빛의 본질에 관하여 파동과 입자의 두 가지 성질을 모두 가진다는, 서양의 개념에 의하여 이율배반적인 모순을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그리고 최소입자가 양성자·전자·중성자 외에도 수백 개의 소립자로 쪼개진다는 것을 발견하였을 때, 그들은 물질의 본질, 최소입자의 파악에 대한 신념이나 절대적 진리에 대한 신앙을 아울러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이 의지하고 있는 철학적 체계를 살펴보면 현대물리학이 제공하는 철학 체계는 실로 서양 사상사에 패러다임의 변천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계시종교로부터 시작하여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시현론,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칸트와 헤겔의 형이상학, 다윈의 진화론의 방식, 서양의 이데올로기와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 등이 기반하고 있던 철학 체계가 모두 서양의 고전물리학의 철학체계에서 형성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계시종교와 소크라테스 이후의 서양 철학에서 득세하게 된 ‘정신능력의 절대화’라는 주장은, 형이상학으로서 서양의 과학과 함께 종교에 필요한 철학적 이론으로 잘 들어맞았다. 그러나 절대성을 주장한 고전물리학은 현대물리학에 의하여 절대성이 파괴됨으로써, 2천여 년 동안 신학과 형이상학이 의지하여 왔던 절대성의 기초인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의 역학체계가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인과 vs 개연: 어느 것이 우주의 본질인가?
우리는 하나의 우주에 살고 있는데, 그 우주를 설명하는 법칙이 “규모”에 따라 정반대라는 점이 현대물리학에서 가장 큰 모순으로 드러난다. 아인슈타인은 미시 세계도 결국 우리가 모르는 미세한 인과법칙(숨은 변수)에 의해 돌아갈 것이며, 우주가 주사위 놀이처럼 확률로 돌아갈 리 없다고 주장한다. 보어는 양자역학으로 반박한다. 거시 세계의 인과율은 사실 수많은 양자적 확률들이 통계적으로 합쳐져서 나타나는 ‘착시’일 뿐이며, 근본은 확률이라는 것이다. 어느 것이 옳은가?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은 우주의 본질에 대하여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다. “고전물리학의 인과율과 결정론” vs “현대물리학의 개연율과 비결정론”은 우주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다.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논쟁에서 드러난 우주론과 세계론에 대한 토론이다. 두 개의 철학체계, 즉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의 철학체계는 별개인가 하나로 합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문제를 놓고 닐스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토론이 있었다. 현대물리학에서 확률적으로만 양자세계를 해석할 수 있다는 닐스 보어의 이론에 대하여 아인슈타인이 반대하면서 결정론적 인과율을 주장하였다. 아인슈타인은 두 가지 철학체계를 합칠 수 있는데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이론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현대물리학의 이론”이지만 “고전물리학의 인과율”을 지지한다. 상대성 이론은 뉴턴의 물리학에서 주장하는 절대시간과 절대공간 개념을 파괴하고 있지만, 동시에 뉴턴의 인과율을 우주 공간으로 넓혀서 증명하고 있다.130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뉴턴의 절대시간을 무너뜨렸다. 그는 시간은 관찰자의 속도와 중력의 크기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고 증명했다. “절대적인 동시성”을 부인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인과율을 고수했다. 시간이 상대적일지라도, 정보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전달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움으로써 인과율을 수호했다. 사건 A가 사건 B의 원인이라면, 어떤 관찰자에게도 A는 B보다 먼저 일어나야 한다. 원인이 결과보다 앞선다는 선후 관계를 보존한 것이다. 상대성 이론은 뉴턴의 역학을 특수한 경우(낮은 속도와 약한 중력)로 포함하는 더 넓은 범위의 이론이다. 상대성 이론은 뉴턴 역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초고속(광속에 가까운 속도)과 거대한 중력의 영역까지 설명하고 있다.131
“우주는 거대한 시계 태엽처럼 정교한 인과관계로 맞물려 돌아가는 시스템”이라는 신념을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이 과학의 언어로 증명하고 있다. 뉴턴은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이라는 무대 위에서 물체가 인과적으로 움직인다고 보았고,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조차 고정된 무대가 아니라, 물질과 에너지에 의해 휘어지고 상호작용하는 물리적 실체(시공간)라고 본 점에 차이가 있다.132 그러나 뉴턴과 아인슈타인 두 명 모두 철저한 결정론자, 인과론자였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에서 주장하는 개연율을 부정하면서 “神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의 이 유명한 발언은 물리학의 두 축인 고전 물리학의 인과율과 양자역학의 개연율 사이에서 그가 가졌던 철학적 신념을 잘 보여준다. 아인슈타인은 뉴턴 물리학을 포함하는 것을 넘어, 양자역학의 확률적 성질은 불완전하며 그 이면에 결정론적인 ‘숨은 변수’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양자역학자들의 불확정적 설명을 반박하면서 양자역학이 제시하는 “비결정론”에 대한 반대이론을 편다. 고전 역학에서는 원인을 알면 결과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지만, 양자역학에서는 입자의 상태가 확률적으로만 존재한다는 데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의 법칙은 근본적으로 명확하고 인과적이어야 하는데 우리가 확률(주사위)에 의존하는 이유는 양자역학이 아직 자연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이론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반대로 양자역학자 보어는 자연의 근본 원리 자체가 확률적이며, 측정 전까지 입자의 상태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아인슈타인은 ‘인과율이 지배하는 더 거대한 이론’ 안에 양자역학의 개연율이 하나의 현상으로 포함될 것이라고 가정했다.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주도한 양자역학은 이 뿌리 깊은 결정론에 균열을 냈다. 이들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이는 인간의 측정 기술의 한계가 아니라 자연의 본성이라고 파악했다. 미래는 단 하나의 결과로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여러 가능성이 확률적으로 중첩되어 있다고 설명했다.133
양자역학의 이면에서 숨은 변수를 찾아내 인과율로 귀결될 것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후대 과학자들에 의해 검증대에 올랐다. 벨(Bell)은 1964년 아인슈타인이 주장한 ‘국소적 숨은 변수’로는 양자역학의 예측을 모두 설명할 수 없음을 수학적으로 증명했고, 그 이후 진행된 수많은 실험은 아인슈타인의 결정론 대신 양자역학의 확률적 해석이 옳음을 지지했다. 2022년 노벨 물리학상은 벨의 정리를 실험적으로 입증한 과학자들에게 돌아갔다. 벨의 업적은 오늘날 양자 컴퓨팅, 양자 암호, 양자 네트워크 등 첨단 기술의 핵심 기반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대 물리학이 원자라는 ‘존재’를 쪼개고 들어갔더니 결국 나타난 것은 입자가 아니라 에너지의 ‘변화’였다는 사실에 이른다. 이는 서양의 존재론적 탐구가 양자역학에서는 결국 동양의 변화론적 결론에 도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양자역학이 태동한 20세기 전반에 걸쳐 서양 과학은 ‘동양의 대수학적 변화론’을 이해하게 된다. 이는 바로 알고리즘적 사고와 연계를 맺고 있다. 동양의 과학은 ‘증명’이 아닌 ‘해법’ 중심의 사고, 곧 술(術)을 지향했다. 서양의 기하학은 “왜 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인가?”라는 불변의 진리를 증명하는 데 집중한다. 이는 정의와 인과율의 영역이다. 그러나 동양의 대수학은 “이런 상황(토지 면적, 세금 등)이 주어졌을 때, 어떤 단계를 거쳐 답을 구할 것인가?”에 집중한다. 구장산술 같은 고전은 수많은 문제와 그 문제를 푸는 술(術)을 나열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알고리즘의 본질인 ‘절차적 해법’이다. 대수학은 고정된 실체가 아닌 ‘변화와 관계’인 동양의 역(易)사상을 중요시한다.
알고리즘은 정지된 도형이 아니라, 데이터가 흘러가면서 상태가 변하는 과정을 다룬다. 이는 변화론적 성격에 집중하면서 알고리즘으로 제시된 방안을 통해 상황에 따라 경로를 수정한다. 이는 고정된 존재론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 맥락에 따라 변하는 주역(周易)의 변화론적 사유와 닮아 있다. 대수학은 개연적 수용을 핵심으로 한다. 현대의 복잡한 알고리즘(AI 등)은 단 하나의 절대적 원인이 아니라, 수많은 변수의 상관관계와 확률(개연율)을 계산하여 최적의 해법을 찾아간다. 이는 동양의 대수학이 추구했던 ‘관계의 미학’과 연결된다. 대수학은 음양이 제공하는 두 개의 본질과 정보 처리의 기원을 공유한다. 가장 근본적인 지점에서 알고리즘(컴퓨터 과학)은 동양 철학과 맥을 같이한다. 라이프니츠는 주역을 중요시했다. 근대 수학의 선구자 라이프니츠는 이진법(0과 1)을 구상한 뒤 주역의 64괘를 보고 그 원리를 확신했다. “있음(양, 1)”과 “없음(음, 0)”의 조합으로 우주만물의 변화를 설명하는 주역의 체계는 현대 디지털 알고리즘의 형이상학적 토대가 된다. 기하학적 도형은 공간에 고정되어 있지만, 정적이지 않은 동적인 규칙을 따르는 알고리즘은 입력 → 처리(단계적 절차) → 출력이라는 시간적 흐름을 따른다. 대수학은 개연적 문제의 해결에 주력한다. 현대의 알고리즘은 단 하나의 정답을 증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해답에 도달할 것인가’라는 운용의 묘를 발휘한다.
결국 양자역학에서 보어의 견해와 아인슈타인의 견해 사이에서 지금까지의 발견은 보어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즉 양자세계의 개연율은 아인슈타인의 주장과는 달리 하나의 우주의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성이론은 계속 인과율이 우주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검토하고자 하는 우주의 본질, 즉 “인과 vs 개연”에 대한 토론은 결론 없이 계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현대 물리학의 등장 이후 과학이 직면한 가장 거대한 분열이자 화두가 바로 인과 vs 개연의 충돌 지점이다. 현재까지 과학에서는 거시 세계(우주)는 ‘결정론적 인과율’이, 미시 세계(양자)는 ‘확률적 개연율’이 지배하고 있다. 거시 세계는 상대성 이론과 인과론이 지배하는 “결정론적 세계”다. 거시세계는 우주, 행성,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일상적인 규모의 세계다. 여기를 지배하는 법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뉴턴 역학체계다. 원인을 알면 결과를 100% 예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행성의 궤도나 포탄의 낙하 지점은 초기 조건만 알면 오차 없이 계산 가능하다. 철학적으로는 “미래는 이미 과거와 현재의 인과관계 속에 결정되어 있다”로 결론지어진다. 반대로 미시 세계는 양자역학과 개연론이 지배하는 “비결정론적 세계”다. 이 세계는 원자보다 작은 전자, 광자 등의 세계다. 여기서는 지배 법칙이 양자역학이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확정할 수 없다는 불확정성 원리가 원칙이다. 전자가 어디에 있을지는 ‘확률(개연율)’로만 존재하며, 관찰하는 순간에만 그 위치가 결정된다. 철학적으로는 “자연의 본질은 우연과 확률이며, 여러 가능성이 중첩되어 있다”로 결론지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두 개의 세계관을 갖게 된다. 우리는 “인과론적인 거시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뿌리는 개연론적인 미시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과학과 철학 세계는 인과율-대립론과 개연율-보완론, 다시 말하면 서양의 철학체계와 동양의 철학체계를 모두 활용하고 있다. 즉 神과 道의 개념에서 발현된 동서양의 사유를 모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神과 道, 어느 것이 옳은 지 판단하는 “철학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은 우리의 실생활에서 적실성이 크지 않다. 神과 道의 개념은 동서양 문명 속에서 자기보존 원칙에 따라 음양론과 선악론으로 우리와 함께 공존하게 된다.134 철학적 분석에 의하면 음양론은 지속력이 있고, 선악론은 강력하지만 자가당착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자기보존에 충실한 본능 측면에서 보면, 선악론과 계시종교는 여전히 인간에게 필요성을 제공하고 있다. 결국, 선악론과 음양론은 우리가 고전물리학의 인과와 현대물리학의 개연,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한 것처럼, 동서양 문명을 통하여 인간이 우주와 인간사를 보는 두 가지 측면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3) 道와 神의 17-18세기 대화
우리는 지금까지 동양의 道와 서양의 神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동서양에서 道와 神의 개념에 담긴 우주관을 분석하고 이러한 우주관이 동서양에 생존하는 인간에게 각각 어떠한 문명을 부여하였는지 비교하였다. 이 두 가지 개념은 수천 년 동안 상호 연관 없이 각자 발생하고 성장한 것이다. 동서양은 기원전부터 실크로드를 통하여 교류하였지만 물자의 교류에 그쳤고 철학문제는 언어가 다른 수많은 국경을 지나며 편도 2년이 걸리는 상황에서 문명의 진수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16-17 세기 이후에는 동서양 직항 해로가 개척되면서 인간과 철학의 교류가 가능 해졌다. 드디어 동양의 道와 서양의 神, 두 가지 철학 체계가 만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동서양의 만남은 대항해시대(The Age of Discovery)에 나선 서양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실제로 서양의 세계정복을 이룩한 대항해시대에는 서양의 선교사들이 정복자들과 동행하였다. 유교와 도교 서적들이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에 의하여 서양에 소개되면서 서양 사상가들이 동양의 자연철학에 접하게 된다. 서양인들은 계시종교를 깊이 그리고 오래 섬기고 있어서 종교가 모든 문명에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유교, 도교를 종교라고 부르며 자연종교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유교나 도교는 종교라고 부를 아무런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 神도 없고 선지자도 없다. 일부 도교도 불교가 동양에 유입된 이후 민간신앙에서 도교의 인물들을 신격화하기는 하였지만 도덕경이나 도교 관련 경전에는 종교적 내용이 없다. 시기적으로도 서양은 계몽시대에 접어 들며 그들의 계시종교에 대비되는 동양의 “자연철학”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135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관심과는 별도로 역사적으로는 유교와 기독교의 충돌로 나타나게 된다.
서양에서 이신론가 퍼져 나갈 즈음, 서양은 포교의 열정을 따라 로마 교황청이 파견한 예수교 선교사들이 동양에 와서 기독교 정신을 퍼트리며 동양과의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서양이 이신론 시대 즉 17-18세기 계몽시대로 접어 들면서 동서양은 비로소 철학적으로 사상의 교류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136 이러한 동서양의 철학적 교류는 道와 神의 비교로 시작되어야 했는데, 당시 역사적 상황 때문에 노자와 모세 대신 공자와 예수의 비교가 되었다. 공자도 자연의 道를 인정하고 있었고, 기독교도 유대교와 함께 구약의 神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교와 기독교의 비교를 통하여 道와 神의 비교는 간접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道와 초자연의 神 간의 직접적 비교가 아니라 조상숭배와 神의 숭배 문제로 전환된 것이다.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사 문제가 서양의 최대 관점으로 부각하게 되었다.
바스코다가마의 해운로를 따라 동양에 도착한 서양의 첫 번째 유명한 선교사가 바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다. 마테오 리치는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하여 1610년 북경에서 죽을 때까지 중국에서 살며 중국어와 문화를 익혔다. 중국 황실의 고문 역할을 하면서 황실의 허락 아래 천주교를 통하여 서양의 神의 개념을 동양에 소개하는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중국어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유교를 배우게 되었고, 죽어서는 북경에 있는 불교사원에 묻혔다. 마테오 리치는 기독교를 통하여 서양사상을 중국에 전파하는데 열심이었지만, 논어 등을 번역하여 서양에 전파함으로써 동양사상을 서양에 전파하는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마테오 리치를 필두로 한 서양 예수회 선교사들이 동양사상을 서양에 퍼트리면서, 동양사상은 서양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크게 유행하면서 환영을 받게 된다. 당시 서양에서는 종교를 포함하여 서양의 전통을 재검토하고 모든 면에서 정신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주입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마침 이때 서양에 유입된 동양 사상이 도그마와 기적, 미신을 배격하고 정신적인 측면을 강하게 부각하였기 때문에 동양사상을 접할 수 있었던 계몽사상가들 사이에 커다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道와 神과의 대화는 두 방면에서 진행되었다. 동양에서 유교와 천주교 간의 대화와 갈등이 있었고, 서양에서는 넓은 동서양 문명 간의 대화와 갈등이 있었다. 당초 중국에서는 마테오 리치에게 천주교 포교의 길을 열어주었다. 마테오 리치가 포교 활동을 할 당시에 이미 동양에 시기적으로 서양사상이 퍼질 계기가 마련되어 있었다. 동양사상이 제설융합적인 면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모든 종교, 철학에는 마음을 개방한다는 자세가 중심이 되었다. 동시에 마테오 리치가 가지고 온 자명종 등 세련된 과학 기계와 세계지도에 대한 식견 등이 동양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과학과 기술 등이 크게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북경에 파견되어 있던 예수회 신부들은 유교의 조상숭배 제사와 기독교의 神에 대한 예배는 함께 공존할 수 있다고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포교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허용하자고 주장하였고 이를 통하여 동서양 문명 간의 대화를 시작하자는 시도가 있었다.
동양에서는 청나라의 강희 황제가 1692년 기독교 등 모든 종교의 포교를 허용하는 “관용칙령”인 용교령(容教令)을 내리게 된다. 이 칙령에 의하여 기독교에게 자유롭게 포교활동을 허용하게 되는데, 이러한 부분은 오히려 서양에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들이 신봉하고 있었던 불관용적인 유일신에 대한 사상 때문이었다.
이러한 서양종교의 불관용 사조와는 비교되는 동양의 개방적인 토양 위에 17세기에 중국에서는 동서양 문명간, 동양의 道와 서양의 神, 그리고 유교와 천주교 간의 대화를 진지하게 시작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마테오 리치 등의 노력에 의하여 서양측도 그들의 포교 활동에 있어서 동양사상과의 대화를 위하여 동양의 전통, 습관을 존경하도록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1659년 교황청 포교성성(布敎聖省)이 아시아로 떠나는 선교사들에게 내린 훈령은 이렇다:
열정으로 행동하지 말아라. 그 나라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제사 제도나 예를 바꾸려고 논쟁하지 말아라, 그러한 제사나 예가 기독교의 교리와 윤리에 분명히 배치되지 않는 한. 우리가 노력하여 프랑스, 스페인, 이태리, 기타 다른 유럽국가를 중국인들에게 복제하도록 가져간다면 이는 아주 어리석은 일이 된다. 또 그들에게 유럽국가처럼 되도록 강요하지 말아라. 그대신 그들에게 신앙을 주어라 그 신앙은 그들의 제사나 예를 부정하거나 손상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큰 문제가 되지 않는 한 그들의 것을 지키고 보호하라.137
그러나 이러한 예수교 신부들의 관용적 태도는 곧 필리핀에 거주하던 스페인 계의 도미니칸 신부들에 의하여 도전을 받게 된다. 그들은 주로 세가지 논점을 제시하였다. 공자에 대한 제사 금지, 조상에 대한 제사 금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예수회 신부들이 기독교의 神을 하늘(天) 또는 상제(上帝) 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하며 천주(天主, 하늘의 주인)로만 부를 것, 이 세 가지를 주장하였다.138
이러한 논쟁은 중요하게 취급되어 로마의 교황청이 관여하게 되었다. 북경의 예수교와 필리핀의 도미니칸 신부사이의 싸움에서 당시 교황 클레멘트(Clemente) 11세는 도미니칸 신부의 편을 들었다. 1704년 교서(papal decree)를 발표하였는데, 이 교서에서 중국인 기독교도에게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하고, 기독교의 神을 천(天) 또는 상제로 부르는 것을 금하고, 오로지 천주로만 부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클레멘트 11세는 1705년 이러한 교서를 강희제에게 전하는 특별 사절을 보냈다.
강희제는 특별사절을 어떻게 취급하였을까? 그는 이들을 마카오로 추방하였다. 이에 대하여 로마 교황은 중국의 제사와 예를 공식으로 금지하는 교서(papal bull)를 공포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이에 대하여 강희제는 1721년 천주교의 중국 내 포교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려 또한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강희제는 칙령내용에서 교황의 입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교황의 교서에 접하고 나는 서양인들이 정말로 마음이 좁음을 알게 되었다. 서양인 들과는 정신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커다란 문제에 집중하는 우리 중국식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국문명을 이해하는 서양인을 한 명도 만날 수 없으며, 그들의 언행은 정말로 믿을 수 없고 어리석은 것이다. 교황의 칙령을 보니, 그들의 종교는 정말로 동양의 작고 고집스러운 불교나 도교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그렇게 어리석은 주장을 그렇게 많이 담고 있는 문서를 본적이 없다. 지금부터는 더 이상의 성가신 일을 피하기 위하여 서양인들의 포교를 금하는 바이다.139
이러한 교황과 중국 황제 간의 이견은 곧 중국 내 천주교도와 신부 그룹 간에 논쟁으로 이어졌다. 중국인 천주교도들은 예수교 신부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반면 교황의 유교 금지 의견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중국내 도미니칸 신부와 주교 들이 지지하고 나섰다. 이렇게 국내에서 문제가 생기자 중국정부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드디어 1724년에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의 결정을 강화시켜 천주교를 금지하고, 북경 조정에서 일하는 신부들 외에는 모두 마카오로 추방하게 된다.140
계몽시대 말기의 사상가들은 계몽군주보다는 공화정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들이 고대 그리스-로마에 대한 연구를 활성화하면서 동양에는 없는 공화정을 원하게 되면서, 동양사상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적 시각이 확대되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는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의견이 악화되어 서양 선교사들을 추방하게 된다. 이러한 중국의 조치에 대해 서양의 지식인들은 중국을 더욱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당시 서양이 산업혁명의 성공에 의지하여 동양을 정복하는 현상이 크게 작용하였다. 특히 정신적 면에서 동양 문명이 부족하다고 평가하게 되었다. 이는 데카르트 이후 서양 대륙의 철학 체계를 이끌어온 정신 중심의 합리주의에 근거하게 된다.
마테오 리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천주교 포교는 16-17세기 중국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철학적으로 보면 기존 도교의 자연의 道 사상과 유교의 기적을 비롯하여 미신을 배격하는 사상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적을 행하고 의인화된 神이 크게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고 볼 수 있었다. 실질적으로 상기와 같은 로마 교황청과 중국 황실 간의 충돌이 실생활에 방해작용으로 다가왔다. 결국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의 대화, 그리고 동양의 道와 서양의 神 간의 철학 체계에 대한 대화, 그리고 상호작용의 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서양의 이신론(理神論)과 경험주의, 그리고 동양의 자연철학
道와 神 간의 대화에서 계몽시대 기간 중에 국가 간 대화에 장애가 있었지만, 동서양 철학사유에서 긍정적인 작용을 한 시기가 있었다. 서양에서 이신론의 등장으로 神의 기적 행위에 대하여 의문을 품으면서 기적을 인정하지 않는 동양의 자연철학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영국의 경험주의가 자연을 중시하면서 동양의 자연철학과 철학적 평행점을 공유하게 된다.
계시종교와 자연철학 체계간의 가장 큰 문제가 기적에 대한 평가다. 기적의 문제가 서양에서는 18세기에 근본적으로 제기되었다. 계시종교에서 기적을 초자연적인 神의 역할로 당연시한 시기가 거의 2-3천 년이 되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기원전 춘추전국 시대에 이미 기적의 문제가 도교, 유교에 의하여 나아가 순자에 의하여 확실하게 정리되었다. 이러한 동양 자연철학의 영향이 바로 서양의 이신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서양 사상계에서도 동양사상이 이신론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세계에서 유일한 이신론적 체계를 갖춘 문명이 중국인 것으로 보았으며, 동양의 문명은 교회나 계시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정신이라는 빛에 의거하는 이신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교의 윤리가 기독교의 가르침과 동일한 가치를 가지지만, 이는 계시가 아니라 정신에 기초한 것이라고 평가했다.141 이들은 동양의 유교와 도교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접근했다.
서양의 이신론은 17세기 말에 대두되어 약 100년간 서양의 사상계를 지배하게 된다. 이신론은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때 최고조에 달하여 프랑스 혁명 정부가 프랑스 공화국의 국교로 선포하기도 했다. 이신론은 계몽 시대 서양의 많은 사상가와 과학자의 기여에 의하여 발달되어 나왔으며, 미국을 건설한 지도자들도 대부분 이신론자였다.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미국 헌법은 이신론에서 나온 것이다. 이신론은 주로 대륙 쪽 사상가들에 의하여 촉진되었으며, 스피노자를 비롯하여 볼테르와 루소 등에 의해 만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계몽 시대까지도 종교의 힘이 강력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스피노자처럼 자신의 생각을 숨기거나, 볼테르나 루소처럼 자신의 생각을 용감하게 발표하고 체포와 박해를 피하여 도망 다니거나 해야 했다.142
대륙사상가들이 이신론을 배경으로 하여 서양의 계몽시대를 보내고 있을 때, 영국사상가들은 다른 철학적 패턴을 추구했다. 대륙의 합리주의가 아닌 영국의 경험주의를 중심 철학 사조로 내세운 것이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는 모두 전통 기독교의 神의 초자연성에서 벗어나 인간의 정신과 자연을 중심으로 하게 된다. 합리주의는 정신을 지식의 근본으로 간주하고 선천적 관념을 중시하며 연역적 추론을 바탕으로 과학, 형이상학, 도덕철학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영국의 경험주의는 모든 지식은 감각적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면서 자연속의 관찰과 경험을 중시하는 귀납적 추론 방법을 제시하게 된다.
합리주의는 정신에 의지, 인간의 앎은 “지적이고 연역적”이라고 주장하고, 기하학, 수학, 윤리, 형이상학에 의하여 증명된다고 주장했다. 경험주의는 인간의 앎은 “감각에 따라 귀납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며 본유(innatism)나 전통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본유나 전통을 멀리하기 위하여 “자연”을 기초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베이컨, 로크, 흄의 저서에 자연을 중심으로 경험주의를 주장한 점이 강조된다.
이런 차원에서 서양의 경험주의자들은 “자연을 절대진리”로 믿는 道의 동양문명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서양 사상가들에게 이미 종교의 힘이 크게 작용하고 있어서 실제로는 철학에 반영된 유사점은 크지 않다. 동양문명은 선입견 없이 수천 년 그대로 순수한 경험주의에 입각하여 道 사상에 도달한다. 道 사상은 불현론을 핵심으로 한다. 그러나 대부분 서양 경험주의자 들은 神의 존재를 믿는 시현론자 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철학은 神과 자연(道)을 비교하는 거대 담론의 차원이 아니라, 인식론의 차원에 자연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경험주의자들은 인식론에서 백지론을 주장하였다. 백지론은 “숙명안에서 자유”라는 인간본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동양문명이 파악한 인간본성에서는 인간의 가능성을 “본능”의 차원으로 제한하는데 중점이 있다. 그러나 백지론에 의하여 인간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면을 거부한다. 오히려 백지론으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측면에서는 합리주의와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므로 서양 경험론자들은 동양문명이 주장하는 불현성, 개연성, 상대성, 상보성이라는 원칙적인 특성을 거론하는 경지에 이르지 않았다. 당연히 그들의 생각은 시현성, 인과성, 절대성, 대립성이라는 서양문명의 거대 담론속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커다란 테두리안에서 서양 경험주의자들은 철학에서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인식론(epistemology)을 토론한 것이다. 서양 인식론에서는 상기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외에 회의주의(skepticism)를 살펴볼 수 있다.
회의주의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인식을 의심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고대에는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의심하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스콜라스티씨즘 과 칼빈주의를 의심하고, 근세에는 합리주의를 대표하는 데카르트 주의를 의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서양의 회의주의는 동양의 불현론과 유사한 점도 있다. 불현론은 절대진리를 믿지만 이를 인간이 표현하는데 대하여 반대하는 것이다. 서양의 회의주의는 표현뿐만 아니라 절대진리의 존재까지 의심하는 데서 동양의 불현론과 차이가 있다. 이런 점에서 서양의 근세철학으로 회의주의는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 철학의 불현론과 같은 회의주의와 차이가 있다. 이때 그리스 철학자들은 동양의 불현론과 같이 절대성의 존재가 아니라 표현을 문제 삼았다.
17~18세기 계몽시대에 영국은 합리론에 대한 반발로 경험론을 주장하면서, 경험론은 자연을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철학을 펼치게 된다. 영국의 사상가들은 자연주의와 경험주의를 통하여 서구 계몽시대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18세기 사상가 흄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종교에 관한 한 보수적으로 남아있었다. 베이컨(1561-1626)은 자연의 중요성을 명확히 주장하면서도 성경과 신앙과는 충돌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인간의 모든 지식은 모두 자연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관찰을 통한 경험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성경과 자연은 모두 하나님의 계시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방법을 비판하고 관찰과 실험을 통한 귀납적 경험주의를 주창하였다. 로크(1632-1704)는 인간의 인식은 후천적 경험을 통해서 형성된다고 경험주의적 백지론과 함께, 자기결정권을 가진 인간이 자유주의를 지향하게 된다는 사회계약론을 주장하였다. 이는 미국 헌법의 창조이념에 기여했다. 동시에 그는 계몽주의의 모토인 관용을 주장하면서도 정부는 무신론자를 관용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성서에 관한 한 천지창조와 기적을 포함하여 그대로 믿고자 하였다.
영국에서 이러한 종교의 힘은 계속되었다. 사후에 철학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 흄(1711-1776)도 그의 회의주의적 종교관 때문에 교수직에 임명되지 못했고 계속적인 피해를 당하고 있었다. 흄은 인간의 정신이 神의 본질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제한적이며, 종교적 믿음은 정신보다는 감정과 습관에 기반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대표저작 “자연종교에 대한 대화”도 사후에 익명으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그의 윤리학과 인식론은 당대에서 평가받지 못했지만 사후에 독립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전통적 유신론자, 자연종교론자, 회의론자 3인의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skeptics를 회의론자로 표현하면서 흄의 철학을 대표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자에 대한 평가에서 설명한대로 서양의 skeptics는 동양의 자연철학자(natural philosophy)와 거의 같은 철학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143 이런 차원에서 흄은 계시종교 체제내에서 경험주의 철학을 펼친 베이컨, 버클리, 로크와는 다른 면이 있다. 흄은 계시종교로 부터 자유로운 자연철학을 펼친 철학자가 된다.144 철학 사유의 측면에서 흄의 철학은 동양의 자연철학과 “사상적평행” (parallelism)을 이룬다.
4) 동서양 사유의 만남: 공자-볼테르, 노자-루소, 순자-스피노자
동양과 서양의 사상가들 중에서 동서양 문명을 접목시키는 역할을 한 사람들이 있다. 스피노자(1632–1677), 볼테르(1694-1778), 루소(1712 – 1778) 세 명이 대표적이다. 서양의 스피노자, 볼테르, 루소는 직, 간접으로 동양의 순자, 공자, 노자와 같은 철학체계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이를 비교하면 흥미로운 동서양의 道와 神 철학체계의 만남을 발견하게 된다.
스피노자는 자연(道)와 神을 동일시한 놀라운 사상을 편 철학자다. 그의 철학 체계는 도교, 그리고 특히 순자의 철학체계와 너무나 닮아 있어 구분이 어려울 지경이다. 스피노자가 영향을 받은 유대 카발라(Kabbalah) 신비주의는 道와 아주 유사한 개념을 내세웠다. 카발라에서 중요시하는 개념 중에서 道와 통하는 기본 개념이 있다. Ein Sof 와 Sephirot 개념이다. 이는 “무한한 존재”와 “만물속에 내재”해 있다는 개념이다.145
神은 무한하고 형언할 수 없는 존재다. 어떤 개념으로도 규정할 수 없다. (Ein Sof)
神은 세계 밖의 존재가 아니라, 세계 안에 내재하여 만물 속에 존재한다. (Sephirot)
이러한 설명을 바로 동양의 道의 자연철학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神 또는 자연” (God or Nature) 이라는 유명한 사상은 바로 카발라로 부터 유래한다. 이 철학에 의하면 서양 계시종교의 神과 동양 자연철학의 道는 같아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서양 철학자 중에서 프랑스의 말브량슈나 독일의 헤겔은 스피노자가 동양 철학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해석하게 된다.146
우리는 스피노자에 이어 볼테르와 루소를 통하여 道와 神 간의 갈등과 조화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동서양 문명의 스피노자는 시대적으로는 볼테르나 루소보다 먼저였지만, 그의 사상은 이들보다 더욱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만약 볼테르나 루소도 스피노자처럼 자연과 神을 동일시했다면, 당시 18세기 서양 사상계의 권력구조로 보아 그들의 철학적 활동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을 것이다. 당시 서양의 상황은 이신론적 관점까지는 받아들여질 수 있었지만, “자연 그 자체가 바로 神”이라는 주장은 배척의 대상이 되어 격렬한 반대를 받거나, 너무 앞장서 있어서 철학적 무관심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동서양 사유의 진실한 비교는 서양이 스피노자의 철학을 충분히 이해하기 까지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작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서양 철학자들은 아직도 이를 계속 피하거나 두려워하고 있다. 서양의 시현론을 송두리째 뒤집어 보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사에서도 스피노자 이후의 서양 철학자들은 스피노자의 “자연과 神은 같다”라는 핵심 사항을 피하면서 동양의 자연철학에 접하게 되었다. 소위 이신론의 테두리내에서 서양의 계시종교와 동양의 자연철학 체계를 분리하여 접하게 된다.
스피노자에 이어 볼테르와 루소가 동양의 자연철학과 유사한 철학체계를 펴게 된다. 볼테르는 유교의 자연철학에서 영감을 받았고, 루소는 도교 사상과 아주 유사한 철학 체계를 표현하게 된다. 루소와 볼테르와 동양 사상의 유사점에 대한 관점은 미국의 철학자 윌 듀란트도 지적하였다:
루소의 철학은 너무나 중국의 도교 철학자들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루소를 노자와 장자와 비교하게 되곤 한다. 그것은 볼테르가 공자와 맹자와 너무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들과 비교되는 것과 같은 이유다.147
볼테르는 공자를 공개적으로 숭배하였고, 루소는 도교의 철학체계와 아주 유사한 사상을 펴나갔다. 대부분의 서양 사람과 대부분의 동양 사람들은 이러한 관점을 놓치고 있다. 이신론의 시대에 서양 철학자들은 서양의 계시종교의 문제점 들과 씨름을 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비하여 동양의 자연철학이 제시하는 철학체계에서 많은 영감을 받고 있었다.148 스피노자의 계시종교에 대한 혁명적인 철학 체계를 고려하면, 루소의 활동의 동서양 비교면에서 제한된 범위는 볼테르와 유사한 점이 있다. 스피노자의 자연신관은 당시의 사상계에서는 神을 부정하는 것, 즉 무신론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루소도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고 활동했을 것으로보인다. 그 결과 루소는 神을 직접 부정하기보다, 神이 창조한 인간이 생성한 문명 자체를 비판하면서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의 문명 비판은 당시 종교와 세속의 권위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그의 저서는 여러 차례 금지되었다. 루소 역시 볼테르처럼 사상의 자유를 위해 여러 곳으로 피신해야 했다.
스피노자는 그의 윤리학에서 “자연이 곧 神”이라고 명확히 주장하며 체계적인 사상을 구축하였다. 이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道로 이해하는 도교의 사상과 큰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반면, 루소는 인간에게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라고 강조하였지만, 스피노자와는 다르게 종교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여기서 루소와 스피노자를 구분하는 중요한 점은, 루소가 서양 문명의 기반이 바로 神과 종교였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루소가 “神과 자연이 동일하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한 적은 없기 때문에 루소의 사상과 도교 사상 사이의 유사성이 스피노자와 도교에서 표현하는 자연철학의 유사점처럼 명백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의 본질을 중심으로 하며 문명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점에서 도교의 사상과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사성이 거의 지적되지 않은 것은, 서양의 사상가들이 도교에 대해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동양의 사상가들은 루소를 서양 철학사의 맥락에서만 이해하려 하였고, 동양 사상, 특히 도교의 사상과의 비교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루소만큼 도교와 유사한 생각을 가진 서양 사상가로는 스피노자를 제외하면 찾기 쉽지 않다. 따라서 루소를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서양인에게 도교를, 그리고 동양인에게는 루소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볼테르 와 공자: “神은 인간의 희생이나 기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볼테르는 유교 사상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서양의 계몽시대를 계도하기 위하여 동양의 자연철학을 많이 활용하였다. 그는 희곡 “중국인의 고아” (프랑스어: L'Orphelin de la Chine, 영어: The Orphan of China)를 1755년에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동양의 자연철학적인 도덕적 질서를 서양에 설명하고자 했다. 이 저서는 중국 원나라 때 지어진 희곡 “조씨 고아”(赵氏孤儿)를 각색한 것이다. 줄거리는 진(晉)나라 경대부 조씨 가문이 몰살당한 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기가 성장하여 가문의 원수를 갚고 정의를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다. 여기서 볼테르는 유교적 자연철학에 입각한 동양의 철학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이러한 철학이 탈 계몽시대에 서양이 배워야 할 방향으로 설정했다.
볼테르는 “기도와 제사, 희생의 필요성은 神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는 동양의 공자의 생각과 유사하다. 공자는 神에 대한 숭배가 인간에게 본질적이지 않으며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므로 인에 집중할 것을 주장하였다.
공자: 귀신은 존중하되 멀리하라(논어, 옹야 20장). 군자는 밥 한 끼 먹는 사이에도 인을 어기지 않는다. (논어, 이인 5장)
볼테르: 神은 우리의 희생도 기도도 전혀 필요로 하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할 필요를 느낄 뿐이다. 神을 숭배하도록 한 것은 神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인 것이다.149
볼테르는 유교철학을 직접 높이 평가하였고 글로 남기고 있다. 볼테르는 공자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유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유용한 정치윤리의 교훈을 집대성하고 있다고 보았다. 볼테르는 공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우리 서양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우리는 동양의 저쪽 끝에서만 현자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단순하고 거창하지 않고 사기스럽지도 않으며, 그리스인들이 겨우 지혜가 무엇인지 구별하게 되고, 그 이외의 북쪽 유럽 사람들은 글자가 무엇인지도 모를 때인 BC 600년에 이미, 행복하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바로 공자다. 고대 스승 가운데 공자는 다른 사람을 속이려고 하지 않은 단 한 사람이다. 전세계를 통틀어 공자 이후 누가 그보다 더 아름다운 행동규범을 준 일이 있는가? “국사는 집안일을 돌보듯 돌보아야 한다. 집안일은 솔선수범함으로써 돌볼 수 있을 뿐이니·······” 인간에게 이보다도 더 유용한 진리를 가르친 스승은 존재하지 않음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150
볼테르는 유교와 도교로 대표되는 동양의 자연철학에 대하여 서양의 계시종교와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중국 지식인들의 종교 또한 존경할 만하다. 아무런 미신도, 어리석은 전설도, 정신과 자연에 위배되는 아무런 독단도 그들에게는 없다.151
볼테르는 자신을 이신론자로 칭하였다. 볼테르의 저작들은 대부분 종교의 불관용, 도그마, 비이성적 요소에 대한 비판에 중점을 둔 것이다. 반면에 루소는 문명 자체에 대한 다양한 이론과 해결책을 제안하였다. 볼테르는 정신을 중시하였고, 루소는 감성을 중시하였다. 그 둘은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경쟁하는 관계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루소는 민중과 함께 혁명적인 기질의 사람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으며, 볼테르는 지식층에서 큰 지지를 받았다. 루소는 문명 차원에서 인간의 타락과 불평등을 분석하고 대책을 제안하였다. 볼테르는 주로 종교와 철학 차원에서 관용과 정신을 강조하며, 불관용과 비이성적 미신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였다.
서양의 계몽시대 동안 동양문명의 합리적이고 정신적인 면모는 서양 사상가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특히 정치윤리사상 분야에서는 라이프니츠와 볼테르가 동양문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그들의 저술에 반영하였다. 정치경제사상 분야에서는 케네(Quesnay)와 뱅상 드구르네(Vincent de Gournay)가 동양의 도교와 무위사상과 같은 개념들을 소개하면서 그 영향을 영국의 아담 스미스에게 전달하였다.
이신론자들이 의문을 품은 문제는 기적을 행하는 神이다. 기적은 자연현상을 위반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적을 행하는 神은 자연과 분리된, 자연을 초월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 신화는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며 어느 정도로 초자연적인 존재로 인식되게 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인간의 인식 속에서 인간은 神과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부각시키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게 된다. 그들은 神으로 하여금 자기를 위하여 자연에 위배되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게 하길 원하게 된다. 이신론자 중에서 이러한 교리에 반대한 사람의 대표자가 바로 볼테르다. 그래서 볼테르는 서양의 계몽시대의 대표 사상가로 평가된다.
계몽시대 이후 이신론은 철학체계로 고유의 자리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기적, 계시, 교회 권위를 부정하고 자연과 정신을 통해 神을 이해하려 하면서 현대의 종교적 관용과 합리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많은 이신론자들이 무신론, 불가지론, 세속주의자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에도 이신론의 영향이 크다.
기적의 문제 이후에, 서양의 神에 대한 이신론의 주요 문제는 선악의 문제였다. 서양인들은 신을 정의롭고 선한 神으로 만들어버렸다. 정의롭고 선한 것은 인간이 필요로 할 뿐이지 神은 정의와 부정, 선과 악의 피안에 있어야 한다고 보는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선과 악은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궁극적으로 좋고 나쁜 것으로 귀착된다.152 자연의 현상인 태풍, 홍수, 가뭄이나 추위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것을 좋거나(원수나 적에게 닥쳤을 경우) 나쁘게(나에게 닥쳤을 경우) 느끼는 것은 인간뿐이다. 러셀(1872-1970)은 “우리가 선악의 개념 대신에 좋고 싫음의 개념을 사용한다면,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153
서양의 사상가들은 유대-기독교의 일신론적인 神에 대한 정의와 이신론의 문제점을 동시에 인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제시한 대안은 모두 神의 개념을 중심으로 했다. 神 대신 자연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을 꺼려 했기 때문이다. 천지창조 후 인간의 세계에 개입하지 않는 神을 이신론의 神, 모든 것과 동일한 자연을 대표하는 神을 범신론의 神으로 부름으로써, 神의 개념 없이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거나 정의할 수 없었다. 심지어, 아무런 神에 대한 개념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 관점을 “무신론”이라 명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154
볼테르는 스피노자의 자연신관, 즉 “神이 곧 자연”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이신론의 관점에서 서양의 전통과 종교를 비판하였다. 18세기의 서양은 아직 스피노자의 자연신관을 완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볼테르는 이신론의 관점에서 비판을 하였다. 스피노자의 자연신관이 “무신론”으로 간주되던 상황은 18세기 계몽시대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신론의 주장만으로도 볼테르는 위험해져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사상의 자유를 위해 여러 곳으로 피난을 취해야 했다.
서양에서는 정통파 기독교와 이신론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신론을 주장하면서, 정통파 기독교의 도그마, 기적, 예배 등 비이성적인 요소를 공격하며 관용을 주장한 사람 들은 계몽사상가 들이었다. 서양 자체에서 개발된 이신론으로 서양은 동양문명을 이해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당시 서양에 소개된 동양문명은 공자 사상이었다. 볼테르는 공자의 자연철학사상에 매료되었다. 그 시대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동양의 관용적인 종교관과 정신적인 윤리체계에 대해 긍정적인 관심과 평가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가 정신적인 윤리체계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진 이유는 구교와 신교 사이에 존재한 사생결단의 혐오 때문이었다. 16-17세기에 서양, 특히 프랑스의 사상가들은 극단적인 종교적 불관용의 환경에 맞서야 했다. 구교는 종교재판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정통성을 유지하려 했다. 특히 종교개혁이 시작된 이후로 신교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르네상스 시기가 끝나며, 서양에는 처음으로 관용칙령이 발표되었는데, 그것이 1562년 프랑스의 샤를르 9세 왕이 섭정을 행하고 있던 캐서린 드 메디치에 의해 선포된 생 제르맹 칙령(Edict of Saint-Germain)이었다. 서양에서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된 이후로 거의 1,200년 만에 나온 첫 관용 조치였다. 그러나 이 칙령이 발표된 직후 구교 세력에 의해 신교도들이 대량으로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나, 관용칙령은 실질적으로 무의미 해졌다. 이어서 프랑스에서는 신교와 구교 사이에 무자비한 프랑스 종교 전쟁(1562-1598)이 36년에 걸쳐 벌어졌다. 이 전쟁을 마무리하며, 프랑스 내의 신교도인 위그노(Huguenots)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는 칙령이 발표되었는데, 그것이 1598년 앙리 4세가 내린 유명한 낭트 칙령(Edict of Nantes)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체에서는 신-구교 간의 전쟁이 확대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종교전쟁, 최초의 세계 대전”이라고 불리는, 유럽의 모든 국가가 신-구교로 나뉘어 대결한 참혹한 30년 전쟁(1618-1648)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전쟁을 종식시킨 유럽은 드디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종교를 초월한 민족국가(nation state)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국가들 사이에서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역할이 부각되어, 계몽주의 사상의 실현에 기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유럽의 관용주의에 반대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루이 14세가 발표한 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이 1685년에 선포된다. 이 칙령은 1598년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던 낭트 칙령을 폐지하는 내용이었다. 이 결과 프랑스에서는 수십만 명의 신교도 위그노가 프랑스를 떠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300년이 지난 1985년에는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퐁텐블로 칙령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프랑스의 신교도 위그노 들에게 사과하는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그런데 루이 14세의 불관용 조치는 왕의 편파적인 행동이고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아래서 동양문명에 대한, 특히 관용적인 종교, 정신적인 윤리관, 계몽전제군주인 중국의 황제들에 대한 비상한 관심이 프랑스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프랑스가 다른 어떤 서양국가 보다 더 신-구교 간의 불관용적인 투쟁의 피해를 많이 보고 있었기 때문에 관용철학에 대한 목마름이 그 만큼 컸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서양에서 이신론이 발달될 즈음, 동양사상이 유럽에 유입되어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이신론은 형성과정에서 동양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신론을 통해 서양이 동양의 자연과의 접근 방식에 크게 다가갔다는 점이다. 즉, 인간이 神을 매개로 하지 않고 직접 자연에 더 가깝게 접근하게 만든 것이다. 동양의 道와 같이 하나의 생동하는 철학과 윤리 체계로는 발전하지 않았지만, 서양의 이신론은 동양의 도교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해석에서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볼테르는 동양에 대한 평가가 잘 알려져 있지만, 루소나 스피노자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은 도교나 동양의 道 사상에 대하여 직접 이를 접하고 영감을 받았다는 증거나 내용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자연철학에 관심을 표하면서 펼쳐낸 사상체계는 놀라울 만큼 동양 사상과 닮았다.
루소 와 노자: “자연으로 돌아가라”
루소는 프랑스의 구체제(Ancien Regime)가 표방한 정치사회적 상황을 비판하면서 문명이 인간을 자연에서 멀어지게 했다고 외쳤다. 흔히 “자연으로 돌아가라”로 요약되는 호소로, 그의 저작에 이 말이 그대로 나오지는 않는다. 루소는 이러한 호소로 절대왕정의 인위적인 질서를 격렬히 비판하며 프랑스 대혁명의 물꼬를 터트렸다. 독일에서는 헤르더, 괴테, 쉴러 등이 루소의 외침에 깊이 공명하면서, 젊은이들이 질풍노도 문예운동을 일으켜 봉건적 질서에 대한 격렬한 분노를 쏟아내게 되었다. 루소의 사상처럼 문명의 여러 분야, 비롯해 정치, 경제, 예술, 윤리 등을 철저히 비판하는 입장은 서양 사상가 중에서도 흔치 않은 것이다.
道는 “자연”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체계다. 道는 서양의 계시종교와 대비되는 자연철학으로 특징지어진다. 서양의 루소도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친 사람이다. 루소는 동양사상의 흐름을 서양에 전파한 서양 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동양사상에 대한 태도는 대부분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루소가 동양사상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글도 남겼기 때문이다. 그가 동양 사상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부분은 대부분 유교와 관련된 것이었다. 계몽시대 후반에 루소는 공화주의를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생각하며 유교를 군주제 옹호의 사상으로 간주하고 비판하고 배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루소의 사상이 동양사상과 크게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루소는 동양의 도교 사상과 아주 유사한 철학체계를 따르고 있었다. 특히 루소의 인류의 문명에 대한 비판과 문명 이전 상태의 인간개성을 회복하려는 그의 시도는 도교의 무위사상과 놀랍게도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반면 루소가 인류의 문명 비판 이후에 제시한 사회계약론이나 정치체제 관련 주장은 도교 사상과는 관련성을 찾을 수 없다. 그러한 주장은 도교의 기본 사상과 배치되는 부분이 크다.
루소의 인간 문명에 대한 획기적인 사상은 무(無)를 중심으로 한 우주관, 그리고 무위를 인간이 따라가야 할 행위로 본 점에서는 도교 사상과 아주 유사하다. 이러한 배경에는 계시종교와는 다른 자연을 존중하라는 기본사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루소가 도교와 같이 자연철학을 존중하였으며 인간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한 측면이 있다.
루소는 서양 사상가 중에서 아주 독보적이고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神이라는 존재를 통해 해석하는 2천 년 이상 군림한 서양의 전통적 사상에 대해 깊게 도전하였기 때문이다. 루소는 다양한 차원에서 인간과 자연의 직접적인 연결을 추구하였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주장은 계시종교에 기반한 서양 문명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문명으로 인해 인간이 자연에서 소외되고 격리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인간에게 자연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한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155
그러므로 루소는 18세기의 종교와 그와 관련된 서양문명 전반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그의 독창적인 생각은 당시에는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연이어 쏟아진 작품을 통해 서양문명사에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였다. 루소의 저술들은 당시 서양에서 큰 반향을 불러왔다.156 동양 문명과 도교 사상에 익숙하지 않았던 당시 서양인들에게 루소의 사상들은 참신하고 경이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루소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법이나 도덕의 제약 없이 살다가, 사회생활에서의 협동이 필요하게 되면서 “법과 도덕이 필요 없는 황금시대”를 떠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유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요순시대와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으며, 도교의 태초의 사회 개념인 무(無)의 철학과도 통한다고 볼 수 있다.
道를 잃은 뒤에 덕이 나타나고, 덕을 잃은 뒤에 인이 나타나고, 인을 잃은 뒤에 의가 나타나고, 의를 잃은 뒤에 예가 나타난다. 예라는 것은 충심과 신의가 엷어진 것이요, 혼란의 시작이다. (도덕경 38장)
도교의 관점에서 볼 때, 루소는 서양의 사상가 중에서 자연철학에 대한 통찰력을 갖춘 독특한 인물이다. 대다수의 서양 사상가들이 유(有) 중심사상인 계시종교의 관점에 다른 문명을 비판하고 비교하였지만, 루소는 도교의 무(無) 중심인 자연철학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루소는 기독교의 천지창조에 대한 관점, 즉 무질서 속에서 정돈된 세계가 탄생했다는 개념을 완전히 뒤집고자 했다. 그의 중심적인 사상은 “인간은 자연 속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며, 사랑에 가득 찬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사회와 문명의 진입으로 속박과 불평등, 그리고 질투의 세계에 빠져 불행해졌다”는 것이다.
루소의 철학의 근간은 동양의 정욕과천(情慾寡淺, 욕망을 줄이고 절제하는 삶) 철학과 유사하다. 이는 “인간이 태어날 때 갖는 감정과 욕망은 원래 크지 않으나, 인간사회에서 이러한 감정과 욕망이 인위적으로 확대된다”는 철학을 폈다. 루소는 인간을 원죄의 주체나 특별하게 창조된 존재로 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간주하였다. 문명을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서양의 대다수의 사상가들과 달리, 루소는 문명을 인간의 타락의 원인으로 지목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루소는 도교의 핵심 사상과 비슷하게,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에서 기본적인 문제점을 보았다.
서양 사상가들 중에 문명의 문제점을 지적한 사상가는 많았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문명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유익한 부분과 유해한 부분을 나누어 본 것이지, 루소처럼 문명 자체를 부정적으로 유해한 것으로 본 사상가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동양문명에서도 유교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문명과 사회의 문제점을 보았고, 이에 대한 보완책 내지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도교는 문명 자체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고, 문명 이전의 자연 상태를 상상하며 거기에서 道를 발견하였고, 이를 통해 사회의 질서와 마음의 평정을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루소와 도교의 사상의 출발점에서 우리는 많은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세상에 못하게 하는 것이 심할 수록, 마음은 더욱 가난해지고
문명의 이기가 많아질 수록, 사회는 더욱 혼란해지고
기교가 발달될 수록, 괴상한 이론이 더욱 힘을 발휘하고
법이나 제도가 정비될 수록, 도둑은 더욱 많아진다. (도덕경 57장)
루소는 인간이 지금은 문명과 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애초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사회의 문명은 원형의 인간과 맞지 않아 인간은 불행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인간은 동물과 같은 고상한 열정이 있었는데 언어와 정신을 통하여 이를 잃게 되었으며, 결국 정신은 복잡한 인간사회를 구성하는데 기여하고 부정적으로 활용한 것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서양인들은 종교의 영향으로 BC 약 4천 년 전 神이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인간은 언어를 가지고 있었으며, 神이 창조한 인간은 창조되었을 때나 지금이나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원형의 착한 인간과 문명에 의하여 타락된 악한 인간으로 구분하는 것은 혁명적인 철학이었다.
이처럼 루소는 인간 본성을 종교의 영향에서 독립시켜, 자연 속의 인간으로 제시함으로써 서양 사상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루소는 문명은 항상 유위(有爲)적이고 인위적인데 거기서 불평등, 시기심,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욕망을 만들어 낸다고 보았다. 그는 “자애심” (amour de soi, 즉 self-love)과 “자존심”(amour-propre, 즉 pride)을 구분하였다. 자애심은 자기보존을 위한 자연적인 본능인 반면 자존심은 인위적인 것으로 남과의 경쟁을 유발하여 불필요한 불안감을 만들어내고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아픔에 대하여 즐거움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라고 보았다.
동양에서는 도교와 유교의 영향으로 루소가 활동하기 2천 년 전부터 이미 인간의 본성을 자연 속에서 상정하였다. 따라서 동양인에게는 루소의 많은 생각 중, 사회계약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새로운 것이 아니며 자연스럽게 접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도교에서는 “남보다 앞서지 않는 것”(겸하부쟁, 謙下不爭)을 중요한 윤리중의 하나로 여긴다. 이는 남과의 경쟁에서 자존심을 앞세우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도덕경에서 루소가 주장한 자애심과 자존심의 구도와 아주 유사하다. 도덕경에는 문명, 언어, 자존심 등이 인간의 삶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다.
현명하다고 사람을 떠받들지 말라,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사라질 것이다.
귀중하다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말라, 사람들 사이에 훔치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원하지 말라, 마음의 어지러워짐이 없을 것이다. (도덕경 3장)
루소는 예술이나 문화의 발달을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았다. 대다수의 서양 사상가들이 예술과 과학의 발달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루소는 예술과 과학의 발달이 인류에게 반드시 유익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예술과 과학이 진정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존심과 허영심에서 나온 결과물로 간주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예술과 과학은 게으르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인간을 타락시켰다고 보았다. 이런 견해는 예술을 사랑하는 많은 동료 예술가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루소의 이러한 사상은 바로 도덕경의 사상과 유사하다.
갖가지 색깔로 사람의 눈이 멀게 되고, 갖가지 음율로 사람의 귀가 멀게 되고,
갖가지 음식으로 사람은 진실한 맛을 잃게 된다. (도덕경 12장)
도덕경에 이어 장자에서 펼친 도교의 사상도 루소의 사상과 아주 유사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커다란 지식은 여유롭고 느긋하나, 조그만 지식은 세밀하고 소심하다.
커다란 언변은 말을 아끼고 무게가 있으나, 조그만 언변은 수다스럽고 가볍다. (장자 내편 제물론)
루소는 물질적 발전이 진정한 우정을 해치고, 우정 대신 시기심, 두려움, 의심이 대신 들어서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루소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본래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인간들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고, 이로 인해 다른 사람의 호의적인 시각을 얻는 것이 중요하게 되면서 인간개성의 왜곡이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이런 변화로 인해 원래의 선한 본성이 타락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하다는 이런 관점은 맹자의 성선설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또한 사회와 문명이 인간의 선한 본성을 손상시키고 있다는 주장과 함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도 맹자와 유사한 면이 있다. 루소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그의 교육 철학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윤리 중심의 인성 교육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점에서 루소의 사상은 동양 문명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교육론은 정보나 개념의 전달 보다는 개인의 개성과 덕성을 발전시키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도록 교육의 목표를 설정하고자 했다. 그의 최종 목표는 사람들이 복잡하고 불완전한 사회 환경 속에서도 덕성을 유지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루소와 동양의 道는 인간 사회와 문명에 대한 진단에서 아주 유사한 점이 있다. 루소가 유를 부정하며 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동양의 도교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또한, 전통 종교에서 제시하는 神의 존재 보다는 인간과 자연을 직접 연결시키려는 그의 대담한 시도 역시 道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러나 루소와 도덕경이 제시하는 해법은 서로 상반된다. 루소의 해법은 道의 무위사상과는 정반대로 극단적이다. 현상인정이 아니라 현상타파가 루소의 접근 방법이다. 또 그가 제안하는 대안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확신에서도 道의 현실론과는 큰 차이가 있다.
道는 무와 유를 동시에 포함하며, 무를 유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 여기긴 하지만, 유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도교가 인간 사회의 유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루소와 다르다. 문명의 문제점에 대한 진단과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식에서 루소의 사상과 道의 사상은 크게 대비된다. 道가 제시하는 제안이나 해결책은 모두 문명의 일부라는 점에서 현실에 대한 긍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도교는 사회의 질서와 조화, 그리고 개인의 복지를 위해 道와 무위 그리고 거기서 나온 윤리를 중심으로 한 방향을 제시한다. 반면에 루소는 뚜렷한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혁명적이며, 새로운 법적, 제도적, 이념적인 현실타파의 해결책을 제안하고 있다.
루소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핵심 이념을 열정적으로 주장하였다. 여타 계몽 철학자들도 평등을 주장하였지만, 그들의 평등은 아리스토텔레스이후 강조된 것처럼 전통적 엘리트주의에 머물렀다. 반면 루소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강조하였다. 모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부분은 도교와 유사하다. 그러나 도교와의 차이점은, 루소가 새로운 정치체제를 주장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귀족제와 왕정을 반대하면서 국가에서의 인민의 평등을 위해 공화정을 주장하였다.
그는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누리던 자유와 평등, 박애를 사회에서도 되찾기 위해 “인민주권” 이론을 제시하였고, 국가의 권력 행사는 “일반의지”에 기반해야 하며, 적절한 크기의 공화국에서 다수의 의견으로 결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루소와 도교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본성에 대한 판단에 기인한다. 루소는 인간본성을 긍정적으로 보고 인민주권이라는 사상에 사람들이 동의할 것으로 상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도교는 인간본성은 항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현실론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이러한 인간본성에 대한 도덕경과 루소의 차이는 루소의 혁명적인 사상이 어떻게 역사속에서 진행되었는지 살펴보면 드러난다. 역사 속에서 루소의 인민주권론과 일반의지론은 실제로 전체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 의견이나 견해를 말살하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대중의 지배 속에 길을 잃은 프랑스 혁명은 극단적인 자코뱅주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루소는 특히 사유재산제도를 비판하였다. 사유재산이 문명의 시작이며, 모든 불평등, 살인 그리고 전쟁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루소는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생긴 인간사이의 분업과 사유재산제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법과 제도를 채택하도록 만들었다고 본 것이다. 이 법과 제도 속에서 인간은 첫째 다른 동료 인간들과 더욱 심한 경쟁을 하게 되면서 또 동시에 둘째 다른 동료 인간들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는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았다. 이 두 가지 압력이 인간의 생존과 자유를 위협하게 되어 인간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루소는 본 것이다. 루소는 지식의 발전이 지배자를 더욱 강력하게 했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데 쓰이게 되었다고 간주하였다.
그러나 도교는 루소처럼 사유재산제도 자체를 문제 삼거나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지도자의 탐욕을 비판하고 백성이 본받을 수 있는 정치를 하여야 한다고 지도자의 지도자 다운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정치가 드러나지 않게 조용하면 백성은 순박 해진다.
정치가 활발하게 날 뛰면 백성은 순박함을 잃는다. (도덕경 58장)
일부 사상가들은 루소의 사유재산제도에 대한 비판이 마르크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로 인해 공산주의로의 이론적 연계의 근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다른 사상가들은 그가 정열과 본능을 중시한 점이 파시즘의 발상에 기여하였다고 주장한다.
루소가 제시한 이러한 독창적인 개혁 논리와 이념은 바로 도교가 받아들이지 않고 경계하던 부분이다. 도교에서는 사유재산을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며, 이를 문제 삼아 논의한 바 없다. 이와 같은 차이점은 루소와 도교 사이의 인간본성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도교는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전제로 하고, 이를 기반으로 삶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다. 그에 반해 루소는 인간의 본성이 긴 역사 속에서 정치경제 사회조건에 따라 변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체제 변화와 사회 개혁을 주장하게 되었다.
반면 동양에서는 도교 사상의 광범위한 영향 하에 자연철학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연철학이 가지는 문제점을 선명하게 인식하는 전통이 자리 잡았다. 이러한 관점은 도교의 우주관에서 유를 인정하면서도 유보다 무를 본질적으로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음양론의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루소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사상가들이 문명의 장점들을 칭찬하고 긍정하는 경향이 컸다. 이러한 태도는 계시종교의 우주관에서 무에는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모든 가치를 유에 위치시키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출발한 것이다.
道는 인간이 따라야 하는 원칙이지만, 한정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자연 또한 인간이 따르고 존중해야 하나, 한정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각 시대와 개인마다 생존해 나가는 방식이 있어야 하며, 이는 道에 대한 시대와 개인적인 해석에서 비롯된다. 결국 절대적인 진리를 찾아낼 수는 없으나, 각 시대마다 그에 대한 해답, 즉 상대적인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진리에 대하여 인간에 닥친 조건은 현실세계에서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하다. 공자의 “근원은 절대적이지만 표현은 상대적”이라는 견해와 레싱의 “진리 자체보다 진리 탐구의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겠다”는 태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도덕경은 이런 시대적이며 개인적인 해답에 대해 일절 말하지 않았으며, 이런 해답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조롱하고, 경계하였다. 그럼으로써 동양문화는 시대적인 해답, 즉 상대적인 진리를 절대화하려는 위험에서 벗어났다. 반면 루소는 시대적이며 개인적인 해답을 제시하는데 열정을 보였다. 道의 철학과 루소의 철학의 차이는 동양의 현실인정으로 인한 불필요한 파괴를 피하고자 하는 사유와 서양의 현실타파를 지향하여 이를 통한 진전을 추구하는 사유의 차이를 보여준다.
스피노자 와 순자: “神과 자연은 동일하다”
르네상스 이후에 서양인들은 자연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자연의 법칙이 계시종교의 도그마와 충돌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서양에서 자연의 중요성을 지적한 사람들은 과학자들이다. 계시종교가 지배하고 있던 서양에서 계시종교의 도그마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곧 마녀사냥의 희생이 되었다. 얀 후스(1372-1415) 같은 사상가는 면죄부 판매를 강하게 비판하고 성경 중심의 신앙을 강조했다. 교황청은 후스를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했다. 후스는 안전 보장을 약속 받았지만 화형으로 처형되었다.
따라서 과학자들의 발견이 반대 의견의 진전에 앞장설 수밖에 없었다. 이들 과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1473-1543), 케플러(1571-1630), 갈릴레오(1564-1642)와 같은 천문학자였다. 이들은 천체관측을 통하여 神의 계시와는 다른 자연의 법칙을 증명해낸 것이다. 성경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주장한 천동설이 근거가 없으며 지동설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자연의 법칙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이들은 자연의 법칙과 계시종교의 도그마 간의 충돌을 야기하게 된다.
이러한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들의 발견에 뒤이어 베이컨(1561-1626) 같은 철학자가 자연에 매료되어 있었다. 르네상스 후기의 인물인 그는 계시종교의 엄격한 탄압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였지만 자연의 중요성을 극도로 강력하게 역설하였다.
앞서 인용한 대로 그는 “인간은 자연의 하인이며 해석자다”라고 하였다.157
과학자들과 베이컨 등은 자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그쳤다. 이들이 자연의 중요성과 종교의 도그마를 연계시켰다면, 이들은 모두 마녀사냥을 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1632-1677)는 계시종교와 자연철학을 연결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표현하였다. 그는 “神과 자연은 같다”고 선언하였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이라는 책에서 “神 또는 자연”(God or Nature)이라는 표현을 거듭 사용하면서 神과 자연, 즉 神과 道를 동일시한 것이다. 근대 서양에서 동서양 문명의 핵심인 神과 道를 일치시키는 철학체계를 내세운 최초의 사상가가 되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은 불가능하다…神 즉 자연의 힘이 인간의 존재를 유지한다. (Spinoza, Ethics, vol.1, IV–Prop. IV)
그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서양에서 神으로 불리는 존재는 자연과 같을 수밖에 없다고 설파했다. 역사적으로 스피노자가 神과 자연이 동일하다고 취급한 최초의 사상가는 아니다. 神과 자연이 동일하다는 생각은 BC 3 세기에 크리시푸스(Chrysippus)라는 그리스 철학자가 주장한 바 있다. “우주자체가 神이다”(The Universe itself is God)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크리시푸스의 저서는 남아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저서 속에서 언급되면서 그의 주장이 전해 내려온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神의 계시를 따르는 시현론에 몰두하고 있는 서양 철학 체계의 틀을 파괴하는 혁명적인 선언이다. 영혼의 존재, 기적, 삼위일체 등을 모두 부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자연을 중시하였고 동양문명이 자연 철학에 기초하였으므로 몇몇 사람들은 스피노자가 동양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그를 이단자로 비판하였다. 그러나 볼테르와는 달리 스피노자나 루소가 동양 자연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이나 흔적은 없다.
스피노자와 순자가 동일한 철학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순자가 파악한 道의 특성과 스피노자가 영향을 받은 유대교 선배들의 사상에서도 나타난다. 스피노자는 12세기 마이모니데스(Maimonides)와 함께 유대교 신비주의 철학인 카발라(Kabbalah)의 영향을 받았다. 카발라 불현 철학은 근본적인 면에서 道의 철학과 동일하다. 神은 “무한한 존재이며 규정할 수 없고” “만물속에 내재해 있다”는 개념은 바로 道의 개념이며 순자의 철학이다. 순자는 道에 대한 규정을 부정하고 道는 자연속의 만물속에 내재해 있다고 믿었다. 마이모니데스는 “부정신학” (Apophatic Theology), 즉 “神은 인간 언어로 직접 설명할 수 없으며 오직 부정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이모니데스는 神은 물질적 속성이 없다는 주장했는데, 이는 道가 의인화를 거절함으로써 물질적 속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면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순자와 스피노자의 사상이 유사하다는 것은 상호 사상적 연계가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다. 스피노자가 동양 자연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노력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즉 “사상적평행” (parallelism)이다.
스피노자는 계시종교의 핵심 도그마를 반대하는 내용을 윤리학에서 서술했다: “神은 아무런 목적이 없다.” “神은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는다.” “인간은 神을 사랑해야 하지만, 神으로부터 사랑을 기대할 수는 없다.” “神과 자연은 동일하다.” 나아가 스피노자는 계시종교의 발원에 대해서 설명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神을 숭배하는 방법을 개발해 낸다. 그래서 神이 자신의 이웃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도록 하고, 자신의 끝없는 탐욕과 눈먼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神이 자연의 진행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바꾸어 주기를 원한다. 이러한 편견이 미신으로 발전되고 인간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잡게 된다. (스피노자 윤리학, I-Appendix)
스피노자에 대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탄압이 아주 심했다.158 기독교는 AD 4세기 로마가 국교로 선포한 이후 계속 서양의 국교로 남아있었다. 그는 수백 년간 “사탄, 사악한 인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 등으로 불렸다. 때문에 많은 서양 사상가들이 그의 저서를 몰래 읽고 감명을 받게 된다. 레싱(Lessing, 1729-1781)과 괴테(Goethe, 1749-1832)같은 철학자가 이에 속한다. 레싱은 스피노자 같은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였고, 선지자를 통한 神의 시현에 반대하여, 당시 독일 철학계를 지배하던 이상주의 철학자들로부터 많은 반대와 뒤따르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레싱은 스피노자에게서 배운 많은 사상을 죽을 때까지 공개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스피노자의 철학을 신봉하였다:
스피노자의 철학(Spinozism)을 무시하고는 아무런 철학이 성립하지 않는다.159
괴테는 스피노자처럼 범신론자로 불렸다. 괴테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읽고 그의 사유 체계의 기초를 여기서 형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내가 머리속에 있는 많은 생각들을 정리하려고 노력하던 중 드디어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읽게 된다. 얼마나 많은 것을 스피노자를 읽고 배웠는지 이루 설명하기 힘들다.”160 이런 고백은 괴테가 1774년 25세에 쓴 것으로 1832년 괴테가 죽은 4년후 1836년에 발표된다. 스피노자가 괴테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독일 시인 하이네는 괴테를 가리켜 “문학의 스피노자”라고 평하였다.161
스피노자는 “神 또는 자연” 라는 표현은 “자연을 창조한 神”을 믿던 서양에서 커다란 철학적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야기했다. 神과 자연이 같다면 神의 문명에서 중요하게 취급해온 神의 천지창조, 기적, 영혼의 존재 같은 것이 모두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사상을 받아들이려면 서양의 神은 동양의 道와 같아져야 한다. 그렇다면 선지자에 의한 神의 존재를 긍정하는 시현론은 道가 주장하는 절대진리는 표현될 수 없다는 불현론으로 탈바꿈하게 된다.162 서양문명과 동양문명의 핵심 체계가 바뀌는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동양에서는 자연(道)과 神의 충돌 문제가 별로 발생하지 않았다. 서양의 패러다임이 동양을 지배한 19세기 이후에도 동양의 道에 대한 철학체계는 바뀌지 않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 계시종교를 숭배하는 사람은 1-2% 정도에 머물고 있다. 한국(남한)에서 30% 이상의 사람이 기독교를 믿는다고 선언하지만, 이들은 다른 사상에 대하여 아주 관대하며, 종교 간의 투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동양에서 BC 5-3세기 전국시대를 통하여 민족국가가 서양 보다 2천 년 전에 이미 탄생하였고 이를 통하여 자연철학과 민본사상이 철학체계의 중심으로 서게 되었기 때문이다.163 전국시대의 순자(荀子, 310-235 BC)의 자연철학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순자는 도교와 유교사상을 융합하면서 인간이 당시 유행하던 미신과 무속 속에서 살지 않도록 주장했다. 도덕경에 동양 자연관의 모든 기초가 있지만, 순자에 의하여 현실적으로 분명하게 표현된다.
하늘에 대해서 우리는 그 운행이나 현상만 알 수 있을 뿐이다…사회의 안정과 변란은 하늘이 정하는가? 아니다. 태양, 달, 별들은 성인이나 폭군 때나 똑같이 움직인다. 그러나 성인 때는 안정이, 폭군 때는 변란이 생긴다. 안정과 변란은 하늘에 달려 있지 않다. (순자 17:5)
순자는 “사회의 안정과 변란은 하늘이 결정하는 것일까?” 라고 물으면서 답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은 거의 2천 년 후에 셰익스피어(1564 – 1616)에 의해 서양에서 동일하게 제시되었다:
친구 브루투스여, 우리가(쥴리어스 씨저의) 부하 라는 사실은 하늘에 있는 우리의 별자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만든 문제임을 잊지 말게.164
순자의 저서에서는 道가 인간의 형상을 가지고, 그의 말과 행동을 인간에게 보여주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 일체 없다. 또한, 기적을 행하여 인간에게 자신을 따르도록 하는 모습을 그린 적도 없다. 그는 앞서 1부 3장에서 보았듯이 “기우제를 지내지 않아도 비는 온다” 라고 역설하고 있다.
순자는 “인간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은 神 또는 자연의 힘이다” 라는 스피노자의 철학과 동일한 철학 사상을 펴고 있다. 다만 순자는 道를, 스피노자는 神을 사유의 중심으로 표현했다: “道(神)는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을 위하여 道(神)의 길을 따라야 한다.” “道(神)의 길은 인간본성에 나타난다.” “道(神)를 사랑하는 사람이 道(神)가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사람이 자연의 일부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사람을 포함하여 우주의 모든 것들은 道(神)의 힘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두 사람 사이의 “사상적 평행”을 나타내는 표현 들은 순자의 “천론”편에서, 그리고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찾을 수 있다. 아래 구절들은 순자와 스피노자 두 사람의 철학이 유사한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스피노자가 그의 저서 윤리학에서 정의한 神을 道로 대체하여 그대로 기술한 것이다:
道는 무한한 존재이다; 무한한 속성을 가진 道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무한한 실체인 道는 나눌 수 없다; 道 이외에는 어떤 실체도 있을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道 안에 있다, 道 없이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 일 수밖에 없다; 마음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지식은 道다; 마음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덕목은 道다; 道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道는 어떠한 즐거움이나 고통의 감정으로 좌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을 포함한 세상만물이 스스로를 보존하는 힘은 바로 자연 즉 道의 힘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힘, 즉 인간의 본질의 표현으로서의 힘은 자연 즉 道의 무한한 힘의 일부이다. 아무도 道를 미워할 수 없다; 道를 사랑하는 인간은 그 보답으로 道로부터 사랑을 기대할 수는 없다.
순자와 스피노자의 철학은 21세기에 우리에게 들어맞는 설명을 하고 있다. 그만큼 합리성이 강하다. 그러나 우리는 문화는 호모 사피엔스의 두뇌가 만들어 낸 것인데, 정신과 본능이 함께 작용한 것이지 절대로 호모 사피엔스의 뉴 브레인인 정신이 홀로 작용하여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합리적으로만 판단하면 시현과 불현, 즉 神과 道의 철학은 하나로 합쳐 질 수 있고 통일되어야 한다. 神과 道의 충돌은 없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神과 道는 별도의 문명체계를 형성할 만큼 크게 다르게 존재한다. 동서양 문명의 특성은 철학, 문학, 교육, 행동에서 나타난다.
동서양 문명으로 지구상에서 시현과 불현이 공존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서양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크게 줄었지만 사상체계는 여전히 시현의 체계를 따르고 있다. 정신의 판단과 현실의 필요성 간의 갈등 속에서 인간의 심정적 실체는 정신의 판단보다 결국 자기보존 본능을 따라가게 된다. 神과 道의 개념 출현 이전에 이미 인간의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자연이나 인간이나 모든 존재가 자기보존 원칙이나 본능을 따라가는 것은, 인간이 정신만이 아니라 정신과 본능을 합친 인간본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적인 상황에서는 神과 道의 합치가 아니라 충돌로 진행된다. 동양과 서양 문명의 충돌은 동양의 자연철학과 서양의 계시종교의 충돌로 표현된다. 이러한 충돌은 동양 보다 서양에서 발생하였다. 초월적인 神의 존재와 인간이 의존 할 수밖에 없는 자연 사이의 간극 때문이다. 이러한 충돌은 철학 체계의 충돌이전에 자신들이 유지하고 있던 기득권을 수호하는 형식으로 역사적으로 진행되었다. 인간의 모든 행태는 철학 체계를 포함하여 모두 자기보존 원칙으로 귀결된다. 자기보존 원칙은 인간본성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