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 계시종교, 신(神) vs 자연철학, 도(道) · 제4장

신과 도의 철학체계는 한 인간 속에 모두 존재한다

약 29분 · 주 26개

1) 음양과 선악: 신이 선하다면 악은 어디서 나왔나?

동양사상은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상정한다. 신이나 죽음에 대한 생각은 동양 사상에서 중요성이 서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작다. 도덕경은 모든 상황을 인간의 접하는 자연에 집중하고 있으며, 자연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만을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유교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표현된다. 죽음 이후의 세상이나 귀신(鬼神)또는 죽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선언한다.

귀신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묻는 제자에게 공자는 답하였다: “사람에 관한 일도 처리 못하면서, 어찌 귀신에 관한 일을 생각하느냐?” 죽음에 대하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라고 묻는 제자에게 공자는 답하였다: “삶을 모르면서, 어찌 죽음을 생각하겠느냐?” (논어 11:11)

서양에서는 2천년이 지나서 아주 비슷한 사상을 스피노자가 표현한다. 동양 사상이 기원전에 펼친 죽음에 대한 생각이 계몽시대 초기에 서양에서 표현된다:

자유로운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에서 나온다.53

이러한 삶에 대한 인식은 인간사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변화론에 입각한 음양론의 입장으로 기울게 된다. 음양론은 인간사에서 선악이 아니라 길흉(吉凶)의 입장을 취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항상 변한다. 인생에서 길, 좋은 것은 언제나 바뀌게 되고, 흉, 나쁜 것도 언제나 바뀌게 된다. 동양인에게는 인생의 길흉은 예측할 수 없다는 고사성어 “새옹지마”에 익숙하다. 인생사는 인생 전체를 보고 길흉화복을 판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서양 철학에서 선악은 존재론 적이어서 변하지 않는다. 악은 없애 버려야 할 존재가 된다. 선악은 바뀌지 않는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나 무신론자는 선악론의 입장에서만 취급될 뿐이다. 개종시켜야 한다.

동양 문영에서 인간사는 인간의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지 교리에 의하여 선악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반면 계시종교는 종교가 정한 엄격한 선악론에 의하여 신으로부터 축복과 저주를 받는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삶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선악론은 더욱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죽음이후의 영원한 삶의 형태는 지금 이 세상에서 선하게 살았는지 아니면 악하게 살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선악론은 그리스 시대부터 “신이 선하다면 악은 어디서 나왔나?” 라는 난제를 제기하였고, 서양 철학 체계내에서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문제로 되어있다.

선악론은 성경 창세기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인간은 뱀의 권유에 따라 신의 명령을 어기고 신과 비슷해지기 위하여 선악과들 따먹게 된다. 인간이 신처럼 될 수 없는데 신처럼 될 수 있다는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는 인간에게 불행이 닥친다. 이런 이야기는 인간이 신의 영역인 선악을 직접 다루는 데서 발생하는 문제와 그 결과의 심각성을 암시해주고 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4-5)

동양 고전 어디서도 선악에 집착하는 설명이나 철학은 없다. 동양문명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선악을 구분하고 선악을 인간사회에 적용하는 데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다. 신의 선악론은 선한자를 상 주고 악한자를 벌하는데 엄격하다. 이에 대립하여 도는 자연은 선악을 구별하지 않으며 모두에게 유익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늘의 도는 모두에게 유익하며 아무에게도 해롭지 않다. (도덕경 81)

그러므로 불현론을 핵심으로 하고 있는 도교에서는 “도는 선하지 않다” 라는 정의를 간직하고 있다. 이는 도 자체가 선악의 구분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하는 선악의 기준으로 표현하면 문제가 생긴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교에서는 인간이 선악을 결정적으로 판단하고 구분하는 것 보다는 선악의 피안에 있는 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도를 파악하라는 노력을 하여야 하며 도를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선악론에 의하면 인간은 쉽게 악해질 수 있으며, 인간의 악한 행위는 일찌감치 나타나고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신은 벌써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6:5-7)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하여 신은 선과 악에 대한 도덕적 명령을 제공하며, 강력한 율법을 남기게 된다. 신의 명령을 어기면 신의 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은 계시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다. 특히 다른 신을 섬기게 되는 것이 최대한의 악한 행위가 된다. 이러한 악을 저지르는 인간에게 대하여 강력한 벌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신은 “질투하는 신”으로 남아 있게 된다. 54

선악론 중에서 서양에서는 신을 선한 존재로 규정하였다. 신이 선하다는 서양의 신의 개념에서는 “신이 선하다면 악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라는 의문이 나오게 된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06:2)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시편 11:5)

그러면 만물을 창조하는 신이 선하시다면 악은 어디서 출발한 것인지 문제가 제기된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예레미아12:1)

신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악 역시 신이 창조하신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왜 악을 창조하셨을까? 이 문제에 대해 서양의 신학자와 형이상학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하였고, 아직도 그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이는 유대-기독교뿐만 아니라, 그리스 철학자들도 이미 오래 전부터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하였다.

서양의 현자중의 하나이며, “법을 내린 사람(law giver)”으로 알려진 아테네의 지도자 솔론(Solon, 638-558 BC)은 "악인 중에 부자가 있고, 선인 중에 빈자가 있다"라는 한탄하는 시를 남겼다.

BC 7-8세기에 활동하였던 호머와 동시대인 그리스 시인 헤시오드(Hesiod)도 선과 악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였다: “어떻게 정의롭고 만능 하신 신이 정의롭지 못한 인간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도록 허용하는가?” 55 이어 인간이 패러다이스를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설명하면서, 헤시오드는 선하고 정의로운 신들이 세상에서 악과 부정이 횡행하도록 내버려두었는지 탄식하게 된다:

인생에서 자신의 약속을 지키고 선과 정의를 실행하는 자는 아무런 보답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이 악을 행하고 과격한 일을 실행하는 자들이 칭찬하게 된다. 폭력이 이기고 덕은 사라진다. 악한자가 선한자를 괴롭히게 된다… 인간은 결국 가혹한 괴로움을 당하게 되고 악으로 부터 아무도 구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56

이러한 고민은 에피쿠로스(BC 341-270)가 머리에 담았던 중요한 문제중의 하나다. 그리스 시대 부터 전해오는 악에 대한 “에피쿠리언 패러독스” (Epicurean Paradox) 또는 “에피쿠로스의 난제” (the Riddle of Epicurus)에 잘 정리되어 있다. 에피쿠로스 패러독스에 관한 기록이 에피쿠로스 자신의 남겨져 있는 문서에는 없다. 초기 기독교 학자인 락탄티우스(Lactantius, 250–325)가 남긴 기록에 담겨 있다:

신에 대하여 에피쿠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은 악을 제거하고자 하는데 못하고 있다;

신은 악을 제거하고자 하는데 원하지 않고 있다:

신은 원하지도 않고 못하고 있다;

신은 원하고 제거하고 싶어한다.

만약 신이 원하는데 못하고 있다면, 신은 연약한 존재인데 이것은 신에 대한 정의와 어긋난다;

만약 신이 원하는데 안하고 있다면, 신은 시기심이 많은 존재인데 이것은 신에 대한 정의와 똑같이 어긋난다;

만약 신이 원하지도 않고 못하고 있다면, 신은 시기심이 많고 연약한 존재다. 이것은 신이 아니다;

만약 신이 원하고 제거하고 싶어한다면, 이것이 바로 신에 대한 알맞은 정의가 된다. 그렇다면 악은 무엇이며, 왜 신은 이것을 제거하지 않는가? 57

거의 2천년이 지나서 영국의 철학자 흄(David Hume)은 에피쿠루스의 선악에 대한 난제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오래된 질문에는 아직 해답이 없다.

신이 악을 없앨 수 있는데 못하고 있다면, 신은 무능하다.

신이 할 수 있는데 안하고 있다면, 신은 악의적이다.

신은 없앨 수 있고 할 수 있다면, 악은 어디에서 왔는가? 58

선악의 문제는 서양인들에게 인간이 풀 수 없는 숙제를 남겨 놓고 있다. 그리스 시대부터 현재의 서양 철학이 이 문제로 계속 고민하게 된다. 그들은 선악의 문제를 존재론에 입각하여 풀어 나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선은 영원히 선하고, 악은 영원히 악하다는 존재론이다. 그러나 동양은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다. 동양의 음양론에서는 변화론에 입각하여 인간사를 취급한다. 선악의 개념은 인간이 만든 인간 활동의 범주 안에서 음양처럼 바뀌어 나간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길흉이 바뀌는 것처럼 음은 양으로 변하고, 양은 음으로 변해간다. 음양은 모두 도에 속해 있다. 신은 선하고 악을 미워하지만, 도는 음양과 인간의 길흉을 모두 포함한다.

신을 두려워하는 인간 vs 도를 환영하는 인간

에피쿠로스는 선악론을 배경으로 하여 신에 대하여 인간이 취해야 하는 입장을 정의하게 된다. 그는 선하고 정의로운 신과 악의 존재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신을 두려워하지 말라. 신은 영원하고 행복한 존재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신에 대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의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신이 상을 내리고 벌을 준다고 말하는데, 자신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는 신을 그들이 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는 것으로 신앙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견해를 강요하는 것이 바로 신앙심을 버리는 것이다. 59

그러나 이러한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그가 살던 시기인 BC 3-4세기에는 많이 회자되었지만, 결국은 불현론의 일부로 취급되면서 서양에서 힘을 일어버리게 된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는 4세기 말 이후 서양에서 모두가 시현론에 파묻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중세 천년의 종교국가 시대에는 불현론자들은 모두 무신론자로 취급되어 규탄과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시현론이 불현론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철학은 르네상스와 계몽시대를 거치면서 이신론에 의하여 조금 순화되었다. 그러나 수천년을 서양 문명의 핵심으로 남아있던 선악론은 서양인들의 문화속에 내재해 있다.

선악론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불행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원죄론의 시작이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은 이것으로 신의 명령을 어겼으며 인간은 스스로 원천적인 잘못을 저지른 존재가 된다. 인간은 항상 신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다.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어려움을 지고 태어나 인생을 살게 된다.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3:16-17)

선악론은 서양에서 인간이 왜 일생을 고생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이야기는 서양의 종교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에도 있다. 헤시오드는 그의 책 “하는 일과 나날들” (Works and Days)라는 책에서 판도라의 상자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이는 성경 창세기의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겪게 되는 죄에서 받는 벌과 유사한 상황을 묘사한다. 에피메테우스의 부인인 판도라에게 제우스가 만든 “판도라 상자”가 전해 진다. 인간을 만들고,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를 벌하기 위해서다. 프로메테우스는 판도라에게 상자를 열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호기심이 많은 판도라는 상자를 열게 된다. 상자를 여는 순간 상자 안에 숨어 있던 모든 나쁜 것들이 뛰쳐나와 인간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놀란 판도라가 황급히 상자를 닫는데 상자안에는 희망만이 남아 있게 된다.

이브와 판도라의 스토리에 의하면 인간이 문제의 근원이다. 인간은 이성과 호기심을 가지게 되면서 선악을 판단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인간의 이러한 실수는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오고, 인간은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인간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이러한 성향에 따라 인간이 죄의 값으로 일생을 거쳐 벌을 받고 참회하게 된다. 서양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일을 하게 되고, 고통을 참는 존재”가 된다. 60

동양문명은 인생에 대한 해석이 서양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신을 두려워하며 참회하는 인간이 아니라 도의 범위내에서 인생의 기쁨을 찾는 인간이 된다. 인간은 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도를 인생의 동반자로서 환영한다. 동양문명에서는 인간이 죄 의식을 가지기 보다는 도안에서 인생의 기쁨을 찾는 자세를 가지도록 권한다. 도덕경의 마지막 문장은 인생의 즐거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는 일을 즐겨라. 당신이 먹고 있는 것을 즐겨라. 입고 있는 옷을 즐겨라. 잘 수 있는 거처를 즐겨라. 인생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을 찾아라. (도덕경 80)

유교도 인간의 각종 감정 중에서 “인생을 즐기는 자세”를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표현하고 있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논어 6:18)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논어의 첫 문장은 바로 인생의 즐거움을 친구와 배움 속에 찾도록 권고하고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배우고 수시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논어 1:1)

이러한 동서양의 인생관의 차이는 신과 도가 인간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하는 차이에 근거한다. 서양의 신은 인간이 엄격히 선악을 구분할 것과 선의 실행을 명령하고 있으며 악인을 벌 할 것을 다짐한다: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다 (이사야 13:11)

반면 도는 선악의 피안에 있으며 모든 사람을 보호하는 도의 힘을 강조한다. 모든 인간은 도의 범위내에서 살게 된다. 도는 모든 사람을 보호하므로, 선한 사람은 도를 즐기고, 선하지 않은 사람도 보호를 받게 된다:

도는 만물이 깃드는 곳이다. 도는 선한 사람의 보배인 동시에 선하지 않은 사람의 보호가 된다. (도덕경 62장)

동양은 종교적 선악의 문제나 인간의 원죄의식으로 부터 자유롭다. 선악은 신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이 만들어내는 호-불호의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서양의 신을 두려워하는 심정은 동양철학에서는 “도를 벗어나는 행위”로 표현된다. 인간은 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사에서 도를 벗어나는 행위로 표현하는 것은 인간이 저지를 수 없는 최대한의 나쁜 행위를 지칭할 때 사용한다.

철학적으로 분석하면 인생을 살아가는데 선악론 보다 음양론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현실속에서 선악론은 사라지지 않고 인생사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본능과 이성을 합친 인간본성에 의하여 좌우되기 때문이다. 선악론은 악에 대한 처벌을 강조하는 것이 생존에 중요한 경우에 특히 유용하다. “악한자는 천 세대 까지 벌을 받게 된다”는 선악론이 현실속에서 사용되는 이유는 생존을 직접 위협하는 상황에서 악의 개념은 “자기보존”을 위한 강력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도와 신 철학체계가 만들어낸 동서양 문명: 음양보완론 vs 선악대립론

도와 신이 인간을 어떻게 취급하는지에 따라서 동서양에 대치되는 철학체계가 설정된다. 동양의 음양 보완론과 서양의 선악 대립론이 그것이다. 동양의 윤리와 서양의 율법 중심의 사회 규범이 생겨나게 된다. 이에 따라 동서양 문명은 인간의 행동에서 커다란 대치성을 보여준다. 동양문명은 수용적-자율적-우회적, 상대적-관계적-관용적, 내향적-수비적-포용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서양문명은 능동적-간섭적-적극적, 절대적-개인적-역동적, 외향적-배타적-진취적인 면을 특성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차이는 동양문명을 “음”의 문명, 서양문명을 “양”의 문명으로 파악하면 아주 적절한 구분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동양의 개념을 사용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서양의 개념을 사용하면 음의 문명은 음양보완론, 양의 문명은 선악대립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음양론에서는 인간이나 물질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를 보완 내지 조화의 개념으로 접근하고, 선악론에서는 이러한 모든 관계를 대립 내지 충돌의 개념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수용적-자율적-우회적 동양 vs 능동적-간섭적-적극적 서양

동양의 수용적이고 자율적이고 우회적인 특색과 서양의 능동적이고 간섭적이고 적극적인 특성은 동서양의 골든 룰에서도 잘 나타낸다. 공자의 가르침은 수용적이다. "남이 너희에게 하기를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 (논어 12장 안연 편). 예수의 가르침은 적극적이다. "너희가 남이 너희에게 하였으면 하는 대로 남에게 하라" (마태복음 7장). 동서양은 남에 대한 태도가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서도 대조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서양에서는 성경에 나와있는 것 처럼 사람이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이 적극적이고 행동주의적인 삶을 가르친다. 반면 동양에서는 도덕경에 나와 있는 것 처럼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고 창과 문으로 방을 만들지만, 실제로 쓸모가 있는 것은 빈 공간”이므로 행동주의적인 삶을 경계하고 수용적인 삶을 권유하고 있다. 동양 사상은 물처럼 부드럽고 양보하는 성질을 권유한다. 도덕경에서도 물의 장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이는 물이 결국 강하고 힘있는 것을 이겨내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양의 수용과 우회성, 서양의 능동과 적극성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잘 나타난다. 동양에서는 잘 듣는 능력을 중요시한다. 부모가 자식들을 가르치는데 항상 선생님이나 남의 말을 잘 들어라 라는 교육이 첫째 번이다. 반면 서양에서는 잘 말하는 능력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말을 잘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을 나타낸다. “유창한 말과 멋있는 행위는 인(仁) 과는 거리가 멀다.” “확고하고, 오래가며, 간단하고, 어눌한 언행이 인(仁) 과 가깝다.” 는 논어의 가르침이 있다. 도덕경에서는 “성실한 언행은 세련되지 않았으며, 세련된 언행은 성실하지 않다. 선한 사람은 남과 다투지 않으며, 남과 다투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 아는 사람은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며, 지식이 많은 사람은 아는 것이 없다.” "양보하면서 극복하라, 굽히면서 꼿꼿이 서라, 비우면서 채워라, 낡아지면서 새로워져라, 작게 가지면서 가득 채워라, 많이 소유하면 혼란이 온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반면 동양에서는 서양의 적극적인 성향에 대비되는 우회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 유위 보다 무위를 추구하는 동양에서는 서양 처럼 당장의 효과가 아니라 때를 기다리는 행동 방법을 권하고 있다. 우회적이라는 표현은 행동을 즉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세(勢)의 움직임을 보고 때를 기다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소위 싹이 트는 때에 미리 행동을 하여 미래에서 뒤늦은 행동을 하지 말고 미리 예측한 결과를 기다린다는 행동 방법이다. 소위 위무위(爲無爲)의 행동 방법을 선호하게 된다.

도덕경과 성경 모두 겸손과 양보를 가르치고 있다. 성경의 산상교훈 중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문구가 있으며, 이는 겸손과 겸양, 그리고 핍박받는 자에 대한 위로가 된다. 마찬가지로 도덕경도 "치욕을 품위 있게 소화하라, 득실에 연연하지 말아라, 불운은 모든 인간에게 닥쳐오는 것이다... 만사를 겸손하게 받아들여라, 그러면 모든 것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겸양과 양보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주의도 함께 가르쳐지고 있다. "씨앗과 누룩처럼 행동하라, 백배의 수확과 하루 세 끼에 충분한 누룩으로 불려라"는 가르침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행동주의는 도덕경에는 없다. 항상 자율과 자제력의 함양에만 집중하고 있다.

도덕경과 성경 모두 물질적인 부를 경계하고 있다. 도덕경에서는 물질적인 부는 인성을 파괴할 수 있는 요소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성경에서도 "부자가 천당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경각심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이와 함께 "부를 지상에 쌓아 놓지 말고 천국에 쌓아 두라"라는 말로 물질적인 부에 대한 적극적인 행동주의도 요구하고 있다. 도덕경이나 유교에서 부를 쌓아서 좋은 일을 하도록 하자는 행동주의를 요구하는 글은 없다. 이재(理財)는, 개인이 부를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다스려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윤리 차원에서 취급되고 있다.

상대적-관계적-관용적 동양 vs 절대적-개인적-역동적 서양

불현론의 철학체계를 따르는 동양문명은 상대성과 조화의 특성을 강조하게 된다. 공자는 논어에서 “생각이 다르다고 이단으로 공격하면 손해가 되어 돌아온다” 라는 상대적이고 관용적인 견해를 펴고 있다. 시현론을 따르는 서양은 확실한 교리와 선악론을 제시하여 인간사에 이를 시행하도록 하고 있다.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라”. 이를 강조하면서 서양은 성경이나 교회는 잘못될 수 없다는 무오설(inerrancy)을 주장하면서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특성을 보이게 된다.

결국 서양 문명에서는 각종 종교 분파가 생기고, 모두 절대성과 무오성을 주장하게 되면서 분파 간에 투쟁이 불가피해진다. 유럽은 16-17세기 신구교 간에 오랜 전쟁에 돌입하게 되고 결국 잔혹한 전쟁 중 하나로 꼽히는 30년 전쟁을 치르게 된다. 비슷한 시기 동양에서는 청나라의 강희제가 1692년 용교령(容教令)을 내려 기독교의 포교를 허용하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서양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종교의 자유를 선언한 강희칙령을 너무 관대한 조치로 평가하고 있었다.

강희칙령은 동양 역사에서는 예외가 아니라, 오히려 전통적으로 유교, 불교, 도교 등 모든 종교의 유용한 가르침을 나라의 운영에 사용한다는 체계를 따른 것이다. 이는 결국 동양 문명이 보여주는 제설융합주의(syncretism)라는 철학적인 태도를 통해 잘 드러난다. "성인은 지나침, 극단, 너무함을 피한다"는 도덕경의 가르침도 이를 반영한다.

서양에서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대륙인 미국을 건국한 청교도들 이후에 일어난다. 18세기에 드디어 미국 헌법 제1조에서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게 된다. 국교를 수립하는 것을 금지하고 자유로운 신앙과 종교행위를 보장하게 된 것이다.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것은 4세기였다. 1,400년이 지난 후에 서양에서 드디어 종교의 자유, 즉 "용교령"이 허용된 것이다.

동양의 관계적 vs 서양의 개인적 특성을 강조하는 문화적 차이는 일상 생활에서도 잘 나타난다. 동양에서는 개인의 주소를 쓸 때 나라 이름, 도시 이름, 구역 이름 순으로 쓴다. 개인의 이름을 쓸 때도 가족을 대표하는 성을 먼저 쓰고,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맨 나중에 쓴다. 전체 속에서 관계적이 나를 찾아가자는 것이다. 개인은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유교에서 내세운 윤리인 인(仁)은, 두 사람을 가르친다는 합성어(人+人)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나를 찾자는 뜻은 결국 상대의 사정을 이해한다는 컴패션(compassion)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동양의 “관계주의” (relationalism)의 핵심이다. 61

반면 서양에서는 개인의 주소를 쓸 때 구역 이름, 도시명, 국가명의 순으로 쓴다. 개인의 이름을 쓸 때도 개인의 이름을 먼저 쓰고 가족을 대표하는 성을 나중에 쓴다. 전체라는 융합체보다 개인의 존재가 중요시된다. 관계는 개인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이것이 바로 서양의 “개인주의” (individualism)의 핵심이다.

서양에서는 개인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자신의 이익과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시 된다. 이에 따라 개인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법적, 사회적 제도가 만들어진다. 반면 동양에서는 개인은 전체와 개인의 관계로서 존재하며, 그 개인의 행동이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게 된다. 이는 개인의 개성뿐만 아니라, 개인의 소속과 상호관계도 중요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음양론에 따라서 전체와 개인이 모두 중요하다는 윤리를 추구하게 된다. 동양에서는 명함을 주고받는 것이 중요하며, 자신의 소속을 밝히는 것은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는 것과 함께, 전체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문화의 특성은 시간을 볼 때도, 동양에서는 전체적인 맥락과 상황을 고려하여 년도, 달, 날짜 순으로 시간을 파악한다. 관조적인 경향이 강하다. 이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당장의 행동이 아니라 전체적인 상황과 전후 관계를 고려하여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는 도교의 무위(無爲)사상과 관련이 있다.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그 테두리안에서 현재 할 일을 하자는 생각이다. 반면 서양에서는 당장의 행동과 순간적인 결정이 중요시된다. 이를 위해 날짜를 먼저 파악하고 그 다음에 월이나 년도를 따지면서 해당 날짜가 가지는 의미와 전체적인 상황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게 된다. 서양의 이러한 특성은 동양의 무위에 대하여 서양의 유위(有爲)적인 당장의 행위가 중요하게 된다.

내향적-수비적-포용적 동양 vs 외향적-배타적-진취적 서양

동양 문명의 내향적이고 서양문명의 외향적 특성의 대비는 일상적인 무의식적인 행동에서도 나타난다. 동양에서는 숫자를 셀 때, 펴진 손에서 손가락을 안으로 굽히면서 하나에서 열까지 센다. 반면 서양에서는 숫자를 셀 때, 꽉 쥔 주먹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펴면서 하나에서 열까지 숫자를 센다. 또 동양에서는 멀리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신호를 할 때 손을 아래로 젖는다. 반면 서양에서는 손을 위로 젖게 된다. 또 국이나 수프를 숟가락으로 떠 마실 때, 동양에서는 밖에서 안으로 숟가락을 움직여 국을 먹는다. 반면 서양에서는 안에서 밖으로 숟가락을 움직여 수프를 떠 마신다.

이러한 동양의 내향성은 구심력으로 서양의 외향성은 원심력으로 역사 속에서 표현된다. 서양은 외부환경이 항상 열려 있고, 확장되는 환경 속에서 민족이나 나라가 커진다. 서양문명이 동 지중해의 에게 해에서 출발, 지중해, 북해, 대서양, 태평양으로 진출하면서 정복과 확장을 거듭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마찬 가지로 서양의 모든 제국들은 외부로의 확장을 통하여 성장하고 소멸하였다. 반면 동양에서는, 특히 중국의 경우, 인구가 늘어나고 영토가 확장된 것이 외부 세력과 민족을 중국내부로 끌어들이는 구심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때가 많다. 몽골의 원나라와 만주족의 청나라가 그 좋은 예다. 일본도 한국도 원심력에 의하여 정복과 확장에 나선적이 거의 없으며 (일본의 경우 도요도미시대와 명치시대의 예외가 있기는 하다),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영토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미시적인 일상생활에서도 내향성과 외향성이 습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양에서는 수용적인 태도가 핵심으로 강조된다. 도덕경에는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은 지혜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맑음이다" 주장한다. 왕양명의 철학에서도 "산 속의 도적은 깨뜨리기 쉬우나 마음 속의 도적은 깨뜨리기 어렵다"는 것을 강조한다. 동양에서는 어려움이나 문제가 생기면 우선 자기를 돌아보고 문제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으려고 한다. 서양에서는 문제의 원인을 우선 외부에서 찾으려고 한다. 서양에서는 인간은 신을 본 따서 창조된 것이므로 문제는 다른 사람, 다른 나라에 있다고 생각한다. 동양에서는 인간은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모두 같으므로 문제가 있으면 자신이 문제의 소지를 없앨 수 있는지 살펴보고 그렇게 문제의 소지를 없애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해결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동서양 간의 내향적-수비적 vs. 외향적-진취적 대비는 스포츠에서도 나타난다. 동양의 전통 스포츠는 태권도, 유도, 궁푸에서 보듯이 자기 방어, 자기 제어, 자기 통솔을 목표로 한다. 반면 서양에서는 그리스-로마의 검투사 시합에서부터 현대의 권투, 검술시합과 같이 진취적인 공격에 의해 상대방을 제압하는 승리를 목표로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1914년 벌어졌을 때 대부분의 유럽사람들은 전쟁의 발발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였다. 이들은 모두 자기네 국가가 수개월내에 승리할 것으로 확신하였으며 수년간 승리 없이 전쟁을 치를 것으로는 상상하기 않고 있었다.62 영국과 독일 국민들은 광장을 몰려나와 전쟁선포를 환영하였다. 동양에서는 전쟁을 선언하는 두 나라 국민이 자발적으로 모두 전쟁을 환영하는 광경은 상상하기 어렵다. 전쟁은 평화를 지키지 못하는 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고 보고 있다. 동양에서는 전쟁 발발보다 전쟁 종식을 기념한다.

3) 과학은 서양철학의 대립론과 동양철학의 보완론을 모두 사용

물리학은 고전 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으로 구별된다. 현대 물리학은 20세기의 양자역학에서 새롭게 발견된 물리학이다. 이는 고전 물리학과는 전혀 다른 철학 체계 위에 구성된다. 놀랍게도 고전 물리학은 서양 선악론의 철학체계인 이원대립론을 지지하고 있으며, 반면에 현대 물리학은 동양 음양론의 철학체계인 이원보완론을 지지하고 있다.

카프라 (Fritjof Capra)가 “물리학의 도” (The Tao of Physics, 우리나라에서는 “동양사상과 현대물리학”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에서 동서양 문명을 넘나드는 철학과 물리학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핵심은 현대물리학은 이원보완론 체계위에 세워진 동양사상과 철학적 사유를 같이하고 있다고 주장한 점이다. 현대물리학은 서양은 그동안 금과옥조로 삼아온 이원대립론과 철학적 사유를 달리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이 파괴되고, 인과율도 파괴되면서, 두가지 존재 간의 대립성도 파괴된다.

서양의 과학, 특히 고전 물리학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 시기 전체를 걸쳐 이원대립론의 철학 체계위에 세워져 있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과 뉴턴의 역학체계는 절대성과 인과론을 아무런 유보도 없이 받아들였다. 절대성과 인과론은 이원대립론의 핵심이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 역학체계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절대적으로 증명되는 철칙이라고 여겨졌다. 절대성에 의하여 이를 증명하는 방법으로 인과론이 설정되었다. 원인을 알면 결과가 필연적으로 예측된다는 논리다. 이러한 절대성과 인과론에 대한 인간의 신뢰는 특히 산업혁명 이후 19세기의 서양에서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인간의 이성과 이에 바탕을 둔 경이로운 과학의 발전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달성하자고 꿈을 키우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낙관론은 20세기 현대 물리학의 등장으로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서양의 과학자들은 그 동안 절대성과 인과론 등을 불변의 원칙으로 믿어왔지만, 양자역학 등의 현대물리학의 과학적 발견으로 인해 이러한 가치들이 불완전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절대성이 상실되면 당연히 이를 설명하는 인과론도 무너지게 된다. 결과 현대물리학에서는 철학 체계로서 절대성과 필연성 대신 상대성과 개연성을 주장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가 별도의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며, 상호 호환성을 가진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의 유명한 방정식인 E = mc²은 에너지가 질량과 가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뉴턴의 기계적이고 절대적인 물리적 세계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게 되며,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상대성을 가지게 되었다. 상대성 이론(relativity theory)의 탄생이다. 아인슈타인의 사상은 근세 유럽철학의 지주였던 뉴턴의 사상체계를 흔들어 놓았다: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은 뉴턴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모든 주요 개념들을 산산조각 내어버렸다. 그 주요 개념들이란 절대공간·절대시간·최소입자라는 개념과 물리적 현상에 엄밀하게 적용되는 인과율, 자연에 대한 객관적 묘사가 가능하다는 생각 등이다.63

계시종교와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정신능력의 절대화’라는 주장은, 형이상학으로서 서양의 과학과 함께 종교에 필요한 철학적 이론으로 잘 들어맞았다. 그러나 절대성을 주장한 서양의 과학, 즉 고전물리학은 현대물리학에 의하여 절대성이 파괴됨으로써, 2천여 년 동안 신학과 형이상학이 의지하여 왔던 기초인 유클리드 기하학과 갈릴레오와 뉴턴의 역학체계가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서양인들이 신처럼 믿었던 과학적 진리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으며, 인간이 발견해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것은 하나의 망상임을 말하고 있다.

‘진리’라는 개념은 순수 기하학의 표현에는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진리’라는 용어는 궁극적으로 ‘현실적’ 물체·대상과 일치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하학’은 기하학적 개념과 실험적 물체 대상과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기하학적 개념 사이의 논리적 관계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64

덴마크의 핵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1885-1962)는 양자역학 분야에서 "상보성 원리"(Complementarity Principle)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서양의 과학과 철학이 중요시했던 이원적인 충돌과 상호 배제와 같은 대립론을 버리고, 조화와 음양론 같은 상보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수립했다. 닐스 보어는 동양의 태극도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즉, 서양의 분리와 대결 같은 개념과 대칭되는 동양의 조화와 상보 개념을 음양의 태극도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65 그는 음양의 태극도를 그의 가문의 문장으로 채택하였으며, "대칭되는 것은 보완적이다"(Contraria sunt complementa)라는 경구를 자신의 문장에 써넣었다.

닐스 보어(Niels Bohr, 1885 –1962)가 제작한 가문의 문장

문장에 그가 사용한 모토 Contraria sunt complementa (대칭되는 것은 보완적이다)가 들어있다

동양 태극도의 음양보완론을 따른 것이다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는 양자역학에 관한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양자내의 움직임을 관찰한 결과 확정적인 위치를 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관찰자의 개입이 이러한 위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서양과학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절대성이나 인과론 같은 확정적인 개념을 버리고 개연성이나 우연성 같은 임의적인 개념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확립했다.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이 의지하고 있는 철학적 체계를 살펴보면 현대물리학이 제공하는 철학 체계는 실로 서양 사상사에 패러다임의 변천이라는 의미를 뛰어 넘는 의미를 가진다. 계시종교로부터 시작하여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시현론,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칸트와 헤겔의 형이상학, 다윈의 진화론, 서양의 이데올로기와 사회다원주의 등이 기반하고 있던 철학 체계가 모두 서양의 고전물리학의 철학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은 수천 년간 "대칭되는 것은 대립적이다"라는 기본 개념을 자연과학과 인문학에서 철칙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양에서는 이를 기초로 하여 과학으로 자연을 정복하자는 기도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질서 이론”(chaos theory)에 의하여 인간이 자연세계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꿈도 접어야 했다. 이 분야는 특히 기후의 예측과 관련하여 우리의 한계를 명확히 해주었다.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인간이 컴퓨터의 발달로 고도의 계산이 기능해졌고 복잡한 경우의 수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기후를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무질서의 가능성을 간과한 개념이라는 것이 곧 들어나게 되었다. 즉 모든 과정 곳곳에서 항상 새로운 방향으로의 변화의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양과학이 오랫동안 고민하던 빛의 본질에 대해 파동과 입자의 두 가지 성질을 모두 가진다는 모순을 받아들여야 할 때, 그리고 최소입자가 양자, 전자, 중성자 외에도 수백 개의 소립자로 분해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때, 과학자들은 물질의 본질이나 최소입자를 이해하는 데 대한 신념이나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물리적 발견에서 서양 물리학자들이 가장 고민했던 것은 이를 설명할 철학적인 개념의 부족이었다. 과학적 발견은 귀납적인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또한 놀랄 만큼 연역적이다. 즉, 새로운 발견을 정리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이론과 개념이 필요한 것이다.

우주와 입자라는 거대한 세계와 미세한 세계의 발견은 서양 문화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절대적이고 기계적인, 점진적인, 배타적인 개념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서양 문명의 기초를 이루는 이러한 개념들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뉴턴의 물리학, 다윈의 진화론과 같은 서양철학에서도 우주의 기본 원리로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에, 서양 과학이 이러한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은 많은 어려움을 초래했다. 우주의 현상과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상대성 이론, 불확정성의 원리, 상보성의 원리, 그리고 진화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굴드(Steven Jay Gould) 교수의 단속평형론(punctuated equilibrium) 등은 모두 서양인들의 고전물리학적 개념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웠던 발견이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상대성, 불가지론, 개연성, 조화의 개념들이 서양문명의 절대적이고 기계적인, 점진적인, 배타적인 기초개념 보다 자연을 이해하는데 적실성이 있다고 이해되어 왔다. 서양 현대 물리학에서 파악한 개념들과 동양 철학의 기초 개념들이 만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66

결국 우리 과학은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의 체계 두가지를 모두 사용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지구상에서는 여전히 적용 가능하다. 그러나 우주로 나아가면 그 절대성이 상실된다. 뉴턴의 물리학은 지구의 생활 속에서 적절한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에 대해서 유용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그 범위를 벗어나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두개의 철학체계, 즉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의 철학체계는 별개인가 하나로 합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문제를 놓고 닐스 보아와 아인슈타인의 토론이 있었다. 현대물리학에서 확률적으로만 양자세계를 해석할 수 있다는 닐스 보아의 이론에 아인슈타인이 반대하면서 “신은 주사위를 사용하지 않는다 (He does not play with dice)” 라고 말했다.67 그는 두가지 현실을 합칠 수 있는데,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이론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결정론적 관점 보다는 미시세계에서 자연은 확률적으로 작동한다는 닐스 보아의 의견이 점차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학은 이원대립론과 이원보완론, 다시 말하면 서양의 철학체계와 동양의 철학체계를 모두 활용하고 있다. 즉 신과 도의 개념에서 발현된 사유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신과 도, 어느 것이 옳은 지 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은 우리의 실생활에서 적실성이 크지 않다. 신과 도의 개념은 동서양 문명속에서 자기보존 원칙에 따라 우리와 함께 공존하게 된다. 자기보존에 충실한 본능 측면에서 보면 선악론과 계시종교는 여전히 인간에게 필요성을 제공하고 있다. 결국 선악론과 음양론은 동서양 문명을 통하여 인간이 우주와 인간사를 보는 두가지 측면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4) “인간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은 신 또는 자연의 힘이다”: 스피노자와 순자

동서양의 인간사는 음양론과 선악론을 따르고 있다. 이는 도와 신의 철학체계 속에서 일어난다. 도는 곧 자연의 길 또는 자연으로 번역할 수 있다. 우리가 도나 신을 따르는 것은 이성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동서양 어디서 태어났는 가에서 결정된다. 동양에서 태어났으면 대부분 도의 개념을 따르고, 서양에서 태어났으면 대부분 신의 개념을 따르게 된다. 결국 인간 속에 신과 도의 철학체계가 모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체계는 동서양 문명으로 나뉘어 특성을 발휘하게 되지만, 심층적으로 분석하면 한 인간의 내부에서 이러한 두 가지 체계의 특성이 상황에 따라 발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은 신 또는 도의 힘이 되기 때문에 결국 신과 도는 동일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상을 펴는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서양의 스피노자가 대표적인 사상가다. 동양에서는 그 보다 2천년 앞선 순자가 아주 유사한 철학 체계를 표현하면서 거의 동일한 생각을 상정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신과 도의 합치가 아니라 충돌이 생기게 된다. 동양과 서양 문명의 충돌은 동양의 자연철학과 서양의 계시종교의 충돌로 표현된다. 이러한 충돌은 동양 보다 서양에서 발생하였다. 이러한 충돌은 철학 체계의 충돌이라 기 보다는 자신들이 유지하고 있던 기득권을 수호하는 형식으로 역사적으로 진행되었다. 인간본성은 결국 자기보전(self-preservation) 원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행태는 철학 체계를 포함하여 모두 자기보전 원칙으로 귀결된다.

르네상스 이후에 서양인들은 자연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자연의 법칙이 계시종교의 도그마과 충돌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서양에서 자연의 중요성을 지적한 사람들은 과학자들이다. 계시종교가 지배하고 있던 서양에서 계시종교의 도그마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곧 마녀사냥의 희생이 되기 때문에 철학보다 과학자들의 발견이 앞설 수 밖에 없었다. 이들 과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1473-1543), 케플러(1571-1630), 갈릴레오(1564-1642)와 같은 천문학자였다. 이들은 천체관측을 통하여 신의 계시와는 다른 자연의 법칙을 증명해낸 것이다. 성경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주장한 천동설이 근거가 없으며 지동설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자연의 법칙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자연의 법칙과 계시종교의 도그마 간의 충돌을 야기하게 된다.

이러한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들의 발견에 뒤이어 베이컨(1561-1626) 같은 철학자가 자연에 매료되어 있었다. 르네상스 후기의 인물인 그는 계시종교의 엄격한 탄압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면서 자연의 중요성을 극도로 강하게 역설하였다:

인간은 자연의 노예다. 자연을 해석할 뿐이다. 인간의 이해력은 자연에 대한 생각과 자연의 진실에 대한 관찰에서만 나온다. 이것 외에는 인간은 아무것도 알 수도 없고 또 할 수도 없다. 68

과학자들과 베이컨 등은 자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스피노자(1632-1677)는 계시종교와 자연철학을 연결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표현하였다. 그는 “신과 자연은 같다”고 선언하였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이라는 책에서 “신 또는 자연”(God or Nature)이라는 표현을 거듭 사용하면서 신과 자연, 즉 신과 도를 동일시한 것이다. 동서양 문명의 핵심을 일치시키는 철학체계를 내세운 최초의 사상가가 되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은 불가능하다……인간의 존재를 유지해주고 있는 것은 신 또는 자연의 힘이다. 69

그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서양에서 신으로 불리는 존재는 자연과 같을 수 밖에 없다고 설파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신의 계시를 따르는 시현론에 몰두하고 있는 서양 철학 체계의 틀을 파괴하는 혁명적인 선언이다. 스피노자가 자연을 중시하였고 동양문명이 자연 철학에 기초하였으므로 몇몇 사람들은 스피노자가 동양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비판하였다. 말브랑슈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로부터 스피노자는 “동양사상가” 라고 평가되기도 하였다.

스피노자는 계시종교의 핵심 도그마에 대한 내용을 윤리학에서 서술했다: “신은 아무런 목적이 없다.” “신은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는다.” “인간은 신을 사랑해야 하지만, 신으로부터 사랑을 기대할 수는 없다.” “신과 자연은 동일하다.” 나아가 스피노자는 계시종교의 발원에 대해서 설명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신을 숭배하는 방법을 개발해 낸다. 그래서 신이 자신의 이웃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도록 하고, 자신의 끝없는 탐욕과 눈먼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신이 자연의 진행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바꾸어 주기를 원한다. 이러한 편견이 미신으로 발전되고 인간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잡게 된다. (스피노자 윤리학, I-Appendix)

스피노자에 대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탄압이 아주 심했다.70 기독교는 AD 4세기 로마가 국교로 선포한 이후 계속 서양의 국교로 남아있었다. 그는 수백 년간 “사탄, 사악한 인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 등으로 불렸다. 때문에 많은 서양 사상가들이 그의 저서를 몰래 읽고 감명을 받게 된다. 레싱(Gotthold Lessing, 1729-1781)과 괴테(Goethe, 1749-1832)같은 철학자가 이에 속한다. 레싱은 스피노자 같은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였고, 선지자를 통한 신의 시현에 반대하여, 당시 독일 철학계를 지배하던 이상주의 철학자들로부터 많은 반대와 뒤따르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레싱은 스피노자에게서 배운 많은 사상을 죽을 때까지 공개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스피노자의 철학을 신봉하였다:

스피노자의 철학(Spinozism)을 무시하고는 아무런 철학이 성립하지 않는다.71

괴테는 스피노자처럼 범신론자로 불렸다. 괴테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읽고 그의 사유 체계의 기초를 여기서 형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내가 머리속에 있는 많은 생각들을 정리하려고 노력하던 중 드디어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읽게 된다. 얼마나 많은 것을 스피노자를 읽고 배웠는지 이루 설명하기 힘들다.”72 이런 고백은 괴테가 1774년 25세에 쓴 것으로 1832년 괴테가 죽은 4년후 1836년에 발표된다. 스피노자가 괴테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독일 시인 하이네는 괴테를 가리켜 “문학의 스피노자”라고 평하였다.73

역사적으로 스피노자가 신과 도가 같다고 취급한 최초의 사상가는 아니다. 신과 자연이 동일하다는 생각은 BC 3 세기에 크리시푸스(Chrysippus)라는 그리스 철학자가 주장한바 있다. “우주자체가 신이다”(The Universe itself is God)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크리시푸스의 저서는 남아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저서 속에서 언급되면서 그의 주장이 전해 내려온다.

스피노자는 “신 또는 자연” 라는 표현은 “자연을 창조한 신”을 믿던 서양에서 커다란 철학적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야기했다. 신과 자연이 같다면 신의 문명에서 중요하게 취급해온 신의 천지창조, 기적, 영혼의 존재 같은 것이 모두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사상을 받아들이려면 서양의 신은 동양의 도와 같아져야 한다. 그렇다면 선지자에 의한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시현론은 도가 주장하는 절대진리는 표현될 수 없다는 불현론으로 탈바꿈하게 된다.74 서양문명과 동양문명의 핵심 체계가 바뀌는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동양에서는 자연(도)과 신의 충돌 문제가 별로 발생하지 않았다. 서양의 패러다임이 동양을 지배한 19세기 이후에도 동양의 도에 대한 철학체계는 바뀌지 않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 계시종교를 숭배하는 사람은 1-2% 정도에 머물고 있다. 한국(남한)에서 30% 이상의 사람이 기독교를 믿는다고 선언하지만, 이들은 다른 사상에 대하여 아주 관대하며, 종교 간의 투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동양에서 BC 5-3세기 전국시대를 통하여 민족국가가 서양 보다 2천년 전에 이미 탄생하였고 이를 통하여 자연철학과 민본사상이 철학체계의 중심으로 서게 되었기 때문이다.75 전국시대의 순자(荀子, 310-235 BC)의 자연철학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76 순자는 도교와 유교사상을 융합하면서 인간이 당시 유행하던 미신과 무속 속에서 살지 않도록 주장했다. 도덕경에 동양 자연관의 모든 기초가 있지만, 순자에 의하여 현실적으로 분명하게 표현된다.

하늘에 대해서 우리는 그 운행이나 현상만 알 수 있을 뿐이다…사회의 안정과 변란은 하늘이 정하는가? 아니다. 태양, 달, 별들은 성인이나 폭군 때나 똑같이 움직인다. 그러나 성인 때는 안정이, 폭군 때는 변란이 생긴다. 안정과 변란은 하늘에 달려 있지 않다. (순자 17-9)

순자의 저서에서는 도가 인간의 형상을 가지고, 그의 말과 행동을 인간에게 보여주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 일체 없다. 또한, 기적을 행하여 인간에게 자신을 따르도록 하는 모습을 그린 적도 없다. 그는 “기우제를 지내지 않아도 비는 온다” 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상한 자연현상이 특별하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혼란과 무서움을 느끼는 것은 잘못이다…기우제를 지내지 않아도 비는 온다. 기우제를 지내도 비는 온다. 지도자는 기우제를 문화행사로 여긴다. 문화행사로 보는 것은 좋다. 사람들은 신이 비를 오게 해준다고 생각하지만, 비를 (귀)신이 내려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흉하다 (순자 17-9)

순자는 "사회의 안정과 변란은 하늘이 결정하는 것일까?” 라고 물으면서 답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은 거의 2천년 후에 셰익스피어(1564 – 1616)에 의해 서양에서 동일하게 제시되었다:

친구 브루투스여, 우리가 (쥴리어스 씨저의) 부하 라는 사실은 하늘에 있는 우리의 별자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만든 문제임을 잊지 말게 77

순자는 “인간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은 신 또는 자연의 힘이다” 라는 스피노자의 철학과 동일한 철학 사상을 펴고 있다. 다만 순자는 도를, 스피노자는 신을 사유의 중심으로 표현했다: “도(신)는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을 위하여 도(신)의 길을 따라야 한다.” “도(신)의 길은 인간본성에 나타난다.” “도(신)를 사랑하는 사람이 도(신)가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사람이 자연의 일부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사람을 포함하여 우주의 모든 것들은 도(신)의 힘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표현은 순자의 “천론”편에서, 그리고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찾을 수 있다. 아래 구절들은 순자와 스피노자 두 사람의 철학이 유사한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스피노자가 그의 저서 윤리학에서 정의한 신을 도로 대체하여 그대로 기술한 것이다:

도는 무한한 존재이다; 무한한 속성을 가진 도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무한한 실체인 도는 나눌 수 없다; 도 이외에는 어떤 실체도 있을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도 안에 있다, 도 없이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 일 수밖에 없다; 마음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지식은 도다; 마음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덕목은 도이다; 도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도는 어떠한 즐거움이나 고통의 감정으로 좌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을 포함한 세상만물이 스스로를 보존하는 힘은 바로 자연 즉 도의 힘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힘, 즉 인간의 본질의 표현으로서의 힘은 자연 즉 도의 무한한 힘의 일부이다. 아무도 도를 미워할 수 없다; 도를 사랑하는 인간은 그 보답으로 도로부터 사랑을 기대할 수는 없다.

순자와 스피노자의 철학은 21세기에 우리에게 이성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그만큼 합리성이 강하다. 그러나 우리는 문화는 호모 사피엔스의 두뇌가 만들어 낸 것인데, 이성과 본능이 함께 작용한 것이지 절대로 호모 사피엔스의 뉴 브레인인 이성이 홀로 작용하여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합리적으로만 판단하면 시현과 불현, 즉 신과 도의 철학은 하나로 합쳐 질 수 있고 통일되어야 한다. 신과 도의 충돌은 없어질 수 있다.

현실에서 신과 도는 별도의 문명체계를 형성할 만큼 크게 다르다. 동서양 문명의 특성은 철학, 문학, 교육, 행동에서 나타난다. 동서양 문명으로 지구상에서 시현과 불현이 공존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서양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크게 줄었지만 사상체계는 여전히 시현의 체계를 따르고 있다. 종교의 자유를 헌법에 명시한 미국에서 20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정치지도자들은 교회 의식을 따르고 신의 가호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성의 판단과 현실의 필요성 간의 갈등 속에서 인간의 심정적 실체는 이성의 판단보다 결국 자기보존 본능을 따라가게 된다. 신과 도의 개념 출현 이전에 이미 인간의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자연이나 인간이나 모든 존재가 자기보존 원칙을 따라가는 것은 인간이 이성만이 아니라 이성과 본능을 합친 인간본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개인으로써 우리는 필요에 따라 우리도 모르게 동양인의 특성과 서양인의 특성을 모두 우리 인생에서 보여주게 된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기능을 할 때 상황에 따라 때로는 동양인처럼 그런 특성을 보이고 때로는 서양인처럼 그런 특성을 보이게 된다.78

동서양 문명의 장점을 꼽을 경우 서양의 진취성과 동양의 포용성을 내세울 수 있다. 서양 문명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근대 산업혁명과 세계정복 시대 까지 진취성을 장점으로 내세워 왔다. 동양은 포용성으로 개인간의 관계나 국가간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관리해왔다. 자신의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종교전쟁이나 이데올로기 전쟁에 빠져 들이 않는 포용성이 바로 동양문명의 장점이다. 우리 개개인은 이러한 포용성과 진취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시대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상황에 따라서 인간은 이 두가지 특징을 모두 사용하게 된다.

  1. 53

    Baruch Spinoza, Ethique, 앞의 책, p.285.

  2. 54

    도 사상에는 죄와 벌의 개념을 쓰지 않는다. 동양에도 “하늘에 죄를 지었다”, “천벌을 받는다” 라는 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죄와 벌의 개념과 비슷한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도교의 도는 선악의 피안에 있으며, 선한 사람은 도를 따르게 되므로, 결국 도가 선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도는 이롭게만 하는데, 선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의 결과로 도를 따르지 않아 “스스로 해를 자초하는 것”이지, 도가 징벌을 내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순자는 하늘의 상벌을 믿지 않는다고 기록했습니다. 또 인간의 행동이 하늘에 감동을 주어 하늘을 움직인다는 신비주의의 근간인 천인감응(天人感應) 설을 믿지 않는다고 기록했습니다. 즉 하늘이 선한 사람을 상을 주고 선하지 않는 사람을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은 일정한데 사람이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의하여 스스로에게 길과 흉을 초래할 뿐이라는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생각을 따르면 선악은 인간의 범주에 있는 것이지 하늘 즉 도는 그 피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평화와 전란은 하늘이 결정하는 것인가? 하늘의 해와 달, 별들의 움직임은 성군 우왕 때나 폭군 걸왕 때나 같았다. 똑 같은 하늘의 움직임을 가지고 우왕은 평화를 걸왕은 전란을 초래했다. 그러므로 세상의 평화와 전란은 하늘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순자 17-5)

  3. 55

    헤시오드는 BC 650년경에 바로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또 “거지는 거지를 질투하고, 시인은 시인을 질투하게 되어있다”은 말을 남겼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농원에서의 가난한 삶에 대하여 불평하는 글을 남겼는데, 그것은 일반 농사군의 가난이 아니라 노예를 소유한 그리스 시민으로서의 불평이었다.

  4. 56

    Ibid., Kindle locations 608–618.

  5. 57

    Rev. Alexander Roberts and James Donaldson, eds., “On the Anger of God,” chap. 13 in The Works of Lactantius, vol. 22 in Translations of the Writings of the Fathers down to A.D. 325 (Edinburgh: T. & T. Clark, 1871), 28.

  6. 58
  7. 59

    Laërtius, The Lives and Opinions of Eminent Philosophers, Kindle locations 7031–7035.

  8. 60

    Ibid.

  9. 61

    서양의 개인주의(individualism)에 대치되는 동양의 철학은 관계주의(relationalism)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동양의 관계주의는 서양 철학 체계에서 사용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서양 단어에 동양의 관계주의를 표현하는 철학적 개념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서양에서는 개인과 종교, 철학적 진실, 이데올로기적 진리의 관계를 중시하는 의미를 가진 개인주의가 중요하다. 그러나 동양의 관계주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며 상대에 대한 배려를 통하여 나의 이익을 지킨다는 뜻을 가진 철학이다. 개인이 아니라 개인-개인 사이의 관계를 중시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서양의 개념인 관계주의(relationalism)를 사용하기로 한다. 서양의 관계주의는 인문적인 표현이라기 보다는 과학적인 표현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이점은 서양의 현대물리학적인 개념들이 과학적으로는 정착되었으나 인문적으로는 아직 서서히 침투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10. 62
  11. 63

    Fritjob Capra, The Tao of Physics, 앞의 책, p.50

  12. 64

    Albert Einstein, La Relativite, 앞의 책, p.8

  13. 65

    서양과학이 오랫동안 고민하던 빛의 본질에 대해 파동과 입자의 두 가지 성질을 모두 가진다는 모순을 받아들여야 할 때, 그리고 최소입자가 양자, 전자, 중성자 외에도 수백 개의 소립자로 분해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때, 과학자들은 물질의 본질이나 최소입자를 이해하는 데 대한 신념이나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물리적 발견에서 서양 물리학자들이 가장 고민했던 것은 이를 설명할 철학적인 개념의 부족이었다. 과학적 발견은 귀납적인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또한 놀랄 만큼 연역적이다. 즉, 새로운 발견을 정리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이론과 개념이 필요한 것이다. 우주와 입자라는 거대한 세계와 미세한 세계의 발견은 서양 문화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절대적이고 기계적인, 점진적인, 배타적인 개념으로는 설명될 수 없었다. 서양 문명의 기초를 이루는 이러한 개념들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뉴턴의 물리학, 다윈의 진화론과 같은 서양철학에서도 우주의 기본 원리로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에, 서양 과학이 이러한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은 많은 어려움을 초래했다.

  14. 66

    양자물리학의 등장 이전에는 서양의 과학과 철학이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는 대원칙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원자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 “자연은 도약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과학자들은 전자가 기저상태(ground state)에서 여기상태(excited state)로 실제로 “도약”한다는 현상을 발견하게 되면서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는 인과관계들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발견은 레이저 광선의 개발 등을 가능하게 하였다.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과정 곳곳에서 도약이 전제하는 새로운 방향으로의 변화의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서양의 근대문명 전체를 지배해온 인과율은 절대적이 아니며 제한된 범위안에서만 작용하게 된다.

  15. 67

    일반적으로 아인슈타인이 God does not play dice로 말한 것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계시종교를 믿지 않았으므로 God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을 뜻하는 He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신 보다는 도에 근접한 표현이다. Max Ehrmann 이 그의 시 Desiderata 에서 “Therefore be at peace with God, whatever you conceive Him to be” 에서 사용한 He 라는 표현과 같다. 이는 모두 스피노자가 표명한 God or Nature 에서 Nature를 표명하는 자연의 법칙을 뜻한다. 결국 동양의 도와 같은 표현이 된다.

  16. 68

    Bacon, Francis (2013-07-29). Complete Works of Francis Bacon (Kindle Locations 4574-4580). Minerva Classics. Kindle Edition.

  17. 69

    Spinoza, Ethics, vol.1, IV–Prop. IV

  18. 70

    스피노자는 계몽시대에 유럽에서 살던 유대인이다. 이베리아 반도를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약 700년간 지배한 이슬람 제국은 유대인에게 관용적인 정책을 폈기 때문에 로마제국에 의하여 추방된 유대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많이 거주지를 옮겼다. 스피노자 가족도 여기 포함됐다. 그런데 15세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면서 유대인들의 재산에 대하여 욕심을 내게 되었다. 새로운 지도자들은 유대인 재산을 탐내어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재산을 놓고 포르투갈을 떠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강요했다. 그래서 스피노자 가족은 당시에 서양에서 가장 개방적이었던 네덜란드로 다시 이민을 가게 된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계시종교에 반대하고 자신의 철학을 펴 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서양에서 신으로 불리는 존재는 자연과 같을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19. 71

    University Press of America, Gerard Vallee, The Spinoza Conversations between Lessing and Jacobi Jacobi,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8, p.29

  20. 72
  21. 73
  22. 74

    여기에 그리스의 불현론자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드러난다. 우리는 융(Carl Jung)이 “만약 서양세계가 헤라클리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면, 서양인들은 오늘날 기독교인이 아니고 중국인처럼 되어있을 것이다” 라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헤라클리투스가 살던 시대에는 그리스에서 불현론자와 시현론자가 철학적으로 다양성을 이루며 같이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이후에는 불현론자들이 서양의 철학사에서 모든 세력을 잃어버리고 서양 문명은 완전히 시현론의 세계로 빠져드는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이제 다시 불현론의 철학세계를 경험하려면 멀리 2천5백년 전의 그리스의 불현론자의 철학세계를 다시 찾아가야 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2천년을 넘어서는 시대적 전환을 서양인들에게 선언한 것이다.

  23. 75

    민족국가 출현이 어떻게 사상체계를 변형시키는 지 하는 부분은 동양과 서양 제3장 1-3 절에 설명되어 있음

  24. 76

    송 나라이후 유행한 신유학에서는 순자가 아니라 맹자를 중시하고 순자를 멀리하였다. 그러나 신유학이 유교의 순수성에 집착함으로써 제한적인 측면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동양의 자연철학을 두루 포함하고 있는 순자가 서양 철학과 비교하는 측면에서 더욱 중요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25. 77

    William Shakespeare, Julius Caesar, act 1, scene 2, lines 140–141.

  26. 78

    Richard Nisbett, The Geography of Thought: How Asians and Westerners Think Differently (Free Press, 2004), Kindle edition. Kindle Location 27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