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 계시종교, 신(神) vs 자연철학, 도(道) · 제2장

신과 도는 우주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졌나?

약 21분 · 주 15개

1) 우주가 신보다 먼저 있었다 vs 신이 우주보다 먼저 있었다

“도는 귀신을 신령하게 하고 상제를 신령하게 하였으며, 하늘을 만들고 땅을 만들었다.” (장자 내편 대종사大宗師). 동양문명에서는 자연을 대변하는 도가 신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가지게 되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외감을 동양에서는 도를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 도의 철학을 통해서 본 자연은 “그대로 있는 것” 이고 목적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다:

자연은 무한하고 영원하다. 왜 자연은 무한하고 영원한가? 그것은 자연에 목적이 없고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도덕경 7)

이러한 표현은 그리스의 불현론자 헤라클리투스가 표현한 우주론과 맥을 같이한다:

우주, 코스모스는 영원한 것이며, 신이나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며, 언제나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다.23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는 그 시초가 있었다고 생각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사물은 시초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사실은 우리의 상상력의 빈곤 때문이다”.

자연은 스스로의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24

이는 스피노자(1632-1677)의 자연관과 유사하다. 스피노자는 자연 그 자체를 신으로 보았다:

자연은 어떤 목적을 위해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신 즉 자연이라고 부르는 이 영원한 존재는 그것이 존재하는 것과 꼭 같은 필요에 의하여만 작용할 뿐이다…자연은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행위도 마찬 가지다. 그 존재처럼 그 행위에는 원칙도 목적도 없다.25

동양문명에서 자연, 우주가 신 보다 먼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반대로 서양문명에서는 신이 우주보다 먼저 있었다고 주장한다. 서양 시현론에서는 신이 천지를 창조하였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인간은 그 중심에 위치한 존재가 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2-6)

신은 6일 동안 우주를 창조한다. 창조한 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날, 빛. 둘째 날, 하늘. 셋째 날, 바다와 육지 그리고 식물. 넷째 날, 해, 달, 별. 다섯째 날, 물고기와 새. 여섯째 날, 육상 동물과 사람 (사람은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 졌다). 그리고 7일째 쉬게 된다. 이로서 세상은 무질서에서 질서로, 혼돈에서 조화로 나가게 된다. 이러한 창조는 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

중국의 천지 창조 신화에서 반고는 거대한 도끼로 혼돈을 쪼개어 하늘과 땅을 나누고, 하늘을 1만 8천년간 떠받들고 성장하고, 죽으면서 그의 몸은 자연으로 변했다. 26 눈은 해와 달, 호흡은 바람과 구름, 목소리는 천둥, 피는 강과 바다, 뼈는 산맥, 털은 초목, 땀은 비, 벼룩은 동물과 인간이 되었다.

태초에 반고라는 신이 있었다……죽을 때가 되어 그의 몸은 자연으로 변했다…… 그의 머리카락과 털은 풀과 나무가 되었고, 그의 눈은 해와 달이 되었다…… 그의 몸에 붙어 살던 벼룩들은 지구상의 여러 동물과 여러 종족의 인간이 되었다.27

동양에 존재하는 창조신화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서양의 창조론과는 달리 동양의 창조신화는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게 된다. 동서양 인들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통하여 다른 우주관을 가지게 된다. 특히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취하는 위치를 설정하게 된다.

성경의 창세기에는 6일간의 창조의 시간이 기록되어 있으며, 최초의 인간 아담이 930년을 살았고, 그 후손들이 얼마나 살았는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약 복음서의 시작은 아브라함에서 예수에 이르는 족보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930세를 살고 죽었더라.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807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912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세기 15:4-8)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마태복음 1:1-17)

성서는 천지청조로부터 예수의 탄생 까지 정교하게 날짜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서양인들이 천지 창조 날짜를 계산하게 되었다. 결과 6천년 전쯤에 천지창조가 일어났을 것으로 보았다. 어러한 계산법은 계속 이어지고 발달되어 중세 초기에는 정확한 날짜도 제시되었다. BC 3952년 3월 18일이 제시된 것이다. 이는 모세5경의 창세기를 깊이 연구하여 새로이 날짜를 계산한 것이다.

“6천년 전의 천지창조설”은 중세 이후에도 계속 굳게 믿어졌다. 놀랍게도 서양에서는 계몽시대 후기인 18세기 까지만 하여도 우주의 창조가 BC 약 4천년전쯤에 있었다는 생각을 사실로서 받아들였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천지창조 이후 5천년이 좀 넘는 시간이 흘렀다”고 설교하였고, 루터도 “우리는 모세로부터 지구는 약 6천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배웠다”고 설교하면서 6천년 창조설을 믿었다. 쉐익스피어도 그렇다. 그의 작품 속에서 “불쌍한 세상은 거의 6천년을 살게 되었다 (The poor world is almost 6,000 years old)” 라고 쓰고 있다.28 많은 과학자들이 새로이 발견된 사실에 근거하여 천지창조의 시기를 계속 업데이트 하고 있었다. 만유인력을 발견하고 케플러의 법칙이 바로 만유인력에 의한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지동설을 더욱 확고하게 한 과학자 뉴턴(Isaac Newton, 1642-1727)도 천지창조설을 포함한 성서의 제반 도그마를 굳게 믿었다. 그는 성서에 쓰여진 대로 천지창조의 날짜를 계산하여 지구가 그때까지 알려진 것 보다 약간 달리 5,700년쯤 되었다고 새로운 천지창조 시기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서양 계몽주의 시대 사상가들은 계시종교의 비이성적인 측면에 대한 의문을 품고 이에 대한 이성적인 설명을 시도하였다. 보시우스(Isaac Vossius)는 1660년에 출간한 저서 “세계의 참된 시작에 대하여” 라는 책에서 중국의 문화가 적어도 BC 2,900년에 시작되는데, 이것은 노아의 홍수 보다 500년 이상 앞선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성서에 의한 계산법은 틀린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볼테르는 이 주장을 계시종교의 천지창조설이라는 도그마를 공격하는데 활용하였다. 29 나아가 볼테르는 중국문명을 기독교 이외의 인간의 문명으로 인정하는 사상가가 되었고, 그의 철학 사전에 중국문명을 서양문명과 다른 문명으로 취급하였다.

2) 기적을 시행하는 신 vs 기적을 무시하는 도

서양의 창조론에서는 자연을 창조한 신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된다. 신의 개념에서는 선지자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선지자가 신의 존재와 신에 대한 셜명을 인간에게 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이 기적을 시행하는 신이다. 초자연 적인 신은 기적을 시행함으로써 자연위에 존재하는 권위를 확립한다. 반면 도는 자연 자체다. 도는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는 기적을 생각할 수 없다. 도의 모든 철학체계는 자연에 기반을 둔 자연철학이다. 당연히 도에는 선지자가 없고 사제계급도 없다.

서양의 신은 선지자 모세의 간청에 못 이겨 이름을 알려주고, 기적을 보여주고, 모세와 1대 1로 이야기도 하며, 시나이 산에서 형체의 일부를 보여주기도 하고, 정의의 신, 분노의 신, 질투의 신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손수 손가락으로 십계명을 돌에 새겨서 주기도 한다. 모두 신이 인간사에 개입하는 증표가 된다. 선지자는 신의 대표자가 되며 결국 사제계급을 형성하며 그 정상에 위치하게 된다. 계시종교가 형성된다. 후계자도 생긴다. 모세의 후계자는 여호수아 인데 그는 태양을 멈추는 기적을 신에게 요청하여 성공한다. 이로서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고 약속된 땅을 점령하게 된다.

동양에서 인간은 자연위에 존재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의 일부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모체로 하여 자연 속에서 진화내지 변화해 왔다는 점을 특별한 이론이나 설명 없이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동양문명은 자연과 도를 중심으로 한 “자연철학” 체계를 따른다. 그러나 서양의 초자연적인 신을 믿는 “계시종교”의 관점에서 동양의 자연철학을 분석하자면 유가는 유교가 되고 도가는 도교가 된다.30 그러나 유가나 도가의 철학에는 어떠한 초자연적 신에 대한 언급이나 분석이 없다. 선지자도 없고, 사제계급도 없다.

동양의 도는 이름도 없고, 인간과 대화도 하지 않고, 형체도 없고,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어떤 특이한 형용사로 불리는 것도 거절한다. 도는 절대진리로 인간에게 자연으로서 접근하며 인간과 언제나 같이 있다. 기적 같은 특이한 형태로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는다. 자연철학 체계를 유지한다. 노자는 선지자가 아니다.

서양의 신의 이미지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으며 신과 인간이 계약을 맺는 이벤트에 집약되어 있다. 서양의 신이 동양의 도와 다른 점 중의 하나는, 인간 사회에 개입할 때 초자연적인 기적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신은 자연을 창조한 초자연적인 존재다. 모세는 신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는 소명을 부여받았다. 모세는 이를 이행하기 위해 신의 도움을 요청했고, 그 도움은 기적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세가 대답하였다.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제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주님께서 당신에게 나타나셨을 리가 없소.’ 하면 어찌합니까?” 주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지팡이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을 땅에 던져라.”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지니, 뱀이 되었다. (출애굽기 4:1-3)

이처럼 모세의 요청에 따라 신은 기적을 행하기 시작한다. 신은 나일강의 물이 피가 되도록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여 이집트의 맏아들과 맏배를 죽이는 것까지 계속되는 10가지 재앙이라는 기적을 통해 파라오를 설득하고, 위협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탈출을 돕게 된다. 그 이후에도 신은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을 돌보아 주고, 모세를 도와 홍해를 갈라 통로를 만드는 기적을 행하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양식으로 뿌려주는 기적도 행하게 된다.

반면 초자연적인 기적이라는 현상에 대하여 도덕경에는 일체의 언급이 없다. 세상만물에 자연의 도가 내재해 있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연현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유명한 구절도 기적을 믿지 않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유교는 기적, 주술, 요술, 미신 같은 것에 관심이 표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

공자는 괴怪, 력力, 난亂, 신神에 대하여는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논어 7:20)

그리고 이러한 괴력난신과 연관된 독트린에 대한 연구는 하지 말도록 경계를 표시한다. 이런 차원을 강조하기 위하여 군자는 그릇처럼 남이 설정해 놓은 이상한 논리를 그대로 따르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뜻의 “군자불기”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君子不器). (논어 2:12)

이러한 자세는 전국시대 말기 사상가로서 유교와 도교의 사상을 결합시키려고 노력한 순자(筍子, c 298-238 BC )에 의하여도 더욱 뚜렷하게 설명된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숲 속의 나무들이 소리를 내어 운다. 사람들이 두려워한다. 이것이 무슨 전조일까 하고 두려워한다. 아무 전조도 아니다. 자연의 변화일 뿐이다. 음양의 작용일 뿐이다.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이러한 현상을 이상하게 보는 것은 좋으나.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이다. (순자 17:8)

반면 신은 서양문명에서 동양의 도와 다른 행적을 보인다. 기적을 행하는 신은 시내 산 근처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면서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과 신 사이에 엄격한 계약이 맺어지게 된다:

너희가 내가 일러준 것을 모두 실행하면, 나는 너희 원수들을 나의 원수로 삼고, 너희의 적들을 나의 적으로 삼겠다 (출애굽기 23:12)

이제 내가 계약을 맺는다. 나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어떤 민족에게서도 일어난 적이 없는 기적들을 너의 온 백성 앞에서 일으키겠다. (출애굽기 34:10)

서양의 신은 계속해서 기적을 행하며 이스라엘 백성과의 계약을 지켜왔다. 출애굽기 34:11에서는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잘 지켜라. 이제 내가 너희 앞에서 아모리족, 가나안족, 히타이트족, 프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을 몰아내겠다"고 말했다. 또한, 신은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데 필요한 전략과 작전을 알려주었고, 하늘에서 큰 우박을 내리며 적군을 죽이고, 태양을 하루 동안 멈추어 여호수아의 승리를 이루도록 기적을 행했다.

동양의 도는 인간 사회와 초연하게 된다. 또한, 어떤 특수한 계약도 인간과 맺지 않는다. 이는 어떤 개인, 부족, 국가도 도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 서양 부족이나 국가들은 모두 자신들의 신을 섬기고, 이러한 신이 자신들만 특별히 보호해준다고 믿는 것과 아주 다른 사유체계를 동양의 도가 따르고 있었다.

여기에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는 도에, 왜 인간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는 다는 것”은 “없다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무시해도 된다. 그러나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항상 영향을 미치지만, 인간이 하는 일이나 행동에 기적 같은 것을 통하여 개별적으로 간섭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도가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아도 인간이 스스로를 위하여 항상 존재하는 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신처럼 인간사에 간섭하여 운명을 바꾸기 때문에 인간이 따라야 한다는 것과는 다른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다.

도는 우주 만물의 원천이기 때문에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을 위한 것이 될 수 없고, 모두의 것이다. 또 자연 속에서 인간과 다른 만물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차별 없이 가꾸고 키워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필수적인 존재가 된다.

도는 차별 없이 온갖 것을 가꾸고 완성시켜 준다 (도덕경 41장)

신은 선악론을 가지고 인간을 상을 주거나 처벌하는 일을 한다. 그러나 도는 도를 따르는 사람에게 상을 주지도 않고, 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벌을 내리지도 않는다. 도는 누구에게나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의 길과 흉은 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서 비롯된다는 입장이다. 예를 들면 곡식이 자랄 때 열심히 일을 하여 곡식을 키우면 겨울에 곡식이 자라지 않을 때도 먹을 것이 생기고 길 해진다. 그러나 도에서 가르치는 것을 어기고 곡식이 자랄 때 곡식을 키우지 않으면 겨울에 먹을 것이 없어지고 흉 해진다. 즉, 도를 따르면 인간에게 복이 있고 따르지 않으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입장이다. 도는 신과는 달리 의인화, 기적, 계약을 넘어서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은 순자에 의해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하늘의 움직임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요순(堯舜) 같은 성군을 위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걸주(桀紂) 같은 폭군으로 인하여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법칙에 응하면 길하고, 법칙에 반하면 흉할 뿐이다. 도를 따라서 이 법칙으로부터 일탈하지 않으면 하늘도 그 같은 사람에게는 화를 내릴 수 없다. (순자 17-1)31

유대인은 신과의 계약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로서 보호받는 대가로 희생과 기도를 드리게 된다. 이러한 요구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고, 출애굽기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인 모세 5경에서는 이러한 요구들이 극도로 세밀한 법률과 제도로 법제화하게 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게 될 때, 신은 10가지 기적을 행하여 파라오를 굴복시켰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기적은 10번째로,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과 맏배를 죽이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문설주에 피를 바르는 방식으로 이 징벌을 피하게 된다. 이 행위를 통해 파라오를 굴복시키고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을 이룬 신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와 예식을 요구하시며 그에 대한 상세한 지시를 하셨다. 이것이 파스카(Pascha, 거르고 지나간다는 뜻) 축제와 제사의 기원이 되었다.32

너희 자녀들이 너희에게 ‘이 예식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여라. ‘그것은 주님을 위한 파스카 제사이다.’ (출애굽기 12:26)

신은 인간에게 보호를 제공하는 대가로 제사, 희생, 그리고 예식을 요구하지만, 도는 이로부터 초연하다. 도는 특별히 어느 인간이나 부족을 보호하거나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도는 자연의 일부로서, 태양과 비처럼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에게 공평하게 베풀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보답도 기대하지 않는다. 행위를 완료한 후에도 도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도는 어디에나 있다. 왼쪽에도 있고 오른쪽에도 있다. 만사가 도의 힘에 의지하지만 마다하지 않는다. 일이 끝나면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다**.** (도덕경 34장)

서양의 신과 달리 동양의 도는 인간에게 기도나 제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특별히 편애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제사를 하라고 요구도 할 수도 없다. 또 설사 인간이 기도나 제사를 한다고 해도 기적을 일으켜 도와줄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지도 않다. 그저 도를 잘 따르면 길하여 일이 잘 풀리고, 도를 어기면 흉하고 일이 안 풀린다 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기원전에 벌써 순자는 일식이나 월식 때 기도를 드리고 한발 때 기우제를 지내는 것은 문화의 한 장식일 뿐이지 그런 일을 한다고 해서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제사의 필요성은 인간이 가지는 것이지 실제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말고 와는 무관한 것임을 설파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사회에 필요한 문화의 한 장식으로써 기우제를 지내는 것은 좋지만, 정말로 이를 믿고 기우제를 지낸다면 그 나라에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았다: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오는 것은 왜일까? 거기에는 아무 이유도 없다. 기우제를 지내지 않아도 비는 온다. 일식, 월식 때 사당에서 북을 울리고, 가뭄 때 기우제를 지내고, 중요한 일을 앞두고 점을 치는 것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진다고 믿어서 가 아니다. 문화의 한 장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군자는 이러한 것들을 문화의 한 장식으로 여기고, 백성들은 신의 작용을 기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의 장식으로 취급하면 나라에 길하고, 신의 작용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나라에 흉하다. (순자 17:9)

계시종교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기적을 행하고 인간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주고받는 것이 신과 인간사이의 계약의 주요내용이다. 신은 선택된 사람을 보호하는 절대적 존재가 되며, 선택된 사람은 신을 절대적으로 섬겨야 한다. 이러한 신은 그 계약을 이루지 않은 개인, 부족, 국가에게는 큰 시련을 예고한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의 전진을 방해하는 나라들은 신에 의해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고 경고한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이제 점차 기적을 믿는 사람은 숫자가 작아지고 있다. 그러나 계시종교에서 주장하는 기적이 문제가 된다고 해서 계시종교의 중요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계시종교는 하나의 커다란 철학체계를 대표하면서 인간의 자기보존 본능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는 자기보존 본능은 무위와 유위의 표현으로 나뉠 수 있다. 무위는 동양문명, 유위는 서양문명의 핵심개념이 된다. 무위와 유위는 무(無)와 유(有)를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동양과 서양의 우주론에서 비롯된다.

3) 우주론: 동양의 무(無) vs 서양의 유(有)

동서양 문명은 우주론에서 원천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동양문명에서는 유는 무에서 나왔고 모든 것이 결국 무로 돌아 감을 설명하면서, 무와 유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천하 만물은 유에서 연유하며, 유는 무에서 연유한다. (도덕경 40장)

반면 서양문명에서는 무질서에서 창조로 표현되는 천지창조 과정에 담긴 유를 강조하는 우주관을 제시한다. 유는 무를 극복한 존재의 시작이다. 무는 의미가 없고 유가 모든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창세기 1:3)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가 기원전 5세기 경 주장한대로 “유(有)만이 진실이며 무(無)는 속임수”라는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파르메니데스는 그의 시 “자연 대하여”에서 자연의 현상이나 변화가 아니라 진리와 존재에 대하여 그의 철학을 밝히고 있다. 그는 유(존재)만이 진실이며, 무(비존재)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무는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허구라는 주장이다. 그는 감각은 기만적이고 이성만이 진리를 인식하게 되며, 존재는 단일하고, 불변하며, 영원하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존재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생각과 존재는 동일하다고 그의 시에서 표현했다. 이러한 주장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후대 철학자들의 인용문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으며, 서양 철학체계에 형이상학 풍조를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동양의 우주관에서, 무는 단순히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와 대조되는 개념이다. 동양의 변화론에 따라 무과 유는 변화해 나간다. 무는 더 근본적인 존재, 만들어지지 않은 것, 또는 세계가 형성되기 전의 원초적 상태를 나타낸다. 이에 비해 유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세계, 변화하는 생태, 생성과 소멸의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도교에서의 무극이나 무는 단순히 '없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극이나 유에 앞서는, 우리의 일상 감각으로는 인지하기 힘든 더 깊고 근본적인 존재나 상태를 지칭한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 천지의 원천이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만물의 모태이다……이 두 가지는 결국 같은 것이나, 나타남으로 인하여 이름이 다르다.

(도덕경 1장)

서양에서는 우주 창조의 시작, 세계의 첫째 날 등 성서의 주요 사건들을 그림과 해설로 표현한 목판 판화집을 출간되었다. 이것은 독일의 뉴렘베르크에서 제작되어 "뉴렘베르크 연대기"(Nuremberg Chronicle)라고 불리며, 1493년에 초판이 출간되었다. 이 판화집은 바로 천지창조의 첫날에 관한 판화로 시작하였다. 서양 문명에서 무질서인 무에서 창조된 유의 존재성을 부각하고 있다. 카오스 (무질서)에서 유니버스 (질서), 즉 창조가 시작됨을 알리고 있다. 무는 유의 창조로 존재가 없어진다. 창조로 인한 모든 개체는 변하지 않는 존재론에 입각하게 된다.

뉴렘베르크 연대기와 비슷한 시기인 15세기부터 도교가 동양의 우주관을 담은 태극도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태극도의 둥근 원은 무극을, 원 안의 디자인은 태극을, 그리고 태극을 이루는 두 부분은 음과 양을 각각 의미한다. 15세기에 태극도 도안이 도교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지만, 태극도에 담겨있는 음양의 개념은 2천년에 발간된 도덕경에서 그래도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우주관은 만물이 음과 양으로 구성되어 서로 변화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상을 나타낸다. 변화론에 입각한 음양론과 우주에서 무(無)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동양 우주관의 '무극-태극'과 서양 우주관의 '카오스-창조'를 비교해 보면 동서양 우주관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동양의 무극은 카오스, 태극은 창조와 비슷하다. 그러나 동서양의 차이를 특징짓는 것은 '무극-카오스'나 '태극-창조'의 동등성이 아니다. 동양 문명에서는 태극보다 무극을, 반면 서양 문명에서는 카오스보다 창조를 중요시하는데 특징이 있다. 도 사상에서 태극은 모든 것의 시작이지만 궁극적인 무존재(Ultimate Non-Being), 즉 무극에 나온다고 설명하고 있다. 태극이라는 단어는 역경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천지가 생기기 시작하는 상태를 지칭한다. 무극이라는 용어는 도덕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며 도가 태초에 무극에 있었음을 나타내고 무극은 태극 이전의 상태를 지칭한다.

이런 차이로 동서양은 우주관에서 서로 대치되는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도가 무극을, 신이 창조를 중요시한다는 것은 곧 동서양 문명이 각각의 우주관을 중심으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위치, 인생의 의미, 그리고 인간 사회를 규율하는 메커니즘에 대해 상반되는 기반위에 구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를 이해하는 두개의 전혀 다른 접근방법이 구성되어 수천년간 지속되었다. 두개의 접근 방법은 인간사에 관한 것, 세계와 자연을 이해하는 접근 방법, 각기 다른 생각의 진행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런 다른 방법 즉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은 상대방의 영향을 받지 않고 별도로 생산되고 성장했다. 33

무의 도와 유의 신은 이러한 우주에 대한 속성을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속성에서 무는 동양의 변화론으로 유는 서양의 존재론으로 연결된다.

4) 무와 동양의 변화론(變化論) vs 유와 서양의 존재론(存在論)

동양 우주론의 핵심인 무는 곧 동양의 변화론, 즉 역경의 근거가 된다. “천하 만물은 유에서 연유하며, 유는 무에서 연유한다”는 선언은 무와 유 사이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반면 무에서 “존재”를 창조하는 서양 우주론의 핵심은 유에 있다. 창조된 유는 서양의 존재론의 근거가 된다. 변화론과 존재론은 동서양 문명의 사유를 전혀 다른 철학적 체계위에 서게 한다. 동양의 변화론은 계속 변하고 있는 자연의 흐름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서양의 존재론은 파르메니데스가 형이상학적으로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존재는 생성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전체이며, 불변하며, 완전하다. 그것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며, 미래에도 언제나 동일하게 있을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유, 즉 신이 창조하는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신이 창조한 것이 변해가기 시작하면 창조의 의미가 없어진다. 서양의 존재론은 신의 창조를 믿는 철학에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어서 신이 창조한 것들은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서양 계시종교의 근간이다. 이러한 계시종교의 우주론이 그리스의 시현론과 합세하게 된다. 여기에서 존재론(ontology)와 목적론(teleology), 그리고 이를 인식하는 인식론(epistemology)등 형이상학이 서양철학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존재론, 목적론, 인식론과 같은 형이상학적 취향의 철학 체계는 변화론을 핵심으로 여기는 동양사유에서는 중요하지 않는 개념이 된다.34

이원론은 자연 현상이나 사유를 두 개의 근본 원리로 설명하는 철학이다. 동양 철학에서는 모든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존재로 항상 변한다는 사유로 인해 우주와 인간의 삶을 해석한다. 동양문명은 변화론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하지 않는 존재에 대한 관심이나 추론은 동양 문명에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동양 철학사에서 서양의 존재론이나 인식론 등이 발전하지 않은 설명이 된다. 그 대신 변화론에 따르는 변화에 숨겨진 흐름을 파악하고 활용한다는 세(勢)의 철학과 함께, 인성의 변화에 관한 술(術)의 철학, 그리고 율법보다 윤리(倫理)를 중시하는 윤리관이 발달하게 된다. 동양문명에서는 윤리, 세(勢)와 술(術)의 철학체계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실질적인 정치윤리와 정치경제 철학이 중심에 서게 된다. 윤리, 세나 술의 철학은 존재론에 입각한 서양 사유에서는 중요하지 않는 개념이 된다.35

서양 문명은 신이 창조한 우주에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신의 율법을 잘 이행하면 인생의 최종 목적인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도 개발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신이 창조한 자연의 모든 것들이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 작용한다는 목적론(teleology)을 주장했다. 반면에, 데모크리토스는 자연의 모든 것이 필요에 따라 우연히 생기고 작용한다는 필연성, 개연성, 또는 우연성(accidentalism)을 주장했다. 그는 모든 것이 신에 의해 창조되고 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과정과 우연에 의해 발생하고 변화한다고 믿었다.

무, 즉 동양의 자연철학은 변하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항상 변하고 있다는 변화론에서 출발한다. 동양의 자연철학을 따르면 우주에는 목적이 없다. 인생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인생에서 원하는 것이 있고, 목표가 있지만 이러한 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거나 일반화할 수 는 없다. 변화론(易, transformationism)이 동양문명의 핵심이다. 절대적인 목적을 표방하는 형이상학이나 이데올로기론이 형성되지 않는다. 동양의 변화론은 서양의 존재론과 대칭을 이룬다.36

동양 변화론의 관점은 동양 고전에서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고전 어디서도 '창조자' 또는 ‘창조’라는 개념이 없다. 우주나 자연의 모든 것이 창조 같은 행동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것이며, 계속 변하면서 우리가 보는 현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거대한 우주를 보아도 모든 것이 항상 움직이며 변하고 있다. 한 번도 쉬는 것이 없다. 변화에는 목적도 없고 핵심을 파악할 수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변화론의 불변성은 어떤 의미에서 모든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기초가 된다. 이러한 철학에서 즉 우주의 변화에서 나온 것이 바로 변화의 흐름을 따르는 도의 개념이 된다. 동양의 창조신화는 초자연적 존재에 의한 우주와 인간의 창조가 아니라 변화론에 의하여 우주와 인간이 생겼다고 본다. 인간은 자연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존재론과 변화론은 인간이 밖의 상황을 분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인간은 자연 속의 개체와 인간 사이에 있는 사안에서 두 가지 요소를 찾아내고 비교한다. 이원의 체계에 대한 분석 방식에서 동서양의 차이가 명확하다. 양지와 음지, 남과 여, 해와 달, 여름과 겨울, 좌우, 상하, 전후, 과거와 미래, 정신과 육체 등의 관계를 동양문명은 보완론으로 다루며, 서양문명은 대립론으로 다룬다. 동양의 변화론을 기초로 이원적인 요소가 보완성을 가진다고 분석하고, 서양은 존재론을 기초로 이원적인 요소가 대립성을 가진다고 분석한다. 결국 서양의 이원대립론과 동양의 이원보완론이 두 문명을 가르는 중요 사안으로 작용하게 된다

서양철학은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불변"을 기초로 하는 존재론이 서양 철학의 기초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존재론이 계시종교와 결합되어서 서양 사유의 핵심이 되었다. 서양에서는 변화를 인정할 때도 변화 속에 있는 불변의 요소를 중요시하여, 여전히 존재론 테두리속에서 다루고 있다. 신이 창조한 것은 변화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상에 기원한다. 반면 동양문명은 자연속에서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다는 변화론에 기초하고 있다. 도사상과 음양 이론은 모두 자연의 변화론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헤라클리투스 (Heraclitus, 535–475 BC) 등이 변화론을 주장했다.

우리는 서양문명의 영향으로 철학을 논할 때 서양의 존재론에 입각한 형이상학적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므로 동양의 변화론에 대하여 충분하고 적절한 (서양의 존재론과의 대비나 비교) 연구가 부족하다. 동양의 변화론, 역 사상은 무엇인가? 동양문명에서는 다양한 개념과 사상이 있는데 그 시초를 명확하게 찾기는 어렵다. 도, 무극, 태극, 음양 등의 중요한 개념과 사상들이 다양한 철학 체계에 서로 얽혀 녹아 있기 때문이다. 태극에서 음양론을 만들어 낸 것 인지, 음양론이 별개의 철학 학파인지, 역경에서 유래한 것인지, 도교의 중심사상인지, 태극은 음양과 무슨 관계인지, 태극론이 도교에서 유래한 것인지, 역경에서 시작된 것인지 시초가 불분명한 것이 많다. 서로 영향을 미치며, 상대편의 주장을 배척하기 보다는 이를 받아들여 자기의 주장을 넓혀 간다는 동양 사유의 특성에 기인한다.

동양 철학에서 음양은 상반된 두 가지 요소지만,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보완하는 변화”를 의미한다. 태극도에서 소양이 있는 음, 그리고 소음이 있는 양은 이런 변화와 상호작용을 묘사한다. 이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일정하게 존재하는 것이 없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모든 것은 한 요소에서 다른 요소로 변화하며, 이는 세상 만사의 동적인 변화의 본질을 반영한다.

동양문명에서는 우주의 변화를 역(易)의 관점에서 이해해왔다. 易이라는 문자는 변화를 의미하며, 도마뱀의 피부색의 변화 또는 해와 달의 주기적인 변화를 상징하는 상형문자에서 유래했다. 이 변화론은 기원 3천년 전부터 동양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개념이다. 서양에서의 창조론이나 존재론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동양의 변화에 관한 개념은 역경(易經)에서 잘 드러난다. 역경은 음양사상을 기본으로 하며, 이를 통해 우주의 변화를 해석한다.

역경은 중국의 사서오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역경이 주장하는 변화론의 핵심은 끊임없이 발생하는 변화에 있다. 변화가 항상 발생한다는 이러한 불변의 원칙은 역경의 핵심이다. 도는 이렇게 변화라는 우주관 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음양론을 따르고 있다:

만물은 ‘음’을 등에 업고 ‘양’을 가슴에 안았다 (도덕경 42).

햇볕이 자연을 비추면, 산을 포함한 자연은 밝고 어두움을 변화해가며 도출한다. 이것이 인간이 항상 접하는 밝고 어두움 즉 음양의 변화다. 변화론은 음양론과 함께 역경의 핵심 사유를 이루고 있다. 역(易)이라는 글자 자체가 음양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역경은 서양에서 종종 "변화의 책"(Book of Changes)으로 번역되곤 한다. 역경이 그리는 변화의 철학은, 대립하는 음과 양이 균형을 이루며 역동적으로 우주를 형성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철학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특별한 목적이나 이유 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근거를 두고 있다. 이는 서양의 창조론이나 존재론이 주장하는 명확한 목적을 가진 창조된 우주와 원천적으로 대비되며, 또한 서양의 진화론이 주장하는 '항상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관점과도 크게 다르다.

서양의 창조론은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새로운 존재가 탄생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역경의 변화론은 새로운 생명의 창조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로 취급한다. 역(易)은 “주소가 없는 변화”(undirected transformation)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우주나 자연의 변화는 예측하거나 방향을 정할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서양의 접근 방식은 원리나 진리를 분석하고 가려내는데 중점을 둔 반면, 동양의 접근 방식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인간의 위치를 이해하려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동양의 변화론과 서양의 존재론은 중요한 순간에 미래를 가늠하는 역할을 하는 동양의 '역경'과 서양의 신탁(oracle)을 비교하면 잘 나타난다. 신탁은 신(神)이 인간의 몸을 빌어(託) 인간의 질문에 대답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동양의 역경은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우주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은 변화를 전제로 하며, 모든 것을 변화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즉, 인간(人)이 하늘(天)과 땅(地)과 함께 미래의 전개에 동참하며 역할을 한다. 역경은 서양의 신탁과 차별화된다.

서양의 존재론은 모든 것이 신이 결정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미래도 신이 결정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이를 알아 맞히는 일에 주목한다. 이것이 서양에서 미래를 점치는 신탁의 의미다. 동양의 사상은 인간의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흘러간다는 사상에 입각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이 흐름을 파악하여 가급적 일찍 행동을 하여 영향을 미치자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역경이 단순히 “미래가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예정서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서양의 점술이나 신탁은 인간의 행동 결과가 신의 뜻에 의해 결정되어 있으며, 따라서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보는, 신에 의지하는 존재론적인 철학이다. 그러나 동양의 역경은 서양과는 달리, 도의 범위 내에서 인간의 역할이 중요시되는 점이 특징이 있다. 즉, 미래가 인간의 행동에 의해 변화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역경은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고 하늘의 결정을 이미 주어진 운명으로서 인간에게 전달하는 점술서의 성격을 초월하고 있다.

역경과 관련하여 우리는 하나의 괘가 3개의 선, 혹은 역경 용어로는 3개의 효사로 시작된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다. 이 3개의 선이 대표하는 것은 바로 천지인(天地人)이다. 이는 하늘, 땅, 그리고 그 중심에 인간의 역할을 놓는 것을 의미한다. 천시와 지리를 잘 관찰해야 하지만, 그 안에서 인간이 도에 가장 부합하는 역할을 찾아내어 이를 실행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개척하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역경은 단순한 예언서나 점술서가 아닌 지혜와 윤리를 담고 있는 철학서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특징이 도교와 유교가 역경과 역사적으로 서로 상호작용하며 발전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

역경에 따르면, 모든 상황에는 그에 상응하는 행동이 있다. 주어진 각 상황에서는 옳은 행동과 그렇지 않은 행동이 선택의 여지로 존재한다. 옳은 행동은 행운을, 반면 그렇지 않은 행동은 불운을 가져온다. 그렇다면 주어진 상황마다 이에 맞는 옳은 행동은 무엇인가? 이를 알아내는 것이 인간이 주어진 상황에서 결정을 하여야 하는 요소가 된다. 항상 변하는 상황의 초기에 인간의 행동이 가능한 한 빠르게 실행된다면, 그것이 미래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역경은 강조한다. 상황을 개척해 나가기 위한 지혜로서 참조하자는 의미가 강하다: “점을 안쳐도 안 되고, 점을 완전히 믿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반드시 점을 참조하라.” (세종대왕이 북벌 사령관에게 내린 교지, 이조 왕조실록에서)

라이프니츠는 동양의 역경과 음양 사상이 자연에 기반한 부호 체계를 사용해 인간에게 실질적이고 윤리적인 지침을 제공한다고 판단했다. 역경의 영향력은 라이프니츠 등 서양의 계몽시대의 사상가들을 넘어서서 현대 과학에도 활용되고 있다. 컴퓨터 체계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사용되는 이진법을 개발하는 데에 있어서 역경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37

  1. 23
  2. 24

    Spinoza, Ethics, vol.1, appendix.

  3. 25

    Benedict de Spinoza, Ethics, trans. E.M. Curley (UK: Penguin Books, 1996), 114. See also Chapter 7 of Lao Tzu's Taoteking: “The Tao is infinite, eternal. Why is it eternal? It was never born; thus it can never die. Why is it infinite? It has no desire for itself; thus it is present for all beings.”

  4. 26

    세계의 많은 창조신화 중에서 한국의 창조신화는 과학적인 관점에서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올 수 있다. 한국의 창조신화는 인간이 곰에서 변화하여 탄생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중국 창조신화에 등장하는 반고는 처음부터 용의 머리와 뱀의 몸을 가진 자연신이며 반고가 죽으면서 반고 자체가 자연으로 변화하여, 반고와 자연이 동일해져 버렸다. 이는 명 나라 시대인 1609년에 발간된 중국의 대사전인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실려 있다. 도회는 그림책이란 뜻이며, 삼재는 하늘, 땅, 인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삼재도회는 하늘, 땅, 인간에 관해 그림을 곁들여 설명한 대사전이라고 볼 수 있다.

  5. 27

    張基槿, 《中國의 神話》, 을유문화사, 1977. p.22

  6. 28

    Shakespeare's (1599) line given to Rosalind addressing Orlando in As you like it (IV, 1:90) was an unquestioned truth in the sixteenth century.

  7. 29

    On the True Antiquity of the World. Clarke, J.J. (1997-04-17). Oriental Enlightenment: The Encounter Between Asian and Western Thought (pp. 45-46). Taylor and Francis. Kindle Edition.

  8. 30

    도가 또는 도교를 뜻하는 Taoism 이라는 단어는 19-20세기 서양의 이데올로기 시대에 서양인들이 도가 와 도교를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는 도가도 도교로 포현하고 있기 때문에 도교가 도가까지 모두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도가는 노장철학을 표현하는 본래의 철학적인 표현을 뜻하고, 도교는 도가 사상이 불교 등의 영향을 받아서 일반민중에 퍼져 있는 기복신앙을 뜻한다. 유가와 유교에 대하여서도 19세기 이후에 Confucianism 이라는 이데올로기식의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서양에서 발단된 공자에 대한 책들은 “철학자 공자의 사상”라고 공자를 소개하였을 뿐, Confucianism 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유교는 도교 보다 훨씬 더 기복신앙 체제로 발전한 종교적 색채가 없기 때문에 유가를 유교라고 표현하는 것은 서양식 계시종교로 표현 측면이 크다.

  9. 31

    순자의 책 순자는 24장으로 되어있고, 각 장 마다 절로 나뉘어 있다. 17-1 은 순자 제17장 천론天論 편 제1절을 뜻한다.

  10. 32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 (출애굽기 12:14). 파스카 축제 세칙은 출애굽기 12:43-48에 상세히 적혀있다: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파스카 축제 규칙은 이러하다. 외국인은 아무도 파스카 제물을 함께 먹지 못한다. 돈으로 사들인 종은 누구든 할례를 받았으면 함께 먹을 수 있다. 거류민과 머슴은 함께 먹지 못한다. 어느 집이든 한 집에서 먹어야 한다. 고기를 집 밖으로 가지고 나가면 안 된다. 뼈를 부러뜨려서도 안 된다.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이 파스카 축제를 지내야 한다. 네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 주님을 위하여 파스카 축제를 지내려면, 남자는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러면 그는 본토인처럼 파스카 축제를 함께 지낼 수 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자는 아무도 함께 먹지 못한다. 이 법은 본토인에게나 너희 가운데에 머무르는 이방인에게나 동일하다.”

  11. 33

    Nisbett, Geography of Thought, Kindle location 180.

  12. 34

    우리는 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왜 동양에는 존재론, 목적론, 인식론이 발달하지 못했는가” 라는 질문에 접하게 된다. 이는 동서양 문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질문이 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는 “왜 서양에는 윤리, 세와 술의 철학이 발달하기 못했는가” 라는 질문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서양문명은 존재론이라는 우주관에 입각하여 인간사에서 존재론, 목적론, 인식론 등 형이상학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동양문명에서는 변화론이라는 우주관에 입각하여 윤리(법이 중요 하기만 법보다 윤리가 앞선다는 철학), 세와 술의 철학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13. 35

    윤리와 세의 철학은 1장 3 챕터에서 서술하였고, 술의 철학은 3장 4 챕터에서 서술한다.

  14. 36

    서양 사전이나 AI을 문의하면 서양의 존재론(ontology)에 대칭되는 단어는 바꿈(change)으로 나온다. 때로 변화 (transformation)를 제시한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transformationism은 변화론이 아니라 변형론이라는 서양 개념 체제에 국한할 것을 주장한다. 변화를 이론이나 사상으로 주장하는 동양적 철학체계는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존재론에 국한된 서양 문명의 제한성을 보여준다. 그 일환으로 동양의 변화론 역(易) 사상의 표현으로 doctrine of change 또는 principle of change을 주장한다. 그러나 역 사상은 “우주안에서는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 라는 뜻은 “변하지 않는 존재”를 표현하는 존재론에 대한 대칭 철학체계를 표현하고 있다. 이런 사유를 표현하는 단어는 역시 transformationism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transformationism 은 서양의 존재론 체계속에서의 변형이 아니라, 동양 철학 체계 내에서 변화를 핵심으로 하는 이론과 사상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이 동양의 변화론에 익숙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존재론이라는 철학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이 존재-변화의 동서양 철학적 차이에 접근하기 어려운 것은 시현-불현의 차이에 접근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유다. 시현론의 틀 속에서 불현론의 동양적 의미(절대진리는 존재하지만 인간이 이를 표현할 수 없다)를 철학적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고 시현의 종속적 개념으로 만 사용하는 데서 나온 한계다. 역경의 번역은 서양인들이 오래전에 사용한book of changes 로 되어있지만 book of transformationism 이 적절하다. 역은 존재론 속의 변형이나 바뀜이 아니라 변화론이라는 존재론과 다른 철학체계를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15. 37

    Clarke, J.J. (1997-04-17). Oriental Enlightenment*: The Encounter Between Asian and Western Thought* (p. 49). Taylor and Francis. Kindle Ed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