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道, “인자하지 않다” vs 神, “인자하다”
道와 神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로 다룬다. 道는 도덕경에서 스스로 “나는 인자하지 않다” 라고 선언한다. 반면 神은 “나는 인자하다” 라고 선언한다. 왜 이러한 반대되는 표현을 하였을까?
道: 하늘과 땅은 인자하지 않다. (도덕경 5장)
神: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06:1)
道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하지만, 神은 神을 믿는 인간에게만 작용한다. 道는 인간이 좋아하던지 말든지 불구하고 인간이 모두 따라야 하는 자연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판단인 인자하다는 관념에 속하지 않는다. 道는 우주 만물의 원천이기 때문에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을 위한 것이 될 수 없고, 모두의 것이다. 이러한 道의 개념은 유대교의 카발라 철학에서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神은 세계 밖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세계 안에 내재하여 만물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道는 인간과 다른 만물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道는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차별 없이 가꾸고 키워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필수적인 존재가 된다.
道는 차별 없이 온갖 것을 가꾸고 완성시켜 준다 (도덕경 41장)
神은 모든 인간을 포괄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이에 성공한 계시종교는 없고, 神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작용한다. 神을 모르는 사람과는 관계가 없는 상황을 역사가 보여준다. 자신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神은 인자해야 한다. 반대로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神은 인자하지 않아야 한다.
계시종교는 神과의 계약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로서 보호받는다. 그 대가로 희생과 기도를 드리게 된다. 이러한 요구는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고, 출애굽기 과정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모세오경 중에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이러한 요구들이 극도로 세밀한 법률과 제도로 법제화하게 된다. 神은 교리를 믿고 시행하는 인간들에게만 작용한다. 반대하는 사람은 적으로 삼는다.
너희가 내가 일러준 것을 모두 실행하면, 나는 너희 원수들을 나의 원수로 삼고, 너희의 적들을 나의 적으로 삼겠다. (출애굽기 23:22)
이러한 神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징벌이 약속된다. 계시종교에서 그래서 神은 “질투하는 神”으로 남아 있게 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출애굽기 20:5-6)
道는 神과는 달리 인간사에 직접 간섭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는 道에 왜 인간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는 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없다는 의미다.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무시해도 된다. 그러나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항상 영향을 미치지만, 인간이 하는 일이나 행동에 기적 같은 것을 통하여 개별적으로 간섭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道가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아도 인간이 스스로를 위하여 항상 존재하는 道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神처럼 인간사에 간섭하여 운명을 바꾸기 때문에 인간이 따라야 한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神은 선악론을 가지고 인간을 상을 주거나 처벌하는 일을 한다. 그러나 道는 道를 따르는 사람에게 상을 주지도 않고, 道를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벌을 내리지도 않는다. 인간의 길과 흉은 神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면 곡식이 자랄 때 열심히 일을 하여 곡식을 키우면 겨울에 곡식이 자라지 않을 때도 먹을 것이 생기고 길 해진다. 그러나 道에서 가르치는 것을 어기고 곡식이 자랄 때 곡식을 키우지 않으면 겨울에 먹을 것이 없어지고 흉 해진다. 즉, 道를 따르면 인간에게 복이 있고, 따르지 않으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입장이다. 道는 神과는 달리 의인화, 기적, 계약을 통하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은 순자에 의해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하늘의 움직임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요순(堯舜) 같은 성군을 위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걸주(桀紂) 같은 폭군으로 인하여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법칙에 응하면 길하고, 법칙에 반하면 흉할 뿐이다. 道를 따라서 이 법칙으로부터 일탈하지 않으면 하늘도 그 같은 사람에게는 화를 내릴 수 없다. (순자 17:1)58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게 될 때, 神은 10가지 기적을 행하여 파라오를 굴복시켰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기적은 10번째로,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과 맏배를 죽이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문설주에 피를 바르는 방식으로 이 징벌을 피하게 된다. 神은 이 행위를 통해 파라오를 굴복시키고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을 성사시킨다. 이에 대한 대가로 神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와 예식을 요구하고 그에 대한 상세한 지시를 내린다.59 이것이 파스카 (Pascha, 거르고 지나간다는 뜻) 축제와 제사의 기원이 되었다. 이러한 의식과 지시를 따르는 자만이 神의 보호를 받게 된다.
너희 자녀들이 너희에게 ‘이 예식은 무엇을 뜻합니까?’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여라. ‘그것은 주님을 위한 파스카 제사이다.’ (출애굽기 12:26)
이로써 神과 인간 간의 언약의 모든 조건이 갖추어지고, 자신에 대한 복종과 인간에 대한 보호를 상호 언약하게 된다.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애굽기 24:3)
神은 인간에게 십계명과 율법을 통하여 언약의 내용을 전하게 된다. 십계명은 계시종교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神의 법률이다. 서양 문명이 윤리가 아니라 법을 중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와 말씀을 다 하신 후, 자신의 손가락으로 쓴 돌로 된 두 증언판을 그에게 주셨다. (출애굽기 31:18)
이어 십계명을 시작으로 계시종교에서는 神과 인간 간의 약속이 이어진다. 서양 종교에서 神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둘 사이에 맺어진 “계약”(covenant)이 핵심이다. 이것을 “계약”형태로 완성하게 된다. 이러한 계약은 여전히 神의 기적을 통하여 인간에게 보증하게 된다.
이제 내가 계약을 맺는다. 나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어떤 민족에게서도 일어난 적이 없는 기적들을 너의 온 백성 앞에서 일으키겠다. (출애굽기 34:10)
이러한 神과 인간 사이의 계약은, 계몽시대 전후 근세에 와서 서양의 인간본성을 모델로 한 “사회계약론”의 모델이 된다.60 동양의 道는 다른 사유의 시작이다. 神은 인간에게 보호를 제공하는 대가로 제사, 희생, 그리고 예식을 요구하지만, 道는 이로부터 초연하다. 道는 특별히 어느 인간이나 부족을 보호하거나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道는 자연의 일부로서, 태양과 비처럼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에게 공평하게 베풀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보답도 기대하지 않는다. 행위를 완료한 후에도 道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道는 어디에나 있다. 왼쪽에도 있고 오른쪽에도 있다. 만사가 道의 힘에 의지하지만 마다하지 않는다. 일이 끝나면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다. (도덕경 34장)
특히 종교의식과 관련하여 서양의 神과 달리 동양의 道는 인간에게 기도나 제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특별히 편애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제사를 하라고 요구도 할 수도 없다. 또 설사 인간이 기도나 제사를 한다고 해도 기적을 일으켜 도와줄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지도 않다.
기원전에 벌써 순자는 일식이나 월식 때 기도를 드리고 한발 때 기우제를 지내는 것은 문화의 한 장식일 뿐이지 그런 일을 한다고 해서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제사의 필요성은 인간이 가지는 것이지 실제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말고 와는 무관한 것임을 설파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사회에 필요한 문화의 한 장식으로써 기우제를 지내는 것은 좋지만, 정말로 이를 믿고 기우제를 지낸다면 그 나라에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았다: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오는 것은 왜일까? 거기에는 아무 이유도 없다. 기우제를 지내지 않아도 비는 온다. 일식, 월식 때 사당에서 북을 울리고, 가뭄 때 기우제를 지내고, 중요한 일을 앞두고 점을 치는 것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진다고 믿어서 가 아니다. 문화의 한 장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군자는 이러한 것들을 문화의 한 장식으로 여기고, 백성들은 神의 작용을 기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의 장식으로 취급하면 나라에 길하고, 神의 작용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나라에 흉하다. (순자 17:9)
神은 선택된 사람을 보호하는 절대적 존재가 되며, 선택된 사람은 神을 절대적으로 섬겨야 한다. 그러나 道는 이러한 선택이나 복종과 관련이 없다. 동양문명에서는 道는 神과 다른 개념으로 인간에게 접근한다. 道는 인간이 피하려고 하여도 피할 수 없는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 계시종교에서 神은 神의 은총(Grace)에 의하여서 선택된 자들에게만 작동한다. 道의 법칙은 인간의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영원한 표현이다. 이러한 동양의 우주관은 자연과 우주에는 인간이 상상하는 그러한 표현이나 목적을 설정할 수 없다는 관측과 맥을 같이 한다.
道는 인간에게 차별적인 인(仁)을 베풀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부정” 법의 표현을 거부하는 불현의 道는 한 가지뿐이다. 여러 가지 분열이나 해석이 없다. 두 가지 道가 있을 수 없으며, 한가지 道 내에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나 “긍정”의 표현을 사용하는 시현의 神은 다른 표현이나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을 피할 수 가 없다. 이처럼 道와 神의 부정과 긍정은 절대진리의 표현 방법에 있어서 다르다.
道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지만 인간이 하는 일의 결과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며 道는 이러한 과정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의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결국 소멸하게 될 것임을 예시하고 있다.
자연은 인자하지 아니하다. 만물을 쓰고 나면 제사에 사용된 짚으로 만든 인형처럼 버릴 뿐이다. 성인은 인자하지 아니하다. 백성을 쓰고 나면 제사에 사용된 짚으로 만든 인형처럼 버릴 뿐이다. (도덕경 5 장)
道와 神을 구별하는 특성 중의 하나는 神이 선한 면을 강조하는 점이다. 神은 인자하기 때문에 죄인인 인간이 선악을 구별하는 길을 가르쳐준다.
주님께서는 선하시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신다. (시편 25:8)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1)
서양의 神은 인자하다는 표현은 神이 인간의 감정을 가지게 됨을 의미한다. 반면 道는 인자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감정 세계를 초월하는 원칙으로 남아있다.
道의 부정신학(否定神學) vs 神의 의인화(擬人化)
시현은 “긍정신학” (cataphatism)이다. 절대적 존재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추구한다. 긍정신학이라는 단어의 그리스어 어원은 긍정(affirmation) 또는 말하기(to speak)에서 유래한다. “神은 인자하다”가 그것이다. 즉, 神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빛, 정의, 진실, 생명으로 神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神은 어두움, 부정, 거짓, 죽음에 대하여 격렬한 반대 입장을 가지게 된다. 道는 불현의 방법을 따르며, “부정신학” (apophatic theology, 절대적 존재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추구한다. “Apo”는 “부정한다”는 뜻이다. “부정신학”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어원에서 “부정” (negation)의 의미에서 유래했다.
“道는 인자하지 않다, 神은 인자하다” 라는 동서양을 비교하는 사유에는 깊은 뜻이 있다. 철학자들은 “부정신학”이라는 용어와 “의인화” 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였다. “부정신학”은 스피노자에게 영향을 미친 마이모니데스가 주장한 神에 대한 개념에도 설명 되어있다.61 마이모니데스는 “神은 인간 언어로 직접 설명할 수 없으며 오직 부정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고 주장했다. 마이모니데스는 1135년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1204년 이집트에서 사망한 중세 유대 철학자·신학자·의사다. 그의 부정신학은 道에서 강조하는 불현철학의 핵심이다. 도덕경의 첫 구절인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표현된 道는 영원한 道가 아니다)가 바로 부정신학을 의미한다. 도덕경에서 “道는 인자하지 않다”로 표현한 것이 바로 부정의 방법으로 절대진리를 표시하는 방법이다. “神은 인자하다”는 서양의 긍정신학의 설정과 정 반대의 표현이다. 神은 선하다 라는 표현은 선의 반대, 즉 악은 어디서 나왔고 왜 존재하는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道의 철학에는 그러한 문제가 없다.
불현론은 도교에서뿐 아니라 유교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공자는 “道는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道 라는 절대진리를 추구하면서도 끝이 없는 道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道가 행해지고 있다는 소리를 아침에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더라도 좋다” (논어 4:8)는 표현이 그것이다.
神은 인자하다 라는 표현은 神이 의인화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다. 부정신학은 道의 철학적 사유를 설명한다. 의인화는 神의 철학적 사유를 설명한다. 의인화(擬人化, anthropomorphization)는 그리스어로 사람을 의미하는 안트로포스(anthropos)와 형태를 의미하는 모르프(morphe)를 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다. 절대진리인 神이 사람의 형태를 가지게 된다는 뜻이다. 神이 사람처럼 되어야 사람에게 神의 의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인화를 통하여 神은 사람처럼 형태와 감정을 가지게 된다. 강력한 형태로 인간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여기에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절대진리의 시현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강력한 적대성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에는 선악의 존재론적인 적대감이 조성된다.
반면 동양의 道는 서양의 神과는 달리 일관되게 의인화를 거절한다. 道는 인간에게 보여줄 어떤 인간과 같은 모습이 없다. 어떤 이름도 거부한다. 道는 보이지도 않아야 한다. 이러한 특성은 도덕경에서 여러 번 강조된다.
道는 보이지 않는다. 이름도 없다. (도덕경 41장)
道는 항상 존재하지만 인간사에 대해 개별적으로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보거나 부를 수 없다. 자연의 길인 道는 터득할 수는 있어도 볼 수는 없다.
道는 언제 어디에나 있는 것인데, 행동도 없고 형체도 없다. 道는 전할 수는 있어도 받을 수는 없으며, 터득할 수는 있어도 볼 수는 없다. (장자 내편 대종사大宗師)
道는 의인화를 거절하지만, 성경은 神이 의인화가 자신의 인간과의 소통을 위하여 꼭 필요한 과정으로 이에 집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의인화를 통해 神은 사람의 형태를 가지게 되면서 선악, 정의, 질투, 분노 등 사람이 가지는 감정도 가지게 된다. 神이 인간처럼 되면 어떤 상황이 일어날까? 인간과 직접 소통함으로써 神은 인간에게 강력하고 직접적인 전달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문제도 생긴다. 의인화되는 神은 스스로 자신의 개성을 인간적으로 한정함으로써 神의 절대성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한다.
세상에는 神이 사람처럼 본능과 정신을 가지고 있고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사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길을 잃고 있는 사람들이다…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인 神을 그러한 속성으로 상상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스피노자 윤리학, I- Prop. XV)
의인화를 거쳐 시현론은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다. 인간에게 직접 표현되고 따르는 자에 대한 호소력이 크다. 절대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는 강력함이 있다. 의인화는 동시에 위험성을 가지게 된다. 의인화 과정에 대하여 의심을 하게 되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생기게 된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神과 선지자가 발견하고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두려운 경고를 하게 된다. 모세오경은 의심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삼 대 사 대 자손에게까지 걸치는 고난을 예고하고 있다.
서양의 神은 동양의 道와는 달리, 이미 인간과 같은 얼굴과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과 직접 대화를 하고, 손가락으로 글까지 쓰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인간사에 神이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데 활용된다. 창세기에 따르면, 인간은 神의 모습대로 만들어졌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창세기 1:26-27)
神이 인간을 창조할 때 이미 “인간을 하나님의 모습대로 만들겠다”고 선언함으로써 神의 의인화는 이미 방향이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 중에서 의인화의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크세노파네스 (Xenophanes, 570-478 BC 경)가 하나다. 그는 “위대한 神은 모습도 생각도 인간을 전혀 닮지 않았다”고 하며, 神이 절대성을 유지하려면 인간을 닮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다. 크세노파네스는 神은 인간의 형태를 가지게 되는 것은 인간사에 직접 간섭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렇게 되면 神과 인간 간의 호환성을 유발하여 인간들은 神처럼 되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62 동시에 인간 부족들이나 동물들은 각자 자신을 닮은 여러 가지 神을 만들게 된다고 패러디하고 있다.
이디오피아인은 그들의 神이 검은 피부에 넙적 코를 가졌다고 생각하며, 트라키아 인은 그들의 神이 푸른 눈에 붉은 머리를 가졌다고 생각 한다…… 만약 말이 神의 얼굴을 그린다면, 말의 얼굴처럼 그릴 것이다. 소는 자신의 神을 소의 얼굴처럼 그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형체도 말이나 소의 모양을 따라 그리게 될 것이다.63
크세노파네스 이후에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 5세기경 철학자)도 神의 의인화에 대하여 반대하고 있었다. 神이 인간의 형태로 표현되면, 이는 결국 인간이 神의 권위를 빌려 神처럼 행동하려고 하는 위험한 행위로 직결될 것이라면서 이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었다.
의인화 과정은 동양문명에는 생소한 개념이다. 그 이유는 道가 인간처럼 되는 이러한 현상이 동양에서는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덕경에서는 계속하여 道가 인간처럼 되지 말아야 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절대진리는 어떤 형태로든 표현되면 절대성을 잃어버린다. 반면 서양의 神은 의인화의 과정, 즉 “사람의 형태를 가지게 되는 과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명확해진다. 유대교 神의 의인화 과정은 모세와 神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神은 모세를 통하여 神의 존재를 설명하면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따라야 할 모든 율법을 제시했다. 모세오경인 토라는 율법이라는 뜻이다. 이 율법에 따라 유대교는 일신교의 종교로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神은 종교를 통하여 인간사를 주관하게 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으로 이끌었다. 이 도중 시나이 산 근처에서 모세는 神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거역할 수 없는 신의 율법이 된다. 구약 성서의 출애굽기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모세와 神 사이에는 매우 흥미로운 대화와 교섭이 이루어졌다. 유대인들은 캠프 바깥에 神과의 만남 장소로 텐트를 설치하였고, 모세는 이곳에서 神과 대화를 시작했다. 神이 인간의 말을 사용하게 된다:
하느님은 모세와, 친구 간에 이야기하듯이, 일대일로 대화를 나눈다. (출애굽기 33:11).
그때 모세는 유대인을 설득하기 위한 증거로서 하나님이 “영광, 즉 자신을 보여줄 것”을 요청한다 (출애굽기 33:18).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너는 나의 얼굴을 보면 안 된다. 왜냐 하면 누구도 내 얼굴을 보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서 하나님은 “근처에 바위가 있는데 네가 거기 있으면, 내 영광이 지나갈 때, 내가 너를 바위틈에 숨기고 내가 다 지나 갈 때까지 너를 내 손으로 덮어줄 것이다. 그 때 내가 손을 치우면 너는 내 뒷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얼굴은 보여져서는 안 된다” (출애굽기 33:20-23). 이와 같이 神은 인간과 같아진 자신의 모습을 모세에게 보여주게 된다.
너는 내 뒷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애굽기 33:23)
아주 흥미롭게도 도덕경에서는 神과 道의 뒷모습에 관한 모세오경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표현을 하고 있다. 그것은 神은 그의 뒷모습을 인간에게 보여주지만, 道는 어떤 경우에도 道의 뒷모습을 인간이 볼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道는 뒤를 따라가도 그 뒤를 볼 수 없다. (도덕경 14장)
의인화된 서양의 神은 모세에게 인간의 모습을 한 자신의 뒤를 보여준다. 그러나 道는 의인화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처럼 앞이나 뒤가 없다. 그래서 道는 앞을 볼 수도 없고, 인간이 설사 道의 뒤를 따라와도 보여줄 뒤가 없다고 정의한다.
2) 인간행동의 원천: 무위(無爲) vs 유위(有爲)
도덕경에서 주장하는 무위에는 인간의 유위를 견제하여 무위로 유위에 대하여 균형을 찾자는 철학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의 유위가 자연적인 道를 혼돈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사는 항상 변화하지만 거기에는 변화하지 않은 하나의 상수가 있다. 그것은 인간본성에서 나오는 이기심, 즉 탐욕의 근원이다. 이는 공익보다는 사익을 추구하는 성향을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탐욕을 견제하자는 것이 무위철학의 핵심이다. 그래야 사회의 균형과 개인의 마음의 조화가 이루어진다.
무위사상은 동양문명으로 하여금 유위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유위의 근본이 되는 무위를 지향하기 때문에 유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기본 골격을 보이고 있다. 도덕경은 현실 참여를 부인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도가의 무위 사상이 더 근본적이라고 여기지만 유가의 현실참여 사상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윤리에 중점을 두고 최대한 자연의 道와 가까운 인간사회의 윤리가 어떠한 것인지 탐구하는 노력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도가와 유가의 차이는 무위와 “유위행위” 간의 차이다. 유가에서 법률이 아니라 윤리를 법률보다 중요시하고 있는 점이 유가의 유위행위와 서양의 유위사상 간의 차이다. 현실적인 인간 사회에서 유위행위가 필요하지만, 이것이 무위를 인정하지 않는 유위로 타락할 가능성이 크므로, 이에 대한 경고로 유위에 대한 무위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공자는 순임금을 두고 무위이치(無爲而治)를 말하면서(논어 15:4) 유교의 유위행위를 넘어서는 무위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순자도 무위를 군자의 행위에서 이상적 경지로 보았다. 이런 점에서 유가는 자신의 유위적인 행동 철학에 무위사상의 가치를 인정하였고, 무위가 인위가 아닌 천리를 따르는 상태로 높이 평가하였다. 유가에서 법치가 아닌 덕치와 예치를 상위에 둔 것이 이를 설명하고 있다.
무위는 글자 그대로는 “무행동”을 의미하지만, 때를 맞춘 움직임, 즉 위무위(爲無爲)를 의미한다. 무위자연(無爲自然). 새싹이 날 때(germinal stage) 그때 인간이 미리 행동하면 변화하는 미래의 상황을 예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고 행동하자는 것이다. 강제나 과잉개입을 하지 않고 사물의 자연적 흐름에 맞춰 행동하자는 道 사상의 핵심이다. 자연을 따르자는 것이다. 서양 정치경제 사상의 핵심인 “자유방임” 사상과 일부 유사한 점이 있다. 유위가 아니라 무위가 인간사의 근원이 된다는 주장이다.
함이 없는 함을 실천하고, 일함이 없이 일함을 실행하라. (도덕경 63장)
서양의 유위론은 인간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가져오기 때문에 이해가 쉽다. 神이 만들어내는 존재인 유가 우주의 근원이 된다는 우주론에 따라,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 유위가 인간사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나 목적에 따라 무언가를 하려는 행동이다. 서양문명을 대표하는 법률이 중요한 사례다. 인간이 주도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인간이 종교의 율법이나 인간의 정신에 근거한 법률이나 제도를 중심으로 인간사를 처리하자는 것이다.
“존재론”을 바탕으로 하는 서양의 유위사상에 비해 동양의 무위론은 이해하기가 어렵다.64 그것은 무위론이 서양 사유에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변화론”을 핵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원천이 무에 있고, 무와 유 사이의 변화를 자연과 우주의 움직임으로 취급하는 것이 동양 철학이다. 유보다 무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동양 철학의 사유는 무로 돌아가는 무위를 인간사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있다.
동양 역사에서 지도자의 임무 중에서 유위보다 무위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 역사에서 최고의 지도자 중의 하나로 꼽히는 청나라 강희제는 무위 라는 글자를 황제가 주재하는 회의실 입구에 현판으로 만들어 걸어 놓았다.
지도자가 꾀(智)로 나라를 다스린다면 나라에 저주가 된다, 꾀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나라에 축복이 된다. (도덕경 65장)
황제나 주요 관리 등 지도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정책을 국가의 정책으로 정하여 백성을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다. 즉, 함부로 법이나 훈령을 만들지 말라는 자신과 중신들에 대한 경고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경우 지도자들이 자신의 확신으로 정책을 세우고 이를 신하들이 이용하는 상황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들은 법을 어기거나 새로운 법을 만들어 사익을 채우는 상황에 접하게 된다:
국가를 운영하는 최선의 방안은 백성들로 하여금 원하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가장 나쁜 것은 국가 지도자가 백성과 같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그들과 다투는 것이다 (사기 129-1)
노자와 함께 도교의 사상을 대표하는 장자는 인간본성과 관련된 무위의 배경을 설명한다. 우주의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자라난다. 모든 싹과 형태가 앞으로 자라나갈 방향을 내포하고 있다는 변화론에 입각하고 있다. 결국 성숙함과 부패함, 그리고 그 사이에 일어나는 계속적인 변화와 변형이 모두 여기서 내재되어 있다. 장자는 정치가 민생에 간섭하지 말고, 즉 유위를 작게 하고, 무위로 대하도록 설명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본성이 있다. 누구나 옷을 만들어 입고, 밭을 갈아 먹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이고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다. 그래서 하늘은 무위로 대하며 간섭을 하지 않는다. (장자 외편 마제 1장)
인도 철학에도 무와 유 또는 무위와 유위로 번역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 있다. 무위는 산스크리트어 “asamskrta”로 표현되며 '창조되지 않은', '형성되지 않은', '제약되지 않은'을 의미한다. 반대로 유위는 “samskrta”로 표현되어 '창조된', '형성된', '제약된'을 나타낸다. 그러나 불교가 발원한 인도철학과 동아시아의 도교에서는 유무를 구별하는 방법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인도철학에서는 무가 근원이고 본질이므로 유에는 일시적인 가치만을 부여한다. 불교에서는 “색즉공 공즉색”이라는 철학도 색 즉 유의 가치는 일시적이며 공 즉 무에 중점을 두고 보아야 한다는데 핵심이 있다. 반면, 도교에서는 무가 근원이지만 유의 역할을 인정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천하 만물은 유에서 생기고, 유는 무에서 비롯된다.” 무와 유는 음양처럼 보완성을 이루고 있다. 인도철학에서 기원한 불교에서 동양의 도교 보다 훨씬 중요하게 무無, 허虛, 공空을 중시하는 것도 이러한 연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사에서도 불교는 인간생활이 가져오는 모든 고통에서 초월하는 경지, 즉 해탈, 니르바나를 지향하지만, 도교에서는 인생사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가 인간에게 주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우주관과 인간사를 중시하는 동양문명에서 행동을 강조하는 유교가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도교와 공존하게 된다. 동양인은 상황에 따라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유교와 도교를 모두 아우르는 경우가 많다.
도교의 무위 중시 입장은 도덕경에 잘 나타나 있다. 도교는 무위사상으로 지배자나 정부가 개인의 생활에 간섭하는 것을 최대한으로 줄이는 윤리관을 동양문명에 기초로 확립하였다.
바퀴살이 30개 모여 하나의 바퀴를 이룬다. 그 중간의 공간이 수레를 구르게 한다. 창을 뚫고 문을 내어 방이 만들어진다. 빈 공간이 있음으로써 방은 쓸모가 있다. 존재를 이롭게 하는 것은 무위가 그를 사용함에 있다. (도덕경 11장)
특히 장자에서 강조되는 무위자연 사상은 인간이 법률, 윤리, 습관, 풍속 등 인간이 만든 문화의 장식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해방되어, 자연 속에서 인생을 찾으라는, 유위에 대칭되는 무위의 뜻을 핵심사상으로 하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동양문명이 다른 어떤 문명보다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개인의 자율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을 퍼트렸다. 그리고 탐욕으로부터 해방된 경제윤리, 또한 궁극적으로 유교와의 합작으로 교육, 근면, 근검절약, 지도자의 청렴 등을 강조하는 건전한 경제의 틀을 만들어 놓았다.
반면 서양은 무위에 대하여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유위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램프를 밝힐 때, 램프의 빛은 방안의 모든 사물을 밝힌다”고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잘 자라 열매를 맺었는데, 열매가 삼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백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마가복음 4:3-8)
세상의 빛과 새싹으로 작용하여 인간사에서 적극적으로 결과를 취득하라는 격려와 함께, 소금과 같이 작용하여 인간사에서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역할을 강조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마태복음 5장)
소금이나, 빛과 같이 노력하는 것은 유위다. 상기 예에서 보듯이 질그릇을 만들고, 방을 만드는 것은 무위다. 무위사상으로 표현되면서 동양문명의 출발점을 이루는 무극중심과 서양문명의 출발점을 이루는 창조중심의 대비가 각각 동서양문명의 기저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지 모른다.
서양에서는 神은 인간이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율법을 선지자를 통하여 인간에게 전해준다. 이는 법을 어기는 것은 神을 배반하고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경고하며 법을 존중하도록 만들면서 유위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道의 차원에서 보면 법치도 결국 인간이 행위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유위에 해당하게 된다. 선지자는 神을 통함으로써 절대적인 神의 강력한 힘을 배경으로 강력함과 집중력을 유발하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이상향을 추구하며 미래를 개척하는 추진력이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추진력은 계속되지 않는다. 결국 지정학적 여건과 세(勢)의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하나의 神, 하나의 이데올로기에서 추진하는 이상향은 실현되지 않았다. 철학적으로도 하나의 神,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세계를 지배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계시종교를 중심으로 한 서양문명은 무와 유에서 유를 중심으로 하고, 행위에서도 무위와 유위 중에서 유위를 중시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무와 유를 완전히 가르면서 이원대립론을 펴 나가게 된다. 서양문명에서 밝음과 어두움, 비존재와 존재 등은 모두 조화가 아니라 대립하고 있다. 반면 자연 철학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道는 밝음과 어두움, 비존재와 존재를 함께 어우르는 철학적 태도를 취한다. 따라서 서양은 우주와 자연, 인간사에서 나타나는 두 개체의 관계를 이원적인 대립 구조로 해석한다. 이원대립론과 선악론은 개체들 간의 관계를 적대적이나 대립적으로 해석한다. 서양의 이원대립론은 주로 과학이나 자연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사용되며, 인간사회의 현상, 특히 종교와 관련된 사항에서는 선악론으로 구체화된다. 이원대립론과 선악론은 모두 존재론에서 출발하고 있다. 우주와 인간은 모두 神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리고 창조된 우주는 창조된 그대로 존재하며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만들어진 대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서양 존재론의 핵심이다. 神이 창조한 것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원칙에 입각하고 있다.
이원론은 자연 현상이나 사유를 두 개의 근본 원리로 설명하는 철학이다. 동양 철학에서는 모든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존재로 항상 변한다는 사유로 인해 우주와 인간의 삶을 해석한다. 동양문명은 변화론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서 말한 대로 동양에서는 존재론 대신 세(勢)와 술(術)의 철학이 발전하게 된다.
동양에는 서양의 창조론이나 진화론과 비견될 만한 도그마나 과학적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양에서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속으로 되돌아간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목적론과 연관된 사상이 발전하지 않았으며, 결국 형이상학과 연계된 인간주의가 발전할 여지가 없게 된다. 동양에는 자연과 인간 창조의 종교적 도그마는 없지만 창조 신화는 있다. 그것은 바로 변화론을 뒷받침하는 반고(盤古)의 창조 신화다. 또한, 다윈처럼 정교하고 과학적인 진화론은 없지만, 자연과 인간의 우주 내 위치 그리고 역할을 설명해 주는 변화론은 존재한다. 동양 사유의 근원인 변화론이 발전하여 체계를 이룬 것이 바로 역경에 담긴 변화론이다.
동양의 윤리문화 vs 서양의 법치문화
무위를 중시하는 동양에서는 윤리가 법 보다 중요 해지며, 유위를 중시하는 서양에서는 법치가 윤리 보다 중요해진다. 이는 동양의 윤리문화와 서양의 법치문화로 표현된다. 윤리와 법률 관계가 동양에서 어떻게 정리되어 왔는지 살펴보면 동서양 문명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동양에서도 기원전 전국시대처럼 법이 중요시되고 법이 중심 역할을 하며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국가를 실현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적이 있다. 이 당시 법은 변법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법에 의하여 봉건제도를 종식하고 군현제로 국가를 운영하자는 혁신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다. 중국의 법치에서는 상앙(390–338 BC), 한비(280–233 BC), 이사(280–208 BC), 같은 사람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상앙이 활동하던 시기는 왕의 친척세력들이 권한을 독점하는 봉건제도식의 오랜 전통을 유지하던 때였다. 상앙은 국가의 발전을 위하여 왕의 친척세력과 평민간의 평등을 강조하는 법치를 주장하였다. 그는 귀족을 특별 대우하는 구 패러다임을 버리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법을 국가의 근본으로 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실행하는 변법을 적극 추진하였다.
상앙은 왕의 친척 등 봉건세력과 20년간 투쟁하면서 토지 귀족을 해체하고 부유층에게 중한 세금을 물었으며 빈농에게 토지 및 농업 자금을 분배하는 법치를 시행하였다. 모든 백성이 가난에서 벗어나며 국가가 성장하면 자기 몫이 있다는 기대를 걸게 되었다. 결국 왕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변법정책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토지귀족의 미움을 받게 되어 20년 동안 그를 돕던 왕(진나라의 효공)이 서거한 이후 상앙은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봉건제도를 군현제도로 바꾸는 혁명적인 패러다임은 살아 남았고, 상앙의 법치는 진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1세기 반 만에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이루면서 진시황이 봉건세습제의 250년 동안 계속된 전국시대를 끝내고 중앙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군현제의 천하통일(221 BC)을 이룩했다. 이때 진시황이 법가 출신의 이사를 승상으로 활용하였다. 법가의 대표적인 저술은 한비(韓非)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법가가 완전히 윤리적 가치를 거부하고, 개인적 지도력보다 법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고, 과거의 예나 이상을 비웃은 점 등으로 볼 때 유가의 사상과 정면 대립하는 안티테제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65 “신(臣) 비(非)는 결코 자기의 의견을 말함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로 시작되는 「난언(難言)」편을 비롯하여, 한비자의 저서는 그 형식이나 내용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비교할 수 있다. 실제로 한비자는 군주론처럼 인간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해부와 관찰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유사한 점에 놀랄 정도다.66 한비자는 마키아벨리보다 거의 2천 년을 앞섰다.
한비자는 군주에게 “명주(明主)는 신하들이 배반하지 않을 것을 의뢰하지 말고, 배반하지 못하게 하는 술(術)을 스스로 갖출 것을 명심해야 하며, 신하들이 속이지 않을 것을 의지하지 말고 속이지 못하게 하는 술을 스스로 갖추는 일에 의지해야 합니다”67라고 군주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군주가 현명하면 마음을 다하여 이를 섬기고, 못난 군주라면 간계를 꾸며 이것을 시험할 따름”68이라는 양호(陽虎)의 말을 신하의 속내로 들면서, 이런 신하도 술(術)로 부려야 한다고 철두철미 마키아벨리적 통치술을 역설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사자의 위협과 여우의 지혜를 고루 사용할 것을 진언하고,69 신하를 영광과 금은보화로 휩싸서 배반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게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70 한비자는 신하란 군주가 현명하면 정성껏 섬기되 그럴 필요가 없으면 군주를 이용하려 드는 법이니, 군주가 반드시 아첨하는 간신배를 물리칠 줄 알아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71
이러한 일면 냉혹하고 비정한 현실론은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난세에는 적용될 수 있고 질서회복을 위해 필요하였는지 모르나, 통일천하를 2천 년 동안 지속한 그 이후의 중국에서는 인(仁)과 의(義)가 숭상되고 중요시되어 조화·중용을 지향함으로써, 대립·갈등 위에 세워진 법가의 사상은 윤리를 중요시하는 유가 사상보다 중요성에서 첫째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군현제가 실현된 통일국가에서는 정치와 행정을 통하여 평화와 안정을 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법은 국가의 통치수단의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국가의 정상적인 정치와 행정을 도와주는 윤리나 무위를 포함하는 도교와 유교의 철학과 공조하게 된다. 이는 결국 “황로사상” (黃老思想)이나 “외유내법” (外儒內法)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도교의 무위와 유교의 윤리를 밖으로 내세우면서 내부의 법치로 통일국가 운영에 기여하게 되는 형식을 갖추게 된다. 무위를 중심으로 하는 덕치(德治)와 윤리를 중심으로 하는 예치(禮治)가 법치보다 중요해지게 된다.
성경에는 가족 관계에서도 神에 대한 숭배를 먼저 생각하도록 명령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숭배가 첫번째 법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 (마태복음 제10장)
동양에서는 BC 4세기에 상앙의 변법시행을 통해 법률이 윤리와 충돌하는 일이 생겼다. 법률이 가족관계보다 중요하다는 연좌제 가 특히 문제가 되었다. 가족이나 이웃까지 범죄에 연루시키는 연좌제는 윤리를 파괴하고 공포를 확산시켜 나가게 되었다. 천하통일을 진나라로부터 물려받은 한나라가 BC 2세기에 이미 윤리가 법률보다 중요하다는 외유내법(外儒內法) 체계로 이 중요한 문제가 정리된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상앙의 변법은 진나라를 강국으로 만든 혁신적 제도였지만, 동시에 인간적 윤리와 도덕을 넘어서는 냉혹한 법치로 묘사된다. 사마천은 상앙의 법치가 이룬 제도적 성과와 함께 그로 인한 비극과 저항을 강조하면서, 법률이 윤리를 압도할 때 발생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동양의 “윤리를 내세우면서 법률을 활용한다”는 사상은 음양론에 의하여 잘 설명된다.
동양의 우주관은 무극-태극의 구조를 중심으로 한다. 둘 다 모두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 동양에서는 무극이 태극보다 우선한다고 본다. 반면 서양의 우주관은 카오스에서의 창조를 강조하며, 창조가 카오스(무질서)를 극복하고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이는 동양과 서양이 음양론과 선악론을 기초로 하는 문명을 가지게 된 근거가 된다. 결국, 동서양은 자신들의 문명의 기초에 서로 대비되는 우주관을 가지게 되었다. 동양은 무극과 태극의 변화를 중심으로 보완과 음양의 원칙을 따르는 반면, 서양은 카오스와 창조 사이의 대립적이고 선악적인 원칙을 중심으로 삼게 된다.
동양 자연철학의 사상들은 “우리의 삶은 끝이 있지만, 지식은 끝이 없다”는 원칙을 받아들이고 있다. 불현의 원칙을 존중하게 되면, 종교나 형이상학적 이론과 같은 한 가지 사상에 경도되는 일이 없다. 진실에 모든 것을 걸고 이를 펼치기 위한 선악론적인 투쟁을 벌이는 일에 탐닉하지 않는다. 서양 시현론에서는 神이 선지자를 통하여 지식의 끝, 즉 절대진리를 인간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은 지식의 끝에 도달하고 영원한 진리에 접하게 된다. 앞서 말한 시현론의 강력함과 위험성은 결국 선악론을 촉발하게 된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가르는 선악론이 그 시발점이 된다.
우리는 서양 패러다임의 세계지배에 따라 서양의 법률 중심의 체계와 조직, 관습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사례를 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동양의 윤리 중심의 문명적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자. BC 4세기에는 제 나라가 문화와 학문을 활용하려는 정책을 폈다. 제나라 수도 임치의 서쪽 직하에 세계 최초의 국립학문연구소인 직하학궁을 설립하였다. 도가, 유가, 법가, 묵가, 명가, 음양가, 연횡가 등 다양한 사상가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토론한 곳으로 백가쟁명의 중심지로 평가된다. 순자, 신도 같은 사상가 등을 배출했다. 여기서 사상가들은 만물제도(萬物齊度), 전성보진(全性保眞), 정욕과천(情慾寡淺), 견모불욕(見侮不辱), 금공침병(禁攻寢兵) 등의 윤리적인 철학을 발전시켰다.72 서양의 법률 중심 철학체계와 비교되는 윤리철학 체계다.
윤리가 율법 보다 우위에 있다는 철학에는 무위가 유위에 대한 경고를 하는 생각이 내재해 있다. 왜 무위는 유위에 대한 경고를 하는 것일까? 유위에만 의지하는 인간의 거대한 실수는 20세기 서양의 이데올로기 시대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절대진리를 파악할 수 없다는 도가도비상도(표현된 道는 영원한 道가 아니다) 라는 道의 기본철학과 대치되는 서양에서 시현론에 몰두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서양 사상계는 근대 시대에 인간의 정신의 능력을 극대화하여 인간이 정신으로 절대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망상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이 절대진리를 파악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역사에서 실현한다고 하면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잔혹한 행위를 거침없이 실행하였던 적이 있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로 표현된 절대진리를 실현하면 인간사회에 이상향이 실현된다고 믿었다. 사회진화론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이상향을 위하여 나아가는 길에 윤리를 버리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절대진리가 비현실적인 경우 결국 그들이 저지르는 잔혹한 행위만 이데올로기의 정체성으로 남게 된다. 이러한 판단은 결국 인간본성에 비추어서 결정이 된다.
인간본성이 항상 선하다면 또는 선하게 만들 수 있다면 무위가 필요 없다. 인간본성을 따라 가면 된다. 그러나 인간본성에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강력한 이기심이 있다. 변하지 않는다. 인간의 이기심은 정신을 최대한 이용하여 확신을 키워 나가게 된다. 공익에 앞서 사익을 취하도록 하는 성향이 인간본성에 존재하고 있다. 이기심은 탐욕으로 쉽게 변형되며 인간사회에 항상 존재하게 된다. 이데올로기 시대에서 서양은 인간본성을 선하게 만들 수 있다는 진화론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동양의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는 서양과는 다르다. 인간본성을 선하게 만드는 진화론은 서양 근대사에서 가능했던 거대한 착오다. 동양의 인성론은 인간이 탐욕으로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소인이 되느냐 아니면 윤리를 지키는 군자가 되느냐 하는 인성론의 변화에 집중한다. 이는 완전히 개인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동양이 파악한 인간 본성이다.
윤리는 타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배움과 성인의 행동을 따르는 데서 생긴다. (순자 23:5)
서양문명은 인간사에 神의 의지와 율법을 개입시킨다. 神에 대한 복종-불복종을 기준으로 인간의 행위와 유위를 선악의 차이로 보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유위에 대한 정의가 대부분 神에 대한 태도로 규정된다. 즉 우상을 섬기는 것, 神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행위에 대한 규정을 율법으로 정했기 때문에, 유위에 대하여는 극도로 엄중한 神의 처벌이 기다리게 된다. 따라서 서양문명에서는 神의 뜻을 따르는 언행은 선이 되고, 이를 어기는 언행은 악을 행하는 죄가 되고 징벌의 대상이 된다. 앞서 인용한 출애굽기(20:5-6)의 “질투하는 하느님”이 그것이다. 결국 서양에서는 인간의 행위가 인간의 영역을 넘어 神이 개입하는 선악, 죄, 벌, 고통 차원의 문제가 된다. 즉 윤리가 아닌 율법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법률의 중요성은 그리스-로마 문명에서도 이미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서양 역사에서 정치 지도자들은 “법을 주는 사람”(Lawgiver)으로 묘사된다. 그리스의 7대 현인 중 가장 유명한 솔론(Solon, 638-558 BC)은 특히 “법을 주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만큼 법을 잘 만들고 지키게 하는 사람이 서양에서 지도자가 된다. 서양문명에서는 당연히 제도나 법률이 많아지고, 제도나 법률을 어기는 사람에 대한 제재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변호사의 역할이 커진다. 서양에는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유능한 변호사가 등장한다. 그리스의 데모스테네스, 로마의 시세로는 모두 변호사 출신이며 유명한 정치가가 되었다. 시세로는 카틸리나 반란 진압으로 “조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다. 데모스테네스는 마케도니아의 팽창에 반대하는 그리스의 인물로 그리스 전역에 명성을 날렸다.
동양 인성론의 핵심은 주어진 인간본성의 테두리 안에서 생후 “인간개성”을 양육하자는 데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인간개성 양육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윤리에 있다. 법률이 아니라 윤리가 인간개성 양육에서 상위에 서게 된다. 동양에서는 사회지도자를 지칭할 때 지도자를 “법을 주는 사람”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사회지도자를 지칭할 때 도교에서는 성인(聖人), 유교에서는 군자(君子)와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73 성인과 군자는 법률의 전문가가 아니라 “윤리성을 갖춘 지도자”다. 동양에서 변호사의 등장은 19세기 이후다. 동양에서는 법을 펼치는 사람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
3) 인간행동의 기준: 변화의 음양(陰陽) vs 존재의 선악(善惡)
음양론과 선악론은 동서양에서 인간사의 행동기준으로 작용한다. 동양에서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관점에서, 행동은 유연성과 적응성을 중시하는 변화론을 따른다. 개인의 행동은 독립적이라기보다 관계와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상호의존성과 연계성에 기반한다. 인간 행동은 자연과 사회 속에서 음(陰)과 양(陽)의 균형을 맞추려는 방향으로 이해된다. 균형과 조화를 지향한다.
인간 행동은 흐름을 보여주며, 자연의 법칙을 준용한다. 동양에서 본 자연의 핵심은 끊임없이 발생하는 변화에 있다.74 “만물은 음을 등에 업고 양을 품에 안는다.” “햇볕이 산을 비추면 밝음(양)이 표출된다. 저녁이 되어 햇볕이 사라지면 산은 어두움(음)을 표출”하게 된다. 도덕경에서는 자연의 만물은 모두 음양으로 표현되고 있다.
만물은 음을 등에 업고 양을 품에 안는다. (도덕경 42 장)
만물의 중심인 道는 언제,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다. 道는 자연과 우주의 질서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믿든지 道를 따르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神은 선택이지만, 道는 필연이다. 인간은 道를 피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道에 의지하며 道안에서 살게 된다.
하늘의 道는 모두에게 유익하며 아무에게도 해롭지 않다. (도덕경 81)
道는 모든 인간에 적용되기 때문에 개별 인간사에 일일이 개입하지 않는다. 인간사에 무관심하다. 인간사는 道의 범위안에서 인간이 스스로 결정한다. 인간 때문에 자연은 법칙을 바꾸지 않는다. 선악론이 아니라 음양론에 의하여 인간사를 표현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하는 일에 책임이 있다. 여름에 열심히 일하여 식량을 마련하고 겨울에 쉬게 된다. 여름에 일을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인간은 겨울에 궁핍을 피할 수 없다. 道는 선악의 피안에 있으며 모든 사람에 적용된다. 선한 사람은 道를 즐기며 선하지 않은 사람은 道의 보호를 받게 된다. 도에게는 적이 없다. 선악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道는 만물이 깃드는 곳이다. 道는 선한 사람의 보배인 동시에 선하지 않은 사람의 보호가 된다. (도덕경 62장)
서양 문명에서는 인간사를 선악론으로 풀어나간다. 무(無)는 “악”의 존재로 취급된다. 유(有)는 어두움과 무질서를 퇴치하여 밝은 세상과 질서를 만들었다는 “선”한 의미를 가진다. 선악론의 시작이다. 불변의 선악론은 서양의 존재론에서 창출된다. 창조된 변하지 않는 존재는 선악론으로 얽히면서 필연적으로 서로 나뉘며 대립하게 된다.
道는 빛과 어두움, 선과 불선(不善)을 모두 포함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절대진리를 “긍정”으로 표현하는 것을 멀리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도덕경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된다: 道는 계곡물처럼 투명하고 흙탕물처럼 탁하다 (도덕경 15). 道는 광명과 섞이고 흑암과 섞이며, 道에서 하나가 된다 (도덕경 56). 이러한 道에 대한 기본 개념은 동양 문명에 깊게 퍼져있다.75 서양의 접근 방식은 존재론에서 출발하며 “존재”의 원리를 분석하고 가려내는데 중점을 둔다. 동양의 접근 방식은 “변화”에서 자연과 인간사의 원리를 이해하려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변화에 중점을 두게 되면 이는 필연적으로 이원보완론으로 연계된다. 문명이 음양의 철학을 가지게 되면 인간사에서 절대성을 가진 선악의 개념을 적용하기 어렵다. 무위의 음양은 자연의 변화 원리를 설명하는 개념이고, 유위의 선악은 인간의 도덕적 판단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무위의 음양은 가치중립적이고, 유위의 선악은 가치판단적이다.
음양은 조화나 보완을 의미하는 기준을 가지게 된다. 음과 양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전환되는 관계다. 낮과 밤, 강함과 부드러움, 생과 사처럼 모든 존재는 변화 속에서 균형을 찾는다. 음과 양은 절대적인 실체가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어떤 상황에서는 음이 양으로, 양이 음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음과 양은 대립적이면서도 서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관계다. 홀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항상 상대를 필요로 한다. 대립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변화 자체가 질서의 원리다. “음양은 기(氣)를 통하여 화(和)를 이룬다” (도덕경 42 장). 음과 양은 화 즉 보완을 의미한다. 태양의 빛이 산을 비추면 음과 양으로 모습을 바꾼다. 어둡고 밝음은 빛과 산의 조화, 보완을 의미한다. 남과 여, 군과 신, 부와 자, 여름과 겨울, 전과 후, 고와 저, 이 모든 것이 동양사상에서는 음양처럼 조화를 이루는 보완 관계에 서게 된다.
서양의 선악론은 이원성의 인간관계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된다. 인간은 “선택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로 나뉜다. 선악의 구분은 필연적으로 두 가지를 대립시킨다. 계시종교의 핵심중의 하나는 선악론이다. 선악의 구분은 道의 철학에는 없는 개념이다. 道는 선악이 아니라 음양을 인간사의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선악론의 반대 개념으로는 가치중립론, 도덕상대론, 도덕허무론 같은 개념 등이 등장한다. 계시종교, 플라톤, 칸트의 철학이 이러한 분석을 따르고 있고 이는 서양 문명의 핵심사상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동양 문명에 이러한 서양 중심적인 반대개념을 적용하여 비교할 수는 없다. 동양 사상은 별도의 우주관과 인간사의 근원과 원리를 중심으로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동양 문명의 특성을 서양과 다르다고 해서 가치중립론, 도덕상대론, 도덕허무론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음양론은 변화론을 따르며 존재의 변화와 조화를 설명하는 철학적 틀이다. 서양의 선은 언제나 선이고, 악은 언제나 악이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해석은 달라질 수 있지만, 그 본질적 구분은 변하지 않는다. 선악론은 유위의 입장에서 인간의 행위와 존재를 평가하는 도덕적, 윤리적 기준이다. 음양처럼 상대적으로 변하지 않고 절대적 가치로 간주된다.
서양 사유로는 선악의 테두리에서 인간사를 구분하기 때문에 동양의 사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동양의 음양론을 내세워야 서양의 선악론과 비교가 된다. 인간사의 원리에서 음양론이 선악론과 정확히 대비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음양론과 선악론은 두 가지 상이한 세계관에 따른 인간사의 원리로 작용하게 된다. 음양론은 자연철학에 내재된 조화와 상호보완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다. 선악론은 종교나 형이상학적 철학에 내재된 도덕적 판단과 상호대립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다.
서양의 인간사의 원리인 선악론은 창조론에 연계되어 있다.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창조는 악으로 취급되는 어두움을 물리치고 생기는 선한 존재가 된다. 선악론과 연계된 창조의 중요성은 서양과 중동지역의 천지창조 신화에 연관된 “카오스와의 투쟁”(struggle against Chaos) 이야기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인간이 바다의 괴물, 용, 커다란 뱀과 같은 카오스의 상징으로 나타나는 나쁜 존재들을 무찌르며 빛과 같은 진실한 “존재”가 시작된다. 그리스 철학자인 헤시오드(Hesiod)도 계시종교와 유사한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태초에 카오스가 있었고, 이로부터 우주와 질서를 의미하는 코스모스와 함께 여러 神들이 탄생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나쁜 카오스를 이기고 좋은 질서가 창조되었다는 전제와 과정은 결국 서양문명을 인간사를 선악론으로 진행하게 만들고 있다. 창세기에서 인간 창조에 이어 바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선악에 관한 이야기다:
여호와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께서 아심이니라. (창세기 2:17, 3:4)
이어서 아담과 이브의 첫 아들인 가인이 둘째 아들인 아벨을 살해하는 죄, 즉 악을 저지르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를 통해 神은 선과 악을 태초부터 구분하게 된다. 神은 선의 편에 서 있다.
모세가 아뢰었다.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나의 모든 선(善)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겠다. 네 앞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겠다. (출애굽기 33:18-19)
이러한 선악론은 기독교 성서에서도 여전히 핵심문제로 다루어진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막 10:18)
神은 神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작용한다. 종교는 대부분 개인의 선택 이전에 부모로부터 물려받게 된다. 교리에서는 선택을 神의 은총(grace)으로 표현한다. 은총을 받아 神을 믿는 인간은 神의 강력한 보호를 받게 된다. 神은 이들을 위하여 기적을 시행하면서 이들의 인간사를 주관한다. 특히 神은 자신을 믿는 인간을 위하여, 인간이 적대자로 생각하는 자는 神에게도 적대자가 된다는 철학을 제시한다. 선악론이 들어서게 된다.
이로써 계시종교에는 적은 절대적으로 악하다는 개념, 선악론이 등장하게 된다. 선악론은 道의 철학에 없는 개념이다. 道는 선악론을 멀리한다. 道는 “선한자에게는 보배, 선하지 않은 자에게는 보호”가 된다. 道에서는 선악론 대신 음양론을 택한다. 神은 “선한자에게는 보배, 악한자들에게는 원수”가 된다. 믿는 사람들은 神을 따르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되므로 神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므로 선악론의 색깔은 절대적이 되며 인간사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다 (이사야 13:11)
계시종교에서는 선악은 神이 명령한 율법의 문제로 바뀌게 된다. 神은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사람은 벌을 주는 징벌의 神이 된다. 선악의 징벌은 율법의 명령이 되고 그 상벌은 가혹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神의 선악론”을 무서워하게 된다. 서양의 선악론은 죄와 벌에 중점을 두어, 악을 행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고 선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는 형태로 인간에게 작용한다. 이렇게 되면, 죄와 벌을 판단하는 율법이 중요해지게 된다. 모세의 5경 중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3권은 모두를 위한 정확하고 엄격한 율법과 징벌로 가득 차 있다. 서양에서 중세 천 년을 거쳐 르네상스 초기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상 세계를 지배하였다. 선악론은 이신론의 출현이후에도 계속 서양문명의 핵심으로 남아있게 된다.
반면, 도덕경에는 선악의 구별이나 이를 수반하는 징벌에 관해서는 아무런 표현도 없다. 인간사는 좋고 나쁨이 있을 수밖에 없다. 동양의 음양론은 선악이 아니라 길흉(吉凶)으로 인간사를 표현한다. 길흉은 神이 내려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자연철학인 道를 따르거나 어기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길과 흉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항상 변한다. 인생에서 길, 좋은 것은 언제나 바뀌게 되고, 흉, 나쁜 것도 언제나 바뀌게 된다. 이러한 삶에 대한 인식은 인간사의 과정에서, 변화론에 입각한, 음양론의 입장으로 기울게 된다.
동양 문명은 인생에서 길흉은 섣불리 예측할 수 없다는 고사성어 “새옹지마”에 익숙하다. 동양에서 인생사는 인생 전체를 보고 길흉화복을 판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존재론이 아니라 변화론으로 인생사를 바라보자는 입장이다. 따라서 동양에서의 길과 흉은 존재론적인 율법보다는 변화론적인 윤리에 의해 정의된다. 동양 사상에는 율법처럼 강제적인 명령어보다는, 조언이나 권유의 형태로 이루어진 윤리에 관한 내용이 많다: “군자는 道를 지켜서 길하고, 소인은 道를 어겨서 흉하다” (주역 계사전 상편 제3장).
음양론은 자연의 물리적, 시간적, 생물학적 차이에서 출발하여 점차 확대되어, 미와 추와 같은 미학적 차이, 선과 악과 같은 도덕적 차이, 그리고 이쪽과 저쪽, 남과 나와 같은 사회적 윤리적 차이를 포함하게 된다.76 음양에서 두개의 개념은 서로 보완적이며, 한 요소가 없으면 다른 요소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선악론에서 두개의 개념은 서로 대립적이며, 이들은 상호 충돌 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음양론은 서양에서 사용하고 있지 않아서 서양 패러다임이 지배하고 있는 최근 2백 년간 세계 사상사나 철학을 논의할 때 별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유가 서양의 대립성과 동양의 보완성 두 가지로 구성 되어있음을 감안할 때 활용할 수 있는 분야가 다양하다.77 동양 문명 내에서 도교를 음으로, 유교를 양으로 보는 구분은 상당히 유용한 방식이다. 또한 동서양 문명을 비교할 때 동양 문명을 음으로, 서양 문명을 양으로 보는 것은 아주 유용하고 적절한 구분이다. 이러한 구분은 다른 개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道와 神은 명확하게 음과 양의 차이를 보여준다. 道의 불현론과 神의 시현론은 음양의 차이를 보여주며, 道는 수용적이고 여성적(陰)인 측면을 중요시하고, 神은 적극적이고 남성적(陽)인 측면을 중요시한다.
음양론의 기본이 되는 이원보완론 덕분에 동양문명에서는 대립과 투쟁의 이원대립론이 철학적으로 힘을 잃게 되었다. 이원보완론과 이원대립론은 동서양 문명의 철학적인 흐름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실제로 논리의 전개에 있어서도 동양의 대구(對句)적 설명과 서양의 삼단논법의 설명이 유행하는 이유는 이원보완론과 이원대립론에 기인한다.78 동양 음양사상에서는 우주의 근본적인 이원성을 받아들이지만 이 두 가지 요소 간의 상호보완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관계가 강조된다. 결과적으로 이원보완론과 음양론의 문화에서 동양이 중시하는 정치윤리학, 정치경제학이 기원전 전국시대에 전개되는 민족국가의 구성과 함께 발전하게 된다, 반면, 서양의 이원대립론과 선악론은 계시종교의 성행과 함께 율법이 존중되며, 형이상학의 발전이 그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음양론의 동양에서는 자연과 인간사회는 모두 음과 양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음과 양은 절대적인 대립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관계 이루며 변화와 조화를 설명하는 원리다. 낮과 밤, 남성과 여성, 강함과 부드러움이 좋은 예시다. 선악처럼 가치판단이 아니라, 존재의 균형과 순환을 강조한다. 음양은 “둘이면서 하나”라는 관계적, 융합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관계적, 융합적 세계관은 서양철학체계가 주장하는 이원론이나 일원론과 다른 차원의 세계관이다.
서양은 자연과 인간의 세계를 도덕적 가치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문명을 구축해 나간다. 절대적이고 대립적인 가치를 주장하는데, 이는 그리스 문명과 계시종교에서 윤리적 측면을 강조하는 선악론으로 나타난다. 도덕적 선행과 죄악, 神과 악마, 천국과 지옥 등이 좋은 예시다. 이는 서양문명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강조하면서 선과 악의 선택이 인간 존재의 핵심 문제로 등장하는 철학체계를 수립하게 된다. 음양론은 가치판단보다 관계와 조화를 중시하고, 선악론은 인간의 도덕적 선택과 책임을 중시하게 된다. 따라서 동양은 사회의 질서와 균형을, 서양은 개인의 윤리적 판단과 구원을 강조하게 된다.
음양론의 지속력 vs 선악론의 강력함과 위험성
음양론과 선악론은 무엇이 다른가? 선악론은 인간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문제는 선악론에 위험이 따른다는 것이다. 신자와 비신자 사이의 적대감, 또 다른 神을 믿는 사람들 사이의 적대감이다. 지구상에는 여러 가지 神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각종 神은 절대성을 가지게 되므로, 神이나 계시종교의 선지자들은 조화롭게 같이 존재하기 어렵다. 神은 다른 神을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 가장 강력한 벌을 예고하고 있다. 삼 대 사 대 자손까지 이어지는 선악의 형벌이다. 이러한 선악의 분열은 같은 神을 믿는 분파 내에서도 생긴다. 분파 간의 강력한 적대성은 때로 다른 神에 대한 적대감을 압도하는 모습도 보인다. 기독교에서 구교와 신교의 싸움은 서양의 근대 초기의 역사를 지배하였다.
의인화를 멀리하는 道는, 일견 의인화의 神 보다 사람 같은 감정이 없고 개입도 피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에서 직접적이지 않다. 그러나 道에는 다른 道가 없고, 道 내에서 다른 분파도 없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한 가지 道를 따르게 된다. 지속력이 있다. 동양문명에서는 우주는 항상 변화하는 것이며 변화는 음양처럼 바뀌며 조화를 이룬다. 거기에는 하나의 근본이 있다. 바로 道다. 道는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다.
선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의 차이가 얼마이겠는가? (도덕경 20장)
음양론은 인간사에서 절대적인 선-악의 구분이 아니라 호-불호(不好)의 기준을 사용하고 있다. 선-악은 결국 호-불호처럼 결국 변한다고 보고 있다. 도덕경과 유교 경전에서는 선악의 문제를 서양과 다른 방법으로 해결했다. 선과 악은 인간의 것이며 자연이나 道와는 무관하다는 사상을 확립했다. 동양에서는 道가 자연 그대로 인간에게 접근함으로써 선악론이 아니라 자연에 있는 변화론을 심어주게 된다. 산은 시간에 따라 밝음과 어두움을 변화시키며 표현한다. 밝음과 어두움이 선악으로 변할 수는 없다. 변화론은 음양 사상을 통하여 동양 사유의 근원이 된다. 서양의 神이 일찌감치 선의 편에 서는 반면, 동양의 道는 선과 악을 초월하고 그 피안을 선택한다. 서양문명은 선악론을 동양문명은 음양론을 사유의 중심으로 삼게 된다.
선악론에서 중요한 요소는 죄와 벌의 개념이다. 선한자는 神으로부터 상을 받고 악한자는 죄를 지었으므로 神으로부터 벌을 받게 된다. 동양에도 “하늘에 죄를 지었다”, “천벌을 받는다” 라는 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죄와 벌의 개념과 비슷한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도교의 道는 선악의 피안에 있으며, 선한 사람은 道를 따르게 되므로, 결국 道가 선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道는 이롭게만 하는데, 선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의 결과로 道를 따르지 않아 “스스로 해를 자초하는 것”이지, 道가 징벌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道의 철학에서는 하늘의 상벌을 믿지 않는다. 또 인간의 행동이 하늘에 감동을 주어 하늘을 움직인다는 신비주의의 근간인 천인감응(天人感應) 설을 믿지 않는다.79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격언은 神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도와야 한다는 뜻이다. 하늘이 선한 사람을 상을 주고 선하지 않는 사람을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은 일정한데 사람이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의하여 스스로에게 길과 흉을 초래할 뿐이라는 철학이다. 이러한 생각을 따르면 선악은 인간의 범주에 있는 것이며, 자연의 원칙 즉 道는 그 피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평화와 전란은 하늘이 결정하는 것인가? 하늘의 해와 달, 별들의 움직임은 성군 우왕 때나 폭군 걸왕 때나 같았다. 똑 같은 하늘의 움직임을 가지고 우왕은 평화를 걸왕은 전란을 초래했다. 그러므로 세상의 평화와 전란은 하늘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순자 17:5)
음양론은 자연법칙을 따르고, 선악론은 계시종교나 도덕적 판단을 따른다. 자유, 평등, 박애, 정의 등은 선이고 속박, 차별, 증오, 부정 등은 악이다. 선과 악은 대립적 구조를 따르며 악을 극복하는 것이 도덕적 목표가 되며 사회적 정의의 실현이 된다. 종교에서는 구원과 연계되어 神의 뜻을 따르는 더욱 강력한 힘을 구사하게 된다. 선악론은 음양론과 비교하여 인간에게 강력한 힘을 주기도 하지만 한쪽으로 경도되어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반대로 인간의 행동에서 음양론은 선악론 보다 덜 강력하지만 지속 가능하다.
이신론의 등장과 과학이 발전하면서 서양에서 神이 기적을 일으키거나 의인화를 통하여 인간사를 주관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숫자가 작아지고 있다. 그러나 계시종교에서 주장하는 기적이나 의인화가 문제가 된다고 해서 계시종교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계시종교의 神은 절대적인 神이 자기를 보호한다는 심리적인 자기보존 본능 차원에서 계속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동은 정신이 아니라 심리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인간은 심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기도에 응하는 神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면이 있다.
인간은 심리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깊은 본능이 있다. 이를 위하여 인간은 神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내었다. 그래서 인간은 神에게 마치 어린이가 부모에게 의존하듯이 자신의 보호와 안전을 의지하는 것이다.80
철학적으로 분석하면 인생을 살아가는데 선악론 보다 음양론이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지속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속에서 선악론은 사라지지 않고 인생사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밖에 없다.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지만 선악론의 강력함이 인성에 호소하는 면이 크기 때문이다.
선과 악은 우리의 존재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방해하는지 가 판단 기준이다. 즉 우리의 행동력을 증가 또는 감소하는 지, 촉진 또는 제거하는 지 하는 것이다.81
궁극적으로 인간은 정신이 아니라 본능과 정신을 합친 인간본성에 의하여 좌우되기 때문이다. 선악론은 악에 대한 처벌을 강조하는 것이 생존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악한 자는 삼 대 사 대 자손까지 벌을 받게 된다”는 선악론이 현실속에서 사용되는 이유는 생존을 직접 위협하는 상황에서 악의 개념은 “자기보존”을 위하여 적에 대비한 강력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양론의 손자 병법 vs 선악론의 클라우제비츠
서양문명의 대립·배타적 성격, 분리·투쟁적 성격과 이와 대조되는 동양문명의 화합·수용적 성격, 조화·화해적 성격은 동서양의 종교·사상·철학 등 어디서나 발견되는 것이지만, 특히 투쟁이냐 공존이냐를 결정하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서는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82 이는 동·서양 전쟁론의 최고봉인 손자의 《손자병법》과 클라우제비츠(Clausewitz)의 《전쟁론》에 나타나 있다. 손자는 동양사유를 적용하여 음양론을 따르고 있고, 클라우제비츠는 선악론을 따르고 있다. 손자는 최고의 승리는 적을 궤멸시키지 않고 이기는 것이고, 클라우제비츠는 적의 완전한 궤멸이 최고의 승리라고 정의하고 있다. 최고의 승리를 위하여 손자는 세의 확장을 중시하고, 클라우제비츠는 공세와 승리의 추구를 중시한다.
같은 주제를 다루는 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살던 문화권의 영향으로 손자는 적은 음양에 따라 내 편이 될 수도 있음을 감안한 장기적인 안목을 보이는 반면, 클라우제비츠는 적은 악한 존재이므로 완전히 파괴하자 단기적인 안목을 보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손자병법》은 전략적이고,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전술적이다. 손자와 클라우제비츠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전략과 전술적 차이는 전쟁에 관한 두 사람의 정의에서 나타나고 있다.
손자: 전쟁은 국가의 중대사다. 국민의 생사와 국가의 존망이 기로에 서게 되는 것이다. 신중히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83
클라우제비츠: 전쟁은 적을 우리 의사에 따르게 하기 위한 무력행위이다.84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적의 완전한 항복을 최대 목표로 삼고 있다. 기원전 5세기 춘추전국시대에 씌어진 《손자병법》에서는 분명히 최고의 전략은 적을 생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적을 괴멸시키고 승리하는 것은 부득이한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다.
대체로 전쟁을 하는 가장 훌륭한 방책은 전국을 온전한 채 두고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이며, 적의 국토를 파괴하고 얻는 것이 차선이다. 적의 군을 온전한 채로 두고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이며, 그것을 파괴하고 얻는 것은 차선이다.85
이런 사고방식에는 필연적으로 비폭력적 수단, 곧 ‘위계’가 적나라한 무력 사용보다 중시되고 있다. 곧 노자의 말대로 존재하지 않는 무기가 창·칼보다 중요한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위계는 중요한 전쟁에서 취할 수 있는 전략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한다. 클라우제비츠는 적의 괴멸을 최고의 승리로 간주하고 있다.
손자: 모든 전략은 위계다.86
클라우제비츠: 적군의 괴멸이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우월한 수단이다. 이와 비교하면 다른 수단은 중요성을 상실한다.87
손자가 하나의 전략으로 높이 평가한 위계·모공(謀攻)에 대해 클라우제비츠는 하나의 사기술로 취급하고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수십 년 후에 독일을 통일할 때 비스마르크가 사용한 모든 외교술이나 정략은 손자 에게서는 크게 평가를 받을 것이고, 클라우제비츠 에게서는 하나의 사기극으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클라우제비츠에게는 전쟁의 결과가 어디로 귀착되든 승리만 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그는 야전군 사령관의 전술을 전체 전쟁론으로 만들어버렸다.88
손자는 동양인인 까닭에 투쟁에 대한 철학에서도 조화라는 동양의 기본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그는 적을 괴멸하여야 할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내 편으로 만들어 조화시켜야 할 대상을 파악한 것이다. 서양인은 내 편이 아닌 자는 모두 나의 적, 또는 기껏해야 나의 적이 아닌 자는 내 편 정도로밖에 발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손자에 의하면, 전쟁에서도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는다”는 동양사상의 본질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대 핵시대는 핵을 사용할 경우 상호 궤멸을 의미하므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가치를 상실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주장한 3단계의 완전한 승리, 곧 “적 군사력의 완전 괴멸, 적 영토의 점령, 적의 의지력 분쇄”는 실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가 의미하는 전쟁의 종결, 적의 무장해제, 승리란 철저한 적의 괴멸로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독일에게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적을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클라우제비츠가 전쟁 계획을 논할 때 어떤 한 국가를 무장해제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적의 무장해제는 중요한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 그것은 군대, 국토, 그리고 적의 의지력 세 가지이다.
우선 ‘군대’를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 ‘영토’를 점령해야 한다. 왜냐하면 영토에서 새로운 군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전쟁이 그쳤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적의 ‘의지력’이 분쇄되지 않으면, 즉 정부와 그 동맹자들이 평화협정에 서명하거나 그 국민이 복종하지 않으면 적대적 행위와 긴장 관계는 계속되므로 전쟁이 그쳤다고 할 수 없다.89
이러한 클라우제비츠의 생각과는 반대로 손자병법에게서는 오히려 적의 전쟁의도를 분쇄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방책이고, 의지력만 꺾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적의 군사력 괴멸은 마지못한 최후의 수단으로서 만 고려되고 있다. 군사력의 괴멸을 승리의 필수요건으로 주장하고, 전쟁은 반드시 무력 행위라고 규정한 클라우제비츠의 경우, 그의 전쟁론은 손자의 전략적 전쟁론에 비하면 분명히 전술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백 번 싸워 백 번 승리하는 것이 결코 최상의 방법이 아니고,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따라서 가장 훌륭한 방책은 적이 전쟁을 하려는 의도를 분쇄하는 일이고, 그 다음은 적의 동맹 관계를 끊어 고립시키는 일이며, 그 다음은 적의 군사를 징벌하는 일이요, 최하의 방책이 적의 성을 공격하는 일이다.90
손자와 클라우제비츠의 이러한 근본적 차이는, 손자가 적도 궁극적인 내 편이고, 또 다른 적에 대해서는 내게 우방이 될 수 있다는 전략적 조화의 개념을 잃지 않고 있는 데 반하여, 클라우제비츠는 적은 항상 적으로서 완전하고 철저하게 괴멸시켜야 한다는 분리·투쟁적인 서양문화의 전형적 기본개념을 전쟁론에 그대로 도입하고 있는 데 기인한다.
이상주의에 의해 대외정책이 짙게 물든 미국에 의하여 주도된 제도에 의한 평화보장은 실패하였음이 명백히 드러나 버렸다. 그것은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로,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같이 국제연맹을 구상하고 창설한 친구인 일본과 이탈리아는 십여 년 후 국제연맹을 깬 장본인으로서 적이 되었는가 하면, 일본과 독일을 가상의 적으로 하여 미국과 함께 국제연합 창설에 참여한 친구인 소련은 수년 후 적이 되었으며, 어제의 적이었던 일본과 독일은 미국에 오늘의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냉전이 끝난 오늘날에는 이 모든 것들이 의미를 잃게 되었다.
평화공존보다는 승리를 추구한 서양의 심리적 태도는 스피노자가 묘사한대로 “전쟁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었는지 생각지 않고 그저 승리하여 적을 혼내 주었다는 것에 더 만족하는 어리석음”으로 밖에 설명될 수 없다.91 이러한 서양의 태도는 스피노자시대 이후에도 수백 년 동안 계속되어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속에서 결정화되었다.
베트남은 세 차례 전쟁을 치렀다. 1945-1954년 프랑스와의 전쟁, 1955-1975년 미국과의 전쟁, 그리고 1979년 초 한 달간에 걸친 중국과의 전쟁이다. 제1차와 제2차 베트남 전쟁은 동서양 간의 전쟁이다. 서양은 클라우제비츠식의 선악론과 승리의 전쟁을 폈고, 동양은 손자병법식의 음양론과 세의 확장 전략을 펼쳤다. 프랑스와 미국은 전쟁이 오래 계속되면서 “왜 전쟁을 하여야 하는지”라는 목적을 상실하게 되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식민지 확장도 공산세력의 동남아 확장 저지도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일단 전쟁에 끌려들어 간 후에는 정치력이나 의지력이 아니라 전쟁 자체의 논리에 따라 그저 승리를 다짐하는 전쟁을 계속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반면 중국은 캄보디아를 침공한 베트남에게 “교훈”적인 전쟁을 하겠다고 목표를 정하였고 미국과 일본에게 이를 설명하였다. 전쟁은 시간과 공간적으로 제한된 군사작전이 될 것임을 천명하였다. 중국의 베트남 공격은 2월 17일 개시되었는데, 베트남의 영토를 전혀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캄보디아 등에 대한 협상을 촉구하기 위한 것임을 선언하였다. 베트남은 중국의 공격에 대해 양보 없이 응수하였다. 중국은 3월 5일 철수를 시작하였으며, 3월 16일에는 철수가 완료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제3차 전쟁은 중국과 베트남 모두 승리를 선언하였지만, 4월에 들어서서 북경과 하노이는 협상을 시작하였다. 중국과 베트남은 전쟁을 준비하면서 전쟁에 걸려 있는 판돈의 크기에 따라 전쟁의 규모나 시간을 조정할 줄 알았다. 서양은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며, 이를 바꾸려고 노력하였다. 식민 대상국가나 공산국가는 적국이 되는 선악론에 따라 이들에 대한 승리를 쟁취하고자 했다. 프랑스도 미국도 패배하였다. 그러나 동양은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이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였다. 북경과 하노이는 음양론에 따라 적국이 우호국으로 쉽게 변화하는 흐름을 따랐다.
손자에게서는 전쟁에서의 승리보다 전쟁 목적 파악의 중요성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 손자는 전쟁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승리에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최대의 이익을 얻는 데 있다는 것을 되풀이 설명하고 있다.
전쟁은 다소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속전속결해야 하는 것이다. 정교하게 한다 하여 지구전을 해서 그 나라가 이익을 보았다는 예는 아직 없다. 그러므로 전쟁의 해를 십분 알지 못하는 자는 전쟁의 이익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92
클라우제비츠에게 전쟁에서의 승리는 곧 전쟁터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가 비록 “전쟁은 다른 방법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는 말로써 전쟁이 목적 달성의 한 방법이고, 전쟁이 정치적 목적에 종속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기는 하다.93 그러나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궁극적 목적, 곧 정치적 목적도 역시 전쟁터에서의 승리를 의미한 듯, 그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구체적 설명을 하고 있지 않아, 이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다.94 실제로 “전쟁은 다른 방법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는 명제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부가 민간정치인에 대해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이용되었다.95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목적을 승리로만 보고 있기에 그 승리가 어떤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있다. 손자는 손자병법 제2장 작전편(作戰篇)에서 너와 나를 동시에 멸망시키고 피폐시킬 전쟁수단의 동원은 올바른 전쟁법이 아니라고 하고 있는 데 반하여, 클라우제비츠는 이러한 고려를 하찮은 박애주의적 태도, 전쟁에서는 무엇보다도 피하여야 할 불필요한 방해가 되는 태도로 보고 있다.
박애주의자들은 피를 많이 흘리지 않고 적을 정복하고 무장해제 시킬 수 있는 인위적 방법이 있고, 이것이 바로 진짜 전쟁 술인 것처럼 쉽게 상상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이것이 소망스럽다 해도 이것은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잘못된 생각이다. 전쟁처럼 위험한 일에서도 호의적 태도에서부터 나오는 착오야 말로 가장 나쁜 잘못이다. 물리적 힘을 최대한 이용한다는 것은 지력도 또한 최대한 이용한다는 것이므로 지력을 무자비하게 사용하고 어떠한 살상도 피하지 않는 자는 그것을 주저하는 적에게 이길 것이다. 이런 법칙은 적도 사용하게 마련이고 서로서로 극한을 향하여 진전하게 되어, 적이 가지고 있는 한계만이 이러한 극한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결정지어줄 뿐이다.96
현대는 손자병법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적의 궤멸이 곧 나의 궤멸을 의미하는 핵무기시대에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무용지물이 된다. 손자는 2,500년 전에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를 내다보듯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21세기 미중패권 경쟁은 서양식 공세와 승리가 아니라 동양식 세의 확장으로 결론이 난다.
우회하여 적에게 이(利)를 주는 듯 유인하라. 이런 방법으로 늦게 출발하여 먼저 도착할 수 있다. 이런 전략을 택할 수 있는 자만이 직접 전략과 간접 전략의 차이를 알고 있는 것이다.97
직접 전략과 간접 전략의 차이는 세의 빌드업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데 달려있다. 손자병법은 특히 당장의 대결과 승부를 결정하는 것 보다는 국가의 운영을 염두에 둔 장기전략에 유용하고, 이러한 형국에서 결국 승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직접전략과 간접전략을 모두 활용하여 세를 확장하자는 것이다.
바둑, 세(勢)의 확장 vs 체스, 공세와 승리
클라우제비츠와 손자병법이 설명하는 것처럼, 상대방과의 경쟁에서 서양은 공세와 승리를 목표로 하고, 동양은 세를 넓히는데 집중하고 있다. 동양에서 종국적 승리는 상대적 승리 즉 세를 크게하는 자에게 결국 자연스럽게 돌아오는 것이지 직접 승리를 목표로 하고 계속 싸우는 자가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철학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철학이 동양의 바둑에 나타나 있다. 이것이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체스, 서양의 상대를 대하는 철학이나 자세와 크게 다르다.
체스에서는 목적이 분명하다. 그 목적은 압도적인 승리다. 체스의 결과는 완전한 승리가 아니면 패배다. 체스 게임은 체스 판에서 벌어지는 계속되는 정면 충돌로 이어진다. 바둑은 상대적인 승리를 목표로 한다; 바둑 게임은 바둑판 전체에서 벌어지지만, 목적은 우리편의 선택 범위를 넓히고 상대편의 선택 범위를 줄이자는 데 있다. 바둑의 목표는 단판의 승리가 아니라 전략적 우위를 계속 점하는데 있다.98
전략적 우위는 세의 흐름으로 정해진다. 동양이 자연의 흐름과 인간사에서 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전체를 알지 못하면 부분만 가지고는 상황을 파악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철학적으로 보면 동양은 항상 변화해 나가면서 알 수 없는 미래의 상황을 추론해 나가는 귀납적 사유를 따르고 있다. 변화하는 세의 힘을 파악하고 결과에 미치는 영향을 중요시하자는 것이다. 제도나 모델을 중요시하는 서양의 존재론은 부분을 보고 전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철학적 성향을 만들어 낸다. 서양의 존재론적 체제는 연역적 사유체계와 연계되어 있다.
세(勢)의 중요성은 중국 사상가 신도(愼到, 395-315 BC)에 의하여 강조되었다. 신도는 “용(龍)도 구름(勢)를 잃으면 지렁이와 같아진다” 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사회에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숨겨진 전략적 흐름인 세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예를 들면 징기스칸은 13세기 몽고에서 태어나서 몽고가 가진 숨겨진 세를 발견하고 이를 규합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용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21세기 몽고에서 태어났다면 무엇을 하던 세계적인 용이 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징기스칸이 살던 13세기의 몽고 기병부대와 합성 활의 숨겨진 세가 21세기에는 없기 때문이다.
신도는 춘추전국시대 조나라 출신 철학자로, 제나라의 직하학궁(稷下學宮)에서 활동했다. 그는 도가(道家)와 법가(法家)의 사상을 취합하면서, 권세(權勢)와 형세(形勢)를 중시하는 현실적인 철학을 발전시켰다. 권세와 형세가 인간 사회와 정치의 본질적 힘이기 때문에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외적 조건과 권력의 흐름이 핵심이라고 판단하였다. 권세란 권력과 세력을 합친 개념으로, 군주가 신하와 백성을 통제하는 힘의 근원이며, 군주에게 권세가 있어야 법과 제도가 제대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도덕적 힘이나 윤리가 아니라 권세 자체가 질서를 유지하는 실제적 힘이라고 주장했다. 형세란 사물이나 상황의 흐름, 시대적 조건, 세력의 배치를 뜻하며, 거스를 수 없는 자연적·사회적 힘으로 보았다. 도덕이나 윤리도 형세를 거슬러서는 무력하며, 형세에 순응해야 안전과 성공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저서로는 신자(愼子) 42편이 있었으나 현재는 7편만 전해지고, 그의 세(勢) 사상은 한비자(280~233 BC) 가 계승하였다. 한비자는 신도의 현실주의적 사상을 높이 평가하면서 자신의 통치 철학을 법(法), 술(術), 세(勢)라는 세 가지 사상으로 요약하였다.
최근 서양 사상가들도 동양의 세(勢)라는 철학적 사유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서양 단어로는 잠재력, 가능성, 숨겨진 힘 등을 의미하는 퍼텐셜(potential)이 가장 유사한 표현을 하고 있다. 서양 단어에도 트랜드(trend) 같은 단어가 경향이나 흐름을 나타내지만 이것은 이미 존재하는 알고 있는 것에 소속된 표현이고, 세처럼 숨겨져 앞으로 나타날 힘에 대한 표현은 아니다. 미중관계 개선을 주도한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중국과 동양문명에 대한 남다른 이해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중국지도자들이 전략적 상황을 읽는 방법과 목표를 설정하는 데서 서양과 다른 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변화에 숨겨진 세를 따르는 동양과 존재론에서 나온 즉각적 행동을 따르는 서양, 두 세계의 철학적 사유가 근원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음을 분석하고 있다:
중국 지도자들은 전략적 판도를 하나의 전체적 흐름으로 본다: 선악, 원근, 강약, 그리고 과거와 현재는 모두 연속적이다. 서양의 역사관은 역사적 흐름을 악이나 후퇴에 대한 완전한 승리의 과정으로 다루지만, 중국의 전통적인 역사관은 다르다…. 중국은 역사의 흐름에서 최선의 선택을 조화에서 찾는다. 전략과 정치력의 발휘는 상대방과의 투쟁적 공존을 이루는데 집중되어 있다. 목표는 상대방을 약하게 하면서 자신의 잠재적 세(勢) 또는 전략적 위치를 강화하는 데 있다.99
손자병법 제5장 전체가 숨겨진 전략 세에 관한 설명이다. 세를 파악하고 이용하면 백전불태가 된다. 손자는 전쟁에서 세는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지는데 전략을 잘 세우는 것으로 전쟁에 임하며, 전술을 잘 사용하는 것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전쟁을 잘하는 장군은 군사 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세를 활용한다” (손자병법 5-5). 그리고 전략과 전술은 상호 의존적이며 서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둘 사이의 조합에서 세가 형성된다고 설명한다. 손자는 전략과 전술 간의 조합은 무궁무진하며 누구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세의 전쟁론을 펼친다:
해와 달과 같이 움직여라. 없어진 것 같지만 다시 시작한다.
사계절과 같이 움직여라. 죽은 것 같지만 다시 시작한다. (손자병법 5-2)
서양은 존재론에 의한 유(有)의 역할, 즉 행동을 중요시한다. 동양은 변화가 만드는 새로운 상황 즉 세(勢)의 움직임을 따르게 된다. 세의 움직임은 유가 아니라 무를 원점으로 한다. 서양의 행동은 법률, 제도, 모델을 추구하게 되고, 동양은 당장의 행동 추구 보다 변화에 숨겨진 세의 우월성에 집중하고 있다. 인간이 추구하는 효능을 어떻게 달성하는지에 대하여 동서양은 다른 방법을 택하고 있다. 프랑스의 중국학자 프랑수아 줄리앙(François Jullien)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인과 중국인은 효능이라는 것을 달성하려고 할 때 다른 철학을 따르게 된다. 그리스인은 행동을 따르고, 중국인은 변화를 따르게 된다. 둘 사이에 관계가 전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인은 인간의 행동이라는 모델에 따라오는 자연적 변화를 생각하고, 중국인은 자연적 변화에 따라오는 인간의 효능성을 생각한다. 전쟁에서 장군은 식물이 자라는 과정이나 강물이 흘러가는 과정과 같이 전략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정하고자 한다… 중국인은 행동의 초월성보다는 변화의 내재성을 믿고 있다.100
서양의 법률과 제도 그리고 모델을 존중하는 습관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서양은 神이 창조한 자연과 인간에는 항상 목적이 있다는 목적론을 가지고 자연과 인간을 관찰하는 습관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법률로 이를 규정하고 모델과 제도를 만들어 남에게 퍼트리고자 한다.
서양의 목적론은 인간의 사유가 진리에 입각하고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한번 세워진 목적에 대한 의문이나 다른 방법에 대한 개연성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양이 발전시킨 이론이나 여기에 따른 실천은 세상에서 모든 상황에 적응한다고 보고 싶어한다. 반면 동양 문명은 변화론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방안을 추구하거나 변화하자는 입장에 대하여 열려 있게 된다. 강요성이 없다. 결국 동양의 인간사는 법, 세, 술이라는 효능성을 추구하면서 공존을 인정한다.
목적을 파악하게 되면 제도의 도출에 집중하게 된다. 서양인들은 제도가 변하지 않는 존재, 그리고 거기에 잠재되어 있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효율을 높인다고 보고 있다. 반면 동양인은 변화의 세에 의존한다. 사물 간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하고,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된다.101
그러므로 서양인들은 그들이 만든 제도나 모델은 세계의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모두 통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神이 만든 인간이므로 모두에게 통용된다는 보편성이 보장되는 것이고, 神이 인도하여 만들어진 제도나 모델은 마찬가지 이유로 보편성이 보장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편적 효용성에는 그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제국주의적인 의도와 함께 인간을 모두 잘 살게 해보자는 종교적 선의의 입장이 혼용되어 역사속에서 작용하여 왔음을 보여준다.
미중의 패권경쟁: 중국의 세(勢) vs 미국의 공세
동서양의 철학적 사유체계는 21세기 미중패권 경쟁에서 미국과 중국이 보이는 전략-전술의 차이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공세를 통한 승리의 추구와 세의 확보의 차이다. 미국은 중국을 21세기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최대 위협으로 확정하고 중국의 굴기를 방해하기 위한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미국은 동맹 강화와 중국에 대한 경제적 압박 등으로 중국에 대하여 공세를 취하며 계속 승리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의 패권경쟁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당장의 승리 보다는 중국의 경제력 강화와 내부 결속에 집중하면서 세 즉 전략적 위치를 강화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미국의 전략은 단기적인 눈에 띄는 유위(有爲)의 공세 전략이다. 중국의 전략은 장기적인 보이지 않는 무위(無爲)의 세의 전략이다.
앞으로는 국제관계가 “전쟁에서 교역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면서 “협력, 경쟁, 갈등” (cooperation, competition, conflict)이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형태를 띠게 된다. 동시에 미중간의 핵무력의 균형으로 인하여 상호파괴를 가져올 수 있는 전쟁의 가능성은 아주 낮게 상정되고 있다. 핵전략에서도 미국과 중국은 근본적 차이를 보인다. 미국은 상호확증파괴(MAD, mutually assured destruction)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MAD는 적대국이 먼저 공격하여도 남아있는 핵무기가 적을 확실히 파괴하고 무력화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핵전략이다. 미소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이 모두 따른 전략이다. 미국은 현재 5,000기 이상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 중국은 MAD 전략에 동의하지 않는다. 적대국이 먼저 공격하여도, 남아있는 핵무기로 적국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아도, 적대국에 “충분한 대가”를 치르게 하면 그것으로 적의 선제공격을 제어할 수 있다는 전략이다. 중국은 현재 600기 정도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의 MAD는 서양식 전략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과 중국이 국제관계를 다루는 문화, 역사, 철학적 패턴이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 아래 일어나는 미중패권 경쟁은 중국의 세의 확대와 미국의 승리를 위한 공세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은 동맹강화, 대 중국 경제와 교역 견제등에 집중하고 있는데 반하여 중국은 경제력 확대에 필요한 세의 확대, 즉 연구인력 집중교육이나 미래산업에 대한 투자확대에 집중하고 있다.102 결국 중국은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전략적 위치를 강화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결국 이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결국 승자는 군사력의 충돌 없이 “저절로” 결정된다는 것이 미국과는 다른 중국의 패권전략이다.
군사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과거의 패권경쟁적 경쟁에서는 군사력이 공세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이제는 방어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미중간의 경쟁은 서양의 역사속에서 여러 번 일어났던 기존세력과 신흥세력 간의 직접적 “충돌”(confrontation)로 결정되지 않는다. 서양 학자들은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충돌로부터 영국과 독일의 충돌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간의 두 세력 간의 역사적 충돌 상황에 익숙하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충돌을 당연시하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으로는 미중관계가 설명되지 않는다. 미중 경쟁은 체스 게임처럼 적의 궤멸이 아니라 바둑 게임처럼 세의 확장으로 오랜 시간을 두고, 결과가 저절로 결정되는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다.103
중국은 미국과의 공존 정책하에 여러 가지 방안을 활용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를 크게 하려 하고 있다. 미국은 공격적으로 중국에 대한 적대감을 표시하고 있다. 미국은 자신의 가치를 종교적 신념으로 중국을 포함 세계에 퍼트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키신저는 이러한 미국과 중국 외교적 비전을 설명하고 있다:
미국의 특이성은 자신의 가치에 대하여 종교적 전파성을 가지고 있다. 미국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세계 곳곳에 퍼트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반면 중국의 특이성은 문화적이다. 중국은 다른나라를 자신과 같이 개종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중국은 자신의 제도가 중국 외의 지역에서도 적용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104
이런 문화적 배경으로 미국과 중국은 동맹국을 다룰 때 간섭과 불간섭의 방법으로 다루게 된다. 이러한 미국과 중국의 방법은 한반도에서 한국과 북한을 다루는 데서 그대로 드러난다. 한국은 미국의 지원과 간섭으로 강력한 경제체제와 민주주의를 갖추게 되었다. 동시에 미사일이나 핵문제에서 미국의 강력한 통제를 받고 있다. 북한은 중국의 친구로 남아 지원을 받지만, 중국은 북한의 경제체제나 국내정치에 일체의 간섭이 없다.
중국의 미국과 다른 대외정책은 마테오리치의 보고서에도 설명 되어있다. 바스코다가마가 개척한 해로를 따라 실제로 동양에 와서 오래 살게 된 예수회 소속 신부인 마테오리치(Matteo Ricci, 1552-1610)는 서양에 보낸 보고서에서 바로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황제도 신민도 아무도 이웃을 침략하거나 정복하려는 전쟁 계획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것에 아주 만족하고 있다. 그래서 이웃나라 정복의 욕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점에서 중국인들은 유럽 사람들과는 아주 다르다.105
서양은 그리스-로마 시대 이후 근세 대항해 시대에도 계속된 제국주의를 펴왔다. 동맹국에게는 자신의 법률, 제도, 모델을 강요하게 되었고, 동맹국이 아닌 주변국과의 관계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은 강요가 아니라 필요하면 가져가되 그 경우 종주권을 인정하라는 자율적인 입장을 취했다. 주변국과는 적대적이 아니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중국은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가치를 다른 나라에 퍼트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면 와서 가져가라는 태도를 취했다. 주변 국가들은 중국과 접촉하여 문명을 배우고 가라는 자세였고, 이를 위해서는 주변 국가들은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다.106
동양식 국제관계에서는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한다. 이웃나라와 평화공존의 방법을 추구하게 된다. 변화는 세를 이용한 점진적인 그리고 디폴트 방식으로 저절로 일어나는 방식을 선호한다. 서양은 법률, 제도, 모델의 보편성을 주장하고 서양 방식을 퍼트리기 위하여 자신의 가치를 전파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중국 황제는 이웃 나라와 반드시 적대적인 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했다. 중국도 미국과 같이 자신이 특별한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세계로 퍼트리려는 보편성을 주장하려는 의도는 갖고 있지 않았다.107
道와 神의 개념은 변화론과 존재론을 통하여 국제관계에서 동양식 불간섭의 방법과 서양식 간섭의 방법을 제공하였다. 불간섭은 정적이다. 분쟁이 작아지지만 역동적인 자극이나 진화 가능성이 줄어든다. 간섭은 동적이다. 분쟁 가능성이 커지지만 동시에 자극과 진화 가능성이 생긴다.
승리와 세의 전략적 차이는 동서양 문명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세를 추구하는 동양은 상대방의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는다. 자신의 문화에 비추어 자신에 맞게 변형하게 된다. 동서양은 19세기 이후 역사상 처음으로 양측 문화가 적극적인 교류를 통하여 변화하게 된다. 특히 서양의 패러다임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양이 서양으로부터 문화적인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지난 반 세기 동안 동아시아의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유럽, 특히 서양의 경험을 참고했다. 그러나 서양의 것을 그대로 베끼기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의 현대화는 아주 다른 형태를 취했다. 그들 자신의 역사와 문화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제도, 관습, 가치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나갔다.108
서양의 법률, 제도, 모델이 동양에 도입되면서 동양은 이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변형된 방식을 취하였다. 제도는 아무리 좋아도 아무 곳에나 그대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다. 제도는 문화에 종속된 개념이기 때문이다.109 동양은 서양의 제도와 경험을 수입하면서 이를 동양의 사유체계에 따라 자신에게 맞추어 나가는 변화된 방법으로 도입하고 있다. 승리와 패배를 의미하는 존재론적인 이데올로기 식의 도입이 아니라 세를 고려한 변화와 변형의 방식이다.
4) 神이 선하다면 악은 어디서 나왔나?
神은 자애롭고 인자하다. 동시에 神은 삼 대 사 대 자손까지 벌을 주는 징벌의 神이기도 하다. 이러한 神의 특성은 모세오경에 구체적으로 예시되어 있다. 계시종교는 죽음 이후에도 살아 남는 영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원죄설을 주장한다. 그래서 인간은 神을 두려워하며 참회하는 인간이 된다. 도덕경에서 설명하는 道는 인간에게 징벌을 주는 구절이 전혀 없다. 인간을 구성하는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인생에서 중요하며 영혼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인생에서 인간은 道가 베풀어 주는 것을 환영하고 즐기라는 자세를 권고하고 있다. 한 번만 사는 인생이 중요하다.
神을 경외하는 인간은 인간사에서 선악론적인 관점을 갖게 된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나 무신론자는 선악론의 입장에서만 취급될 뿐이다. 개종시키거나 선악의 관점에서 악의 존재로 취급된다. 계시종교에서 인간은 종교가 정한 엄격한 교리에 의하여 神으로부터 축복과 저주를 받는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삶이 있다는 천당과 지옥론을 믿으면서 선악론은 더욱 더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죽음이후의 영원한 삶의 형태는 지금 이 세상에서 선하게 살았는지 아니면 악하게 살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서양 철학에서 선악은 존재론 적이어서 변하지 않는다. 악은 없애 버려야 할 존재가 된다.
계시종교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선악론에 담겨있는 위험성은 악은 왜 존재하는가 라는 의문이다. 전지전능한 神이 다스리는 세상에 정의롭지 않은 일과 악한 일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선악론의 문제는 창세기에 기록된 선악과의 이야기에서 벌써 암시된다. 인간은 뱀의 권유에 따라 神의 명령을 어기고 神과 비슷해지기 위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된다. 인간이 神처럼 될 수 없는데 神처럼 될 수 있다는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는다. 선악과로 인하여 인간에게 불행이 닥친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4-5)
이런 이야기는 인간이 神의 영역인 선악을 직접 다루는 데서 발생하는 문제와 그 결과의 심각성을 암시해주고 있다. 선악론에 의하면 인간은 쉽게 악해질 수 있으며, 인간의 악한 행위는 계속된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神은 벌써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6:5-7)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하여 神은 선과 악에 대한 도덕적 명령을 제공하며, 강력한 율법을 남기게 된다. 神의 명령을 어기면 神의 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은 계시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다. 특히 다른 神을 섬기게 되는 것이 최대한의 악한 행위가 된다. 이러한 악을 저지르는 인간에게 대하여 강력한 벌을 내리게 된다. 서양에서는 神을 선한 존재, 인자한 존재로 규정하면서 선한 존재가 아닌 자 들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론이 핵심에 깔려 있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시편 11:5)
그렇게 되면 神이 선하다는 서양의 神의 개념에서는 “神이 선하다면 악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라는 의문이 나오게 된다. 악도 神이 창조한 것인가?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예레미아12:1)
그리스 시대부터 “神이 선하다면 악은 어디서 나왔나?” 라는 난제가 제기되었다. 서양 철학 체계내에서는 선악론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문제로 되어있다. 神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악 역시 神이 창조하신 것인가? 그렇다면 神은 왜 악을 창조하셨을까? 이 문제에 대해 서양의 신학자와 형이상학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하였고, 아직도 그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이는 유대-기독교뿐만 아니라, 그리스 철학자들도 이미 오래 전부터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하였다. 서양의 현자중의 1인자로 꼽히는 아테네의 지도자 솔론(Solon, 638-558 BC)은 “악인 중에 부자가 있고, 선인 중에 빈자가 있다”라는 한탄하는 시를 남겼다.
BC 8-7세기에 활동하였던 호머와 동시대인 그리스 시인 헤시오드(Hesiod)도 정의롭고 전능한 神들이 어찌하여 정의롭지 못한 인간이 세상에서 잘 살도록 허용하는가 하는 선과 악의 문제를 고민하였다.110 이어 인간이 패러다이스를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설명하면서, 헤시오드는 선하고 정의로운 神들이 어찌하여 세상에서 악과 부정이 횡행하도록 내버려두는가 하고 탄식하게 된다:
인생에서 자신의 약속을 지키고 선과 정의를 실행하는 자는 아무런 보답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악을 행하고 과격한 일을 실행하는 자들이 칭찬받게 된다. 폭력이 이기고 덕은 사라진다. 악한자가 선한자를 괴롭히게 된다… 인간은 결국 가혹한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악으로부터 아무도 구해주려고 하지 않는다.111
이러한 고민은 에피쿠로스(BC 341-270)가 머리에 담았던 중요한 문제중의 하나다. 그리스 시대 부터 전해오는 악에 대한 “에피쿠리언 패러독스” (Epicurean Paradox) 또는 “에피쿠로스의 난제” (the Riddle of Epicurus)에 잘 정리되어 있다. 에피쿠로스 패러독스에 관한 기록이 에피쿠로스 자신의 남겨져 있는 문서에는 없다. 초기 기독교 학자인 락탄티우스(Lactantius, 250–325)가 남긴 기록에 담겨 있다:
神에 대하여 에피쿠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神은 악을 제거하고자 하는데 못하고 있다;
神은 악을 제거하고자 하는데 원하지 않고 있다; 神은 원하지도 않고 못하고 있다; 神은 원하고 제거하고 싶어한다. 만약 神이 원하는데 못하고 있다면, 神은 연약한 존재인데 이것은 神에 대한 정의와 어긋난다; 만약 神이 원하는데 안하고 있다면, 神은 시기심이 많은 존재인데 이것은 神에 대한 정의와 똑같이 어긋난다; 만약 神이 원하지도 않고 못하고 있다면, 神은 시기심이 많고 연약한 존재다. 이것은 神이 아니다; 만약 神이 원하고 제거하고 싶어한다면, 이것이 바로 神에 대한 알맞은 정의가 된다. 그렇다면 악은 무엇이며, 왜 神은 이것을 제거하지 않는가?112
거의 2천 년이 지나서 영국의 철학자 흄(Hume)은 에피쿠로스의 선악에 대한 난제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오래된 질문에는 아직 해답이 없다. 神이 악을 없애려 하는데 할 수 없다면, 神은 무능하다. 神이 할 수 있는데 하려 하지 않는다면, 神은 악의적이다. 神이 할 수도 있고 하려고도 한다면, 악은 어디에서 왔는가?113
선악의 문제는 익숙한 서양인들에게 인간이 풀 수 없는 숙제를 남겨 놓고 있다. 그리스 시대부터 현재의 서양 철학이 이 문제로 계속 고민하게 된다. 그들은 선악의 문제를 시현론과 존재론에 입각하여 풀어 나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선은 영원히 선하고 악은 영원히 악하기 때문에 궤멸하여야 하는 존재가 된다. 선악론은 인간에게 강력한 추진력을 제공한다. 특히 계시종교와 결부되면 그 추진력은 생사를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동양의 음양론은 선악론이 제공하는 강력한 추진력이 없지만 동시에 선악론이 가져오는 왜 인간에게 악이 있는가 라는 풀기 어려운 문제로 고민하지도 않는다. 동양의 음양론에서는 변화론에 입각하여 인간사를 취급한다. 선악의 개념은 인간이 만든 인간 활동의 범주 안에서 음양처럼 바뀌어 나간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길흉이 바뀌는 것처럼 음은 양으로 변하고, 양은 음으로 변해간다.
道, 한 번만 사는 인생 vs 神, 죽음 이후의 세계
선악론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불행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원죄론의 시작이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은 이것으로 神의 명령을 어겼으며 인간은 스스로 원천적인 잘못을 저지른 존재가 된다. 인간은 항상 神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다. 神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어려움을 지고 태어나 인생을 살게 된다.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3:16-17)
선악론은 서양에서 인간이 왜 일생을 고생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이야기는 서양의 종교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에도 있다. 헤시오드는 그의 책 “하는 일과 나날들” (Works and Days)라는 책에서 판도라의 상자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이는 성경 창세기의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겪게 되는 죄에서 받는 벌과 유사한 상황을 묘사한다. 에피메테우스의 부인인 판도라에게 제우스가 만든 “판도라 상자”가 전해진다. 인간을 만들고,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를 벌하기 위해서다. 프로메테우스는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제우스의 선물을 받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그러나 호기심이 많은 판도라는 상자를 열게 된다. 상자를 여는 순간 상자 안에 숨어 있던 모든 나쁜 것들이 뛰쳐나와 인간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놀란 판도라가 황급히 상자를 닫는데 상자안에는 희망만이 남아 있게 된다.
이브와 판도라의 스토리에 의하면 인간이 문제의 근원이다. 인간은 정신과 호기심을 가지게 되면서 선악을 판단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인간의 이러한 실수는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오고, 인간은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인간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이러한 성향에 따라 인간이 죄의 값으로 일생을 거쳐 벌을 받고 참회하게 된다. 헤시오드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낮에는 노동과 고통을 쉴 날이 없는” 존재가 된다.114
神을 믿는 서양 세계에서는 현세의 세상이 괴로움으로 차 있기 때문에 죽음이후의 세계를 그리게 된다. 소위 저 세상의 천당을 그리게 된다. 동시에 神의 존재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불현론자들은 인생에서 죽음이후의 천당과 비슷한 이세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게 된다.
행복을 추구하는 서양 사상가들은 악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왜 인간이 神을 두려워하여야 하는가? 에피쿠로스는 선악론을 배경으로 하여 神에 대하여 인간이 취해야 하는 입장을 정의하게 된다. 그는 선하고 정의로운 神과 악의 존재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이 神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불필요하게 神을 두려워하는 근심에서 해방되는 것이 에피쿠로스가 주장한 행복론인 “아타락시아” (마음의 평온)의 요체다.
神을 두려워하지 말라. 神은 영원하고 행복한 존재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神에 대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의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神이 상을 내리고 벌을 준다고 말하는데, 자신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는 神을 그들이 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는 것으로 신앙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견해를 강요하는 것이 바로 신앙심을 버리는 것이다.115
그러나 이러한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그가 살던 시기인 BC 3-4세기에는 많이 회자되었지만, 결국은 불현론의 일부로 취급되면서 서양에서 힘을 상실하게 된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는 4세기 말 이후 서양에서 모두가 시현론에 파묻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천 년의 종교국가 시대에는 불현론자들은 모두 무신론자로 취급되어 규탄과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죽음 이후의 천당이 그들의 생존 목표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르네상스와 계몽시대를 거치면서 변화하게 된다.
동양문명의 인생의 의미 추구는 인생에 대한 해석이 서양과는 판이하게 다른 데서 시작된다. 神과 달리 道는 모든 인간에게 예외 없이 도움이 된다고 선언한다. 인간은 道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道를 인생의 동반자로서 환영한다. 道의 범위내에서 남과 함께 인생의 기쁨을 찾는 인간이 된다. 인생은 한 번만 산다. 저 세상에 대한 생각은 동양 사상에 중요하지 않다. 도덕경은 인간이 道를 지키면서 인생의 기쁨을 찾는 자세를 가지도록 권고한다. 도덕경의 마지막 부분은 인생의 즐거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는 일을 즐겨라. 당신이 먹고 있는 것을 즐겨라. 입고 있는 옷을 즐겨라. 잘 수 있는 거처를 즐겨라. 인생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라. (도덕경 80)
이러한 도교의 즐거움은 인생에서 자연이 베푸는 것들을 즐기는 자세, 즉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찾자는 것이다. 도교가 주장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살자는 것이고, 인간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유교도 인간의 각종 감정 중에서 “인생을 즐기는 자세”를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표현하고 있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논어 6:18)
유교가 인생을 즐기는 사람이 지식보다 중요하다는 표현은 서양의 에피쿠로스와 비슷한 점이 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육체적 향락을 찾자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이 없는 평정 상태를 찾자는 것이고,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소멸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점도 유교 철학과 비슷하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은 유교에서는 즐거움은 관계주의에서 오는 것이고,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개인주의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이다. 유교 논어의 첫 문장은 바로 인생의 즐거움을 “친구와 배움” 속에 찾도록 권고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동양에서 인생의 즐거움은 개인이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니고 함께 라는 관계주의에 기초한다.
배우고 수시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논어 1:1)
동양은 종교적 선악의 문제나 인간의 원죄의식으로 부터 자유롭다. 선악은 神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이 만들어내는 호-불호의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동양 고전 어디서도 선악에 집착하는 설명이나 철학은 없다. 동양문명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선악을 구분하고 선악을 인간사회에 적용하는 데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다. 동양사상은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상정한다.
神이나 죽음에 대한 생각은 동양 사상에서 그 중요성이 서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작다. 도덕경은 모든 상황을 인간이 접하는 자연에 집중하고 있으며, 자연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유교에서 더욱 실질적으로 표현된다. 죽음 이후의 세상이나 귀신(鬼神)또는 죽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선언한다.
귀신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묻는 제자에게 공자는 답하였다: “사람에 관한 일도 처리 못하면서, 어찌 귀신에 관한 일을 생각하느냐?” 죽음에 대하여는 묻는 제자에게 공자는 답하였다: “삶을 모르면서, 어찌 죽음을 생각하겠느냐?” (논어 11:11)
동양 사상이 기원전에 펼친 죽음에 대한 생각이 계몽시대 초기에 서양에서 표현된다. 서양에서는 2천 년이 지나서 아주 비슷한 사상을 스피노자가 표현한다.
자유로운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에서 나온다.116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에서, 서양 문명은 神에 대한 두려움에서 행복론으로 기울고 있다. 神이나 형이상학적인 두려움이 없어진 측면에서 동양의 道의 사유와 서양 사유사이에 유사한 면이 생겼다. 동양에서 서양처럼 행복을 목적으로 찾고 있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러나 서양의 개인주의적인 행복론은 여전히 동양은 관계주의적인 의미론과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동양에서 자연, 배움, 친구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관계주의는 계속되고 있다.
인간사를 주관하는 神의 존재는 인간에게 항상 두려움을 준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부활과 이 세상의 삶은 영원한 저 세상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교리를 내세웠다. 그래서 저 세상에 대한 믿음이 중요 해졌고, 교리에 의하여 저 세상에 대한 묘사와 천당, 지옥, 선악에 대한 구별이 더욱 중요해진다. 이러한 과정은 기독교 교단의 힘을 강력하게 하였고, 교단은 면죄부를 판매하는 관행까지 가지게 되었다. 이 세상의 삶은 참회와 회개로 점철되었다.
계몽시대의 이신론에 의하여 “참회하는 인간”이라는 철학이 도전을 받게 되었다. 神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으므로 인간은 “神을 두려워하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루소의 성선설이 대표적인 반증이다. 이신론 이후 서양 철학은 인간은 왜 사는가 하는 문제를 새롭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이를 계기로 서양은 “행복론”에 다시 접근하기 시작한다. 벤탐과 밀의 공리주의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사회와 개인의 삶의 목적으로 부상한다. 이는 에피쿠로스 철학의 재생을 의미한다. 앞서 보았듯 에피쿠로스의 행복은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 고통과 불안,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마음의 평온이다. 친구 같은 공동체가 정신적 평온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보았다.
그러나 행복은 순간적이고 개인적이다. 행복이라는 감정은 쉽게 없어진다. 그 경우 행복에 매달리던 인간은 어디로 가게 되나? 그러나 동양 문명은 개인주의(individualism)가 아니라 관계주의(relationalism)에 입각하고 있다.117 관계주의 문명에서는 혼자 “행복”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한번 사는 인생에서 자연, 배움, 친구 등 다른 사람과 함께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 목적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