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우리는 누구인가: 심신일체 (心身一體) vs 영육투쟁 (靈肉鬪爭) · 제1장

서양의 정신(精神) 숭배 문명

약 58분 · 주 76개

1) 정신숭배 문명의 시작: 솔방울(Pine Cone)과 영혼의 눈(Eye of Soul)

서양은 수천 년간 정신과 본능을 별개로 취급하고 정신을 숭배하는 문명을 추진했다. 그 흔적은 “솔방울”과 “영혼의 눈”이라는 두 상징에 남아 있다.

솔방울은 서양과 중동에서 아주 오래된 신성한 상징이다. 3천 년 가까이 전 아시리아의 님루드 궁전 벽을 장식한 부조에는 날개 달린 수호 정령(아프칼루)이 한 손에 솔방울 모양의 물건을, 다른 손에 작은 물통을 들고 서 있다. 학자들은 이것을 성수를 뿌려 왕과 신성한 나무를 정화하는 도구로 본다.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神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끝을 솔방울처럼 장식한 지팡이 “터르서스”(Thyrsus)를 들었다. 로마 시대에 만든 거대한 청동 솔방울 “피냐”(Pigna)는 중세에 옛 성 베드로 대성당 앞뜰의 분수가 되었고, 지금은 바티칸 박물관 안뜰에 서 있다.

솔방울 모양의 정화 도구와 물통을 든 아시리아의 수호 정령(아프칼루). 님루드, 기원전 9세기.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 사진: Gary Todd, CC0
터르서스를 든 마이나스(디오니소스를 따르는 여신도)와 사티로스. 마크론이 그린 술잔, 기원전 490–480년경.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06.1152), 퍼블릭 도메인
바티칸 박물관 안뜰의 청동 솔방울 “피냐”. 로마 시대 작품으로, 중세에는 옛 성 베드로 대성당 앞뜰의 분수였다. 사진: Richard Mortel, CC BY 2.0

뇌 속의 송과선(Pineal gland)이라는 이름도 솔방울에서 나왔다. 2세기 로마에서 활동한 그리스 의사 갈레노스가 이 작은 분비선을 솔방울을 닮았다 하여 “코나리온”이라 불렀고, 라틴어 “피네알리스”(솔방울 같은)가 오늘의 이름이 되었다. 이 솔방울 모양의 작은 샘을 영혼의 자리로 만든 사람은 17세기의 데카르트다. 그는 “이 샘이 영혼의 주된 자리이며, 우리의 모든 생각이 만들어지는 곳”이라고 하였다(1640년 1월 메이소니에에게 보낸 편지). 『정념론』(1649)에서도 그는 같은 생각을 폈다. 뇌에서 좌우 한 쌍이 아니라 하나뿐인 기관이 송과선이므로, 두 눈으로 들어온 상이 여기서 하나로 합쳐지고 영혼이 몸과 만난다고 본 것이다.

데카르트 『인간론』(1664)의 그림. 두 눈으로 들어온 상이 뇌 한가운데의 송과선(H)에서 하나로 모인다. 웰컴 컬렉션, CC BY 4.0

“영혼의 눈”은 플라톤에게서 시작된다. 그는 『티마이오스』에서 머리를 “우리 몸에서 가장 신성한 부분”이라 하였고, 『국가』에서는 사람마다 영혼의 눈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정신에 담긴 영혼의 눈으로 우주의 진리를 보고 표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이제 영혼의 눈을 사용해서 모든 사물을 관통하는 우주의 빛을 보고 영원한 진리를 향할 수 있어야 한다.170

그는 영혼의 눈 만이 진리에 도달한다고 역설하였다. 종교적, 형이상학적 발견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철학이다.

영혼의 눈은 신체적 눈 보다 10,000배나 중요하다. 왜냐 하면 영혼의 눈만이 진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171

송과선이 “제3의 눈”이라는 생각은 훨씬 뒤에 생겼다. 1886년 영국의 생물학자 볼드윈 스펜서는 도마뱀과 뉴질랜드의 투아타라 정수리에 빛을 느끼는 작은 “셋째 눈”이 있고, 그것이 송과선과 한 뿌리라는 것을 밝혔다. 2년 뒤 신지학자 블라바츠키가 『비밀 교리』(1888)에서 이것을 시바 神의 이마의 눈과 하나로 엮으면서 “송과선은 제3의 눈”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실제로 사람의 송과선은 어두워지면 멜라토닌을 내어 몸에 밤과 계절을 알린다. 머릿속의 작은 솔방울은 지금도 빛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영혼의 눈은 근대 서양에서 “神의 눈”으로 다시 나타난다. 1789년 무렵 르 바르비에가 그린 프랑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그림 꼭대기에는 빛나는 삼각형 속의 눈이 있고, 1782년에 정한 미국 국새의 뒷면, 1935년부터는 1달러 지폐 뒷면에도 피라미드 위에 같은 눈이 있다.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神의 섭리를 뜻하는 기독교의 상징, “섭리의 눈”(Eye of Providence)이다.

르 바르비에,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1789년경). 꼭대기에 섭리의 눈이 있다. 파리 카르나발레 박물관, 퍼블릭 도메인
미국 국새 뒷면의 도안(1782). 피라미드 위의 섭리의 눈. 퍼블릭 도메인

이와 같이 솔방울과 영혼의 눈을 통하여 인간의 정신을 숭배하는 사상의 기반이 서양 문명에 수천 년간의 역사를 통하여 정착하게 된다. 정신의 숭배는 서양문명의 근세에서 새로운 형식을 취하게 된다. 솔방울과 제3의 눈 같은 그림을 통한 정신 숭배에서 정신 속으로 들어가서 이를 표현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것이 서양문명이 본능에서 분리된 정신을 중요시하는 “형이상학”이다.

2) 정신숭배 문명의 확산: 이미지에서 철학체계로

인간본성에 대한 인위적 구분과 설명의 대표적인 예가 본능과 정신(신체와 정신, 정열과 지성, 생리와 심리, 감성과 이지, 육신과 영혼) 등으로 이등분하여 설명하는 자세다. 서양문명은 2천 년 동안이나 이러한 구별을 당연한 것으로 보고 정신을 육체로 부터 대립시켜 하나의 독립된 현상으로 보고자 했다.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영육투쟁이라는 인성론을 내세운다. 고대 플라톤은 영혼은 이데아 세계를 지향하지만, 육체는 감각적 욕망에 묶여 영혼을 방해한다고 보았다. 중세 기독교에서는 정신은 신적이고 선한 것, 육체는 욕망과 죄의 근원으로서 정신과 대립한다고 보았다. 서양에서 神은 자연신이 아니라 정의의 하나님, 선한 하나님, 곧 정신의 산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삼위일체론에서 잘 나타나는 것처럼 영적인 존재다. 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만든 인간도 근본적으로 영적이고 정신적 존재로서 취급된다. 근대 서양의 합리주의에서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를 별개의 실체로 구분하는 이원론 속에서 정신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고대 형이상학, 중세 신본주의, 근대 합리주의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문명에서는 본능과 정신 사이에 “균형”의 개념이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신의 보편화 라든가 정신과 본능의 뚜렷한 분리가 아직 없었고 균형을 이루던 시대였으며,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상호 견제하고 있었다. 그리스 문명에서 아폴로(Apollo)는 이성과 정신의 표상이다. 디오니소스(Dionysus)는 감각과 본능의 표상이다. 정신과 본능, 즉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대립하고 있었다. 니체는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 예술의 두 神인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 세계에서 아폴로적 예술인 조형예술과 디오니소스적 예술인 비조형적 음악예술 사이에 그 기원에서뿐 아니라 목적에서도 격렬한 대립관계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그들은 하나로 통합되어 나타나, 이 통합체로서 아폴로적이며 동시에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이 생겨났다. 그것은 곧 아테네 비극이다.172

이러한 대립관계를 결정적으로 깨뜨린 것은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3인의 철학자다. 이들은 형이상학을 주장했다. 즉 정신이 인간의 본성이고 육체는 물질이며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모든 노력은 육체에서 분리된 정신을 탐구하고 이를 통하여 영원한 진리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신숭배 전통은 그리스 및 지중해 문명에서 계속되었지만, 이를 철학화 한 사람은 이들이다. 이 들은 그리스인 만이 神이 주는 정신이나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영혼숭배 사상은 피타고라스에게서 배운 것이다. 이들은 또 정신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감각은 기만적이고 정신만이 진리를 인식하게 된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답습한 것이다. 이들은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서 정신을 연구하는 것을 형이상학으로 표현하며 철학의 요체라고 중요시했다. 인간의 본능을 폄하하면서 인간의 본능은 동물의 본능과 같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피타고라스의 영혼숭배 사상과 파르메니데스의 정신숭배 사상을 결합하였으며, 영혼과 정신을 동일시하며 정신숭배 철학을 서양 문명에 퍼트리는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들에게는 정신 즉 영혼이 중요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페르시아인 등 야만인은 영혼이 없는 동물과 같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을 모두 노예로 만들 것을 주장했다. 본능과 정신을 구분하는 이원대립론의 철학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거쳐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 완성되었다. 존재론적 입장에서 그리스인과 야만인, 남자와 여자 사이의 영혼과 정신면에서의 차이는 영원하다고 보았다. 그는 위대한 철학자이지만 인종차별과 젠더차별의 기초를 쌓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정치학(Politics)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야만인 들에게는 여자는 노예와 똑같다.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지도자가 생길 수 없다: 그들은 노예, 남자, 그리고 여자로 구성된 집단일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 시인이 이런 말을 했다: “그리스가 야만인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 야만인과 노예는 같은 종류 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173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비극 속에서 나타나는 神에 대한 인간의 복종, 곧 숙명에 대한 인간의 순종은 동양문명에서 나타나는 자연과 인간 간의 조화와 유사하다. 또 동양의 시(詩)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나타내듯이 헬레니즘의 조각품은 정신과 본능의 조화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문화는 소프로진(Sophrosyne)이라고 불리는 중용의 문화로서의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중용, 균형상태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문화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리스인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었는데 단신교 아닌 다신교로서 여러 神들이 상호 견제하는 가운데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숙명의 神” (God of Destiny)은 3명의 여신으로 “모이라이” (Moirai, The Fates)라고 불리었다. 제우스 등 불멸의 神들도 이들의 숙명에 복종해야 했다. 숙명이 神들의 불멸성과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파르메니데스를 필두로 한 일단의 엘레아 학파에 의해 표현된 정신의 절대성을 주장하려는 형이상학적 자세는, 체육에 커다란 중점을 둔 그리스인들의 교육방식에 의하여 견제되어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이러한 그리스적 휴머니즘은 인간의 숙명에 대한 저항과 神의 처벌을 주제로 한 그리스 비극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아이스킬로스(Aeschylus)의 비극도 숙명에 대한 인간의 저항과 神의 처벌 사이에 균형을 이루고 있으나, 이미 바람은 인간의 저항편에 서 있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균형은 소크라테스에게서 극도의 긴장감을 가지고 나타난다. ‘끊임없는 질문’과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극단적인 태도 사이에서 그리스 휴머니즘의 표현은 그 극치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균형의 종착점인 동시에 분열의 시발점이다.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도 항상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가장 현명한’ 소크라테스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그 이외의 인간에게는 거의 불가능함을 소크라테스 이후의 서양문화사가 우리에게 보여준다.

헬레니즘 문명은 정신과 본능의 조화와 일체감을 파헤치며 정신적인 것의 본체를 해부하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가운데 정신에 대해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결국 지혜보다는 지식을 중요시하게 된다. 소크라테스 이후의 서양문명은 지식의 절대성을 믿고 지혜보다는 지식의 탐구에 몰입한다. 정신과 본능이 분리되고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분리되면서 그리스 비극 또한 파괴되었다:

소크라테스적 이론의 중요성을 살펴보자. 그것은 “무엇을 안다는 것”이 바로 미덕이다, 인간은 “무지로써만 죄를 지을 뿐”이며, “미덕을 갖춘 인간은 행복하다”는 것이다. 낙관주의를 표명하는 이 세 가지 격언은 바로 그리스 비극의 죽음을 의미한다.174

그리스 비극의 죽음은 곧 그리스 문명이 향유하고 있었던 본능과 정신의 조화가 파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능-정신 균형의 파괴는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의한 것이다. 이들이 바로 헤라클리투스 등이 주장한 불현론을 버리고 정신을 숭배하는 시현론을 서양문명이 택하도록 만든 장본인들이다. 시현론은 소크라테스 이후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 시기까지 거의 2천 년을 서양 철학사를 지배하게 된다.

그리스 문명에서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로 지칭되는 소위 시현론자들의 이론을 서양문명이 채택하고 있었고 종교의 힘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문명에서 소크라테스 이전까지 수백 년 동안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사이에 균형을 이루었던 시기가 있었다. 이 시기에는 시현론자들의 철학과 함께 헤라클리투스 같은 불현론자 들의 철학이 동시에 중요성을 발휘하였으며, 이는 그리스 문명이 정신과 본능사이의 “균형”의 중요성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용과 절제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시대에 이미 시대적 흐름이 디오니소스를 등지고 아폴로 측에 서게 되었다.

서양의 이성과 정신 숭배는 무엇보다도 종교와 연관이 있다. 정신을 神과 연결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창세기 1:26). “하나님은 정신이다” (요한 4:24). 서양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만든 인간도 근본적으로 정신적 존재로서 취급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양에서는 종교와 함께 형이상학이라는 철학 분야에서도 정신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을 정의하면서 물질과 대비되는 정신에 대한 연구로 취급하였다. 그는 형이상학은 존재와 실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 분야로서 존재론(ontology)등 여러 가지 분야로 이를 나누었다. 이러한 철학적 경향은 중세 종교에서도 가장 중요한 분야로 여겨졌으며, 근세 철학에서도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서양 근세 철학자로서 합리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라이프니츠(1646-1716)는 인간의 정신의 위대성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였다.

인간이 세계를 알 수 있다는 것은 하나도 놀라울 것이 없다. 인간은 자신 안에 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가 축소판의 神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175

신본주의가 인간의 정신으로 이동되는 합리주의의 시작이다. 이로써 神과 인간 정신의 밀접한 관계는 서양문명에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중세 천 년 동안은 학문과 저술이 대부분 종교에 관한 것이었다. 스콜라스티씨즘 (스콜라 철학)은 오로지 성경을 연구하고 종교에만 집중하는 신본주의 철학이다. 르네상스 초기 인본주의에 입각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중요해진 것은 이들이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의 이행을 알리는 첫번째 저서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기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남긴 시스타인 채플의 천장 벽화에도 神이 인간에게 정신을 불어넣는 상황을 묘사하는 그림이 있다. 당시 로마 교황청에서는 인간의 해부학적인 묘사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神의 배경에 인간의 두뇌를 배치하여 神이 뇌에 있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아담의 창조” 1510년경 미켈란젤로의 그림에 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神이 아담에게 정신을 전달하고 있는데 서양문명에서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서양문명에서 정신 현상은 초자연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초자연적인 神이 초자연적인 정신을 인간에게 전해주었다고 믿었다. 정신은 神이 다른 동물을 제외하고 인간에게만 준 것이다. 정신은 육체와 대립되는 관계를 가진다: “육체를 따르는 자는 육체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체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로마서 8:5-6). 정신과 본능의 분리와 대립은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일 뿐 아니라 그리스-로마 철학에서도 그렇게 받아들여 졌다. 로마 줄리언 황제(330-363)가 죽기전에 남긴 말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나는 철학으로부터 영혼이 본능보다 얼마나 더 중요한지 하는 것인지 배웠다. 죽음에 이르러 영혼이 분리된다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의 대상이다.”176

정신숭배 라는 인간본성에 대한 해석은 서양 문명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정신숭배 철학은 그리스의 시현론에서 시작하여, 중세 종교시대, 근세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을 거쳐 최종단계에 돌입한다. 바로 20세기 이데올로기 시대다. 중세 종교시대에 서양은 계시종교에 대한 연구에만 집중한다. 神이 인간에게 주는 정신에 대한 연구다. 중세 종교철학은 계시종교와 플라톤의 철학을 접목시키려고 노력한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로 대표된다. 11세기에 시작되어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스콜라스티씨즘은 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연계시키려는 노력이었다. 이런 정신에 집중하려는 노력은 르네상스 이후 데카르트에 영향을 미쳤고, 데카르트는 합리주의로 대표되는 근세 형이상학의 기초를 쌓게 된다. 그는 중세 시기의 기독교적 “정신”을 형이상학적 “정신”으로 대체하는 역할을 하였다.

기독교가 지배한 중세 시기와 르네상스 시기를 넘어서, 서양은 17-18세기에 철학적으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우리가 계몽시대 또는 정신시대 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 서양은 종교와 성경에 얽혀 있는 도그마로부터 해방되는 “계몽”을 거쳤다. 천동설 등 성경에 적혀 있는 것을 그대로 진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정신으로 검토하여 그 진위여부를 판단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검토는 서양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천문학의 발달에 힘입어 천동설이 지동설로 대체되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화에서 자극을 받았다.

이와 같이 성경에 기록된 절대진리의 진실들이 일부 의심을 받게 되면서 神의 성격에 대한 의심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선지자들이 神을 만나 전달한 진리, 계명, 율법 등이 정말로 神에게 온 것인지 또는 선지자의 상상에서 온 것인지 검토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서양 사상가들은 神은 존재하는데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理神論)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정립하게 되었다. 이신론으로 서양 사람들은 기적, 지옥, 사탄 등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신론자들은 선지자가 전한 神의 말씀이 절대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신본주의가 아니라 정신에 의지하는 것이 지식의 원천이라고 믿었다. 정신이 뒷받침하는 생각과 과학에 대한 믿음을 증가시켜 18-19세기 산업혁명의 기초를 닦았고, 神과의 계약에 의한 교회의 권위가 아니라 새로운 인성론에 의한 정부의 구성을 추구하였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였다. 계몽시대의 시작은 17세기 프랜시스 베이컨, 르네 데카르트, 바루크 스피노자, 아이작 뉴턴 등의 저서 등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서양문명에서 정신능력에 대한 평가가 정신의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강력 해졌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철학적으로 분석하면 서양문명이 정신의 시대를 거치면서 두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서양은 정신과 본능의 조화를 주장하는 철학을 따라 정신의 힘을 제자리에 놓자는 가능성이 있었고, 정신의 보편화를 이루자는 철학을 따라 본능을 더욱 무시하고 정신의 힘을 더욱 키우자는 가능성이 있었다. 여기서 서양은 후자, 즉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신의 보편화의 길을 택하였다.

이러한 아폴로 측에 편향된 성향이 서양문명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르네상스 시기에 정신과 본능이 같이 존재하던 시기는 짧았고 그 흐름은 이미 정신능력의 보편화 편에 서고 있었다. 정신과 본능 사이에서 똑같이 일면의 진리와 편파적 생각을 내포하고 있던 데카르트와 마키아벨리 가운데서 데카르트는 칭송되었고 마키아벨리는 많은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정신의 보편화 시대를 풍미하는, 데카르트 이후 마르크스에 이르는 서양 정신사는, 다음과 같이 도식화될 수 있다: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reason); 칸트- 생각하지 않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pure reason); 헤겔- 나와 같이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absolute reason); 마르크스- 나와 같이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그 존재하지 않음을 정치적 현실 (praxis)로 증명하여야 한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주장한 정신이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고 믿었다. 특히 마르크스에 와서 그의 역사적 정신의 절대적 가치는 반대자의 제거를 주장하면서 절대성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 세계를 흑백의 논리로 보았고,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으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자신이 누구 편에 서는가를 명확히 인식하였고, 자신은 그들을 위해 싸울 것과 그들이 최후로 승리하리라는 것은 확신하였다.177

정신이 별도로 두뇌속에 존재한다고 믿은 데카르트로부터 도덕의무론을 주장한 칸트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은 합리론자 들이 지배했다. 이들의 영향으로 인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이고 정신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고 착각하는 시기가 서양에 퍼지게 된다. 인성론에서 살펴볼 때 서양 철학자들이 저지른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신이 본능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라는 엄청난 착오를 하게 된다는 점이다. 서양의 합리론자들이 만들어낸 이러한 성향은 이데올로기 시대의 비극으로 귀결된다. 인성론면에서 우리가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받아들여야 할 원칙이 있다. “본능에 없는 것을 정신이 스스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서양의 합리주의자 들은 시간이 갈 수록 본능과 거리를 계속 멀리하면서 정신만의 능력에 의지하는 현상을 극대화하게 된다. 바로 “정신의 절대화” 또는 “정신능력의 절대화” 현상이다. 그러나 정신의 역할이 커지면, 당연히 본능이 이러한 정신능력에 대하여 반발하게 마련이다. 서양문명이 본능을 멸시하고 정신만을 추구하는 일반적인 경향을 보이는데 대하여 이에 대한 반작용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팔리아(Paglia) 교수가 정신과 본능의 관계를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해부학적인 두뇌 즉 뉴 브레인과 올드 브레인 사이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다. “아폴로를 질서 vs 디오니소스를 무질서”로 표현하지 않고 “아폴로를 질서 vs 디오니소스를 에너지”로 표현한 것이 탁견이다. 본능이 힘의 원천인 에너지, 그리고 정신은 에너지를 조정하는 질서가 된다.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사이의 투쟁은 두뇌에서 뉴 브레인(the higher cortex)과 올드 브레인(the older limbic and reptilian brains)사이의 투쟁이다. 결국 예술은 인간이 항상 가지는 딜레마의 표현이다. 그 딜레마는 아폴로로 표현되는 질서와 디오니소스로 표현되는 에너지 사이의 딜레마다.178

마키아벨리로부터 홉스와 쇼펜하우어를 거쳐 니체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사에서는 정신보다는 본능에 충실한 철학자들이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정신 보다는 본능에 충실하고자 하는 흐름은, 데카르트에게서 마르크스에게로 이르는 합리주의자들의 흐름처럼 뚜렷하지는 않으나, 쇼펜하우어와 니체에게서 그 흔적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동시에 니체가 의도했건 안 했건 그의 철학은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파시즘에 결정적으로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 히틀러는 이러한 니체의 영향 등으로 파시즘을 키워 나갔다. 히틀러 청년단의 모토는 바로 니체에게서 따온 것이다: “나를 파괴하지 못하는 것은 나를 강력하게 만든다” (What does not kill me makes me stronger).

이러한 흐름의 원조 마키아벨리는, 데카르트가 인간본성의 파악에서 정신에 치중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본성을 파악하는 데서 본능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중대한 잘못은 그가 부도덕하다는 데 있지 않고 정치에서의 도덕적 요인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데 있다. 마키아벨리는 인간행태를 무도덕(amoral)한 관점에서 관찰한 것이다. 인간은 림빅시스템(limbic system)과 함께 네오코르텍스(neocortex)도 가지고 있다. 용병대장 네 명을 간계로 죽이는 세자르 보르기아(Cesar Borgia)는 중대한 정치적 실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179 정신을 중심으로 하는 인성론의 왜곡이 일어나며 동시에 이에 대한 반대 작용에 의하여 본능을 중심으로 하는 인성론의 왜곡이 함께 일어나는 현상을 서양의 근대 철학사가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서양의 정신문화사는 형이상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정신의 발전으로 보는 철학이 한 때 유행하였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은 진실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에 편향된 합리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당시 서양이 처한 상황을 철학으로 정당화하는 일을 한 것이다. 서양의 근대사는 정신의 발전이 아니라, “소외된 정신”이 주도권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에 대한 “소외된 본능”의 반발이라는 형태의 변증법적인 상황으로 파악하는 것이 현실에 가깝다.

마키아벨리에서 히틀러에 이르는 소외된 본능의 흐름은 다음과 같이 도식화될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도덕 없는 승리만을 위한 삶의 정당화(amoral)에서, 쇼펜하우어의 삶의 의지(will to live)의 철학으로, 그리고 니체의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를 거쳐, 드디어 히틀러의 강자의 생활권(lebensraum) 독점 철학으로 이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정신문화사적 의의는 파시즘의 패망으로 코뮤니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제거되었다는 데 있다. 코뮤니즘은 일부에서 정당화되고 찬양되는 반면 파시즘은 만인의 저주와 비난을 받게 되었다. 피카소는 자신의 공산주의에 대한 심정은 “목마른 짐승이 샘터로 향하는 심정”이라고 서슴지 않고 공언하였으며, 사르트르 등에 의하여 지배된 전후 서양 지식층은 좌익인 체하여야 대접을 받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풍조 속에서 전후 수십 년을 보내게 된 것이다.180

그리고 소외된 정신인 코뮤니즘과 대항해야 할 수단은 소외되지 않은 인간의 상식, 서양 철학자들이 중요시하지 않는 중용이 남아 있을 뿐이며, 스피노자, 볼테르, 괴테, 레싱 등이 열정과 혼돈의 서양 철학사 속에서도 간직하여온 통찰력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정신숭배 문명 비판: 볼테르, 니체, 하이데거

서양 문명이 형이상학적 철학으로 편향되는 문제의 심각성을 적나라하게 지적한 사람이 있다. 바로 18세기 사상가 볼테르, 19세기 사상가 니체, 20세기 사상가 하이데거다. 볼테르와 니체는 서양 근세문명사의 근간을 이루는 신학과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하이데거는 정신에 집중하는 서양 철학 체계를 비판하면서 인간의 존재 자체에 집중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폈다. 이들은 나아가 서양의 근대사에 머물지 않고 서양 문명에게 닥친 문제의 원인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의 시현론을 비판한 것이다. 이 세 사람의 사상가는 형이상학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당연히 서양 철학사에서 이를 주류로 만든 플라톤을 함께 비판하게 된다. 플라톤은 정신을 “영혼의 눈”이라고 표현하면서 정신숭배 문명이 서양 철학체계를 지배하도록 주도한 인물이다.

이들의 비판은 신학, 형이상학, 그리스의 시현론자 들을 통해 인간본성에 대한 문제에 이르게 된다. 물론 볼테르와 니체의 형이상학 비판 이전에 스피노자가 본능과 정신이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지적하며 서양 합리론자들의 문제점을 지적하였지만, 서양 문명은 인간본성 중에 정신능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철학과 문명을 이끌고 가게 된다. 그리고 본능을 경시하거나 멸시하게 된다. 즉 서양 근대사 이후 서양 문명은 인간본성 왜곡문제로 귀결하게 된다. 인간주의는 인간본성을 왜곡하는 철학위에 설립된 것이다.

서양문명은 기독교로 부터 윤리에 관한 것을, 그리스-로마의 전통으로 부터 지식에 관한 것을 받아들였다. 기독교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정신과 본능과의 관계에서 조화보다는 분리를 택하는 존재론위에 구성되어 있다. 서양문명은 이러한 철학위에 세워진 종교를 받아들였고, 그리스 문화로 부터도 조화보다는 분리를, 중용보다는 진보에 적합한 것을 취하여 흡수하였다.

근대사에서 서양은 “형이상학적 진리”를 마치 중세 종교의 神처럼 신봉하게 되었다. 이러한 서양문명은 인간의 정신 즉 인간의 정신능력을 과도하게 평가하고 이에 심취하는 철학에 의존하게 된다. 정신의 보편화는 결국 인성론에서 인간본성을 왜곡하는 현상을 촉발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확고한 반대의견을 피력한 철학자가 볼테르다.

나는 형이상학에 관한 내 모든 생각을 더군다나 더 거부하기로 결론지었다. 또한 내가 내 밑에서 끊임없이 꺼지는 움직이는 모래 위를 걷고 있는 연약한 동물이라는 것, 항상 옳다는 것을 믿는 것만큼 미친 짓은 없으리라고 결론지었다.181

볼테르는 절대적인 것을 주장하거나,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항상 옳다고 보는 형이상학의 무가치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거의 모든 형이상학 책 말미에 로마의 재판관이 동의하지 않을 때 사용했던 두 단어를 적어 놓기로 하자. 곧 ‘이것은 분명하지 않다’ 라고.182

형이상학에 대하여 포이어바흐도 같은 견해를 표시하고 있다. 특히 형이상학과 신학의 공통점은 시현론 즉 절대적인 것을 인간이 표현할 수 있고 진리로 확고히 믿는데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헤겔의 철학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은 신학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183 고 말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형이상학자들은 시현론을 추구한다는 차원에서 신학과 동일한 차원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진실한 철학의 발달을 방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실증주의의 창시자 콩트(Comte)도 같은 진단을 내렸다:

형이상학은 결국 해체적인 단순화로 점점 기력을 잃어 온 일종의 신학에 지나지 않는다.184

결국 르네상스 이후의 서양의 형이상학은 인간이 절대적인 것을 표현하고 이를 믿음으로써 큰 흐름에서 중세 신학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 신학적 형이상학자들은 형이상학적 진리를 추구하면서 이상향을 제시하고 인간을 이 방향으로 몰고 가고자 했다:

독일인들은 옛 ‘이상향’을 되찾고, ‘이상향’과 진리를 재결합시키는 편법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과학을 거부할 권리와 거짓말할 권리를 정당화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라이프니츠와 칸트! 이들은 서양의 지적 진실성을 가장 크게 왜곡한 두 사람이다.185

니체는 이런 점을 가리켜 “라이프니츠도 칸트도 형이상학의 껍질을 쓴 신학자”로 볼 수 있다고 갈파하였다:

칸트의 성공은 신학자로서의 성공에 지나지 않는다. 루터를 본뜨고 라이프니츠를 본뜬 칸트는 전진을 방해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독일적 경직성의 불협화음적인 장단을 맞춘 또 하나의 나막신에 지나지 않는다.186

그들은 신학이나 형이상학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없는 진리를 찾는데 열중하여, 정상적인 생의 즐거움을 계속해서 억눌러왔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무엇을 위한 것 인지도 분명하지 않은 의무만을 내세워 인생을 어둡고 삭막한 것으로 만들었다. 칼뱅이 제네바에 세운 신국(神國)이나, 루터가 그린 프로테스탄트의 사회나, 크롬웰이 영국에 잠시 실현했던 세계가 모두 칸트가 생각했던 도덕률이 실현된 사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즐거움 없이 의무만 가진 자동인형으로서 아무런 깊은 개인적 선택도 없이, 일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보다 더 이상 빨리 파괴하는 것이 있을까? 이것이 바로 타락과 어리석음을 제조하는 방법이다······ 칸트는 스스로 어리석음을 택했다. 그가 괴테와 동시대의 인간이라니!187

이러한 삶에 대한 서양문명의 부정적 태도는 기독교의 원죄사상에 나타나는 태도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이러한 기독교 교리가 그리스 철학 중에서 삶의 즐거움을 평가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삶의 즐거움에 대한 인정은 동양문명의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다. 이점은 인도의 불교 와도 커다란 차이를 이룬다.

인도의 불교는 ‘인생은 고통’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모두 동양문명에서 표현하고 있는 삶에 대한 기쁨을 무시 내지 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생리(生理)가 근본이지 괴리(怪理)나 병리(病理)가 근본일 수는 없다.”188 동양철학이 생리(인생은 즐거움, joy)를 근본으로 삼았다면 서양철학은 괴리(인생은 죄, sin)를, 인도철학은 병리(인생은 고통, suffering)를 근본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논어 선진편(先進篇)에서 군사적 승리, 정치적 위업이나 조상숭배보다도 높이 평가된 “늦은 봄에 봄 옷이 다 되어 성인 5, 6명과 아이들 6, 7명이 기수(沂水)에서 몸을 씻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쏘이고 읊조리며 돌아오는”189 “삶의 기쁨”은 서양문명에서 깨끗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논어는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면 기쁘지 아니하랴?”는 “삶의 기쁨”을 표현하는 것으로 첫 문장을 시작하고 있다. 공자는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며,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190고 정리하며 “생을 즐길 줄 아는 능력을 지식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다.

생의 즐거움을 의무에 대한 열정으로 대치하려는 경향은 서양 중세 기독교나 근세 형이상학에서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의 근원은 그리스 문명에서 소크라테스 이후의 시현론에서 찾을 수 있다.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는 “사람을 화나게 하고 분통이 터지게” 한다. 논리는 정연하고 표현은 웅장하며 우아하지만, 볼테르가 표현한 대로 “아침 첫닭이 울어 잡귀들이 사라질 때” 정신차리고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궤변들이 허다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플라톤은 감동적인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그려 보이고 있다. 그러나 노자와 공자를 필두로 모든 중국의 현인들이 경계하고 거부한 미사여구나 이상스러운 표현들을 제거하고 요점만 간추리면, 죽음과 삶에 대한 플라톤의 철학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죽음은 긴 잠에 불과하거나, 내세로 연결되어 있거나 둘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긴 잠을 자는 것도 좋은 일이고, 내세에 가서 먼저 도착해 있을 선배 현인들을 만나 즐겁게 대화를 계속하는 것 또한 좋은 일이다. 따라서 삶과 죽음 가운데 어느 것이 좋은지는 아무도 모른다.” 대략 이와 같다. 이 얼마나 엄청난 궤변인가?

삶의 즐거움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그렇게 즐거운 것이나 좋은 것으로 생각했다면 남이 죽여도 무관심하거나 고마워해야 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그의 처 크산티페가 “당신이 이렇게 부당하게 죽다니!”하고 억울해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럼 내가 정당하게 사형 받는 것이 좋겠소?”하고 반박내지 위로한 것으로 전해진다. 플라톤은 삶의 즐거움에 대한 것은 일체 언급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그 즐거움을 잃는 슬픔에 대해서는 일체 고려하지 않고 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시지프스 신화 가운데서도, 지옥의 왕 하데스(Hades)까지 속일 정도로 강렬한 시지프스의 생의 즐거움에 대한 애착은 망각되고, 돌을 굴려 올리는 운명을 거역한 시지프스의 이미지만 서양문명에서 영웅의 이미지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에게 무한정의 진보가 가능하다는 낙관주의를 창시해준 꿋꿋한 인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보가 허구에 불과할 경우 진보의 이름 아래 “본능적인 삶의 기쁨”을 없앤 궤변가일 수도 있다. 플라톤은 지식만이 가치 있고 삶의 기쁨까지 포함한 나머지 모든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강변함으로써 형이상학적 의무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철학을 서양문명에 전달하였다.

동양의 생에 대해서 느끼는 즐거움은 종교적 절대자에 대한 숭배와 형이상학적 절대성에 복종에서 오는 희열과는 전혀 다른 인성론에 기인한다. 동양의 인성론은 본능과 정신의 일체감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데, 서양의 인성론은 본능을 무시하고 정신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러한 인성론은 곧 자연론과 초자연론의 출발점이 된다. 본능과 정신의 균형이나 조화를 파괴하고, 정신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곧 시현론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초자연성과 어울리게 된다. 종교의 이름을 빌린 각종 미신과 도그마에 대항하여 싸운 볼테르는 神의 시현론적인 속성은 서양인이 필요로 하여 만든 것이지 결코 神이 인간에게 알려주거나 명령한 것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볼테르에 의하면 서양인들은 스스로의 필요에 의하여 神의 속성을 곡해하고 자유자재로 이용하고, 남을 설득하기 위하여 神으로 하여금 기적까지 일으키게도 한다.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질서를 세운 神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 질서를 어기고 기적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불경죄가 아닌가?

왜 神이 기적을 행해야 하는가? 몇몇 인간에게 神이 의도한 바를 실행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면 神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나는 우주 창조에 의해서도, 내 모든 우주 질서에 의해서도, 영원한 내 법칙에 의해서도, 내 의도 가운데 일부는 이룰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영원한 나의 법과 내 생각을 일부 고쳐서 나의 법과 생각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실행해야 하겠다. 이런 말은 神의 능력이 아니라 무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며, 상상도 못할 자기모순인 것이다. 그러므로 神으로 하여금 기적을 일으키게 감히 상상하는 것이야 말로 신성모독을 범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神을 모독할 수 있다면) 이것은 마치 神에게 “당신은 연약하고 앞뒤가 안 맞는 존재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기적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神에 대한 불경이 되는 것이다.191

헤겔은 이러한 기적을 정당화하려는 나머지 “기적은 극히 상대적인 것인 바 자석이 보여주는 현상도 바로 기적 가운데 하나”192 라고 어처구니없는 강변을 그의 유명한 역사철학 속에서 늘어놓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기적을 행하는 神은 자연을 초월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이 스스로를 그 神과 동일시함으로써 인간 또한 자연과 격리되고 초자연적인 존재로 둔갑하게 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유행시킨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라는 말은 바로 자신의 내부 세계로 눈을 돌리라는 표현이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자세에 의하여 자신의 본질을 알 수 있다는 주장으로 탈바꿈하였다. 진리를 파악할 수 있고 절대적인 것을 알 수 있다는 태도는 바로 시현론의 핵심이다. 이러한 시현론의 태도는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이론가 가운데서 가장 솔직한 레싱이 진리 자체보다도 진리를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두겠다고 용감히 말한 이유이다. 그는 이 말로써 모든 현학자들을 놀라게 하고 노하게 하였으나, 과학의 깊은 비밀을 들추어낸 것이다. 지극히 솔직한 표현인 이러한 드문 고백과 나란히 소크라테스에게서 처음 나타나는 뿌리깊은 환상이 존재하고 있다. 곧 정신능력이 인과율을 바탕으로 인간 존재의 뿌리까지 닿을 수 있고, 그것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고치기까지 할 수 있다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그것이다. 이러한 고상한 형이상학적 환상은 과학과 본능처럼 들러붙어서 예술로 화할 때까지 끊임없이 과학을 인도한다. 여기에 바로 이런 메커니즘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193

그러나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을 형이상학과 연결하면 자기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절대적으로 주장하는 결론과 통하게 된다. 알 수 없는 본질을 알 수 있고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태도는 신학과 형이상학의 본질인 시현론으로 통하게 된다. 그러나 神 외에는 아무도 자신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 볼테르의 주장이다:

만약 자기 자신의 영혼을 볼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일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훌륭한 격언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神뿐이다. 神 외에 누가 자신의 본질을 알 수 있겠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움직이고 북돋우는 것을 영혼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지력의 한계 덕분에 우리는 그 이상은 아는 것이 없다. 인류의 4분의 3은 거기에 만족하고, 생각하는 존재라는 데 대해서 더 이상 거북해하지 않는다. 나머지 4분의 1은 그것을 알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고, 발견하지도 못할 것이다.194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르 레싱(Theodor Lessing, 1872-1933)은 이러한 유럽문명 속의 인간을 가리켜 “인간이란 바로 자기의 이른바 정신에 대해 점차 과대망상으로 되어버린 육식 원숭이류”라고 평하였다.195 이러한 정신적인 것,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아폴로적인 것에 압도된 유럽문명속에서는, 전체를 파악한 괴테 같은 전인(全人)만이 “자연의 본질은 심정적 인간이 아닌가”196 하고 외칠 수 있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종에서 모두 발견되는 생리적 욕구나 필요 외에, 특별히 발달된 문화적 사회적 생활에의 욕구나 필요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인간 특성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 이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특색을 지칭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에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 “사회적” 동물도 또는 사회적 “동물”도 아니다.

“정신능력의 보편화” 라는 현상은, 형이상학으로서 서양의 과학과 함께 이론과 기초로서 상호 보완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그러나 절대를 주장한 서양의 과학, 곧 시현론의 고전물리학은 불현론의 현대물리학과 대치하게 되면서 2천여 년 동안 신학과 형이상학이 의지하여 왔던 철학인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의 역학체계가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서양인들이 神처럼 믿었던 과학적 진리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으며, 인간이 발견해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것은 하나의 망상임을 말하고 있다.

‘진리’라는 개념은 순수 기하학의 표현에는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진리’라는 용어는 궁극적으로 ‘현실적’ 물체와 대상과 일치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하학’은 기하학적 개념과 실험적 물체 대상과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기하학적 개념 사이의 논리적 관계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197

그러나 이러한 과학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야기하는 결정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철학은 역사적인 神과 정신을 숭배하는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근세의 형이상학이 중세 신학을 계승한 것처럼, 신교는 구교를 계승하였다. 루터는 역사적인 기독교의 전통을 계승 재건하였다.

루터, 그 운명의 수도승은 교회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기독교가 사라질 바로 그 시기에 기독교를 재건하였다는데 있다.198

이렇게 서양문명이 시현론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서양문명의 전통 때문이다. 서양문명은 소크라테스 이후 2,500년 동안 불현론을 멀리하고 시현론에만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 형이상학, 이데올로기 라는 시현론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주 어렵게 되어있다. 그들의 시현론은 바로 정신과 본능 사이의 균형을 파괴하고 정신만을 중시하는 흐름을 서양문명의 핵심요소로 만들어 버렸다.

정신-본능 균형의 파괴, 그리고 정신을 숭배하는 형이상학에 대한 문제점을 서양인들이 인식하게 된 것은 근세에 이르러서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니체의 철학에서 소크라테스의 정신 중심의 철학과 형이상학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표현하게 된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서양의 문명을 정신중심의 문명이라고 지적하면서 “정신을 넘어 존재 자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인성면에서 보면 인간의 존재 자체는 본능과 정신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정신에 집중하고 있는 서양 정신사의 편향성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정신이 아니라 본능까지 포함한 인간존재 전체에 집중하자는 철학은 바로 동양의 정신과 본능을 연계하는 철학 체계와 맥을 같이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플라톤의 정신 능력에 편향된 철학을 비판하였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으로부터 비롯된 형이상학이 문제가 된다고 보고 이것이 서양 문명이 진리에 대한 왜곡의 시작을 하게 된 원인으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서양 문명의 왜곡이 그리스시대, 중세 종교를 거쳐 근세,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 서양 철학 전통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하여야 한다고 보고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결국 존재를 이데아론에 종속시키며 형이상학화 하였고, 이런 철학적 견해가 계시종교와 힘을 합치면서 서양문명을 2천 년 이상 이끌게 된다. 특히 20세기에 이르러서는 형이상학이 극대화되면서 정신, 또는 정신에 반대하는 본능에 편중된 이데올로기가 한때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정신에 편중된 전자가 공산주의고 본능을 따르는 후자가 파시즘이다. 20세기 이데올로기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의 실현을 위하여 윤리로 대표되는 인간개성 자체의 파괴를 일삼게 된다.

하이데거는 서양의 정신중심 철학을 지적하면서 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존재 사유, 즉 인간 전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다고 보았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서양의 형이상학적 정신 중심의 사유의 출발로 보았다. 그의 철학을 따르면, “정신을 넘어 존재 자체”를 중심으로 하는 인간은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가 되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정신-존재의 비교철학에서 존재를 중심으로 사유하는 방식을 새로이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서양의 합리주의는 존재를 망각한 사유라고 비판하였다.

문화적인 차원에서 볼 때 그리스 문화가 통찰력을 잃고 멸망한 것은 소크라테스의 예에서 보듯이 일차적으로 정신의 극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정신의 극대화는 곧 정신과 본능 사이의 조화와 균형의 파괴를 의미하며, 통찰력의 파괴를 의미한다. 중용을 권유하는 페리클레스의 유언을 뿌리치고 무모한 시칠리아 원정을 감행한 것이 아테네 몰락의 원인이었던 것처럼, 중용을 지키라는 델피 신전의 간판에 새겨진 지혜를 깨뜨리고 정신능력의 보편화라는 길로 들어선 데, 그리스 균형의 파괴의 원인이 있다. 그 장본인은 소크라테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그 후계자들은 아폴로적인 그리스인이 중용이라고 부른 도달하기 힘든 최고의 도덕적 자비심, 헌신, 영웅적 행위, 항심(恒心)까지도 지식의 변증법에 의해 추론을 계속함으로써 마치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만들어버렸다.199

공자는 “중용의 힘은 대단하기도 하다. 사람들이 중용을 오래 지키고 있는 일이 적으니”200 하고 갈파하였다. 신학과 형이상학을 멀리했던 동양문명은 중용을 지켜올 수 있었다. 기독교적 신학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발전한 그리스의 형이상학은 서양인들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이나 자연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2천 년 이상 주장해왔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경향은 특히 우리가 대서양 시대라고 부르는 16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450년 가까이 서양이 세계를 정복하는 “열린세계”에서 활동하는 동안 강력한 힘을 행사했다. 그러나 세계 정복이 완성되고 열린 세계가 끝나는 것과 함께 형이상학의 역할도 끝나가고 있다.

정신현상의 보편화 과정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은 인과율에 대한 집착이다. 인과율은 변화론을 주장하는 동양문명에서는 부정되고 있으나, 서양에서 인과율은 정신현상의 보편화를 정당화하는 진보사상에 없어서는 안 될 초석이다. 절대적 진리를 향하여 인간이 점진적으로 진보하고 있다는 철학이 성행하게 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확고한 표현을 얻는 인과율은, 르네상스에서 다시 라이프니츠에 의해 힘차게 재생하여 진보의 문화를 살아 있게 하는 데 공헌한다.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에서 본 바와 같이 다윈으로 하여금 ‘점진적’ 진화를 주장할 수 있게 하는 데도 한몫을 하게 된다. 볼테르는 이러한 서양문화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플라톤을 읽었을 때, 가장 가벼운 원자로부터 지고의 존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을 단계적으로 구분해놓은 것을 보고 아주 감동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마치 옛날에 모든 혼령들이 아침 첫닭이 울면 사라지듯이, 그 거대한 허깨비는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201

몰락해가는 그리스 사회에서 중용을 이해했을 뿐 아니라 실천에 옮겼다는 점에서 마지막 그리스인이라 부를 수 있는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인이 극단적인 길로 들어설 때마다 중용의 길로 되돌려 놓았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인들이 때에 맞지 않게 거만해지고 용맹해질 때는 겁을 주었고, 아테네인들이 이유 없이 두려워할 때는 신뢰심을 회복시켜주었다.202

지혜를 대표하는 델피의 좌우명도 페리클레스의 중용도 사라지는 바로 그 시대에, 곧 아테네가 몰락해가는 시기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후 약 2천 년 동안 서양에 압도적 영향을 미칠 시현론이라는 철학세계를 확산시켰고, 그 철학세계가 서양문명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는 중세 신학과 근세와 근대 형이상학의 행태를 띠며 변화해 나갔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약하고 타락해가던 시대에 낙관적 피상적 수사학적이 되고, 논리를 찾고, 세계를 합리적으로 해석하고자 하지 않았던가? 곧 좀더 ‘차분해지고’ ‘과학적’이 되지 않았던가? 모든 근대사상이나 민주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낙관주의 및 그 현대적 표현인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모든 현상은 약해지고, 늙고 생리적으로 피로해진 징후가 아닌지 누가 알겠는가.203

특히 최근 수백 년 동안 경이적 발달을 기록한 과학조차도 서양인들이 그토록 믿었던 것과는 달리, 인간에게 밝은 미래를 안겨줄 것이라는 것은, 시현론으로 무장된 열린 세계가 끝남과 함께 더 이상 확실한 것이 못되게 되었다. 과학의 본질은 무엇이며 과학이 인류의 미래에 끼칠 영향은 어떤 것인가?

우리의 과학, 그 과학 전체는 도대체 인생의 표현으로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학은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는가? 과학적 정신은 비관주의에 대한 무서움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한 방어법이 아닐까? 도덕적으로 말하여 하나의 속임수이며 비겁한 행위가 아닐까? 비도덕적으로 말하여 하나의 간계일까? 소크라테스여 소크라테스여, 바로 여기에 그대의 비밀이 있는가? 신비스러운 아이러니의 명수여, 바로 여기에 그대의 아이러니가 있는가?204

대부분의 서양 철학자들은 질문을 밀고 나가다가 무엇인가 발견하였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운다. 시현론과 진보의 철학은 연계되어 있다. 그렇게 해야 열린 사회에서 “진보”가 계속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절대적 진리”란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면 우리는 레싱이 갈파한 대로 인간은 “진리보다는 진리 탐구의 길을 더 중요시”해야 할지 모른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라면, 공자가 말한 대로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지식의 한계가 된다. “삶에는 끝이 있으나 앎에는 끝이 없다” 라는 도교의 철학을 받아들이면, 형이상학을 주장하는 서양문명의 정신능력 선택은 한계에 부딪치고 결국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고 볼 수 있다.

3) 정신숭배 문명의 몰락: 이데올로기, 정신과 과학의 야합

끝없이 앞으로 달려가던 서양의 정신숭배 사상은 20세기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합리주의”로 무장한 정신은 “과학적인” 사회다윈주의와 야합, 이데올로기 시대를 창출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잘못된 인성론에 기초하는 것으로 서양 정신세계를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다. 정신과 과학의 야합이 서양에서 실현되었다. 정신은 본능과 떨어져서 활동할 수 없는 것인데 서양의 합리주의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오판하였고, 사회다윈주의의 점진투쟁론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사상이 과학으로 20세기 서양세계에 확산되었다. 분리된 정신과 허상의 과학이 접합한 것이 이데올로기의 본질이다.

다윈은 인간이 神의 특별한 창조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진화론을 주장했지만, 초기 생명체를 포함한 자연의 창조는 神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다윈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진화론이 병행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神에 대한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고 설명했다:

태초에 하나 또는 수개의 생명체에 창조주가 입김을 불어넣어 시작되었다는 생명의 시작이라는 위대성에 대하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지구가 애초에 정해진 대로의 규율과 인력에 의하여 그 사이클을 계속하는 동안, 그렇게 단순한 시작으로부터 이루 셀 수 없는 아름답고 경이로운 형체들이 진화되었고 진화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205

다윈의 진화론은 결국 “神의 창조와 자연의 진화”를 결합한 것이 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철저한 자연론적인 진화론이 아니라 神의 창조와 자연의 진화가 동시에 병존하는 이론이다. 계몽시대의 이신론을 포함하여 많은 서양의 사상가들이 그러했듯이 이들은 서양 사상을 자연론으로 완전히 변형하지 못하고 神과 자연을 병존시키는 방법을 취했다. 다윈도 위대한 사상을 제공했지만 철학체계는 서양철학 사유를 그대로 계승했다. 그만큼 그리스-로마 시대의 시현론과 중세 종교의 철저한 시현론의 성향이 그들의 사상에 여전히 크게 작용했다.

사회다윈주의: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는 다위니즘(Darwinism)에서 출발하였지만, 다윈의 예상과는 다르게 이데올로기 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다위니즘은 인간이나 지구의 생물은 神이 각자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자연속에서 진화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계시종교 도그마의 핵심인 창조론을 파괴하는 혁명적 이론이다. 다윈의 진화론이 발간된 것은 1859년이었다.

문제는 다윈의 진화론 자체가 아니라 여기서 파생된 사회다윈주의다. 사회다윈주의가 정신의 힘을 극대화하는데 필요한 철학과 과학의 야합이라는 결과를 노정하는 데서 과학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위대한 발견은 발견자의 노력이고, 여기에 포함된 문제는 시대의 문제” 라는 생각을 도입하면 진화론은 다윈의 위대한 업적이다. 그러나 다윈이 서양 사상에 깊숙하게 내재해 있던 투쟁론과 점진론을 그의 진화론에 그대로 사용한 것은 실수 중의 실수였다.

진화론은 서양의 사유체계내에서 수립되었다. 그로 인해 서양 근대의 철학체계에서 모두가 당연한 과학적인 진리로 받아들인 명제가 다윈의 진화론을 설명하는 메커니즘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명제가 당시 서양철학계를 휩쓸고 있던 정신숭배 문명과 결합하여 사회다윈주의를 만들게 된다. 그 메커니즘은 두 가지다.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 (Natura non facit saltum, Nature does not make leaps)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Bellum omnium contra omnes, War of all against all)이다. 당시 많은 사상가들은 명제의 당위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라틴어로 된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사회다윈주의는 다윈의 진화론이 인간 역사에서 점진적, 투쟁적인 진화를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고 만들어진 것이다.206 이로써 서양 인간사를 이데올로기 시대에 몰입하게 했다.

사회진화론의 창시자 스펜서(1820~1903)는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이 인간사회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사회도 자연처럼 경쟁을 통해 발전하기 때문에 “무능한 자를 인위적으로 돕는 것은 사회 발전을 저해”한다는 사상을 폈다.

이러한 주장을 흡수한 이데올로기들은 불평등, 인종차별,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사회다윈주의를 적극 활용하였다. 특히 인간본성이 “진화” 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은 모든 윤리와 인본주의를 말살하는 정책을 가능하게 하였다. 사회다윈주의의 점진론과 투쟁론은 공산주의, 나치즘, 인종차별, 우생학에서 “과학”으로 활용되었다. 이들은 점진론과 투쟁론을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이라는 대체 용어로 활용하면서 과학성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회다윈주의는 20세기 처참한 실수를 저지른 이후 잘못된 사유로 판명되었다. 인간본성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폐기된 상태다.

점진론과 투쟁론의 철학은 다윈 진화론의 시작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다윈은 모든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난다는 서양철학을 그대로 자신의 진화론에 인용하였다.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 이 금언은 19세기 서양 철학과 과학계 사고의 초석이었다. 투쟁론도 이와 함께 다윈 진화론의 핵심이 되었다. 다윈은 뒤에 스펜서의 표현을 빌려 이를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 하였다. 점진론과 투쟁론이라는 다윈 진화론의 핵심철학은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다윈의 진화론은 결국 사회다윈주의로 변질되고 이상향의 실천을 위하여 인간의 윤리를 위반해도 좋다는 참혹하고 무자비한 “이데올로기 시대”(the Age of Ideology)의 창출에 기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사상가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당시에 유행하던 점진론과 투쟁론을 진화론에 그대로 사용하는데 대하여 반대의견을 표명하였다. 다윈의 진화론을 옹호하고 나선 헉슬리는 《종의 기원》 출간 전에 다윈에게 편지를 보내어 점진론을 그대로 진화론에 사용하는 다윈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본인은 귀하의 진화론을 위하여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할 각오까지 되어 있습니다. 나는 진화론 방어를 위하여 발톱은 더욱 날카롭게, 부리는 더욱 예리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는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 라는 법칙을 아무런 유보 없이 전폭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불필요한 장애를 스스로 자초하고 있습니다.207

그러나 다윈 진화론의 점진적 성격은 서양문화의 저변에 깔린 하나의 강력한 흐름이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인용한 라마르크(Lamarck)의 진화론인 “용불용설”도 점진적 성격의 것이었다. 다윈이 진화의 점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즐겨 되풀이한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는 말은 다시 과학자와 철학자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진 개념이었다. 다윈 자신이 《종의 기원》 속에서 이를 강조하고 있다,

자연선택은 미세하고, 연속적이며, 유용한 변이들을 축적해 나가기 때문에 큰 변화를 일으키거나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단지 작고 느리게 작용할 뿐이다. 모든 새로운 지식에 의하여 그 진실성이 증명되고 있는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는 규범은 자연선택설 속에서도 명백하다.208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유행시킨 것으로 알려진 라이프니츠는 그의 책 “인간오성신론”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무것도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는 말은 널리 확증된, 내가 즐겨 쓰는 중요한 격언 가운데 하나이다.209

점진론과 투쟁론 때문에 사회다윈주의를 주장하는 사람 들은 인간본성은 진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인간이 사는 생애 속에서, 또는 대를 이어 진화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다윈을 비롯한 진화론자들은 인류가 출현 이후 계속 진화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콩트, 마르크스, 히틀러 등은 이러한 진화론 위에서 출발했거나 이러한 이론에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

진화가 점진적, 투쟁적으로 일어난다는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자연과학에서는 단순한 오류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이 자연과학의 분야를 떠나 사회과학에 적용될 경우에 생기는 사회다윈주의는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히틀러의 인종 차별적 우생학에서 보는 것처럼 커다란 비극이 된다. 다윈의 기록과 히틀러의 기록은 놀랄 만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히틀러는 그의 책 “나의 투쟁” 속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국가로 하여금, 우주를 지배하는 영원불변의 법칙에 따라 최선최강의 것을 키우고, 나쁜 것과 약한 것을 억제하도록 하는 의무를 가지게 한다.210

다윈은 종의 기원 제8장 ‘본능에 관한 부분을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결국 이러한 모든 본능이 특별히 주어지거나 창조되었다고 보는 것보다는, 생물을 번식시키고 변이 시키며, 강자를 살리고 약자를 죽여 진보의 길로 이끄는, 일반법칙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논리적 귀결은 아닐지라도 훨씬 만족스러운 설명인 것이다.211

히틀러의 파시즘이 다윈의 진화론에 크게 의존하였던 것처럼, 공산주의도 다위니즘에 표명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이론을 과학적인 진실로 믿고 의지하고자 하였다. 마르크스는 다윈의 진화론에 끈질기고 강력한 호기심을 표명하였다. 그의 분신인 엥겔스에게 마르크스는 흥분에 찬 편지를 보냈다.

다윈이 동식물 가운데서 분업, 경쟁, 새로운 시장 개척, ‘발명’, 맬서스(Thomas Malthus)적 ‘생존경쟁’을 갖춘 자신의 영국 사회를 다시 발견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홉스의 만인(萬人)에 대한 만인(萬人)의 투쟁이다.212

자신의 이념체계를 과학적인 것으로 간주하고자 하였던 마르크스는 다위니즘에서 자신의 공산주의를 받쳐줄 과학적 증거를 찾고자 하였다. 1861년 마르크스는 라살(Lassalle)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이러한 의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다윈의 저술은 매우 중요하며, 역사적 계급투쟁의 자연과학적 토대로서 나에게 꼭 맞는다.213

이데올로기와 사회다윈주의의 결합은 무엇보다도 다윈이 주장한 투쟁적이고 점진적인 진화에 대한 설명에 기인한다. 이데올로기에서는 다위니즘을 그들의 투쟁과 점진적인 변화에 “진리”로 삼고 활용하고자 했다. 다윈은 그의 저서 종의 기원 속에서 새로운 종은 “점진적이고 투쟁적인”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에 의하여 생긴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자연선택은 매일, 매시간 온 세계에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든 변이를 자세히 조사한다. 나쁜 것은 뽑아버리고 좋은 것은 보존하고 축적하면서.214

다윈의 자연선택설의 투쟁적 성격은 그가 기술한 대로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지상의 모든 생물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결과 필연적으로 생기는 “생존 경쟁” 문제에 관하여 취급하도록 하겠다. 이것은 맬서스의 원리를 동·식물계에 적용시킨 것이다.215

맬서스나 다윈의 이러한 견해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나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보는 것처럼 생존을 투쟁으로 보는 서양문화의 저변에 깔린 특성을 반복,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도덕에 개의하지 않고(amoral) 생존과 승리를 위하여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 마키아벨리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자연상태로 본 홉스나,216 생존경쟁을 인간사회와 자연계에 적용한 맬서스나 진화론의 다윈은 모두 서양문화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다.

다윈은 창조론에 입각한 “종은 변하지 않으면 개별적으로 형성된 것”217 이라는 당시 대다수 박물학자들의 견해에 반대하여, “종은 느리고 미세하고 연속적인 진화”218 에 의하여 형성되었다는 기계적 직선적 반작용적인 진화론을 주장하였다. 매순간 인간본성이 진화해 나간다고 주장함으로써 다윈은 진화, 진보의 신화를 19세기의 각종 이념운동에 제공하였다. 20세기 이데올로기 시대의 창출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사회다위니즘은 이렇게 다윈의 진화론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사람은 자연에 의해 주어진 변이를 선택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선택하여 바라는 대로 변이를 누적한다. 이리하여 사람은 동·식물을 자신의 이익 혹은 즐거움에 적합한 것으로 만들어 나간다.219

다윈은 이러한 점진적 누적이 자연에서는 생물의 이익을, 인간에게서는 인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선택된다고 가정했다. 그것은 적자생존이라는 자연과 인간의 법칙을 따라간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만 선택한다, 자연은 자기가 돌보고 있는 생물의 이익을 위해서만 선택한다.220

자연의 적자생존 원칙은 인간이 원용할 수 있을까? 다윈은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회다윈주의는 자연의 진화에 작용하는 적자생존 원칙이 인간이 활용하여 인간사회에 인간 사이에 적자생존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인간의 손에 달려 있으며, 그렇게도 강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선택의 원리는 자연계에도 적용되는 것일까? 나는 그것에 매우 유용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221

인간 본성을 이렇게 파악하는 것은 계시종교에서 나타난 존재-인성론과 정 반대의 방법이다. 계시종교는 타고난 인간개성이 변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본성은 매 순간 진화하는 과정을 겪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동양의 변화론적 인성론과도 다르다. 동양은 인간은 같은 인간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출생 후 가지고 태어난 인간본성의 범위내에서 인간개성은 변화해 나간다고 본다. 정신이 본성이라는 모든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지만, 그 한계내에서 정신이 작용한다고 보는 동양의 인성론과 다윈이나 사회다윈주의의 인성론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점진성과 투쟁론은 진보, 진화에는 필요불가결한 성격이다. 그것은 상대성과 자율성을 부인하고 결정론과 인과율을 주축으로 하여 형성된 르네상스 이후 서양과학과 철학에 만연해 있었다. 그리고 다윈은 이를 답습하였다. 다윈은 서양 철학이 철석 같이 믿고 있던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이라는 편견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윈의 진화론의 점진적 투쟁적 성격은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당시 서양문화의 내재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윈 진화론 vs 단속 평형론 (Punctuated equilibrium)

다윈이 주장한 점진적 진화론, 즉 모든 것이 항상 진화하고 있다는 이론은 과학적으로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화석 기록의 대부분이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종이 오랫동안 거의 변하지 않다가 짧은 시기에 새 종이 나타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 주된 이유다. 미싱링크는 점진적 진화의 과정 중 거쳐야 할 생물의 종들이 있지만 그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가설이다. 만약 이런 흔적들이 계속해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다윈 진화론의 수정이 불가피하다. 그 수정된 이론중의 하나가 “단속 평형론”(punctuated equilibrium)이다. 1972년 엘드리지와 굴드 교수가 발표한 이 이론에 따르면 종(種)은 오랜 안정기를 거치다가 짧은 시기에 급격히 분화한다는 진화론이다. 이 때를 제외하면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로의 진화 이후로는 “비진화적인 적응”(non-evolutionary adaptation)을 보이고 있다.

단속평형론은 神이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창조론과는 다르다. 또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계속해서 점진적 진화를 하고 있다는 다윈의 진화론과도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비진화적인 적응론은 道의 문명에서 강조하는 변화론과는 잘 들어맞는다. 피부나 눈의 빛깔, 코나 입술의 생김새 등은 현생인류를 이루는 각 인종의 특색이다. 서양 학자들은 편의에 따라 한때 현생인류를 황인종(아시아), 백인종(서양), 흑인종(아프리카), 갈색인종(인도), 홍인종(아메리카)으로 분류하면서 이들이 다른 인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이 모두 같은 인종이고 인종의 특색은 변화된 것뿐이지 인간이 진화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 로의 최후의 변이는 여러 곳에서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유전자 풀(pool)에서 현생인류의 유전자가 지구상 여러 지점에서 자라나와 이것을 공유한 현생인류가 지구상을 뒤덮게 된 것이다. 오늘날 세계 각지에 있는 모든 인종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하나의 종에 속한 아종(亞種)들이다. 곧 인종 사이의 차이는 지리적 격리, 풍토의 차이에 대한 적응에서 온 것으로 한 가지 종(種) 안에서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다.222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분화된 인종으로 서의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신체적 특징, 곧 피부의 빛깔, 눈의 빛깔, 코의 생김생김 등의 차이는 호모 사피엔스의 신체 자체가 진화해가는 과정인가? 아니면 카멜레온의 피부 빛깔이 환경에 따라 변화하듯이 진화와는 관계없는 단순한 변화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여기서 창조론에 입각한 서양의 神의 문명은 20세기 전반기 까지도 인류의 신체적 특징을 다른 인간으로 창조된 특징으로 간주하고자 했다. 이점은 19세기 후반 다윈의 진화론 이후에도 차이가 없었다. 즉 인간이 현재의 모습대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되어 현재처럼 된 것이라고 해도, 다른 인간으로 진화된 것으로 차이를 두고 취급하고자 했다.

앞서 보았듯이 진화론자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 이후 계속 진화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19세기 서양을 열풍처럼 휩쓸던 진보사상이 퇴조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진화에 대한 이론도 바뀌기 시작하였다. 인간사회가 계속 진화하고 있다는 생각도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종이 계속 변하고 있다는 진화론자의 주장이 꺾이면서 변화를 겪게 된다.

화석상에 나타난 증거에 의하면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이래 두뇌의 용적이나 구조가 변화하였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223

종의 진화의 경계에서, 두뇌는 10만 내지 20만 년 이래로 불변의 상태에 있다.224

우리가 이런 견해를 수용한다면, 즉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 이후 진화하고 있지 않다면, 진화는 다윈이 주장한 것처럼,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일 수 없으며, 그가 그렇게 부인하고자 애쓴 “도약”에 의해 진화가 갑자기 일어난다고 보아야 한다. 그가 주장한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s)는 존재하는데 발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인간의 뇌는 점진적으로 커진 것이 아니라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갑자기 비약적으로 커졌고, 그 이후 변화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 두뇌의 진화에 대한 이론은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인간은 각 세대마다 점진적으로 뇌가 자라며 진화해온 것이 아니라 단속적으로 조그만 두뇌를 가진 종(種)에서 큰 두뇌를 가진 종으로 대체되어온 것이다.225

실제로 다윈 이래 활발한 화석 발굴로 시조새나 틱타알릭 같은 중간 단계의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화석 기록의 대부분은 점진적인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다. 곧 지질학 및 화석학에서 의한 증거는 다윈의 점진적 진화를 부인하고 있다. 이러한 물적 증거를 사실로서 그대로 받아들여, 단속평형론이라는 다윈의 점진적 진화론과는 다른 새로운 진화론이 발표되었다. 이는 19세기 진화론과 진보사상에 입각한 모든 이념을 뒤엎을 만한 획기적인 것이다. 사회다위니즘은 그 근거를 상실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226

단속평형론의 요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종은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지질학적 시간개념에서 보면 비교적 순식간에 나타나서 거의 변화하지 않고 수백만 년 동안 존속한다.227 지금까지의 화석학적 증거는 기존 종(種)의 안정성과 신종(新種)의 갑작스러운 출현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종의 변천·진화에서 기존 종의 안정성은 한 종의 초기화석과 말기화석이 거의 유사하다는 것으로 증명되며, 갑작스러운 출현은 미세한 변화의 축적이 아닌 완성된 형태로 신종이 나타나는 것으로 증명된다.228 곧 화석이 보여주는 증거에 의하면 신종은 갑자기 나타나며 사라질 때도 갑자기 사라진다.229 진화는 일반적으로 격리된 일부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한 종이 서서히 계속적으로 변화하여 진화가 이루어지는 적은 거의 없는 법이다.230

왜 하필이면 선택이론을 불필요하고, 아마도 그릇된 가설과 연결시켜야 하는가? 우리에게 알려진 화석들은 점진적 진화의 개념을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 한 동물군(群)은 아주 짧은 기간 안에 멸종해버리고, 신종은 항상 갑자기 나타난다. 어떤 화석상의 증거도 중간단계에 있는 연결 종을 보여주지 않는다. 같은 지역에 있는 오랜 돌들을 모두 뒤집어보아도 그런 화석상의 증거는 없다.231

다윈의 진화론에서 점진적 성격은 투쟁적 성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점진적 성격이 수정되는 이상 투쟁적 성격도 수정 받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의 다윈이나 그 추종자들이 생각하던 동물의 세계는 잔인한 것이었다. 모든 동물이 매분 매초를 생존경쟁에 바치고 있는 그런 세계였다. 성공의 척도는 곧 싸움에서 몇 번 이겼는지, 굴복시킨 적이 얼마나 되었는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동물 사이의 싸움이 사실은 죽기 살기의 투쟁이 아니라 예식에 불과할 때가 많으며, 공생관계·협동관계도 생사(生死)의 투쟁 못지 않게 생활이나 진화에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232 생존경쟁은 진화에서 다윈이 생각했던 것만큼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단속평형론은 생존경쟁의 중요성을 부인하고 있다.

같은 종의 각 개체는 종이 출현하였을 때 가지고 태어난 변화가능 범위 안에서만 서로 경쟁한다. 그러므로 개체 사이의 생존경쟁은 진화적 가치가 거의 없기 때문에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233

다윈 자신이 종의 기원속에서 그의 자연선택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 파동설이 옳음을 증명하는 방법과 같다고 기술하고 있다.234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아인슈타인이 1905년 광전효과에 의해 빛이 입자의 성질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해낸 이래, 빛은 파동과 입자 두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235 또한 다윈 자신이 지질학적 화석학적 사실이 점진적 진화를 입증해주고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이러한 사실이 그의 자연선택설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음을 기술하고 있는데, 오늘날 실제로 그러한 일이 생긴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지질학은 분명히 생물이 미세하고 점진적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이 사실은 자연선택설에 대하여 제기될 수 있는 이론 가운데 가장 명백하고 중대하다.236

19세기까지 맹위를 떨치며 물리학은 물론 철학까지 지배하여 온 갈릴레오와 뉴턴의 역학체계가 20세기에 그 절대성을 상실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포용 되듯이, 다윈의 진화론도 굴드 교수가 주장하는 ‘단속평형론’ 같은 좀더 포괄적 진화론에 포용 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온 것이다. 서양의 사상체계는 물리학적 근거뿐 아니라 생물학적 근거까지 삽시간에 상실하게 되어버렸다. 진보사상은 그 밑받침을 잃고 허공에 뜬 사상누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다윈이 주장한 진화이론이 부인되었다고 해서 그가 밝혀낸 진화라는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윈의 학문적 공로는 물론 모든 개개의 종이 창조되었다는 계시종교의 도그마를 깨고 종은 진화에 의하여 생성되었다는 사실을 불변의 사실로서 확립한 데 있다. 다윈은 당시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으면서도 확신을 굽히지 않는 용기와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위대한 사상의 장점은 개인의 것이며 단점은 시대의 영향이라는 생각대로 다윈은 인간이 진화론적 존재라는 것을 밝힌 위대한 업적을 남겼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또한 시대의 영향을 받아 진화라는 사실을 설명하는데 시대적 오류를 범한 것도 틀림없다.

다윈의 진화론으로 이제는 모든 꽃이 이에 상응하는 곤충을 위하여 특별히 만들어졌다는 식의 창조론을 더 이상 주장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런 면에서 진화론은 전통적 창조론과 상치된다. 여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핵심적인 우연성의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을 부인할 길이 없다. 질서정연한 우주 안에서 생명이 발전하고 진화된 고등생물이 나타난다는 점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 이러한 것이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어리석은 망상으로 간주되게 되었다.237

다윈의 진화론은 해석여하에 따라 인간이 계시종교의 가르침대로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다윈은 여전히 기독교인일 수 있었다. 실제로 다윈 자신도 “왜 내 이론이 사람들의 종교적 감정을 당황하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238 이런 점에서 유대·기독교의 창조론이나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태도가 일치한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연의 산물이고 자연을 따라야 한다는 동양의 道의 개념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그리스 문화를 제외하고는 서양문명이 숙명과 자유를 동시에 포용하거나 조화시킨 적이 없다. 크게 볼 때 중세까지는 숙명이, 르네상스 이후에는 자유가 기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서 유대·기독교적 神이 정신으로 대체되면서 자유도 또한 숙명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중용의 개념을 무시하고 비웃는 그들은 ‘숙명 안에서의 자유’라는 참된 자유의 의미를 깨달을 문화적 기반을 가지지 못했다. 다윈은 중국인과 고대 그리스인이 가지고 있던 중용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는커녕 이에 대해 차디찬 냉소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육가는 중용을 찬미하지도 찬미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극단적인 것을 좋아한다.239

다윈은 완성을 향하여 진보하지 않는 개체나 종은 낙오되며, 패배하여 자멸한다는 것을 불변의 자연법칙으로 주장하였다:

자연선택은 다만 생물의 이익에 따라 이익 때문에 작용하므로 신체적 및 심적 자질은 모조리 완성을 향하여 진보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240

그러나 개체나 종이 진화하는 것이 아니고 변화하는 것일 경우, 거짓 진화와 진보를 위하여 열에 들뜬 경박한 자들에 의하여 동원되는 무자비한 폭력과 간교한 지혜는 정당화될 수 없다. 서양문명에 내재해 있는 분리와 투쟁의 기본개념은 서양의 진화와 진보사상과 표리관계에 있다. 다위니즘은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에서 만들어진 20세기 서양 철학 사조다. 그러나 20세기 인간주의 이데올로기가 소멸함으로써, 21세기에 와서는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를 기초로 사회과학을 설계하는 사상가는 없어졌다.

4) 20세기 이데올로기, 반윤리적 인간주의 (人間主義)

서양 철학은 고대 정신의 보편화에 뒤이은 근세 정신의 절대화를 거쳐 드디어 근대 정신의 인간주의(人間主義, anthropocentrism)에 도달한다. 이러한 경로가 서양 철학사의 흐름이다. 인간주의는 인본주의(humanism)와 전혀 다르다.241 인간관계를 풀이하는 차원에서 인본주의는 형이상학 이나 신본주의와 대칭되는 사상이다. 이는 동양적 철학의 핵심 사상이며 도교와 유교에서 이러한 사상을 견지하고 있다. 서양철학사에서는 중세 천 년의 암흑시대를 견뎌내고 서양이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본주의를 경험하게 된다. 계시종교가 4세기 로마의 국교로 정해진 이후 처음으로 그리스 시대의 인본주의에 회귀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인본주의와는 다르게 인간주의는 인간 정신의 힘에 의존하는 형이상학적 사상이나 신본주의적 사유가 인간관계를 초월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세운다. “진리”가 인간관계를 초월할 수 있다는 철학이다. 전형적인 서양의 시현론에 입각한 체계다. 불현론에 따라 진리를 인간이 표현할 수 없다면, 그러한 진리는 인간관계를 초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현론의 도그마를 떠나서, 서양에서는 놀랍게도 과학의 이름으로 윤리에 반하는 철학을 펴는 사상가들이 있다. 허버트 스펜서 (1820–1903)가 이에 해당한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 “종의 기원”을 읽고, 자연선택 개념을 사회에 적용하여 사회다위니즘(Social Darwinism)을 발전시켰다. 그는 1864년 저서 “생물학의 원리” (Principles of Biology)에서 처음으로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러한 주장은 다윈 진화론의 점진론과 투쟁론에 근거한다. 다윈은 1859년 저서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에서 “모든 생물의 진보로 이끄는 하나의 일반법칙, 곧 번식하라, 변이하라, 가장 강한 자는 살고 가장 약한 자는 죽게 하라”고 설명했다. 다윈 자신은 1869년 제5판부터 스펜서의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받아들였다. 이를 사회화한 사상가가 스펜서다. 스펜서는 “사회도 자연처럼 경쟁을 통해 발전한다”는 논리를 펼쳤고, 따라서 “무능한 자를 인위적으로 돕는 것은 사회 발전을 저해한다”고 보았다. 스펜서는 동양철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반윤리적 철학 체계를 주장하였다. 유교는 “지도자는 빈자의 어려움을 도와주고, 부자의 부를 키우지 않는다” (논어 6:3)는 윤리를 주장한다. 스펜서의 강자 철학사상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큰 영향을 행사하였다. 서양의 제국주의자들은 쌍수를 들어 이를 환영하였다. 나아가 공산주의와 파시즘 이데올로기에서도 이를 적극 활용하였다.

마르크스는 환경 특히 경제적 요인에 따라 인간본성이 변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윈은 진화론에서 이러한 “자연선택은 매일, 매시간 온 세계에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든 변이를 자세히 조사한다. 나쁜 것은 뽑아버리고 좋은 것은 보존하고 축적한다.” 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인간본성은 자연선택에 의하여 변화된다는 가설에 입각하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동양문명처럼 변하지 않는 인간본성의 존재를 믿었더라면 이루어지지도 않을 이상향을 꿈꾸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취하는 사회” 나 “개인의 발전조건이 사회 전체의 발전조건과 동일한 사회”의 실현을 위한 폭력의 사용을 정당화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회다윈주의에 의거하여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하는 공산주의 이론은 인간본성을 왜곡하였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독재체제를 정당화했고 윤리를 초월하고자 했다. 공산주의 이론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루어 지지 않을 미래의 이상향을 위하여 현재의 윤리를 배반한 점에서 공산주의는 비난을 받을 만한 어처구니없는 철학의 잔혹한 아이러니다.

그러나 유전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격세유전(隔世遺傳)이다. 일반적으로 부모의 형질이 자식에게 직접 나타나지만, 어떤 경우에는 부모 세대에서는 드러나지 않고 한 세대를 건너뛰어 손자 세대에서 발현되는 경우가 있다. 영어 표현에서는 격세유전 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아타비즘(Atavism)을 사용한다. 이는 진화 과정에서 사라졌던 조상 형질이 후손에게 다시 나타나는 것을 설명한다. 조상 형질의 재 출현은 2세대가 아니라 더 넓은 조상을 포함한다. 현재는 무능한 사람이지만 다음 세대 또는 그 후손 세대 에서는 아주 유능한 자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유전의 비밀이다. 반대도 성립한다. 점진론과 투쟁론을 무력화하는 유전의 법칙이다. 무능한 사람을 인위적으로 돕는 것은 인간사회의 자기보존 본능의 일부다. 윤리가 이러한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 19세기 다윈 진화론의 메커니즘인 점진론과 투쟁론은 20세기 후반 굴드 교수의 진화론인 “단속평형론”에서 재평가되어 적실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공산주의나 파시즘 같이 절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모든 이데올로기는 허구다. 인간본성에 비추어 볼 때 이루어질 수 없는 목표를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허구적인 이상의 실현을 위하여 윤리 등 인간으로 버릴 수 없는 희생을 내던지도록 강요한다. 기타 이데올로기도 객관적 진리의 표현이 아니라 당시 사회적 필요에 따라 심리적으로 구성된 서사다. 자유, 평등, 박애 등은 위대한 사상이지만 상황에 따라 적용범위 등이 바뀌게 되기 때문에 객관적인 진리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민족주의, 자유주의 등은 보편적인 진리를 주장하지만 심리적으로 분석하면 결국 특정 집단의 이해와 권력을 비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핵심은 자기보존본능이다.

인간주의라는 특이한 서양 문명의 한 형태는 간단히 몇 사상가가 창작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인간주의는 서양의 계몽시대에 생긴 이신론을 거쳐, 정신의 역할을 극대화하고, 또 이것이 “과학”과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정신의 역할이 계속 확장되면서 인간주의에서는 정신이 인간 전체를 대체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로써 서양은 20세기에 인간이 창작한 각종 이데올로기로 세계를 정복하려는 극한 투쟁의 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인본주의는 인간주의와 전혀 다른 철학체계다. 인본주의는 르네상스 시대에서 종교관에서 해방되어 인간의 본성을 찾아가자는 뜻에서 신본주의(Theocentrism)에 반대되는 인본주의 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대표하는 철학이 인본주의와 가깝기 때문에 이때의 인문주의를 인본주의라고도 표현하기도 한다. 유교의 기본철학은 인본주의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물론 서양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와 유교의 인본주의는 신본주의에 대칭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동서양의 차이를 보여준다. 인본사상에서 서양은 개인의 자유와 합리성을 강조한 반면, 유교는 도덕적 책임과 사회적 조화를 중시한다. 즉 서양의 개인주의와 동양의 관계주의의 차이를 보인다.

인간주의는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관점이다. 자연이나 다른 존재(때로는 神의 존재 포함)보다 인간의 지위를 우선시하는 철학적 태도다. 즉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사유다. 인간주의는 인본주의와 완전히 다른 철학체계다. 특히 윤리 문제에서 핵심적 차이를 보인다. 인본주의는 동양문명이나 서양의 르네상스 시대에서 가장 분명하게 모습을 보여준다. 종교가 아닌 인간본성을 중심으로 인간사회를 구성하자는 것이다. 반면 인간주의는 인간의 정신이 본능에 얽혀 있다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보자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상형을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정당하게 여기기 때문에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를 넘어서고자 하게 된다. 정신의 역할이 강조된다는 것은 정신이 “발광체”로서 윤리까지 관장한다는 것이 된다. 윤리가 본능에서 유래된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인간주의는 인간이 절대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시현론에 입각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 된다. 인간주의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숙명을 인정치 않는 무절제한 자유다. 자연의 산물인 인간에 자연이 주는 것들을 아무런 제한 없이 사용하게 되며, 자연을 인간중심으로 마음대로 다루어도 좋다는 뜻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의식주의 생활에 묶여 있는 본능을 무시하고 마치 올드 브레인이 없이 뉴 브레인만 가지고 사는 생물인 것처럼 착각하는 과대망상에 빠지는 것이 된다. 그러면 레싱이 설명한대로 “인간은 자신의 정신의 능력을 평가하는데 과대망상에 빠진 원숭이”가 된다. 인간의 정신이 神을 대체할 수 있다고 보는 환상에 빠지는 것이 되고, 자연의 길인 道를 인간이 설명할 수 있고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는 것이 된다. 이러한 인간주의에 대한 철학적 설명은 서양에서 발생하고 동양에서 부인되는 문명사적인 측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동서양 문명 비교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서양문명이 계몽시대의 이신론을 통하여 형이상학에 더욱 몰입하면서 정신의 절대화로 향하게 된다. 우리는 이 시기를 이데올로기 시대 라고 부른다. 인간이 정신의 힘을 과신하여 유신론에서 神이 하는 역할을 인간의 정신이 모두 할 수 있다는 과대 망상적인 상태로 돌입한다. 이런 문제를 인간본성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정신의 절대화라는 현상에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본능과 감정에 대한 일부 관장능력이 뉴 브레인에 생겼다는 것은 인간이 그만큼 동물적 본능에서 “해방” (emancipate)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해방이라는 의미의 특이성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뉴 브레인은 동물적 본능의 행위들을 일부 조정할 수는 있지만 거기서 끝이다. 인간이 동물적 본능을 생기게 하거나 없앨 수는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본능을 떠난 형이상학적 순수지식, 즉 정신의 힘에만 의지하는 지식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정신이 인간을 대신하려는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는 버클리, 칸트, 피히테, 헤겔 등을 거치면서 서양 철학의 주류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서양 철학의 정신 숭배는 끝내 초인적인 인간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인간주의라는 “미친 상황”으로 가게 된다.

근대철학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한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생각과 그 존재를 확고히 믿었고 여기서부터 외부의 세계를 추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태도는 계속 확대되었는 바, 버클리와 칸트를 거쳐, 모든 것이 자아의 표현일 뿐이라고 믿은 피히테에 이른다. 이것은 한마디로 미친 짓이다. 그 이후의 철학은 이런 극단적 태도로부터 끊임없이 일상생활의 상식으로 피해보려고 시도해왔다.242

인간주의를 표방하는 이데올로기 시대는 결국 서양문명의 정신숭배의 종착역이 된다. 사회다윈주의가 핵심 역할을 하게 된다. 이데올로기 시대를 점검할 때 특히 이데올로기 시대를 가능하게 만든 사회다윈주의의 핵심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보았듯이 사회다윈주의는 각종 이데올로기가 제국주의, 인종차별, 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향 실현을 위하여 정당화하였는데,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화하여 인간본성의 개조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들이 인간의 윤리를 극복, 초월 또는 무시하려는 성향을 보인 것은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최대의 문제점의 하나로 꼽힌다. 윤리가 본능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정신능력에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반면 윤리가 정신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정신능력에 한계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윤리면에서 보면 “인간을 진보의 수단”으로 여기는 인간주의가 발생하게 된다. 인간주의가 잔혹한 측면을 드러내는 것은 윤리와 윤리의 기초가 되는 인간본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파시즘에서 말하는 “생활권 확보”,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취하는 사회” 같은 것들은 본능을 무시한 상태에서, 정신을 동원하여 이상향을 달성해보고자 하는 데서 발생하는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이다. 파시즘이 생활권의 확보를 위하여 군사력 동원한 인종말살 정책을 펴는 것이나 공산주의가 이상향을 지향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옹호하는 것이나 바로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를 짓밟아도 좋다는 망상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데올로기는 인간본성이라는 한계를 결국 뛰어넘을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이상향 달성을 위하여 제시한 일시적 희생이 인간주의의 영구적인 정책으로 남게 된다.

이데올로기 시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철학적 방법으로 분석과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최선의 방법은 인간본성에 의한 분석과 판단이다.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정신이 절대적인 진리를 파악하고 앞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서양의 20세기의 특이한 환경, 즉 신학-형이상학-이데올로기 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도달한 마지막 단계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 사항은 인간의 정신의 역할이다. 인간 본성이 본능과 정신으로 구성되며, 정신은 본능이 제공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인성론을 받아들이면,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인성론을 크게 왜곡하는 데서 출발하였으며 결국은 완전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철학이 된다.

결국 본능은 발광체, 정신은 반사체이므로 “정신에 의존하자 ”는 주장은 허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기초 철학 체계를 무시하고 서양은 20세기 이데올로기 시대를 통하여 정신에 의존하여 인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려고 한 시기였다. 그리고 결과는 참혹한 비극을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이데올로기 시대가 이러한 문제를 일으킨데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본능을 무시하고 정신에만 의존하자는 인성론의 왜곡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양문명과 프로타고라스의 인본주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인간주의는 20세기 서양철학계를 휩쓸었다. 인간주의는 형이상학이 주장하는 “진리”나 신본주의의 “도그마”가 “만물의 척도”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인간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이와 다르게 동양문명은 본질적으로 인본주의다. 어떤 진리나 도그마가 인간관계를 훼손할 수 없다. 도교와 유교가 형이상학적 진리나 神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사회의 중심이라는 사유를 핵심으로 삼고 있다. 공자, 맹자, 순자의 사상은 모두 神이나 형이상학에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도덕적 가능성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의 특징이다.

제자가 공자에게 귀신을 어떻게 섬겨야하는지 묻자 공자는 “사람 섬기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기겠느냐?” 라고 답했다. 신본주의를 배제하고 인본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 답변이다. 또 그 제자가 죽음에 대하여 묻자 공자는 “아직 삶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논하겠느냐?” 라고 답했다. (논어 11:11). 형이상학적 추상을 배제하고 이세상의 실질적인 삶, 즉 인본주의에 집중할 것을 강조한 답변이다. 맹자도 그의 철학에서 神이나 형이상학적 진리를 배제하고 인의예지(仁義禮智)에 집중하여 인간사회의 현실성에 집중하도록 공자의 인본주의를 계승하였다. 순자도 “기우제를 지내지 않아도 비는 온다” 라고 선언하면서 교육과 법률을 통한 인간사회의 교화를 주장하였다. 神이나 형이상학적 진리를 멀리하고, 인본주의로 개인과 국가를 운영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도교에서도 神, 형이상학적 진리, 이데올로기를 모두 멀리하고 있으며, 자연에서 인간이 배운 道를 실행하자는 철학체계도 인본주의와 사유를 같이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체계는 서양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즉 신본주의(theocentrism)나 인간주의(anthropocentrism)에 반대하는 인본주의(humanism)라는 철학사상 체계가 그리스와 르네상스 시대에 나타난다. 그리스 시대부터 존재해온 인본주의가 그것이다. 그후 서양이 중세 계시종교의 신본주의에 대항하여 그리스 문명에서 인본주의를 다시 찾아오자는 의미에서 문명의 재탄생, 즉 르네상스를 구현하고자 노력한 것이 그 예시다. 적어도 시현론이 그리스 문명의 주류를 이루기 전에는 인본주의가 그리스 문명의 핵심 요소 중의 하나였다. 프로타고라스(481-411 BC)는 인간이 문명의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선언하였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지금 있는 모든 것, 모든 사안, 존재하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이 포함된다.243

神이 내린 교리에 얽매이지 말고 인간 자체의 자율적인 생각을 중요시하자는 생각이다. 일종의 르네상스 적인 인본주의 생각의 표현이다. 神이나 이데올로기 등은 일단 확정되고 나면 인간 중심이 아니라 교리나 이데올로기 중심이 되어버린다.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확정된 교리가 인간을 지배한다. 프로타고라스는 종교를 신성시하면서 절대진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쪽으로 그리스 철학의 중심이 옮겨가던 때 살던 사상가이다. 이런 시기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절대성 표현을 믿고 이에 얽매는 것을 부인하고 인본주의 적인 점을 유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프로타고라스는 무엇이 옳은가는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과 인식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神이 판단의 기준이었지만,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을 기준으로 삼아 세계를 이해하려 했다. 인본주의의 철학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신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적 사고로 전환되는 중요한 계기였다. 그의 명제는 다양한 의견이 모두 존중받을 수 있다는 철학적 근거가 되었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의 시현론자들은 의견을 달리했다. 플라톤은 이 명제를 비판하며, 모든 의견이 참이라면 모순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진리에는 보편적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로타고라스의 명제에는 이데올로기를 반대한다. 즉 인본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신본주의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인간이 절대진리를 표현하는 능력을 가진다는 식의 인간중심이 되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신본주의가 된다. 神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과 다른 점이 없게 된다. 인간이 神을 대신할 뿐이다. 계시종교의 윤리까지 인간이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면이 있기 때문에 종교는 이데올로기와 양립하기 어렵다. 이데올로기 시대에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의 절대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神을 섬기는 유신론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게 된다. 공산주의는 무신론을 주장하였고, 파시즘은 지도자가 절대성을 가지기 때문에 전통종교는 정권의 도구가 된다.

이데올로기는 서양의 합리주의를 근원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결국 인간의 정신이 神의 존재를 본받아 올드 브레인을 무시하고 홀로 작동할 수 있는 상태로 서양문명을 계속 몰고 갔다. 그러나 정신은 반사체이지 발광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데올로기는 물론 합리주의도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인본주의는 절대진리는 인간이 표현할 수 없다는 불현론에 입각한다. 그렇다고 인간의 노력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끝까지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여도 절대진리에는 도달할 수는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최선을 다하여 상대적 진리를 찾아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필요한 철학을 갖추자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상대적 진리는 남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데 있다. 인간주의는 시현론에 입각한다. 그러므로 이들이 주장하는 형이상학적 진리는 절대적이 되며, 이를 남에게 얼마든지 이를 강요하게 된다. 윤리도 모든 것의 해결을 약속하는 절대진리의 달성을 위하여 무시하게 된다.

서양의 인본주의가 르네상스 시대에 중세를 지배하여온 신본주의에 대항하여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명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인본주의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로 전환하면서 신본주의의 핵심인 정신 숭배 사상으로 치우쳐 수백 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20세기에 도달하여 사회다위니즘과 야합하여 神을 정신이 대체하는 인간주의에 도달하게 된다. 더구나 인간주의에서는 신본주의에서 중시하는 神의 윤리까지 모두 버리는 철학사에서 보기 힘든 아이러니를 연출하게 된다.

인본주의와 인간주의도 결국 정신과 본능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인간본성에 의하여 적절성이 판가름 난다. 모든 철학과 과학은 적게 또는 크게 인간본성과 관련이 있다. 아무리 멀리 인간본성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결국 인간본성으로 귀착하게 된다. 종교, 시현론, 불현론, 자연철학, 자연신앙 등 모든 것이 인간성의 철학과 연결 되어있다. 우리가 인간의 생각하는 마음이 神과 道 이전에 이미 있었다고 하는 생각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를 인정하게 된다. 반면 神이 인간이전에 존재하고 있었고 인간을 창조하였다는 철학에 입각하면 신학이나, 형이상학, 인간주의로 문명이 흐르게 된다. 서양의 근세 합리주의가 서양 문명을 이러한 흐름에 합류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이 강해지면 결국 인본주의가 인간주의로 표변하게 된다.

동양은 서양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받아들였나?

앞서 보았듯이 다윈이 진화를 설명하는 메커니즘에서 범한 실수가 문화적 진화라는 다위니즘을 창출하게 된다. 이는 정신능력에 극도로 편향된 당시 서양문명의 영향을 다윈이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진화론이라는 책에 저술된 대로의 다윈의 진화론은 철저히 서양 철학과 고전물리학 이론을 따르고 있다. 점진론과 투쟁론이 그것이다. 이런 이론이 기반이 되어 다윈의 진화론은 이데올로기와 접선하여 사회진화론으로 향하게 된다. 사회진화론 덕분에 이데올로기는 미래 유토피아 건설이 가능하다고 보고 이를 위한 강력하고 극단적인 조치들을 서슴없이 취하게 된다.

서양 神의 문명에서는 정신과 본능은 대립적으로 또는 적대적으로 존재한다. “神과 같아질 수 있는 정신을 본능이 붙잡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철학을 서양은 수천 년을 넘게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 철학 세계부터 근세 합리주의 철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인간본성의 설정 즉 정신이 인간의 중심이라는 설정이 그들의 신학과 형이상학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창출하는 근원으로 작용한다.

인간 본성 문제에 있어서 동양은 서양과는 근원적으로 대치되는 철학을 따르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살펴보면 동양이 서양의 이데올로기를 서양인들처럼 숭배하기는 어려웠다. 서양이 집착한 정신능력의 절대화 현상, 즉 이데올로기 시대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 오로지 정신의 흐름을 따라 움직인다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문명에서만 가능하다. 이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거대한 왜곡을 진보와 진화의 선구적 임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서양의 “미친” 형이상학적 이론에 매료된 나라가 서양 외에 하나 있었다. 19세기 후반 20세기 전반의 일본이다.

일본은 동양이면서도 인종차별주의에 빠진 서양문명을 숭배하고 그대로 따라가는 흐름에 빠져들었다. 동서양의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서양 사상만이 미래의 일본의 성공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믿게 되었다. 후쿠자와(1835-1901)는 19세기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언론, 복식부기 등 서양의 선진화된 제도를 일본에 도입하고 일본의 근대화에 없어서는 안 될 긍정적 존재로 부상하였다. 그의 사상의 크기는 놀랄 만하여 가히 “르네상스 맨” 이라고 불릴 만했다. 그의 초상화가 일본 만 원권 지폐를 장식할 만큼 일본에서는 그에 대한 존경심이 크다.

그런데 그는 서양의 이데올로기적인 적자생존 방법을 그대로 일본의 국제관계에 도입하고자 했다. 즉 다윈의 적자생존 진화론과, 훗날 히틀러가 내세운 리벤스라움 (Lebensraum, 생활공간)과 같은 전쟁론을 동아시아에 도입하고자 한 것이다.244 생활공간론은 독일 지리학자 라첼(Ratzel)이 1897년 저서 《정치지리학》에서 사용, 국가를 살아있는 유기체에 비유하며 독일은 성장·생존을 위해 더 넓은 영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이론을 국제사회에 적용한 것이다. 후쿠자와는 이러한 이론에 매료되었고, 당시 서양에서 유행하던 스펜서(1820–1903)의 사상을 신봉하여 이를 동양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스펜서는 적자생존과 자연선택 원칙이 과학적 진화론에서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고 확신했다. 후쿠자와는 이러한 이론을 국제적으로 다른나라에도 적용하고자 했다.

후쿠자와는 한국과 중국이 진화론적으로 뒤떨어진 나라이며 일본은 이들과 함께 살 수 없는 영원한 후진국이라고 평가했다.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구라파처럼 되자)라는 이론을 내세워 후진국인 아시아의 이웃나라를 정복하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아시아를 벗어나 구라파 즉 서양처럼 되어야 미래에 살아남을 수 있고 번영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의 전체 사상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일본은 히틀러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 일본인들은 미래를 대표하는 데 가장 앞서 가고 있는 독일의 모든 것을 따라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히틀러 독일이 서양 전체를 전쟁으로 휘몰아 만신창이로 만드는 것처럼, 일본은 동아시아 전체를 전쟁으로 휘몰아 만신창이로 만들게 되었다.

후쿠자와의 서양식 적자생존론은 히틀러가 서양에서 패망한 것처럼 결국 동양에서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불현, 윤리, 음양, 보완 사상이라는 동양정신을 모조리 버리고 시현, 법치, 선악, 투쟁에 기초한 서양 적자생존론에 몰입했다. 정신이 미쳐가면서 만들게 되는 이데올로기를 창출한 서양문명에 압도된 현상이다. 그는 국가 간에도 윤리가 있어야 한다는 동양의 오랜 전통과 심오한 문화, 철학을 한줌의 가치도 없는 약자의 논리로 치부하였다. 서양의 정복, 착취, 군사력을 앞세운 약육강식의 비문명적인 미개한 행동양식을 일본이 그대로 본받았다. 다음 내용은 후쿠자와가 1885년 발표한 “탈아론” 논문에 담긴 내용이다:

서양문명이 동양에 도착하면 동양에 있는 모든 나무와 풀잎들이 서양의 바람을 따라가게 된다. 내 생각에는 서양문명이 동양을 정복할 때 중국과 한국이라는 두 나라는 독립해서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이는 무지, 불법, 폭력 그리고 잔인함 속에서 한쪽 마을이 살고 있는 데 그 옆에 정의로운 사람이 존재한다는 상황과 유사하다. 우리는 중국과 한국이 발전하여 그들과 아시아를 함께 개발하자는 시간을 기다릴 수 없다. 그보다 우리는 아시아의 전열을 완전히 떠나서 서양의 나라들에 미래를 거는 데 우리를 던져야 한다. 나쁜 친구와 가까이하는 자는 함께 나쁜 이름을 면할 수 없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하는 바이다.245

그러나 후쿠자와와 일본군국주의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양 이데올로기의 동양 전파는 결국 실패하였다. 동양 국가들은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서양과 다른 패턴을 보이고 있다. 서양 국가들은 진심에서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라는 이데올로기를 시행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국가들은 이데올로기의 실패와 함께 모두 소멸하였다. 소멸 원인은 이데올로기가 인간본성에 대한 오해내지 오판에 기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은 서양과 이데올로기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일본은 독일의 파시즘을 흡수하려고 하였고, 중국은 소련의 공산주의를 흡수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동양국가들은 이데올로기에 충실하여 여기에 국가 운명을 모두 던지는 서양식 방법보다는 이데올로기를 국가 운명에 활용하고자 하는 융합주의(syncretism) 라는 동양의 전통방식을 취하였다.

파시즘 독일의 패망과 공산주의 소련의 소멸로 이데올로기 시대가 종결되면서 동양 국가들이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가 관심의 대상이었다. 동양에서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도 공산주의 이념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념에 포함된 내용 중에서 국가운영에 필요한 것은 활용한다는 자세로 나아가고 있다. 결국 이러한 융합주의적 국가운영 자세라는 동양식 방식에 의하여,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은 서양에서는 모두 사라지고 동아시아에만 남아 있게 되었다.

일본의 경우 군국주의 시기 동안 동양문명의 특성을 버리고 서양의 이분법적인 분리와 투쟁의 철학을 따라가고자 했다. 그러나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에 패하고 난 후에 갑자기 파시즘을 버리고 미국의 민주주의 체제를 선언하고 이를 따르려는 노력을 하였다. 놀라운 변신이다. 파시즘에서 민주주의로 급변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결국 서양과는 달리 동양식으로 서양의 이데올로기를 활용하는 방법을 찾고자 하는 노력에서 온 것이었다. 일본은 이런 형태로 극단적으로 또 우회적으로 동양문명의 특성을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후 일본의 국내정치도 서양의 정권 교체처럼 이념으로 분리된 정권 간의 교체가 아니라 한 정당안의 계파 간의 조정으로 정권의 교체를 이루는 성향도 동양 문명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동양의 사유의 근간을 유지하면서 서양 이데올로기를 활용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중국은 융합주의라는 철학의 테두리 안에서 공산주의를 국가운영의 한 방편으로 보고 활용하자는 것이다. 중국이 국가운영을 공산주의 철학에 떠맡기고 이를 그대로 따라하는 서양식 시현주의적인 방식과는 달리 동양의 문명적 특성을 따라가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서양의 공산국가들은 모두 공산주의를 버리고 패망하였지만, 중국은 공산주의를 유지하면서 그 일부 필요한 부분을 국가운영에 활용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도교, 유교, 불교를 모두 국가운영에 사용한 것처럼 공산주의도 그 이념에 포함된 내용 중에서 필요한 부분을 국가운영에 활용하자는 것이다. 중국은 공산주의를 활용하면서도 정부가 유교 사상을 활용, 공자를 중국 문명의 대표자로 내세우며 세계에 전파하는 “공자학원”으로 또한 활용하고 있다. 이는 중국문명이 모든 철학이나 가설들에 얽매이는 것 보다는 융합주의(syncretism)에 따라 인간이 만든 모든 철학 체계를 국가운영에 활용하고자 하는 동양문명의 특성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사상의 수입면에서도 그렇고 국가운영면에서도 그렇고 동아시아 공산국가들의 융합주의적 태도는 멸망한 서양의 공산국가들이 몰입했던 교조적인 태도와 문명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서양이 창조하고 20세기에 이르러 한 때 세계를 지배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동양의 이러한 이해와 적응은 동양문명에 잠재하고 있는 특성 때문이다. 그러한 특성은 무엇보다도 동양문명에 내재하고 있는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본성 면에서 동양문명은 서양 처럼 정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본능과 정신을 음양적으로 조화시킨 보완론을 따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주

  1. 170

    Plato, The Republic (Packard Technologies, 2005), 3,241–43, Kindle Edition.

  2. 171

    Ibid., 3,043–44.

    주 170

    Plato, The Republic (Packard Technologies, 2005), 3,241–43, Kindle Edition.

  3. 172

    Friedrich Wilhelm Nietzsche, La Naissance de la Tragédie, Editions Gonthier, Paris, p.17

  4. 173

    Aristotle, Politics, vol. 1 (Loeb Classical Library), 1252 b 8.

  5. 174

    Friedrich Wilhelm Nietzsche, La Naissance de la Tragédie, 앞의 책, p.93.

    주 172

    Friedrich Wilhelm Nietzsche, La Naissance de la Tragédie, Editions Gonthier, Paris, p.17

  6. 175

    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Essais de Théodicée, Garnier-Flammarion, Paris, p.457.

  7. 176

    Edward Gibbon,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Volume 1, ed. David Womersley (London: Penguin Classics), 944.

  8. 177

    Isaiah Berlin, Karl Marx, pp.316~317.

  9. 178

    Camille Paglia, Sexual Personae: Art and Decadence from Nefertiti to Emily Dickinson (New Haven, Conn.: Yale University Press, 1991), 96–97, Kindle Edition.

  10. 179

    J. Bronowski and Bruce Mazlish, The Western Intellectual Tradition, pp.69~70.

  11. 180

    Raymond Aron, L’Opium des Intellectuels, Gallimard, Paris, P.26 참조.

  12. 181

    Voltaire, 앞의 책, pp.512~513.

    주 149

    Voltaire, Dictionnaire Philosophique, De Etiemble, Paris, 1967, p.76,

  13. 182

    Voltaire, 위의 책, p.60

    주 149

    Voltaire, Dictionnaire Philosophique, De Etiemble, Paris, 1967, p.76,

  14. 183

    Ludwig Feuerbach, 앞의 책, p.161.

    주 166

    Erich Fromm, Art of Loving, p.53 및 Ludwig Feuerbach, Manifestes Philosophiques, p.96 참조

  15. 184

    Auguste Comte, La Science Sociale, Gallimard, Paris, 1972, p.229.

  16. 185

    Friedrich Wilhelm Nietzsche, Ecce Homo, p.145

  17. 186

    Friedrich Wilhelm Nietzsche, L’Antéchrist, p.18

  18. 187

    Friedrich Wilhelm Nietzsche, L’Antéchrist, p.19.

  19. 188

    柳仁熙, 《朱子哲學과 中國哲學》, 범학사, 1980, p.245.

  20. 189

    車柱環 역, 《論語》, 을유문화사, p.152.

  21. 190

    車柱環 역, 위의 책, 雍也篇.

    주 189

    車柱環 역, 《論語》, 을유문화사, p.152.

  22. 191

    Voltaire, Dictionnaire Philosophique, 앞의 책, p.315.

    주 149

    Voltaire, Dictionnaire Philosophique, De Etiemble, Paris, 1967, p.76,

  23. 192

    G. W. F. Hegel, Leçons sur la philosophie de l’histoire, p.252.

  24. 193

    Friedrich Wilhelm Nietzsche, La Naissance de la Tragedie, 앞의 책, p.98.

    주 172

    Friedrich Wilhelm Nietzsche, La Naissance de la Tragédie, Editions Gonthier, Paris, p.17

  25. 194

    Voltaire, 앞의 책, p.7.

    주 149

    Voltaire, Dictionnaire Philosophique, De Etiemble, Paris, 1967, p.76,

  26. 195

    Max Scheler, 신상호 역, 《철학적 인간학》, 정음사, p.167.

  27. 196

    Max Scheler, 허재윤 역, 《철학적 세계관》, 박영사, p.180.

  28. 197

    Albert Einstein, La Relativite, p.8

  29. 198

    Friedrich Wilhelm Nietzsche, Ecce Homo, p.145

  30. 199

    Friedrich Wilhelm Nietzsche, La Naissance de la Tragedie, 앞의 책, p.100.

    주 172

    Friedrich Wilhelm Nietzsche, La Naissance de la Tragédie, Editions Gonthier, Paris, p.17

  31. 200

    車柱環 역, 앞의 책, p.86.

    주 189

    車柱環 역, 《論語》, 을유문화사, p.152.

  32. 201

    Voltaire, 앞의 책, p.101.

    주 149

    Voltaire, Dictionnaire Philosophique, De Etiemble, Paris, 1967, p.76,

  33. 202

    Thucydide, Histoire de la Guerre du Peloponnese, Garnier Flammarion, Paris, p.151.

  34. 203

    Friedrich Wilhelm Nietzsche, La Naissance de la Tragedie, 앞의 책, p.169.

    주 172

    Friedrich Wilhelm Nietzsche, La Naissance de la Tragédie, Editions Gonthier, Paris, p.17

  35. 204

    Friedrich Wilhelm Nietzsche, 위의 책, p.164.

    주 172

    Friedrich Wilhelm Nietzsche, La Naissance de la Tragédie, Editions Gonthier, Paris, p.17

  36. 205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London: John Murray, 1866), P 577.

  37. 206

    사회진화론은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 –1903)와 가장 깊이 연결된 이름이다(이 이름은 뒤에 비판자들이 붙였다). 스펜서는 진화론을 과학과 철학을 모두 묶어서 함께 설명하는 철학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문제는 그가 인간 진화에서 획득 형질이 유전된다는 라마르크의 이론을 믿었다는 점에 있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한 대표적 인물로, 사회가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한 형태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그는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다. 그의 사상은 후대에 사회진화론으로 불리며, 특히 경쟁을 강조한 부분은 사회다윈주의와 연결되어 비판적으로 평가된다.

    그는 사회도 생물처럼 진화한다고 보고, 경쟁을 통해 강자가 살아남는다고 주장했다. 빈자에 대한 자선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른다고 반대했는데, 이런 점 때문에 사회다윈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여겨진다.

  38. 207

    Stephen Jay Gould, The Panda’s Thumb, p.173.

  39. 208

    Charles Darwin, The Origin of Species, 앞의 책, p.435.

    주 205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London: John Murray, 1866), P 577.

  40. 209

    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 Garnier-Flammarion, Paris, p.40.

  41. 210

    A. Hitler, Mein Kampf, reproduced D. H. Bouanchaud, Charles Darwin et le Transformisme, Payot, Paris, 1976, p.77.

  42. 211

    Charles Darwin, The Origin of Species, 앞의 책, p.257.

    주 205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London: John Murray, 1866), P 577.

  43. 212

    Stephen Jay Gould, Le Pouce du Panda (The Panda’s Thumb, More Reflections in Natural History), Éditions Grasset, Paris, 1982. P.64.

  44. 213

    Le Monde, 1984. 5. 17.

  45. 214

    Charles Darwin, The Origin of Species, 앞의 책, p.90.

    주 205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London: John Murray, 1866), P 577.

  46. 215

    Charles Darwin, The Origin of Species, 앞의 책, p.29. 다윈과 함께 자연선택설을 발표한 Wallace도 Malthus의 《인구론》을 읽고 영감을 얻었다.

    주 205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London: John Murray, 1866), P 577.

  47. 216

    Thomas Hobbes, Leviathan, Penguin Books, Middlesex, 1968, p.185.

  48. 217

    Charles Darwin, The Origin of Species, 앞의 책, p.17.

    주 205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London: John Murray, 1866), P 577.

  49. 218

    Charles Darwin, 위의 책, p.434·435·411.

    주 205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London: John Murray, 1866), P 577.

  50. 219

    Charles Darwin, 위의 책, p432.

    주 205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London: John Murray, 1866), P 577.

  51. 220

    Charles Darwin, 위의 책, p90.

    주 205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London: John Murray, 1866), P 577.

  52. 221

    Charles Darwin, 위의 책, p87.

    주 205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London: John Murray, 1866), P 577.

  53. 222

    인류학자들이 흑인을 지칭하여 “아프리카 태양의 자손(son of African sun)”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검은 피부, 곱슬머리, 두터운 입술 등의 신체적 특질이 아프리카의 기후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럽 쪽으로 간 인류의 조상들은 춥고, 일광이 적은 기후풍토에 적응하여, 멜라닌색소가 줄어들면서 피부가 점차 희어졌을 것이다. 이것은 체내 필수요소인 비타민 D의 합성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지금부터 2만 년 전 뷔름(Würm) 빙기(氷期)가 끝나고 기후가 온화해져서 스칸디나비아의 북극해 연안까지도 사람이 살 수 있게 되었다. 이 땅에 도착한 사람들은 여름 동안은 사양의 백야에서, 겨울 동안은 연속된 암흑의 밤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러한 북구환경에 더욱 적응한 사람들은 백색 피부와 파란 눈 즉 녹안의 북구인(Nordic)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인의 피부가 황색인 것도 유럽인의 피부가 희고, 아프리카인의 피부가 검은 것처럼,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모래바람이 불고 일조시간이 많은 독특한 환경에 노출되어 여기에 적응한 결과라고 추측된다. 동양인의 황색 피부는 추위와 가뭄에 방어기능을 가지는 것처럼 생각되며, 작은 코와 입은 호흡하는 공기가 허파에 닿기 전에 따뜻하고 습하게 해주며, 그리고 먼지로부터 인체를 보호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가느다란 눈과 몽고주름(epicanthic fold)은 먼지와 아주 찬 공기로부터 눈을 보호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동아시아에 정착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베링(Bering) 육교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였다. 아프리카에서 추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피부의 색소 침착의 필요성은 줄어들었다. 햇빛을 차단하여 몸을 보호할 필요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반대로 햇빛을 받아들여 비타민 D를 합성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아메리카에서 남아메리카로 이동함에 따라 또다시 피부를 보호할 필요가 생겨 멜라닌 색소의 침착이 증가되었다. 오늘날 열대지방의 아메리카인들이 같은 기후조건에서의 아프리카인들보다 검지 않은 것은, 아메리카로 이동 이후 아직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에서 발견한 인골은 2, 3만 년 전의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곧 동아시아에 살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아메리카로 이주하여 2, 3만 년 사이에 아메리칸 인디언, 즉 홍인종이 된 것이다. 오늘날은 서로 인종이 달라졌지만 이들의 신체적 특징이 같았던 시기는 지구의 역사에 비추어보면 그리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54. 223

    Stephen Jay Gould, La Mal Mesure de L’Homme, Editions Ramsay, Paris, 1983, p.365.

  55. 224

    Alexander Marshack, The Roots of Civilization: The Cognitive Beginnings of Man’s First Art, Symbol and Notation, McGraw-Hill, New York, 1972. Reproduced, Alain de Benoist, Vu de Droite, Copernic, Paris, 1979, p.29

  56. 225

    Newsweek, 1982.3.29., p.46

  57. 226

    실제로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은 Darwin과는 무관하다. Darwin은 Karl Marx측(Karl Marx에게 직접 쓴 서한이라는 설과, Marx의 사위 Edward Aveling에게 쓴 서한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에게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힌 것으로 되어 있다. “귀하가 본인의 저작에 관한 견해를 어떤 형태로 밝히든 본인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더구나 본인이 귀하의 저작에 대하여 지지의 뜻을 표하는 것은 성실한 태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본인은 귀하의 저작에 관하여 아는 바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영광이긴 하지만, 귀하의 저작이 본인에게 헌정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Le Monde 1984.5.17.; La Recherche, no. 77, avril 1977, p.394 참조)

  58. 227

    Newsweek, 1982.3.29., p.45

  59. 228

    Stephen Jay Gould, Le Pouce du Panda(The Panda’s Thumb, More Reflections in Natural History)앞의 책, p.176

    주 212

    Stephen Jay Gould, Le Pouce du Panda (The Panda’s Thumb, More Reflections in Natural History), Éditions Grasset, Paris, 1982. P.64.

  60. 229

    Stephen Jay Gould, Darwin et les Grandes Enigmes de la vie(Ever since Darwin, Reflections in Natural History), Editions Pygmalion, Paris, 1979, p.63

  61. 230

    Stephen Jay Gould, 위의 책, p.62

    주 229

    Stephen Jay Gould, Darwin et les Grandes Enigmes de la vie(Ever since Darwin, Reflections in Natural History), Editions Pygmalion, Paris, 1979, p.63

  62. 231

    Stephen Jay Gould, The Panda’s Thumb, 앞의 책, p.173

    주 212

    Stephen Jay Gould, Le Pouce du Panda (The Panda’s Thumb, More Reflections in Natural History), Éditions Grasset, Paris, 1982. P.64.

  63. 232

    Stephen Jay Gould, Ever since Darwin, 앞의 책, pp.90~91

    주 229

    Stephen Jay Gould, Darwin et les Grandes Enigmes de la vie(Ever since Darwin, Reflections in Natural History), Editions Pygmalion, Paris, 1979, p.63

  64. 233

    Newsweek, 1982.3.29., p.45

  65. 234

    Charles Darwin, The Origin of Species, 앞의 책, pp.442~443

    주 205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London: John Murray, 1866), P 577.

  66. 235

    Carl Sagan, Cosmos, 서광원 역, 《코스모스》, 우주, 1981, P.231; L. Barnett, 《우주와 아인슈타인 박사》, p.27, 제2장 5절 참조

  67. 236

    Charles Darwin, The Origin of Species, 앞의 책, p.287.

    주 205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London: John Murray, 1866), P 577.

  68. 237

    Canon C. E. Raven, “Darwin and his Universe,” The History of Science, Cohen & West Ltd., London, 1963, p.144.

  69. 238

    Charles Darwin, The Origin of Species, 앞의 책, p.443.

    주 205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London: John Murray, 1866), P 577.

  70. 239

    Charles Darwin, The Origin of Species, 앞의 책, p.123.

    주 205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London: John Murray, 1866), P 577.

  71. 240

    Charles Darwin, 위의 책, p.450.

    주 205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London: John Murray, 1866), P 577.

  72. 241

    인간주의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생소하다. 최근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를 설정하면서 서양에서 유행하고 있는 어휘다. 이들은 기후변화 등의 문제점을 감안하여 최근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는 것은 좋지만 자연의 생태계를 중심으로 하자는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에서 인간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계시종교의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표현을 중화하자는 표현으로 쓰인다. 인간주의(anthropocentrism)라는 용어는 서양에서는 인간중심주의라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생태중심주의(ecocentrism)과 대비되는 용어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신본주의(theocentrism)와 비슷한 맥락에서, 인간이 神을 대신한다는 뜻으로 인간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서양의 르네상스 당시 신본주의에 대칭된다는 뜻에서 인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는 인문주의로도 표현된다. 이 책에서는 신본주의와 대칭되는 면을 부각하기 위하여 인문주의 보다 인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데올로기 시대에 인간이 神을 대신하여 모든 것을 주관하려는 움직임은 인간주의 (人間主義)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73. 242

    Bertrand Russell,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p.21.

  74. 243

    Diogenes Laërtius, The Lives and Opinions of Eminent Philosophers, Kindle locations 6494–6496.

  75. 244
  76. 245

    His article- an unsigned editorial article published on March 16, 1885- demonstrates “leave Asia and join Euro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