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 인간본성: 본능-이성 이원론 vs 본능-이성 합일론 · 제3장

동양 인성론: 타고난 인간본성 속에서 변화하는 인간성

약 27분 · 주 23개

1) 서양의 자연주의 인성론: 산적-백성 간의 상호이익에서 리더십이 생성

서양의 인성론과 사회계약론은 서양 철학의 중심인 존재론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자연철학에 근거한 인성론이 제기되고 있다. 동양의 자연철학에서 주장하는 인성론과 매우 유사하다. 서양의 전형적인 존재론과 선악론의 테두리를 벗어난 자연주의에 입각한 인성론이다. 맨서 올슨(Mancur Olson, 1932-1998) 교수의 이론이다. 근세의 사상가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제한된 사회에 추론한 인성론과 사회계약론이 아니라 현실적인 자연철학에 입각하여 인간사회에서 리더십이 어떻게 발생하였는지 분석하고 있다. 올슨 교수는 지도자와 백성 사이에 합치되는 이익 때문에 정부가 생겼다고 본다. 지도자과 백성이 모두 자기보존 원칙을 따른다.

종족 단위를 넘어서는 인간사회의 통치체제는 사회계약론이나 권한을 스스로 양보하는 그런 상황에서 조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폭력을 최대한 사용할 능력이 있는 자들 사이에서 합리적인 이익을 찾는 과정에서 조성된다.144

지도자와 백성의 “상호이익”(encompassing interest)이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동기라는 이론이다. 그의 이론은 인류의 사회 생활은 한가지 행동원칙에 의해서 움직였을 것으로 본다. 그것은 남의 것을 빼앗는 방법, 즉 습격에 의한 도적질(raid)이다. 올슨은 인간사회의 생존은 이들을 “이동산적” (roving bandit)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르고 보니 도적들 중에서 매년 수확한 것을 빼앗아 오는 것 보다 수확이 좋은 곳에 정착해서 매년 적절히 빼앗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는 산적들이 생겼다. 그래서 이들은 한 곳에 머무르는 “토착산적”(stationery bandit)이 된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백성을 위하여 사회기간산업을 일으키는 것은 사회기간산업속에 자신의 이익이 포함되는 “상호이익” 때문이다. 145

토착산적이 되면서 이들은 백성들에게서 빼앗는 정도를 조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동산적처럼 모든 것을 다 빼앗는 것이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백성들에게 일년 먹을 것과 다음 생산에 쓰일 물자를 남겨 놓고 빼앗는 것이 토착산적에게 도움이 된다. 그리고 식량의 증산을 위하여 도로, 저수지, 시장을 만들어주면 백성도 토착산적에게도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되면 토착산적은 지도자가 된다. 올슨은 산적과 백성사이의 “상호이익”이 지도자를 탄생시켰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토착도적은 사슴을 포획하는 늑대가 아니다. 그보다는 목장에서 기르는 동물들이 잘 보호되고 물도 자유롭게 먹게 하는 목장 주인과 비슷하게 된다. 146

올슨의 이런 통찰력은 1920년대에 중국 만주에서 군벌들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군벌들이 세력을 확보하는지 하는 문제를 살펴보다가 깨달은 것이다. 올슨은 만주 군벌들 사이의 투쟁에서 이동도적과 토착도적을 비교하였다. 이동도적들이 패배하는 원인은 주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데 있었다. 토착도적들이 주민의 지지를 받아서 지도자가 되면서 결국 승리하는 과정을 보고 그의 이론을 세웠다.147 바로 도적과 백성사이의 상호이익론이다 올슨의 이론은 서양의 제반 사회계약 보다 동양 지도자론에서 그리고 있는 지도자의 “천명” (Mandate of Heaven)사상과 유사하다.

백성을 잘 살게 해주면 지도자에게 천명이 있는 것이고, 이에 실패하면 천명이 사라진다.

올슨의 탁월한 통찰력에서 우리는 인간본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점을 알 수 있다. 올슨 이론은 사회계약론을 주장하기 위하여 성악 또는 성선설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인간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지도자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살펴보자는 데 있다. 자연적인 인성론에 근거한다. 근세의 서양 사상가들의 인성론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인성론을 구상하고 있다. 지도자나 백성이나 모두 자기이익을 챙기는 인간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고 이에 근거하여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인간본성인데 지도자는 상호이익을 위하여 백성에게 자기의 눈앞의 이익을 양보하는 자세를 발휘한다고 보는 것이다. 동양문명은 2천 5백년 전에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상황을 목격하고 인간본성을 파악하고 정치윤리 철학을 세웠다. 동양에서 보는 작은 도적은 이동 도적이며 큰 도적은 토착 도적이 된다:

작은 도적은 잡히고 말지만, 큰 도적은 제후가 된다. (장자: 도척 하편)

군대의 구성도 마찬가지 상호이익에서 발생한다. 지도자와 백성의 합의에 의해서다. 토착도적 즉 지도자는 자신과 백성 보호를 위하여 군대도 만든다. 백성들은 이러한 현명한 지도자를 만나면 계속 지도해 주기를 바라면서 “국왕 만세”(Long live the King!)을 희망하게 된다. 결국 왕과 백성은 서로의 이익을 위하여 정부라는 제도를 자연스럽게 만들게 된다. 그러나 정부가 구성되었다고 상황이 정리된 것이 아니다. 정부를 지도하는 자들과 백성들 사이에 상호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힘 겨룸은 계속된다. 이를 통하여 올슨은 토착 도적과 백성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자연적인 경제경제학 이론을 개발하였다. 양쪽 간의 상호이득이 핵심이다.

이러한 철학적 생각은 서양이 고민하고 있는 한가지 문제에 대하여 명확한 해답을 제시한다. 본성인가 양육인가 (Nature or Nurture) 하는 문제는 서양에서 지금까지 중요한 철학적 문제로 남아있는 과제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의 본성이고, 양육에 의하여 토착도적와 백성 사이에 이성을 발휘하여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양보선을 찾는다. 양육이 없으면 누구나 타고 태어난 눈 앞의 이득만 챙기는 나쁜 정부와 나쁜 백성이 된다. 이점은 특히 지도자에게 문제가 된다. 실제로 서양의 경우 20세기까지 왕들이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 위하여 백성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거대한 세금을 거두는 미련한 왕들이 존재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전제적인 왕들은 자신의 군사적 목적을 위하여 최대한 세금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 서양 역사에서 최대한의 전제적 관할권을 가진 왕들을 생각해보라. 부르봉 왕조의 왕들 (특히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왕 포함)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들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제국도 결국은 세금을 올리는 노력을 계속하였고 적어도 세입의 출처 한계까지 극대화했다. 148

이점은 동양도 마찬가지다. 황제가 선정(善政)을 베풀지 못하면 백성의 이득을 버리고 결국 끝내 눈앞의 자신의 이득만 챙기는 상태가 조성된다. 천명이 사라지는 것이다. 동양에서 왕조가 교체될 때 새로운 왕조가 취한 첫번째 조치는 세금을 내리는 행위였다. 망하는 왕조는 이미 세금이나 착취의 한도를 한껏 높여 놓았기 때문이다. 세금을 내리는 것은 민심을 얻어 선정을 베풀고 천명을 확보하자는 생각이다. 올슨 교수의 이론은 종교의 원죄론이나 홉스, 로크, 루소의 이론 보다 사실에 가깝다. 그리고 인간본성, 정부의 구성과 구성이후의 과제에 관한 설명을 놀랍도록 잘 표현하고 있다. 인간본성에 내재한 이익으로 지도자와 참여자 간의 문제를 풀어나간 점은 동양의 인간본성론과 유사하다.

서양문명은 본질적으로 이론과 제도를 만들어내는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이를 기초로 하여 서양은 민주제도를 추진하였다. 그리고 합리적인 정권교체라는 제도를 만들어냈다. 동양이 실패한 제도면에서 서양은 성공하였고, 동양은 서양에서 이러한 제도를 배우고 있다. 문제는 정권교체라는 제도에 있다. 서양의 모든 정치체제가 정당제도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다. 정당제도는 과연 제대로 작용할 것인가? 문제는 여전히 인간본성에 달려있다. 서양의 정당이 국민의 이익 즉 공익과 정당의 승리 즉 사익이 배치되는 상황에서 사익을 희생하고 공익을 취할 수 있는지 하는데 있다. 인간본성이 그렇게 작용할 수 있는지 하는데 있다.

전쟁같이 모두가 공멸하는 상황에 처하기 전에는 인간본성은 공익보다는 사익을 취하게 마련이다. 2차 세계 대전이 끝 난지 오랜 지금, 현재 정당들은 공익 보다 사익을 취하는데 익숙해있다. 인간본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라든지 빈부격차심화 같은 범세계적인 문제는 공익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정당들은 이런 문제의 해결은 2차적인 문제로 보고 당장 차기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방안들 즉 사익을 앞세우는데 익숙해 있다. 여기에 올슨 교수가 파악한 민주제도의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는 왕이라든지 대통령, 수상 등 국가의 지도자가 국가재정을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는 하는 좋은 제도이지만, 이익집단 들이 경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데는 별 효과가 없는 제도임을 지적하고 있다.

비록 민주주의는 그 지도자로 하여금 사회잉여자본을 자의적으로 빼내서 쓰는 것을 방지하는데 아주 유리한 위치에 있지만,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민주주의에서 특수 이익집단이 국가의 전체 경제정책을 좌지우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149

올슨은 “개인들이 모인 집단은 사익을 위하여 일하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특수이익집단이 만드는 정치경제 정책은 공공의 이익을 해치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서양의 민주주주의는 최고지도자가 공익을 해치는데 성공적인 제도를 만들어내었다. 서양의 민주주의는 국가주의(statism)에 대한 대비는 잘하고 있는데 특수 이익집단 즉 집단주의(tribalism)에 대한 대비는 현격히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현재 서양이 겪고 있는 정당과 자본을 다루는 비즈니스 사이의 결착에 대한 탁견이다. 150

서양 모든 국가에서 빈부격차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것이 계속되면 수십년내에 서양정부는 모두 빛에 허덕이는 무기력한 정부로 전략하게 된다. 정당과 비즈니스의 결착은 곧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인간본성에 있는 이기심의 조장, 즉 탐욕에서 유래한다. 민주주의도 똑 같은 논리에 휘둘리게 된다. 정당이 승리하도록 뽑는 것은 일반 백성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긴축을 요구하는 정당보다는 국채로 보조금을 주는 정당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민주주의 이론도 인간본성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 된다.

2) 이타심은 이기심의 희생인가 계명된 이기심인가?

이타심이 본능에 없다면 윤리나 법은 神이나 절대화된 이성 같이 외부에서 인간에게 준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동양문명에서는 이타심은 크게 보면 이기심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이타심은 무엇인가? 이타심의 분석에서 道의 문명과 神의 문명이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서양에서는 이타심은 이기심을 버리고 이를 대체한 상태로 본다. 이기심과 이타심 중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서양문명에서 이타심은 자기희생이다. 동서양의 “보완론” 문명과 “대립론” 문명의 차이가 다시 드러난다. 이타심(Altruism) 은 서양사전이나 문건을 찾아보면 한결 같이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다른 사람만을 위하는,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닌, 이런 뜻으로 쓰인다. 이타심은 “자기를 위하지 않는다”는 함의를 가진다 (Selflessness or Unselfishness).

서양 문명에서 윤리는 신의 명령이다. 자신의 이익을 희생해서 다른 사람의 이익을 선택하여야 한다는 명령이다. 이러한 철학은 계시종교의 율법에 이어 계몽시대에 인간의 이성이 신을 대신할 수 있다는 합리주의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계몽시대의 철학자 칸트는 “진정한 도덕적 사랑은 남을 위한 실쳔”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런 철학과 맥을 같이 한다. 칸트의 윤리의 출발점으로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에 의한 도덕적 의무론(deontology)을 주장했다. 그는 인간은 이성속에 도덕법칙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계몽시대에 신이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의 철학체계속에서 이러한 칸트의 철학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 (Copernican Revolution)으로 지칭되면서 서양 합리론자들로 부터 숭앙을 받고 있지만, 결국 “신의 율법”을 “인간의 이성”이 대체한 형식이다.

동양에서는 이타심을 “계명된 이기심” (Enlightened self-interest) 로 본다. 서양문명 어느 곳에도 이타심은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함께 추구한다는 동양문명의 핵심을 이루는 철학 같은 것은 찾기 힘들다. 동양에서는 이타심은 제대로 된 이기심을 추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로 해석된다. 개인주의에서 주장하는 “나”의 중요성과 관계주의에서 주장하는 “우리”의 중요성에서 동양문명은 우리의 중요성을 핵심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결론이 가능하다. 공자는 논어에서 “계명된 이기심”을 설명한다:

자기의 이익을 세우려 거든 남의 이익도 함께 세워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남이 원하는 것도 같이 이루어야 한다. (논어 6:28)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익을 위하여 남도 이익이 되도록 돕는 다는 점이다. 순자는 윤리와 법이 “우리”를 위해서 있는 것임을 설명한다. 즉 윤리는 자기보존을 위하여 필요한 계명된 이기심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우리가 윤리와 법을 모두 없애고, 정부가 하는 행위를 모두 제거하고, 벌을 준다는 가능성을 모두 제거해 버리면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 지 살펴보자. 그러면 강한자가 약한자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게 된다. 다수가 소수를 해치고 없애려고 하게 된다. 윤리와 질서가 사라진다. 사회는 멸망의 길로 향하게 된다. (순자 23:7)

윤리는 결국 자기보존이라는 이기심에 소속된다. 동양에서 윤리는 도덕적 명령도 아니고 자기 희생도 아니다. 자기보존에 속하는 계명된 이기심이다. 서양에서는 이제 이러한 철학적 사고를 시작하고 있어 보인다.

자기보존이라는 생물학적 현실이 인간의 윤리를 만들어 낸다.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자는 양도할 수 없는 필요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다른 사람도 보호되도록 도와야 한다. 만약 이에 실패한다면 우리 자신이 멸망하게 되는데, 자기보존이라는 기본 원칙에 담긴 기준을 우리 스스로 배신하고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151

인간은 다른 어떤 동물과도 달리 탐욕을 가지고 태어난다. 탐욕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 윤리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인류의 위대한 선각자들은 모두 이웃사랑을 윤리의 기준으로 제시하였다. 동양문명에서 윤리는 神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깨달음으로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다.

도(道)를 존중하고 덕(德)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명령 때문이 아니라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다. (도덕경 51장)

동양문명에서 윤리를 神이 아니라 자연에서 나온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배우자는 道의 윤리다. 동양문명에 내재한 이기심과 이타심의 조화 개념은 서양에 없는 철학이다. 서양인들은 윤리를 神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동양인은 윤리를 자연에 의지하고 있다. 즉 자연이 인간에게 제시한 道를 따라간다. 道는 이기심과 이타심을 조화시키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동양 인성론에서 핵심 과제는 인간 본성에 존재하는 강력한 이기심을 어떻게 평가하는 가 하는 문제다. 유교나 도교에서는 이타심은 자신을 위한 계명된 이기심으로 다룬다. 즉 이타심은 이기심의 희생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기심의 일부가 된다. 공자는 이기심과 이타심의 조화를 인간성 양육의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한다. 인간은 자연이 생물다원성을 보존하듯이 자기 보존을 위하여 이기심을 줄이고 이타심을 적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도덕경에서 설명한다. 인간은 자연의 도를 따라야 한다:

자연은 많은 것을 적게 만들고 적은 것을 많게 만든다. 인간은 많은 것을 더욱 많게 만들고 적은 것을 더욱 적게 만든다. 누가 많은 것을 나누어 세상에 줄 수 있나? 道를 이해한 자만이 할 수 있다. (도덕경 77)

동양문명에서 주장하는 “계명된 이기심” 에 대하여 최근 서양의 과학적 철학자들이 이를 뒷받침하는 자연주의에 입각한 이론을 제공하고 있다. 서양 학자들이 주장하는 “혈족선택”(Kin selection)이라는 20세기 후반 조성된 발견으로 계명된 이기심은 확실한 과학적 원천을 가지게 된다. 혈족선택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윤리의 원천이 있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내고 있다. 이런 점은 서양에서 유행하는 칸트의 철학과 대조를 이룬다. 칸트보다 데이비드 흄의 철학체계를 따르고 있다. 흄은 인간의 윤리가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인간본성의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고, 반대로 칸트는 윤리가 감정이라는 본성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로운 이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윤리가 완전히 이성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흄은 윤리는 이성이 아니라 본능에 기초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서양의 일부 사상가들의 머리 속에 드디어 계명된 이기심의 씨앗을 발견하게 된다. 도덕에 대한 판단은 이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감성이 원천이라는 것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생물학자 해밀턴(Hamilton)은 1960년에 혈족선택이라는 아이디어를 주장했다. 이것은 이타심이 자기 자신을 위한 유전적인 선택에 속한다는 발견에 기인한다. 이러한 발견으로 서양에서는 처음으로 혈족선택은 이기심에 따른다는 철학이 나온다. 도킨즈 교수는 이타심은 철저한 이기심에 속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비록 일견 보기에는 혈연선택이 이타심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지만, 생물학적 유전인자의 차원에서 보면 철저한 이기심의 발로다. 152

유전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매우 이기적이며 예외적으로 이타심을 보이는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 본성은 강력한 이기심과 약소한 이타심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주장이다:

유전적으로 성공하는 유전인자는 아주 이기적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인간도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우리의 이기적 목적이 제한된 이타심을 발휘할 때 달성될 수 있다. 예외적으로 그리고 제한된 경우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원해도 보편적인 사랑이나 일반적인 복지 같은 것은 우리의 유전인자가 지배하는 진화에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15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타심과 배려심을 윤리로 키워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는 이기심이 워낙 강력하기 때문이다. 강력한 이기심과 약소한 이타심이 공존하는 것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현실이다.

우리는 배려심과 이타심을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의 이기심이 지배하는 유전인자들이 다른 생물에서는 가능성이 없는 이기심을 억제하는 기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154

이타심은 사람과 동물에서 똑 같이 발생한다. 즉 자신을 희생하면서 혈족을 도와서 길게 보면 유전적으로 자신은 죽어도 자신을 형성하는 유전자를 번식시킨다는 논리다. 동물세계에서는 이러한 “상호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는 윤리적으로 좋은 행위로 찬양이 되지 않는다. 이타심은 이기심의 일종이다. 그러나 상호 이타주의가 인간사회에서만 찬양된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여 이타심을 자기희생만으로 취급하던 서양문명에서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상호 이타주의”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굴드(Stephen Jay Gould)교수는 다음과 같이 이를 설명한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역설적으로 이타심과 이기심이 모두 진화론에 따라 선택될 수 있다. 이타심은 개인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과 함께 상호의무관계를 설정하거나 또는 혈족을 도와 이타심 유전자를 복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155

그러므로 결국 상호 이타주의도 자기보존이라는 궁극적 목적에 소속된다. 이러한 명제 하에 인간 내부에는 강력한 이기심과 약소한 이타심이 공존하며 우리는 그러한 속성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굴드 교수는 이러한 공존이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의 게임을 벌리고 있다고 본다:

결국 이기심과 이타심 사이에서 동식물과 사람들은 “죄수의 딜레마”의 게임을 벌리고 있다. 그 목적은 자기보존이다. 156

이러한 게임을 사회전체로 확산시키면 번영하는 사회의 문명과 그렇지 못한 사회의 문명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을 알수 있다. 성공적인 사회는 유전자에 속한 상호 이타주의를 배움에 의하여 확산시키는 문명을 가지고 있다.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에는 상호 이타주의가 존재한다. 이 논리는 유전자에 속할 수도 있고 또 배움에 의하여 습득될 수도 있다. 157

우리는 이타심에 대하여 동서양문명이 어떻게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유교와 도교에서 상호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것, 즉 인간성 양육을 배움에 의한 최대 목표로 삶고 있다. 동양은 계명된 이기심으로 이타심을 평가하고 이에 대한 문명적 컨센서스를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철학 체계가 문명의 핵심으로 자리잡은 시기가 BC 4-5 세기였다. 동양에서 인성론이 확립괸 시점이다. 서양은 이기심과 이타심은 투쟁적으로 보고 종교의 힘을 빌려야 이타심을 인간에 불어넣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계시종교가 계몽시대를 거쳐 이신론에 이르면서 발전을 계속하여 최근에 이르러서 서양의 사상가들은 “종교적 윤리”을 떠나 자연적인 “계명된 이기심” 즉 “상호 이타주의”라는 철학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서양의 인성론은 동양의 인성론과의 최초의 합치점을 발견하게 된다.

3) 인간성 양육: 고자 성무선악론, 맹자 성선론, 순자 성악론

동서양의 사상가들이 인간본성을 연구할 때 그들은 각각 그들이 처한 동서양의 철학적 사유의 범위내에서 이를 검토하게 된다. 서양은 인간본성을 “존재론” 적으로 접근하는데, 인간은 神이 만들 때부터 변하지 않는 존재로 보고 접근한다. 동양은 “변화론” 적으로 접근하는데, 태어날 때 가지게 되는 인간본성은 같지만 그 범위내에서 변화해 나가게 되므로 이런 인간본성을 어떻게 관리하여 긍정적인 인간성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핵심이다. 서양은 인간성이 정해져 있으므로 법과 제도를 통하여 인간성을 통제한다는 접근법과 차이가 있다.

동양의 변화론은 동양 사유의 원천인 “항상 변하고 있는 자연”이라는 우주론에 기인한다. 동양의 인성론이 변화론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은 본능과 이성으로 구성된 같은 인간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태어나서 표현하는 방법은 항상 변하게 된다”. 동양의 성무선악설(고자), 성선설(맹자)과 성악설(순자)이 모두 이 체계를 따른다.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 인간본성을 인정하면서, 태어나서 변하는 표현 방법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순자가 이러한 변화론 적인 인성론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성인(聖人)도 본성에서는 일반 백성과 다름이 없다. 그들은 행동에서 차이가 있다. (순자 23:5)

맹자와 순자 모두 유가 사상가들이다. 공자가 이미 유사한 인성론을 펴면서 이들 철학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

인간본성으로 보면 모두가 비슷하다. 그러나 행동에서는 인간은 큰 차이를 보인다. (논어 17:2)

변화론을 따르는 동양의 인성론에서는 서양의 존재론적인 인간본성에 의한 사회계약론이 등장할 수가 없다. 홉스, 로크와 루소의 인성론은 인간은 그렇게 태여 났고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제도와 법률을 중시하는 사회계약론을 내세우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운 사회계약론에 의하여 선악적으로 인간을 평가하게 된다. 당연히 제도나 법률이 많아지고, 변호사의 역할이 커지며, 제도나 법률을 어기는 사람에 대한 제재가 많아질 수 밖에 없다. 서양에는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유능한 변호사가 등장한다. 동시에 법률을 정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 이들은 모두 선악론 체제안에서 움직인다.

동양 인성론은 인간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하는 데 대하여 성선, 성악, 백지론을 구분한다. 그러나 동양 인성론의 핵심은 그 테두리 안에서 생후 인간성을 양육하자는 데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제도나 법률이 아니라 윤리가 중심이 된다. 제도나 법률을 평가하는 변호사는 동양에서 19세기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동양에서는 윤리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며 그들의 사상은 음양론의 테두리를 따르게 된다.

고자, 맹자와 순자의 인성론은 인간은 인간본성은 가지고 태어났지만 태어나서 어떤 인간이 되는지 변화하는 인간성 부분에 집중하게 된다. 본인의 노력에 따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인간성을 가지는 사람과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성을 가지는 사람으로 변한다. 맹자의 성악설이나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은 착하다 거나 악하다는 존재론적인 설명이 아니다.158 숙명적으로 또 자연적으로 인간은 이렇게 되어있다 라는 표현일 뿐이다. 인간본성이 착한 것으로 변함없이 정해져 있다는 설명은 맹자 철학의 핵심이 아니다. 또한 인간본성이 악한 것으로 변함없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은 순자의 철학의 핵심이 아니다. 맹자나 순자는 인간본성이 선하거나 악하게 태어나거나 인간생활에 문제를 일으키게 되어있다고 본다. 선하게 태어나도 태어난 이후 사회 생활에서 자신을 잘 훈련하여 선한 부분을 키워 나가야 한다는 것이 맹자 철학의 핵심이다. 순자의 성악설도 악한 부분을 잘 훈련하여 윤리와 법을 지키도록 하자는 것이 순자 철학의 핵심이다. 인간성 양육이 목적이다.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은 윤리로 귀착하는 귀납이 중요하다. 서양의 존재론에서는 성선, 성악은 연역적인 불변의 중요성을 가진 점이 중요하다. 홉스의 성악설에서는 왕에게 개인이 권한을 양보하는 제도와 체제가 중요하고, 루소의 성선설에서는 일반의지를 확보하는 제도와 법을 만들자는데 집중해 있다. 그래서 서양 체제에서는 법과 제도로 성악, 성선의 존재론적인 인간본성을 규제해야 한다 데 핵심이 있다. 반면 동양의 변화론에서는 성선, 성악은 귀납적인 번화의 중요성을 가진다. 규범적인 법률이 아니라 설득형의 윤리가 중요해진다.

기록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BC 4세기에 고자(告子, 420-350 BC)가 동양에서 처음으로 인간본성에 대한 생각을 남겼다. 고자는 인간과 다른 동물이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식욕과 성욕, 두 가지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동물에도 선, 불선이 없고 인간에도 선, 불선이 없다는 주장이다. 성선설과 성악설을 모두 부정한다. 성무선악론(性無善惡論)을 주장한다:

고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과 불선(不善)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마치 물이 동서로 나뉘어 있지 않은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맹자 11-6)

고자의 이러한 인간본성에 대하여 사색한 책들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 맹자의 책에서 인용된 것이 우리가 아는 고자의 인간본성에 대한 모든 것이다. 맹자의 책 “맹자” 제6장 고자(告子)편에 인간본성에 관한 제반 설명이 들어있다. 고자의 성무선악론이라는 철학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나 로크의 백지론과 비슷하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아무도 고자의 성무선악론이라는 인간본성 주장을 발전시켜 자신들의 주장에 사용하지 않았다. 서양에서 백지론을 로크가 활용하였고, 또 20세기 이데올로기 시대에 광범위하게 활용된 것과 대조적이다. 고자의 성무선악론은 맹자와 순자의 성선, 성악론이 인간성을 양육하자는 변화론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진전한 것과 유사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고자 이후에는 성무선악론 보다는 성유선악론 쪽으로 방향이 정리된다.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로 나뉜다. 그러나 동양의 성선설과 성악설은 본성에 인간이 얽매여 있다는 존재론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은 본성이 어떻든 간에 인간성의 “양육”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는 변화론으로 접근한다. 인간성 양육을 최종 목적으로 삼은 점은 맹자와 순자에 차이가 없으며, 거슬러 올라가면 두 사람의 스승인 공자에게서도 똑 같이 핵심적인 목적으로 변함이 없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고자의 성무선악설도 변화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 처럼 인간성의 양육에 집중한다는 점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동양의 본성론은 생성(Becoming)론적이다.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이 모두 인간성의 양육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동양의 인간본성에 대한 종합적인 결론은 인간이 선악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성유선악론”(性有善惡說)로 정리된다. 인간이 “고정된 인간본성” (fixed human nature)를 가지고 태어났는지 하는 질문에 동양의 성유선악론의 답은 명확하다. 인간본성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모두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의 올드 브레인에 강력한 이기심과 약소한 이타심을 모두 가지고 태어난다. 동양은 음양처럼 이러한 인간은 두가지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태어난다.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본성이다. 태어난 후 뉴 브레인에서 이러한 음양적 인간본성을 관리하면서 인간성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핵심이다.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을 보면 그와 같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나쁜 성격을 가진 사람을 보면 자신을 돌아보고 그와 같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논어 4:17)

순자도 비슷한 의견을 표한다:

길거리의 사람도 성인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윤리와 투명한 법으로 그렇게 될 수 있다 (순자 23:11)

동양에서는 본성이 달라도 그 범위내에서 인간성의 양육이라는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는 데서는 일치한다. 그러나 서양의 본성론은 이미 규정한 목적으로 향하는데 쓰이게 된다. 곧 사회계약론에 적용된다. 서양의 성악설은 왕의 권위를 인정하는데 쓰였으며, 백지론은 자유주의를 신장하는데 쓰였고, 성선설은 인민주권을 지향하는데 쓰였다. 이렇게 동서양의 본성론이 그 목적이나 목표에서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의 본성론은 생성(Becoming)론 적으로 또 귀납적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서양의 인간본성은 존재(Being)론 적으로 또 연역적으로 볼 수 있다.

맹자(372-289 BC)는 고자의 주장과 달리 인간과 동물 간에 차이점이 있다고 규정했다. 사람은 물과 다르다. 인간은 동서가 아니라 상하로 나뉜다. 인간이 선-불선을 구분하지 않으면 인의(仁義)등 윤리가 무너지게 된다는 주장을 폈다:

사람에게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인(仁)의 싹이요,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싹이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싹이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은 지(知)의 싹이다. 사람에게는 이 네 가지 싹이 있으니, 이는 마치 우리에게 네 팔다리가 있는 것과 같다 (맹자 11-6)

이것이 맹자가 주장하는 성선설(性善說)의 요체다. 맹자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윤리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설명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고, 불행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올바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런 윤리는 교육 등 상황에 따라서 나타날 수도 있고 숨게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풍년과 흉년에 따라 농산물의 작황이 다르듯이 인간도 교육에 의하여 도덕성이 나타날 수 있고 숨어있을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맹자의 성선설의 결론은 자연이 풍년을 만나는 것처럼 인간을 잘 양육하자는 데 있다.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는 인간본성에 대하여 순자 제23장 성악론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순자의 성악설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은 태어나면서 그대로 두면 사회생활에 불편한 천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 선한 요소는 나중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본성만 따르고 감성대로만 한다면 서로 싸우고 빼앗고 하는 폭력사회가 되고 만다. 그래서 법과 윤리가 필요하다. 윤리와 법으로 사람들이 서로 양보하고 규범을 지켜서 안정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순자 23:1)

이것이 순자의 성악설의 요체이며 그 근본은 인간본성을 있는 그대로 자연적인 상태로 보는데 있다. 천성은 군자나 소인 모두 똑같이 피할 수 없이 인간으로 가지고 태어난다:

본성이란 타고 태어난 것이다. 본성은 배워서 바꿀 수도 없고, 일하여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윤리와 법은 성인(聖人)이 성취한 것이다. 이는 배워서 만든 것이며, 변화시켜 만든 것이다 (순자 23:5)

그래서 인간은 모두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고, 방종하면 사회적으로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탐욕을 따르는 성향은 군자와 소인 모두 가지고 태어 난다. 이를 양육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자데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 순자의 목표다. 순자의 성악설에는 인간성을 미워하고 인간본성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자연스럽게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이를 관리하여 인간성을 양육하여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되풀이하지만 맹자와 순자의 인성론의 중점은 성선, 성악이라는 존재론이 아니라 태어난 본성 테두리 안에서 변화론에 의하여 올바른 인간성을 양육하자는 데 있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본성을 인정하고, 그 범위내에서 윤리와 법률로 이를 관리하여 사회에 이롭게 하자는 인성론이다.

4) 본능과 이성으로 구성된 인성: 본능은 발광체, 이성은 반사체

서양 인성론은 인간의 생각하는 마음, 뉴 브레인이 결국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을 논의할 때 뉴 브레인과 올드 브레인의 역할에 오해를 할 소지가 큰 선언이다. 올드 브레인이 행동의 원천이고 뉴 브레인은 이를 조정하는 역할만 한다는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특히 인간 행동의 원천은 올드 브레인에서 만 나오기 때문에 뉴 브레인을 이것을 확대 또는 축소하는 조정 역할만 한다는 역할 분담을 생각하면 문제의 근원에 접할 수 있다.

뉴 브레인이 역사를 만들어 낸다고 하는 것은 이성-본능 면에서 본능의 역할을 이성이 모두 대체 할 수 있다는 불완전한 사상이다. 그러나 서양문명에서는 특히 이성, 즉 뉴 브레인이 자율성을 가지고 새로운 세상과 인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것에서 만, 즉 본능의 범위안에서 만, 인간의 가능성이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 서고자는 것, 즉 “정신능력”에만 집중하여 본능의 원천적인 역할을 저평가 하는 것이 서양문명의 본질이다. 본능을 무시하고 神이 준 “이성”에 모든 것을 걸고 이상향을 실천하고자 하는 모험을 하게 될 수 있다. 이런 현상이 실제 서양사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서양이 만들어낸 20세기 이데올로기 시대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인간 본성을 무시하는 상황이 극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윤리를 무시하는 비극을 일으키게 된다.

본능은 인간의 굴레(human bondage) 또는 기(氣)로 파악된다. 서양은 본능을 인간의 굴레로 파악하였다. 본능이 없으면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자유롭게 추구해 나갈 수 있는데 본능이 방해를 하고 있다고 보고 싶은 것이다. 인간은 본능이라는 굴레를 떠나 神과 같이 자유롭게 되는 것이 그리스 시대 이후 지금까지 서양인들의 꿈이었다. 인생의 목표도 행복해지는 것인데 서양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상태를 “神처럼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규정이었다. 실제로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神과 인간의 차이가 많지 않다고 여겼고 반신반인도 있었다. 한 때 로마시대에는 사람도 화장을 할 즈음 누군가가 영혼을 보았다고 증언하면 그 사람들은 모두 神으로 취급받았던 적이 있었다.

반면 동양문명에서는 자연을 창조한 神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자연의 道를 절대가치로 인정하는 불현론에 입각했다. 서양과는 달리 본능을 힘의 원천으로 파악하였다. 氣가 없으면 理가 작동할 수 없다. 본능이 인간의 행동의 원천임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그 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자는 철학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성은 인성내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되고, 이성이 자유롭게 본능을 벗어나 찾아 나설 수 있다는 것은 인성에 대한 기본적이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이성과 본능의 역할 분담에 동양과는 다른 접근을 한다. 神의 문명에서는 이성이 神이 특별히 인간에게 준 것이므로 본능을 무시하는 대립적 구분이 불가피하다. 이런 “이성상위, 본능하위”의 역할 분담이 서양문명의 주류를 이룬다. 2천년이 넘게 지속되어 왔다. 그런데 이성과 본능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동양문명에서 상정하는 인간 본성이며, 이러한 주장이 서양에도 등장한다. 물론 하나로 보자는 의견은16세기 스피노자의 주장이 가장 유명하다: “정신과 육체는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정신과 육체의 다른 표현인 “심리와 생리” 도 합일체로 보는 의견이 의학서적에서 계속 밝혀지고 있다: “심리와 생리는 불가분의 합일체이다”. 지적 능력 또한 인간의 생리작용·욕구·감정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심리와 생리도 불가분의 합일체 일뿐이다 159

다시 말하면 지적 능력은 생리작용·욕구·감정이 지향하는 것과 같은 방향, 곧 자기보존, 환경에의 적응이라는 것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는 열정을 인간의 굴레로 표현하면서 이성의 역할을 중요시했지만 동시에 인간본성에서 열정의 역할을 중요시 헸다.

인간은 언제나 열정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 윤리학, IV–Prop. IV).

열정이 인간의 본성이다. 열정에 의하여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계속 확인해 나간다… 인간은 이성의 권유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 윤리학, IV–Prop XVIII)

이성이 인성론의 원천이라는 주장은 소크라테스 이후, 기독교 교리와 융합하면서 중세를 지배하였고, 근대에 와서는 데카르트의 합리론으로 서양에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아 이성과 본능이 연계되어 있다는 중요한 과학적 발견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성이 아니라 본능이 행동의 원천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근세 서양철학은 소위 합리주의자들의 손에 있었다. 성경에 쓰여진 대로 神이 인간에게 준 이성이라는 원칙을 데카르트 같은 합리주의자가 종교를 떠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神을 떠나서 이성이 인간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습성을 서양에 만들었다. 이러한 합리주의자에 대한 반대 이론은 영국의 경험주의(Empiricism)에서 찾을 수 있다. 경험론자의 주장을 따르면 이성이 아니라 본능이 인간의 행동의 주체라는 생각이 등장한다. 흄(Hume)은 앞에서 밝힌 대로 “이성은 정열의 노예이며 그렇게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의 행동의 원천은 본능에서 유래한다. 인간의 진화과정을 살펴보면 이러한 분석에 좀더 큰 이해를 표시하게 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올드 브레인은 발광체, 뉴 브레인은 반사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윤리의 원천도 본능에서 나온다. 본능에 그러한 원천이 없다면 윤리가 생겨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성이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 라는 이론은 윤리의 원천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있다는 분석으로 설명된다. 이성은 반사체라는 생각은 여러 사상가들이 예지를 동원하여 내다보고 있었다. 스피노자, 데이비드 흄, 러셀 등이 그러한 예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흄의 윤리-감정론은 인성론에서 본질적으로 칸트의 윤리-이성론과 대칭을 이룬다. 흄의 윤리-감정론은 동서양 인성론과 맥을 같이 한다. 흄에게는 윤리가 감정의 반사체로 조성되는데 칸트에게서는 이성이 감정을 떠나면서 자체가 발광체 로서의 도덕과 윤리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칸트에게 서는 도덕이 본능에서 해방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 흄은 “본능 안에서의 자유”를 주장하고, 칸트는 “본능에서 떠난 자유”를 주장하게 된다. 실제로 복잡한 흄의 이론 보다도 칸트의 주장은 서양의 합리론의 지지를 받게 된다. 神을 이성이 대체하면서 도덕이 神이 준 것 처럼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의무로 인간속에 존재한다는 “코페르니쿠스 적” 혁명을 이루었다고 평가받게 된다.

흄은 스피노자 처럼 서양의 주요 사상가들로부터 변절자로 취급되기에 이르렀다. 흄의 종교에 관한 저서인 “종교와 미신에 대하여”는 흄의 생전에는 숨겨놓았다가 사후에 발간되었다. 흄은 종교적으로 부터도 “이단”이라는 의심을 받았고 이로 인해 철학 교수직을 획득하는데 실패하였다. 18세기 흄이 살던 시대는 독신죄(瀆神罪, blasphemy)가 인정되던 시기다. 1697년 20세의 학생이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그는 마호메트를 언급하고 삼위일체설 등 서양의 종교가 비상식적인 면이 있다고 친구에게 언급한 것이 알려지면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독신죄가 그의 죄목이었다.

이성이 별도로 두뇌속에 존재한다고 믿은 데카르트로부터 도덕의무론을 주장한 칸트에 이르기 까지 서양을 지배한 합리적 이성론자들의 영향 때문에 인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성이고 이성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고 착각하는 시기가 서양에 더욱 퍼지게 된다. 인성론에서 살펴볼 때 여기서 서양 철학자들이 저지른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성이 본능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라는 엄청난 착오를 하게 된다는 점이다. 서양의 합리론자들이 만들어낸 비극으로 이를 수 있는 너무 불합리한 착오다. 인성론면에서 우리가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받아들여야 할 원칙이 있다. “본능에 없는 것을 이성이 스스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본성에 의하면 이성이 아니라 본능이 윤리의 원천이 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윤리를 만들어 내는 단계에서는 중요한 이성의 역할이 있다. 이 단계에서 이성이 본능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다. 이성이 본능에 영향을 미치는 단계에서는 본능에 그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본능 중에 존재하는 이타심이다. 인성을 살펴볼 때 본능에는 강력한 이기심에 더하여 미약하지만 이타심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깊이 살펴보면 이러한 “강력한 이기심과 미약한 이타심의 조화”는 인간사회를 역동적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배경이다. 만약 인간이 강력한 이타심과 미약한 이기심이라는 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면, 인간사회는 천국 비슷하지만 철저하게 무미건조하고 인간이 왜 살아가야 하는지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된다. 결국 인간사회는 윤리면에서 이성을 통하여 이타심과 이기심 간의 균형을 이루자는 어렵고 힘든 그러나 역동적인 개인, 사회, 국가운영 차원에서 벌어지는 투쟁과 합의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유교의 군자 또는 스피노자식 현자는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다.

이렇게 분석하면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인간의 윤리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칸트 식 “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능과 이성을 함께 아우르는 인간본성”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윤리관이 본성에 의거하고 있다면 이런 메커니즘은 숙명처럼 인간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다. 동시에 인간의 이성은 본성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로서 죽는 순간까지 인성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철학, 즉 인간의 본성을 발광체로서 인정하면서 인간의 이성이 반사체로서 역할을 한다는 철학을 가지면, 인간-인간 간의 윤리관이 나갈 방향을 정해진다. 이것이 “숙명(본성)안의 자유(이성)”라는 개념이다. 즉 본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인간성 양육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인간성 양육은 완전히 인간 개인의 책임으로 돌아간다. 이런 책임은 죽을 때 까지 계속된다: “인생은 끝이 있으나 앎은 끝이 없다” 라는 동양철학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교리나 형이상학적 발견이나 이데올로기로 인간성 양육을 대체할 수 없다.

뉴 브레인이 본능을 없앨 수 없는 것처럼 그 역도 성립한다. 올드 브레인이 인간의 정신능력 자체를 생성하거나 소멸시킬 수는 없다. 인간이 다른 동물처럼 기본욕구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숙명적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정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숙명적이다. 그것을 없애거나 바꿀 수는 없다. 즉 인간은 본능적인 숙명의 범위내에서 정신능력의 자유를 누린다.

러셀은 이성과 정열을 갈등·대립 관계로 보아온 유럽문명의 중압감 속에서도 이성과 정열이 결국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짐작하고 있다:

욕망, 정서 또는 정열(어떤 말을 선택하든지 그것은 독자의 자유 지만)은 행동의 원칙으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성은 행동의 원천이 아니라 오직 그 조정자에 불과하다 160

인간의 존재는 결국 “숙명안에서의 자유”라는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다. 인간은 동물처럼 살 수 있는 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뉴 브레인을 가지고 태어난다. 여기서 인간은 두가지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다: 올드 브레인의 본능을 이기심에 가득한 탐욕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뉴 브레인이고, 본능에 있는 작은 이타심을 동원하여 위대한 인간성을 발휘하는 것도 뉴 브레인이다. 그러나 이기심이 이타심 보다 훨씬 강력하게 인간본성에 존재한다.

인간은 동정심보다도 복수심에 더 기울기 쉽다. (스피노자 윤리학, IV-Appendix-XIII)

이러한 인간본성의 설정을 도덕심을 발휘하여 탓 할 수는 없다. 왜냐 하면 이기심, 즉 욕망이 인간본성의 핵심이고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이고, 문명을 움직이는 힘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 즉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스피노자 윤리학, IV- Prop. IV, IV- Prop. IV, IV-Preface)

본능은 이성의 힘으로 어떤 방향으로 “표현”되는가 하는 것이 결정된다. ‘본능적 행위’와 ‘습득한 행위’도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서 둘 사이를 구분하는 것도 잘못된 것임이 의학에 의해 증명되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쌓아온 증거에 의하면 ‘본능적’ 행위를 ‘습득한’ 행위와 전혀 무관한 별개의 행위로 보는 것은 부정확하고 잘못된 것임이 드러나고 있다. 둘 사이는 서로 섞여 있다.161

본능적 행위와 습득한 행위를 구분하는 것이 부정확하다는 표현은 본능과 이성이 상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기심과 이타심의 갈등 속에서 인간은 이타심을 키워 나갈 자유를 가지고 있다. 반대로 인간은 이기심을 극도로 키워 나갈 수 도 있다. 인간은 “숙명적인 범위”를 인식하며, 그 범위 안에서 한껏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것이 그가 가진 자유의 전부이다. 이성이 본능을 무시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인간본성에 근거한 인간사가 역사에 그대로 표현되는 경우가 있다. 서양의 근세역사가 이를 보여준다. 서양에서 계몽시대와 이신론의 등장으로 서양 사람들 사이에 유신론에 대한 믿음이 모두 없어진 것이 아니다. 서양 사상가들 사이에 이신론이 널리 퍼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신론의 이성적 설득과 관계없이 유신론을 그대로 믿고 의지하고 있다. 종교는 종교에 담겨진 도그마를 배척하는, 다시 말하면, 성경이나 神의 말씀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과정을 거치고서도, 인간에게 필요한 요소로 남는다. 왜냐 하면 인간의 본성은 이성적이 아니라 심정적이고 본능적인 면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본능은 발광체, 이성은 반사체 라는 인성론을 받아들이면 종교의 필요성은 여전히 남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이 가진 지적 능력은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모순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유럽문화에서는 배격되었다. 그러나 빛이 입자·파동 두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이 증명된 것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순을 오히려 자연의 기본성질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원자보다 작은 물질단위는 어떤 때는 입자처럼, 어떤 때는 파동처럼 행동한다. 빛도 이러한 양면성을 보여준다.162 실제로 아인슈타인이 빛의 입자설을 증명함으로써 정신과 육체처럼 이원적이며 일원적인 것이 자연계에도 존재함이 증명되었다. 빛의 이중성은 모든 자연에 보편화되고 있는 좀더 깊고 중요한 이원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자연의 보편성인지도 모른다.

빛은 어떤 상황 아래에서는 입자의 흐름으로 행동하고 다른 상황에서는 파동으로 행동한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은 우리의 상식과는 일치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빛에 관한 실험결과와는 잘 일치한다.163

빛처럼 이원적이며 일원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와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육체와 영혼이 하나의 순수하고 근원적인 이원성을 이룩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이들이 오히려 여러 가지 가능한 분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가능적 분열이란 내가, 매우 부정확하기는 하나,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라고 일컬었던 양극성(분극성)을 통해서 현실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164

결국 사유의 측면에서 볼 때 자연에서 일원-이원성의 조화는 예외가 아니라 보편적 법칙으로 보아야 한다. 서양철학에서는 이를 모순으로 보았지만, 동양철학에서는 음양론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순의 ‘조화’가 자연의 내재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동양철학에서 보면 서양철학의 과도한 형이상학적 취향에 대하여 간단한 설명이 가능하다.

네오코르텍스와 림빅시스템으로 구성된 진화론적인 존재인 인간에게는 정신과 육체라는 분리(dichotomy)가 있을 수 없다. 정신만을 떼어서 독립된 실체로서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전제로 한 유럽의 거대한 형이상학적 연구는 구체성이 없어진다. 신학이나 형이상학은 초자연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인류에게는 부적당하다. 동양문명에 신학이나 형이상학적 취향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인류에게 그 정신은 그 모체인 광대하고 신비로운 대우주의 질서, 곧 자연의 질서를 음미하는 것이 그 기능이지 초자연적인 것을 꿈꾸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는 정신의 존재를 믿었고 실제로 송과선(pineal gland)이 정신 덩어리라고 주장했다.165 그러나 정신은 하나의 현상이지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다:

정신은 생물학적 기능의 한 측면, 심리적 측면, 일뿐이다. 정신을 육체와 병행하여 존재하는 별도의 형이상학적 실체로 취급할 수는 없다. 166

형이상학을 주무기로 한 서양의 철학은 소외된 인간의 것이다. 인간은 “정신적 육체적 실존체”(psychosomatic existence)이며, 이기적(理氣的) 존재인 것이다. 정신과 육체를 2천년 동안 대립시켜온 서양문명 때문에 서양인들에게는 정신-육체 관계가 모순, 갈등, 투쟁의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신학과 형이상학에서는 정신의 상징인 神이 모든 것을 결정하므로 인간은 아무런 자유를 가질 수 없다는 이론이 가능하다. 반대로 이신론에서 처럼 神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으니 인간의 이성이 모든 자유를 가지고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이론이 가능하다. 이 두가지 서양 근대사의 흐름이 서양 인성론에 숨겨진 근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성과 본능의 합일성을 주장하고, 발광체인 본능안에서 반사체인 이성의 조정 역할을 상정하면 “숙명안에서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이것이 동양 인성론의 흐름이다. 서양 문명과는 다른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제공하고 있다.

동양문명에서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서양문명에서는 인간은 자연위에 서는 초월적인 존재를 따라가고자 노력하는 존재다.

동서양 인성론은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에 답을 제공하고 있다. 여러가지 답이 제시되고 있지만 컨센서스가 없다. 인간은 본능과 이성의 결합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갖게 되면서 본능-이성으로 구성된 인간은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본능과 이성의 크기는 인간 각자 다르다. 이성은 “본능의 테두리 안에서만” 자유롭게 작동한다. 본능은 발광체, 이성은 반사체다. 선악론은 이성만의 판단이다. 본능에는 선악이 없다. 본능은 강력한 이기심과 약소한 이타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타심은 이기심의 희생이 아니라 계명된 이기심이다. 인간의 행동에 있어서 본능은 에너지의 원천이며 이성은 이를 관리한다.

  1. 144
  2. 145
  3. 146

    Mancur Olson, Power and Prosperity; Outgrowing Communist and Capitalist Dictatorship, Paper Books, 2000, p7

  4. 147

    Mancur Olson, “Dictatorship, Democracy, and Development,” The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87 (Sept. 1993): 568.

  5. 148

    Mancur Olson, Dictatorship, Democracy, and Development,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Vol. 87, No. 3 September 1993

    http://www.svt.ntnu.no/iss/Indra.de.Soysa/POL3503H05/olson.pdf

  6. 149

    Mancur Olson, “Dictatorship, Democracy, and Development,” The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87 (Sept. 1993) 574-575 쪽

  7. 150

    집단주의가 서양 민주시장경제를 위협하는 내용은 3장 2-3에 설명되어 있음.

  8. 151

    Antonio R. Damasio, Looking for Spinoza: Joy, Sorrow, and the Feeling Brain (Orlando, FL: Harcourt Brace, 2003), 171.

  9. 152
  10. 153

    Dawkins, The Selfish Gene: 30th Anniversary Edi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Kindle edition, 2.

  11. 154

    Ibid., 3.

  12. 155

    Gould, The Mismeasure of Man, 5744–48.

  13. 156

    Ibid., 202–03.

  14. 157

    Gould, Ever Since Darwin, 256–57.

  15. 158

    중국의 전국시대에는 서양종교의 선악의 개념이 아직 동양에 유입되기 전이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본성이 선악적으로 선하다가 아니라 좋다, 착하다 정도가 정답이다. 이를 서양의 선악개념을 도입하며 선을 악의 절대적인 반대개념으로 분석하기 시작하면 맹자의 생각을 잘못 읽게 된다. 순자의 성악설도 마찬가지다. 惡자는 악과 오 라는 두가지 읽는 방법이 있다. 순자의 인간본성에 대한 설명은 性惡說은 성악설이 아니라 성오설로 읽자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순자의 성악설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성오설이라는 표현 보다는 성악설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다.

  16. 159

    Noyes and Kolb, 앞의 책, p.15.

  17. 160

    Bertrand Russell, Human Society in Ethics and Politics, 金泰吉 역, 《인간사회질서론》, 박영사, p.9.

  18. 161

    Noyes and Kolb, 앞의 책, p.14.

  19. 162

    Fritjob Capra, The Tao of Physics, 앞의 책, p.55.

  20. 163

    Carl Sagan, Cosmos, 앞의 책, p.216.

  21. 164

    Carl Friedrich von Weizsäcker, 앞의 책, p.216.

  22. 165

    René Descartes, Discours de la Methode, Garnier-Flammarion, p.282.

  23. 166

    Noyes and Kolb, 앞의 책, p.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