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우리는 누구인가: 심신일체 (心身一體) vs 영육투쟁 (靈肉鬪爭) · 제3장

동서양의 인성론: 인성은 변화하는가 고정 되어있는가?

약 53분 · 주 21개

1) 서양 인성론: 변화하지 않은 인간본성

호모 사피엔스는 동양이던 서양이던 모두 같은 인간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정신과 본능으로 구성된 인간본성은 예측 가능한 시기에 변화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철학체계는 인간사에 접근해야 한다. 인간이 생각해낸 모든 철학체계는 결국 올바른 인간본성위에 세워졌는지 아니면 잘못된 인간본성위에 세워졌는지 하는 문제로 그 진위가 판가름이 난다.

동서양 문명은 인간본성을 어떻게 분석하여 왔는가? 인간본성은 철학적으로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또는 서양의 Tabula Rasa, 백지론) 세 가지로 구분된다. 이러한 획일적 구분은 간단한 장점이 있지만 동서양 인성론의 원천적인 차이점을 간과하고 있다. 인성론에 있어서 서양은 “창조된 것은 변하지 않는다” 라는 존재론(ontology)을 따르고, 동양은 “모든 것은 항상 변한다” 라는 변화론(transformationism)을 따른다. 서양이 본 인간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변하지 않는다. 존재론적인 인간본성에 따른 神과의 계약 또는 사회계약론이 서양의 인성론에는 필요하다. 동양이 본 인간개성은 “타고난 본성 범위내에서, 정신의 역할로 변화”한다. 사회계약이 아니라 변화론에 따른 인간개성 함양에 동양 인성론이 집중하게 된다.

서양의 성악설, 성선설, 그리고 백지론 모두 존재론을 따른다. 서양의 성악설(계시종교와 홉스)은 인간은 악하게 태어났고 그렇게 “존재”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 성악설에 의하면 인간은 악한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고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죽기 전까지 반성하고 회개하여야 하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생존을 위하여 선지자나 국왕에게 권리를 양보하여야 한다. 서양의 성선설(플라톤이나 루소)은 인간은 원래 선하게 태어났고 선한 인성은 변화하지 않는다. 선한 인성에 의거 인간은 진리를 탐구하고 발견하는 길로 갈 수 있다. 진리를 발견한자가 지도자가 되고 나머지 인간을 이끌어 나간다. 진정한 실체는 변하지 않는 본질인 “이데아”에 있으며 이를 발견한자가 지도자가 되고, 또는 개인적 이해관계를 넘어 공동체 전체의 공공선을 지향하는 “일반의지”를 찾아내자는 것이다. 서양의 백지론(아리스토텔레스와 로크)은 인간은 아무것도 없는 백지와 같이 태어나므로 교육에 의하여 모든 인간이 진리를 성취할 수 있다. 형상은 현실 속에 내재한다고 보면서 경험과 관찰을 통해 본질을 추구하자는 입장이다. 인간은 백지상태에서도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연권(생명, 자유, 재산)을 가지고 있으므로 정부는 이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과거에는 선악론에 기반한 인성론,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사회계약론과 연계된 인성론이 유행이었지만, 이제 적실성이 많이 상실되었다. 과거의 서양 인성론과 차원을 달리하는 자연철학 인성론이 최근에 서양에서 제기되었다. 올슨(Olson, 1932-1998) 교수가 리더십이 인간사회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귀납적 차원에서 분석하면서 인간본성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하고 있다. 올슨 교수가 제시하는 인성론은 동양의 인성론과 많은 부분에서 맥을 같이하고 있다. 올슨 교수의 인성론은, 존재론에 입각한 서양의 과거 인성론과는 다른, 변화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인성론: 종교적 성악론, 플라톤 성선론, 아리스토텔레스 백지론

서양에서는 인간 본성론은 오랫동안 종교의 교리를 따랐다. 종교에서는 인간본성을 성악설로 시작한다. 계시종교에서 인간은 神의 형상을 본떠서 神이 만들어 낸다. 기독교에서는 지상보다 훨씬 중요한 사후 세계에서 선한 사람은 천당에 가고 악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 중세 천 년 동안 교회의 성악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원죄론 철학 등으로 일부 수정되는 면도 있었지만 본질은 철저한 성악설에 기인한다. 성악설에서 본능은 인간의 구원을 방해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선악론은 비슷하게 묘사된다. 프로메테우스가 진흙으로 인간의 형태를 만들고 아테네 여신이 숨을 불어넣어 인간이 생겨났다. 그러나 최초의 여성인 판도라가 금지된 상자를 열면서 인간 사회의 선악이 시작되었다. 구약에서도 인간이 그리스 신화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믿었다. 전지전능한 神이 일주일에 걸쳐 지구와 하늘과 별을 만들었다. 이어서 神의 형상으로 진흙을 빚어 남자를 만들어 내고,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 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神의 명령을 어기고 금지된 선악과를 먹으면서 죄를 짓게 된다. 기독교의 선악과 라는 열매와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 상자가 악을 여는 근원이 된다.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원죄의식이 인간을 따라다니게 된다. 따라서 서양은 중세 까지는 원죄의식에 억눌려 인간본성에 대한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 했다.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며 곧 다가올 최후의 심판에 대한 대비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의 인간본성론에 대한 철학에도 기본적으로 선악론에 의거한 것이다. 그의 원죄론에 의하면 인간은 나쁜 욕망(hurtful desire)인 강력한 “욕정론”(concupiscence)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면 정신과 본능의 분리를 당연시하던 神의 문명에서, 본능은 규탄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조상이 저지른 원죄론과 인간이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나는 욕정론은 종교개혁 때도 그대로 살아남았다. 루터나 칼빈 등 종교개혁 지도자가 인간본성의 본질로 원죄론과 욕정론을 내세웠다. 어쨌든 원죄를 씻기 위하여 인간은 참회와 회개를 계속 해야 했고 그 일환으로 착한 일을 하여 천당에 가도록 해야 한다. 이런 원죄론이 천 년 이상 서양 세계를 휩쓸었다. 이러한 종교적 힘 때문에 서양에서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인간본성에 대하여 철학적 접근을 할 수 없었다.

근세 이전의 인성론에서 종교의 성악설에 대비되는 철학은 플라톤에게서 찾을 수 있다. 플라톤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떤 “본유관념”(Innatism)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인간이 진실을 찾는 본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의 성선설은 인간내부에 진실과 절대진리를 찾는 본유관념이 있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이를 위하여 플라톤은 영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앞서 본 대로 영혼의 눈만이 진리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영혼의 눈을 통하여 진리를 파악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혼과 본능을 구분하는 이원대립적 인성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해진 인간본성이 없다는 백지론을 폈다. “타불라 라사” 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타불라 라사는 라틴어로 Tabula rasa 로 쓰며,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깨끗한 “빈 석판” (blank slate)이라는 뜻이다. 우리 말로는 백지론이다. 결국 Tabula rasa는 인간본성을 다룰 때 인간은 아무런 인간본성이 없이 태어난다는 주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성이 정신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본능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신이 본능의 굴레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하여 인간을 이끌고 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형이상학의 출발이다. 이점은 동양 변화인성론과 출발점에서 차이가 있다. 동양의 변화인성론은 본능의 역할을 인정하면서, 정신의 역할에 따라 인간의 개성이 변화한다는 변화론이다. 서양의 백지론은 백지 상태가 본능의 능력을 무시하는 존재론적인 가치를 지닌다.

근대 인성론과 사회계약: 홉스 성악론, 로크 백지론, 루소 성선론

서양의 근대 인성론은 그리스의 인성론과 유사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지만, 사회계약을 동반한다는 것이 특색이다. 근대 사회에서 서양은 神의 율법 대신 정신에 의지하여 인성론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로 서양의 근대 인성론에서는 십계명을 대체할 사회계약을 염두에 두고 인간본성을 상정하게 되었다. 서양 종교에서 神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둘 사이에 맺어진 “계약”(covenant)이 중심이다: “이제 내가 계약을 맺는다” (출애굽기 34:10). 이 계약을 대체할 필요가 절실했다.

근세에 이르면서 서양에서는 이신론의 등장과 함께 인간의 정신이 神을 대신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서양에서 인간 본성의 토론과 사회계약론이 함께 등장한다. 종교에 의지한 神과 인간 간의 계약 대신 정신이 명령하는 “사회계약론”(social contract)이 등장하게 된다. 인간사이의 계약이 필요한데, 여기서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본성이 중요해진다. 인간본성에 따라 사회계약론의 내용이 변하기 때문이다. 神의 교리 대신 인간의 정신에 따라 왕이나 정부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회계약론이 나와야 한다.

사회계약론을 뒷받침하는 인성론이 함께 등장한다. 홉스(1588-1679), 로크 (1632-1704), 루소(1712-1778)의 인성론과 사회계약론이 서양을 대표한다. 서양 문명의 선악설은 인성에서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선하거나 악하거나 거기서 끝이다. 법률과 제도로 다스려야 한다. 인간은 악한 행동을 저질렀기 때문에 악한 인간으로 죽을 때까지 神에게 회개와 참회를 해야 한다. 神이 그 결과를 판단한다. 근대 정신시대에 돌입하여서 서양은 존재론적인 인성론의 기본을 그대로 유지한다. 홉스의 성악설에서도 악한 인성은 변하지 않는다. 악한 인간본성은 강력한 왕권을 인정하면서 개인의 안전을 보호하여야 한다는데 사용되었다. 로크는 선악이 아니라 백지론을 주장했다. 그의 백지론도 교육에 의하여 모두 자유를 옹호하는 선한 인간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선한 인간을 만드는 교육과 법률에 의지하면 된다. 루소의 성선설도 선한 인간개성은 변하지 않는다. 선한 인간 본성에 의지하여 사회계약을 이루어 거기에 의지하자는 것이다. 일반의지를 유효하게 만드는 법률과 제도를 만드는데 중점을 두게 된다.

홉스는 그의 사회계약론을 위하여 인간본성으로 성악론을 내세웠다. 홉스는 자연상태의 사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비참하고, 괴롭고, 잔인하고, 짧다” 라고 기술했다.305 인간은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런 인간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존재론을 따른다. 그가 1651년에 출간한 “리바이어던” (Leviathan)에서 악한 인간본성을 누누이 강조한다. 리바이어던 은 1651년에 출간되었다. 홉스는 1642-1651 동안 10년간 이어진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격렬한 영국 내전을 목격하고 그의 철학적 사상을 세웠다. 그는 투쟁속에서 사는 인간의 행동을 잘 관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회계약론은 악한 인성을 가진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의 악한 행동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백성이 왕으로부터 보호되는 이득을 얻고, 대신 자신의 권리의 일부를 왕에게 양보하고 충성한다는 것이다.

로크는 인간본성의 판단에서 홉스와 다르다. 로크는 인간은 본성이 없이 태어난다는 백지설을 주장하였다. 백지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 주장하였지만, 영국 경험주의 사상가 로크(1632-1704)가 재차 주장해서 서양에 다시 유행한 개념이다: 인간의 마음은 처음에는 아무 글자도 없는 백지와 같고, 그것을 채우는 것은 경험이다. 그러므로 로크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열에 아홉은 선하든 악하든, 쓸모가 있든 없든, 교육에 의해 지금의 그가 된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큰 차이를 만드는 것은 바로 교육이다.306

로크는 교육에 따라 인간은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 본성을 갖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일반 개인과 지도자 모두 자유를 존중하도록 가르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로크는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권력자를 제거할 수 있다는 저항권을 주장한다. 맹자 민본주의의 근간인 민귀군경(民貴君輕) 사상과 유사하다. 로크의 백지론은 존재론에 입각한 절대성을 강조하게 된다. 인간은 어디서 태어나든 생태적으로 자유주의 백지론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주장이다. 로크는 자유를 존중하는 정부가 자유를 존중하는 백성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로크의 사회계약론에서는 자유주의가 가장 중요한 기본이 된다. 루소의 사상도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자유를 개인의 가장 중요한 권리로 주장한다. 로크는 모두가 자유주의 사상을 획득하고 이에 의하여 사회를 설계할 수 있다는 사회계약론을 주장한다. 로크의 사상이 미국 건국과정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루소는 홉스와 로크 이후 새로운 사회계약론과 인성론을 제시한다. 루소는 홉스의 성악설과는 달리 성선설을 주장한다. 루소는 홉스와 스피노자를 사악한 인성을 주장했다고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원래 착하게 태어났다. 루소는 야생의 동물은 고귀한 품성과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동물이 가축화(domesticated) 되면서 그런 좋은 품성을 모두 버리고 연약하고 균형을 잃은 품성과 육체를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 인간도 원래는 “진지한 우정, 성실한 존경심, 완전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데 문명사회에서 살면서 이들이 “질투, 의심, 무관심, 두려움, 미움, 속임수” 로 변한다. 그래서 문명의 나쁜 영향을 제어하기 위하여 인간들은 정부를 세운다. 정부를 통하여 공동의 이득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루소는 “일반의지” (General will) 가 중요한데 이것은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원 전원의 이익을 대표하며, 항상 옳으며,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일반의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사회계약이 백성과 정부사이에 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루소의 인성론과 사회계약론은 당시에 서양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혁명에서 생긴 정부가 루소의 영향을 받았다. 자유, 평등, 박애 가 3대 목표가 된다.

올슨의 현대 인성론: 산적-주민 상호이익에서 리더십이 생성

이러한 서양의 사회계약론에 대하여 최근 서양에서 리더십의 형성에 대한 새로운 설명이 등장하고 있다. 서양의 인성론과 사회계약론은 서양 철학의 중심인 존재론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자연철학”에 근거한 인성론이 제기되고 있다. 올슨(Olson, 1932-1998) 교수의 이론이 이를 대표한다.

올슨의 인성론과 순자(荀子)의 인성론을 비교하면, 두 사람 모두 인간 본성을 이기적이고 욕망 중심으로 보고, 집단적 협력은 자연적으로 생기지 않으며, 외적요인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올슨은 인간은 사익을 우선시하는 존재인데 공익은 법률과 제도 같은 강제력이나 선택적인 인센티브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순자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익을 추구하는데 법률과 교육을 통해 공익을 추구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올슨은 20세기 현대 사람으로 경제면에 집중하였고, 순자는 고대 사람으로 윤리에 집중한면이 있다. 그러나 고대와 현대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상가는 인성면에서 유사한 견해를 가지고, 정치와 경제 측면에서 공익을 추구하는 인간개성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올슨의 인성론은 서양인성론중에서 처음으로 변화론을 주장한 측면이 특색이고, 동서양 인성론 비교에서 중요한 동서양의 합치점을 이룬다.

올슨은 전통적인 서양 사상가들이 집중한 당시 정치상황에 맞추어 추론한 인성론과 사회계약론을 멀리했다. 그리고 현실적인 자연철학에 입각하여 인간사회에서 리더십이 어떻게 발생하였는지 분석하고 있다. 올슨 교수는 지도자와 주민 사이에 합치되는 이익 때문에 정부가 생겼다고 본다.

종족 단위를 넘어서는 인간사회의 통치체제는 사회계약론이나 권한을 스스로 양보하는 그런 상황에서 조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폭력을 최대한 사용할 능력이 있는 자들 사이에서 합리적인 이익을 찾는 과정에서 조성된다.307

이는 자연적인 자기보존 원칙에 입각하고 있다. 동양의 인성론이 기초하는 자기보존 원칙과 맥을 같이한다. 동양문명에서 보면 정부는 사회계약이 아니라 결국 지배자과 피지배자의 상호이득의 합치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부구성 이후에도 지도자와 주민의 상호이득의 내용에 따라 정부가 유지되거나 약해져서 소멸하게 된다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은 지도자와 주민 모두 똑 같은 인간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러한 인간본성에서 생후 노력에 따라 상호이득을 추구하려는 사람과 자신의 이득만 취하려는 사람으로 나뉘는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지도자과 피지배자 사이에 끊임없이 계속되는 견제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도자와 주민의 “상호이익”(encompassing interest)이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동기라는 이론이다. 그의 이론은 인류의 사회 생활은 초기에 한 가지 행동원칙에 의해서 움직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것은 남의 것을 빼앗는 약탈(raid)이다. 올슨은 이들을 “이동산적” (roving bandit)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르고 보니 도적들 중에서 매년 수확한 것을 빼앗아 오는 것 보다 수확이 좋은 곳에 정착해서 매년 적절히 빼앗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는 자가 생겼다. 그래서 이들은 한 곳에 머무르는 “정착산적”(stationary bandit)이 된다.

정착산적이 되면서 이들은 주민들에게서 빼앗는 정도를 조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동산적처럼 모든 것을 다 빼앗는 것이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민들에게 일년 먹을 것과 다음 생산에 쓰일 물자를 남겨 놓고 빼앗는 것이 정착산적에게 도움이 된다. 그리고 식량의 증산을 위하여 도로, 저수지, 시장을 만들어주면 주민도 정착산적에게도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 나라를 오래 다스리는 자는 그 나라에 “상호이익”(encompassing interest)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나라에 공공재를 제공한다.308

이렇게 되면 정착산적은 강도에서 지도자가 된다. 올슨은 산적과 주민사이의 “상호이익”이 지도자를 탄생시켰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정착산적은 사슴을 포획하는 늑대가 아니다. 그보다는 목장에서 기르는 동물들이 잘 보호되고 물도 자유롭게 먹게 하는 목장 주인과 비슷하게 된다.309

올슨의 이런 통찰력은 1920년대에 중국 만주에서 군벌들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군벌들이 세력을 확보하는지 하는 상황을 살펴보다가 깨달은 것이다. 올슨은 만주 군벌들 사이의 투쟁에서 정착산적과 이동산적을 비교하였다. 이동산적이 패배하는 원인은 주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데 있었다. 정착산적이 주민의 지지를 받아서 “지도자”가 되면서 결국 승리하는 과정을 보고 그의 이론을 세웠다.310 바로 도적과 주민사이의 상호이익론이다. 올슨의 이론은 서양의 제반 사회계약론 보다 현실적이다. 동양 지도자의 “천명” (Mandate of Heaven)사상도 여기서 추출이 가능하다. 백성을 잘 살게 해주면 지도자에게 천명이 있는 것이고, 이에 실패하면 천명이 사라진다.

올슨의 탁월한 통찰력에서 우리는 인간본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점을 알 수 있다. 올슨 이론은 사회계약론을 주장하기 위하여 성악 또는 성선설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인간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지도자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살펴보자는 데서 출발한다. 자연철학적인 인성론에 근거한다. 근세의 서양 사상가들의 인성론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인성론을 구상하고 있다. 지도자나 주민이나 모두 자기이익을 챙기는 인간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고 이에 근거하여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인간본성인데 지도자는 상호이익을 위하여 주민에게 자기의 눈앞의 당장의 이익을 양보하고 지속가능한 이익을 취하는 자세를 발휘한다고 보는 것이다. 동양문명은 2천 5백 년 전에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상황을 목격하면서 인간본성을 파악하고 정치윤리 철학을 세웠다. 동양 사회에서 지도자가 출현하는 과정을 올슨 교수가 이동산적에서 정착산적이 출현하는 과정과 아주 유사한 상황으로 묘사했다.

작은 도적은 잡히고 말지만, 큰 도적은 제후가 된다. (장자, 도척 하편)

군대의 구성도 마찬가지 상호이익에서 발생한다. 지도자와 주민의 합의에 의해서다. 정착산적 즉 지도자는 자신과 주민 보호를 위하여 군대도 만든다. 주민들은 이러한 현명한 지도자를 만나면 계속 지도해 주기를 바라면서 “국왕 만세”(Long live the King!)을 희망하게 된다. 결국 왕과 주민은 서로의 이익을 위하여 정부라는 제도를 자연스럽게 만들게 된다. 그러나 정부가 구성되었다고 상황이 정리된 것이 아니다. 정부를 지도하는 자들과 주민들 사이에 상호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힘 겨룸은 계속된다. 이를 통하여 올슨은 정착산적과 주민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자연적인 정치경제학 이론을 개발하였다. 양쪽 간의 상호이득이 핵심이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의 본성이고, 양육에 의하여 정착산적과 주민 사이에 정신을 발휘하여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양보선을 찾는다. 양육이 없으면 누구나 타고 태어난 눈 앞의 이득만 챙기는 나쁜 정부와 나쁜 주민이 된다. 이점은 특히 지도자에게 문제가 된다. 실제로 서양의 경우 20세기까지 왕들이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 위하여 주민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거대한 세금을 거두는 미련한 왕들이 존재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전제적인 왕들은 자신의 군사적 목적을 위하여 최대한 세금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 서양 역사에서 최대한의 전제적 관할권을 가진 왕들을 생각해보라. 부르봉 왕조의 왕들(특히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왕 포함)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들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제국도 결국은 세금을 올리는 노력을 계속하였고 적어도 세입의 출처 한계까지 극대화했다.311

이점은 동양도 마찬가지다. 황제가 선정(善政)을 베풀지 못하면 주민의 이득을 버리고 결국 끝내 눈앞의 자신의 이득만 챙기는 상태가 조성된다. 천명이 사라지는 것이다. 동양에서 왕조가 교체될 때 새로운 왕조가 취한 첫번째 조치는 세금을 내리는 행위였다. 망하는 왕조는 이미 세금이나 착취의 한도를 한껏 높여 놓았기 때문이다. 세금을 내리는 것은 민심을 얻어 선정을 베풀고 천명을 확보하자는 생각이다. 올슨 교수의 인성론에 관한 이론은 종교의 원죄론이나 홉스, 로크, 루소의 인성론 이론 보다 훨씬 인성론의 본질에 가깝다. 그리고 인간본성, 정부의 구성과 구성이후의 과제에 관한 설명을 놀랍도록 잘 표현하고 있다.

인간본성에 내재한 이익으로 지도자와 참여자 간의 문제를 풀어나간 점은 동양의 인간본성론과 유사하다. 서양문명은 본질적으로 이론과 제도를 만들어내는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이를 기초로 하여 서양은 민주제도를 추진하였다. 그리고 합리적인 정권교체라는 제도를 만들어냈다. 동양이 실패한 제도면에서 서양은 성공하였고, 동양은 서양에서 이러한 제도를 배우고 있다. 문제는 정권교체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라는 제도에 있다. 서양의 모든 정치체제가 정당제도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다. 정당제도는 과연 제대로 작용할 것인가? 문제는 정당제도조차 여전히 인간본성에 매달려 있는 인간이 관리한다는 것이다. 서양의 정당이 국민의 이익 즉 공익과 정당의 승리 즉 사익이 배치되는 상황에서 사익을 희생하고 공익을 추구할 수 있는지 하는데 있다. 인간본성이 이를 허용할 것인가?

전쟁같이 모두가 공멸하는 상황에 처하기 전에는 인간본성은 공익보다는 사익을 취하게 마련이다. 2차 세계 대전이 끝 난지 오랜 지금, 현재 정당들은 공익 보다 사익을 취하는데 익숙해있다. 인간본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라든지 빈부격차심화 같은 범세계적인 문제는 공익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정당들은 이런 문제의 해결은 2차적인 문제로 보고 당장 차기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방안들 즉 사익을 앞세우는데 익숙해 있다. 여기에 올슨 교수가 파악한 민주제도의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는 왕이라든지 대통령, 수상 등 국가의 지도자가 국가재정을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는 좋은 제도이지만, 이익집단 들이 경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데는 별 효과가 없는 제도임을 지적하고 있다.

비록 민주주의는 그 지도자로 하여금 사회잉여자본을 자의적으로 빼내서 쓰는 것을 방지하는데 아주 유리한 위치에 있지만,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민주주의에서 특수 이익집단이 국가의 전체 경제정책을 좌지우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312

올슨은 개인들이 모인 집단은 사익을 위하여 일하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특수이익집단이 만드는 정치경제 정책은 공공의 이익을 해치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서양의 민주주의는 최고지도자가 공익을 해치는 것을 막는 데 성공적인 제도를 만들어내었으나 새로운 도전에 부딪쳐 있다. 서양의 민주주의는 국가주의(statism)에 대한 대비는 잘하고 있는데 특수 이익집단 즉 집단주의(tribalism)에 대한 대비는 현격히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현재 서양이 겪고 있는 정당과 자본을 다루는 비즈니스 사이의 결탁에 대한 탁견이다.313

2) 동양 인성론: 타고난 인간본성 속에서 변화하는 인간개성

동서양의 사상가들이 인간본성을 연구할 때 그들은 각각 그들이 처한 동서양의 철학적 사유의 범위내에서 이를 검토하게 된다. 서양은 인간본성을 “존재론” 적으로 접근한다. 인간본성은 神이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변하지 않는다. 서양은 모두 정해져 있는 인성론을 상정하기 때문에 종교의 율법, 즉 법률과 제도를 통하여 인간개성을 관리한다는 접근법을 취하게 된다. 여기서 정한 인성론은 神과의 계약 또는 사회계약을 틀로 내세우게 된다. 동양에서는 인성론이 “변화론”을 따른다. 인간은 같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범위내에서 태어난 이후 교육과 노력에 따라 인간개성이 변화한다는 것이 동양 인성론의 핵심이다. 이러한 인성론은 본능과 정신의 관계에서 본능을 발광체, 정신을 반사체로 분석하게 된다.314 즉, 인간개성은 태어난 후 음양처럼 “변화” 한다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神이 아니라 자연의 道를 믿었던 동양에서는 고대 시기에 神과 인간 간의 계약이 없었던 것처럼, 근대에도 사회계약설이 필요하지 않았다. 道라는 자연의 법칙에 기초한 동양의 인성론이 변함없이 고대와 현대에서 그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동양의 인성론은 변화론에 입각하고 있다. 상호 연계된 본능과 정신이 개인의 노력에 따라 무궁무진한 변화를 보여주는 개성을 창조해 나간다. 여기에 인간사회의 불규칙성과 매력이 있다. 서양 철학에서는 정신-본능의 관계에서 분리를 주장하는 이원론(dualism)이 있다. 데카르트의 주장이 그렇다. 이에 반대하는 일원론(monism)이 있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일원론이다. 서양식 이원론-일원론의 구분이다. 그러나 우리가 동양의 심신, 이기론의 내용을 분석하면, 이들은 심신일원론이나 심신이원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정신과 본능은 “보완과 조화를 이룬다”는 보완론이다.315 이는 스피노자의 정신-본능을 연계시키는 연계론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동양의 보완론은 심신일체론처럼 정신과 본능을 구분하지 않는다. 서양은 정신과 육체의 관계를 “분리냐, 동일성이냐”로 논쟁했지만, 동양은 애초에 분리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보완론”을 주장했다.

동양의 인간개성함양 vs 서양의 사회계약이론

서양의 사회계약론은 천 년 이상 서양세계를 지배해온 神과 인간 간의 “계약”론에 지배된 서양인들이 창안해 낸 것이다. 神의 문명에 지배되어 있는 서양사람들을 위한 노력이다. 서양의 법률과 제도를 중시하면서 사회계약론에서도 도움을 받아 지도자의 민주적 교체 제도를 확립한 측면은 인류사에서 아주 중요한 진전이다. 이점은 동양에서 배울 점이다. 그러나 동양 문명에서 보면 사회계약이론의 기초가 된 “서양의 인간본성론”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홉스의 성악론은 지도자가 왜 질서를 유지하여야 하는지 설명이 부족하다. 지도자는 성악론의 예외에 해당하는지, 또는 지도자만 神 또는 정신에 의하여 이타심을 가지게 되는지 설명이 없다. 로크의 백지론은 정신이 반사체가 아니라 발광체로서 본능에서 해방된다는 오류내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자유를 가르치면 모든 사람이 수용하는 사회질서가 된다는 백지론은 현실성이 없다. 루소의 성선설은 인간이 아니라 문명에서 문제를 찾고 거꾸로 인간본성은 선하다고 유추하고 있다. 그런데 문명도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선한 인간본성에서 나쁜 문명이 나왔는지에 설명을 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홉스는 전쟁과 극단적인 투쟁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자라나면서 인간본성이 악하게 나타나는 것을 정상적인 인성론으로 오판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서양의 마키아벨리(1469–1527)와 한비자(280–233 BC)가 바로 홉스처럼 전쟁과 투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일생을 살면서 홉스와 비슷한 인간은 악하다는 인성론을 설립하고 이에 따라 그들의 현실정치(Realpolitik)론을 정립한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본성에 의거하여 홉스는 무질서속에서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그러나 평화시에는 적용되기 힘든, 사회계약론을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

로크의 백지론은 인간본성을 부인한다. 교육에 의하여 사람이 이루어진다는 이론은 교육을 중시하는데 기여한 바 있다. 동시에 도그마적인 교리에 현혹될 수 있다는 아주 위험한 길을 열어 놓는다. 백지론에 의하면 인간은 본성에서 자유롭다. 본성이 없다고 보면 인간은 “아무것이나 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 미래를 위하여 또 가상의 유토피아를 위하여 도그마적인 교리로 교육하면 인간을 윤리를 무시하는 괴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교육이나 교리를 누가 주관하고 훈련을 시키느냐가 결과를 예단한다. 로크와 유교 모두 교육을 중시한다. 그러나 서양의 타불라 라사 식 교육과 동양의 유교의 교육이 인성론에서 기초가 아주 다른 점을 인식해야 한다. 서양은 “타불라 라사” 식 인간은 본성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교육과 훈련에 의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동양은 본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본성의 범위내에서 윤리와 교육에 의해 사람을 사람 되게 만들 수 있다는 인간개성 양육에 집중한다고 주장한다. 본성의 범위 내에서 개성의 교육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동양의 교육은 윤리의 원칙에 반할 수 가 없다. 그러나 로크의 인간본성을 인정하지 않는 성무선악론(性無善惡論)은 윤리를 초월 또는 배반하는 사상을 수립할 수 있게 한다.

루소의 성선설은 기독교의 성악론에 대비되는 혁명적인 인성론이다. 서양 철학체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성선설과 일반의지에 대한 확신은 근거가 약하다. 루소의 성선설에 기인한 일반의지가 항상 옳을 수 있다는 확신은 근거가 없는 확신이다. 이러한 “확신”은 민주정부를 구성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독재체제를 정당화해주는데 악용되었다. 실제로 1789프랑스혁명은 로베스피에르 등이 가지고 있었던 초기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공포정치로 막을 내렸다. 20세기 이데올로기 시대에도 파시즘, 코뮤니즘의 독재정권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정치가 모두 “일반의지”를 반영한다고 주장하였다. 로크와 루소의 인성론과 사회계약론에 힘입어 서양 문명에서는 개인의 자유가 특히 중요해진다. “자유 아니면 죽음”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를 외친 패트릭 헨리(1736-1799)의 주장처럼, 자유가 마치 절대적인 모럴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결국 자기보존이라는 더 근본적인 명제 앞에서 힘을 잃게 된다. 앞서 본 영국의 브렉시트가 그 예다. 영국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다른 서양 국가들은 상황이 어려워지면 국가와 국민 보존을 위하여 자유나 인권 보다 더 중요한 자기보존원칙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자기보존 원칙이 최근 급격히 서양에서 힘을 얻고 있다. 자유, 평등, 박애는 중요한 선언이다. 가급적 이를 지켜야 사회나 국가가 건전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정신의 창조물이다. 결국 상황이 변해가면 이들 원칙을 절대적 명제로 지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본능과 타협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정신과 본능의 관계에서 본능이 행동의 원천이고, 정신은 본능에 새겨진 테두리내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

서양의 “사회계약이론” 대신, 동양은 “인간개성함양론”을 제시하고 있다. 동서양이 인성론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상이한 방향의 설정이 가능하다. 인간개성을 함양하는 인성론에서는 어떻게 본능과 정신을 분석하고, 그 연계 관계를 상정하고 있는가? 뉴 브레인이 본능을 없앨 수 없는 것처럼 그 역도 성립한다. 올드 브레인이 인간의 정신능력 자체를 생성하거나 소멸시킬 수는 없다. 인간이 다른 동물처럼 기본욕구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숙명적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정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숙명적이다. 그것을 없애거나 바꿀 수는 없다. 러셀은 정신과 정열을 갈등·대립 관계로 보아온 서양문명의 중압감 속에서도 정신과 정열이 결국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짐작하고 있다:

욕망, 정서 또는 정열(어떤 말을 선택하든지 그것은 독자의 자유 지만)은 행동의 원칙으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정신은 행동의 원천이 아니라 오직 그 조정자에 불과하다.316

인간의 존재는 결국 “숙명 안에서의 자유”라는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다. 인간은 동물처럼 살 수 있는 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뉴 브레인을 가지고 태어난다. 여기서 인간은 두 가지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다: 올드 브레인의 본능을 이기심에 가득한 탐욕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뉴 브레인이고, 본능에 있는 작은 이타심을 동원하여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인간개성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것도 뉴 브레인이다. 그러나 이기심이 이타심 보다 훨씬 강력하게 인간본성에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동정심보다도 복수심에 더 기울기 쉽다. (스피노자 윤리학, IV-Appendix-XIII)

이러한 인간본성의 설정을 도덕심을 발휘하여 탓 할 수는 없다. 왜냐 하면 이기심, 즉 욕망이 인간본성의 핵심이고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이고, 문명을 움직이는 힘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 즉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다. (스피노자 윤리학, IV–Prop. XVIII 증명; III, 감정의 정의 1)

그러나 본능은 정신의 힘으로 어떤 방향으로 “표현”되는가 라는 “인간개성”을 결정하는 힘이 된다. 앞서 2부 2장에서 보았듯이, 본능적 행위와 습득한 행위를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다.

본능적 행위와 습득한 행위를 구분하는 것이 부정확하다는 표현은 본능과 정신이 상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나타낸다. 윤리적으로 표현하면, 이기심과 이타심의 갈등 속에서 인간은 이타심을 키워 나갈 수 있다. 반대로 인간은 이기심을 극도로 키워 나갈 수도 있다. 정신이 본능을 무시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인간본성에 근거한 인간사가, 역사에 그대로 표현되는 경우가 있다. 서양의 근세역사가 이를 보여준다. 서양에서 계몽시대와 이신론의 등장으로 서양 사람들 사이에 유신론에 대한 믿음이 모두 없어진 것이 아니다. 서양 사상가들 사이에 이신론이 널리 퍼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신론의 정신적 설득과 관계없이 유신론을 그대로 믿고 의지하고 있다. 종교는 종교에 담긴 도그마를 배척하는, 다시 말하면, 성경이나 神의 말씀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과정을 거치고서도 인간에게 필요한 요소로 남는다. 왜냐 하면 인간의 본성은 정신적이 아니라 심정적이고 본능적인 면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본능은 발광체, 정신은 반사체 라는 인성론을 받아들이면 종교의 필요성은 여전히 남게 된다.

이러한 “심정적” 현상은 인간이 가진 지적 능력은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모순”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모순은 근대 서양문화에서 오랫동안 배격되었다. 고전물리학이 이러한 모순을 배격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앞서 본 빛의 입자·파동 이중성처럼, 모순을 오히려 자연의 기본성질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원자보다 작은 물질단위는 어떤 때는 입자처럼, 어떤 때는 파동처럼 행동한다. 빛도 이러한 양면성을 보여준다.317 실제로 아인슈타인이 빛의 입자설을 증명함으로써 정신과 육체처럼 이원적이며 일원적인 것이 자연계에도 존재함이 증명되었다. 빛의 이중성은 모든 자연에 보편화되고 있는 좀더 깊고 중요한 이원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자연의 보편성인지도 모른다.

빛은 어떤 상황 아래에서는 입자의 흐름으로 행동하고 다른 상황에서는 파동으로 행동한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은 우리의 상식과는 일치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빛에 관한 실험결과와는 잘 일치한다.318

빛처럼 이원적이며 일원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와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육체와 영혼이 하나의 순수하고 근원적인 이원성을 이룩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이들이 오히려 여러 가지 가능한 분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가능적 분열이란 내가, 매우 부정확하기는 하나,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라고 일컬었던 양극성(분극성)을 통해서 현실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319

결국 사유의 측면에서 볼 때 자연에서 일원-이원성의 조화는 예외가 아니라 보편적 법칙으로 보아야 한다. 서양철학에서는 이를 모순으로 보았지만, 동양철학에서는 음양론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순의 조화 내지 보완이 자연에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본능은 발광체, 정신은 반사체

동양의 인성론에서 본능-정신의 역할을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한 것은 이율곡이다. “모든 현상은 기(氣, 본능)가 발동하고, 이(理, 정신)가 그것을 타고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이와 거의 같은 인성론은 서양에서 거의 3세기 후에 나타난다. 러셀이 이러한 인성론을 표현했다. 그는 흄의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또 노예이기만 해야 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이성은 창조하는 힘이라기보다 조화시키고 통제하는 힘이다”라고 표현했다.320 프로이트도 유사한 인성론을 가지고 있었다. 정신(ego)은 본능(id)이라는 말의 월등한 힘을 고삐로 제어해야 하는 기수와 같지만,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종종 말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말을 몰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본성은 타고날 때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속에서 인간개성이 변하는 것이다.

이는 본능이 인간의 행동에서 발광체의 역할을 하고, 정신은 이것을 받아서 반사체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321 동양 인성론에서 핵심으로 생각하는 인간개성은 이렇게 본능과 정신의 역할이 연계적으로 활동하여 생성된다. 본능-발광체, 정신-반사체의 역할분담은 현대 의학이 계속 밝혀내고 있는 과학적 사실과도 부합된다. 현대 의학도 해부학적으로 유사한 표현을 하고 있다. “뉴 브레인 (정신)은 마치 기수가 고삐 없이 말 위에 앉아 있듯이, 림빅시스템(본능)을 타고 앉아 있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서양 인성론은 인간의 생각하는 마음, 뉴 브레인이 결국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을 논의할 때 뉴 브레인과 올드 브레인의 역할에 오해를 할 소지가 큰 선언이다. 올드 브레인이 행동의 원천이고 뉴 브레인은 이를 조정하는 역할만 한다는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특히 인간 행동의 원천은 올드 브레인에서 만 나오기 때문에 뉴 브레인을 이것을 확대 또는 축소하는 조정 역할만 한다는 역할 분담을 생각하면 문제의 근원에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서양문명에서는 특히 정신, 즉 뉴 브레인이 자율성을 가지고 새로운 세상과 인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것에서 만, 즉 본능의 범위안에서 만, 인간의 가능성이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 서고자는 것, 즉 “정신능력”에만 집중하여 본능의 원천적인 역할을 저평가 하는 것이 서양문명의 본질이다. 본능을 무시하고 “神이 인간에게만 준 정신”에 모든 것을 걸고 이상향을 실천하고자 하는 모험을 하게 될 수 있다. 이런 현상이 실제 서양사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서양이 만들어낸 20세기 이데올로기 시대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인간 본성을 무시하는 상황이 극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쉽게 윤리를 무시하는 비극을 일으키게 된다.

본능은 서양에서는 인간의 굴레(human bondage), 동양에서는 기(氣)로 파악된다. 서양은 본능을 인간의 굴레로 파악할 경우 본능이 없으면 정신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추구해 나갈 수 있다고 보고 싶은 것이다. 인간은 본능이라는 굴레를 떠나 神과 같이 자유롭게 되는 것이 그리스 시대 이후 지금까지 서양인들의 꿈이었다. 인생의 목표도 행복해지는 것인데 서양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행복한 상태를 “神처럼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실제로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神과 인간의 차이가 많지 않다고 여겼고, 반신반인도 있었다. 한 때 로마시대에는 사람도 화장을 할 즈음 누군가가 영혼을 보았다고 증언하면 그 사람들은 모두 神으로 취급받았던 적이 있었다.

반면 동양문명에서는 자연을 창조한 神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자연 즉 자연의 道를 절대가치로 인정하는 철학에 입각했다. 동양의 자연철학에서는 서양과는 달리 본능을 힘의 원천으로 파악하였다. 氣가 없으면 理가 작동할 수 없다. 본능이 인간의 행동의 원천임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그 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자는 철학이다. 그럼으로써 인간개성은 인성내부에서만 즉 본능의 범위내에서만 정신의 역할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정신이 자유롭게 본능을 벗어나 이상향을 찾아 나설 수 있다는 것은 인성에 대한 기본적인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정신과 본능의 역할 분담에 동양과는 다른 접근을 한다. 神의 문명에서는 정신이 神이 특별히 인간에게 준 것이므로 본능을 무시하는 대립적 구분이 불가피하다. 이런 “정신상위, 본능하위”의 역할 분담이 서양문명의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 정신과 본능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동양문명에서 상정하는 인간 본성이며, 이러한 주장이 서양에도 등장한다. 물론 하나로 보자는 의견은 앞서 본 17세기 스피노자의 주장이 가장 유명하다. 정신과 육체의 다른 표현인 “심리와 생리” 도 합일체로 보는 의견이 의학서적에서 계속 밝혀지고 있다: “심리와 생리는 불가분의 합일체이다”. 앞서 말했듯 지적 능력도 생리작용·욕구·감정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본능과 함께 인간에게는 정신의 역할이 있다. 인간이 정신을 활용하지 못할 경우 본능의 노예처럼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인간의 굴레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인간은 언제나 열정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 윤리학, IV–Prop. IV).

스피노자는 인간본성에서 열정의 핵심적인 역할을 중요시했지만, 동시에 정신이 열정과 관련하여 할 수 있는 역할을 중요시했다. 정신의 역할이 있지만, 인간은 정신의 권유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분석했다.

열정이 인간의 본성이다. 열정에 의하여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계속 확인해 나간다… 인간은 정신의 권유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 윤리학, IV–Prop XVIII)

이러한 스피노자의 열정-정신 연계를 주장하는 현실론과는 다르게 서양 문명은 정신의 역할을 극대화하는데 익숙하다. 정신이 인성론의 원천이라는 주장은 소크라테스 이후, 기독교 교리와 융합하면서 중세를 지배하였고, 근대에 와서는 데카르트의 합리론으로 서양에서 위세를 떨쳤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정신이 전부라는 이데올로기 적인 주장이 가능하다. 근세 서양철학은 소위 합리주의자들의 손에 있었다. 성경에 쓰여진 대로 神이 인간에게 준 정신이라는 원칙을 데카르트 같은 합리주의자가 종교를 떠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神을 떠나서 정신이 인간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습성을 서양에 만들었다.

이러한 합리주의자에 대한 반대 이론은 영국의 경험주의(Empiricism)에서 찾을 수 있다. 경험론자의 주장을 따르면 정신이 아니라 본능이 인간의 행동의 주체라는 생각이 등장한다. 흄(Hume)은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또 노예이기만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의 행동의 원천은 본능에서 유래한다. 인간의 진화과정을 살펴보면 이러한 분석에 좀더 큰 이해를 표시하게 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올드 브레인은 발광체, 뉴 브레인은 반사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윤리의 원천도 본능에서 나온다. 본능에 그러한 원천이 없다면 윤리가 생겨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이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 라는 이론은 윤리의 원천은 정신이 아니라 감정에 있다는 분석으로 설명된다. 정신은 반사체라는 생각은 여러 사상가들이 예지를 동원하여 내다보고 있었다. 스피노자, 데이비드 흄, 러셀 등이 그러한 예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동시에 현대에 와서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아 정신과 본능이 연계되어 있다는 중요한 과학적 발견이 계속되고 있다.

흄의 윤리-감정론은 인성론에서 본질적으로 칸트의 윤리-정신론과 대칭을 이룬다. 흄의 윤리-감정론은 동서양 인성론과 맥을 같이 한다. 흄에게는 윤리가 감정의 반사체로 조성되는데 칸트에게서는 정신이 감정을 떠나면서 자체가 발광체 로서의 도덕과 윤리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칸트에게 서는 도덕이 본능에서 해방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 흄은 “본능 안에서의 자유”를 주장하고, 칸트는 “본능에서 떠난 자유”를 주장하게 된다. 실제로 복잡한 흄의 이론 보다도 칸트의 주장은 서양의 합리론의 지지를 받게 된다. 칸트는, 神을 정신이 대체하면서, 도덕은 정신에 의하여 神이 준 것처럼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의무로 인간속에 존재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서양의 합리론자들로 부터 “코페르니쿠스 적” 혁명을 이루었다고 평가받게 된다.

흄은 서양의 주요 사상가들로부터 변절자로 취급되기에 이르렀다. 스피노자와 비슷한 처지다. 앞서 말했듯 흄은 “이단”이라는 의심을 받아 교수직을 얻지 못했고, 종교에 관한 저서도 사후에야 발간되었다. 18세기 흄이 살던 시대는 독신죄(瀆神罪, blasphemy)가 인정되던 시기다. 흄이 태어나기 14년 전인 1697년에는 에든버러에서 20세의 학생 토머스 에이컨헤드(Thomas Aikenhead)가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그는 마호메트를 언급하고, 삼위일체설 등 서양의 종교가 비상식적인 면이 있다고 친구에게 언급한 것이 알려지면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독신죄가 그의 죄목이었다. 흄의 본능은 발광체, 정신은 반사체라는 주장은 당시 아직도 건재하던 정신을 중시하던 신본주의 사상에서 용납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변화 인성론: 고자 성무선악론, 맹자 성선론, 순자 성악론

동양의 변화론은 동양 사유의 원리인 “항상 변하고 있는 자연”이라는 우주론에 기인한다. 동양의 인성론이 변화론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은 본능과 정신으로 구성된 같은 인간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태어나서 표현하는 행동, 즉 인간개성은 다르다”. 동양의 성무선악설(고자), 성선설(맹자)과 성악설(순자)이 모두 이 체계를 따른다.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 인간본성을 인정하면서, 태어나서 변하는 인간개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수양과 교육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인성론은 변화론이라는 자연철학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동양 인성론은 종교와 결합시키지도 않았고 사회계약론과도 연계시키지도 않았기 때문에 서양의 고대, 근대 인성론과는 달리 한 가지 인성론이 고대부터 현대까지 계속되는 지속력을 가진다.

고자(告子, 420-350 BC)는 맹자와 논쟁하며 인간본성에 대한 생각을 남겼다. 고자는 인간과 다른 동물이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식욕과 성욕, 두 가지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동물에도 선, 불선이 없고 인간에도 선, 불선이 없다는 주장이다. 성선설과 성악설을 모두 부정한다. 성무선악론(性無善惡論)을 주장한다:

고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善)과 불선(不善)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마치 물이 동서로 나뉘어 있지 않은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맹자 11-2)

고자의 이러한 인간본성에 대하여 사색한 책들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 맹자의 책에서 인용된 것이 우리가 아는 고자의 인간본성에 대한 모든 것이다. 맹자의 책 “맹자” 제6장 고자(告子)편에 인간본성에 관한 제반 설명이 들어있다. 고자의 성무선악론(性無善惡論)이라는 철학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나 로크의 백지론과 비슷하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아무도 고자의 성무선악론이라는 인간본성에 관한 주장을 발전시켜 자신들의 사회개혁론에 사용하지 않았다. 고자의 성무선악론이 존재론이 아니라 동양의 변화론을 따랐다. 그 경우 고자도 인간본성에 의하여 선악론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이후 변하는 인간개성에서 양육에 중점을 두자는 인성론을 주장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점이 서양의 백지론과 고자의 성무선악론 철학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존재론과 변화론의 차이다.

고자 이후에는 사상가들의 사유가 성무선악론 보다는 성유선악론 쪽으로 방향이 정리된다.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로 나뉜다. 그러나 동양의 성선설과 성악설은 본성에 인간이 얽매여 있다는 존재론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은 본성이 어떻든 간에 인간개성의 “양육”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는 변화론으로 접근한다. 인간개성 양육을 최종 목적으로 삼은 점은 맹자와 순자에 차이가 없으며, 거슬러 올라가면 두 사람의 스승인 공자에게서도 똑 같이 핵심적인 목적으로 변함이 없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고자의 성무선악설도 변화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처럼 인간개성의 양육에 집중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맹자(372-289 BC)는 고자의 주장과 달리 인간과 동물 간에 차이점이 있다고 규정했다. 사람은 물과 다르다. 인간은 동서가 아니라 상하로 나뉜다. 인간이 선-불선을 구분하지 않으면 인의(仁義)등 윤리가 무너지게 된다는 주장을 폈다:

사람에게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인(仁)의 싹이요,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싹이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싹이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은 지(知)의 싹이다. 사람에게는 이 네 가지 싹이 있으니, 이는 마치 우리에게 네 팔다리가 있는 것과 같다 (맹자 3-6)

이것이 맹자가 주장하는 성선설(性善說)의 요체다. 인의예지는 측은지심(불쌍히 여기는 마음), 수오지심(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지심(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 네 가지 마음에서 발현한다고 설명했다. 서양의 루소도 성선설을 주장했지만 그는 인간이 잘못되는 문제의 근원을 문명이나 제도에서 찾았고 사회개혁을 통하여 이를 고치고자 했다. “인간은 본래 선하게 태어났다. 그러나 사회가 인간을 타락시켰다” 라고 주장했다. 루소가 외부에서 문제를 찾고자 했다면 맹자는 내부에서 문제를 찾았다. 맹자는 성선설에 대한 방해는 개인의 외부환경이나 교육의 부족에서 보고 노력과 수양에서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맹자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윤리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설명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고, 불행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올바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런 윤리는 교육 등 상황에 따라서 나타날 수도 있고 숨게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풍년과 흉년에 따라 농산물의 작황이 다르듯이 인간도 교육에 의하여 도덕성이 나타날 수 있고 숨어있을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맹자의 성선설의 결론은 자연이 풍년을 만나는 것처럼 인간을 잘 양육하자는 데 있다.

순자(310-235 BC)는 자신의 저서 순자 제23장 성악론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순자의 성악설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은 태어나면서 그대로 두면 사회생활에 불편한 천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 선한 요소는 나중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본성만 따르고 감성대로만 한다면 서로 싸우고 빼앗고 하는 폭력사회가 되고 만다. 그래서 법과 윤리가 필요하다. 윤리와 법으로 사람들이 서로 양보하고 규범을 지켜서 안정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순자 23:1)

이것이 순자의 성악설의 요체이며 그 근본은 인간본성을 있는 그대로 자연적인 상태로 보는데 있다. 천성은 군자나 소인 모두 똑같이 피할 수 없이 인간으로 가지고 태어난다:

본성이란 타고 태어난 것이다. 본성은 배워서 바꿀 수도 없고, 일하여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윤리와 법은 성인(聖人)이 성취한 것이다. 이는 배워서 만든 것이며, 변화시켜 만든 것이다 (순자 23:5)

그래서 인간은 모두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고, 방종하면 사회적으로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탐욕을 따르는 성향은 군자와 소인 모두 가지고 태어난다. 이를 양육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 순자의 목표다. 서양의 홉스는 성악설을 주장하면서 인간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싸우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라는 표현은 라틴어 격언 “Homo homini lupus est” 에서 유래한다. 이는 고대 로마 시대의 극작가 플라우투스(Plautus)가 처음 사용, 인간 사회의 본질을 냉혹하게 드러내는 문구다. 홉스는 자연상태는 무정부상태나 전쟁상태와 같기 때문에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절대군주가 필요하다는 사회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홉스는 외부의 해결책을 찾자는 반면 순자는 내부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순자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으니 이를 개인의 노력과 교육을 통하여 순화하여 군자와 소인 중에서 군자처럼 되도록 하자는 데 중점을 두었다. 순자의 성악설에는 인간본성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자연스럽게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이를 관리하여 인간개성을 양육하여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동양의 변화론은 이해가 어렵다. 본능에서는 인간은 같지만, 정신의 노력에 따라 본능이 나타나는 행동에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들은 군자와 소인이 인간본성에는 차이가 없으나 태어나서 배우는 바에 따라 행동으로 나타나는 인간개성에 차이가 생긴다고 본 것이다.

성인(聖人)도 본성에서는 일반 백성과 다름이 없다. 그들은 행동에서 차이가 있다. (순자 23:5)

맹자와 순자 모두 유가 사상가들이다. 스승 공자가 이미 유사한 인성론을 펴면서 이들 철학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

인간본성으로 보면 모두가 비슷하다. 그러나 행동에서 인간은 큰 차이를 보인다. (논어 17:2)

홉스, 로크와 루소의 인성론은 인간은 그렇게 태여 났고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제도와 법률을 중시하는 사회계약론을 내세우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운 사회계약론에 의하여 선악적으로 인간을 평가하게 된다.

고자, 맹자와 순자의 인성론은 인간은 인간본성은 가지고 태어났지만 태어나서 어떤 인간이 되는지 변화하는 인간개성 부분에 집중하게 된다. 본인의 노력에 따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인간개성을 가지는 사람과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개성을 가지는 사람으로 변한다.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은 착하다 거나 악하다는 존재론적인 설명이 아니다.322 숙명적으로 또 자연적으로 인간은 이렇게 되어있다 라는 표현일 뿐이다. 인간본성이 착한 것으로 변함없이 정해져 있다는 설명은 맹자 철학의 핵심이 아니다. 또한 인간본성이 악한 것으로 변함없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은 순자의 철학의 핵심이 아니다. 맹자나 순자는 인간본성이 선하거나 악하게 태어나거나 사회생활 속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되어있다고 본다. 선하게 태어나도 태어난 이후 사회생활에서 나쁜 영향을 받을 수 있으므로 자신을 잘 훈련하여 선한 부분을 키워 나가 도록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맹자 철학의 핵심이다. 순자의 성악설도 강력한 이기심을 윤리와 법에 따라 잘 훈련하여 훌륭한 인간개성을 가지도록 하자는 철학체계다.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은 윤리로 귀착하는 귀납이 중요하다. 서양의 존재론에서는 성선, 성악은 연역적인 불변의 중요성을 가진 점이 중요하다. 홉스의 성악설에서는 왕에게 개인이 권한을 양보하는 제도와 체제가 중요하고, 루소의 성선설에서는 일반의지를 확보하는 제도와 법을 만들자는데 집중해 있다. 그래서 서양 체제에서는 법과 제도로 성악, 성선의 존재론적인 인간본성을 규제해야 한다 데 핵심이 있다. 반면 동양의 변화론에서는 성선, 성악은 귀납적인 변화의 중요성을 가진다. 규범적인 법률이 아니라 설득형의 윤리가 중요해진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동양의 본성론은 생성론적이다.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이 모두 인간개성의 양육을 생성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인간이 “고정된 인간본성” (fixed human nature)를 가지고 태어났는지 하는 질문에 동양 인성론의 답은 명확하다. 인간본성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모두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은 강력한 이기심과 약소한 이타심을 모두 가지고 태어난다. 동양은 음양처럼 이러한 인간의 본능, 즉 올드 브레인은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태어난다. 태어난 후 뉴 브레인에서 이러한 음양적 인간본성을 관리하면서 계몽된 이기심으로 향하도록 인간개성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핵심이다.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을 보면 그와 같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나쁜 성격을 가진 사람을 보면 자신을 돌아보고 그와 같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논어 4:17)

순자도 비슷한 의견을 표한다.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이것을 원해야 하고, 윤리와 법률로 이를 도울 수 있다. 인간개성의 함양이 목적이 된다.

길거리의 사람도 성인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윤리와 투명한 법으로 그렇게 될 수 있다 (순자 23:11)

동양에서는 본성이 달라도 그 범위내에서 인간개성의 양육이라는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는 데서는 일치한다. 그러나 서양의 본성론은 이미 규정한 목적으로 향하는데 쓰이게 된다. 곧 사회계약론에 적용된다. 서양의 성악설은 왕의 권위를 인정하는데 쓰였으며, 백지론은 자유주의를 신장하는데 쓰였고, 성선설은 인민주권을 지향하는데 쓰였다. 이렇게 동서양의 본성론이 그 목적이나 목표에서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동양의 인성론은 타고난 인간본성을 인정하고, 그 범위내에서 윤리와 법률로 이를 관리하여 올바른 인간개성을 키워 사회에 이롭게 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 종교나 형이상학적 이론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동양에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변함이 없이 적용되는 인성론이다.

3) 인간본성의 관리: 동양, 숙명안의 자유 vs 서양, 결정론-자유의지 대립

지구상에는 셀 수 없는 숫자의 나무가 있다. 한 나무에는 많은 잎사귀가 있다. 그런데 모든 잎사귀가 다르게 생겼다. 세상에 똑같은 잎사귀는 한 쌍도 없다. 지구상의 인간도 이제 80억 명을 넘어서고 있다. 이들은 각자 다른 개성을 가지고 산다. 지구상에 똑 같은 개성을 가지고 가는 사람은 한 쌍도 없다. 그러면 인간은 똑 같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모두 다른 개성을 가지고 산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동양문명에서는 인간은 본성은 타고 태어나는 것이지만 인간개성은 태어나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인간개성은 본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본성내에 있는 “강력한 이기심과 약소한 이타심 간의 상호작용”이라는 테두리내에서 움직인다. 그런데 그 테두리내에서 어떤 인간개성을 가질 수 있는 가는 완전히 개인에 달려 있다. “발광체의 본능, 반사체의 정신” 이러한 본성으로 태어나는 인간은 “숙명안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모든 인간은 결국 같은 인간본성의 테두리안에서 태어난다. 물론 인간본성에서 우리를 관장하는 여러 가지 정열의 강력함에 차이가 있고, 이기심과 이타심의 비교적 크기에 차이 등이 있다. 그러나 강력한 이기심과 약소한 이타심,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정열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예를 들면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정열을 크게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도 이러한 본능이 어떤 방향으로 표현되는 가 하는 것은 순전히 교육과 자신의 노력에 달려있다. 2차 대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두 사람을 꼽으라면 처칠과 히틀러 가 대상에 오른다. 두 사람 모두 보기 드문, 지배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강력한 정열이라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한 사람은 역사에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고, 한 사람은 미치광이에 가까운 사람으로 취급된다. 그것은 본성이 아니라 환경과 자신의 노력이 두 사람을 가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인간본성이 아니라 인간개성이 사람의 됨됨이를 결정하는 것이고 역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인류의 문명은 인간본성에 내재한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런 이기심을 관리하지 못하면 문명은 유지될 수 없다. 동양의 윤리와 서양의 율법은 인간본성의 이기심을 관리하고자 시작된 것이다. 서양문명은 법률과 윤리는 神이 인간에게 준 것으로 시작된다. 모세의 십계명과 예수의 이웃사랑의 윤리가 모두 神에게서 나온 것이다. 동양에서는 법과 윤리가 인간본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한다. 인간본성을 그대로 놔두면 인간사회에서 다툼과 경쟁을 피할 수 없다. 이기심은 인간본성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 그리고 이기심은 인간사회의 동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과 윤리를 만들어 인간사회를 관리하자는 생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법은 神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문제를 유발하기 쉬우니, 법률보다 상위의 개념에 있는 윤리를 법률보다 중요한 개념으로 삼자는 것이 동양의 문명이다. 도덕경과 논어의 중심 개념은 윤리다. 동서양 문명을 비교하자면 동양에서는 神이 표상하는 율법 보다 道가 표상하는 윤리를 중시하자는 생각이 깃들어 있다. 윤리는 神이 명령이 아닌 인간본성을 관리하고자 인간사회에서 자기보존 원칙에 의하여 설정된 것이다.

맹자와 순자의 성선설과 성악설을 살피면서 우리는 그들의 인간본성에 대한 토론의 종착역이 인간개성의 교육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은 사회계약론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윤리의 교육에 집중 되어있다. 맹자의 저서와 순자의 저서가 모두 인간본성이 이렇다 고 규정하는데 집중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어떻게 교육을 통하여 좋은 인간개성을 가지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맹자와 순자 모두 스승인 공자를 닮고 있다. 공자는 인간본성에 대하여 토론하지 않는 채, 인간개성의 양육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의예지를 인간이 갖추어야 할 개성의 목적으로 제시하는데 집중한다. 이점은 서양이 계몽시대를 겪으면서 인간본성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만들어낸 철학과 비슷하다. 특히 벤자민 프랭클린의 철학과 동일하다. 프랭클린은 서양의 형이상학을 검토하다가 형이상학의 토론은 커다란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인생을 사는데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항상 중요시해온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즉 남에 대한 배려, 성실, 근면, 정직 등이라고 적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동양의 인간본성에 대한 토론은 형이상학을 떠나 실체적인 “인간개성”의 측면에 이미 접근했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 개성은 본성과 정신의 합의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즉 본성에 정신이 접근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 개성이라고 본 점이다. 이점에서 보면 맹자의 선험적 윤리관은 본능에 있는 이타심을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맹자의 선험성은 본능에 의지하고 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맹자는 본능에 있는 강력한 이기심 대신에 미약한 이타심만 중시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궁극적인 개성의 형성을 위하여 그 나름의 노력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력한 이기심을 무시한 점은 순자의 성악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된다. 그리고 순자는 강력한 이기심에 모두 집중한 나머지 미약한 이타심을 무시한 점이 맹자를 따르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이타심도 본능의 일부가 되니까, 순자가 모든 윤리는 태어난 후 생긴다는 생각은 선험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맹자, 순자 모두 그들의 생각은 본능-정신의 상보적인 역할로 개성을 만들자는 데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서양 인간본성론이 결국 사회계약론이나 법률과 제도로 발전하였다면, 동양 인성론은 결국 인간개성론, 즉 정치윤리와 정치경제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법률과 윤리는 결국 인간본성에서 비롯된다. 앞에서 살펴본 순자의 인간본성에 대한 철학(순자 23:1, 23:5)이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323

우리가 본성론과 양육론 사이의 관계를 동양식으로 풀어내면 서양이 그렇게 고민하는 “결정론과 자유의지” 문제가 없어진다. 神의 문명에서는 神이 인간을 창조하였고, 인간사를 돌보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결정론과 자유의지” 간의 어려운 문제를 스스로 도출하였다. 인간본성은 결정론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양육론은 자유의지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결국 인간은 본성과 양육 모두를 필요로 한다. 본성은 어차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본성을 사회생활에 유용하게 사용되도록 하는 것은 양육의 역할이다. 서양의 神의 문명에 내재해 있는 투쟁론으로는 결정론과 자유의지 문제를 풀기 어렵다. 神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생각을 따르면 이는 결정론을 지지한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의 역할을 강조하면 이는 자유의지론을 지지한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자는 입장에서 나오는 어려움이다. 그러나 동양 道의 문명에 내재해 있는 조화론을 따르면 문제는 쉽게 풀린다.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모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 이문제는 없어진다. 올드 브레인은 결정론이고 뉴 브레인은 자유의지이다. 따라서 이 둘을 동시에 고려해야 인간본성의 숙제가 풀린다. 그런데 하나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뉴 브레인은 올드 브레인의 프레임내에서 자유롭다. 즉 숙명안의 자유라는 개념이 성립된다.

동양문명이 왜 그렇게 교육을 중시하는지 하는 문제도 쉽게 풀리게 된다. 자신의 노력과 교육은 인간이 태어나서 무조건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된다. 그래서 道의 문명에서는 神의 문명 보다 교육이 거의 2천 년 앞서 시행되었다. BC 4세기 맹자의 모친이 아들 교육을 위하여 3번 힘든 이사를 하면서 교육에 힘쓴 이야기는 모든 부모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중세 천 년 신본주의 시대에는 모든 것이 성경에 써 있고 그것을 잘 시행하면 천당에 가는 최대 목적이었다. 성경 외에는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중세 천 년을 지배하던 교육은 스콜라 철학, 즉 성경에 대한 공부였다. 지혜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것이었다. 거의 천 년 동안 서양의 학문과 저술은 종교와 神에 관한 것이 중심이었다. 종교를 벗어난 인본주의 저술이 본격적으로 나온 것은 14세기 르네상스 때다. 그러므로 개성양육에 대한 관심은 동서양이 2천 년 차이가 난다. 서양에서 개성양육을 중심으로 한 국민교육에 대한 관심은 로크와 루소 등의 영향으로 18-19세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BC 6세기 공자의 논어는 전체가 개성양육에 대한 책이다. 지도자(君子)를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다. 맹자와 순자의 성선설과 성악설은 개성양육을 위한 서문 같은 것이다. 이들의 인성론은 모두 개성양육으로 지도자를 만드는데 집중하기 위한 입문서 같은 역할을 했을 뿐이다.

동양문명에서는 성선, 성악설이 인간본성은 이기심과 이타심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성유선악설”로 사람들 마음속에 정리된다. 그러나 서양문명에서는 다른 경로를 취한다. 홉스의 성악설은 그의 사회계약론의 핵심이므로 조화나 수정될 수가 없다. 왕정을 지지하기 위한 것이니 왕정이 무너지면서 그의 성악설은 지지기반을 잃게 된다. 로크의 자유정부론도 백지설을 기초로 한 것이다. 지도자와 참여자 모두 교육에 의하여 자유의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유지되는 이론이다. 선험적인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주장이 된다. 루소의 성선설은 왕정이 아니라 인민주권을 주장한 이론이 된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일반의지”(General Will)가 성립하지 않으면 그의 사회계약론이나 성선설도 무너진다. 특히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생각을 성선설과 결합시킨 점에서는 그의 성선설이 국민주권을 이용하여 전체주의와 결합될 여지를 남겼다. 서양에서 이데올로기 시대에 서양의 지도자들이 적극 이용한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서양 사상가들 중에서 특히 인간본성을 논의한 사람들 중에서 누구도 인간개성의 양육이라는 목표에 집중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로크도 그렇고 루소도 그렇고 이들은 윤리의 양육이 아닌 자신들이 주장한 자유의지나 일반의지를 주장하기 위한 교육을 원하였다. 반면 공자, 맹자, 순자는 모두 인간개성의 양육을 목표로 하였다.

강력한 이기심 때문에 누구나 부와 권력을 원한다.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자기보존 본능이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다음 세대의 사람들은 똑같이 강력한 이기심과 미약한 이타심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가 이타심으로 작용하는 그런 사회는 만들 수는 없다. 이것이 인간본성이다.

그러면 양육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양육은 인간본성의 가능성내에서 작용한다. 노력을 통하여 이타심을 키우고 이기심을 제어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양육이 할 일이다. 이타심을 활용하여 자신의 이익이 오래 유지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타심은 계몽된 이기심이 되어야 한다. 여기 양육의 역할이 있다. 본성은 의학적으로 보면 올드 브레인이다. 양육은 뉴 브레인이다. 이 둘은 연결되어 있다. 의학적으로 “대뇌화”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본성과 양육은 상보적으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본성과 양육의 상보적 노력으로 이기심이 탐욕으로 무한히 커지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타심에 눈을 떠야 한다. 이렇게 해야 좋은 인간개성이 자라난다. 이타심에 눈을 뜬 이기심은 계몽된 이기심이 된다. 지도자의 필수 요건이다.

우리가 백지론을 제외한다면, 인간은 모두 한 가지 인간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인간본성에 내재한 이기심과 이타심을 어떻게 조정하는가에 따라서 군자와 소인으로 나뉜다. 인간사회에서는 군자와 소인 두 가지 종류의 인간그룹이 형성되어 있다. “한가지 인간본성과 두 가지 인간그룹” 이것이 동서양의 사회구성에서 동일한 요소다. 동양은 군자와 소인으로 구분한다.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소인이 될 수 있다. 그 둘은 동료다. 한 그룹이 없으면 다른 그룹도 없어진다. 조화론이 두 그룹을 연결한다.

서양도 인간을 두 그룹으로 나눈다. 그러나 두 가지 인간 그룹은 태어난 이후 개성의 양육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진다. 유형학적인 구분이다. 종교, 인종, 지역으로 나눈다. 道의 문명과 神의 문명의 차이다. 그리스 시대에는 영혼을 가진 그리스인과 영혼이 없는 “야만인”으로 나눈다. 야만인은 동물과 같으며 노예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아래서는 신자(구원을 받은 자)와 불신자(버려진 자)로 나뉜다. 교황청도 이교도는 노예로 삼아도 좋다고 칙서를 내렸다. 정신의 시대에는 “정신”을 가진 서양인과 정신을 못 가진 비서양인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 시대에는 이데올로기 교리를 믿는 자와 반대자로 나누게 되었다. 이데올로기 교리에 반대하는 자는 제거되어야 한다. 제대로 대접을 받으려면 그리스에서 태어나 영혼을 가지거나 서양에서 태어나 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서양의 두 그룹의 구분은 다분히 태어나는 장소에 따라 또 부모가 누구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즉 태생과 신념에 따른 구분이다. 두 그룹은 투쟁적 관계를 형성한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용납하지 않는다.

동양은 유형적이 아니라 관계적으로 인간을 구분한다. 군자와 소인의 구분이다. 군자와 소인은 어느 인문사회에나 다 있다. 어떤 타입의 인간인지 구분하기 이전의 인간상에 근거한다. 서양에도 군자(지도자)와 소인(참여자)이 있다. 그러나 서양의 투쟁적 구분에서는 영혼, 정신, 이성, 이데올로기의 소유 또는 불 소유에 따라 인간이 갈린다. 불 소유자는 인간의 자리에서 제외된다. 이런 구분에서 양육론은 설자리가 없다. 모르는 곳에서 태어나면 아무리 양육을 잘해도 서양이 주장하는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영혼, 정신, 이성, 이데올로기가 생길 리가 없다. 그러나 동양의 군자-소인 구분은 철저히 양육에 의하여 결정된다. 어느 사회에나 지도자와 참여자는 항상 있기 마련이다. 강력한 이기심과 약소한 이타심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 어떤 교육과 깨달음에 의하여 이기심과 이타심을 조절하여 군자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고 이기심이 탐욕이 되는 소인으로 남는 사람이 있다. 모두 양육론이 결정한다.

동양문명은 2천 년 이전에 인간본성(nature)에 대한 토론을 정리하면서 양육(nurture)으로 접어 들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차지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인간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인간본성을 뛰어 넘어 인간의 개성(인성, 품성, 성격, 인격 등)에 대한 토론과 철학에 집중했다. 서양은 인간본성이 무엇인지 하는데 집중하고 있고, 동양은 인간개성을 키우는데 집중하고 있다. 개성은 언제 형성되는 것인가? 이 개성은 본성에 이미 정착된 신호에 따라 달라 지는 것인가? 아니면 양육에 의하여 달라 지는 것인가? 본성과 양육은 별도로 작동하는 것인가 아니면 상호 작용아래 개성을 만들어 나가는 것인가? 道의 문명에서는 본성과 양육이 상호작용 아래 인간개성을 만들어 나간다는 철학을 세웠다.

앞서 말했듯 서양이 교육의 중요성을 생각한 것은 로크와 루소 이후이지만, 동양문명은 2천 년간 교육의 중요성에 집중하였다. 그것은 본성을 인정하되, 인간이 어떻게 크느냐는 인간개성의 형성은 양육(nurture)의 힘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근세 초기의 서양 사상가들은 예수교 신부들이 전해오는 동양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동양에서 모든 사람이 교육에 열중하고, 교육의 성공 정도에 따라 관리를 뽑는 과거제도에 대하여 놀라움과 부러움을 표했다. 당시 서양은 모든 관직은 엽관제도에 의하여 사고 파는 형식이었다.

동양의 현실관리 vs 서양의 이상추구

서양의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은 인간 전체를 위한 비전을 쫓는다. 종교의 전파와 이데올로기의 추구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일견 위대하고 웅장한 면을 담고 있다. 그러나 모든 포교와 이데올로기 전파가 그렇듯이 현실성이 없다는데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 특히 이데올로기에서 추구하는 비전들은 모두 인간본성을 왜곡하고 구성되었다. 영혼, 정신, 이성을 인간의 본질로 취급하는 인성론에서 문제가 있다.

서양이 추구하는 의미는 결국 개인주의 라는 철학에 의거하고 있다. 개인과 神, 개인과 이데올로기의 관계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보다 중요해진다. 동양의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은 불현론과 관계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道는 끝이 없다” “삶에는 끝이 있는데, 앎에는 끝이 없다” “道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仁을 행함에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當仁不讓於師)” 라는 도교와 유교의 고백이 이를 가르친다. 윤리적인 측면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은 비전의 추구가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으로 인간 관계의 조화를 추구한다. 동양의 의미는 관계주의 라는 철학에 의거하고 있다. 관계주의는 변화론에 입각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조건은 시기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게 된다.

서양 문명은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 창달을 위한 법률과 제도에 집중하고 있다. 행복은 개인주의 적이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인간 사이의 “관계주의”에 입각한 윤리가 문명의 핵을 이룬다. 윤리는 인간본성에 내재한 이기심에 대한 경계에서 온다. 이기심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탐욕에 대하여 관계주의의 윤리를 체득하여 사회생활에서 인간사이의 조화를 이루자는 것이다. 동양의 도교는 성인을 목표로 한다. 유교는 군자를 목표로 한다. 성인이나 군자나 모두 “지도자”라는 목표로 귀결된다. 관계주의 적 표현이다. 서양에서 스피노자 등 서양의 불현론자들은 “현인”을 목표로 삼았다. 개인주의적 표현이다.

서양 철학의 중심인 시현론은 개인주의의 핵심적인 가치를 대변한다. 진리(神, 형이상학적 진리, 이데올로기 등)가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나와 진리의 관계는 나와 다른 어떤 인간과의 관계보다 중요하게 된다. 나와 남의 관계는 나와 진리의 관계에 종속되며, 종교나 이데올로기에 따라 남을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근거하여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가 최우선으로 중요시된다. 내가 파악한 진리를 추구하고 많은 동조자를 만드는 것이 서양인들의 생활패턴이 된다.

앞서 말했듯 동양문명의 핵심은 “진리는 있지만 인간이 표현할 수 없다”는 불현론이다. 불현론 문명의 사유에 의하면 인간이 발견했다고 하는 “진리”는 인간-인간 관계의 핵심인 윤리, 仁을 넘어설 수 없다.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남에게 강요할 수도 없다. 이 철학이 인간에게 주어진 관계주의의 핵심이다.

변해가는 인간개성 양육을 위하여 동양문명에서 성립한 사상이 유교의 군자사상과 도교의 무위사상이다. 이들은 이상의 실현이 아니라 인간본성이라는 현실을 관리하자는 철학이 핵심을 이룬다. 순자는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문제가 있는 천성은 어쩔 수 없다고 본다.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인간본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태어난 이후 윤리와 법으로 이를 잘 다스려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인간개성을 만들자는데 집중한다는 “숙명 안에서의 자유”라는 철학과 통한다. 결국 순자의 목적은 인간의 천성이 문제가 있으니 천성을 바꾸자거나, 이를 없애거나 뛰어 넘자는 것이 아니라, 윤리와 법을 통하여 인간개성을 “양육”하자는 것이다. 윤리와 법이 인간사회에 필요한 이유다. 그는 윤리와 법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흐름을 파악한 데서 나오는, 군자와 성인이 만든 것으로 정의했다. 선험성이나 초월성을 부인하고 있다.

이러한 동양문명은 현실참여에 집중하게 된다. 군자사상과 무위사상이다. 변화하는 인간개성을 양육하여 인간사회를 관리하는데 집중한다. 즉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인성론을 인간이 사회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이다. 정치윤리(political ethics)와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에 집중하게 된다. 서양문명이 신학, 형이상학, 이데올로기에 집중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모든 서양의 인성론은 모두 인간사회의 관리가 아니라 이상향의 실현을 목표로 삼고 있다.

맹자는 인간을 정신 곧 뉴 브레인의 측면에서 주로 파악하였으며, 순자는 그 반대로 인간을 본능 곧 올드 브레인의 측면에서 주로 파악한 것이 드러난다. 그렇다고 맹자가 인간의 감정이나 본능을 무시하거나 죄악시하지는 않았으며, 마찬가지로 순자가 도덕이나 사회규범을 인간의 본능을 구속하는 것이라고 도외시한 것도 아니다. 맹자와 순자 모두 본능과 정신의 존재와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목적은 하나다. 맹자나 순자 모두 “인간개성의 양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순자는 인간본성이 올바름을 알고 이에 관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으나 훌륭한 스승과 좋은 친구를 만나 자기 수양을 해야 한다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무릇 인간에게는 올바름을 알 수 있고, 마음은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선천적 본성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반드시 좋은 스승을 만나 배워야 하며, 좋은 친구를 만나 사귀어야 이러한 본성을 키울 수 있다 (순자 23:15)

서양에서는 스피노자가 순자와 가장 유사한 인간본성과 자연관을 표명하고 있다. 순자의 인간본성론은 스피노자의 인간본성론과 유사하다. 스피노자는 가지고 태어난 본능에 따라서 자신의 이익을 쫓아가는 인간 본성을 인간의 굴레(human bondage)로 표현했다. 인간 속에는 이런 본능과 함께 정신이 있는데, 정신에는 본능을 관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아주 소수사람만이 이를 달성하게 된다고 보았다. 스피노자는 이들을 자유인(free man)으로 지칭했고 나머지 대부분 굴레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대중(multitude) 라고 지칭했다. 스피노자가 인간을 “자유인-대중”으로 구분한 것은 순자가 인간을 “군자-소인”으로 구분한 것과 아주 비슷하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순자와는 달리 정치윤리의 측면이 개인의 자유에 있다고 정의했다. 순자는 사회의 지도자에 있다고 규정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자유인이 목적이다. 그러나 순자는 인간을 어떻게 윤리를 지키고 정치적으로 유능한 지도자가 되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앞서 본 대로 순자(천론편)와 스피노자(윤리학)는 자연관에서도 같은 입장을 취한다.

맹자와 순자의 인간개성 양육은 이미 공자에게서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공자의 대학 8장에서 수신제가(修身齊家), 9장에서 치국(治國), 10장에서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길을 설명한다. 그 뜻이 곧 자신을 다스리고, 가정을 다스리고, 국가를 다스리고, 천하를 다스린다 라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군자의 목적은 올바른 정치에 있다. 이를 위하여 인간개성을 지도자로 양육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똑 같은 본성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누구는 군자가 되고 누구는 소인이 된다. 그들이 다른 이유는 그들의 본성과 가능성의 차이에 있지 않고, 그들이 하는 습성과 노력에서 찾을 수 있다. (순자 4:7)

맹자와 순자 모두 공자와 함께 지도자를 길러야 한다는 유교 특유의 정치적 측면이 강하다. 순자는 정치윤리적 행동을 강조하고 있다:

듣는 것이 듣지 않는 것보다 낫다. 보는 것이 듣는 것 보다 낫다. 깨닫는 것이 보는 것 보다 낫다. 행동하는 것이 깨닫는 것 보다 낫다. 행동하는 것에 배움의 목적이 있다. (순자 8:9)

여기서 순자는 다음 질문을 던진다. 인간을 모두 성인으로 만들 수 있는가? 모두 가 그렇게 원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원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결국 개인의 선택이 중요하다:

사람은 배움과 행동으로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가? 그것은 가능하기는 한데, 이것을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인은 군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원하지 않으면 될 수가 없다. 군자는 소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원하지 않으면 될 수 없다…. 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강요하여 만들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순자 23:12)

여기서 동서양 문명의 차이가 있다. “神에 대한 믿음” vs “인간개성 양육”의 차이다. 神의 문명에서는 정해진 율법을 믿겠다고 선언하면 신자가 된다. 신자가 되면 율법에 의하여 “밖에서” 신자를 관리하게 된다. 道의 문명에서는 군자는 밖에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정해진다. 스스로가 군자인가 소인 인가를 정한다:

군자는 원하는 것이 자신의 내부에 있다. 소인은 원하는 것이 밖에서 정해진다. (논어 15:20).

이러한 공자의 생각은 순자에 와서 보다 분명히 설명된다. 군자는 평천하 라는 지도자로서의 목적이 있다. 군자는 이러한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 소인은 이러한 윤리적 목적이 없고 개인의 욕심에 따르게 된다.

군자는 생각과 물건을 활용한다. 소인은 생각과 물건에 활용 당한다. (순자 2:5).

유교의 군자 사상은 도교의 무위 사상과 맥을 같이한다. 외부의 행동을 최소화하는 것이 무위의 법칙이다. 율법은 외부의 설득과 이를 용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기독교는 개종을 인정한다. 정해진 율법만 따르면 되기 때문에 구교도가 신교도가 되기도 하고 반대도 성립한다. 그러나 道의 문명에서는 군자와 소인이 개종한다고 하여 상호 위치를 바꿀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개종에는 많은 경우 강요로 그렇게 된다. 유대교도가 기독교도가 되거나 아니면 모든 재산을 몰수한다는 칙령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순자가 설명하였 듯이 군자와 소인은 강요로 그렇게 될 수 없다. 본인이 원해야 행동으로 나타나야 그것이 가능하다.

논어에서도 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군자는 자신에게서 원하는 것을 찾으며, 소인은 남에게서 원하는 것을 찾는다.” “군자는 스스로의 능력을 판가름하며, 소인은 남이 알아주는지에 의하여 결정된다.” “군자는 道에 대하여 걱정하고 소인은 가난에 대하여 걱정한다.” 직접 그 사람을 평가하기 어려우면 그 사람 주위에 있는 사람을 보면 된다. 순자는 그의 책 성악론에서 주변사람을 보라고 말한다: “사람이 어떨지 궁금하면 그 친구를 보라. 왕이 어떨지 궁금하면 그 신하를 보라.”

4) 인간본성의 목적: 삶의 의미추구 vs 개인의 행복추구

서양의 사회계약이론이나 동양의 인간개성함양, 이는 모두 인간 사회를 관리하자는데 목적이 있다. 이는 인간본성이 어떻게 구성되고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인간본성에 비추어 볼 때 동서양 문명에서 인간은 무엇을 원하고 추구하는가? 동서양의 인성론은 그 출발점에 차이가 있다. 변화론과 존재론이다. 이에 따라 동서양 문명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이 달라진다. 우리는 정신이 아니라 인간본성, 즉 본능과 이성으로 구성된 인간 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실질적인 탐구를 할 필요가 있다.

계시종교는 神의 뜻이 인간의 정신 보다 우위에 있다는 전제위에 성립된다. 그런데 서양의 합리론은 神이 인간에게 준 정신이 神과 같은 능력을 보일 수 있다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동양은 정신과 본능이 연계되어 있다는 인성론을 그 문명의 기초로 삼는다. 이러한 인성론에서 동양은 인간 사이의 의미를 찾는 데 목적이 있다. 천당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Individualism)와는 다르게 관계주의(Relationalism)는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 삶의 의미는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핵심으로 윤리에 입각한다. “자신이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줘야 한다”. 동양의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인생은 서양의 시현론에 입각한 이상향의 세계를 실현하고자 하는 비전과는 차이가 있다. 이상향을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은 위대한 결실을 맺기도 하지만 쉽게 윤리를 무시한 인간주의로 빠지게 된다.

서양의 대항해 시대는 인간 정신의 위대성을 확대하고 싶어한다. 정신숭배 문명에 더욱 확신에 찬 서양은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게 된다. 과학의 놀라운 발전에 힘입어, 인간이 이상적인 세계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정열에 휩싸인다. 인간은 이상을 추구하기 위하여 태어났고 이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거대한 철학체계가 성립된다. 이 시기에 근대 서양은 인간의 역사에서 발견하기 힘든 발전을 이루었다. 견제와 균형이론 성립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 실현, 예술, 음악, 체육, 과학 모든 면에서 인류에게 놀라운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서양의 세계정복과 함께 서양정신의 위대함을 역설하는 철학체계가 성립되었고, 대다수 서양인들이 동조하게 되었다. 서양 중심으로 이를 세계에 확대하자는 생각이 들끓게 되었다. 서양인을 위한, 세계를 위한 이상세계를 꿈꾸게 되었다.

정신이 주도한 이상향을 인간사회에 실천할 수 있다는 생각은 불가능한 꿈이다. 본능이 발광체, 정신은 반사체이므로 본능을 무시하는 이상향은 인간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동양의 변화론에 의하면, 인간사회에서 잠시 이상향에 매달리는 시기와 이를 제거하는 파괴시기가 교체할 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이 이상향을 건설하자는 생각은 “사회진화론”과 결합하면서 이데올로기 시대를 열게 된다. 이로써 서양의 이데올로기는 20세기에 윤리적으로 참혹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각종 이념을 창조하고 여기에 인류가 모든 것을 던지고 달려들게 된다. 그 참담한 결과를 목도한 서양 철학은 사회진화론의 허구를 알게 되고 인간정신의 한계도 점차 알게 된다.

서양문명은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인간정신은 神 또는 자연의 법칙 아래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된다. 문제는 서양이 다시 계시종교의 神에게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데 있다. 기적을 행하고 인간사를 주관하는 神에 대한 문제는 계몽시대에 정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사를 주관하지 않는 神은 스피노자가 제안한 방식대로 神과 자연을 동일시하면 해결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결국 동양문명이 의지하는 道의 자연철학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된다. 그러나 자연철학은 서양의 문명을 수천 년간 지배해온 기조인 정신 숭배 사상과 핵심적인 차이가 있어서 이것도 쉽지 않다. 여기에 바로 서양문명이 나아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드러난다.

계몽시대 이후의 서양에서 정신이 神을 대체하면서 윤리의 근본을 찾는 철학에 집중한다. 이신론의 체계내에서 칸트는 인성내부에 윤리를 찾는 본성이 존재한다는 철학을 내세운다. 이러한 칸트의 “정신”에 의한 윤리 의무론은 계시종교에서 神이 명령한 “율법”에 의한 윤리 의무론 보다 설득력이 훨씬 약하다. 따라서 윤리의 의무가 약해진 서양인들은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서양인들이 집중하고 있는 것이 행복론이다. 정신에 의한 “의무론” 보다 생의 “행복론”에 더 집중하는 성향을 보이게 된다. 벤탐은 인성은 결국 행복을 찾게 되므로 행복을 찾는 데서 윤리라는 목적이 생긴다고 보았다.324 서양에서는 인생의 목적을 행복의 추구에서 찾는 오랜 전통이 있다. 탈레스, 소크라테스에서 부터 에피쿠로스를 이어 근세의 벤탐의 공리적 윤리론으로 이어진다. 탈레스는 “가장 행복한 사람은 건강한 몸 풍부한 정신, 잘 길들여진 성품을 가진 사람이다” 라고 행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은 행복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인간의 잘못은 무지에서 온다. 지식은 미덕이다. 미덕은 행복이다”.

서양 문명은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에 입각한다. 동양에서는 드물게 개인주의를 주장한 사람이 있다. 전국시대 백가쟁명 중의 하나인 양주(楊朱)의 사상이 서양의 개인주의와 아주 비슷하다. 모든 행동을 나를 위하는데 중점을 두었으며, 사회적 도덕에 무관심하였다. 나 만을 위하자는 위아(爲我)주의와 인간의 본성을 자연 그대로 지키자는 전성보진(全性保眞)주의가 양주사상의 핵심이다. 양주와는 반대되는 묵자(墨子)의 사상도 전국시대에 세력을 떨쳤다. 묵자는 겸애(兼愛)와 비공(非攻)을 주장했다. 남을 사랑하는데 중점을 두고, 어떤 경우에도 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폈다. 끊임없이 전쟁이 펼쳐지던 전국시대에 묵자의 사상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양주, 묵자의 사상은 모두 일가견이 있지만 양쪽으로 치우친 사상이다.

공자의 유교 사상은 양주처럼 자신에 중점을 두는 것과 묵자처럼 남에게 중점을 두는 것을 모두 포괄하는 관계주의를 주장하였다. 나와 남을 연계시키자는 주장이다. 공자사상의 관계주의는 남이 행복하지 못하면 혼자서도 행복할 수 없다는 개념이다. 결국 공자사상이 유교사상으로 동양 사유의 중심이 되었다. 동양 문명에서는 “우리” 라는 관계주의를 중시하기 때문에 인간과 절대자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시한다.

유교에서 최고의 윤리로 여기는 인(仁)이 바로 인간-인간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관계주의를 지향한다. 종교나 형이상학에서 주장하는 “진리”가 아니라 인간-인간 관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남도 살고 나도 살자”는 관계주의가 중심이다:

자신이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기가 도달하고자 하면 남도 이롭게 해준다. (논어 6:28)

관계주의에서는 행복이라는 것도 혼자 행복할 수는 없으며, 다른 사람과 함께 행복이라는 감정, 긍정심리학을 느끼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서양 문명의 비교에서 서양의 개인주의에 대치되는 동양의 철학은 집단주의가 아니라 관계주의로 표현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관계주의라는 개념은 서양 철학 체계에 없다. 서양에서는 종교적 진리, 철학적 진실, 이데올로기적 진리가 나에게,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초월한다는 개인주의가 중요하다. 그러나 동양의 관계주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며 상대에 대한 배려를 통하여 나의 이익을 지킨다는 뜻을 가진 철학이다. 관계주의의 철학적 의미는 “네가 없으면 내가 없다”는 간단한 진리와 통하고 있다.

서양의 개인주의에서 느끼는 행복은 순간적이다. 행복의 느낌은 계속되지 않는다. 행복을 찾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느낀다. 프레임 설정에 문제가 있다. 행복과 불행은 다분히 제로섬 게임이다. 동양에서처럼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배움에서 이를 측정한다. 관계주의는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 있다. 의미의 추구는 계속적이고 단계적이다.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행복의 추구는 제로섬이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쉽게 마약이나 외부에서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게된다. 의미를 찾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배움의 성과로 측정을 하게 되므로 내부에서 의미와 성과가 측정된다.

동양의 맹자나 순자의 윤리관은 행복이나 에피쿠로스의 쾌락과는 관계가 멀다. 맹자는 道의 문명에서 태어난 사상가로서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나 쾌락을 추구하는데 있지 않다고 보았다. 동양문명에서 사상가들은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정치윤리를 추구하며 “지도자(君子)”를 잘 고르자는 데 있다. 이점은 유교의 특징으로 공자, 맹자, 순자 등이 모두 공유하고 있던 목표다. 도교에서는 원래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피하고 자연의 道를 파고드는데 목적이 있지만, 그래도 도교 조차도 인간을 성인(聖人)과 백성으로 나누면서 성인의 지도력을 설명하고 있다.

동양의 의미를 추구하는 삶은 관계주의에 입각하여 자연 및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함께 하자는 윤리를 중심으로 한 인본주의에 입각하게 된다. 이것은 피아(彼我, 상대와 나)를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이기심의 희생이 아니라 계몽된 이기심 즉 관계주의의 표현이 된다.

인(仁)은 “남에 대한 배려” 즉 컴페셔니즘(compassionism)이다. 윤리는 혼자 서는 달성할 수 없는 “관계적”이다. 행복이 개인주의에 기반한다면 인(仁)은 남과의 연계를 필연적으로 하는 관계주의에 기반한다. 관계주의는 상대에 대한 배려심을 중요시하는데 행복이 아니라 인생에서 “의미있는 삶” 또는 “가치있는 삶”(worthiness 또는 worthwhileness)를 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이 서양의 공동체주의와는 동양의 관계주의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양의 공동체주의는 개인주의를 대체하는 의미로 쓰이지만, 동양의 관계주의는 개인주의를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관계주의가 서양의 개인주의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동양의 관계주의는 서양의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를 합친 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서양인들의 행복에 대한 집착은 유별나다. 그들은 존재론에 입각하여 행복이 간헐적이고 임시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양의 변화론에 의하면 행복에 대한 정의가 달라진다. 행복은 중요하지만 이것도 우주의 모든 것처럼 간헐적으로 인간에게 찾아오고 임시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동양사상에서는 한시적인 “행복”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취급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인간사에서 가족, 친구, 배움, 자연에서 찾는 현실적인 삶의 “의미”를 중요시하게 된다.

공자는 논어 옹야편에서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낫고,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더 낫다” (제18장) 라고 설명했다. 아는 것(知), 좋아하는 것(好), 즐기는 것(樂)은 서양의 행복론과 다르다. 공자의 설명은 개인의 노력으로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단순히 지식을 아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 대상을 좋아하고 더 나아가 즐길 수 있어야 진정한 성취와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 철학자 중에서 행복론을 주장한 사람 중에서는 에피쿠로스가 유명하다. 에피쿠로스의 행복론은 쾌락이다. 그러나 그의 행복론은 동적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 평온”(ataraxia)이다. 욕망을 절제하고 우정과 신뢰를 중시하면서 지혜로운 삶을 통하여 정신적 평온을 이루며 행복에 도달하자고 주장했다. 행복에 대한 서구의 강박관념은 동양문명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근대에 와서는 제러미 벤탐과 존 스튜어트 밀이 인간과 사회의 존재 이유로 행복론을 내세웠다. 그들은 개인을 떠나 사회전체의 행복을 주장하면서 행복의 지수를 정치적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자연은 인간을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인의 지배 아래 두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적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오직 고통과 쾌락이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원인과 결과 라는 사슬의 갈 길을 정한다. 그들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 말하는 모든 일, 생각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가 이들의 예속을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은 그들의 지배를 입증하고 확인하는 노력일 뿐이다.325

벤탐(1748-1832)은 공리적 이유 때문에 도덕성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벤탐은 목적에 따라 윤리가 생긴다고 본 것이다. 공리적 윤리는 “도덕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목적으로 한다. 밀(1806-1873)은 같은 공리주의자 면서 벤탐과 차이를 보인다. 밀은 벤탐의 “양적쾌락주의 ”라는 주장에 대하여 “질적쾌락주의”를 주장한다: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흔히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알려진 말)가 그의 주장이다.

이들은 정의, 용기, 성실, 진실과 같은 미덕이 “개인”의 행복(또는 개인이 합친 공리적인 행복)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인의예지 같은 미덕은 동양에서도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이러한 미덕은 “개인” 홀로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또는 자연 과 인간의 “관계”에서 추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동양은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관계의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을 모색한다. 삶의 의미는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친구, 가족, 배움에서 상대방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동양의 삶의 의미는 관계적(relationalistic)이다. 인생에서 자연이나 상대방과 함께 하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반면 서양의 행복은 개인적(individualistic)이다. 혼자 행복하게 된다. 그리스인이 정의한 최선의 행복은 자신들이 神처럼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은 서양인들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있다. 동양에도 퍼지고 있는 개념이다. 진리, 돈, 명예, 사랑 등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으면 그 당시 행복을 느낀다. 동양인은 인생을 보람 있게 즉 의미 있게 살기를 원한다. 나 개인이 아니라 남과 함께 한다는 의미를 느끼자는 것이다. 나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나와 관련된 사람들, 가족, 친구, 동료 그리고 자연과 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무엇을 함께 달성하였는지가 중요하다. 거기서 인생의 보람을 느낀다. 여기서 윤리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서양과 동양의 마약문제의 현황이 행복추구의 문제를 노정하고 있다. 서양인들은 법과 단속의 차이 그리고 밀수와 공급망의 차이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서양 특히 미국은 마약을 사용하는 내부가 문제의 근원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오는 마약의 “공급”에서 문제의 해결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동양인은 개인의 행복이나 불행이 아니라 가족, 친구, 배움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다. 이것이 부족하면 가족이나 대인관계를 개선하고 배움의 성과를 높이는 것에서 해결 책을 찾는다. 마약으로 이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동서양을 구분하는 사유체계 중에 개인주의와 관계주의 라는 철학체계의 차이가 있다.

주

  1. 305

    Thomas Hobbes, Leviathan (Mobile Reference) 1,307, Kindle Edition:

    “이런 상황에서는 산업이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그 열매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화도 없고 항해도 없으며 바다로 수입할 수 있는 상품의 사용도 불가능합니다. 편리한 건물도 없고 많은 힘이 필요한 물건을 옮기거나 옮기는 도구도 없습니다. 지구 표면에 대한 지식도 없고 시간에 대한 계산도 없습니다. 예술도 없고 문학도 없고 사회도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나쁜 것은 끊임없는 두려움과 폭력적인 죽음의 위험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고립되고 가난하고 추하고 잔인하며 짧습니다.”

  2. 306

    John Locke, Works of John Locke: Including Two Treatises of Government,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and More (2008), 15,037–38, Kindle Edition.

  3. 307
  4. 308
  5. 309

    Mancur Olson, Power and Prosperity; Outgrowing Communist and Capitalist Dictatorships, Basic Books, 2000, p7

  6. 310

    Mancur Olson, “Dictatorship, Democracy, and Development,” The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87 (Sept. 1993): 568.

  7. 311

    Mancur Olson, Dictatorship, Democracy, and Development,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Vol. 87, No. 3 September 1993

    http://www.svt.ntnu.no/iss/Indra.de.Soysa/POL3503H05/olson.pdf

  8. 312

    Mancur Olson, “Dictatorship, Democracy, and Development,” The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87 (Sept. 1993) 574-575 쪽

  9. 313

    집단주의가 서양 민주시장경제를 위협하는 내용은 3장 2-3에 설명되어 있음.

  10. 314

    서양 모든 국가에서 빈부격차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것이 계속되면 수십 년내에 서양정부는 모두 빚에 허덕이는 무기력한 정부로 전락하게 된다. 정당과 비즈니스의 결착은 곧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인간본성에 있는 이기심의 조장, 즉 탐욕에서 유래한다. 민주주의도 똑 같은 논리에 휘둘리게 된다. 정당이 승리하도록 뽑는 것은 일반 주민이다. 그러나 주민들은 긴축을 요구하는 정당보다는 국채로 보조금을 주는 정당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민주주의 이론도 인간본성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 민주주의 라는 제도가 당위성을 가지고 인간사회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존원칙이 인간사회에 군림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본능은 발광체, 이성은 반사체라는 인성론이, 사회계약론이나 형이상학적 이상이 기초하는 인성론 보다 현실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11. 315

    종합주의, 혼합주의, 융합주의와 보완주의는 영어로 syncretism으로 볼 수 있다. 보완론은 서양문명에서 보기 힘든, 그러나 동양문명에서 핵심요소다. 종교와 관련하여 제설종합주의라는 일상 번역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데올로기를 모두 사용하는 것은 융합주의, 인간본성에서 본능과 정신을 합해서 활용하는 것은 보완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12. 316

    Bertrand Russell, Human Society in Ethics and Politics, 金泰吉 역, 《인간사회질서론》, 박영사, p.9.

  13. 317

    Fritjof Capra, The Tao of Physics, 앞의 책, p.55.

    주 277

    Fritjof Capra, The Tao of Physics: An Exploration of The Parallels Between Modern Physics and Eastern Mysticism, A Bantam Books, 1975, pp.108~109 참조

  14. 318

    Carl Sagan, Cosmos, 앞의 책, p.216.

    주 235

    Carl Sagan, Cosmos, 서광원 역, 《코스모스》, 우주, 1981, P.231; L. Barnett, 《우주와 아인슈타인 박사》, p.27, 제2장 5절 참조

  15. 319

    Carl Friedrich von Weizsäcker, 앞의 책, p.216.

    주 272

    Carl Friedrich von Weizsäcker, Die Geschichte der Natur, 姜聲渭 역, 《자연의 역사》, 삼성미술재단, p.215.

  16. 320

    Bertrand Russell, “Mysticism and Logic” (1914), Mysticism and Logic and Other Essays (London: Longmans, Green, 1918), 1장: “Reason is a harmonising, controlling force rather than a creative one.”

  17. 321

    본능은 발광체, 정신은 반사체 라는 동양의 인성론은 서양의 실존주의가 보는 인성론과 유사한면도 있지만 다르다. 유사점 및 차이점이 있다. 동양의 인성론은 본능의 범위내에서 정신의 역할은 행하게 된다. 정신의 선택을 회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존주의는 인간을 “자유의 형벌을 받은 존재”로 보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본질보다 실존이 중요하다는 실존주의 철학에서 동양의 인성론과 차이가 있다. 서양의 전통 철학은 인간의 본질을 먼저 규정하려 했지만, 실존주의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를 강조하면서 인간은 태어나면서 정해진 본질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본질을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인성론을 예정하고 있다. 동양의 인성론과 차이점이다. 동양 인성론은 본질과 실존이 연계되어 있으므로, 실존(정신)은 본질(본능)이라는 한계내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18. 322

    중국의 전국시대에는 서양종교의 선악의 개념이 아직 동양에 유입되기 전이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본성이 선악적으로 선하다가 아니라 좋다, 착하다 정도가 정답이다. 이를 서양의 선악개념을 도입하며 선을 악의 절대적인 반대개념으로 분석하기 시작하면 맹자의 생각을 잘못 읽게 된다. 순자의 성악설도 마찬가지다. 惡자는 악과 오 라는 두 가지 읽는 방법이 있다. 순자의 인간본성에 대한 설명은 性惡說은 성악설이 아니라 성오설로 읽자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순자의 성악설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성오설이라는 표현 보다는 성악설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다.

  19. 323

    神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은 목적이 분명하고 “행동”이 확실해야 한다, 즉 유위를 중시한다. 불현의 도를 믿는 문명에서는 무위를 중시한다. 무위는 글자 그대로는 “무행동”이지만, 때를 맞춘 움직임 즉 위무위(爲無爲)를 의미한다.

  20. 324

    윤리의 근원을 찾는 서양의 노력은 부활론과 초인론도 포함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신이 죽어서는 안 되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부활론(resurrection)을 주장하였고, 니체는 도덕적으로 인간이 계시종교의 神을 대체하자는 초인론(superman)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초인론은 이데올로기 시대의 실패를 거치면서 거의 소멸하였다. 부활론은 전통적인 계시종교의 영향 등으로 계속 살아남아 있다.

  21. 325

    Jeremy Bentham, An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 (White Dog Publishing, 2010), Kindle edition, locations 236–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