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양의 동양문명에 대한 부정적 평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서양은 동양 문명에 대하여 오랜 시간 동안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중요하고 흥미로운 사실이 우리에게 잘 안 알려져 있을까? 이러한 중요하고 흥미로운 사실이 잘 안 알려져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서양의 동양문명에 대한 계몽시대 초기의 긍정적 펑가가 계몽시대 후기로 접어 들면서 180도 방향을 바꾸어 부정적으로 변하였기 때문이다. 계몽시대 이후는 서양의 산업혁명 시기와 일치한다. 산업혁명으로 서양은 서세동점, 동양을 물리적으로 정복하기 시작했다. 증기선과 대포로 무장된 서양 함선 앞에서 동양의 목선은 그야말로 쥐 앞의 생쥐처럼 쓰러졌다. 산업혁명 이전과 이후의 서양의 동양에 대한 평가는 문명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에 의거한 평가로 변하였다. 압도적인 서양의 지위는 당연히 동양 문명에 대한 평가를 긍정에서 부정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계몽시대 초기에 서양의 사상가들은 유럽의 군주들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개인의 사상은 물론 경제 생활에 세세히 간섭하고 있을 때, 동양에서 군주가 윤리의 제약을 받으며 백성의 생활에 간섭을 최대한 줄이는 통치 행위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동양 군주를 “계명된 전제군주 (enlightened despot)” 라는 당시 서양에서 추구하려고 하던 롤 모델이 시현된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계몽시대 후기로 들어가면서 서양 사상가들은 군주제가 아닌 공화정을 꿈꾸며 그리스-로마 식 민주정체를 모델로 하면서 동양의 계명된 전제군주에 대한 평가를 부정적으로 바꾸기 시작하였다. 서양 사상가들이 공화적을 꿈꾸면서 중국의 전제군주에 대한 호기심과 호의가 비난과 혐오로 대체되게 된다.
프랑스 백과사전학파의 지도자로서 계몽시대를 주도한 디데로(Denis Diderot, 1713–1784)는 계몽사상가들 중에서 자신의 생각을 바꾼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초기에 동양문명을 서양문명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특히 종교와 윤리적인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는 중국적인 것들을 비과학적이고 편견에 차있다고 폄하하였다. 그는 서양이 본받아야 할 것은 루소가 제시한 “고상한 야만인”이며, 더 이상 중국의 자연철학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헬베티우스(Claude Helvétius, 1715-1771) 역시 생각을 바꾼 사상가 중의 하나다. 중국의 계몽전제군주를 좋게 평가하던 태도를 180도 바꾸어 중국의 황제를 계몽되지 않은 압제자라고 비판하였다.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와 콩도르세(Condorcet, 1743-1794) 또한 중국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은 자유의 부재가 중국의 정치적, 윤리적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고 보았다.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는 특히 동양의 문명 자체가 자유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정의하였다. 중국의 정체성이 공포를 조장하는 압제정권이라며, 동양에는 정치적 자유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19세기 서양은 그들의 세계정복의 마지막 목표인 동양을 식민지화하는데 몰두하게 된다. 동양은 서양의 압도적인 과학과 군사력 앞에 힘없이 무너진다. 동양은 서양 세력의 동양 점령, 즉 서세동점이라는 미증유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당연히 서양은 동양에 대한 평가와 인식을 더욱 새롭게 부정적으로 하기 시작하였다. 물리적인 지배의 흐름을 타고 사상적으로도 서양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생각과 철학 체계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은 헤겔(Friedrich Hegel, 1770-1831)이나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 등 서양역사철학자 들에 의하여 체계화되었다.
헤겔은 세계역사의 진보적인 흐름에 있어서 서양이 가장 선두에 있으며, 따라서 미래를 위한 진정한 발전은 오직 서양만이 이룩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방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헤겔은 동양의 문명이 세계사의 흐름에서 뒤떨어져 있으며, 서양은 동양문명에 대하여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소위 헤겔리아니즘의 핵심이다. 랑케는 헤겔을 신봉하였다. 그는 동양세계가 서양의 정신에 예속되게 된 것이 세계사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고 커다란 기쁨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식민정책과 세계정복이 결국 전세계에 서양문명을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서양의 동양에 대한 시각 변화는 곧 사상적인 측면을 떠나 인종적인 편견으로 파급되었다. 계몽시대 초기에 서양이 동양사상을 서양보다 우월한 것으로 보고 이에 경도되었을 때는 동양인을 “백인”으로 분류하였었다. 그러나 계몽시대 후기 이후, 특히 서양의 세계정복이 이루어 지면서, 동양인은 “황색인”으로 둔갑하게 된다.192 서양의 백인 보다 문명적으로 열등할 뿐 아니라, 이것을 인종적인 이유로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결국 그들의 세계정복과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서양인들 사이에 세계를 정복하고 미개한 세계를 계도하는 것이 “백인의 의무”라는 생각이 발전되어 나오게 된다. 동서양의 관계에 대하여도 라이프니츠의 동서양 교류에 대한 희망과 낙관적인 견해와 반대편에 서게 된다. 동서양은 아주 다른 문명을 가지고 있고 서양이 월등 앞서 있기 때문에 교류 같은 것은 불필요하다는 견해가 유행하게 되었다. 영국의 시인 키플링(Kipling)은1895년에 발표한 “동양과 서양의 발라드(Ballad of East and West)” 라는 시에서 이를 압축하여 표현하게 된다:
동양은 동양, 서양은 서양이다. 이들 둘은 서로 만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최후의 심판의 날 대지와 하늘이 심판대에 서게 될 그 때까지.193
이러한 풍조는 과거 동양에 관한 긍정적인 평가에 대한 시정 작업도 포함하게 된다. 한 예로 서양의 르네상스에 결정적이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서양의 사상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아온 몽골제국에 대한 평가도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근대와 현대에 와서 특히 18세기 산업혁명과 뒤이은 세계정복이 이행되는 시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서양은 징기스칸과 동시대인 13세기, 그리고 그 직후 14-15세기 르네상스 시대와 17-18세기 계몽시대 이전까지 이르는 수백 년 동안은 몽골과 징기스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거의 평가에 대한 시정작업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웨더포드 교수는 서양인들이 그들이 처한 입장에서 그들의 필요에 따라 징기스칸과 몽고인을 보는 시각이 시대적으로 어떻게 근본적으로 바꾸어 왔는지 흥미로운 분석을 제기하고 있다. 이때 서양인 들은 인종적인 편견에 입각한 평가를 쏟아내게 되었다:
유럽의 거의 모든 과학자들은 인류를 아프리카인, 아시아- 몽골인, 그리고 유럽인의 3대 인종으로 분류하는 방안을 받아들였다…그리고 가장 진화한 유럽 백인종에 비하여, 아시아 몽골인들은 신생아 상태에서 성장을 멈춘 정도의 저능아로 기술되기 시작하였다…그 이후 이들은 원숭이 오랑우탄과 아주 가까운 것으로 취급되었고… 심지어 의학적으로 저능아 들을 몽골로이드 (Mongoloid) 라는 명칭으로 부르기까지 하였다.194
이러한 인종적 편견은 서양문명에서 연속성을 가진다. 그리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동양을 혐오하는 소위 그리스 시대의 “오리엔탈리즘”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근-현대에서 서양에서 확대 재생산된다.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싸움에서 나타난 “오리엔탈리즘”의 열등성을 전세계로 확대하여 이와 비교한 서양의 우월성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대표적인 서양 역사가는 바로 위트포겔 (Karl August Wittfogel, 1896–1988)이다. 그는 “동양의 전제주의 (Oriental Despotism)” 라는 저술에서 유럽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모두 “수자원과 농업을 근간으로 한 문명” (hydraulic civilization) 이 발달하였는데 이는 모두 전제주의를 낳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근동, 중동, 극동은 물론 다른 지역의 문명까지를 모두 전제주의로 보고 오리엔탈리즘으로 한데 묶어 서양과 비교하자는 생각을 폈다. 바로 “서양과 그 나머지 세계” 라는 이분법이다. 당시 세계로 뻗어 나가 천하무적의 지위를 누리고 있던 서양의 시대정신과 꼭 맞아 떨어지는 책을 출간한 것이다. 그의 책은 서양인들 사이에 주목을 받고 많이 인용되기에 이르렀다.
오리엔탈리즘의 기원과 의미에 대하여 “신동아-서울대 HK 문명연구 사업단 공동기획-문명의 교차로에서”로 연재된 기고에 통찰력 있는 설명이 있다:
BC 472년에 공연된 비극 ‘페르시아인들’은 페르시아 전쟁을 극화한 것으로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 제국과 교류하고 충돌하면서 무엇을 성찰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페르시아의 전제정치와 위계질서, 엄청난 부와 사치, 감정표현의 과도함, 무질서, 비겁함에 대해서 그리스의 민주정치와 평등주의, 검약과 절제, 자기훈육과 질서, 용감함을 맞 세운 것이다… 비극 ‘페르시아인들’의 분석과 해석을 계승한 헤로도토스는 서양과 동양, 유럽과 아시아, 그리스인과 비(非)그리스인, 전제정치와 민주정치의 이분법을 더욱 발전시킨다. 이렇게 하여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하다는 이데올로기가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서 오리엔탈리즘이 시작되었다.195
지금 동서양에 알려진 우리에게 알려진 몽골제국, 몽골인, 몽골평화(Pax Mongolica)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인 사실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근 현대에 와서 이루어진 인종적인 편견에 휩싸인 평가인 것이다.196 마찬 가지로 오리엔탈리즘 등으로 그리스와 근동의 문제를 전세계로 확대하여 동아시아까지 포함하면서 서양의 우월성을 철학적으로 내세운 것이다.
동양에서 왜 서양처럼 과학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느냐에 대하여는 많은 설명이 제시되었다. 동양의 글자, 특히 중국의 표의문자, 과거 지향적인 사상체계, 분석적이니 못한 철학, 농업기반의 전통적인 경제체제, 해금-쇄국 정책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동양 국가들이 쉽사리 그리고 빨리 서양의 과학기술을 습득하는 것을 보면서 이러한 설명과 이유들이 하나씩 모두 근거를 잃게 되었다.
이렇게 잘못된 답을 끊임없이 도출하는 경우에는 그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왜 다른 문명에서는 서양처럼 과학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다분히 서양중심적이고 또 과학기술은 당연히 모든 문명에서 발달하여야 하는 것인데 그 문명에 어떤 장애나 잘못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을 가정하고 출발하는 질문이다. 그래서 서양 사상가들은 과거 수십 년간 동양문명에 내재된 서양과 다른 점을 찾아내며 거기에 책임을 전가하곤 하였다. 즉 동양에서 왜 서양처럼 과학 기술이 발전하지 못하였는가 하는 질문 보다 왜 서양에서 동양보다 훨씬 앞선 과학 기술이 발달되어 나왔는가 하는 질문이 더 올바른 답을 도출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서양의 해양문화적인 성격, 기하학의 필요성과 발달, 중상주의에 의한 국가간의 극심한 경쟁, 개인의 창의력과 경제력 신장의 필요성 등등 서양에만 있는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다른 문명에서는 없었던 놀라운 과학기술을 산업혁명으로 연결하였던 것이다. 다른 문명에 관한 한 문제의 핵심은 왜 과학기술을 스스로 발달시키지 못하였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배우고 흡수하는데 한 문명이 어려움을 겪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 측면에서 동양문명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흡수하고 습득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이러한 편견은 동양사상에 내재하는 진정한 가치에 대하여 동서양이 모두 눈과 귀를 닫아 버리는 상황을 북돋우고 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동양사상이 가지고 있는 서양과 다른 우주관, 인간-자연의 관계, 보편적 윤리관, 그리고 인간본성에 대한 서양문명과 다른 철학체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17-18세기 서양의 계몽시대에 서양으로 유입되어 크게 환영받고 평가받았던 동양 사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특히 이를 통하여 동서양의 정치경제 사상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2) 산업혁명 이전의 동서양
동양에 대한 서양 우위의 이미지는 대부분 서양인들에 의하여 만들어 졌고 거의 그대로 동양에 전파되고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우리는 쉽사리 동양이 서양에 비교하여 역사적으로 계속 뒤떨어진 위치에 있었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은 역사학자와 사상가들에 의하여 기술되어 왔다. 웰스는 동서양의 비교에서 균형 잡힌 역사적 시각을 보이고 있다:
오랫동안 중국은 서양보다 우월했다. 서양 세계가 중국을 다시 따라잡기 시작한 것은 16, 17세기에 아메리카의 발견, 인쇄된 책자와 교육의 전파, 그리고 근대과학의 여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 번창했던 당나라 때, 예술적이지만 약간 타락했던 송나라(960~1279) 때, 그리고 문화적이었던 명나라(1368~1644) 때 중국은 번영했고 행복했으며, 당시 문화와 예술 등은 어느 나라보다 앞서 있었다. 197
서양의 최고 중국문명 권위자 중의 하나로 알려진 니담(Joseph Needham, 1900-1995)도 그의 책 “중국의 과학과 서양” 에서 동서양 관계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20세기 후반에 사는 우리가 아직도 19세기적 생각에 압도되어 3, 4세기 전만 해도 유럽보다 중국이 더 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198 BC 1세기부터 기원후 15세기까지 자연에 대한 지식을 인간의 실제적 필요에 적용하는 데 있어 중국문명이 서양문명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199
니담은 2차대전 종전 후 옥스퍼드 대학에 중국문명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제안하여 이 계획이 받아들여져 중국과학과 문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저작을 시작하였다. 이 연구에서 니담은 주철술(철을 녹여 일정한 형태의 모양으로 만드는 기술로서 그릇이나 대포의 제작에 사용), 보습(또는 쟁기날), 말의 등자의 동양 발명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말의 등자는 동양에서 3세기경에 발명되었으며 서양에는 중세시대에 유입되었다. 등자의 사용은 인간의 말을 사용한 기동력과 전쟁능력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크게 향상시켜주었다. 문명의 발전에 기여한 정도가 바퀴의 발명이나 인쇄술의 발명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크다는 평가가 있을 만큼 등자의 발명은 중요성을 지닌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종이, 화약, 인쇄술, 나침반 등의 발명이 모두 중국에서 이루어 졌음을 증명해 내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까지만 해도 서양은 물론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대부분의 발명은 서양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믿고 있었다.200 20세기 중반 이후, 서양에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니담의 연구 덕분에 이러한 중요한 발명들이 동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받아들여 지게 되었다. 이에 이어서 곧 니담을 필두로 서양에서는 그렇다면, 왜 중국은 천년 또는 수백 년이나 앞선 문명, 과학, 기술이 계속 발전하지 못하고 서양에게 따라 잡히게 되었나 하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니담의 질문 (Needham’s Question)으로 알려진 이 중요한 의문은 20세기 중반 서양의 많은 과학자와 사상가들의 관심사항이었다.201 웰스도 니담 이전에 이미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것을 달성했던 중국이 왜 더 이상 성취한 것이 없었는가? 이 기간 동안 중국은 해양으로 진출했고, 상당한 해외무역을 하고 있었다. 왜 중국은 아메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지 못했는가? 202
니담이나 웰스처럼 역사를 살펴본 사상가들은 긴 역사 속에서 동양문명이 서양보다 우월하던 시기가 오래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서양이 동양을 모든 면에서 압도하고 있는 최근 2-3세기 동안은 각 문명의 상대적 위치에 관한 이러한 시각은 적실성이 없었다. 결국 서양에서는 물론 동양에서도 동양 문명의 서양 전파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거의 모두 믿을 수 없는 시각으로 보고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20세기 후반에도 동양 경제의 역사적 흥기가 폭발적으로 현실화되기 전 까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서양인인 웰스나 니담이 동양이 서양보다 문화 면에서 오래 앞서 있었다는 유리한 평가를 가볍게 하였을 리도 없고, 또 그들의 방대한 역사적 지식으로 미루어 볼 때도 지어낸 이야기일 리도 없다. 사실 역사를 잘 살펴보면 웰스나 니담의 이러한 동양에 대한 시각은 18세기 이전에는 서양에서 지배적인 시각이었다. 아담 스미스가 그 한 예이다. 아담 스미스는 1776년에 저술한 그의 책 국부론에서 중국의 번영을 기술하고 있다. 중국은 18세기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의 하나였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의 하나다. 다시 말하면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농토는 기름지고, 사람들은 부지런하며 세련되었다. 그러나 오래 동안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르코 폴로가 500년 전에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중국의 문화, 산업, 그리고 많은 인구를 기술하였는데, 오늘날 중국을 여행한 사람들도 유사한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아마도 오래 전에 중국의 법체계와 제도가 허용하는 최대의 부를 이미 창출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여 진다.203
웰스, 니담, 아담 스미스의 이러한 시각을 우리가 받아들일 경우, 우리는 서양이 동양을 본격적으로 따라잡고 우위를 차지한 것은 지난 2-3세기, 즉 18세기 이후에 한정되어 있다는 아주 흥미롭고 중요한 역사적 시각을 가지게 된다. 그럴 경우 우리는 과거 2세기에 한정된 지배적 서양의 시각에 우리를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19-20세기의 상황의 포로가 되어서는 과거를 이해할 수도 없고, 21세기에 펼쳐질 미래를 설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20세기 상황이전의 오랜 역사를 되돌아보며 동서양의 부침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 이전, 동양문물의 서양 전파
동서양의 문명은 19세기에 서양이 동양으로 본격적으로 다가올 때까지 수천 년간 근본적으로 서로 격리된 채 발달되어 왔다. 진정한 문명을 이루는 기본단계들인 문자, 금속사용, 사회조직, 계시종교, 자연철학 등은 모두 동서양이 격리된 채 각각 개발한 것이지, 서로 긴밀한 영향을 미치거나 외부로부터 유입된 것이 아니다.204 두 문명을 이어주는 것은 가느다란 비단길 즉 실크로드 만이 있었을 뿐이다. 동서양간에 전파된 어떤 문화적 요소도 이 극도로 가느다란 통로를 따라 중앙아시아의 산맥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본질적인 것만 제외하고는 모든 특성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실크로드는 동서양간에 사상적으로 긴밀한 상호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 가늘고 너무 길었다.205
실크로드는 흔히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육로와 함께 해로도 중요하였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육로만 표현하는 실크 로드(road) 라는 어휘대신 통로의 의미인 실크 루트(route)라는 어휘가 더 정확하다고 보고 있다. 동서양을 연결하는 육로와 해로로 구성된 실크루트는 BC 1세기에 본격적으로 개척되어 동서양 무역 통로가 되었다. 1497년 바스코다가마에 의하여 대서양과 인도양을 잇는 동서양 직항 항해로가 개척되기까지 1700년 이상 동서양을 연결하여 주는 유일한 통로로 활용되었다.
실크 로드를 통하여 주로 오간 것은 가볍고 값이 나가는 귀중품이었다. 수 천년 간 중국의 비단이나 향료가 서양으로 팔려나갔고, 서양에서는 유리제품과 비단을 사기 위한 귀금속이 중국으로 실려왔다. 실크가 단연 가장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그래서 그 길을 실크로드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BC 1세기에는 중국 한나라와 로마제국의 세력이 동서양에서 각각 견고해지고 확장되면서 실크로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에 이르렀다.
이 기간 동안 중국에는 로마제국을 대진국(大秦國)으로 표현하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로마시대의 문헌에 중국의 비단이 로마로 많이 팔려 나간 기록이 있다. 로마에서는 이에 대한 경계심까지 표명할 정도였다:
로마의 원로원은 여러 차례 경제적인 그리고 도덕적인 이유에서 로마시민이 비단 옷을 입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 켰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그것은 중국에서 비단을 수입하기 위하여 로마제국의 많은 양의 금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비단옷은 사치스럽고 부도덕한 것으로 치부되었다.206
기원 3세기 로마 원로원 의원인 세네카는 비단 옷의 “부도덕한 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나는 비단 옷이, 몸의 곡선을 감추어 주지 못하고 더구나 비단 옷을 입는 사람의 존엄성을 지켜주지 못하는데도, 옷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부정한 여인들의 몸매가 엷은 비단옷을 통하여 밖으로 그대로 들어 나서 손님이나 주인이나 자기 부인의 몸매에 대하여 같은 지식을 가지게 될 수 있는 것을 보고 수많은 여인들이 다투어 비단옷에 열성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207
동서양간의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은 간접 교역이었다. 즉 유럽의 서양과 동아시아의 동양 사이에 존재하던 중앙아시아와 중동 여러 나라의 상인이 중개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중개인 없이 서양에서 최초로 동양을 직접 방문하여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긴 서양인은 마르코 폴로였다. 14세기에 일어난 일이다. 물론 마르코 폴로 이전에 천주교 신부들이 간헐적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기록을 남겼으나, 동양을 서양에 본격적으로 알린 것은 마르코 폴로였다. 13세기에 실크로드를 통하여 동양에 갔던 마르코 폴로는 귀로에는 실크루트 바다를 통하여 돌아온다.
마르코 폴로는 동양에서 보고 온 것을 13세기말에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자로 남겼다. 그의 여행기는 유럽에 동양문명을 소개한 최초의 책자가 된다.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1492년 대서양을 건너 미국을 발견한 콜럼버스도 그 중의 하나다. 콜럼버스는 동방견문록에 주석을 달아가며 열심히 탐독하고 서양에서 동양으로 이르는 직항 항해로를 개척하여 동양에 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을 통하여 동양의 문물을 소개하였는데 이 때 소개된 동양의 문물 중에는 여러 종교에 대한 관용적 태도, 지폐 사용, 활자 인쇄술, 석탄 활용, 만리장성과 대운하 에 대한 설명이 있다. 대다수의 서양인들은 마르코 폴로 시대 사람은 물론 그 후에도 수세기 동안 믿지 않았다. 문명의 기초가 너무 다르고, 크기의 차이가 커서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종이조각을 금이나 은 대신 사용할 수 있는가, 무슨 검은 돌 조각을 태워서 연료로 쓸 수 있는가, 어떻게 손으로 일일이 필사하여 만드는 책을 활자라는 것으로 또 종이라는 것을 사용하여 대량 생산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떻게 神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인간사회가 가능하며 또 한 국가에 몇 가지 종교가 공존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 등을 품고, 마르코 폴로가 허풍을 떤다고 본 것이다. 이 모두 이해하거나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이나 질문은 아직 중세 암흑시대를 살고 있던 서양인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특히13세기말 정치 경제 인구 등 모든 것이 작은 규모였던 서양인 들에게 마르코 폴로가 전한 동양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나 일에 연관된 인구나 물질의 단위가 툭하면 수백만을 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15세기 말까지도 영국의 인구가 3백만 정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 서양인들에게 백만이라는 단위는 몇 개 나라를 동원하여야 가능한 숫자로 여겨졌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마르코 폴로를 “백만의 사나이” (Il Millionare) 라고 부르며 조롱하였다. 마르코 폴로의 임종 때 그 친우들은 영혼의 평화를 위하여 《동방견문록》에 수록된 허다한 거짓말을 회개하도록 권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르코 폴로는 한숨을 쉬며 나는 내가 본 동양의 놀라운 일을 그 절반도 기술하지 못하였다고 하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유럽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허황된 것으로 확신하였으며, 따라서 그를 허풍쟁이, 거짓말쟁이의 대명사로 삼았다. 서양에서 황당하다고 생각되는 말을 하는 사람을 “마르코 폴로” 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서양인들이 바스코다가마가 1497년에 개척한 대서양-인도양 직항로를 따라16-17 세기에 동양에 직접 와서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 기술한 것이 대부분 사실이었음이 확인될 때까지 약 300년간 계속되었다.208
이렇게 서양이 동양의 새로운 풍모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중세 “암흑시대” 때문이다. 서양이 근 천년 간의 중세 암흑시대를 겪는 동안 동양은 문물 면에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게 된 것이다. 천 년의 격차를 둔 이러한 동양의 발전된 문물과 사상은 두 차례로 나뉘어 서양에 도달하고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첫째는 동양의 문물이고 두 번 째는 동양의 사상이다.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대 제국을 건설하여 약 2세기 동안 모든 교역을 활발하게 진작시킨 “몽골 평화”(Pax Mongolica) 기간 동안 동양의 발명품들이 본격적으로 서양으로 유입되면서, 서양의 르네상스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그 이후 동서양간 처음으로 직접적인 인적 접촉을 통하여 동양의 사상이 서양에 유입되면서 서양의 계몽주의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직항 항해로를 통한 동서양의 직접적인 접촉은 16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실크로드가 여러 나라의 관할아래 각종 국경을 통과해야 했다. 예외가 있었다면 몽골이 동서양을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할 때였다. 몽골제국은 도로와 다리를 크게 확장시키고 새로 건설하면서 제국 내에서는 물론 동서양간 자유로운 교역과 문물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진흥시켰다. 이때 동양의 발명품들이 서양에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이다.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 지르는 인류 최대의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여 몽골 평화를 정착시킨 덕분이다. 그 이전에는 실크 로드를 통하여 막연하게 동양문명이 존재한다는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한된 교통 통신의 수단 밖에 가지지 못했던 인류는 동서양간에 서로를 잘 이해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12세기까지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양 여행에는 편도에 2-3년이 소요되고 있었다.
몽골 평화 시기에 문물의 흐름은 동양에서 서양으로 일방통행이었다. 서양은 당시 약 천 년에 걸친 중세 암흑세계를 막 벗어나려고 꿈틀거릴 시기이므로 동양에 줄 것이 천주교라는 계시에 의한 종교뿐이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동양에는 도교와 유교를 중심으로 한 자연철학체계가 확고히 성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양의 계시종교가 파고들 틈이 없었다. 그래서 동양의 문물이 일방적으로 서양에 전래되게 되었으며, 이때 전래된 동양의 문물이 서양의 르네상스의 시작과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징기스칸과 근대세계의 출현”(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이라는 책에서 웨더포드 (Jack Weatherford) 교수는 몽골의 평화가 르네상스에 미친 영향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의 기술, 전쟁, 의복, 상업, 음식, 예술, 문학, 그리고 음악까지 모두 몽골의 영향으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유럽인 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긴 도복과 스커트 대신 바지와 상의를 입게 되었다. 악기를 손가락으로 뜯으며 연주하는 대신 몽골이 초원에서 사용하던 활로 연주하게 되었다. 또 미술도 새로운 방법으로 그리게 되었다.209
서양인 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몽골로부터 배운 바지를 입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우리가 그리스인들, 로마 원로원 의원, 중세 수도사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수천 년 동안 긴 도포 자락을 입었던 것이다. 또 현악기는 손으로 뜯어 연주하는 하프가 역시 수천 년 동안 서양의 현악기였으며,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비로소 현악기의 줄을 활로 켜는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발달되어 바이올린이나 첼로가 된 것이다.
중세 암흑시대 천 년을 견뎌온 서양은 몽골의 평화 덕분에 많은 동양의 경이로운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우리가 흔히 꼽는 중국의 4대 발명품인 종이, 화약, 인쇄술, 나침반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문물이 14세기 전 세계를 휩쓴 흑사병에서 살아남아 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 서양인 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의 시작이다. 이러한 문물은 예를 들면 종이 같은 것은 그전에도 중앙아시아와 중동에 있는 여러 나라 상인들의 중계를 거쳐 서양에 도달한바 있다. 그러나 말과 글, 습관과 문화가 다른 여러 나라 상인들의 중계를 거치면서 교역품을 제외한 기술이나 문화, 사상의 본질은 대부분 희석되거나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몽골의 평화 기간 동안에는 막대한 물량의 동양 발명품들이 계속적으로 서양으로 유입되면서, 서양의 문명의 발달과 도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종이와 인쇄술의 서양유입이 책의 물량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켜 르네상스를 도래하게 하는데 기여한 바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도 당초에는 손으로 일일이 베끼는 필사본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콜럼버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인쇄본이 퍼져서 콜럼버스도 동방견문록을 인쇄본으로 읽을 수 있었다. 또 나침반의 서양 유입은 15세기말부터 대거 시작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 항해를 결정적으로 수월하게 하였다. 이때 동양의 주철술(iron cast)과 화약의 사용을 융합하여 서양은 우수한 대포를 만드는데 성공하였고, 대포가 서양의 세계정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음은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15-16세기 르네상스가 14세기부터 시작된 몽골의 평화 덕분에 서양에 자유롭게 유입되기 시작한 동양의 문물의 덕분이었다면, 르네상스를 뒤 있는 17-18세기 서양의 계몽시대에는 동서양간의 직접 접촉에 의하여 동서양간의 사상의 교류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때도 역시 사상의 흐름의 방향은 동양사상의 일방적인 서양 유입 쪽이었다. 서양은 계시종교의 각종 비이성적인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동양의 자연철학 사상 체계가 서양 쪽으로 흐르게 된 것이다.
계몽시대, 서양의 동양문명에 대한 긍정적 평가
동서양은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컫는 히말라야-쿤룬 산맥에 의하여 갈라져 서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수천 년을 지내며 각각 특성을 가진 문명체계를 구축하고 지내게 된다. 이렇게 상호 격리되어 발달된 동서양 문명 간의 실질적인 사상적 교류는 결국 16-17세기에 이르러서야 가능케 된다. 그것은 바스코다가마가 개척한 대서양-인도양 항로를 통하여 서양의 천주교 선교사들이 청나라의 북경에 거주하게 되면서 비롯되었다.
천주교 신부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다. 마테오 리치는 1582년 30세 때 마카오에 도착하여 28년을 중국에서 살며1610년 58세의 나이로 북경에서 죽을 때까지 중국어와 문화를 익혔다. 중국 황실의 고문 역할을 하면서 서양 神의 개념을 동양에 소개하는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중국어로 발간하였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유교를 배웠다. 죽어서는 북경에 있는 불교사원에 묻혔다.
마테오 리치는 우리나라와도 관계가 있다. 그는 북경에서 조선의 사절로 온 이수광(李睟光)을 만나 그에게 서양문명과 기독교 교리를 전수하였다. 이수광은 귀국 후 1614년 (광해군 6년)에 지봉유설(芝峰類說)이라는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을 저술하면서 천주교를 언급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기독교를 통하여 서양사상을 중국에 전파하는데 열심이었지만, 논어 등을 번역하여 유럽에 전파함으로써 동양사상을 유럽에 전파하는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때 공자는 그 이름을 라틴어화 한 Confucius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때 동양은 무엇을 서양에서 배우고 느끼게 되었을까? 동양은 서양의 초상화 기법과 시계 같은 정밀기계와 세계지도 등에 관심을 표하게 된다. 그러나 철학과 사상 면에서 서양이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은 계시종교, 즉 천주교였다. 그러나 이미 동양이 천주교에 대하여 과거 당, 송, 원나라 때의 접촉을 통하여 상당한 정도로 인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 서양의 계몽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자연철학 체계를 이미 갖추고 있었던 동양이 계시종교에 커다란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서양 계몽시대인 17-18세기 사상의 흐름은 동양의 자연철학이 서양에 영향을 미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중국인으로서 최초로 서양을 방문한 사람은 중국에 거주하던 서양 선교사 쿠플레(Couplet) 가 천주교 신자로 개종시킨 중국인 심복종(沈福宗, Shen Fuzong)이다.210 그는 미카엘(Michael)이라는 세례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1681년 마카오를 떠나 유럽으로 가게 된다. 심복종은 이태리, 프랑스, 영국을 방문하였고, 쿠플레와 함께 런던, 베를린, 비엔나를 방문하여 학자들과 만났으며, 중국어, 동양철학 등에 대한 질문에 답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84년에는 프랑스 왕 루이 14세를 알현하고 국왕 만찬에도 참석하여 젓가락 사용법과 한자 쓰기를 시연하였다. 1685-1688간 영국에 머무른다. 영국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영국 왕 제임스 2세를 알현한다. 제임스 2세는 영국을 방문한 최초의 중국인인 심복종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의 초상화도 그리게 하여 왕궁에 걸어 놓았다. 211 그는 1688년 영국을 떠나 포르투갈로 가서 예수교 신부가 되었다. 그 후 중국으로 향하는 귀로에 1691년 모잠비크 근처에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212
마테오 리치와 심복종 등을 통하여 서양의 사상가들은 동양의 문화에 처음으로 직접 접하게 된다. 이때 서양의 사상가들은 동양사상에 대하여 편견 없는 신선한 호기심을 표하고 평가를 하게 된다. 서양의 계몽시대인 17-18세기에 동양 유교를 중심으로 한 정치윤리와 도교를 중심으로 한 정치경제 두 방면에서 동양사상이 서양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양의 사상가들은 계속되는 종교개혁으로 비롯된 신-구교 사이의 무자비한 살육전을 겪으며 서양 종교의 도그마와 불관용성에 진저리를 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이들은 동양사상에서 神의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자연 우주관과 윤리체계를 발견하고 놀라움과 경탄을 표시하였다. 그들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이미 이루어진 문명을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 (Gottfried Leibniz, 1646-1716) 같은 사상가가 대표적으로 동양문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동서양 문명의 교류에 대한 커다란 기대를 표하고 있었다:
인류가 성취한 가장 빛나는 두 개의 문명을 우리 대륙의 양단에, 곧 유럽과 중국에 둔 것은 나에게 운명의 특별한 배려로 생각된다. 신의 섭리는 또한 좋은 여건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바, 가장 발달해 있고 또 서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나라가 서로 팔을 뻗치고 있는 동안 그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서서히 좀더 높은 생활방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213
이 시기 서양의 계몽사상가들은 동양사상이 아무런 도그마 없이, 지극히 관용적으로, 또 정부의 간섭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동양사회에서 정치, 경제, 윤리 면에서 잘 작동하는 것에 대하여 긍정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데멜(Walter Demel) 과 먼젤로(David Mungello) 교수가 이 시기의 서양 사상가들의 동양문명에 대한 시각을 잘 집약하여 정리한 논문과 저술을 발표하였다.
데멜의 시각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서양에게 중국인들이 친절하고 부지런하지만, 결국 무신론자들이며 미신적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서양 철학자들은 여러 면에서 놀라운 측면을 보게 되었다. 즉 동양의 관리들이 출신이나 재산의 유무에 상관없이 개인의 식견과 덕성만을 기준으로 선출되는 것, 학자들이 특별히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점, 여러 가지 통계들이 아주 발달해 있는 점, 특히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도 중국이 아주 풍요를 누리고 있는데 대하여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서양은 이때 중국사람들을 이들이 비록 윤리적이고, 예의 바르며, 머리가 좋다고 하더라도, 성경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며, 종교적 판단을 전혀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서양의 사상가들은 중국이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들의 사상체계 속에 소속되지 않는데 대하여 아주 불편해하였다… 동양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문화적 패턴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중국의 황제들이 농업에 직접 관심을 표시하고 있는데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들은 서양의 군주들에게 중국의 황제처럼 봄에 직접 파종 시범을 보일 것을 권고하였다. 그래서 루이 15세와 16세, 조셉 2세 등 서양 군주들이 파종하는 시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볼테르는 다른 모든 나라가 미신에 젖어 있는데, 중국의 지도층만은 현명하고 이신론적 (deistic)이라고 보았다. 중국에는 최고 지도자와 백성 사이에 서양의 귀족계급 같은 중간 계급이 없는데 대하여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고, 귀족계급처럼 일을 하지 않는 계층이 없는데 대하여 경이롭게 생각하였다. 1692년 종교적 자유를 허용한 중국 강희제의 관용조칙 (Edict of Tolerance)에 대하여 놀라며 지나치게 관용적이라고 비판까지 하였다. 많은 서양의 사상가들이 중국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나라가 운영된다고 생각하였다. 관료들을 승진시키는 제도가 있고, 관료를 후하게 대하고, 뇌물을 받으면 중한 벌을 받는, 그러한 체제가 오랫동안 유지되고 발전된데 대하여 아주 고무되었다. 중국의 군주는 충직하고 학식이 높은 측근들의 보좌를 받아 나라를 다스리는데, 이러한 모델은 그들이 생각하는 “계명된(enlightened) 절대군주”의 모범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윤리는 중국사회의 중심 사상이었고 그 윤리는 신앙심이 깊은 기독교인이 아닐지라도 일반 백성 노력해야 하는 실질적인 목적일 뿐 아니라 누구나 달성이 가능한 이상적인 목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214
먼젤로 교수도 그의 저서 “중국과 서양의 만남 1500-1800 (The great encounter of China and the West, 1500-1800)”에서 또 “서양 계몽주의 시대 속의 유교 (Confucianism in the Enlightenment)” 라는 논문에서 유럽 계몽시대에 서양이 본 동양에 대하여 적고 있다.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볼테르 및 다른 계몽사상가들은 유교의 이성적인 가치관에 입각한 황제가 통치하는 중국이 바로 유럽에서 계몽군주제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군주가 선비관료 조직과 협의를 통하여 통치하는 것에 주목한 것이다. 케네(François Quesnay)는 공자에 대한 존경심이 아주 깊어서 유교를 열심히 유럽에 전파하였고, 그래서 케네 자신이 ‘유럽의 공자’ 라고 불리 울 정도였다. 유교의 5경은 어느 특수한 파벌이 아닌 모든 동양인의 공통된 유산으로 여겨지는데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공자의 교훈은 윤리에 집중되어 있는데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을 뿐 아니라, 실용성 면에서 커다란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유교는 인류에게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수립하는데 유용하다고 보았다. 이점은 특히 종교 없이도 윤리체계가 가능하다는 역사적인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이들은 놀라고 고무된 것이다. 일부 서양 계몽사상가들은 주자학에 담긴 우주론과 형이상학은 유물적이고 무신론적이라고 배격하기도 하였다. 유교 사상은 영국에 18세기에 소개되었는데, 사무엘 존슨은 당시 영국에서 관직이 런던의 자본가들에 의하여 매관매직 되고 있던 것과 비교하여 중국의 능력에 기반한 선비관료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것을 지적했다…특히 중국의 과거제도가 개인의 능력과 지적 성취도를 관직과 연계하고 있는데 대하여 크게 평가하였다. 그래서 중국은 “지식에 기반한 성과주의” (learned meritocracy)의 산 증거로 여겨지게 되었다.215
이러한 중국에 대한 호의적 관심은 서양 귀족의 생활과 건축양식, 그리고 영국식 정원의 발전으로도 나타난다. 당시 프랑스의 베르사유,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상수시의 프러시아 왕가의 궁전에는 모든 장식품과 벽과 천정을 중국식으로 장식한 “중국실” 또는 중국식 방이 있었다. 18세기에 서양에서 유행한 로코코 식의 건축과 장식 방식은 중국식 모델을 본 딴 것이다. 이들은 중국식 비단, 중국식 자기, 차를 고급 취미로 퍼트리면서 좋아하였다. 이러한 문화, 건축, 생활양식의 경향을 당시 유럽에서는 프랑스언어를 따라 “중국풍” 이라는 표현의 시누아즈리(Chinoiserie) 라는 어휘를 사용하였다. 미술에 있어서도 동양의 영향을 받은 와또(Jean Antoine Watteau, 1684-1721)같은 대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유럽 대륙의 왕조들이 이렇게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동안 영국에서는 중국의 영향으로 소위 영국식 정원(English Garden)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바로크 시대까지 계시종교 또는 절대 왕정의 질서를 상징하는 기하학적 균형과 개념을 반영한 잘 정리된 정원이 서양에 유행하고 있었다. 이것이 중국의 자연주의의 영향으로 유럽대륙의 기하학적 정원에서 무질서해 보이기도 하지만 자연스러운 영국식 정원으로 변형하게 된다. 어쩌면 유럽식 봉건 왕조를 가장 먼저 탈피하고 의회 민주주의를 수립하는데 성공한 영국이 자연적인 정원을 선호 한 것은 자연철학의 체계를 정원 구성에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서양 계몽시대 사상가들은 동양 자연철학에 심취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그리고 넓게 동양사상은 17-18세기에 서양사상가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동양사상에 대한 서양의 관심은 두 가지 방면으로 진행되었다. 밸르(Pierre Bayle, 1646-1706),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 1646-1716)와 볼테르(Voltaire, 1694-1778) 등을 통한 유교의 정치윤리사상이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케네(François Quesnay, 1694 –1774), 드 구르네(Vincent de Gournay, 1712 –1759)와 쁘와브르(Pierre Poivre, 1719-1786) 등 프랑스 중농주의(Physiocracy) 철학자를 통한 도교의 정치경제사상이다. 우선 정치윤리사상을 살펴보자.
유교는 계시종교가 아니라 자연철학이다. 유교의 지향목표는 수신을 통한 현실 참여, 즉 정치적인 행동에 있다. 수신(修身)과 애민(愛民) 두 가지가 유교 철학의 핵심이다. 이러한 동양의 자연철학이 17-18세기의 계몽시대에 계시종교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서양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산업혁명 이후 동양문명을 폄하하고자 하던 서양의 풍조 때문에 많이 잊혀지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에 서양 사상가들은 동양문명을 뒤떨어진 문명으로 취급하는 헤겔리아니즘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산업혁명 이전 서양 계몽시대로 되돌아가 보면 서양 사상가들은 동양문명에 대하여 존경의 태도를 보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볼테르다. 그는 공자에 대하여 “인류에게 가장 유용한 지혜를 주었고, 인류의 모든 스승 중에서 다른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지 않은 유일한 스승”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216 이들은 계몽시대에 계시종교 대신에 이신론(Deism, 理神論)을 주장하고 있었다. 어떻게 동양 사상이 서양의 이신론자들에게 크게 어필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서양 사상가들이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인간-자연 관계, 또 이에 의거한 자연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철학은 동양문명이 2천년 앞서서 이미 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서양 계몽시대 사상가들은 서양의 이신론의 표본을 동양의 유교나 도교에서 찾고자 노력했다.
계몽시대 직전 서양인들이 살던 세상의 배경에는 종교개혁과 신-구교 간의 전쟁과 살육전이 오랜 기간 계속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1572년 구교가 신교도들을 새벽에 습격 학살 한 “성 바톨로뮤 축일의 대학살”이 있었고, 유럽 전역에 걸쳐서 신-구교 지지세력간 30년 전쟁 (1618-1648)이 일어나고, 프랑스는 신교도 위그노들에게 신앙생활을 인정하였던 1598년의 낭트 칙령(Edict of Nantes)이 1684년에 폐기되면서 신-구교 간의 피비린내 나는 갈등이 재연되는 등 종교의 불관용성이 극에 달하였다고 보아도 좋을 만큼 인간생활에 커다란 피해를 미치고 있을 때였다. 바로 이시기에 동서양은 처음으로 사상의 교류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즉 동양의 道와 서양의 神이 동서양의 사상가들을 통하여 접촉과 대화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당시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서양의 윤리관은 철저히 종교주의적이었다. 즉 神과 종교로부터 윤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았다. 동양의 윤리관은 자연적이다. 즉 자연 속에서 그 변하지 않는 원칙인 道를 발견하고 이것을 인간사회에 적용한 것이 동양의 윤리관이다. 그래서 서양의 이신론자들은 유교에서 神이 개재되지 않은 동양의 자연주의적 윤리관에 접하면서, 놀라움과 존경을 표시하게 된다. 또 이들은 당시 중상주의 정치경제 철학아래 국가가 개인의 모든 경제활동에 간섭하고 있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던 시절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동양에서 도교의 무위사상에 의하여 국가가 개인의 경제활동에 간섭하지 않는 데도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보고 또한 놀라움과 존경을 금 할 수 없었다.
16세기에 이미 동양사상에 관심을 표시한 프랑스 철학자로 수필가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가 있었다. 몽테뉴는 인본주의에 입각하여 당시 서양 종교의 불관용성을 비판하였는데, 이때 유럽으로 간헐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동양사상을 준거로 많이 사용하였다. 1687년에는 파리에서 라틴어로 유교에 관한 책, “중국의 철학자 공자(Confucius Sinarum Philosophus)” 라는 책이 출간되어 서양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읽히게 되었다. 217 이러한 배경아래 17-18세기에 동양사상을 본격적으로 서양에 소개하기 시작한 프랑스 철학자로 중에 밸르와 말브랑슈가 있다.
밸르(Pierre Bayle, 1646-1706)은 종교의 불관용성 뿐 아니라 절대진리를 발견하였다고 하는 모든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주장을 비판하고 공격하는데 집중하였다. 이때 밸르에게 아주 유용하게 쓰인 것이 바로 형이상학에 무관심하고 종교적 취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고, 진리는 인간이 달성할 수 없는 것이라는 “道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道가 아니다” 라는 명제 위에 설립된 동양의 자연 철학 사상이었다. 실제로 이러한 道의 정의를 도입하여 밸르는 “神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고 주장하였다.218 이런 이유로 밸르는 18세기 계몽사상을 주도한 프랑스 “백과사전” 학파의 효시인 “역사적 비판적 사전”을 발간하기 시작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당시 유럽사상가들이 동양사상을 이신론적이라고 생각하던 것 보다 한걸음 더 앞으로 나갔다. 그는 과감히 동양사상은 무신론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인류가 서양식 종교가 없어도 얼마든지 탄탄한 윤리체계를 세울 수 있다는 증거로 삼았다.
말브랑슈(Nicolas Malebranche, 1638-1715)는 “기독교 철학자와 중국 철학자 사이, 神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대화” 라는 소책자를 저술하였다.219 여기서 그는 유교사상에 내포된 神에 대한 개념을 스피노자의 神에 대한 개념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고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당시 서양 사상가들이 주자학의 이기론에 의한 동양의 자연철학 체계와 스피노자의 종교관을 동일시하는 데서 온 것이었다. 동양의 자연철학 체계는 공자의 유교 뿐 아니라 도교의 핵심을 이루는 道의 개념이므로, 동양의 道와 스피노자의 神을 동일시하고자에게 파고, 이에 비추어 서양의 계시종교의 도그마 적이고 비이성적인 면을 부각시킨 것이다. 동서양의 대화에서 드디어 서양에서 최초로 동양의 道의 개념을 이해하고 동양의 道와 서양의 神을 동일시하는 철학이 대두된 것이다.
이들이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독일에서도 동양문명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서양문명과 대등한 입장에서 비교한 철학자가 나왔다. 그가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 1646-1716)다. 라이프니츠는 중국에 대한 관심이 깊어 저술을 두 권 하였다. 하나는 예수회 신부들의 보고서와 서신을 중심으로 하여 1697년 발간 “중국의 최근 뉴스 (Novissima Sinica, Latest News of China)” 이라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1713년 발간 “중국의 철학, 중국의 자연신학에 대한 고찰” 이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중국의 역경과 이기론 등을 설명하면서 동양의 종교가 “계시가 아닌 이성에 의거한 자연종교”를 설립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인류가 성취한 가장 빛나는 두 개의 문명이 유라시아 대륙 양쪽 끝”에 있는데, 앞으로 이 두 개의 문명이 교류를 시작하면 중간에 있는 모든 다른 문명들이 함께 높은 문명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동서양 문명 간의 교류의 확대를 실제로 추진하기도 하였다.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는 라이프니츠의 제자인데 동양문명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평가를 스승으로부터 계승하였다. 볼프는 1721년 Halle 대학에서 행한 유교에 대한 연설에서 유교의 윤리가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성에 기초한 것이지만 기독교의 윤리와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고 주장하였고, 그래서 유교의 존재가 바로 자연윤리 체계의 가능성을 증명해 준 것이라고 하였다. 볼프의 이러한 강의에 대하여 동료 신교도 들은 격분하였고, 그를 끝내 대학에서 몰아내고 프러시아에서 추방하는데 성공하였다.
계몽시대 이전과 이후에 동양사상에 관심을 표한 철학자는 많다. 이들은 몽테뉴, 말브랑슈, 베일, 볼프, 라이프니츠, 볼테르, 디데로, 헬베티우스, 케네 그리고 아담 스미스 등이 있다…. 크리스챤 볼프 (Christian Wolff, 1679-1754)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라이프니츠의 제자인데 라이프니츠는 당시 독일의 합리주의를 이끌던 철학자이고 칸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볼프는 유교를 열심히 연구했으며, 특히 유교의 윤리철학에 커다란 존경을 표했다. 그는 1721년에 할리(Halle)대학에서 유교윤리는 종교적 시현이 아니라 이성의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설명된 것인데 기독교의 윤리의식에 버금간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유교는 합리성에 비추어 보아도 문제가 없는데, 이것은 자연주의 윤리의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해준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은 신교도 신자들을 격분시켰고 끝내 신교도들은 볼프를 대학에서 쫓아 내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볼프는 프러시아에서 추방되었다. 220
프랑스 예수회 소속 역사학자 뒤할데 (Jean-Baptiste Du Halde, 1674-1743)는 파리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1703년부터 1743년까지 40년간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신부들의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편집, 발간하면서 동양문명을 서양에 소개하였다. 볼테르(Voltaire)와 디드로(Diderot)를 필두로 한 프랑스의 백과사전학파 등 서양의 계몽사상가들은 이 보고서에서 동양에 관한 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221 그는 1735년에는 “중국의 일반역사”라는 책을 프랑스어로 발간하고 그 책은 이듬해 영어로 번역되면서 유럽 전역에 퍼져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책에서 뒤할데는 중국의 역사와 함께 동양 문명의 모든 면을 아주 긍정적으로 소개하고 평가하였다. 동시에 서양의 제도나 문화와 비교하면서 서양의 낙후성을 지적하였다.
계몽시대 많은 사상가들이 서양문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공격할 때 동양문명의 장점을 그 논거로 삼는 책을 여러 권 발간하면서 유럽 사상계는 동양사상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때 서양이 주목한 동양문명의 특징은 이신론적 우주관, 황제가 주변 보좌진의 의견을 들어 통치하는 윤리적 정부제도, 정부관리를 가족관계의 출신이 아니라 개인 능력에 따라 선발하는 과거제도, 적은 세금으로 많은 인프라를 제공하는 경제적 전통, 정부가 개인의 경제행위에 대한 불간섭 등이 있었다. 특히 이때 소개된 사상이 북경의 예수회 신부들이 접촉한 중국의 유교지식층이었기 때문에 공자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볼테르는 공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우리 서양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우리는 동양의 저쪽 끝에서만 현자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단순하고 거창하지 않고 사기스럽지도 않으며, 그리스인들이 겨우 지혜가 무엇인지 구별하게 되고, 그 이외의 북쪽 유럽 사람들은 글자가 무엇인지도 모를 때인 BC 600년에 이미, 행복하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바로 공자다. 고대 스승 가운데 공자는 다른 사람을 속이려고 하지 않은 단 한 사람이다. 전세계를 통틀어 공자 이후 누가 그보다 더 아름다운 행동규범을 준 일이 있는가? “국사는 집안일을 돌보듯 돌보아야 한다. 집안일은 솔선수범함으로써 돌볼 수 있을 뿐이니·······” 인간에게 이보다도 더 유용한 진리를 가르친 스승은 존재하지 않음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222
공자는 “세상이 지금까지 배출한 최고의 인물”로 칭송되고, “계몽사상의 성자”(the patron saint of the Enlightenment)로 일컬어지기까지 하였다.223
4) 서양의 계몽시대, 무엇으로부터의 계몽인가?
17-18세기 계몽시대에 서양은 지금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열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논의했다. 당대 최고의 철학가, 과학자, 사상가들 사이에 종교적 열정, 냉철한 이성, 그리고 때로는 정의감을 가지고 성경에 적혀있는 여러 가지 논제에 대하여 토론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동양의 자연철학에 대하여 왜 서양의 사상가들이 커다란 호기심을 보이고 이에 경도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러한 흥미로운 사건들을 몇 가지 살펴보자.
지옥이 실제로 예루살렘 지하에 있다고 믿고 있었던 서양
기독교가 내세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래 서양인들은 천당과 지옥을 굳게 믿었다. 중세 서양인들은 지옥이 예루살렘의 지하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단테가 신곡을 쓴 13-14세기에 그는 지옥이 예루살렘의 지하에 있다고 보고 있었다. 이러한 지옥의 존재는 결국 천당-지옥이라는 사후의 세계에 대한 서양의 믿음과 직접 연결된다. 우리가 짐작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중세와 근세의 서양인들은 최후의 심판이 곧 다가올 것으로 믿었었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에서 죄를 사하고 천국에 가려는 열망이 그들의 인생을 지배했다. 교회는 이러한 죄를 사해주는 여러가지 증표를 제시하였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을 되찾으려는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면 모든 죄가 사해지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교황의 선언이 제1차 십자군 형성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나아가 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하는 행위로 이어졌다. 많은 이들은 지옥의 각종 끔찍한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고자 했다.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고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은 서양
태양을 하늘에 멈추게 한 여호수아의 기적(여호수아 10:12-14)은 서양 사상계에 천 년을 넘게 진리로 믿어져 온 초석중의 하나였다. 천동설은 도전할 수 없는 진실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커다란 풍파를 일으킨 사건이 르네상스 시대 후기와 계몽시대 전기에 일어났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 케플러 (Johannes Kepler, 1571-1630) 와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 등이 천체관측이라는 과학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제시한 태양중심적 우주관 (heliocentrism) 이 그것이다. 神이 천동설에 의하여 태양을 멈추었는데, 새로운 이론인 지동설에 의하면 神은 지구의 자전을 멈추어야 했었기 때문이다. 神, 또는 여호수아 중의 하나가 오류를 범한 것이거나, 또는 神과 여호수아 사이의 연결에 심각한 오류가 발생하였거나, 성서의 기록과정에 오류가 있었으므로, 성서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갈릴레오의 유명한 지동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통하여 실제로 관찰한 천체의 움직임은 분명히 태양이 중심이고 지구가 그 주위를 돌고 있었다. 그러나 교황청은 성경에 적힌 神의 말씀을 계속 주장해야 했다. 교황청은 지구주위를 태양이 돈다는 천동설을 강요했다. 중세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미의 가설을 지지하고, 지구가 세계의 중심이며, 지구는 평편하고 지구위로 해와 달을 비롯한 천체가 떠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가설은 모세5경 창세기에 있는 천지창조의 묘사와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지동설은 神이 지구와 인간을 특별히 창조하였다는 성경의 도그마에 내재된 지구중심적 우주관 (geocentrism)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움직인다는 관측의 결과에 대하여 로마 교황청이 탄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갈릴레오는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성경말씀을 인정하면서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고 지동설을 되풀이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노아의 홍수에 대한 믿음이 동양문물의 서양 유입으로 도전을 받다
지구의 나이 계산과 연관된 것으로서 동양의 문물이 영향을 미친 노아의 홍수를 새로이 측정하는 사건도 있었다. 서양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에 서양의 사상가들은 기독교의 비이성적인 측면에 대한 의문을 품고 이에 대한 이성적인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 중 하나가 창조의 기원과 인류의 시작이 언제 였는지 찾는 노력이었다. 당시만 하여도 성경에 기록된 아담과 아브라함을 이어내려 오는 족보를 따라 그 연대를 계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을 때였다. 이 상황에서 북경에 파견된 예수회 신부들의 보고서와 번역물에 의하여 동양문명이 서양으로 유입되면서, 계몽사상가들은 거기서 기독교의 도그마를 공격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를 발견하였다. 네덜란드의 학자 보시우스 (Isaac Vossius, 1618-1689)는 성경에 의한 역사가 아니라 자연역사 (natural history)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1660년에 출간한 저서 “세계의 참된 시작에 대하여” 라는 책에서 중국의 문화가 적어도 BC 2,900년에 시작되는데 이것은 홍수 보다 500년 이상 앞선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성서에 의한 계산법은 틀린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볼테르는 이 주장을 유대-기독교가 최초의 그리고 가장 오래된 종교라는 도그마를 공격하는데 활용하였다.224 그리고 나아가 볼테르는 동양문명을 다른 문명과 함께 기독교 이외의 인간의 문명으로 인정하는 사상가가 되었다. 그는 이를 그의 철학적 사전에 반영하였는데, 서양에서는 최초로 기독교 문명 이외에 중국문명과 다른 문명을 정식으로 인정하며 언급하는 사례가 되었다.
계시종교의 핵심인 기적에 대한 불신
계몽시대에 종교의 이름을 빌린 각종 미신과 도그마에 대항하여 싸운 볼테르는 기적을 행하는 神의 속성은 인간이 필요로 하여 만든 것이지 결코 神이 인간에게 알려주거나 명령한 것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왜 神이 기적을 행해야 하는가...기적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神에 대한 불경이 되는 것이다”.225 볼테르는 동양의 자연 철학체계가 이성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동양 철학체계가 미신도 없고, 기적도 믿지 않으며, 의인화라는 과정도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제사는 죽은 조상에 대한 존경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볼테르는 유교가 아주 성공적으로 인간사회에 윤리 사회적 질서를 세워주고 있으며, 이러한 동양의 윤리는 서양의 미신적 믿음과 거추장스러운 의식, 타락한 제도에 의존하는 기독교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神은 우리의 희생도 기도도 필요로 하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할 필요를 느낄 뿐이다. 神을 숭배하도록 한 것은 神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인 것이다”.226 기적을 행하는 종교의 창시자가 겪는 문제에 대하여 볼테르는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당신이 위대한 명성을 원하고 종교의 창시자가 되고 싶으면 완전히 미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당신의 광기가 시대의 흐름을 타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미친 상태에서도 광기서린 언행을 당신의 이성이 인도해야 한다. 즉 남이 질릴 만큼 의견을 분명히 해야 하고 고집도 극도로 완고하게 하는 것을 꺼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당신은 교수형에 처해질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교수형을 피할 수 있다면, 당신을 모시는 사당이 세워질 것이다”.227 결국 기적을 부인하는 사상가들이 많아지면서 이들은 기적을 믿는 계시종교로 부터 神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을 퍼트리게 된다.
아담과 이브가 사용한 언어를 찾는 운동의 전개, 중국 표의문자에 대한 가치 부여
17-18세기 서양의 계몽시대에 지구의 연령을 계산하는 것과 함께, 아담과 이브가 사용한 언어를 찾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었다. 이들은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사용한 언어는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의 순수한 언어, 천사의 언어로 여겨졌다. 서양에서 아담의 언어(Adamic Language)를 찾고자 한 노력이 일어난 것은 창세기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날짐승을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 에게 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세기 2:19). 이들이 아담의 인간의 타락이전의 언어를 찾은 이유는 16-17세기 서양의 역사가 신-구교 간의 갈등과 이를 등에 업은 세력 간의 오랜 살육전으로 점철 되어있어서, 그 이유를 언어와 개념의 차이에서 온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기록에 의하여 더욱 확고한 생각으로 굳어졌다. 즉 창조 이후에 인류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조화롭게 살고 있었는데, 인류가 교만해지고 神의 지혜와 권위에 도전할 생각으로 바벨탑을 쌓는 것을 보고, 神이 이를 부수고 인류를 여러 부족으로 흩어져 다시는 합치지 못하도록 각기 다른 언어를 쓰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하여 계몽시대 서양 사상가들은 태초의 언어 즉 아담과 이브의 언어를 찾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신-구교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인간의 이해의 영역을 넓혀 보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의 표의문자가 서양 각국이 사용하고 있던 표음문자보다 더 자연에 가깝다고 보고 아담과 이브의 언어를 찾는데 도움을 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관심을 표하게 되었다.
지구의 나이를 6천년 정도라고 굳게 믿던 서양
모세5경의 시작이고, 유대-기독교 성서의 시작인 창세기는 神의 천지창조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모세가 神에게서 직접 계시를 받아 작성한 것으로 적어도 18세기 까지는 서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의 사실로 굳게 믿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이단자, 배교자로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심각한 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서양문명에서는 오래 동안, 약 2천년 가까이 神이 자연과 인간을 엿새에 걸쳐 창조 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구약에 창조의 과정과 시간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최초의 인간 아담이 930년을 살았고, 그 후손들이 몇 년을 살았는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세기 15:4-8) 신약 성서의 시작이 아브라함에서 예수에 이르는 왕과 선지자들의 족보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으로 부터 예수까지는 42세대가 지났다. 아브라함부터 다윗 왕까지 14세대, 다윗 왕으로부터 바빌론의 유수까지 14세대, 바빌론의 유수부터 예수까지 14세대가 그것이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4세기를 전후하여 천지창조의 시기를 심각하게 계산하고 달력에 반영시키는 습관이 있었다. 초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지창조가 5-6천년 전쯤에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비잔틴 제국의 달력에는 천지창조가 5509년 전에 있었던 것으로 기준을 삼고 있었다. 그것은 구약에 기술된 천지창조가 6일만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었는데 베드로 후서에 기록된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라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었다.228
지구의 멸망과 예수 재림의 시기를 심각하게 계산한 서양인들
지구 멸망 설은 예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이라는 신약성서에 기록된 종교적 믿음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서양에서는 중세 서양인들은 물론 18세기 까지도 많은 서양인 들은 성서에 예언된 대로 지구의 멸망과 예수의 재림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 문제가 성서에 여러 번 아주 상세하게 설명되었기 때문에 중세 서양인들 사이에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요소로 간주되었다. 종말론 (eschatology) 또는 내세론은 중세에 교황청에서 사회를 안정시키고 교황청의 권위를 유지하는 효과적인 방안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800년 샤를마뉴 대제 덕분에 전 유럽에 대한 교회의 권위를 확보한 교황 레오 3세 때부터 내세론에 입각한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초에는 구교의 면죄부의 판매가 극성하게 되자 드디어 1517년 루터가 과감히 이에 맞서 일어섰고, 자기 영토내의 재산이 면죄부 구입을 통하여 로마로 흘러 들어가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영주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 구교와 대립한 신교의 탄생과 신-구교 사이의 잔혹한 종교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예언된 지구멸망의 시기가 계속 뒤로 늦추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15세기 사상가 사이의 계산에 의하면 지구종말이 18세기 초로 발표되기도 하고, 또 예수 탄생 2000년 되는 해에 종말이 시작될 것으로 계산되기도 하였다. 교황청 측에서는 16세기말에 마지막으로 종말에 관한 입장을 밝혔는데 1992년 이전에는 종말이 없을 것으로 본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종교개혁 이후 각국의 왕권이 커짐에 따라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또 프랑스의 앙리 3세와 리슐리웨 재상 등은 사회를 어지럽히는 혼란을 막기 위하여 지구의 종말 년도를 발표하여 국민을 호도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기 시작하였다.229 그러나 성서에 100회 이상 여러 번 언급된 지구종말론은 정부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뉴턴도 18세기 초 지구의 멸망 시기를 계산하여 2060년 이전에는 세계가 멸망하지 않는다고 기록하였다. 그 계산은 서양에 샤를마뉴 대제가 유럽을 통일하고 레오 3세가 최초의 명실상부한 교황으로 세력을 가지게 된 800년을 기점으로하고 구약 다니엘 서에 종말과 관련 제시된 1260일을 1260년으로 계산하여 800+1260=2060을 산출해 낸 것이다. 뉴턴은 “지구의 종말이전에 복음서가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서 읽혀야 하며, 지구 종말 전에 그렇게 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230 사실 지구 멸망 즉 세계의 종말은 예수의 재림을 의미하며 사탄을 멸하고, 모든 선한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보답을 받는 신앙과 연계되어 있었으므로 그 시기를 예측하는 것은 구교의 권위를 확립하는 기독교의 근원적인 도그마의 하나였다. 그래서 이 문제는 로마 교황청에게 아주 핵심적인 사안으로 취급하였으며, 종교개혁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었다. 루터는 지방 영주의 지지를 받아 로마 구교의 면죄부판매, 성서 해석권의 독점 등 여러 가지 병폐를 맹렬히 규탄하였지만, 그도 천동설과 함께 세계의 종말과 예수의 재림을 굳게 믿고 있었으며, 세계의 종말이 점점 빨리 다가오고 있다고 믿었었다. 그래서 일부 서양 사상가들은 종교개혁으로 이루어진 신교가 면죄부 판매의 중지, 개인의 신앙과 성서 해석권의 중시 등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천동설이나 지구종말론의 비과학적인 측면 등 이성의 인도를 거절하였다는 면에서 구교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의견도 표시하게 된다.
따라서 선악의 문제와 함께, 천당 지옥의 존재는 계몽시대에도 대부분의 서양 사람들과 사상가들이 흔들림 없는 사실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옥의 물리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성서무오류성이 도전을 받으면서 천동설, 창조론, 천지창조에 대한 년대 계산, 노아의 홍수, 아담의 언어 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서 이러한 도그마들도 함께 흔들리게 된다. 천당과 지옥의 존재는 서양문명의 기초에 있는 선악론, 죄와 벌, 그리고 법의 역할에 대하여도 문제를 제기하게 됨을 의미한다. 여기서 동양 유교의 자연적 윤리관 과 자연의 道에 입각한 무위사상이 서양 사상가들에게 크게 어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동서양 문명의 차이의 근원은 민족국가의 구성 시기를 비교하면서 찾을 수 있다. 동양이 서양보다 민족국가의 구성에 있어서 2천년 빨랐다. 민족국가의 구성과 민족국가의 생존을 위하여 따라오는 철학체계의 변화에 대하여는 최근 서양의 학자들도 지적하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