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권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 동양에서 본 서양 · 제4장

“붙잡는 손”: 국가주의, 집단주의, 개인주의

약 31분 · 주 37개

1) 인간본성을 지배하는 탐욕은 붙잡는 손의 근원

자연의 道와 인간의 道를 구분한 것은 인간본성과 정치경제철학에 있어서 동서양이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게 하는 근원이다. 자연의 道는 꿀벌의 세계를 포함하여 모든 동물의 세계를 포함한다. 인간도 크게 보면 지구상의 동물에 속하므로 궁극적으로 자연의 도를 따르게 된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손이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자연의 道가 아니라 인간의 道를 따르는 성향이 강하다. 즉 동물의 세계에 없는 탐욕을 행사하기 때문에 인간의 道가 작용하는 것이다. 여기에 붙잡는 손이 작동하게 된다. 결국 인간의 행동에는 “보이지 않는 손”과 “붙잡는 손”이 함께 작동하는 것이 현실이다. 자연의 道는 보이지 않는 손이고 인간의 道는 붙잡는 손이다. 서양의 정치경제사상은 아담 스미스 이래 보이지 않는 손을 주장하였고, 동양의 정치경제사상은 도덕경-관자-순자-한비자-사마천이래 붙잡는 손 이론을 주장하게 된다.

동양의 붙잡는 손 즉 인간의 道가 언제나 사익이 공익을 해친다는 뜻은 아니다. 도덕경에서 무위는 보이지 않는 손 즉 자연의 道를 정치경제에서 꼭 필요한 파트너로 보고 있다. 인간의 道가 편재하는 인간 사회에서는 이에 대항하여 인간사회를 자연의 道에 가깝게 만들기 위하여 무위사상이 자연의 道의 동맹자가 된다. 그러므로 서양의 보이지 않는 손 이론과 동양의 붙잡는 손 이론은 두개의 손 사이의 “경쟁”이 인간사회에 편재해 있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에서 서양은 보이지 않는 손의 편에 서서 인간사회의 정치경제 상황을 컨트롤 해보자는 것이고, 동양은 붙잡는 손의 편에 서서 인간사회의 정치경제 상황을 컨트롤 해보자는 것이다.

동양의 무위사상은 탐욕이 발효되는 이기심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다. 이 이기심은 국가주의, 집단주의, 개인주의에 모두 적용된다. 국가주의, 집단주의, 개인주의 3개의 차원에서 결국 인간의 탐욕이 작용하는 것을 관리하자는 것이다. 서양의 자유방임주의는 당시 팽배하고 있던 국가주의라는 정부의 이기심에 대하여만 작용하게 된다. 전제군주나 왕정체제하의 국가주의에 아주 효과적인 체제와 법규를 만들어내고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서양의 정치경제 체제는 집단주의나 개인주의 이기심에 대하여는 견제심리가 없다. 오히려 이기심을 방임하는 차원에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에 자유를 주면서 국가주의의 이기심을 견제하는 도구로 이용한 측면이 크다. 다시 말하면 동양에서 무위사상은 국가주의, 집단주의, 개인주의 라는 차원의 이기심을 관리하고 있는데 서양에서 자유방임주의는 오로지 국가주의의 이기심에 대하여만 견제하고 있다.

무위사상은 서양의 자유방임과는 달리 개인의 사익을 “관리”해야 한다는 철학을 기초개념으로 가지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것에 집착하지 않으면 모든 곳으로 통하게 된다. 그러므로 무위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도덕경 43장). 순자도 개인의 이기심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다. “인간본성과 감정은 방임하면 무질서와 폭력을 낳게 된다; 인간본성과 감정은 윤리에 의해서 관리되어야 한다” (순자 23:1). 반면 서양의 자유방임주의는 개인의 이기심에 대하여 자유방임주의에 의하여 보호된다고 주장하게 된다. 프랑스의 자유방임론자들은 “자유방임, 자유통행, 그러면 세상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라는 도덕경에서 나온 철학을 그대로 주장하였지만, 그들은 이 주장을 국가에 대하여만 사용했을 뿐, 개인은 대상에 넣지 않고 있었다. 즉 개인이나 집단주의 이기심의 편을 들면서 국가주의적 이기심에 대하여만 대항하였을 뿐이다.

서양의 자유방임주의는 인간본성의 차원에서 볼 때 특이한 혼합성을 보인다. 즉 인간이 개인으로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개인적인 이기심이 공익으로 수렴되고, 지도자가 되면 지도자의 이기심은 국가주의라는 이기심이 되어 공익을 해친다는 이중적인 인간본성을 도출하고 있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를 비롯하여 많은 서양의 정치경제사상가들은 집단주의(tribalism)적 이기심, 즉 비즈니스 차원의 이기심은 국가주의 이기심처럼 공익을 해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평가했다.

아담 스미스는 데이비드 흄(1711-1776)의 인성론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감정이 이성의 기본을 이룬다는 흄의 인성론에 깊이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스미스는 인간의 감정 중에서 남에 대한 배려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스미스는 자신의 저작 중에서 그를 유명하게 만든 국부론(Wealth of Nations)보다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를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 책을 계속 감수하고 편집하였다. 도덕감정론에서 스미스는 인간본성은 개인의 이익을 쫓기 마련인데 탐욕으로 변하기 쉽다는 것을 인정한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이익추구와 탐욕은 …개인의 헛되고 끊임없는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남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고 동정심이 탐욕을 견제하게 된다고 보았다.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집중하더라도, 인간본성에 어떤 원칙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다른 사람 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행복이 자신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생각들이 자신에게 직접적 이득을 가져오지는 않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만으로 좋은 것이다. 남에 대한 배려와 가엽게 생각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273

아담 스미스의 인간본성의 이해는 이 처럼 특이한 면이 있다. 대부분의 동서양 사상가들이 인간본성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 한가지 측면을 주장하고 있는데, 아담 스미스는 두가지 측면을 동시에 주장하고 있다. 인간은 이기적이며 자애롭고, 탐욕스러우며 이타적이다. 그는 도덕감정론에서 특별히 인간의 선한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속에는 사회적인 점이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인간은 인간의 존속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인간 자신은 스스로 직접적인 이득을 취하지 못하지만… 결국 인간 개인의 이익은 자연히 사회전체의 이득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274

아담 스미스는 홉스와 맨더빌 등이 인간본성에 대하여 심술 굿은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인간이 “완전한 神에게 배운 바와 같이 자연적으로 도덕성을 가지고 자선행위를 하게 되어있고, 부정과 악덕행위를 미워하게 되어있는데” 이것을 무시하고 있다. 스미스는 “인간들이 인간내부의 힘인 이성과 철학에 의하여 알기 이전부터 종교가 도덕심의 법칙을 재가하여 주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스미스는 미덕을 사랑하고 진정한 영광심을 갈망하는 것이 인간이 가진 감정 중에 최고로 중요한 두가지 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미스는 “모든 공익을 주장하는 정신은, 다시 말하면 공익이 사익을 우선한다는 모든 주장은 사기극이며 인간을 기만하는 조작”이라고 강력한 견해를 표명하였다. 그는 사익과 공익을 구분하면서 공익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275

이와 같이 스미스는 긍정적인 인간본성에 의지하여 앞으로 전개할 그의 중요한 정치경제 철학의 핵심인 사익과 공익의 수렴론을 준비하고 있었다. 선한 인간본성을 가진 개인의 노력에 의하여 공익은 저절로 구성된다는 인간본성론에 의지한 정치경제철학의 기초가 이렇게 스미스의 마음속에 구성된다. 결국 스미스는 인간 본성에 있는 탐욕과 미덕 중에서 미덕이 종국적으로 승리한다고 본 듯하다. 그러므로 개인이 스스로의 이익과 탐욕에 집중해도 결국 사익은 공익으로 수렴한다는 정치경제철학이 가능하게 된다. 자유방임론이 옳을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동양의 무위사상은 서양의 자유방임론과 기본적인 철학을 달리한다. 인간본성론에서 입장이 다르다. 여기에 동서양의 정치경제철학의 기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무위사상에 의하면 개인, 부족, 지도자들은 모두 같은 인간이다. 동양의 무위사상은 누가 무엇을 하든지 모두 같은 인간이고 같은 인간본성을 가지고 있고, 모두 이기심에 의하여 공익을 해칠 수 있다고 분석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정치경제적으로 무엇을 하든지 법과 윤리가 필요하다. 지도자는 이것이 필요하고 개인은 필요하지 않는다는 방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무위사상은 인간의 이기심이 너무 강하고 너무 중요하다고 본다. 이에 비하여 이타심은 약한 상태에 있다. 그래서 이기심이 다른 사람의 이익과 공익을 중요시하는 감정을 앞에 놓는 것은 아주 어렵다고 본다.

동양에서는 인간의 이기심은 “붙잡는 손”(grasping hand)이 되어 곳곳에서 공익을 해치고 사익을 크게 하려는 역할을 하려는 존재가 된다. 국가주의, 집단주의, 개인주의로 표현된다. 붙잡는 손은 서양의 보이지 않는 손과는 정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서양은 서로 다른 두개의 정치철학구조를 설정하도록 하고 있다. 동양은 무위사상과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근면, 절약, “우선 일하는 자세”(deferred gratification)가 동양문명의 기조를 형성한다. 여기서는 관계주의(relationalism)에 의하여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개인의 자율과 창조성에 대한 인센티브가 강조되지 않는다. 서양은 자유방임과 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익추구과 창조성을 강조한다. 여기서는 개인주의(individualism)을 중시하고, 행복, 소비, 그리고 “즉시 즐기는 자세”(instant gratification)가 성행한다. 그러나 그런 사회에서는 장기적으로 빈부격차의 증가를 컨트롤 하기가 어렵게 된다.

서양에서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인간본성은 선량하며 인간 개인의 이익추구는 긍정적이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공익을 수렴한다 본다. 관리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추구한다. 이러한 인간본성에 대한 서양의 이해는 서양이 2천년 이상 유지해온 인간은 죄를 지은 악한 인간이다 라는 고대, 중세의 해석과 다르다. 180도 전환하여 악에서 선으로 전환하였다. 서양의 계몽시대에서 겪게 된 변화다. 인간본성은 죄의식의 대상에서 기쁨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러한 서양의 정치경제철학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 사익을 공익으로 자연스럽게 수렴한다는 기저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하는 이러한 사익-공익 수렴론은 자연스럽고, 자동적이며, 자연히 일어나는 것이며,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서양의 정치경제사상가들은 나중에 이러한 이론을 보강하기 위하여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commons)이나 “의도하지 않은 편익이나 비용의 발생”(positive and negative externalities) 같은 컨셉트를 주장하고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런 컨셉트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서양 정치경제철학 체계는 그대로 유지된다. 즉 “자유방임주의는 국가의 방해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공익과 사익이 수렴하기 때문이다” 이라는 체계는 서양 정치경제사상의 기조로 남아있다.

여기서 동양의 무위사상은 서양의 자유방임주의와 철학을 달리한다. 공익은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데 개인의 탐욕이라는 사익이 빠지게 되기 때문에 보호되어야 한다. 탐욕은 개인, 집단, 국가 모든 단위에서 작용한다. 인간본성으로 미루어 볼 때 개인의 이익은 탐욕으로 진전하기 쉽고 예외적으로 이타심으로 진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의 균형을 위하여 윤리로 개인의 이익을 탐욕이 아니라 이타심으로 유도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문화가 생성된다.

2) 사익 추구를 위한 비즈니스-의회-행정부의 단합

법을 정하는 의회는 국민을 위하는 공익에서 점차 멀어지고 자신들의 재선이라는 사익을 추구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국민이 의회에 대한 지지율은 한국이나 미국에서 모두 20% 안팎이다. 법을 이용하여 의회가 기업가의 이익을 키워주고, 기업가는 국회의원들의 재선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한다. 비즈니스와 의회가 단합하면 행정부는 많은 경우 이를 따라할 수 밖에 없다. 결국 비즈니스-의회-행정부가 공익을 외면하고 우선 자신이 살아남는 사익을 추구하는 현상이 커져가고 있다. 이는 빈부격차의 증가로 나타난다.

집단주의가 공익을 해지는 현상은 중상주의 체제에서도 성행하였다. 아담 스미스는 중상주의 정책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1619-1683)의 정책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콜베르는 프랑스 루이 14세 밑에서 1665-1683 간 18년 재무상으로 지냈다. 그는 보호무역주의를 추구하면서 이를 왕과 기업가 간에 이익을 나누는 방안으로 활용하였다. 실제로 콜베르가 재무상으로 취한 최초의 정책중의 하나는 베니스로부터 유리제품의 수입을 대체할 수 있도록 프랑스 왕립 유리제품 조합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그는 7년후 이 조합이 그럴듯한 유리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하자 베니스로부터 일체의 유리제품의 수입을 금지하였다. 중상주의 정책아래 모든 국가가 앞다투어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늘리는 것에 국가의 미래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극도의 보호무역주의, 수입대체 산업의 신장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경제 제도 아래서 당연히 집단주의 탐욕은 자유롭게 성장하게 되었다. 즉 상기 왕립 유리제품 조합 같은 것은 국가로부터 독점적 보호와 편의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국가, 즉 왕실은 이러한 기업으로부터 세금이나 기타 적절한 형식으로 소득을 거두는 공생관계를 형성하는 가운데 결국 일반 국민만 희생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교역을 제한하고, 규제하고, 지시하는데 관한 대부분의 규정, 법, 칙령, 조칙, 그리고 정부, 왕, 의회의 공공조례 등이 모두 결국은 정치적인 오류 거나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교활한 사람들이 개인의 이득을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276

아담 스미스, 맨서 올슨, 아이젠하워 대통령, 그리고 최근 금융경제학자 들이 바로 이러한 집단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표현하고 있다. 아담 스미스는 한 국가내의 상인과 제조업자는 모두 독점에 의하여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할 수 있으므로 국외의 경쟁자들을 배제하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에 희생되는 사람은 결국 일반국민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국가의 간섭을 배제한 국민의 경제활동에 대한 자유방임과 국가의 무역에 있어서 중상주의적 보호무역대신 자유무역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277 아담 스미스는 국가주의로부터 개개인의 이기심을 해방시키면서, 동시에 집단주의 탐욕에 대하여 우려하기 시작한다:

같은 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주 만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모일 때 대화의 핵심은 항상 공공이익에 대한 음모로 끝나거나 때로는 물가를 올리기로 하는 담합으로 끝나기 마련이다.278

한걸음 더 나아가 아담 스미스는 이러한 집단주의 탐욕을 법으로 다스리기는 아주 어렵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같은 기업에 종사하는 사업가들이 종종 회합을 가지은 것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법은 자유와 공평성에 어긋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법으로 같은 기업에 종사하는 사업가들이 가끔 만나게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지라도 법은 그러한 회합을 필요하게 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손쉽게 하는 일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279

올슨도 그가 “특별 이익집단 (special interest group)” 이라고 부른 집단주의 탐욕이 민주주의를 위협할 가능성에 대하여 경고를 하고 있다:

비록 민주주의는 그 지도자로 하여금 사회잉여자본을 자의적으로 빼내서 쓰는 것을 방지하는데 아주 유리한 위치에 있지만,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민주주의에서 특수 이익집단이 국가의 전체 경제정책을 좌지우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280

또 올슨은 “개인들이 모인 집단은 사익을 위하여 일하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지 않는다” 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특수이익집단이 만드는 정치경제 정책은 공공의 이익을 해치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특수 이익집단이 만드는 정치경제 정책은 보호무역적이고 과학기술의 발전에 반하는 성격을 띠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성격상 이익은 이익집단에게 집중시키면서 그 비용은 모든 국민이 균등하게 지불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논리에 따라 이익집단의 정책에 대하여는 국민적 저항이 크지 않게 된다. 그래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특수이익집단은 점점 커지게 되고 결국 그 나라의 경제가 낙후되게 된다.281

이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재직시 군과 기업간에 이들 이익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긴밀한 연계로 인하여 공익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자신의 국정운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8년간 대통령직을 떠나면서 1961년에 행한 유명한 연설에서 바로 “군산복합체 (military industrial complex)”에 대한 경고를 남기고 떠난 것이다:

정부를 운영함에 있어서 우리는 군산복합체에 의한, 자연발생적이거나 고의적이거나 간에, 정당하지 않은 영향력을 쌓으려는 기도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부적절한 힘이 커져서 우리에게 커다란 재난을 가져올 수 있는 개연성은 상존합니다. 우리는 이 군산복합체의 힘이 우리의 자유나 민주주의 절차를 훼손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282

이러한 군산복합체는 결국 미의회를 통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고 따라서 행정부의 힘도 작용하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군산정 복합체 (military-industrial-congressional complex)” 로도 불리게 되었다. 민주주의 국가 내에서 생겨나는 이러한 우려는 국가주의 탐욕이 제도적으로 견제되었다고 하여 공익이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주의 아닌 집단주의의 탐욕에 의하여 공익이 훼손되는 상황에 우리가 이르렀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활동하던 시기는 1950년대이다. 그때는 아직 금융시장이 오늘날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기 전이다. 세계 제2차 대전 동안 크게 성장한 군산 복합체가 이제는 집단주의 탐욕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주체의 자리를 “금융-정부 복합체 (finance-governmental complex)” 에게 내어주게 된 것이다. 이는 산업혁명에 이어 금융혁명으로 부를 수 있을 만큼 경제체제의 중심을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옮겨 놓을 만큼 강력한 변화다:

지난 30년 동안 대부분의 선진국 금융차원에서 진정한 혁명이 일어났다. 1970년에 미국에서 전체 상장주식과 미국 경제 총생산 과의 비율은 0.66 이었다. 그것이 2000년에는 급속도로 신장하여 미국 내 상장주식 총액이 국내총생산(GDP)의 1.5 배에 이르게 되었다. 283

시장경제에서 다국적기업, 국제금융기업 등 그 무엇으로 부르든지 이들이 추구하는 집단주의 탐욕은 이제 시장경제 자체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금융기업들은 세계적인 규모의 시장을 상대로 교묘한 운영체계에 의하여 생산성은 하나도 없는 이윤과 탐욕추구에 몰두하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들이 세계 시장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서, 21세기 정치경제 체제를 “카지노 자본주의 (Casino Capitalism)”로 부르기에 이르렀다. “자본가 들로부터 자본주의를 구출하기: 어떻게 열린 자본시장이 기존세력에 도전하면서 빈부 모든 계층에 번영을 가져다주었나” 라는 2013년 저서에서 라잔(Rajan)등 경제학자들은 바로 기업가들이 모이게 되면 공익을 해치는 모의를 하는 방향으로 힘을 모으게 된다는 아담 스미스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러나 아주 자주 그리고 너무나 많은 국가에서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고자 하는 이러한 기업가들의 모의는 결국 국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284

아이젠하워의 군산 또는 군산정 복합체가 이제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힘과 영향력이 커졌다. 금융계가 정부와 힘을 합쳐 “공정경쟁”이라는 공익을 해치는 “금융-의회 또는 금융-정부 복합체”로 발전되어 나오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 즉 시장경제체제는 지금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 중에서 생산과 분배를 가장 효율적으로 하는 방안이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경쟁이 있다. 그런데 경쟁은 기업가들의 끊임없는 탐욕을 관리하고 견제하기 때문에 모든 기존 기업가들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285 그래서 집단주의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우려 경쟁을 제어하고 각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법을 기준으로 한 선악의 판단 기준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정치경제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이 만든 법이 지금 세계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국내외로 모두 빈익빈 부익부를 조장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나라에서 법을 만드는 의회는 국민을 위하는 공익보다 국회의원의 재선을 추구하는 사익에 점점 더 몰입되고 있다. 이들은 부자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고, 부자들이 국회의원의 재선에 꼭 필요한 선거자금을 대주고 있다. 선진국에서 의회-자본가-행정부가 합심하여 빈익빈 부익부를 조장하는 법을 만들고 국민도 이를 고치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게 되었을까? 비록 아담 스미스가 집단주의 탐욕에 대하여 일찌감치 경각심을 들어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서양의 시장경제 사상은 아담 스미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국가의 탐욕으로부터 개인에 대한 자유방임을 주장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집단주의 탐욕에 대하여 충분히 경계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개인들이 모인 집단, 즉 특수 이익집단 등 집단주의의 탐욕에 대해서는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만 지적하였지 아무런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 국가주의 탐욕은 나쁘고, 개인주의 이기심은 좋다는 이분법에 머무르면서 집단주의 탐욕은 그저 원칙적으로 좋은 개인주의 이기심에서 일부 일탈한 정도로의 경계만 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경제규모가 커지고, 세계화 현상이 퍼지면서, 웬만한 국가들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영향력이 큰 다국적기업, 다국적 금융기업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들의 탐욕이 제기하는 시장경제에 대한 위협은 과거 국가의 탐욕만큼이나 심각한 것이 되어버렸다.

서양에서는 당초 개인의 이기심에 대하여는 아담 스미스 이후 건전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이기심의 연장인 다국적 기업의 탐욕에 대하여는 근본적인 문제로 인식하기 보다는 대증요법, 즉 문제가 생기면 그 이에 따른 국부적인 해법만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하여 왔다. 그것이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독점금지법 등이다. 여기에는 철학적인 문제가 개재되어 있는 것이다. 집단주의 탐욕은 21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두 가지 차원에서 그 폐해가 너무나 명백해져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나는 경제에서 다국적기업의 탐욕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에서 정당의 탐욕이다. 전자는 시장경제를 위협하고 후자는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경제면에서 초국가 금융기업의 집단주의 탐욕과 유사한 집단주의 탐욕이 정치면에서도 눈에 띄게 등장하게 된 것이 21세기의 특징이다. 민주주의 측면에서 정당들은 국민의 이익 즉 공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세계의 수많은 정당들은 공익 추구 보다는 정권의 재창출, 즉 정당의 이익을 앞세우는 것이 많이 목격되고 있다. 이들이 대표하고 있는 것은 국민의 이익도 아니고 소속 집단 즉 정당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주의 (tribalism) 탐욕인 것이다.

이렇게 서양 정치경제 제도가 당면한 문제점은 서양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근본을 위협하고 있다. 이 위기는 궁극적으로 한가지 질문으로 귀결된다.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가 제시한 감시인은 누가 감시하나? 라는 질문이다. 286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가 집권자나 정당이 하는 일을 궁극적으로 유권자인 국민이 감시하고 평가하고 판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 제정시대에 황제의 호위대가 월급을 많이 주는 지휘관이나 장군을 황제로 옹립하듯이, 빚을 내서라도 사회복지를 증가시키는 정치인을 선거에서 당선시키고, 따라서 정당 간에는 재집권을 위하여 사회복지를 증가시키는 경쟁이 일어나고, 국민이 그 위험을 간파하지 못하고 눈앞의 복지를 선호한다면 민주주의의 기본전제는 무너진다. 실제로 유로위기 당시 각국의 지도자과 국민들이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문제의 본질을 알리고, 국민에게 기본적인 근로윤리로 되돌아 가도록 호소하고, 그런 정치가를 국민이 지도자로 뽑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경우 서양의 민주정치제도의 출발점인 정당정치제도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된다.

동양에서 정당정치에 대한 시도와 집단주의 탐욕에 대한 논쟁이 11-12세기에 전개된 바 있다. 송나라 진보주의 정치가 구양수 (歐陽修, 1007-1072)는 일련의 개혁조치를 시도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관리에 대한 보수를 올려서 공무에 충실하게 할 것, 법의 시행을 실효성 있게 할 것, 정실정치를 타파할 것, 그리고 과거시험에서 실질적인 정부 운영에 필요한 과목을 추가할 것 등이 포함된다.287 1045년에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린다. 그의 주장은 그의 붕당론 (朋黨論)에 근거한다: “군자는 원칙에 의하여 파벌을 형성하고, 소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파벌을 형성한다” 고 주장하면서 파벌의 형성을 허용할 것을 주장한다. 288 즉 현대식 정당 정치를 건의한 것이다.

실제로 11세기에는 송나라에서 현대식 사회주의로 간주될 수 있는 정책이 재상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을 중심으로 펼쳐졌으며, 보수주의라고 간주될 수 있는 정책이 왕안석(王安石, 1021-1086)에 의하여 시행되면서, 두 세력 간에 경쟁과 견제가 있었다. 결국 구양수의 파벌 형성 즉 정당정치에 대한 생각은 채택되지 않았다. 이유는 군자의 수준에 이를 수 있는 자는 극소수이고, 결국 대부분의 사람은 소인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정당인도 결국 사익에 빠지게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정당정치의 주장은 결국 주자학의 태두, 주희(朱熹, 1130-1200) 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사장되기에 이르렀다. 주희는 파벌의 구성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파벌은 결국 공공의 이익 보다는 집단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는 주장을 폈다.

집단주의자 들이 사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제어해야 하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결국 정당정치에 맞길 수 없고 정부에 있게 된다. 행정을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법을 만드는 책임을 진다는 삼권 분립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정부의 통치술 가운데 술치의 개념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왜냐 하면 시장이 공정경쟁이라는 공익을 추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라잔(Rajan)등 경제학자들은 금융혁명으로 특징지어지는 21세기 세계경제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정경쟁으로부터 이득을 보고 있는데, 이 공정경쟁이라는 “공익을 지키고자 하는 중요한 일에는 별 인센티브가 없다는 것이 문제”라는 패러독스를 지적하고 있다:

시장은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아주 자유로울 수도 없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시장은 아주 깨지기 쉬운 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경쟁시장에서 이득을 보지만, 실제로 경제체제를 경쟁적이게 하고 공정한 경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에는 아무도 커다란 이득을 취할 수 없다는데 문제의 관건이 있다. 심지어 자본가들조차도 공정경쟁을 진작하는 데서는 이득을 취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자본가들은 경쟁으로부터의 보호를 정부에 계속 요청하게 되는데,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본주의의 최대의 적이 되는 것이다.289

대기업, 즉 경제에 있어서의 집단주의는 최근의 2008년의 금융위기, 2011년의 유로위기 이후 시장경제에서 최대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특히 금융자본과 금융기업의 공공이익을 외면하고 자체의 이익만을 끝없이 추구하는 탐욕에 대하여는 연일 보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서양 시장경제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대비가 없는 상태이다. 서양에서는 집단주의 탐욕을 원천적인 문제로 보기 보다는 아담 스미스이래 시장경제 사상에 의거하여 “부족의 탐욕은 의도하지 않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공공의 이익 창출로 인도된다”는 원칙을 기본철학으로 아직도 믿고 있는 듯하다. 지금 노출되고 있는 문제점은 이러한 기본원칙에 대한 일부 예외 또는 주변적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양상이다.

법적으로 일부 견제 장치를 제외하고는 초 국가적 대기업, 특히 금융기업들은 윤리적으로 볼 때 용납되지 않는 기업운영을 하고 있는데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또 그 이후, 정부의 보조 즉 국민의 세금으로 생존하는 거대 금융기업에서 막대한 급료와 보너스를 나누어 갖는 상황을 일반 국민들이 목격하게 된 것이다. 정부가 별다른 초치를 취하고 있지 못한 가운데 최근 불과 수년 전부터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이 주로 유엔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기는 하다. 즉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의 사회공유 가치창달”(CSV, Creating Shared Value), 또는 “환경-사회-기업운영”(ESG, Environment, Social and Corporate Governance,) 이라는 운동아래 일부 기업이 법적으로는 비록 아무런 의무가 없지만 스스로 윤리적 책임의식을 가지고 기업의 집단주의적 탐욕을 스스로 자제해 보자는 운동이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기업의 기본 설립 목적, 즉 이윤추구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하게 된다. 부차적이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러한 최근의 운동은 아직 자선의 차원에 머물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결국 금융혁명과 함께 막강한 금융자본가, 그리고 이와 연계를 맺는 정치권의 관계의 시스템이 민주시장경제의 최대의 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를 규율하는 룰을 만들어 내는 것은 중용을 찾아 유지하는 것처럼 어렵다:

경쟁적인 시장은 룰이 없는 경우와 숨막힐 정도로 많은 룰 사이의 정교한 중용으로 이루어진다. 자본주의가 최대로 잘 작용하는 상태가 아주 불안정 한 것은 바로 이 중용의 입지가 아주 좁기 때문이다. 이 상태는 손쉽게 기득권에 의한, 기득권을 위한, 기득권의 시스템으로 전락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우리가 경험한 자본주의는 바로 이러한 형태의 자본주의였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아직도 지구상 많은 곳에서 이러한 자본주의가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290

국가주의 탐욕과 비교하여 집단주의 탐욕으로 볼 수 있는 이들의 활동에 대한 관리에 필요한 조치와 규율들은 동양보다 서양에서 주로 만들어져 나올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동양의 서양 배우기는 집단주의 탐욕을 규제하는 룰을 검토하고 도입하는 면에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점에서도 동양은 펀더멘털 면에서 좋은 기반을 가지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동양 정치경제 철학에 내재해 있는 술치(術治)의 개념이다. 술치의 개념은 인간은 개인, 집단, 국가지도자 모두에서 공동으로 발견되는 인간본성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철학에 근거한다. 즉 모든 인간은 공익보다 사익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무위사상에 의하면 현세의 모든 정치정당 그리고 특수이익집단은 결국 집단주의적인 이기심을 추구할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결국 법이 제한하는 것을 피해가면서 자체의 탐욕을 최대한 신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향을 보이게 될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결국 올슨이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지적한 대로, 모든 인간은 가능한한 최대한의 착취 즉 높은 세금을 거두고자 하는 “정주강도”의 성질을 본능으로 가지고 있다. 이는 국가주의 군주뿐 아니라 집단주의로 표현되는 정당이나 거대기업의 탐욕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3) 붙잡는 손의 행위는 국가주의에서 집단주의로 이동

서양의 시장경제가 국가주의라는 탐욕에 대처하는 데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집단주의 탐욕은 서양의 시장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서양의 집단주의는 서양의 개인주의의 연장이다. 서양의 자유방임주의는 개인의 자율을 방임하면서 자율이 자유로 변환하는 과정을 겪었음은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이는 곧 개인과 집단 차원에서 사익-공익 수렴론과 결합하면서 사익이 공익을 앞세우는 현상이 만들게 된다. 공익-사익 수렴론은 한 국가의 경제체제에서 결국 빈부격차를 심화하게 된다. 왕들이 자신의 사익을 위하여 나라의 경제를 운영하면서 민중과의 소득격차를 크게 하던 국가주의 현상은 이제 집단주의 지도자들이 왕을 대신하여 사익을 추구하고 민중과의 소득격차를 크게 벌리는 현상으로 전환하고 있다. 서양에서 이러한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서양문명은 어떻게 몰락하는가 (How Western Civilization could collapse)” 라는 기사는 미래를 내다보며 서양 정치경제에 닥친 문제를 소개했다. 민주주의, 개인의 자유, 사회적 관용 같은 가치위에 세워진 서양문명이 30년, 한 세대 내에 위기에 봉착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두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지구온난화를 포함한 생태계의 파괴 또는 빈부격차가 커지는 것을 방기함으로써 서양문명은 몰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양문명이 퇴보하는 가능성에 두가지 가 있음을 검토하였다. 하나는 선진국 함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초국가적문제가 심각 해져서 선진국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국가들을 파괴하는 경우다. 지구온난화, 팬데믹, 개도국의 인구팽창, 빈부격차의 증가 등 초국가적 문제의 등장이 그것이다. 생태계의 파괴로 인류문명이 근본적인 타격을 받으면 동서양 문명이 모두 위기에 봉착하고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는 인간본성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빈부격차를 극복 못하는 선진국함정에 빠진 서양문명이 파괴될 경우 동양문명이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보자. 선진국의 엘리트 그룹이 자신들의 부를 계속 추구하는데 만 목적을 두고 나머지 인간들의 생활에 무관심할 경우 그런 사회는 결국 퇴보한다. 국가내부의 빈부격차 증가와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 국가 간의 빈부격차 증가다.

잘사는 나라와 잘 못 사는 나라 사이의 빈부 격차는 매일 더 크게 벌어지고 있다. 잘사는 나라는 매일 더 부자가 되고, 잘 못사는 나라는 살아 나가기가 매일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291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8명이 가진 재산을 합치면 현재 지구상 인구의 절반인 하위 36억명의 재산을 다 합친 것보다 많다.292 여기에 문제를 더욱 크게 하는 것은 후진국의 급격한 인구증가 추세다. 2050년에 가면 세계 인구는 90억명에 이르게 된다. 1900년의 세계 인구는 16억명이었다. 아프리카 인구는 현재 9억명에서 20억명이 된다. 동남아 인구도16억명에서 25억명이 된다. 그런데 유럽의 인구는 7.3억명에서 6.6억명으로 줄어든다.293 나이지리아와 일본을 비교해보자. 현재 각각 1.3억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2050년이 되면 나이지리아는 3억명으로 늘어나고, 일본은 1억명으로 줄어든다.294

선진국은 각자 자신 내부의 빈부 격차 증가에 집중하느라고 세계 문제에 몰두할 여유가 없다. 세계문제를 제외하고 국내문제로 인하여도 선진국은 결정적인 위기를 맞게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과 영국을 예로 들면, 현재의 빈부 격차 추세가 계속되면 2050년쯤에는 미국과 영국에 중산증은 없어지고, 부자와 극빈자의 두 부분으로 국민들이 갈라서게 된다는 것이다.

2050년쯤 되면 미국과 영국은 근본적으로 두개의 사회적 계층을 가진 나라로 변하게 된다. 작은 엘리트 그룹은 잘 살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생활 환경을 맞게 된다… 이들은 불만에 싸이고 두려움을 가지고 살면서 종교, 인종 또는 국가 라는 데 매달리게 된다. 부자들은 자기들이 소유한 부에 더욱 매달려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더 일하게 만드는 체제로 전환하게 된다.295

그렇게 되면 그런 나라는 양 극단에 선 사람들이 서로 극심한 투쟁을 하게 되어 나라로서 구실을 할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민주주의, 개인의 자유, 관용 같은 가치를 점점 소홀히 하게 된다. 서양이 빠진 « 선진국 함정 »이 의미하는 바는 당시 룩셈부르크의 총리 융커(Jean-Claude Juncker, 1995.1-2013.12 간 19년 총리역임, 현재 EU 집행위원장) 가 한 말에서 정확히 지적되고 있다: “우리 지도자들은 유로 위기에 봉착하여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다들 잘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할 경우 어떻게 재선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We, heads of government all know what to do, we just don't know how to get reelected when we do it.”) 융커 위원장의 말은 무엇보다도 유럽 국가들이 안고 있는 막대한 부채, 그리고 이와 연계된 사회복지 비용, 이를 개선하지 못하는 정치체제에 대한 지적이다.

선진국이 이를 피하려면 “빈부의 격차의 증가와 빛을 내서 하는 복지의 답습”으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 선진국이 그렇게 한다면 서양문명의 몰락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은 무제한 인간의 행동을 기다리지 않는다. 현재 상황을 바꾸지 않으면 몰락으로 가게 될 것을 예견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들 중에는 서양문명이 몰락하면, 중국 같은 강한나라가 살아남게 될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296

왜 서양문명이 쇄락해도 동양문명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동양이 놀라운 경제성장을 하고 있고 지구상 유일하게 중진국 함정을 벗어나고, 민주시장 경제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는지 원인을 살펴보아야 한다. “문화가 중요하다 (Culture Matters)” 라는 논문에서 미국 학자 로렌스 해리슨(Lawrence E. Harrison) 은 동양 유교문화권을 예로 들면서 한 나라의 문화와 경제 발전 사이의 긴밀한 상관관계에 대하여 통찰력 있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싱가포르, 홍콩, 대만은 열대 지역에 있다… 그들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은 유교 문화권의 일본이나 한국이 경제 발전에서 성공하는 것을 되풀이하고 있는다… 또한 열대에 있는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그리고 필리핀에 있는 소수 중국계가 경제적인 성공을 이룩하는 것도 유교 문화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페루나 브라질에 있는 소수의 일본인들도 마찬 가지이다. 297

중남미 학자들은 과거 기후, 식민생활, 지배구조(dependence theory), 또는 인종차별 등 때문에 경제발전을 하기 어렵다는 « 핑계 »를 상정하였다. 해리슨 교수는 중남미에 있는 동아시아의 중국, 한국, 일본인의 경우를 보면 그러한 어떠한 것도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제도나 패턴을 가지고는 경제발전을 이룰 수가 없으며, 즉 문화가 바로 제도나 패턴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며 준 것이다. (“Culture is the mother; institutions are the children.”)298

지구 전체를 보면, 서양을 따라잡은 나라는 동양 밖에 없고, 동서양을 제외하면, 아직 경제발전이나 민주주의 면에서, 선진국이 된 나라는 없다고 설명하면서. 결국 인류의 30% 정도만 선진 민주국이고 나머지 70%에 대한 노력은 지난 반세기 이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299

우리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세계를 경제발전으로 이끌 수 있다는 꿈이 좌절과 패배주의로 뒤바뀌었음을 목도하게 되었다. 스페인, 포르투갈, 한국,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 홍콩 같은 몇몇 안 되는 나라들 만이 로스토(Rostow)의 발전계획에 따라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였을 뿐이다. 현재 대략 60억명의 사람 중에는 10억명 정도가 선진국 민주대열에 있을 뿐이다. 300

사실 동아시아 국가들, 일본을 필두로,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를 지칭하는 4룡, 그리고 중국의 경제 발전은 그 속도나 폭에서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서양의 학자들은 “유교적 근로 윤리 Confucian Work Ethics”라고 통칭하면서 서양의 자본주의가 흥기할 때 서양이 가지고 있었던 소위 “신교도 근로 윤리 (Protestant Work Ethics)”와 비교하기도 한다.

유교적 근로 윤리의 특성으로 이들은 근면성, 절약, 교육열, 작은 정부, “미래를 위하여 당장의 즐거움을 유보” (deferred ingratiation 또는 deferment of present pleasure for greater future gain) 하는 전통, 그리고 효율적인 법 제도와 사회복지 제도 등을 꼽고 있다. 결국 “유교” 국가들은 경제와 민주가 성공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부상은 동양이 결코 경제 발전을 이룩하여 서양을 따라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 막스 베버의 견해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301 이는 완전히 서양적인 편견이며, 정치경제사상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 발전, 근로윤리, 성과주의, 그리고 근면절약으로 표현되는 유교적 가치를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유하고 있다. 그들의 경제적 성장으로 막스 베버가 중국의 종교 라는 책에서 주장한 것이 억지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는 중국에서 자본주의적 성장이 불가능한 이유는 칼빈주의에서 볼 수 있는“자신들이 선택을 받았는지 불확실 하다는 데서 오는 긴장감”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302

동양의 유교 근로윤리는 자신을 위하여 하는 것이므로 종교적인 이론의 변화나 지구종말론의 운명과는 무관하게 내부의 필요에 의하여 실행되는 것이므로 굳건한 문명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양 언론들은 동 아시아의 가치로서 “교육, 근면, 절약, 그리고 미래의 더 큰 성취를 위한 현재의 즐거움을 유보하는 자세”를 들고 있다.303 서양의 통계도 유럽, 미국, 동양인 중에서 미국을 기준으로 할 때 유럽인은 미국인 보다20% 정도 적게, 동양인은 30% 정도 많게 일하고 있다고 하면서 동양의 근로의식이 가장 강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동아시아에서 경제발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바로 유교 사상에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20세기중반 까지도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강력한 교육/성취감/성과주의/근검절약 같은 경제적 비약에 필요한 요소들을 끌어내는 데는 바로 같은 문화적 정치적인 리더십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304

경제적으로 볼 때 유교, 개신교, 그리고 유대교에 속한 사회들은 구교, 이슬람, 그리고 그리스정교에 속한 사회들보다 성공적으로 발전을 이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생각이나 사상이 경제발전을 이루는데 필요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이들은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들은 많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사회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면, 종교에 관한 연구를 볼 때, 개신교, 유대교, 그리고 유교 사회들이 구교, 이슬람, 그리고 그리스 정교 사회들 보다 경제적 발전을 위한 진흥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고 보고 있다. 반면 후자들은 경제적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305

결국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후반기까지 서양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저 동양의 문명에서 왜 동양이 서양에 압도되었는지 문제점만 찾으려고 노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20세기 중반까지 동양이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에서 뒤지고 있는 이유를 유교와 도교의 전근대성, 비합리성, 비과학성, 비민주성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강했다.306 그러나 동양의 계속되는 획기적인 경제발전, 민주, 사회 발전에 주목하여 동양의 정신 문화 즉, 유교 (교육중시와 성과주의 전통, 보편적 윤리와 근검절약의 문화), 도교 (적은 세금과 작은 정부로 개인의 경제주도권을 보장, 자연과 인간 간의 조화), 불교 (자비사상, 무소유 중시)등에 내재해 있는 정치경제사상의 가치에 대하여 21세기 초 에야 비로서 서양도 서서히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양의 이러한 장점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정책적 결정이나 결단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와 전통 속에 배어 있는 것이다. 서양과는 다른 깊고 넓은 동양 특유의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고, 철학적 바탕을 가지고 있다. 즉 정치경제사상에서 동양이 서양보다 집단주의(tribalism)에 대한 경계를 확실히 하고 있다. 동양 근로윤리의 특성은 동서양의 경제발전 패턴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본성의 이기심을 동양에서는 관리를 통하여 경제발전을 추구하자는 패턴을 보이고 있고 서양에서는 방임을 추구하자는 패턴을 추구하자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서양보다 민족국가의 건설에서 2천년 앞선 동양에는 민족국가 건설과 함께 등장하는 정치경제사상면에서 찾아낼 지혜와 정책이 있다. 동양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서양과 다른 정치경제학적 사상은 싱가포르의 고 리콴유 총리가 잘 설명하고 있다. 그는 공산주의의 소멸과 함께 미국에 닥치고 있는 서양이 겪고 있는 정치경제적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사회가 성공하려면 경쟁을 통하여 능력 있는 사람을 키우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도 기회를 부여하여야 한다. 즉 경쟁과 협력이 공존해야 한다. 공산주의처럼 모든 사람이 비슷한 결과를 공유하면 발전이 없게 된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소멸했다. 반면 능력만 키우는데 집중하여 성공한 사람이 모든 것을 취하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가질 것이 없게 되면 빈부차가 점점 심해지게 된다. 미국이 그런 것처럼 결국은 사회의 균형과 공평성이 깨진다. 307

그는 이런 상황에서 빈부격차 문제의 해소와 함께 경제발전을 이루는 방안은 동양의 정치경제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음양론을 소개한다. 한 나라에서 경제약자에 대한 지원과 함께 경제발전을 이룬 자들에게 대한 정당한 보상을 음양론의 철학에 따라 조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경쟁과 협력을 공존시키자는 것이다:

최선의 방법은 동양의 음양론에서 찾을 수 있다. 경쟁과 협력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이것은 서양의 자유주의자들이 하는 것과 다르다. 그들은 국민들을 선동하여 수치심도 내던지고 복지를 하나의 권리처럼 계속 주장하게 한다. 결국은 그 나라에서 복지비용이 폭발적으로 팽창하고 만다.308

이런 상황 속에서 동양문화 기본 장점인 교육중시, 성과주의, 근검 절약, 자기수양의 전통은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하는가 라는 문화의 원초적인 과제와 우리는 맞닥뜨리고 있다. “서양의 패턴에서 윤리의 배제 vs 동양의 패턴에서 윤리의 핵심적인 역할”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21세기 동서양의 정치경제의 현실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21세기 초의 동양문명은 서양문명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특히 동양의 관계주의가 서양의 개인주의에 의하여 상당히 침투되어 있다. 동양의 젊은이들은 서양의 젊은이들과 비슷하게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rich and famous)것을 원하고 이것을 추구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동시에 한 문명은 깊고 넓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현 상황이 문명 자체를 바꾸어 동양문명이 서양문명처럼, 특히 동양의 관계주의가 서양의 개인주의로 몰입되어가는 과정을 겉 고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 수천년을 두고 쌓아온 동양문명과 강력한 서양문명 간의 대화와 충돌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수 세대 또는 수 백년이 지나가야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서양에서 지금도 정치경제를 논하면서 경제, 법률, 제도에 집중하고 있다. 개인주의에 집중하게 된다. 윤리는 대부분의 경우 제외되고 있다. 반면 동양에서는 근검, 절약, 무욕 같은 윤리가 정치경제의 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관계주의에 집중하게 된다. 동양 정치경제의 근로윤리는 이기심에 대한 관리에서 온다. 인간은 사회생활에서 교육과 자기수양을 통하여 근검절약을 추구해야 하고, 이기심의 발현에서 탐욕보다는 동정심과 겸양을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양의 개인주의에 대하여 동양은 관계주의를 사유로 하는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결국 정치경제사상은 문명의 유산이다. 동양문명은 서양과는 다른 정치경제사상을 가지고 있다. 관계주의는 유교, 도교, 불교에 모두 퍼져 있으며 동양 문화 내부에 깊고 넓게 스며들어 있다.309 동양이 관계주의의 문화적 장점을 살리고 키워 나가면 선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4) 서양의 집단주의 vs 동양의 술치(術治)

동양의 사익-공익 충돌론과 서양의 사익-공익 수렴론은 인간 행동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본성에 대한 철학의 차이에게 발생한다. 동양은 인성론에서 인간본성이 강력한 이기심과 미약한 이타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관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서양의 아담 스미스 등의 인성론은 인간본성이 선하다는 철학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에 맡기자는 자유방임론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양 인성론에서는 인성의 관리 라는 차원에서 서양 정치철학과 상반되는 정치철학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철학은 지도자의 통치력에 필요한 요소가 된다. 이것이 바로 동양에서 중요시하는 통치술의 개념이다. 인간본성에 비추어 정치경제 관리할 때 술치(術治)의 철학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신불해(申不害)는 전국시대 한(韓)나라의 재상이며, 형명(刑名)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군주의 명령이나 관직을 지칭하는 명(名)과 이를 신하들이 잘 시행하는지 여부를 살펴보는 형(刑)이 국가운명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그는 형명의 술(術)이 부국강병을 이루는 첩경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그의 술치(術治) 사상은 전국시대를 거쳐 중국과 동양에서 인사행정과 관료제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술치의 핵심은 지도자가 관료나 신하들이 공익을 해치고 사익을 추구하는지를 살펴서 바로잡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데 있다. 민족국가의 설립과 그에 따른 관료제도나 행정제도가 갖춰졌다고 해서 술치의 역할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술치의 핵심 요소는 인성론에 기인하는 것이므로 인간 사회에서 제도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작용하게 된다. 사회제도의 발전 과정에서 오히려 중요성이 더해지고 사익과 공익을 구분하는 것이 더욱 어렵게 된다. 정치경제가 중요해지면서 관료뿐만 아니라 비즈니스의 탐욕을 관리하는 책임이 정부에 주어지게 된다. 관료와 비즈니스의 연계로 사익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술치를 국가경영에서 중요시한 예로 싱가포르를 들 수 있다. 리콴유 총리는 집권 초기 1960년 2월에 무엇보다 먼저 국가공무원이 사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는 “부패방지법”을 공포하였고, 탐관오리를 조사하는 “탐오조사국”을 설치하여 강력한 수사권과 사법권을 부여했다. 동양의 개념인 술치를 강조함으로써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53년 대통령직을 떠나며 고별연설을 하였다. 여기서 그는 군산복합체의 집단주의 행위가 사익을 추구하면서 국가 운명에 커다란 문제를 일으킨다고 경고하였다. 군산복합체의 행위는 집단주의가 공익을 외면하고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에 대하여 정부가 무력감을 가지게 되는 서양 정치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바로 동양문명에서 “공익과 사익은 충돌한다”는 철학에 따라 술치로 대처하고자 하는 중요한 정치경제적 문제다. 아담 스미스 등이 제공한 “공익과 사익은 수렴한다”는 철학적 이론을 신봉하는 서양 정치경제학은 술치 문제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무방비 한 상태에 있게 된다. 따라서 집단주의 행위는 서양에서 계속 확산되고 있다.

2007-2008의 글로벌 금융위기나 2009-2011의 유로위기는 단순한 금융이나 경제 문제가 아니다. 그 저변에는 시장경제 사상과 시장경제를 관리하는 체제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경제차원의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문제가 개재되고 있다. 서양은 큰 정부, 많은 세금, 많은 법규, 빈부격차의 증가, 그리고 빛을 내어 확대하는 복지를 계속 답습하고 있다. 2007-2008 금융위기는 금융가, 의회, 그리고 행정부가 합쳐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 집단주의가 그 원인이다. 미국은 결국 이런 금융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미봉책으로 지나쳐 버렸다. 이것이 당시 금융위기를 분석한 베스트셀러인 “자본주의자 들로부터 자본주의를 구하자" (Saving Capitalism from the Capitalists)가 내린 결론이다: “시장경제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사회주의로의 복귀가 아니다. 진정한 위협은 시장경제 체제내에서 사익을 보호하자는 집단주의적 행동이다.”

술치의 철학은 동서양이 거대기업과 언론 사이의 유착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에서도 나타난다. 미국을 비롯하여 서양에서는 거대기업이 언론사를 구입하고 활용하는 것을 자유롭게 허용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거대기업과 언론사의 통합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 바로 술치의 개념 때문이다. 군산복합체는 군과 산업체 간의 집단주의 이익추구를 위하여 언론과 여론의 중요성을 알고 이를 활용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가 더욱 커진다. 이들은 앞다투어 언론사를 사들인다. 바이든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고별연설과 아주 유사한 고별연설을 2024년 말에 시행했다. 여기서 그는 거대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언론사를 소유하는 상황이 최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이들 거대기업과 언론사의 결착이 놀라운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민주주의를 위협할 정도라고 지적하였다.

관료나 행정가들이 공익을 해치고 사익을 추구하는 것을 경계하는 술치(術治)는 사회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 집단주의의 사익추구에 대한 정부의 대비에 대하여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특히 술치의 개념이 빈약한 서양에게 닥친 근본적 문제가 된다. 앞으로도 21세기를 가름할 서양사회의 근본적인 문제, 즉 빈부격차의 계속되는 증가라는 현상은 바로 술치가 강조한 공익과 사익의 구분이라는 원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서양 정치경제 철학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집단주의 행위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정당에 그대로 해당되어 문제가 된다. 민주주의에서는 국민이 능력 있는 사람들을 지도자로 선출하고, 이러한 지도자가 공익 즉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전제가 지켜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서양의 정치제도에서는 점차 공익 우선이라는 전제가 흐려져가고 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서양은 투명성 증대 등의 정치 제도 개선과 시민들이 정치에 더 많이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방안 등을 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민주주의가 계속 발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문제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군산복합체, 금융위기, 의회가 공익보다 사익을 추구하는 경향 등을 고려하면, 문제는 단순히 체재의 개선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체제 이전에 피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문제에 기인한다고 봐야 한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지 결국 인간 본성을 따르기 때문에 정치인도 역시 결국 공익보다는 자기 보존 (의회주의에서 재선)에 이끌리게 된다. 술치의 개념의 부재로 서양은 정치경제와 민주주의는 자신도 모르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치고 있다. 결국 빈부격차가 계속 증가하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서양에서 집단주의, 즉 금융가와 의회, 나아가 행정부까지 가세하여 각 집단그룹이 자신들의 이익을 확대하는 경향을 추구하고 있는데 대하여 커다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서양 대부분의 국가들이 GDP대비 국가채무가 너무 커서 국가의 경제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대로 가면 낙후와 쇠락이 불 보듯 뻔한데 서양은 정치가나 유권자나 이를 바로잡을 결의나 활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서양국가들이 정치경제 차원에서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지적한 것이다. 바로 서양이 보이고 있는 선진국 함정이다. 이는 바로 동양의 인성론이 개발한 술치의 개념의 “부재”와 직접 연계되어 있다.

서양의 정치경제는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개인주의 이기심에 대하여는 사상적으로 무방비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이기심을 방임하는 쪽으로 시장경제의 방향이 설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담 스미스의 시장경제 철학에 의하여 개인의 이기심은 방임되어 이에 대한 아무런 윤리적 처방을 내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동양은 무위사상으로 이러한 인간본성에서 비롯되는 계속되는 어려운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무위사상은 동양의 사회생활에서 가장 유용하면서도 가장 몰이해되고 있는 사상이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많은 경우 무위를 활용하고 있다. 동양사상에서 법가에 속하면서도 도교를 깊이 연구한 한비자에 의하여 무위가 실생활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주 잘 설명되고 있다:

道 라고 하는 것은 만물의 시초입니다. 군주는 자연의 道를 잘 헤아려 인간의 道를 세워야 합니다…군주는 마음을 비우고 평정을 유지하면서 신하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고 일을 하게 만들어야 합니다…말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말하게 하고, 일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일하게 하여야 합니다…그러므로 군주에게 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하지 않고 신하로 하여금 하게하는 법이며, 현명하다고 하더라도 과시하지 않고 신하가 하는 것을 지켜보는 법이며, 용기가 있더라도 그것을 나타내지 않고 신하로 하여금 스스로 그 무용을 발휘하게 해야 합니다. (한비자, 주도편主導編)

물론 한비자는 무위의 철학을 법가의 관점에서 군주가 신하를 통솔하는 술치(術治)의 방법으로 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법가에 속하는 한비자는 무위사상을 활용하여 효율을 극대화하면서도 동시에 군주와 신하 간의 깊은 신뢰와 공동이익을 모색할 수 있다는 면은 외면하고 있다. 즉 도교에서 무위사상이 상정하고 있는 인간사회의 윤리와 조화라는 목적과는 관계없이 다만 통치술의 목적으로 무위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인 관점을 잠시 옆으로 치워 놓고 본다면, 한비자는 그의 날카로운 예지와 필치로 무위의 작용을 아주 간명하고 쉽게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동서양문명은 서로 아주 다른 인간 본성에 대한 처방을 상정하고 있다. 특히 정치경제와 관련하여 서양사상에는 윤리가 기본적으로 배제되어 있으나, 도교와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동양사상에서는 법률보다 윤리가 핵심을 이루고 있다. 동양의 정치경제철학은 이러한 윤리의 중요성을 기반으로하고 있다. 사익과 공익은 일치한다는 전제하에 출발한 서양의 정치경제학은 사익과 공익은 충돌한다는 동양의 정치경제학과 기본적인 차이점을 드러낸다. 이는 모두 통치술 개념의 필요성에 대한 동서양 문명의 차이, 즉 동서양 문명이 인간본성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지 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

  1. 273

    Adam Smith,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op.cit., p.

  2. 274

    Smith, Adam (2008-12-13).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op.cit., p. 74.

  3. 275

    Ibid, p.27

  4. 276

    George Whatley and Benjamin Franklin, Principles of Trade, March 1777, in The Works of Benjamin Franklin vol., II. By Jared Sparks, Boston, Hilliard, Gray and Company, 1840, p.401

  5. 277

    Smith, Adam (2002-06-01).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p. 321). Public Domain Books. Kindle Edition.

  6. 278

    Smith, Adam (2002-06-01).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op.cit., pp. 84-85

  7. 279

    Ibid

  8. 280

    Mancur Olson, “Dictatorship, Democracy, and Development,” The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87 (Sept. 1993) 574-575 쪽

  9. 281

    Ibid.

  10. 282
  11. 283

    Rajan, Raghuram; Zingales, Luigi (2003-02-18). Saving Capitalism from the Capitalists: How Open Financial Markets Challenge the Establishment and Spread Prosperity to Rich and Poor Alike (p. 68). Crown Publishing Group. Kindle Edition.

  12. 284

    Rajan, Raghuram; Zingales, Luigi (2003-02-18). Saving Capitalism from the Capitalists: How Open Financial Markets Challenge the Establishment and Spread Prosperity to Rich and Poor Alike. Op.cit., p 276

  13. 285

    Ibid 1, 44 쪽

  14. 286

    누가 감시인을 감시하나? 라는 명제는 로마의 시인 쥬브널(Juvenal) 이 그의 풍자시에서 제기한 의문이다. 당초에는 딸의 행실을 지키기 위하여 감시인을 임명하면서 그 감시인은 누가 감시하나 라는 풍자로 시작됐는데, 차츰 정치적인 뜻으로 더 많이 쓰이게 되었다.

  15. 287
  16. 288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17. 289

    Rajan, Ibid, 311

  18. 290

    Rajan et al, Ibid, 311-312

  19. 291
  20. 292
  21. 293
  22. 294
  23. 295

    How Western civilisation could collapse, BBC, 18 April 2017

  24. 296

    Ibid.,

  25. 297

    Lawrence Harrison and Samuel Huntington Editors, Why Culture Matters (Haw Values Shape Human Progress), Basic Books, 2000, New York, Introduction, Introduction 28

  26. 298

    Ibid, Introduction 18

  27. 299

    Ibid, Introduction 17

  28. 300

    Ibid, Introduction 17

  29. 301

    Harrison, Lawrence E.; Clark, Gregory; Boettke, Peter J.; Robinson, James A. (2007-01-08). How Much Does Culture Matter? (Cato Unbound) (Kindle Locations 132-137). Cato Institute. Kindle Edition.

  30. 302

    Harrison, Lawrence E.; Clark, Gregory; Boettke, Peter J.; Robinson, James A. (2007-01-08). How Much Does Culture Matter? (Cato Unbound), op.cit., Kindle Locations 132-137

  31. 303

    The Economist August 20th, 2011

  32. 304

    Ibid, Kindle Locations 137-143

  33. 305

    Harrison, Kindle Locations 117-119

  34. 306

    Lawrence Harrison and Samuel Huntington Editors, Why Culture Matters (Haw Values Shape Human Progress), Basic Books, 2000, New York, Introduction, Kindle Locations 137-143

  35. 307

    Allison, Graham. Lee Kuan Yew: The Grand Master's Insights on China, the United States, and the World (Belfer Center Studies in International Security) (pp. 123-124). The MIT Press. Kindle Edition.

  36. 308

    Ibid

  37. 309

    심지어 한국에 중국이나 일본 보다 넓게 펴져 있는 기독교 사상에서도 관계주의 가 살아남아 있다. “나와 神의 관계” (individualism) vs “나와 부모의 관계”(relationalism)에서 어느 것이 중요한지 하는 점에서 한국 기독교 인들은 서양의 기독교인들과는 많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후자를 선택하는 경우가 훨씬 서양보다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