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I 혁명은 양날의 검: 생산성 증가와 양극화 확대
우리는 현재 AI 혁명의 와중에 있다. 몇 가지 상황을 정리하면서 인간에게 닥친 근본적인 문제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많이 토론되는 문제가 AI가 인간을 대체하게 된다는 시나리오 또는 AI를 지배하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한다는 시나리오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반드시 고려해야 할 문제가 인간본성이다. 호모 사피엔스로서 우리는 가지고 있는 인간본성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 이러한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인간본성에 대한 토론에서 우리는 서양 근대철학의 아버지 라고 부르는 데카르트(1596-1650)의 사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그의 사유세계가 한참 만개에 달한 시점에서 2개의 저서를 발표한다.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 1637)과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 1644)가 그것이다. 여기서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통해 인간 정신을 모든 사고의 확실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자연을 수학적·기계적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인간은 이성을 통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물질 세계를 정신과 구별되는, 연장(延長)을 속성으로 하는 실체(res extensa)로 규정하고, 자연을 기계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대상으로 설명했다. 인간 정신은 神의 완전함을 본받아 자연을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고 보았다. 이로써 데카르트의 자연관 핵심으로 기계론적 세계관을 제시하였다. 자연은 복잡한 기계와 같으며, 원리를 알면 조작·통제 가능하다고 설명하였다. 나아가 인간주의(anthropocentrism), 즉 인간 이성은 神의 질서를 모방할 수 있는 힘을 지니며, 따라서 자연을 지배할 권한을 가진다고 해석했다.
이로써 데카르트는 근대과학의 발전에 크게 긍정적으로 기여했으며, 동시에 이데올로기 시대의 인간주의를 여는데도 부정적으로 기여했다. 여기서 우리는 데카르트의 인간본성에 대한 분석이 어떻게 “합리주의”로 서양의 근대철학을 주도했는지 주목해야 한다. 그의 합리주의는 스피노자나 데이비드 흄 같이 이에 반대하는 사상가들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서양에서 압도했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시대에 인간주의가 인류사회를 파멸 직전까지 몰고가면서, 정신중심의 서양 사유체계가 본격적인 도전을 받게 된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는 여전히 서양인들의 뇌리에 깊이 남아있다. 이에 의거한 사람들은 여전히 인간의 힘으로 자연이나 인간 본성을 개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된다.
AI혁명은 인류의 정신기능에 관한 문제다. 산업혁명은 “근육혁명”이고, AI혁명은 “정신혁명”이다. 산업혁명은 인간의 신체적 노동을 기계가 대체하면서 생산력을 폭발적으로 확장시킨 사건이었다. 증기기관, 전기, 대량생산 체계가 인간의 ‘근육’을 대신해 산업을 움직이게 되었다.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이래 인간이 지탱하여 온 인간이나 짐승의 근육을 산업의 힘이 대체하게 되었다. 반면 AI 혁명은 “정신혁명”이다. 인간의 지적·인지적 활동을 인공지능이 보조하거나 대체하면서 새로운 차원의 혁신을 만들어내고 있다. AI 혁명은 인간의 고유의 정신능력을 확장하면서 사회·경제·문화 전반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흐름이다. 데이터·컴퓨팅 인프라, 자율적 의사결정, 물리적 세계와의 결합, 그리고 인간 삶의 방식 변화를 초래한다. AI 혁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AI가 아무리 발전하여도 그것은 AI를 창조한 인간본성 속에서 움직이게 된다. 호모 사피엔스에 닥칠 위험은 인간을 대체하는, 즉 인간본성을 개조하는 AI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AI가 인간본성을 재구성할 수 있다면,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는 거기서 끝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그동안 쌓아온 모든 종교, 윤리, 진화론, 과학, 철학체계가 모두 무효가 된다.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인간의 역사가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모든 존재와 생각이 인간본성과 함께 사라지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의 죽음과 같은 것이 된다. 호모 사피엔스로서 우리는 공자와 스피노자의 철학을 상기해야 한다: “죽음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관찰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AI가 인간을 대체하겠다는 가설은 철학의 영역이 아니라 공상과학소설의 분야로 넘겨야 한다.
AI혁명을 지배하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는 시나리오도 인간본성을 중심으로 분석해야 한다. AI가 발전하여도 인간본성이라는 체제내에서 움직이게 된다. 강력한 이기심과 약소한 이타심,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고자 하는 윤리와 법률, 이런 체제는 여전히 AI혁명도 지배하게 된다. 지금까지 인간사회에서 어떤 계시종교, 형이상학적 논리, 이데올로기도 인간본성이라는 자연법칙을 벗어나면서 인간세계를 지배한 적이 없다. AI도 이 체제내에 머물게 된다. 그러므로 AI에 의하여 인간이 인간을 철저히 지배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철학의 영역이 아니라 공상과학소설의 분야에 남기는 것이 좋다.
이런 가능성 보다도 AI 혁명이 가져올 문제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산업혁명이 아무도 예기하지 않았던 기후변화를 가져왔고 우리 생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산업혁명은 기후변화의 원인(遠因)이다. 산업혁명이 없었다면 기후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석탄·석유 같은 화석연료 사용을 폭발적으로 늘렸고, 이로 인해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가 급격히 상승하여 지구 온난화와 기후위기의 구조적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 누구도 이를 계획하고 인간을 지배하는데 활용한 것이 아니다. 기후변화만으로 인류가 완전히 멸종할 가능성은 낮지만, 문명 붕괴와 대규모 인구 감소를 초래할 위험은 충분히 존재한다. 생존 환경이 악화되어, 해수면 상승, 폭염, 가뭄, 홍수로 인해 거주 가능한 지역이 줄어들게 된다. 또한 농업 생산성 감소, 물 부족으로 대규모 기근 발생 가능이 커진다. 동시에 기후 변화로 인해 전염병 매개체 확산이 가능해지면서 팬데믹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기후변화에 대하여 인간본성에서 접근해보자. 기후변화는 인간의 탐욕이 재산을 끊임없이 증가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컨트롤하지 못한데 있다. 인간이 그럴 능력이 있었다면 전세계가 산업화와 교역으로 뒤덮이면서 자연을 수탈하는 과정에 이르기 전에, 인간사회가 이를 관리하였을 것이다.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 자본과 기술을 통해 증폭되면서, 자연을 무한히 착취할 수 있다는 착각을 낳았고 결국 기후변화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최근 수십 년간 기후변화에 대한 거듭된 경고와 실제로 우리에게 닥친 문제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미래 세대의 생존 가능성을 보장할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
AI 혁명으로 인간의 본성이 다시 강력하게 드러나는 무대가 되고 있다. 산업혁명이나 AI혁명이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거울이며 인간 본성을 확대하는 증폭기가 된다는 점이다. 산업혁명이 많은 혜택을 인간에게 가져왔다. 그처럼 AI 혁명이 많은 혜택을 인간에게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산업혁명이 인간의 탐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증폭시켰듯이, AI 혁명은 인간의 부에 대한 집착과 권력욕을 더욱 크고 적나라하게 보여주게 된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AI혁명이 인간을 더 자유롭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더 종속적으로 만들 것인가?
산업혁명 당시 우리는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 1811~1816)을 경험하였다. 러다이트는 실제인물인지 모르지만 섬유방직기계를 파괴하기 시작한 “러드” 라는 인물을 따르는 섬유산업 노동자들을 뜻한다. 이 운동은 산업혁명 초기 영국 노동자들의 기계 파괴 운동이었다. 단순한 폭동을 넘어 노동자 계급의 생존권 투쟁이었다. 러다이트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실업과 빈곤 심화, 즉 사회의 양극화에 대한 걱정이 앞선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후 노동조합과 민주주의 운동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동시에 부정적인 측면이 계속 커지고 있다. 노동조합과 민주주의 운동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빈부격차 문제는 산업혁명이후 심화되었다. 인간본성에 내재하는 탐욕과 양극화가 그 만큼 확대된 것이다.
산업혁명과 AI혁명이 나갈 방향은 인간의 정신적 구상이나 형이상학적 발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결국 인간본성이 결정한다. AI혁명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 갈지는 산업혁명에 의하여 인간본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하는 과거사례가 잘 보여준다. AI 혁명이 가져올 여러 가지 발전을 긍정적으로 보고 즐겨야 한다. “AI를 다 폭파하고 옛날로 돌아가자”는 반대의견도 나온다. 산업혁명때 등장한 러다이트 운동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우리가 산업혁명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처럼, AI를 무시할 수 없다. 미래의 대세이기 때문에 뒤떨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빈부격차의 확대, 즉 중산층의 감소로 인한 국가내 그리고 국가간의 불안정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산업혁명과 AI 혁명: 양극화는 공익을 외면하는 사익추구에서 발생
양극화 현상은 공익을 외면하고 사익추구를 정당화해주기 때문에 발생한다. 사익-공익 수렴론이다. 거대기업들이 사익을 추구하여도 이들의 사익이 결국 공익으로 돌아와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산업혁명과 AI혁명이 보여주는 현상은 이러한 가설에 반대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고, 중산층은 약화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결국 양극화의 본질은 공익을 위반하고 사익추구를 허용하는 정치경제체제에 있다.
양극화의 본질을 살펴보자. 산업혁명의 결과로 자본가 계급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증기기관, 방직기, 철도 등 새로운 산업에 투자한 기업가와 공장주들이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방직업자, 철강업자, 철도 사업가들이 산업혁명 이후 “신흥 부자”로 떠오르게 된다. 이전에는 귀족·지주가 사회 상류층이었지만, 산업혁명 이후 “산업 자본가” (industrial capitalist)가 새로운 상류층으로 자리 잡게 된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백만장자들이 등장하고, 사회의 양극화와 기후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백만장자” (Millionaire)가 탄생하였다. 산업혁명에 뒤이어 국가간의 패러다임이 약탈에서 교역으로 전환하면서, 백만장자의 일천배의 재산을 가진 “억만장자” (Billionaire, 10억 달러이상 소유자)들이 늘고 있다. 이어 AI혁명으로 1000억 달러 이상을 가진 사람들은 “초억만장자” (Centibillionaire, 센티빌리어네어)들이 등장한다. 초억만장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2020년대 중반 기준으로 세계에 16명 안팎이 꼽히며 이들은 대부분 서양인들이다. 사익과 공익이 수렴한다는 정치경제체제에서 발생한다.
최근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Oxfam)과 세계불평등연구소(WIL)의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10명이 보유한 자산이 전 세계 인구 하위 40% (약 31억 명)의 재산을 능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옥스팜, 2022년). 이는 세계 불평등이 역사적 정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불평등 비율은 매년 가속화되고 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양극화가 더 이상 커질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고 있다. 인간본성에 내재하는 탐욕과 지배력이 계속 확대된다.
이들은 미래의 자본을 주무르는 “AI 자본가” (AI capitalist)가 된다. AI 혁명으로 가장 큰 수혜를 보는 산업은 반도체, 데이터센터 구축, 전력설비, 배터리 소재 등이 있다. 이들 AI 자본가들 앞에서 산업자본가들인 방직업자, 철강업자, 철도 사업가등은 힘을 잃게 된다. AI 자본가들은 데이터를 독점하게 된다. 산업혁명 때는 토지·기계가 자본의 핵심이었다면, 지금은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자본의 핵심이다. 이들은 플랫폼 지배력을 가지게 된다.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이 AI 기술을 통해 시장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부의 집중을 강화하게 된다. 소수 기업가·투자자가 천문학적 자산을 축적,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하게 된다. 이들이 가지는 재화의 힘이 천문학적이어서 이들은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차지하게 된다. AI 자본가들은 단순한 경제 권력자가 아니라, 정책·윤리·문화까지 좌우하는 새로운 권력층으로 부상한다.
억만장자들의 뒤안길에는 실업과 빈곤 심화가 도사리고 있다. 기술 자체보다 분배의 불공정과 사회적 안전망 부족에 대한 반발이 사회문제의 중심이 된다. AI를 활용하는 기업·정부·권력 집단이 사익을 위하여 AI를 사회를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문제가 된다. 초억만장자들이 가장 많은 미국에서 이 문제를 가장 큰 문제로 보고 이를 시정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회나 국가가 망하는 경우 결국 거대기업도 같이 망하게 된다. 이들은 이러한 “관계주의”의 실체를 보는 거시적인 혜안이 있는 사람들이다.
워런 버핏의 노력이 좋은 예다. 워런 버핏은 ‘부자 감세’에 반대하며 오히려 부자 증세를 강력히 주장해 온 인물이다. 그는 자신보다 직원들이 더 높은 세율을 내는 현실을 비판하며, 초고소득층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뉴욕타임스 기고(2011년)를 통하여 “수퍼부자 감싸주기를 중단하라”라는 글을 통해 미국의 재정적자 해결을 위해 부자 증세를 촉구했다. 그는 자신이 낸 소득세율(17.4%)이 사무실 직원들의 세율(33~41%)보다 낮다는 점을 지적했다. 상위 400명의 평균 세율이 1992년 29.2%에서 2008년 21.5%로 떨어진 사실을 비판했다. “높은 세율이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막지 않는다”는 생각도 자신의 글에 덧붙였다.
그의 주장은 오바마 행정부 시절 “버핏 룰” (Buffett Rule)이라는 정책 제안으로 이어졌다. 연소득 100만 달러 이상 초고소득층은 최소한 중산층과 동일한 세율을 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는 부자 감세를 줄이고 조세 형평성을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개인주의에 입각한 서양정치경제 체제 때문이다. 이들은 소위 낙수효과를 내세우며 개인주의에 의한 부의 창조를 계속 주장하였다. 결국 버핏 룰은 입법화에 실패하였다. 미국을 떠나 세계적으로도 “글로벌 부유세” 가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G20 합의(2024년)로 “초고액 자산가”에 대해 국제적으로 최소 세율을 적용하는 방안이 논의되며 조세 회피 방지, 불평등 완화, 기후·빈곤 대응 재원 마련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기업 대상 글로벌 최저한세(最低限稅, Global Minimum Tax)는 15%로 시행 단계에 들어갔다. 그러나 중요한 개인 자산에 대한 글로벌 공통 과세는 정치적 합의 실패로 무산되었다. 모두 서양 개인주의 체제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들의 생각은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부정책으로 이어지지 않아서 실패하였다. 개인주의와 사익과 공익이 수렴한다는 논리를 가진 서양의 철학체계내에서는 살아남기 힘든 노력이다.
AI 혁명과 관련하여 미국의 샌더스(Sanders) 상원의원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이슈는 바로 양극화의 확대다. AI 혁명으로 인간본성의 재구성이 가능하여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본성의 이기심의 발로인 지배력의 확대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 심화와 관련 그는 AI가 대규모 일자리 상실을 초래할 수 있으며, 그 혜택은 소수의 대기업과 “억만장자 계층”에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이는 기존의 경제적 양극화를 더욱 확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나타낸다. 그는 AI가 단순히 경제 문제를 넘어 정치, 교육, 환경, 심지어 전쟁 방식까지 바꿀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로봇 군인” 같은 군사적 활용은 사회적 불안과 권력 집중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샌더스는 AI가 “혁명적이고 변혁적인 기술”임을 인정하면서도, 현재 의회와 사회가 논의와 규제에서 너무 뒤처져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데이터센터 건설에 대한 일시적 중단(moratorium)까지 주장하며, AI 개발 속도를 사회적 합의와 규제 체계가 따라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샌더스의 관점은 AI 혁명이 단순히 기술 발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 구조와 불평등을 확대할 수 있는 위험한 촉매제라는 점에 있다. 산업혁명이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격차를 확대했던 것처럼, AI 혁명도 비슷한 양극화의 메커니즘을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양극화에 대처하는 방법은 부의 분배에 있다. 이윤추구와 탐욕을 구분하여야 한다는 명제로 우리를 이끌게 된다. 어떻게 이윤추구를 보장하고 탐욕은 관리하는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공익과 사익 문제로 다시 한번 우리를 이끌게 된다. 공익을 보장하면 양극화가 줄어들고, 즉, 중산층이 보호되지만, 사익 추구를 허용하면 양극화가 늘어나고 중산층은 줄어든다. 서양에서 중산층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양극화는 중산층의 임금 정체와 생활비 상승으로 나타난다. 생산성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임금은 그만큼 오르지 않았다. 주거비, 교육비, 의료비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중산층의 실질 구매력이 줄어든다. 서양에서 자동화·글로벌화로 인해 제조업과 전통 산업 일자리가 해외로 이전되거나 자동화로 대체된다. 중산층을 지탱하던 안정적 “중간 기술직”이 사라지면서 불안정한 서비스업·저임금 노동으로 대체되면서 자산 격차가 확대된다.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 가격 상승은 자산을 가진 상위층에만 이익을 주게 된다. 중산층은 자산 축적이 어려워지고, 부채(학자금·주택담보대출)에 더 의존하게 된다. 정책·세제 구조 면에서 세제와 복지 정책이 상위층에 유리하게 설계되거나, 중산층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하게 된다. 미국의 경우 특히 의료·교육 비용 부담이 커서 중산층이 쉽게 하층으로 밀려나는 현상이 생긴다. 1970년대 이후 미국 등 서구 국가에서 중산층 비율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양극화 심화로 나타나는데 상위층은 더 부유해지고, 하위층은 더 불안정해지며, 중산층은 점점 사라지는 구조가 나타난다. 사회적 영향으로 정치적 양극화, 사회적 불안, 민주주의 기반 약화로 이어진다. 서양에서 중산층은 경제 구조 변화(자동화·글로벌화) + 생활비 상승 + 자산 격차 + 정책 실패라는 네 가지 축이 동시에 작용하면서 붕괴되고 있다.
2) “서양문명은 어떻게 몰락하는가”: 중산층의 소멸
서양의 시장경제 체제가 국가주의(statism)라는 탐욕에 대처하는 데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집단주의(tribalism) 탐욕은 서양의 시장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서양의 집단주의는 서양의 개인주의(individualism) 철학의 연장이다. 서양의 자유방임주의는 개인의 자율을 방임하면서 자율이 자유로 변환하는 과정을 겪었다. 이는 곧 개인과 집단 차원에서 사익-공익 수렴론과 결합하면서 사익이 공익을 앞세우는 현상을 만들게 된다. 공익-사익 수렴론은 필연적으로 한 국가의 경제체제에서 결국 빈부격차를 심화하게 된다. 왕들이 자신의 사익을 위하여 나라의 경제를 운영하면서 민중과의 소득격차를 크게 하던 국가주의 현상은, 이제 집단주의 지도자들이 왕을 대신하여 사익을 추구하고 민중과의 소득격차를 크게 벌리는 현상으로 전환하고 있다.
“서양문명은 어떻게 몰락하는가” (How Western Civilization could collapse) 라는 기사는 미래를 내다보며 서양 정치경제에 닥친 문제를 소개했다.454 민주주의, 개인의 자유, 사회적 관용 같은 가치위에 세워진 서양문명이 30년, 한 세대 내에 위기에 봉착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지구온난화를 포함한 생태계의 파괴 또는 빈부격차가 커지는 것을 방기함으로써 서양문명은 몰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진국의 엘리트 그룹이 자신들의 부를 계속 추구하는데 만 목적을 두고 나머지 인간들의 생활에 무관심할 경우 그런 사회는 결국 퇴보한다. 이 문제는 한 국가의 내부상황으로 머물지 않는다. 국가내부의 빈부격차 증가는 필연적으로 국가 간의 빈부격차를 유발한다. 결국 지구전체의 문제가 된다.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 사이의 빈부 격차는 날로 커지고 있다.
선진국은 각자 자신 내부의 빈부 격차 증가에 집중하느라고 세계 문제에 몰두할 여유가 없다. 세계문제를 제외하고 국내문제로 인하여도 선진국은 결정적인 위기를 맞게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과 영국을 예로 들면, 현재의 빈부 격차 추세가 계속되면 2050년쯤에는 미국과 영국에 중산층은 없어지고, 부자와 극빈자의 두 부분으로 국민들이 갈라서게 된다는 것이다.
2050년쯤 되면 미국과 영국은 근본적으로 두개의 사회적 계층을 가진 나라로 변하게 된다. 작은 엘리트 그룹은 잘 살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생활 환경을 맞게 된다… 이들은 불만에 싸이고 두려움을 가지고 살면서 종교, 인종 또는 국가 라는 데 매달리게 된다. 부자들은 막대한 부와 자원을 움켜쥐고, 수는 훨씬 많지만 노동으로 그들을 떠받치는 평민들에게는 거의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 사회를 불안정과 붕괴로 몰아간다.455
그렇게 되면 그런 나라는 양 극단에 선 사람들이 서로 극심한 투쟁을 하게 되어 나라로서 구실을 할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민주주의, 개인의 자유, 관용 같은 가치들은 점점 소홀히 하게 된다. 서양이 빠진 “선진국 함정” 이다. 선진국 함정이 의미하는 바는 당시 룩셈부르크의 총리 융커(Jean-Claude Juncker, 1995-2013 간 19년 총리, EU 집행위원장 역임) 가 유로 위기가 터지기 전에 한 말에서 정확히 지적되고 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한 뒤에 어떻게 다시 당선될 수 있는지를 모를 뿐이다.” (“We all know what to do, we just don't know how to get re-elected after we've done it.”) 융커 위원장의 말은 무엇보다도 서양 선진국들이 안고 있는 막대한 부채, 그리고 이와 연계된 사회복지 비용, 이를 개선하지 못하는 정치체제에 대한 지적이다.
선진국이 이를 피하려면 “빈부의 격차의 증가와 빚을 내서 하는 복지의 답습”으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 선진국이 그렇게 한다면 서양문명의 몰락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은 무제한 인간의 행동을 기다리지 않는다. 현재 상황을 바꾸지 않으면 몰락으로 가게 될 것을 예견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들 중에는 서양문명이 몰락하면, 중국 같은 강한나라가 살아남게 될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456
왜 서양문명이 쇠락해도 동양문명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동양이 놀라운 경제성장을 하고 있고 지구상 드물게 중진국 함정을 벗어나고, 민주시장 경제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는지 원인을 살펴보아야 한다. “문화가 중요하다” (Culture Matters) 라는 논문에서 미국 학자 로렌스 해리슨(Lawrence E. Harrison) 은 동양 유교문화권을 예로 들면서 한 나라의 문화와 경제 발전 사이의 긴밀한 상관관계에 대하여 통찰력 있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싱가포르, 홍콩, 대만은 열대 지역에 있다… 그들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은 유교 문화권의 일본이나 한국이 경제 발전에서 성공하는 것을 되풀이하고 있다… 또한 열대에 있는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그리고 필리핀에 있는 소수 중국계가 경제적인 성공을 이룩하는 것도 유교 문화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페루나 브라질에 있는 소수의 일본인들도 마찬 가지이다.457
중남미 학자들은 과거 기후, 식민생활, 지배구조(dependence theory), 또는 인종차별 등 때문에 경제발전을 하기 어렵다는 «핑계»를 상정하였다. 해리슨 교수는 중남미에 있는 동아시아의 중국, 한국, 일본인의 경우를 보면 그러한 어떠한 것도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제도나 패턴을 가지고는 경제발전을 이룰 수가 없으며, 즉 문화가 바로 제도나 패턴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458
지구 전체를 보면, 서양을 따라잡은 나라는 동양 밖에 없고, 동서양을 제외하면, 아직 경제발전이나 민주주의 면에서, 선진국이 된 나라는 없다고 설명하면서, 결국 인류의 30% 정도만 선진 민주국이고 나머지 70%에 대한 노력은 지난 반세기 이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459
스페인, 포르투갈, 한국,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 홍콩 같은 몇몇 안 되는 나라들만이 로스토(Rostow)의 발전계획에 따라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였을 뿐이다. 2000년 무렵 대략 60억 명의 사람 중에는 10억 명 정도가 선진국 민주대열에 있을 뿐이다.460
사실 동아시아 국가들, 일본을 필두로,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를 지칭하는 4룡, 그리고 중국의 경제 발전은 그 속도나 폭에서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서양의 학자들은 “유교적 근로 윤리 Confucian Work Ethics”라고 통칭하면서 서양의 자본주의가 흥기할 때 서양이 가지고 있었던 소위 “신교도 근로 윤리(Protestant Work Ethics)”와 비교하기도 한다.
유교적 근로 윤리의 특성으로 근면성, 절약, 교육열, 작은 정부, “미래를 위하여 당장의 즐거움을 유보” (deferred gratification 또는 deferment of present pleasure for greater future gain) 하는 전통, 그리고 효율적인 법 제도와 사회복지 제도 등을 꼽고 있다. 결국 “유교” 국가들은 경제와 민주가 성공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부상은 동양이 결코 경제 발전을 이룩하여 서양을 따라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 막스 베버의 견해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461 이는 완전히 서양적인 편견이며, 정치경제사상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 발전, 근로윤리, 성과주의, 그리고 근면절약으로 표현되는 유교적 가치를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유하고 있다. 그들의 경제적 성장으로 막스 베버가 중국의 종교 라는 책에서 주장한 것이 억지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는 중국에서 자본주의적 성장이 불가능한 이유는 칼빈주의에서 볼 수 있는“자신들이 선택을 받았는지 불확실 하다는 데서 오는 긴장감”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462
동양의 유교 근로윤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종교적인 이론의 변화나 지구종말론의 운명과는 무관하게 내부의 필요에 의하여 실행되는 것이므로 굳건한 문명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양 언론들은 동 아시아의 가치로서 “교육, 근면, 절약, 그리고 미래의 더 큰 성취를 위한 현재의 즐거움을 유보하는 자세”를 들고 있다.463 서양의 통계도 유럽, 미국, 동양인 중에서 미국을 기준으로 할 때 유럽인은 미국인 보다 20% 정도 적게, 동양인은 30% 정도 많게 일하고 있다고 하면서 동양의 근로의식이 가장 강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동아시아에서 경제발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바로 유교 사상에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20세기중반 까지도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강력한 교육/성취감/성과주의/근검절약 같은 경제적 비약에 필요한 요소들을 끌어내는 데는 바로 같은 문화적 정치적인 리더십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464
전반적으로 보면, 종교에 관한 연구를 볼 때, 개신교, 유대교, 그리고 유교 사회들이 구교, 이슬람, 그리고 그리스 정교 사회들 보다 경제적 발전을 위한 진흥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고 보고 있다. 반면 후자들은 경제적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465
결국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후반기까지 서양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저 동양의 문명에서 왜 동양이 서양에 압도되었는지 문제점만 찾으려고 노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20세기 중반까지 동양이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에서 뒤지고 있는 이유를 유교와 도교의 전근대성, 비합리성, 비과학성, 비민주성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강했다.466 그러나 동양의 계속되는 획기적인 경제발전, 민주, 사회 발전에 주목하여 동양의 정신 문화 즉, 유교(교육중시와 성과주의 전통, 보편적 윤리와 근검절약의 문화), 도교(적은 세금과 작은 정부, 개인의 경제주도권을 보장, 자연과 인간 간의 조화), 불교(자비사상, 무소유 중시)등에 내재해 있는 정치경제사상의 가치에 대하여 21세기 초 에야 비로소 서양도 서서히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양의 이러한 장점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정책적 결정이나 결단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와 전통 속에 배어 있는 것이다. 서양과는 다른 깊고 넓은 동양 특유의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고, 철학적 바탕을 가지고 있다. 즉 정치경제사상에서 동양이 서양보다 집단주의에 대한 경계를 확실히 하고 있다. 동양 근로윤리의 특성은 동서양의 경제발전 패턴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본성의 이기심을 동양에서는 관리를 통하여 경제발전을 추구하자는 패턴을 보이고 있고 서양에서는 방임을 추구하자는 패턴을 추구하자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서양보다 민족국가의 건설에서 2천 년 앞선 동양에는 민족국가 건설과 함께 등장하는 정치경제사상면에서 찾아낼 지혜와 정책이 있다. 동양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서양과 다른 정치경제학적 사상은 싱가포르의 고 리콴유 총리가 잘 설명하고 있다. 그는 공산주의의 소멸과 함께 미국에 닥치고 있는 서양이 겪고 있는 정치경제적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사회가 성공하려면 경쟁을 통하여 능력 있는 사람을 키우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도 기회를 부여하여야 한다. 즉 경쟁과 협력이 공존해야 한다. 공산주의처럼 모든 사람이 비슷한 결과를 공유하면 발전이 없게 된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소멸했다. 반면 능력만 키우는데 집중하여 성공한 사람이 모든 것을 취하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가질 것이 없게 되면 빈부차가 점점 심해지게 된다. 미국이 그런 것처럼 결국은 사회의 균형과 공평성이 깨진다.467
그는 이런 상황에서 빈부격차 문제의 해소와 함께 경제발전을 이루는 방안은 동양의 정치경제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음양론을 소개한다. 한 나라에서 경제약자에 대한 지원과 함께 경제발전을 이룬 자들에게 대한 정당한 보상을 음양론의 철학에 따라 조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경쟁과 협력을 공존시키자는 것이다:
최선의 방법은 동양의 음양론에서 찾을 수 있다. 경쟁과 협력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이것은 서양의 자유주의자들이 하는 것과 다르다. 그들은 국민들을 선동하여 수치심도 내던지고 복지를 하나의 권리처럼 계속 주장하게 한다. 결국은 그 나라에서 복지비용이 폭발적으로 팽창하고 만다.468
이런 상황 속에서 동양문화 기본 장점인 교육중시, 성과주의, 근검 절약, 자기수양의 전통은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하는가 라는 문화의 원초적인 과제와 우리는 맞닥뜨리고 있다. “서양의 패턴에서 윤리의 배제 vs 동양의 패턴에서 윤리의 핵심적인 역할”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21세기 동서양의 정치경제의 현실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윤리를 배제하고 법률에 주로 의존하는 서양 정치경제체제는 군산정 복합체가 사익을 추구하는 길을 터주게 된다.
이익집단의 사익추구, 민본주의 위협
법을 정하는 의회는 국민을 위하는 공익을 추구해야 한다. 그 이전에 중요한 한 단계가 더 있다. 국민은 공익을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사람을 대표로 선출하여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와 민본주의의 근간이다. 그러나 의회가 공익이 아니라 자신들의 재선을 우선시하는 대표자로 채워지면 민주주의와 민본주의는 의미가 없다. 결국 국민의 선택이 좌우한다. 국민은 근검절약을 주장하는 사람과 자신들의 정치력에 의하여 성과를 우선 보장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중에서 후자를 선택하는 본성을 보인다. 전쟁이나 외계민의 침입, 혹성의 충돌 같은 위급상황이 없으면, 국민은 당장 성과를 보장하겠다는 사람을 뽑게 된다.
국회의원이 공익보다 사익을 우선시하는 성향, 그리고 국민이 공익을 우선시하는 대표자보다 당장의 사익을 보장하겠다는 대표자를 우선시하는 성향, 이 두 가지 성향은 같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그 동전은 인간본성에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인 이기심이다. 국민과 국회의원이 모두 이타심인 공익보다 자기보존을 위한 이기심을 앞세우는 것이 인간본성이다. 평화가 계속되면 공익보다 사익을 추구하는 상황이 전개되기 때문에 법치주의나 자유민주주의는 위협을 받게 된다. 삼권분립 체제에서 한 축이 무너지면 그 체제는 두 다리로 서있을 수 없어서 민주주의는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국민들이 의회에 대하여 보여주는 지지율은 아주 낮다.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지지율이 모두 20% 안팎이다. 국민은 국회의원들이 공익 보다 재선을 위한 사익에 우선 집중한다는 상황을 계속 목격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기업이나 단체의 후원금이 불법이다. 그러나 미국 등 서양 선진국에서는 후원금이 활발히 허용된다. 특히 미국의 경우 기업의 정치활동위원회(PAC, political action committee)를 통한 간접 지원이 제도적으로 허용되어 있다. 미국 의원의 재선을 위한 최대 요소는 선거에 필요한 지원금이다. 개인이나 기업가에서 지원하는 후원금이다. 의원들은 법을 이용하여 후원자들에게 필요한 이익을 키워주고, 후원자들은 국회의원들의 재선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한다. 국회의원들은 군자의 품격을 갖춘 지도자 이기 이전에 자기보호 본능에 충실한 사람들 즉 소인들이 많다. 이들은 후원회나 비즈니스의 지원이 직접적이다. 비즈니스와 의회가 단합하면 행정부는 많은 경우 이를 따라할 수밖에 없다. 결국 비즈니스-의회-행정부가 집단주의에 의거하여 공익을 외면하고 우선 자신이 살아남는 사익을 추구하는 현상이 커져가고 있다.
집단주의가 공익을 해치는 현상은 중상주의 체제에서도 성행하였다. 아담 스미스는 중상주의 정책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1619-1683)의 정책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콜베르는 프랑스 루이 14세 밑에서 1665-1683, 18년간 재무상으로 지냈다. 그는 보호무역주의를 추구하면서 이를 왕과 기업가 간에 이익을 나누는 방안으로 활용하였다. 실제로 콜베르가 재무상으로 취한 최초의 정책중의 하나는 베니스로부터 유리제품의 수입을 대체할 수 있도록 프랑스 왕립 유리제품 조합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그는 7년후 이 조합이 그럴듯한 유리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하자 베니스로부터 일체의 유리제품의 수입을 금지하였다. 중상주의 정책아래 모든 국가가 앞다투어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늘리는 것에 국가의 미래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극도의 보호무역주의, 수입대체 산업의 신장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경제 제도 아래서 당연히 집단주의 탐욕은 자유롭게 성장하게 되었다. 즉 상기 왕립 유리제품 조합 같은 것은 국가로부터 독점적 보호와 편의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국가, 즉 왕실은 이러한 기업으로부터 세금이나 기타 적절한 형식으로 소득을 거두는 관계를 형성하는 가운데 결국 일반 국민만 희생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교역을 제한하고, 규제하고, 지시하는데 관한 대부분의 규정, 법, 칙령, 조칙, 그리고 정부, 왕, 의회의 공공조례 등이 모두 결국은 정치적인 오류 거나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교활한 사람들이 개인의 이득을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469
집단주의가 공익을 해치는 성향은 중상주의, 그리고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아담 스미스, 맨서 올슨, 아이젠하워 대통령, 그리고 최근 금융경제학자 들이 바로 이러한 집단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표현하고 있다. 아담 스미스는 한 국가내의 상인과 제조업자는 모두 독점에 의하여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할 수 있으므로 국외의 경쟁자들을 배제하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에 희생되는 사람은 결국 일반국민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국가의 간섭을 배제한 국민의 경제활동에 대한 자유방임과 국가의 무역에 있어서 중상주의적 보호무역대신 자유무역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470 아담 스미스는 국가주의로부터 개개인의 이기심을 해방시키면서, 동시에 집단주의 탐욕에 대하여 우려하기 시작한다:
같은 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주 만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모일 때 대화의 핵심은 항상 공공이익에 대한 음모로 끝나거나 때로는 물가를 올리기로 하는 담합으로 끝나기 마련이다.471
한걸음 더 나아가 아담 스미스는 이러한 집단주의 탐욕을 법으로 다스리기는 아주 어렵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같은 기업에 종사하는 사업가들이 종종 회합을 가지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법은 자유와 공평성에 어긋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법으로 같은 기업에 종사하는 사업가들이 가끔 만나게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지라도 법은 그러한 회합을 필요하게 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손쉽게 하는 일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472
올슨도 그가 “이익집단(special interest group)” 이라고 부른 집단주의 탐욕이 민주주의를 위협할 가능성에 대하여 경고를 하고 있다. 민주주의 체제는 국가주의에 대하여는 사익을 추구하는데 대하여 잘 방지하는 장치를 가지고 있지만, 집단주의에 대하여는 사익 추구를 방지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다. 즉 삼권분립제도에 의하여 지도자가 사익을 추구하는 것은 잘 방지하지만, 비즈니스와 의회가 단합하여 사익을 추구하는데 방법에 대하여 삼권분립제도는 별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또 올슨은 개인들이 모인 집단은 사익을 위하여 일하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특수이익집단이 만드는 정치경제 정책은 공공의 이익을 해치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특수 이익집단이 만드는 정치경제 정책은 보호무역적이고 과학기술의 발전에 반하는 성격을 띠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성격상 이익은 이익집단에게 집중시키면서 그 비용은 모든 국민이 균등하게 지불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논리에 따라 이익집단의 정책에 대하여는 국민적 저항이 크지 않게 된다. 그래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특수이익집단은 점점 커지게 되고 결국 그 나라의 경제가 낙후되게 된다.473
이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재직시 군과 기업간에 이들 이익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긴밀한 연계로 인하여 공익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자신의 국정운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8년간 대통령직을 떠나면서 1961년에 행한 유명한 연설에서 바로 “군산복합체(military industrial complex)”에 대한 경고를 남기고 떠난 것이다:
정부를 운영함에 있어서 우리는 군산복합체에 의한, 자연발생적이거나 고의적이거나 간에, 정당하지 않은 영향력을 쌓으려는 기도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부적절한 힘이 커져서 우리에게 커다란 재난을 가져올 수 있는 개연성은 상존합니다. 우리는 이 군산복합체의 힘이 우리의 자유나 민주주의 절차를 훼손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474
이러한 군산복합체는 결국 의회를 통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고 따라서 행정부의 힘도 작용하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군산정 복합체(military-industrial-congressional complex)” 로도 불리게 되었다. 민주주의 국가 내에서 생겨나는 이러한 우려는 국가주의 탐욕이 제도적으로 견제되었다고 하여 공익이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주의 아닌 집단주의의 탐욕에 의하여 공익이 훼손되는 상황에 우리가 이르렀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활동하던 시기는 1950년대이다. 그때는 아직 금융시장이 오늘날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기 전이다. 세계 제2차 대전 동안 크게 성장한 군산 복합체가 이제는 집단주의 탐욕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주체의 자리를 “금융-정부 복합체(finance-governmental complex)” 에게 내어주게 된 것이다. 이는 산업혁명에 이어 금융혁명으로 부를 수 있을 만큼 경제체제의 중심을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옮겨 놓을 만큼 강력한 변화다:
지난 30년 동안 대부분의 선진국 금융차원에서 진정한 혁명이 일어났다. 1970년에 미국에서 전체 상장주식과 미국 경제 총생산 과의 비율은 0.66 이었다. 그것이 2000년에는 급속도로 신장하여 미국 내 상장주식 총액이 국내총생산(GDP)의 1.5 배에 이르게 되었다.475
(미국의 이 비율은 2025년에 2배를 넘었다.)
시장경제에서 다국적기업, 국제금융기업 등 그 무엇으로 부르든지 이들이 추구하는 집단주의 탐욕은 이제 시장경제 자체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금융기업들은 세계적인 규모의 시장을 상대로 교묘한 운영체계에 의하여 생산성은 하나도 없는 이윤과 탐욕추구에 몰두하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들이 세계 시장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서, 21세기 정치경제 체제를 “카지노 자본주의(Casino Capitalism)”로 부르기에 이르렀다. 라잔(Rajan)등 경제학자들은 바로 기업가들이 모이게 되면 공익을 해치는 모의를 하는 방향으로 힘을 모아 사익을 추구하게 된다고 규정하였다. 이들 경제학자들은 아주 자주 그리고 너무나 많은 국가에서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고자 하는 이러한 기업가들의 모의가 결국 국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국가의 무책임성을 진단하고 있다.476
군산정 복합체, 즉 특수 이익집단은 이제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힘과 영향력이 커졌다. 금융계가 정부와 힘을 합쳐 “공정경쟁”이라는 공익을 해치는 “금융-의회 또는 금융-정부 복합체”로 발전되어 나오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 즉 시장경제체제는 지금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 중에서 생산과 분배를 가장 효율적으로 하는 방안이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경쟁이 있다. 그런데 경쟁은 기업가들의 끊임없는 탐욕을 관리하고 견제하기 때문에 모든 기존 기업가들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477 그래서 이익집단, 즉 집단주의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경쟁을 제어하고 각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 집단주의의 최대 문제점은 사회의 양극화로 나타난다. 국민은 빈부격차의 증가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된다. 중산층은 줄어들고, 국민은 극도의 부를 누리는 부자와 빈자로 나뉜다. 국가가 공익을 보호하지 않으면 공익은 누구의 책임이 되나?
자유방임의 덫: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나?”
자유방임주의는 개인의 경제적 자율을 국가주의(statism)에서 해방시켰다. 자본주의는 이에 의지하여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통제경제체제를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자유방임주의는 비즈니스와 의회의 단합으로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주의(tribalism)에 무력함을 드러내고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서 의회를 구성하는 정당들은 국민의 이익 즉 공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세계의 수많은 정당들은 공익 추구 보다는 정권의 재창출, 즉 정당의 이익을 앞세우는 것이 많이 목격되고 있다. 이들이 대표하고 있는 것은 국민의 이익이 아니고 소속 집단 즉 정당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주의 탐욕인 것이다. 이들은 서양의 자유방임주의를 내세우고 자신들의 성공이 공익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을 대표하는 정당들이 이기심 내지 탐욕을 자유방임하게 되면 공익을 아무도 지키지 않게 된다. 감시인이 없는 상태가 된다. 자유방임주의는 서양 정치경제체제의 덫이 된다.
이렇게 서양 정치경제 제도가 당면한 문제점은 서양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근본을 위협하고 있다. 이 위기는 궁극적으로 한 가지 질문으로 귀결된다.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가 제시한 “감시인은 누가 감시하나?” 라는 질문이다.478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가 집권자나 정당이 하는 일을 궁극적으로 유권자인 국민이 감시하고 평가하고 판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 제정시대에 황제의 호위대가 월급을 많이 주는 지휘관이나 장군을 황제로 옹립하듯이, 빚을 내서라도 사회복지를 증가시키는 정치인을 선거에서 당선시키고, 따라서 정당 간에는 재집권을 위하여 사회복지를 증가시키는 경쟁이 일어나고, 국민이 그 위험을 간파하지 못하고 눈앞의 복지를 선호한다면 민주주의의 기본전제는 무너진다. 실제로 유로위기 당시 서양 각국의 지도자와 국민들이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문제의 본질을 알리고, 국민에게 기본적인 근로윤리로 되돌아 가도록 호소하고, 그런 정치가를 국민이 지도자로 뽑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경우 서양의 민주정치제도의 출발점인 정당정치제도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된다.
동양에서 정당정치에 대한 시도와 집단주의 탐욕에 대한 논쟁이 11-12세기에 전개된 바 있다. 송나라 진보주의 정치가 구양수(歐陽修, 1007-1072)는 일련의 개혁조치를 시도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관리에 대한 보수를 올려서 공무에 충실하게 할 것, 법의 시행을 실효성 있게 할 것, 정실정치를 타파할 것, 그리고 과거시험에서 실질적인 정부 운영에 필요한 과목을 추가할 것 등이 포함된다.479 1044년에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린다. 그의 주장은 그의 붕당론 (朋黨論)에 근거한다: “군자는 원칙에 의하여 파벌을 형성하고, 소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파벌을 형성한다” 고 주장하면서 파벌의 형성을 허용할 것을 주장한다.480 즉 현대식 정당 정치를 건의한 것이다.
실제로 11세기에는 송나라에서 현대식 사회주의로 간주될 수 있는 정책이 재상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반면 보수주의라고 간주될 수 있는 정책이 사마광(司馬光, 1019-1086)에 의하여 시행되었다. 두 세력 간에 경쟁과 견제가 있었다. 결국 구양수의 파벌 형성 즉 정당정치에 대한 생각은 채택되지 않았다. 이유는 군자의 수준에 이를 수 있는 자는 극소수이고, 결국 대부분의 사람은 소인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정당인도 결국 사익에 빠지게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정당정치의 주장은 결국 주자학의 태두, 주희(朱熹, 1130-1200)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사장되기에 이르렀다. 주희는 파벌의 구성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파벌은 결국 공공의 이익 보다는 집단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는 주장을 폈다. (천 년이 지나서 현대 국가에서 이러한 논거가 새롭게 검증되는 사례가 도출된다. 앞서 본 의회 지지율 20% 안팎이 그 예다.)
집단주의자들이 사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제어해야 하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결국 정부에 있게 된다. 정부의 통치술 가운데 술치(術治)의 개념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왜냐 하면 시장이 공정경쟁이라는 공익을 추구하기가 어렵고 정부의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금융혁명으로 특징지어지는 21세기 세계경제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정경쟁으로부터 이득을 보아야 하는데 이것이 지켜지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 “공정경쟁이라는 공익을 지키고자 하는 중요한 일에는 별 인센티브가 없다”는 것이 문제라는 패러독스를 지적하고 있다:
시장은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아주 자유로울 수도 없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시장은 아주 깨지기 쉬운 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경쟁시장에서 이득을 보지만, 실제로 경제체제를 경쟁적이게 하고 공정한 경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에는 아무도 커다란 이득을 취할 수 없다는데 문제의 관건이 있다. 심지어 자본가들조차도 공정경쟁을 진작하는 데서는 이득을 취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자본가들은 경쟁으로부터의 보호를 정부에 계속 요청하게 되는데,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본주의의 최대의 적이 되는 것이다.481
대기업의 사익추구는 21세기 초반 시장경제에서 최대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특히 금융자본과 금융기업의 공공이익을 외면하고 자체의 이익만을 끝없이 추구하는 탐욕에 대하여는 연일 보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서양 시장경제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대비가 없는 상태이다. 서양에서는 집단주의 탐욕을 원천적인 문제로 보기 보다는 아담 스미스이래 시장경제 사상에 의거하여 “부족의 탐욕은 의도하지 않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공공의 이익 창출로 인도된다”는 원칙을 기본철학으로 아직도 믿고 있는 듯하다. 지금 노출되고 있는 원천적인 문제점은 이러한 기본원칙에 대한 일부 예외 또는 주변적 문제로만 인식되고 있는 양상이다.
법적으로 일부 견제 장치를 제외하고는 초 국가적 대기업, 특히 금융기업들은 윤리적으로 볼 때 용납되지 않는 기업운영을 하고 있는데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또 그 이후, 정부의 보조 즉 국민의 세금으로 생존하는 거대 금융기업에서 막대한 급료와 보너스를 나누어 갖는 상황을 일반 국민들이 목격하게 된 것이다. 정부가 별다른 조치를 취하고 있지 못한 가운데 최근 불과 수년 전부터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이 주로 유엔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기는 하다. 즉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의 사회공유 가치창달”(CSV, Creating Shared Value), 또는 “환경-사회-기업운영”(ESG, Environment, Social and Corporate Governance) 이라는 운동이 일부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법적으로는 비록 아무런 의무가 없지만 스스로 윤리적 책임의식을 가지고 기업들이 집단주의적 탐욕을 스스로 자제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기업의 기본 설립 목적, 즉 이윤추구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하게 된다. 부차적인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러한 최근의 운동은 아직 “가급적 남도 돕자는 자선의 차원”에 머물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결국 금융혁명과 함께 막강한 금융자본가, 그리고 이와 연계를 맺는 정치권의 관계의 시스템이 민주시장경제의 최대의 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를 규율하는 룰을 만들어 내는 것은 중용을 찾아 유지하는 것처럼 어렵다:
경쟁적인 시장은 룰이 없는 경우와 숨막힐 정도로 많은 룰 사이의 정교한 중용으로 이루어진다. 자본주의가 최대로 잘 작용하는 상태가 아주 불안정 한 것은 바로 이 중용의 입지가 아주 좁기 때문이다. 이 상태는 손쉽게 기득권에 의한, 기득권을 위한, 기득권의 시스템으로 전락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우리가 경험한 자본주의는 바로 이러한 형태의 자본주의였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아직도 지구상 많은 곳에서 이러한 자본주의가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482
집단주의에 대한 서양의 철학적인 대비의 부족은 자유방임 주의의 시작에 문제가 있었다. 정부의 철저한 간섭이 담겨 있는 중상주의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자는 데 자유방임주의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방임은 “개인의 경제 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국가의 간섭을 가능한 배제하는 경제 사상”으로 정의된다. 인간본성에 의하여 사익을 공익을 창출하게 된다는 철학체계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국 서양의 자유방임은 무위사상과 달리 개인의 자율에게 “자유”를 주는 패턴을 강조하게 된다. 결국 아담 스미스가 주장한 자유방임에 대한 원천적인 의심을 가져야 한다.
3) 술치(術治), 공익을 사익으로부터 보호하자는 철학
사익-공익 충돌론과 사익-공익 수렴론은 동서양간의 “인간본성”에 대한 철학의 차이에게 발생한다. 동양은 인성론에서 인간본성이 강력한 이기심과 미약한 이타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관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서양의 아담 스미스 등의 인성론은 인간본성이 선하다는 철학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에 맡기자는 자유방임론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양 인성론에서는 인성의 관리라는 차원에서 서양 정치철학과 상반되는 정치철학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철학은 지도자의 통치력에 필요한 요소가 된다. 이것이 바로 동양에서 중요시하는 통치술의 개념이다. 인간본성에 비추어 볼 때 정치경제체계에서 반드시 술치(術治)의 철학을 사용하여야 공익을 수호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전국시대 법가는 한비자라는 사상가를 배출하여 법가 사상을 통합하는 저술을 남겼다. 전국시대 수백 년 동안 7개의 나라가 생존을 위하여 국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을 시험하였다. 세(勢), 법(法), 술(術)을 활용한 세치, 법치, 술치가 두각을 나타냈다. 한비자는 군주가 자신의 권력(勢)를 바탕으로 법률과 제도(法)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방법(術)을 그의 책에서 종합적으로 설명하였다. 한비자는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와 관료들을 대할 때 공익과 사익이 충돌한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전국시대에 널리 퍼진 술치의 개념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의 술치 철학은 신불해(申不害)의 정치학에서 따온 것이다. 왕이 법을 정할 때 관료들의 마음속에서 공익을 수행하며 사익을 취하는 생각을 버리도록 하는 방향으로 국법을 정해야 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보았다. 동시에 지도자의 솔선수범을 강조하고 있다.
신불해는 전국시대 한(韓)나라의 재상이며, 형명(刑名)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4세기 사람이다. 그는 술(術)을 중시한 법가 사상가로, 군주가 신하를 다스릴 때 형명을 통해 권력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군주의 명령이나 관직을 지칭하는 명(名)과 이를 신하들이 잘 시행하는지 여부를 살펴보는 형(刑)이 국가운영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실제 행한 바(刑, 곧 形)와 직명·말(名)을 일치시키는 정치적 원리에 집중하고 있다. 신하들은 자신의 직책에 맞는 일을 해야 하며, 말과 행동이 어긋나면 처벌을 받는다는 원칙이다. 이를 통해 군주가 신하를 평가하는 객관적 기준을 마련하고, 권력의 주도권을 군주가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술치의 핵심은 결국 관료나 신하들이 공익을 해치고 사익을 추구하는지를 살펴서 바로잡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데 있다. 그는 지도자가 신하를 다루는 형명의 술(術)이 부국강병을 이루는 첩경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술치사상은 전국시대를 거쳐 중국과 동양에서 인사행정과 관료제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신불해 철학의 핵심은 신하들이 끊임없는 사익 추구의 유혹을 버리고 공익을 추구하도록 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철학이다. 신불해는 신하들의 말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며, 제도적·행정적 관리로 이를 달성하고자 했으며, 신하의 행동을 법과 제도에 따라 평가하고 공적에는 상을 과실에는 벌을 주어 예측 가능한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다. 신불해의 형명지학(刑名之學)은 사마천의 사기에서 황로사상(黃老思想)에 근거를 둔다고 평가하고 있다.483 법가와 도가 사상을 통합하여 나라를 통치하고자 한 것이다.
민족국가의 설립과 그에 따른 관료제도나 행정제도가 갖춰졌다고 해서 술치의 역할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술치의 핵심 요소는 인성론에 기인하는 것이므로 인간 사회에서 제도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작용하게 된다. 술치는 사익-공익 충돌론에 입각하는 정치경제 철학을 동양 문명에 깊이 심어 놓았다. 사회제도의 발전 과정에서 오히려 중요성이 더해지는 것은 사익과 공익을 구분하는 것이 더욱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가 중요해지면서 관료뿐만 아니라 비즈니스의 탐욕을 관리하는 책임이 정부와 국민에게 주어지게 된다. 의회와 비즈니스의 연계로 사익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동양국가들에서는 술치 문화가 강하게 유지되고 있다. 술치를 국가경영에서 특히 중요시한 예로 싱가포르를 들 수 있다. 리콴유 총리는 집권 초기인 1960년에 무엇보다 먼저 국가공무원이 사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금지시키는 술치의 조치를 취하였다. 그는 “부패방지법”을 공포하였다. 1952년 영국 식민 정부가 세운, 탐관오리를 조사하는 “탐오조사국”에 강력한 수사권과 사법권을 부여했다. 탐오조사국(貪汚調査局, Corrupt Practices Investigation Bureau)은 싱가포르의 부패방지 전문 수사기관이다. 싱가포르 총리 직속 기관으로, 경찰이나 검찰보다 독립적으로 활동한다. 공무원·기업·개인 등 사회 전반의 부패 행위를 조사하고, 청렴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 기관이다.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청렴한 국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공무원에게 사익 추구를 금지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연봉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국가를 성공적으로 운영하였다. 동양의 개념인 술치에 역점을 두어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면서 성공한 케이스다.
술치의 개념은 동양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서양에서 공익과 사익의 수렴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 문제가 국가행정에 미치는 거대한 부정적인 영향력을 지적한 지도자가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61.1.17 대통령직을 떠나며 고별연설을 하였다. 여기서 그는 군산복합체의 집단주의 행위가 사익을 추구하면서 공익을 추구하는 국가 운영에 커다란 문제를 일으킨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하였다. 군산복합체의 행위는 집단주의가 공익을 외면하고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에 대하여 정부가 무력감을 가지게 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었다.484 국방과 비즈니스의 결합이 민주주의 제도와 국민의 자유를 잠식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이는 바로 동양문명에서 “공익과 사익은 충돌한다”는 철학에 따라 술치로 대처하고자 하여야 한다는 현상이 서양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아담 스미스 등이 제공한 “공익과 사익은 수렴한다”는 철학적 이론을 신봉하는 서양 정치경제 체계는 술치 문제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무방비 한 상태에 있게 된다. 따라서 집단주의 행위는 서양에서 계속 확산되고 있다. 2007-2008의 글로벌 금융위기나 2009-2011의 유로위기는 단순한 금융이나 경제 문제가 아니다. 그 저변에는 시장경제 사상과 시장경제를 관리하는 체제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경제차원의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문제가 개재되고 있다. 서양은 큰 정부, 많은 세금, 많은 법규, 빈부격차의 증가, 그리고 빚을 내어 확대하는 복지를 계속 답습하고 있다. 2007-2008 금융위기는 금융가, 의회, 그리고 행정부가 합쳐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 집단주의가 그 원인이다. 미국은 결국 이런 금융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미봉책으로 지나쳐 버렸다. 이것은 금융위기 5년 전인 2003년에 나온 베스트셀러 “자본주의자 들로부터 자본주의를 구하자” (Saving Capitalism from the Capitalists)가 내린 결론이다. 곧 시장경제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사회주의로의 복귀가 아니라, 시장경제 체제내에서 사익을 추구하자는 집단주의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술치의 철학은 동서양이 거대기업과 언론 사이의 유착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에서도 나타난다. 미국을 비롯하여 서양에서는 거대기업이 언론사를 구입하고 활용하는 것을 자유롭게 허용하고 있다. 이 문제를 서양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언론통제 또는 자유주의 훼손”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집단주의의 사익추구를 관리”하는 것으로 볼 것인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술치의 눈으로 보면 이는 관리해야 할 집단주의의 사익추구다.
군산복합체는 군과 산업체 간의 집단주의 이익추구를 위하여 언론과 여론의 중요성을 알고 이를 활용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가 더욱 커진다. 미국의 강력한 거대 기업은 앞다투어 언론사를 사들인다. 서양에서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바이든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고별연설과 아주 유사한 고별연설을 2025년 1월에 시행했다. 여기서 그는 거대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언론사를 소유하는 상황이 최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이들 거대기업과 언론사의 결착이 놀라운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민주주의를 위협할 정도라고 지적하였다.
정치경제 문제에 있어서 “워싱턴 컨센서스”와 “베이징 컨센서스”를 비교하는 분석도 이러한 동서양 문명의 다른 면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자유민주주의-경제발전 모델을 내세우고, 후자는 권위주의-경제발전 모델을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모델의 비교는 지금의 추세가 서양의 자유주의 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서양중심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동서양의 정치경제 발전 모델은 자유에 집중하여 분석하는 것 보다 자기보전 원칙에 집중하자는 문명적 측면을 간직하고 있다. 사익-공익 충돌론과 사익-공익 수렴론이 그 중요한 관점이 된다. 후자를 따르는 서양 정치경제 사상에서 술치의 관점은 중요시하지 않는 개념이 된다. 그러나 관료나 행정가들이 공익을 해치고 사익을 추구하는 것을 경계하는 술치는 사회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 더욱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집단주의 행위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정당에도 그대로 해당되어 문제가 된다. 민주주의에서는 국민이 능력 있는 사람들을 지도자로 선출하고, 이러한 지도자가 공익 즉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전제가 지켜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서양의 정치제도에서는 점차 공익 우선이라는 전제가 흐려져가고 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서양은 투명성 증대 등의 정치 제도 개선과 시민들이 정치에 더 많이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방안 등을 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민주주의가 계속 발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문제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군산복합체, 금융위기, 의회가 공익보다 사익을 추구하는 경향 등을 고려하면, 문제는 단순히 체제의 개선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체제 이전에 피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문제에 기인한다고 봐야 한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지 결국 인간 본성을 따르기 때문에 정치인도 역시 결국 공익보다는 자기 보존(의회주의에서 재선)에 이끌리게 된다. 술치 개념의 부재로 서양은 정치경제와 민주주의는 자신도 모르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치고 있다. 결국 빈부격차가 계속 증가하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서양에서 집단주의, 즉 금융가와 의회, 나아가 행정부까지 가세하여 각 집단그룹이 자신들의 이익을 확대하는 경향을 추구하고 있는데 대하여 커다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서양 대부분의 국가들이 GDP대비 국가채무가 너무 커서 국가의 경제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대로 가면 낙후와 쇠락이 불 보듯 뻔한데 서양은 정치가나 유권자나 이를 바로잡을 결의나 활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서양국가들이 정치경제 차원에서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지적한 것이다. 바로 서양이 보이고 있는 선진국 함정이다.485 이는 바로 동양의 인성론이 개발한 술치의 개념의 “부재”와 직접 연계되어 있다.
술치와 무위사상 vs 자유방임
동양은 서양의 법규위주의 정치체제를 따르면서 “술치”라는 개념은 잊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술치라는 단어에 대하여 직접적인 관심이나 인용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중요성은 그대로 동양문화속에 살아있다. 사익에 대하여 공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술치의 철학은 이야기나 시 구절을 통하여 동양 문화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앞서 든 배사향공(背私向公), 선공후사(先公後私) 등의 경구나 일화가 계속 존경을 받으면서 사용되고 있다.486
술치의 개념은 공익 보호로 나타난다. 서양의 사익-공익 수렴론을 주장하는 체제에 대하여 동양은 사익-공익 충돌론이라는 철학을 정치경제 체제의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술치의 개념은 인간은 개인, 집단, 국가지도자 모두에서 공동으로 발견되는 인간본성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철학에 근거한다. 즉 모든 인간은 공익보다 사익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본성은 방임이 아니라 관리가 필요하다. 무위사상이 술치가 추구하는 공익의 관리 철학을 대표한다.
무위사상에 의하면 현세의 모든 정치정당 그리고 특수이익집단은 결국 집단주의적인 이기심을 추구할 경향을 보일 것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결국 법이 제한하는 것을 피해가면서 자체의 탐욕을 최대한 신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결국 올슨 교수가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지적한 대로, 모든 인간은 가능한한 최대한의 착취 즉 높은 세금을 거두고자 하는 “정착강도”의 성질을 본능으로 가지고 있다. 이는 국가주의 군주뿐 아니라 집단주의로 표현되는 정당이나 거대기업의 탐욕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본능을 제어하는 장치가 있어야 개인의 경제적 자율을 지키면서 공익을 유지하게 된다.
동서양 정치경제 체제에서 왜 이런 다른 현상이 생기게 되었을까? 비록 아담 스미스가 집단주의 탐욕에 대하여 일찌감치 경각심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서양의 시장경제 사상은 아담 스미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국가의 탐욕으로부터 개인에 대한 자유방임을 주장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집단주의 탐욕에 대하여 충분히 경계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개인들이 모인 집단, 즉 특수 이익집단 등 집단주의의 탐욕에 대해서는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만 지적하였지 아무런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 국가주의 탐욕은 나쁘고, 개인주의 이기심은 좋다는 자가당착의 이분법에 머무르면서, 집단주의 탐욕은 그저 원칙적으로 좋은 개인주의 이기심에서, 일부 일탈한 정도로의 경계만 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경제규모가 커지고, 세계화 현상이 퍼지면서, 웬만한 국가들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영향력이 초국가적 기업과 초국가적 금융기업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들 초국가적 기업의 탐욕이 시장경제에 대하여 제기하는 위협은 과거 국가의 탐욕 보다 더 심각한 것이 되어버렸다.
서양에서는 당초 개인의 이기심에 대하여는 아담 스미스 이후 건전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이기심의 연장인 다국적 기업의 탐욕에 대하여는 근본적인 문제로 인식하기 보다는 대증요법, 즉 문제가 생기면 그 이에 따른 국부적인 해법만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하여 왔다. 그것이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독점금지법 등이다. 여기에는 철학적인 문제가 개재되어 있다. 집단주의 탐욕은 21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두 가지 차원에서 그 폐해가 너무나 명백해져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나는 경제에서 초국가적 기업의 탐욕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에서 정당의 정권 유지 탐욕이다. 전자는 시장경제를 위협하고 후자는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탐욕은 결합되어 있다. 동전의 앞뒷면이다.
서양에서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문제가 양극화로 점점 커지게 된다. 인간의 이기심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공익을 창출한다는 이론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 즉 이기심에서 공익이 창출된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라고 규정하고 싶어했다. 감시자가 없어도 저절로 사익과 공익이 수렴된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만약 이기심이 공익이 아니라 양극화의 확대와 연결된다면, 서양 정치경제체제 전체에 문제가 생긴다. 동양의 무위사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사익과 공익이 충돌한다면 사익이 공익으로 연결되도록 하는 것은 지도자가 책임 져야 한다. 그런데 서양 정치경제 체제에서 지도자는 집단주의의 힘 앞에서 무력하고 감시할 수가 없다. 바로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나 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없게 된다.
동양은 국가주의에 대한 대처 방법이 서양의 민주주의와는 달랐다. 민본주의에 의지하고 있다. 동양은 무위사상에 의거하여 국가주의에 대하여 법과 윤리로 대처하고 있다. 그러나 왕은 실제적으로 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있었다. 무위사상이 자유방임주의로 서양에 편입되는 18세기에도 변하지 않았다. 법의 지배가 부족하였던 것이다. 민본주의 윤리에 의지하는 동양 사상은 17세기까지만 해도 서양의 중상주의보다 유리한 정치경제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즉 지도자에 대하여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나?” 라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지도자에 대한 견제 장치가 윤리에만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동양의 윤리보다 서양의 법률의 개념이 정권교체면에서 확실한 결과를 가지고 왔다.
동양은 지도자의 교체 제도가 없이 세습 지도자의 능력에 지도자가 죽을 때까지 권력을 유지하는 제도를 견지하면서 지나치게 지도자에 의지하게 되었다. 이런 제도는 수천 년간 계속되었다. 따라서 윤리에 의지하는 학자들의 견제와 균형의 개념은 세습지도자가 무능할 경우 그의 탈법적인 횡포로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동양은 20세기에 들어서서 법률에 의한 지도자의 교체 제도를 서양으로부터 수입하여, 민본주의에 민주주의 철학 체제를 결착 시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대부분의 동양에서는 지도자의 평화적 교체에 성공하고 있어 보인다. 윤리적으로는 기원전 4세기에 이미 맹자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준비된 면이 있었다. 그는 군주가 덕을 잃으면 더 이상 군주로서 자격이 없으므로 교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맹자는 백성이 근본이라는 민본주의와 백성을 위해야 국가가 융성한다는 위민사상을 강조했다.
서양의 법률에 의하여 평화적인 지도자의 교체 제도를 해결하였다. 서양은 민주주의 제도로 지도자의 교체를 확립하고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견제와 균형으로 이끌어 나간다는 실험을 하고 있다. 그러나 법률적으로 지도자가 아닌 다른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지도자가 아니라 집단주의가 이들 삼권분립의 견제와 균형 체제를 파괴하는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거대기업의 비즈니스가 입법부와 결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방임 주의의 방임 패턴은 국가주의의 문제는 해결하였지만 집단주의에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에는 아무런 대책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무위사상은 법치 행위를 뛰어넘는 인간행위에 대한 원초적인 철학적 사유다. 서양의 자유방임 사상과 차원을 달리한다. 무위사상은 도교의 근본사상이다. 무위사상은 경제에서 자연의 경제 행위와 인간의 경제 행위를 구분하고 있다. 자연의 경제 행위는 균형을 이루는데 집중한다. 생태계의 원리다. 그러나 인간의 경제행위는 차이를 키워 빈익빈 부익부를 만든다. 자연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다른 점을 지적하고 있다. 자연속에 없는 인간의 탐욕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늘의 道는 많은 것을 가진 자에게서 취하여 없는 자를 돕는다. 인간의 道는 없는 자에게서 취하여 많은 것을 가진 자를 돕는다. (도덕경 77)
여기에 동서양이 정치경제 측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게 된다. 자연의 경제 행위는, 맨더빌이 제시한대로 꿀벌의 세계를 포함하여, 모든 동물의 세계를 포함한다. 그런데 인간이 꿀벌의 행위를 따르자는 것이 18세기에 서양에 유행하던 철학의 기조였다. 이기심의 찬양이 그 기조다. 자연의 경제 행위를 인간의 정치경제 행위에 그대로 적용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서양의 “보이지 않는 손”이 역할을 하게 된다. 인간도 꿀벌과 같이 개인의 이기심을 따르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공익이 저절로 창출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문명에서 보면 인간의 본성은 자연의 경제 행위를 따르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경제 행위를 만들어 나간다. 동물의 세계는 “탐욕이 없는 이기심”이 작동한다. 그래서 생태계의 원리가 생긴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에서는 다른 어떤 동물도 가지고 있지 않은 “탐욕이 있는 이기심”이 작동한다. 탐욕은 인간 경제에서 “붙잡는 손”이 된다. 인간이 존재하는 경제 분야에서 곳곳에 피할 수 없이 붙잡는 손이 생긴다. 서양은 국가주의에만 치중하였지만, 이 붙잡는 손은 국가주의(statism), 집단주의(tribalism), 개인주의(individualism) 분야에서 공익을 해치는 손이 된다. 그러나 붙잡는 손은 인간본성에 내재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 지도자라는 국가주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집단주의, 개인주의에 모두 해당이 된다.
여기서 동양의 무위사상은 서양의 자유방임주의와 철학을 달리한다. 공익은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데, 개인의 탐욕이라는 사익에 의하여 쉽게 훼손될 수 있기 때문에 공익은 특별히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무위사상의 핵심 중의 하나다. 인간본성으로 미루어 볼 때 개인의 이익은 탐욕으로 진전하기 쉽고 예외적으로 이타심으로 진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의 균형을 위하여 “윤리”로 개인의 이익을 탐욕이 아니라 이타심으로 유도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여기서 동양문명의 중심이 되는 윤리문화가 생성된다. 동양 문명이 “공익을 빙자한 사익 추구를 경계하는 술치”의 개념을 중요시하는 이유다.
4) 술치의 핵심: 이윤추구와 탐욕은 어떻게 구분하나?
인간의 경제활동에서 이윤추구와 탐욕을 구분하여야 한다. 공익을 사익으로부터 보호하자는 술치 철학의 핵심이 바로 이윤추구와 탐욕의 구분에 있다. 그러나 법으로는 이를 구분할 수 없다. 서양은 경제적 관점과 윤리적 관점을 분리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동양은 두 가지 관점이 융합주의(syncretism)에 의하여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도교와 유교의 철학은 경제에서 윤리를 중시하는 “정치경제”적 성격이 핵심이다. 지도자, 즉 도교의 성인이나 유교의 군자는 윤리적으로 자신을 세우지 않으면 지도자가 될 수 없다. “군자는 덕을 추구하고, 소인은 이익을 추구한다.” “道를 이해한 지도자는 탐욕으로부터 자유롭다.” 이러한 유교와 도교의 윤리적인 사유가 동양의 지도자의 첫째 덕목이 된다. 서양은 윤리를 멀리한 법으로 경제를 관리하고자 한다. 그러나 법의 차원에서 보면 문제가 있다. 어디까지가 이윤추구이고 어디서부터 탐욕이 되는지 법적으로 따질 수 없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윤추구는 경제의 핵심이다. 순자와 아담 스미스가 역설했듯이 이기심은 인간의 경제활동의 근본이다. 로크는 이를 “욕구가 없는 곳에는 근면도 없다” (Where there is no desire, there will be no industry)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욕구, 곧 이기심과 이윤추구는 정당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기심이 공익을 해치고 탐욕으로 발전하는 것은 방지해야 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탐욕은 관리되어야 한다. 이윤추구를 정당화하는 데는 서양의 자유방임주의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방임주의는 감시자가 없어서 탐욕의 희생물로 전락하게 된다.
이윤추구와 탐욕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은 윤리보다 법을 중요시하는 서양에서 자주 발생한다. 서양에서 “탐욕은 좋은 것이다” (Greed is good) 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보이스키(Boesky)라는 월스트리트 투자자가 1986년 UC 버클리 졸업식 연설에서 “탐욕은 괜찮다”(Greed is all right)는 말로 처음 썼다. 그는 탐욕은 건전하고 이를 가지고 있어도 당신은 선하게 느낄 수 있다 라고 설명했다. 이 표현은 1987년 영화 Wall Street에서 게코(Gordon Gekko)라는 인물이 사용한 대사에서도 사용되어 유명해졌다. 서양에서는 탐욕이 개인의 성공뿐 아니라 경제 발전에도 기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표현은 1980년대 이후 미국 금융 자본주의의 정신을 대표하는 문구로 자리잡았다.
서양에서 “탐욕은 좋은 것이다” 라는 표현은 탐욕을 미화하거나 비판할 때 모두 인용되는 상징적 표현이 되었다. 탐욕이 경제적 동력과 혁신을 촉진할 수 있다는 자유시장 자본주의적 논리를 담고 있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탐욕이 기업의 성장, 경쟁, 효율성을 높여 사회 전체의 부를 증대시킬 수 있다는 주장은 아담 스미스의 사익이 공익을 창출한다는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이나 밀턴 프리드먼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 이라는 논리와 맥을 같이한다. 탐욕은 본래 과도한 욕망으로, 타인과 사회에 해를 끼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욕망은 발전과 성취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이 생긴다. 윤리보다 법에만 의존하는 서양에서 더욱 핵심적 문제가 된다.
탐욕은 좋은 것이다 라는 말은 자본주의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지만, 지나친 탐욕은 불평등, 환경 파괴, 사회적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탐욕(greed)과 이익 추구(profit-seeking), 두 개념 모두 “더 많은 것을 원 한다” 는 욕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경계가 모호하다. 같은 행동이라도 맥락에 따라 탐욕으로 보일 수도, 정당한 이익 추구로 보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기업의 이윤 극대화는 경제학적으로는 정상적인 활동이지만, 사회적 책임을 무시하면 탐욕으로 비판받는다. 탐욕과 이익 추구의 구분은 절대적이지 않고, 사회적 규범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즉 윤리의 범주에 들어간다.
이윤추구는 기업 활동의 본질로서 정당한 경제 행위로 인정된다. 기업은 주주와 이해관계자를 위해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기본 목적이다. 그러나 탐욕이 되면 방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탐욕은 윤리적·도덕적 개념으로, 법률상 명확한 정의가 없다. 따라서 법정에서 “탐욕적이다”라는 이유만으로 처벌하거나 제재하기는 어렵다. 법은 주로 불법 행위(가격 담합, 독점 남용, 사기, 불공정 거래 등)를 규제하지, ‘탐욕’이라는 동기를 직접 규제하지 않는다. 법적으로는 ‘탐욕’을 따로 규정할 수 없고, 오직 불법적 결과가 발생했을 때만 제재가 가능하다. 그러나 사회적·윤리적 차원에서는 기업이 단순한 이윤추구를 넘어선 ‘탐욕’을 보일 때 비판과 규제 요구가 커지게 된다. 윤리적 차원에서는 이윤추구와 탐욕의 구분은 가능하다. 기업이 끝없는 소유·지배 욕구의 표출로 공익이 훼손되는 것은 탐욕의 전형이다. 그러므로 탐욕은 법으로 불법적 결과가 발생하였을 때 사후적으로 처벌하게 된다. 그 이전에는 인간사회는 “윤리”에 의존하게 된다.
법치를 근간으로 하는 서양 문명에서는 법을 인간 행위의 가장 중요한 기점으로 삼고 있다. 서양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에서도 “법치”를 주장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있다. 그러나 법치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윤리다. 동양문명에서 윤리를 법 보다 중요시하고 있는 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은 서양의 사익-공익 수렴론에서는 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의 사익-공익 충돌론에서는 윤리에 중점을 두어야 사회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본다. 서양은 인간본성의 이기심과 이타심의 표출 과정에서 결국은 이타심이 “저절로 승리”하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고, 동양은 강력한 이기심을 윤리와 법률로 관리해야 약소한 이타심이 강력한 이기심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서양의 이러한 법과 윤리의 전통은 절대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내 것이 옳고 네 것은 틀렸다는 절대성을 부여할 수 없다. 각 지역의 지정학적인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적실성이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지도자는 “덕(德)”과 “도덕적 정당성”을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는 도교, 유교적 이상이 윤리의식으로 등장했다. 부(富)는 사적 욕망과 연결되며, 공적 리더십과는 상충한다고 여겨졌다. “부자는 정치에 참여하면 사익을 추구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지도자의 덕목으로 군주는 검소함과 청렴을 중시했으며, 지나친 부는 오히려 불신을 불러왔다. 부와 인간본성 사이의 관계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이를 밝히고 있다 (사기 129-29): 앞서 인용한 대로 재산이 “만 배가 되면 그 사람의 노예가 된다”. 서양에서도 “부의 이면에는 언제나 범죄가 도사리고 있다” (Behind every fortune there is a crime)라는 용어가 자주 회자된다.487
서양에서는 정복문화의 지정학적인 전통으로 그리스 로마 시대 부터 귀족과 부유층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는 곧 권력의 기반이었다. 중세 이후에도 봉건 영주, 상업 자본가, 은행가 등 부자 계층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근대 민주주의 시대에도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부와 권력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현실이 제도화되었다. 서양의 경우 정치 지도자는 대규모 자산가나 기업 후원에 크게 의존한다. 상부상조 정신으로 지도자는 이들의 이권을 법으로 뒷받침한다. 정치경제 철학에서는 낙수효과를 주장하는 이론이 부와 권력의 유착을 보호하게 된다.
동양의 윤리와 서양의 법률이 동서양 정치경제 체제의 근간이다. 그러나 동양은 윤리를 앞세웠지만, 윤리와 법률을 적절한 방법으로 동시에 활용하는 체계를 세워 나간다. 순자는 기원전에 이미 인간의 본성은 “윤리와 법률”로 관리해야 사회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설득하였다. 이러한 동양의 융합주의(syncretism)가 앞서 말한 외유내법과 황로사상이다. 그러나 서양은 계시종교, 형이상학, 이데올로기 등의 영향으로 법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윤리에는, 특히 정치경제 차원에서, 거의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인간사회는 법치주의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많다. 윤리가 개재되어야 한다.
공자와 예수가 모두 법으로 문제를 가지고 가기 이전에 윤리에 의한 해결을 우선시하였다. 두 사상가 모두 법은 최후의 수단이고, 인간 사회는 먼저 윤리적 합의와 도덕적 실천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본 셈이다. “법이전에 윤리” 라는 사상은 법만으로 사회를 운영하면 강제와 처벌만 남고, 인간의 자발적 도덕성은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문제를 더욱 어렵게 하는 구조로 사회 전체를 끌고 가게 된다.
정치경제문제에 있어서, 이윤추구는 법으로 보장하고, 탐욕은 윤리로 제어하게 된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이 인간의 경제활동을 윤리에서 해방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탐욕은 그대로 남게 된다.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은 결국 비즈니스와 의회의 결합으로 양극화를 초래한다. 비즈니스와 지도자가 같은 배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의 붙잡는 손 이론은 지도자가 양극화를 방지해야 하는 윤리적 책임을 가장 커다란 의무로 가지게 된다. 즉 양극화 보다 중산층의 보호에 집중해야 한다. 동양의 역사속에서도 왕이 양극화에 가담하여 부를 누리게 되는 때, 그 왕조는 망하고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왕조 등장한다. 새로운 왕조는 세금을 대폭 낮추는 조치로 양극화를 제거하는데 집중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인간의 이기심의 관리는, 서양의 보이지 않는 손과 동양의 붙잡는 손이라는 두 가지 동서양의 철학체계 중에서, 어느 철학이 중산층을 생성하고 보호하느냐 하는 것이 그 유효성을 입증한다. 국가경제가 아무리 커져도 빈부격차가 계속 커지면 그런 나라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반드시 중산층이 튼튼해야 국가가 제대로 효율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서양 정치경제는 부자를 부자로 만드는데 익숙해있다. 보이지 않는 손은 개인주의에 입각, 부자를 만들고 그 부자가 만들어내는 경제활동이 낙수효과 등에 의하여 중산층이 생긴다는 논리다. 과연 그런가?
서양의 가치들은 철학적으로 개인을 기초로 하고 있다. 서양인들에게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보다 종교, 형이상학적 진리, 법률 등이 우선권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장치들에는 내재되어 있는 가치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장치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자신을 크게 하자는 욕망이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정치경제학적으로 분석하면 서양 의회가 제정하는 많은 법들이 많은 장점을 내세우지만 동시에 집단주의의 부를 키우면서 빈부격차를 크게하는 결과로도 귀결된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중산층이 줄어들고 유약해진다.
앞서 몇 차례 살펴본 것처럼 서양의 정치경제는 개인주의 이기심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무방비 상태에 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원죄의식으로 문제삼고 있으며, 복음서에서는 분명하게 물질적 부에 대하여 경계하고 윤리적 차원에서 문제를 삼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서양의 근-현대 정치경제 사상가들은 윤리는 정치경제 사상 또는 개인주의 이기심과 관계가 없다고 본 듯하다. 이들은 아담 스미스가 그랬던 것처럼 성선론이라는 인간본성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동양의 유교와 도교에서는 인간본성과 이기심에 대한 윤리적 차원에서의 경계와 관리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인간본성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이기심이다. 지도자는 이러한 이기심의 요체를 파악하여야 한다. “이기심에서 벗어나면 道의 근원을 볼 수 있다. 이기심 속에서는 道의 나타남만 볼 수 있다” (도덕경 1장). 순자는 인간본성에 대한 경계를 통하여 지도자와 백성에게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시발점을 밝히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이익과 즐거움을 탐하기 때문에 이에 따르면 서로 충돌하고 양보는 없어진다. 인간의 본성에 만 따르면 인간은 쉽게 질투와 증오에 빠져들기 때문에 성실과 신뢰가 사라지게 된다” (순자 23:1).
서양에서는 개인주의 이기심에 대하여 윤리로 규율 하지 않기 때문에 “법에서 금지되어있지 않은 모든 것은 정당하게 허용되는 것”이라는 논리가 적용된다. 그 결과는 서양의 시장경제에서 개인주의 이기심은 더욱 활발하게 작용하게 된다. 유교 사상 전체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윤리에 대한 설명과 이를 체득하기 위한 자기수양이라고 볼 수 있으며, 도교의 경우도 거듭 윤리와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동서양문명은 서로 아주 다른 인간 본성에 대한 처방을 상정하고 있다. 논어에서 바로 윤리가 법이전에 먼저 유지되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법이 많고 형벌이 심하면, 백성은 수치심을 버리고 마음대로 한다; 덕성이 융성하고 예절이 바르면, 백성은 수치심을 가지고 올바르게 된다” (논어 2:3).
서양에서 지금도 정치경제를 논하면서 법률에 집중하고 있다. 윤리는 대부분의 경우 제외되고 있다. 반면 동양에서는 근검, 절약, 무욕 같은 윤리가 정치경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동양 정치경제의 근로윤리는 이기심에 대한 경계에서 온다. “道를 이해한 지도자는 탐욕으로부터 자유롭다.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도덕경 64장). 이러한 지도자는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데 근검절약 보다 좋은 것이 없다. 근검 절약하는 일은 일찌감치 道를 따르는 일이다” (도덕경 59장). 인간을 대하는데 지도자는 세 가지를 중요시한다. “세 가지 보물을 소중히 간직하라. 첫째는 동정심, 둘째는 근검절약, 셋째는 겸양정신이다” (도덕경 67장). 도교에서 지도자의 솔선수범을 가장 중요시한다. 지도자가 부를 누리고 부를 자랑스러워하면 그 나라의 국민들은 근검절약 정신을 버리게 된다.
인간본성과 근검절약 윤리문화
동양이 윤리를 중심으로 하는 문명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정책적 결정이나 결단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와 전통 속에 배어 있는 것이다. 동서양의 차이는 철학적 사유에서 동양의 관계주의와 서양의 개인주의라는 개념의 차이에 기인한다. 강력한 이기심과 약소한 이타심을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본성에서는 근검절약이라는 윤리문화를 앞세워야 사회 질서가 유지된다. 동양의 윤리문화는 서양과는 다른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막스 베버(1864-1920)가 1904년에 발간한 그의 저서 “신교도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에서 신교도 근로 윤리를 설명하였다. 그는 신교도의 근로윤리를 자본주의의 정신적인 지주로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베버의 근로윤리는 그 근원에서 동양의 근로윤리와 크게 다르다.
신교도 근로윤리는 16세기 서양의 종교개혁 이후 생겨난 신교도들의 “근검절약 태도”는 천당에 가기 위한 자격요건으로 神의 축복(grace)을 받았다는 증표로서 개인에게 나타난다고 믿어졌다. 그래서 너도 나도 종교적 열정에 의하여 “근검절약 하는 자세”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488 그리고 이러한 근검절약의 정신은 자본의 축적과 투자의 증진으로 이어져 서구자본주의를 가능케 하였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생각은 중세를 이어 근세까지 이어온 서양의 종말론과 상당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축복을 받은 자 만이 지구 종말이 와서 예수의 재림이 이루어질 때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증표를 나타내고자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제는 서양에서도 종교적 지구 종말을 심각하게 믿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렇게 되면 청교도 근로윤리는 사라지게 된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神의 축복을 받아 천국으로 가게 된다는 근거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이러한 변화는 아담 스미스를 태두로 하는 근대경제학의 이기심 방임과 때를 맞추어 일어나게 되어, 동양과는 달리 서양에서는 “즐거움을 가능할 때 당장 만끽하는” (instant gratification)자세가 소비 문화와 함께 생기게 되었다. 퍼거슨 (Niall Ferguson) 은 그의 2011년 저서 “문명: 서양과 나머지 (Civilization: The West and the Rest)”에서 바로 서양에서의 근로의식과 종교심과의 상관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즉 유럽이 미국 보다 훨씬 더 근로의식이 취약하며, 유럽인이 미국인 보다 종교심도 약하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즉 미국인은 유럽인 보다 약 20% 더 많이 일하는데, 교회 참석률도 유럽인이 10% 정도인데 반하여 미국인은 36%에 달한다고 통계를 제시하고 있다.489
반면 동양의 유교 근로윤리는 앞서 말한 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하는 것이므로 굳건한 기반을 가진다. 퍼거슨도 위의 책에서 동양인이 미국인보다 30% 정도 많이 일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근로윤리 중에서 가장 정치경제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근검절약이다. 즉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얼마나 많이 저축하는 가 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동양의 근로의식은 개인, 부족, 국가에 모두 적용되어 서양과 비교할 때 아주 높은 투자와 저축률을 보이고 있다. 퍼거슨은 그의 책에서 서양의 국가 채무가 아주 높은 점과 그 문제점과 비교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 기자이며 저술가인 블루스타인(Paul Blustein) 은 외국의 물품을 미국이 마구 찍어 낼 수 있는 달러로 계속 사들이고 있는데 이는 그대로 미국의 부채로 누적되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490 퍼거슨은 미국의 부채가 2001년 GDP대비 32%였는데, 이것이 2011년 66%로 급증하였으며, 2011년 당시의 증가세가 계속되면 2021년에는 90%, 2031년에는 150%, 2047년에는 300%로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미국의 경우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막대한 국가채무에는 약 100조 달러에 달하는 의료보험 및 사회보장 비용 및 연금부채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의 국가재정은 아주 심각하다. 그리스가 난관에 봉착했을 때 보다 더 나쁜 상태에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491
재정수지 적자와 무역수지 적자가 동시에 일어나는 소위 쌍둥이 적자(twin deficit)는 그 나라에게 견딜 수 없는 경제적 위기를 촉발한다. 미국처럼 기축통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만 예외가 된다. 돈을 계속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국이 쌍둥이 적자를 계속 하면서도 국력을 유지하는 이유가 된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가 계속될 수 있을 것인가?
개인주의 이기심에 관하여 서양의 방임주의가 어떻게 서양의 소비-부채 문화를 낳았고, 개인주의 이기심에 대한 동양의 관리와 자제 사상이 동양의 근검절약 문화를 낳았다. 동양은 그 문명의 기저인 윤리 면에서 서양의 정치경제 체제 보다 펀더멘털 면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근로윤리 의식으로 나타난다. 서양보다 동양이 근원적으로 강한 경쟁력과 밝은 미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근로윤리의식에 기인한다. 정치경제에서 윤리가 중요한 이유다. 근검절약이나 솔선수범은 법으로 정할 수 없다. 윤리의 관할이다.
이러한 근로윤리는 뿌리가 깊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프랑스 중농주의 사상가 중의 한명인 쁘와브르(Poivre)는 18세기 중엽에 동양을 여행하고 동양의 근로윤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게으른 사람은 아주 혹독한 경멸의 대상이었다. 게으름뱅이는 사회의 일원이면서도 기생충처럼 사회를 갉아먹는 일원으로 취급되었다. 정부도 이러한 게으름뱅이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전통적으로 모든 사람이 일을 하도록 되어있는데, 나라 한 구석에서 일을 안 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나라 다른 한 구석에서 그 때문에 굶주리고 피해를 보는 사람이 생긴다는 생각이 백성들 사이에 깊이 그리고 널리 퍼져있었다.492
쁘와브르가 18세기에 동양에서 발견하고 감탄한 뿌리 깊은 근로윤리는 윤리에 중점을 둔 동양의 교육, 절제, 자기수양을 중요시한다. 따라서 동양에서는 교육의 중요성이 일찍부터 강조되어 왔다. 공자는 “인간은 타고 난 본성 은 누구나 비슷하다; 인간은 교육에 의하여 크게 차이가 난다.”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는 아무도 빼놓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인간본성에 입각한 동양의 교육은 근검절약 윤리문화와 지도자 양성에 집중하고 있다.
동양의 정신 문화에 내재해 있는 가치체계는 서양 철학이 소홀히 하고 있는 윤리적 가치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근검 절약이다. 교육에 의하여 강조되는 근로의식은 법률이 아니라 윤리의 문제다. 윤리에서 주장하는 부분이 바로 탐욕에 대한 경계다. 이윤추구와 탐욕의 구분은 윤리에 의하여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윤리 의식은 지도자가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사회에 정착할 수 가 없다.
지도자의 솔선수범: 군자(君子)-성인(聖人)사상
동양문명은 지도자를 어떻게 양성하고 나라를 다스리게 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도교 성인사상이 바로 유교의 군자사상과 유사하다. 유교의 군자사상은 도덕적 수양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도덕적 인간상을 강조하고, 도교의 성인사상은 자연과 합일하여 무위자연을 실현하는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모두 지도자를 지칭하고 있다. 동양 사상에서는 유교의 군자-소인, 도교의 성인-백성의 비교에 의하여 소인이나 일반 백성 즉 대중을 따르지 말고 군자나 성인을 따르도록 하는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지도자의 윤리적 역할을 중요시하는 측면은 동양 교육에서 특히 중요하다.
지도자의 윤리적 역할은 지도자와 소인을 대비하는 관계주의(relationalism)체계에서 특히 강조되는 부분이다. 서양은 교육이나 인간 수양에서 개인주의(individualism)를 따라 개인적인 완성을 강조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볼 수 있듯이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나, 교육은 개인의 지식 습득과 행복 추구 등에 중점을 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정의, 용기, 절제, 관용, 중용의 독트린 등 덕목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윤리적 가치가 개인의 행복을 어떻게 가져오는지 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이지, 그러한 윤리적 가치를 어떻게 교육에 의하여 함양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지 하는데 중점을 둔 것은 아니다. 17세기에 서양에 발간된 스피노자의 윤리학(ethics)도, 유교의 논어나 도교의 도덕경 같이 근검절약과 사회봉사에 중점을 둔 개인의 덕성을 함양과 교육에 목적이 있었다기 보다는, 神의 본질이나 인간 본성의 탐구를 통한 “자유인” (free man)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반면 동양철학 체계는 사물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좋은 지도자를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다.
행동하는 것이 깨닫는 것 보다 낫다. 행동하는 것에 배움의 목적이 있다. (순자 8:9)
개개인의 덕성의 함양이라는 교육의 중점을 둔 사상은 서양에서 로크에 의하여 시작된다. BC 5세기에 정립된 이러한 동양 교육철학은 서양에서는 2천 년 이후에 로크(1632-1704)에 의하여 처음으로 표현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열에 아홉은 선하든 악하든, 쓸모가 있든 없든, 교육에 의해 지금의 그가 된 것이다.” 또 그는 공자처럼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믿었다.493 그러나 동양 교육철학과 로크의 교육철학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서양사상가로서 서양 철학에 얽매어 본능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 데서 그의 인성론의 한계가 드러난다. 로크의 교육은 본능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측면이 문제가 된다. 인간이 평등하고, 교육이 중요하지만, 인성론에서 정신의 가능성을 과대평가하면서 정신이 본능의 한계성을 뛰어넘는다고 평가한 면이 그것이다. 로크가 중요시한 자유 같은 가치가 자기보존본능의 상위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정신이 제공하는 자유는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자유가 생존이라는 본능의 원칙을 넘어설 수는 없다.
동양문명에서는 이기심을 윤리차원에서 관리하고 경계하자는 것이다. 결국 법이나 규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탐욕과 이윤추구의 경계를 윤리적으로 해결하여 내놓은 답이 바로 동양의 군자사상과 무위사상의 본질이다. 동양문명은 이러한 아주 유용한 개념을 2500년 전에 정립하여 사용하고 있다. 군자는 바로 바람직한 지도자 상인데, 국민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으로 승화시키는 지도자를 말하며, 개인적인 이기심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이다. 반면 소인은 대부분의 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던지 자신의 이기심을 앞세우는 사람이다. 지도자로서는 부적합한 사람이지만, 역사는 많은 경우 소인이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았음을 보여준다. 동양의 군자, 성인으로 묘사되는 윤리적인 지도자상이 현대 정치경제에 커다란 기여를 할 수 있다. 지도자의 최선의 덕목은 재산이 아니라 윤리가 된다.
군자는 의로움을 생각하고, 소인은 이익을 생각한다. (논어 4:16)
군자는 덕을 마음에 두고, 소인은 재산을 마음에 둔다. (논어 4:11)
군자사상과 무위사상은 연계되어 있다. 인간의 행동에서 인위적 부분을 최소화하려는 정치경제 철학을 동양문명에 심어 놓았다. 특히 지도자의 간섭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도덕경의 “지도자는 자신의 계획이 없고 백성의 계획을 자신의 계획으로 삼아야 한다” (도덕경 49장)는 주장은 지도자의 이기심을 관리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무위로 국가를 지도하면 백성은 저절로 이루게 된다” (도덕경 57장)는 주장은 바로 국가주의라는 이기심에 대한 관리가 된다. 이는 앞서 인용한 사마천의 사기(129-1)의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모두 기원전에 동양 정치경제 사상으로 자리를 잡은 철학이며, 서양에서는 이러한 정치경제 철학이 동양 보다 2천 년을 지나서 근세에 최초로 등장한다.
앞서 보았듯이 이익추구와 탐욕의 경계는 법이나 규정으로 규율할 수 없고, 그래서 윤리의 역할이 개재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솔선수범이다. 아무리 법이 좋아도 지도자가 이를 갖가지 방법으로 어기면 법은 아무 소용이 없다. 지도자에게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부의 축적이다. 부자는 지도자가 되기 어렵고, 지도자는 부자가 되기 어렵다는 윤리적 원칙이 있어야 한다. 법은 갖가지 방법으로 우회할 수 있지만, 재산은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윤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이기심의 관리 차원에서 도교는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지도자가 이타심을 국가운영의 기저로 삼아야 국가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윤리는 계몽된 이기심이 된다.
성인은 자신을 위하여 축적하지 않는다. 남에게 많이 쓸수록 더 많이 포용하게 된다.
남에게 주는 것이 많을 수록 더 많이 가지게 된다. (도덕경 81장)
유교와 도교가 모두 윤리와 정치를 불가분의 하나로 보고 있고, 윤리적인 이상형을 군자, 성인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를 21세기에 적용하면 군자나 성인은 바로 바람직한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지도자는 재산이 아니라 근검절약위에 수립한 솔선수범이 우선되어야 한다. “지도자는 참된 것을 쌓는데 열심이다. 재산을 쌓는데 열심이지 않다” (논어 15:31). 그러므로 지도자는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지 않고 남을 위하여 자신의 능력을 나누어주는 데 집중한다.
이렇게 동양의 지도자에게는 성공이나 승리이전에 윤리적인 기준이 중요하게 된다. 동양에서는 관계주의가 서양문명의 개인주의를 대신하여 작용하는 문명을 구성한다. 지도자는 이타심(계몽된 이기심 enlightened self-interest)과 함께 솔선수범과 청렴을 기준으로 삼게 된다. 서양에서도 이러한 지도자 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트루먼이 1953년 공직을 떠났을 때 전직 대통령 연금은 아직 없었고(전직 대통령법은 1958년에 생겼다), 정부에서 받는 것은 월 112달러 남짓의 육군 연금뿐이었다. 대기업들이 높은 보수의 자리를 제안했지만 그는 “아무리 점잖은 거래라도 대통령직의 위신과 품위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일에는 결코 관여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494
이것이 바로 트루먼(Truman) 대통령의 윤리관이다. 이러한 정신은 서양에서도 크게 존경을 받고 있다. 로마시대의 모범적인 정치가이며 시민으로 추앙받는 신시나투스(Cincinnatus) 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로마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봉사하다가, 직을 떠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평범한 농민으로 남은 일생을 살았다. 권력을 탐하지 않고 공익을 위해 헌신한 로마의 전설적 인물로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이 존경하던 인물이다. 1790년에 정식으로 Cincinnati라는 도시도 미국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청렴하고 근검 절약하는 지도자 상은 서양의 일반적인 지도자 상이 아니다. 알렉산더에서 카이사르에 이르기까지 근세 왕조와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고대 지도자들은 승리자, 정복자이고 동시에 막대한 부를 소유하였다. 이러한 지도자 상을 본받아 현대 서양의 지도자들은 부유하다. 그러나 맹자가 지적하였듯이 지도자가 부유하고 이익을 추구하면 그 수하의 보좌진들, 나아가 국민전체가 그 지도자를 본받아 이익을 추구하고 부유해지고자 한다. 결국 이러한 지도자 상에 따라 모든 국민이 윤리적인 이상의 추구보다는 “부와 명성(Wealth and Fame)”를 원하게 된다.
동양에서는 아직도 국민은 근검절약을 덕목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아직은 이러한 철학이 실제로 보편화 된 채 남아있다. 반면 미국에서는 머스크, 베조스, 머독, 엘리슨 같은 일류 부자들이 주요 언론을 소유하고 확장하고 있다. “언론을 장악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이윤추구와 탐욕은 동양의 정치경제사상에서 윤리에 의하여 테두리가 생긴다. 거대기업이 언론사를 장악하는 것은 동양에서는 자율을 어기는 탐욕이고, 서양에서는 자유를 구가하는 이익추구다. 부자가 지도자가 되거나 지도자가 부자가 되는 것은 동양에서는 무위를 벗어나는 자율을 어기는 것이고, 서양에서는 자유를 추구하는 자유방임이다. 이러한 구분은 서양의 유위사상체계에서는 법으로 규율할 수 없는 범위다. 동양의 무위사상체계에서는 윤리의 핵심이다.
국민의 근검절약 정신과 지도자의 청빈한 솔선수범의 전통, 이를 지켜나가야 한다. 지구 곳곳에서 우리에게 무섭게 닥치고 있는 기후변화 현상은 이기심에 기인하는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AI 혁명에서 우리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문제도 바로 이기심에 기인하는 탐욕에서 발현하게 된다. 빈부격차의 확대가 바로 그것이다. 근검절약과 솔선수범은 윤리의 핵심이자 정치경제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 윤리에 기반한 동양의 정치경제는 개인주의 이기심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것이고, 바로 이점이 시장경제의 펀더멘털에서 서양과 대비된 동양의 우위를 지킬 수 있는 점이다. 사상적으로 볼 때 서양의 정치경제 패턴에 내재된 이기심의 방임은 곧 소비-채무의 경제체제를 지향하게 된다. 동양의 정치경제 펀더멘털에 내재된 이기심의 관리는 곧 근검-절약의 경제체제를 지향하게 된다. 어느 사회든지 모두가 부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가 협력하여 가난한 자는 도울 수 있다. 그렇게 협력하는 사회는 지도자가 반드시 공익을 수호하고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하여야 한다. 이것이 관계주의다.
서양 경제는 개인주의에 입각하여 부자가 되면 낙수효과에 의하여 빈부격차가 해소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즉 상위 계층(부유층, 대기업 등)에 혜택이나 자원이 집중되면, 그것이 투자·소비·고용을 통해 결국 하위 계층(서민, 중소기업 등)에게도 흘러내려 경제 전체가 성장한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이는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근세 세계정복 시대까지 서양의 경제를 오래 지탱하여 온 “정복국가”의 경제에서는 설명이 가능한 이론이다. 그러나 서양 자체가 근세에 이르러 “민족국가”의 경제 체제로 전환된 이후에는 설명될 수 없는 이론이다. 상위계층에 대한 지원은 집단주의로 통하게 되고, 결국 중산층을 빈약하게 하고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간의 빈부격차만 증가시킬 뿐이다.
근검절약이라는 정치윤리와 정치경제의 패턴은 동양문명에 깊고 넓게 내재되어 있다. 특히 지도자의 솔선수범이라는 전통은 관계주의에 입각한 철학체제로써 서양보다 훨씬 건전하고 탄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양이 개인주의에 기반한 서양의 제도와 규범을 배우면서 고유의 근검절약의 문화와 전통을 버리게 되면, 근검-절약의 국가로부터 소비-채무의 국가군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동양은 근검절약의 근로윤리와 함께 미래도 잃게 된다. 반대로 동양이 서양의 민주시장경제 제도를 배우면서 자신의 근검절약의 정신과 교육-성과주의 중시의 전통을 지켜 나갈 수 있다면 미래에 내세울 수 있는 정치경제 문화체계를 가지게 된다. 나아가 동양은 인류가 봉착하고 있는 양극화와 AI 혁명이라는 격변기를 보다 잘 관리해 나가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