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족국가는 자연철학과 민본주의를 지향
민족국가의 형성에 대하여 동서양의 대부분 학자들과 AI 기반 전문지식들은 “근대적 의미의 민족국가”을 주장한다. 산업혁명이후 서양에서 출현한 헌법, 3권 분립 등 견제와 균형 제도의 도입을 민족국가의 구성 요소로 본다. 특히 전통 왕조의 폐지가 중요하다. 중국의 1912 신해혁명, 일본의 1868 메이지 유신, 한국의 1897대한제국 성립을 민족국가의 출현으로 보자는 것이다. 서양 중심적인 세계관과 역사관에 기인한 견해다.
서양 민족국가와 동양 자연철학의 만남은 17세기에 이루어졌다. 당시 서양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지정학적 환경이 변화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서양 역사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이 접하게 되는 민족국가(nation state)의 출현이었다. 민족국가의 출현은 한 문명의 철학적 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태동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의 생존을 위한 “자연철학” 체계를 따르게 된다. 민족국가는 정복자나 선지자 등 지도자들의 명령이 아니라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민본주의”로 생존을 추구하게 된다. 계시종교가 아니라 자연철학 체계를 국가 운영의 중심으로 삼는 과정을 밟게 된다.
이러한 철학에 접한 서양의 사상가들은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동양의 경이적인 발전을 주목하면서 동양문명의 기원을 서양 보다 훨씬 빨리 민족국가가 기원전에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소위 왕조의 폐지 이전에도 민족국가의 출현이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민족국가 형성에서 동양이 서양보다 2천년 앞선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키신저 같은 동서양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도 주장하고 있다.
민족국가의 출현이 인간 사회의 문명체계의 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동서양 문명 비교에서 중요한 시점은 동서양에서 언제 민족국가가 출현하였는지 하는 것이다. 동서양에서 언제 민족국가가 출현하게 되었나? 키신저는 동양의 민족국가의 출현이 서양보다 약 2천년 앞서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중국에서 전국시대는 250년 계속되다가 진시황의 통일로 종말을 고한다. 이 동안 봉건제국은 자치권을 획득하여 독립된 국가로 변모하게 된다. 서양에서는 이와 같은 유사한 경험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제2 차 세계대전으로 이르는 그 시기에 가지게 된다. 유럽 국가들이 세력균형 속에서 주도권을 쟁취하려고 싸우는 과정이 그것이다. 231
미국 정치학자 후쿠야마도 국가간의 수백년간 지속된 전쟁이 국가의 형태를 변형시킨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민족국가가 동서양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 설명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동양에서 이러한 수백년의 전쟁상태를 겪었으면서 민족국가가 탄생하였다. 서양에서는 천년 이상 뒤에 유사한 전쟁 상황을 겪으며 중앙집권적인 민족국가가 태어나게 된다:
중국에서 민족국가들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계속되는 전쟁속에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동서양비교에서 아주 흥미로운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동양보다 천년 이상 늦게 형성된 민족국가 설립에서 서양은 아주 유사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중국과 유럽에서 민족국가의 형성은 모두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노력에서 비롯됐다. 전쟁준비를 통하여 봉건영주들의 영토가 한 국가의 영토로 점차 통합되고, 국가통치권력이 중앙집권화 되고, 근대식 독립적인 행정체제가 태어나게 된다. 232
민족국가가 형성되면 이들을 통치하기 위한 행정체제인 관료주의, 국내 경제를 운영하기 위한 정치경제사상, 국내정치를 운영하기 위한 정치윤리사상 등이 생겨나게 된다. 동양에서는 이러한 체제가 기원전 전국시대에 이미 이루어졌다. 서양에서는 2천년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 이루어졌다.233
동양의 민족국가 구성이 서양의 민족국가 구성보다 2천년 앞섰다는 것은 민족국가 구성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민본사상” 의 태동이 동양이 서양보다 2천년 앞서게 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장은 “민주주의” 체제가 동양에서 서양보다 앞섰다는 그런 뜻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서양의 법률, 제도, “지도자의 평화적 교체”가 포함한다. 특히 지도자의 평화적 교체를 헌법에 수록하고 견제와 균형이 반영된 정치 제도에 반영시키는 것은 동양에서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동양이 온전히 서양에서 배워온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서양의 창작품이며 서양에 배워온 것이라는 생각이 존재한다. 그러나 동서양을 비교할 때 “자연철학”, “민본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경제체제”의 발전을 고려하면 우리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족국가”의 출현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을 가지데 된다.
동서양 문명을 비교할 때 민족국가의 출현을 감안하여 우리는 동서양 사상가들 사이에 2천년의 간격을 두게 된다. 동서양 문명비교에서 도교 vs 이신론(理神論), 유교 vs 자연철학, 무위사상 vs 자유방임주의, 한비자 vs 마키아벨리, 손자병법 vs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등등의 개념이나 사상가 사이의 비교가 2천년의 간격을 보이게 된다. 도교, 유교, 무위사상, 한비자, 손자 등은 모두 기원전의 인물이거나 그 시점에 이루어진 사상 들이다. 이에 대비되는 서양인물이나 사상은 이신론, 자연철학, 자유방임주의, 마키아벨리, 클라우제비츠 등이 포함되는데 이들은 모두 서양의 근세에 세워진 사상이나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 계시종교 체계가 아니라 자연철학 체계를 따르고 있다. 이들이 출현함으로써 비로서 동서양의 자연철학 체계간 사상과 인물의 비교가 가능하게 된다.
민족국가란 무엇인가? 동양에서는 민족국가라는 개념은 너무나 당연하여 새롭게 생각해야 할 개념이 아니다. 동양은 수천년 전부터 민족국가를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국가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민족국가는 서양에서는 근세에 처음 경험하기 시작한 중요한 개념이다. 서양은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정복국가, 중세는 종교국가로 특징 기울 수 있으며, 근세에 와서야 비로서 민족국가를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정복국가에서 시민과 각종 노예 등으로 구성된 여러 민족이 같이 사는 국가였다. 중세 천년 이상의 기간 동안은 서양은 종교를 중심으로 국가를 나누게 되었기 때문에 국가내에는 여러 민족이 같이 사는 그런 형태였다.
로마 교황이 기독교 국가운영에 깊이 관여하였고, 종교개혁 시기에는 구교와 신교로 국가들이 나누어져서 성립되었다. 구교 국가내에는 구교를 믿는 여러 민족이 같이 살고 있었고, 신교도들은 살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신교국가내에는 신교를 믿는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고, 구교도들은 살수가 없었다. 그런 형태가 17세기 신-구교 간의 장기적인 전쟁을 치르면서 결국 생존을 위하여 종교와 무관한 민족중심의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즉 한 국가내에 같은 민족으로 구성된 신구교를 믿는 사람들이 같이 살게 된 것이다. 드디어 수백년간의 전쟁 끝에 민족국가가 출현하고 새로운 국가운영체제가 태동된다.
동양에서 민족국가는 전국시대인 BC 6-3세기에 시작되었다. 서양에서 민족국가는 베스트팔렌 조약(1648) 이후에 시작되었다. 그러면 그 이전의 서양국가들은 도대체 어떤 형태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정복국가 체제였다. 피정복국가 사람들은 노예다. 그리스와 로마 같은 정복국가 들은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과 잡아온 노예로 구성된다. 스파르타는 시민수 보다 노예가 훨씬 많았으며, 아테네는 노예가 절반을 넘었고, 로마는 1/3 정도가 노예였다. 노예들은 전쟁, 약탈에서 잡아오거나 노예시장에서 구매로 보충되었다. 카이사르는 고울 지방을 정복한 영웅으로 서양사에 알려져 있지만 고울 지방을 정복하면서 수많은 노예를 팔아서 부를 축적하였다. 한번은 그의 군대가 전쟁에서 이긴 날 한 번에 5만명의 노예를 잡고 팔아서 카이사르와 로마군단병들에게 커다란 부를 안겨주기도 하였다. 노예는 어떤 취급을 받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이 정의를 빌리면 “노예는 동물과 똑 같은 존재” 였다. 노예는 동물과 같이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야만족들에게는 여성과 노예는 똑 같이 취급된다. 왜냐하면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모두 노예일 뿐이다. 그래서 시인들이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인들이 야만족들을 다스리는 것은 당연하다.” 야만족들은 노예와 같은 근성을 가진다. 234
오직 그리스 시민만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믿었고 철학적으로 그리스인들에게 설명하였다. 이런 정복국가에서는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국가의 경제를 지키고 크게하는 최선의 방안이다. 국가내의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경제이론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로마 시대 이후 서양은 중세 천년 이상 기간 동안 종교국가였다. 로마 교황청이 절대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神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나 교황청이 중심이었다.235 지방영주나 왕들은 제한된 권한만 행사하였기 때문에 민족국가내에서 백성 전체를 상대로 하는 정치경제사상이 태어날 수 가 없었다. 중세기간동안 서양은 교회와 국가가 공존하는데 교회가 국가운영 체제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특히 계시종교의 종말론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16세기까지 서양의 기독교 역사는 한 마디로 기다림의 역사였다. 즉 인간역사의 종말이 언제 다가오는지 하는 것을 기다리며 그 종말의 기다림이 계속 연기되는 상황을 기다리는 것이 그들의 역사였다. 비록 기다림의 구체적 유형은 상황에 따라 바뀌어 나갔지만, 종말을 기다린다는 것은 항상 동일하였다. 236 … 루터는 종말이 수년내에 다가온다는 것을 자주 인용하였으며, 그때가 올해 일지도 모른다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종종 神은 선택된 자들을 위하여 종말의 시점을 앞당길 것이라고 언급하였는데 “시간의 흐름에서 앞으로의 100년은 10년처럼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설명 했다. 237
그러므로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나 국가들은 종교와 처음으로 구분되어 하나의 정치체제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정복국가도 아니고 종교국가도 아닌 민족국가들이 처음으로 서양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자신이 지배하는 곳에 각자 스스로의 종교를 가진다” 라는 개념은 국가 지도자의 주권을 지지하는 표현이다. 지도자가 어떤 종교관을 가지던 간에 그가 지배하는 지역안에서는 종교 위에 국가가 선다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런 개념은 30년 전쟁이 끝나갈 무렵 에나 가능 해졌다. 독일인들이 평화를 수립하는데 종교는 이제 전쟁-평화 문제와 관련하여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원칙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 해졌다. 238
민족국가가 생기면서 드디어 서양에서 국가가 종교적 선악의 판단이 아닌 이성에 의한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러한 철학체계는 정복자나 계시종교의 연역적 명령체계에서 독립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민족국가들은 당연히 연역적인 명령체계에서 벗어나 스스로 발견할 수 밖에 없는 귀납적인 자연철학의 체계를 따르게 된다.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필연적이 아니라는 생각은 곧 종교가 당연히 행사하여야 할 권한을 제한해준다. 최후이 심판이라는 개념은 선악의 선택에 있어서 하나의 조건 만을 허락한다. 그러나 정치가는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선악이 아니라 최악과 차선의 악을 판단하는 선택에 있어서 종교가 아닌 도덕적 판단을 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리슐리웨(Richelieu)는 국가운영에서 선견지명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선견지명을 가져야만 정치가는 국가에 다가오는 악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은 한번 시작되면 점점 더 피하기 어렵게 된다. 239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철학 체계의 정치경제는 “민본주의”를 지향하게 된다. 국가의 생존을 위하여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민본사상은 어떻게 태동되는가? 춘추전국 시대에 형성된 민족국가와 함께 발현한 민본사상은 국가 생존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민본주의에 의해서만 민족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민본사상은 정복 지도자나 계시 종교의 지침이 아니라 백성이 국가에 가장 중요하다는 사상이다. 민본 사상은 춘추 전국시대 이후 위민(爲民), 보민(保民), 목민(牧民), 애민(愛民) 등 여러가지 표현으로 쓰여 지고 있었다. 맹자는 BC 4세기에 이미 민본사상의 본질을 밝혔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장 가볍다”(맹자, 진심 하). 맹자는 적극적으로 백성의 중요성을 전면에 내세운 철학자중의 하나다. 그런 이유는 간단하다. 민본사상이 국가와 국민의 “생존”에 필요했던 것이다. 맹자 이전에도 공자, 그리고 도덕경 등에서 벌써 민본주의가 동양 자연철학의 핵심 주제로 등장하고 있었다.
서양의 민본사상은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루소가 처음 주장한 이후에 철학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 이전에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정복시대”와 중세 “교권시대”가 수천년간 이어지며 민본주의가 서양에서 생성될 수 없었다. 서양에서17세기에 비로서 민본주의가 필요한 민족국가 들이 탄생하였고, 민주적으로 지도자를 교체하는 민주주의 제도와 모델이 19세기에 서양 각국에 전파되게 되었다. 동양도 이러한 제도와 모델을 수입하였고 이에 적응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동양의 이미 가지고 있던 민본주의 사상이 중요하게 작용하다. 동양이 서양의 민주주의 제도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문명적으로 동양의 민본사상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문화는 어머니, 제도는 그 아들” (Culture is the mother; institutions are the children)이다. 문화가 없으면 제도가 적응하지 못한다.
루소의 국민중심사상은 서양에서는 전혀 새로운 시각이다. 이에 커다란 감명을 받은 것이 독일 철학자 칸트다. 칸트는 루소를 읽기 전 까지는“국민”(people)의 중요성을 몰랐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칸트 이전의 서양사상가들은 정복시대의 정복지도자나 교권시대의 종교지도자를 중시하는 서양문명 체제내에서 2천년 이상 살았다. 그러나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서양에서는 정치윤리사상의 테두리가 달라진다. 민족국가의 출현 이후에 비로서 서양에서 처음으로 “국민”전체가 국가 생존에 필요해지게 되었고 이를 주장하는 사상가들이 나타나게 된다.
민본사상은 국가나 민주주의가 당연히 중요시하는 이데올로기나 철학적 개념이기 때문이어서 발전되어 나온 것이 아니라 민족국가의 성립이라는 테두리에서 자생적으로 나온 것이다. 전쟁이 횡행하는 시기가 계속되면, 국가안에서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도자나 귀족이 아니라 국민 전체가 노력해야 국가를 지킬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본성의 자기보존(self-preservation) 본능에서 나온다.
2) 동양의 정치경제 철학: 관자, 순자, 한비자, 사마천, 그리고 도덕경
민족국가의 민본주의는 당연히 민본 위주의 정치경제 철학을 생성한다. 정치경제 철학은 17-18세기 이전의 서양문명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복시대인 그리스-로마 시대나 종교중심의 중세시대에서는 민족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양의 사상가들은 정치경제사상을 펼 수 있는 대상이 없었다. 17세기에 비로서 서양에 민족국가가 탄생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18세기에 프랑스에서 중농주의라는 정치경제사상이 생겨났고, 영국의 아담 스미스가 서양의 정치경제사상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그리스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분야에 걸쳐서 이론과 철학을 설명하였으나 그들에게 정치경제사상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이들은 정복시대의 문명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해낸 “정치경제사상”은 인간이 사회에서 어떠한 재산을 가져야 옳은 가 하는 정치윤리 문제에 대한 일부 견해에 국한되어 있다. 그들은 국가 또는 폴리스 내의 모든 사람 즉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경제에 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민족국가내에서 생존을 위하여 국가내의 “국민”에 관심이 가장 중요해진다. 국민을 어떻게 경제활동에 활용하는가 하는 것이 국가의 힘과 국가 생존의 중대한 목적이 된다. 바로 민본사상의 발현이다. 이에 따라 민본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처음으로 정치경제 사상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BC 6-3 세기 전국시대에 동양 사상가들의 정치경제사상을 살펴보자.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첫 발걸음은 바로 정치경제사상의 기반이 되는 인간본성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자연철학에 의거한 인성 확립이다. 이들은 이를 기반으로 정치경제철학의 핵심을 수립해 나가고 있었다. 관자(管子), 순자(荀子), 한비자(韓非子), 사마천의 사기(史記), 그리고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살펴보자.
관자(管子, 춘추 전국시대에 쓰여진 책). 관중(管仲)은 전국시대 이전 봉건제도가 민족국가로 이행되어 나가는 시대인 춘추시대의 인물이다. 685-645 BC 동안 즉 40년간 제 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한 정치가다. 그의 사상과 유사한 철학을 공유한 많은 사람들의 철학을 열거한 책이 바로 “관자(管子)”다. 이는 동서양을 아울러 최초의 정치경제서적으로 꼽힐 만하다. 관자는 춘추시대에 시작하여 전국시대의 백가쟁명 사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전국시대에 편집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관자에 적힌 철학 중에서 특히 국가내의 모든 백성에 대한 경제정책적 사상이 많이 담겨있다. 동양의 민본주의는 서양의 민주주의와 다르다. 서양의 민주주의는 인간이 기어코 달성해야 하는 비전이나 이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동양의 민본주의는 모든 나라나 개인이 사활을 걸고 투쟁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 아주 현실적인 목표가 있다. 전국시대에 국가나 개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다. 즉 “자기보존”이라는 아주 현실적인 목표가 있다. 그것은 국력을 키워 나가야 전국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백성 전체를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보고 활용해야 한다는 원천적인 현실론에 입각해 있다. 민본은 민족국가의 생존 철학의 기본이 된다.
민본사상은 서양에서는 근세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다. 노예가 필수적인 시민-노예를 나누는 정복국가 시대나 인간이 아닌 神의 명령을 위주로 하는 기독교인-비기독교인으로 나누는 종교국가 시대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국가내의 모든 인간, 국민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경제철학이 불필요 했다. 아래는 관자에 기술된 민본사상의 표현이다:
국가가 부유하면 사람들은 멀리서도 찾아온다. 국토를 누구 나에게 경작할 수 있도록 하면 사람들은 정착하게 된다. 곡식이 가득하여 백성들이 먹을 수 있으면 그들은 절제되고 겸손하게 된다. 옷과 식량이 넉넉해지면 백성들은 존경심과 부끄러움을 알게 된다. (관자 1:1) 240
이러한 민본사상은 무위사상과 연결된다. 인간을 가리지 않고 포용하는 지도자의 철학은 자연의 무위사상에서 근거를 찾자는 것이다.
“당신은 우리 가족이 아니다” 라는 말을 하지 말라. 그러면 이를 듣는 사람들은 귀하의 말을 듣지 않게 된다. “당신은 우리 구역 사람이 아니다” 라는 말을 하지 말라. 그러면 이를 듣는 사람들은 귀하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된다. “당신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다” 라는 말을 하지 말라. 그러면 이를 듣는 사람들은 귀하를 따르지 않게 된다. 대지와 같이 행동하라. 하늘처럼 행동하라. 대지나 하늘은 특별히 누구를 구별하지도 않고 누구만 중요시하지도 않는다. 태양과 같이 행동하라. 이것이 진정한 지도자의 행동지침이다. (관자 1:5)
관자는 소금과 철의 유통을 국가독점으로 만들어 제 나라의 국부를 크게 증진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제 나라 환공(桓公)을 춘추6패의 최초의 패자로 만들었다.241 그리고 곡식과 다른 제품의 유통의 크기에 따라 동전(화폐)의 량을 조절하는 경제정책을 정착시키는 정책을 사용했다. 통화정책으로 제나라의 국부의 기초를 단단하게 하였다.242 이는 관자에서 “경중”(輕重) 정책 편에서 설명된다. “천하의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는가” 라는 환공의 질문에 대한 관중의 답은 통화정책이었다. 물가 조정정책을 국가의 재정정책 시스템에 적용한 최초의 사례다.
순자(荀子, BC 3세기 초반)는 그의 책 순자 제10장 부국(富國, wealth of nation)편에서 아담 스미스의 19세기의 국부론(國富論, wealth of nation)처럼 국가의 경제를 어떻게 운영하여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순자는 부국편에서 백성이 부유해지지 않으면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거둘 수 없으며, 백성을 보호하지 않으면 백성을 일하게 할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국가의 경제를 건전하에 하는 것은 국가의 지출을 검소하게 하고, 백성들을 부유하게 해야 하며, 여유분을 잘 보관하는 것이다. 국가의 지출을 검소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예산을 줄이는 것이며 국가운명을 잘하여 백성을 부유하게 할 수 있다. 백성이 부유해지면 국가의 재정에 여유가 생긴다. 243
그리고 특히 재미 있는 부분은 아담 스미스가 유행시킨 “보이지 않는 손”의 개념은 순자에 의하여 2천년 전에 유사하게 설명되고 있다. 각자 자신을 위하여 만들지 않아도 그 생산품들은 결국 전체의 이익에 기여한 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사익이 공익을 창출”한다는 서양식 이론을 내세운 반면, 순자는 “유통”에 의하여 “각자의 노력이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이득”을 만들어 나간다는 설명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유통에 의하여 스스로 생산하지 않아도 국내외의 여러가지 제품을 사용하게 된다. 해변에 사는 사람들은 목재로 된 용기를 사용하고, 산속에 사는 사람들은 해산품을 소모한다. 농부는 자신들이 만들지 않는 목재나 진흙을 사용하여 목공이니 석공이 만든 제품들을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장인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농부들이 생산하는 각종 곡식을 스스로 농토에서 만들지 않으면서 즐기게 된다 (순자 9:12)
순자는 유통에 의하여 모든 사람이 즐기게 되는 물품을 사용하게 되는데, 여기에 아담 스미스와는 다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서양의 아담 스미스는 공익은 사익에서 저절로 창출된다는 견해를 표명하지만, 순자는 유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유통이 공익을 창조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순자는 유통도 개인의 탐욕에 의하여 손상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인간본성과 감정은 방임하면 무질서와 폭력을 낳게 된다; 인간본성과 감정은 윤리에 의해서 관리될 수 있다. 훌륭한 스승과 원칙을 따라야 한다. (순자 23:1)
인간본성에 따라 사익을 그대로 방임하면 공익이 훼손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공익을 위하여 인간본성은 법과 윤리에 의하여 관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한비자(韓非子, BC 3세기 후반)는 자신의 책 한비자에서 정치경제사상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밝히고 있다. 특히 공익과 사익을 구분하는 철학이 눈에 뜨인다: “고대에 단어를 만들어 나갈 때 원을 그리고 이것을 개인의 것이라고 불렀고, 원 밖에 있는 것은 공공의 것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미 개인의 것과 공공의 것, 그것들이 출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서양의 사익과 공익 수렴론 vs 동양의 사익과 공익 충돌론”에서 자세히 살펴본다.
신하들이 사익을 추구하지 않고 공익을 추구하는 것은 지도자가 현명하고 능력이 있을 때 그렇게 한다. 신하들이 공익을 추구하지 않고 사익에 매달리는 것은 지도자가 우둔하고 능력이 없을 때 그렇게 된다. (한비자 19:21)
한비자의 사익-공익 충돌론은 국가를 운영하는 지도자에게 술치(術治)가 핵심중의 하나라는 철학과 연계된다:
법률과 행정조치는 신하들이 사익을 추구하는 방법을 없애는 방법이다. 법과 행정조치가 성공하면 사익 추구가 사라진다. 사익은 법을 위반하는 단서가 된다… 만약 지도자가 개인의 취향에 따라 신하를 활용하면 신하들은 공익이 아니라 지도자의 취향을 만족시키는데 헌신하게 된다 (한비자 45:6)
한비는 국가의 생존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백성의 노력에 의하여 국부를 스스로 크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안임을 설명한다. 그는 그의 정치경제철학의 시작으로 인간의 노력은 모두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며 국가의 정책은 이를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농장주가 농토를 개간하고 씨를 심고자 노동자 고용하고자 음식을 주고 돈을 주는 것은 농장주가 노동자를 사랑해서가 아니고 관대하게 음식을 주고 돈을 주는 것이 노동자가 일을 잘하게 하기 위함이다. 노동자가 최선을 다하여 농토를 개간하고 씨를 심는 것은 농장주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열심히 일을 하면 좋은 음식과 돈이 지불되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신의 위해서 일하 것을 기본을 삼는다. 244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기회의 균등을 지켜야 하며 결과의 균등을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밝히고 있다:
개인이 가난한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게으르거나 돈을 함부로 써서 그렇게 된다. 반대로 개인이 잘 사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열심히 일하고 돈을 절약해서 그렇게 된다. 만약 지도자가 잘 사는 사람에게서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면, 이것은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는 사람에게서 빼앗아서 게으르고 돈을 함부로 쓰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과 같다. 그러면 인간들은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지 않아도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한비자 50:3)
한비는 공익-사익 충돌론에 입각하여, 공공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국가와 지도자의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 한비는 이미 전국시대 말기의 인물이기 때문에 민족국가내에서 이미 관료체제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관료체제내에서 지도자와 신하의 이익 추구 방식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사기(史記, 91 BC 전후)는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책으로 서양의 최초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의 책과 비교할 수 있다. 특히 사기의 열전(列傳) 부분은 당시 동서양 영웅들의 인생기록이라는 면에서 플루타크 영웅전과 아주 비슷하다. 그러나 사기에는 헤로도토스나 플루타크 영웅전에는 전혀 없는 정치경제사상이 담겨 있다. 사마천이 살던 시기에는 동양에서는 이미 민족국가 형성이 완성되어 정치경제사상이 국가운명에서 전쟁 못지 않게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사기 열전 69장은 화식(貨殖)열전으로 명명되어 있다. 화(貨)는 재산을 뜻하며, 식(殖)은 증식을 뜻한다. 즉 재산이 왜 중요한지, 재산을 늘려 부자가 되는 방법, 그리고 재산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에 관한 기록이다. 여기서 정치경제사상을 설명하는 인간본성에 대한 사마천의 탁견이 담겨 있다. 인간본성에서 이익과 재산이 인간을 움직이는 원천적인 이유임을 밝히고 있다:
천하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찾아오는 것은 모두 이익을 얻고자 함이고,
천하사람들이 무너지듯 흩어지는 것도 이익을 찾아가는 것이다. (사기 129-2)
사마천은 역사와 인간의 마음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결국 자신의 이익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간파하고 있다. 관료들이 공익을 위하여 일하도록 하지 않으면 사익을 추구하게 되는 상황은 일반인들이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동일한 인간본성에 있다고 보았다.
대체로 사람들은 상대방의 재산이 열 배가 되면 헐뜯고, 백 배가 되면 두려워하고, 천 배가 되면 그 사람의 일을 해주고, 만 배가 되면 그 사람의 노예가 된다. 이것은 만물의 이치다. (사기 129-29)
관료들은 행정명령을 왜곡하고, 도장을 훔쳐 사용하고, 죄를 짓는 행위를 하는데 그것은 돈을 착취하는데 목적이 있다. 농부, 기술자, 상인, 목동들은 모두 자신들의 일을 하면서 더 많은 돈을 취하려고 노력한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매일 자신들의 능력과 기술을 활용하여 좀 더 많은 금전적 이익을 취하려고 노력한다. (사기 129-27)
인간본성이 이러할 진데, 정부나 지도자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국가주의 탐욕”이다. 즉 지도자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백성과 다투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국가를 운영하는 최선의 방안은 백성들로 하여금 원하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가장 나쁜 것은 국가 지도자가 백성과 같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그들과 다투는 것이다 (사기 129-1)
사마천은 순자나 한비자가 설파한 것처럼, 또 2천년후에 케네와 아담 스미스가 노력한 것처럼 무위사상(서양에서는 자유방임주의)으로 국가경제를 운영하는 것이 최선의 방안임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농업은 먹을 것을 생산하고, 대지는 여러가지 물품과 물자를 생산하며,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물건들을 만들고, 상인은 이런 것 들을 움직여 돌게 한다. 이러한 일들은 정부가 규제하거나 강요하거나 빼앗아 대신하는 일 없이 저절로 일어난다. 백성 모두가 각자가 원하는 것을 취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할 뿐이다… 그렇게 하라고 요청하기 않아도 저절로 일어난다. 즉 道를 따라갈 뿐이다. (사기 129-3)
상품이나 화폐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사기 123-5)
도덕경(BC 6-7세기): 관자, 순자, 한비자, 사기 등은 서양보다 2천년 앞서서 정치경제사상의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정치경제철학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고전은 노자의 도덕경이다. 특히 정치경제철학을 도덕경의 행동지침인 무위사상과 함께 제시하고 있다. 관자, 순자, 한비자, 사기 등이 모두 무위사상을 공유하고 있지만, 근원은 도덕경에 있다. 무위사상은 인간본성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이해하면서 그런 기반위에 제시하고 있다. 아래는 도덕경에 명시되어 있는 정치경제철학의 일부분이다.
민생중시 (도덕경 53장): 조정은 화려하나, 논 밭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곳간은 텅 비었다. 그런데도 한쪽에서는 비단옷을 걸쳐 입고, 날카로운 칼을 차고, 음식은 물릴 정도이고, 재물은 쓰고도 남는다. 이것이 도둑이 아니고 무엇인가?
간명한 법규 (도덕경 57장): 금하고 가리는 것이 많을수록 백성은 더욱 가난해진다. 백성들이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다룰수록 나라는 더욱 혼란해진다. 사람 사이에 잔꾀가 많을수록 괴상한 일이 많이 생긴다. 법이나 명령이 요란 할수록 도둑이 더 많아 진다.
작은 정부 (도덕경 58장): 다스림이 간단 할수록 백성에게는 득이 된다. 다스림이 복잡 할수록 백성에게는 해가 된다…백성이 다스리기 힘든 것은, 위에서 너무 많은 정책을 만들어 간섭하기 때문이다.
민간 주도 (도덕경 65장): 자신의 계획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지도자는 국가에게는 해악이다. 자신의 계획을 국민에게 강요하지 않는 지도자는 국가에게 축복이다.
적은 세금 (도덕경 75장):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위에서 세금을 과도하게 거두어 자신만을 위하여 쓰기 때문이다.
사회균형 (도덕경 77장): 하늘의 道는 많은 것을 가진 자에게서 취하여 없는 자를 돕는다. 인간의 道는 없는 자에게서 취하여 많은 것을 가진 자를 돕는다. 지도자 중에 누가 잉여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 道를 이해하는 자 만이 할 수 있다.
지도자의 청렴 (도덕경 81장): 지도자는 자신의 부를 추구하지 않는다. 남을 위하여 일하는 데서 기쁨을 찾는다. 따라서 남에게 주는 것이 많을 수록 자신은 더욱 부유하게 된다.
서양의 계몽시대에는 동양의 관자, 순자, 한비, 사마천 등 사상가들의 책이나 철학이 서양에 소개되기 이전이다. 계몽시대에 유교와 도교의 서적들 만이 서양에 소개되고 서양 사상가들이 감명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도교의 정치경제철학은 도교의 핵심 행동원리인 무위사상과 함께 이때 형성되기 시작한 서양의 정치경제사상의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민족국가의 구성은 결국 국가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을 시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서양은 동양의 무위사상에서 영감을 얻게 된다.
3) 민족국가는 서양 중상주의를 민본주의 정치경제로 전환
최근 우리는 정치경제, 즉 political economy라는 용어에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경제 철학은 서양이 17세기 이전 침략과 약탈 시대 동안에는 사용하지 않던 개념이다. 민본주의가 정치경제 철학의 저변에 깔려 있는 장치가 된다. 정치경제 철학은 서양보다 훨씬 먼저 동양에서는 민족국가의 형성과 함께 발전된 철학이다. 도교의 무위라는 핵심 사상이 정치경제 철학에 적용된다. 무위사상은 유위에 대한 경계를 주장하며 개인과 지도자가 행동원리로 삼아야 할 만큼 중요한 정치, 경제, 윤리적인 사상이다. 도교의 행동원리인 무위사상은 후에 서양에서는 자유방임(laissez-faire)주의로 번역될 만큼 중요한 경제성을 내포하고 있다.
당시 서양은 중상주의에 몰입해 있었는데 이는 정부가 국가의 개인의 경제활동에 절대적으로 관여하는 정책이다. 중상주의로 인하여 개인의 경제적 자율을 주장하는 무위사상과 정 반대되는 정부의 간섭체제가 서양을 수백 년간 지배하고 있었다. 정부의 간섭을 배재하자는 무위사상은 서양 사상가들에게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철학으로 다가오게 된다.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초기 식민-착취 정책과 중후반기 보호무역 정책을 모두 관통하는 하나의 현상은 국가주의로 표현될 수 있다. 서양의 식민-중상주의 정책은 정치경제측면에서 볼 때 결국 국가주의로 귀결된다:
중상주의는 17-18세기 유럽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그것은 국가주의의 한 종류였는데 오류에 가득 찬 경제논리를 이용하여 제국주의적 국력을 키우고, 또 국가가 선택하는 집단이나 개인에게 독점권을 주거나 보조금을 주는 제도였던 것이다.245
중상주의 정책을 추구하며 각국의 군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국가의 경제, 통상 정책을 강력히 통제하고자 하였다. 물론 당시 군주들은 거듭되는 전쟁과 긴박한 경쟁 속에서 국가의 안보와 부, 즉 부국강병을 앞세운 면도 있었다. 당시는 국가와 군주의 구별이 없었다.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 라는 선언으로 유명하다.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과 국가주의를 통한 개인의 이기심 내지 탐욕 추구와 구분이 없는 상태였다.
17세기에 서양 제국은 전세계를 무대로 한 식민지 개척, 금-은, 향신료와 노예획득 경쟁을 시작하였다. 그 방법으로 주로 개척, 해적행위와 탈취에 의존하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콜럼버스와 바스코다가마의 대서양과 인도양 개척을 필두로 이에 제일 먼저 성공한 나라다. 포르투갈이 선두에 섰었지만 인구가 너무 작아 스페인에게 밀리게 된다. 스페인은 소위 코르테즈 (Hernán Cortés, 1485-1547)와 피사로 (Francisco Pizarro, 1471-1541)같은 콘키스타도르 들의 활약으로 아즈텍 과 잉카 제국의 금과 은을 탈취한다. 콘키스타도르는 스페인어로 정복자를 뜻한다. 아메리카로부터 얻은 막대한 금과 은을 국내로 들여와 스페인은 유럽 최대 강국으로 부상한다.
영국은 이러한 스페인의 금과 은, 그리고 향신료를 실어 나르는 배를 습격하여 이를 탈취하는데 집중하기도 한다. 유명한 드레이크 (Francis Drake, 1540-1596) 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러한 드레이크의 해적행위에 투자하여 어떤 해에는 왕실 수입의 반쯤을 이로부터 확보할 정도였다.246 드레이크는 해적, 탐험가, 해군제독, 기업인, 정치가 로서 활약하였으며, 작위도 받았고 1588 스페인의 무적함대와의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는 등 특출한 인물이었다. 영국인에게는 둘도 없는 애국자, 스페인에게는 자국선의 대서양 항해에 가장 위험한 해적 두목으로 커다란 현상금이 걸린 사나이였다.
이러한 스페인과 영국간의 경쟁은 해상 곳곳에서 소규모 충돌이 빈번해지다가 결국 전면전쟁으로 이어진다. 서양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1588년 영불해협에서 벌어진 해전(the battle of Gravelines)에서 스페인 무적함대의 궤멸과 영국 해군의 승리로 두 나라의 운명이 갈린다.247
유럽 국가들은 해운의 발전, 해외식민지의 개척과 함께 국제무역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들은 식민지와 영토확장을 추구하고 국제무역의 관리를 통하여 국부를 증가시키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러한 행태는 “중상주의 (重商主義 Mercantilism)” 라고 불리게 되었다. 중상주의 라는 어휘는 라틴어 mercans에서 왔는데 이는 물건을 사는 사람 (buyer) 이라는 뜻이다. 유럽제국은 중상주의정책을 추구하며 국가간의 거의 무제한적인 전쟁의 상태로 돌입하게 된다. 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무려 300년 가까이 이러한 중상주의를 숭배하는 상태가 계속된다.
이들이 취한 중상주의라는 국가경제 정책은 상업을 진작하여 민생을 도모하거나 세계질서를 유지하자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철학이 아니다. 이는 최강의 국가로 살아남고 군림하는데는 남을 정복하고 필요한 물자를 탈취하거나 자국에 유리한 교역조건에 의하여 확보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경쟁수단으로 삼았다. 이것이 중상주의다. 이 정책은 어떻게 해서든지 국제교역에서 무역흑자를 달성하고 이를 통하여 국가의 재화, 즉 금의 소유를 극대화하자는 것이다. 당연히 극도의 보호무역주의가 성행하게 된다. 보호무역주의 기치아래 서양 각국은 무역수지의 흑자 달성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중상주의 정책은 아래와 같이 표현된다:
우리는 외국으로부터 우리가 판매하는 것보다 더 많이 수입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정책을 견지해야 한다. 왜냐 하면 이를 어기면 우리는 가난해지고, 상대방은 부유해지기 때문이다. 248
그래서 모든 나라가 수출을 극대화하고 수입을 극소화하는 정책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 따라 유럽 각국은 해외 식민지 확보와 제국내의 무역 통제를 위한 경쟁을 하게 된다. 중상주의는 대서양 3각 무역의 패턴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즉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면화, 설탕, 담배 등이 유럽으로 수출되고, 유럽에서는 이를 가공한 섬유나 사탕수수로 만든 술 럼(Rum)주 같은 공산품을 아프리카나 다른 식민지로 수출하고, 아프리카에서는 노예를 아메리카로 수출하는 무역을 유럽 각국이 앞장서서 추구하게 된 것이다.
전매와 독점은 중상주의 정책의 일반적인 패턴이 된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 등 근대 경제학자들은 중상주의를 국가권력, 제조업자와 상인이 결탁하여 소비자에게 손해를 끼친 거대한 경제체제로 보았다. 실제로 중상주의자들은 정부관료나 상인들이 대표하였다. 실제로 상인들은 외국의 경쟁을 배제한 국내 시장에서 독점권을 가지고 막대한 이윤을 취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노무자와 소비자의 입장을 희생한 결과다. 또 국가는 높은 관세를 물리고 상인들이 지불하는 세금을 독점할 수 있었다. 중상주의자들은 당연히 근로자들을 저임금으로 묶어 두는 것을 국부를 위하여, 국가의 생존을 위하여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노무자나 하위계급에게 교육, 여가제공, 최저임금이상의 임금제공 같은 것을 국가를 나태와 악으로 이끄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국내에서는 무역 경쟁력을 높이기 위하여 노임의 증가를 적극적으로 억제하게 되었다.
4) 서양의 시장경제 철학은 도교 무위사상에서
17-18세기 계몽시대에 서양의 사상가들은 중상주의라는 철저한 국가통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치고 있었다. 중상주의에 제일 처음으로 사상적으로 도전장을 던진 사람들은 프랑스의 중농주의 사상가(Physiocrats) 들이었다. 이들은 중상주의라는 슬로건 아래 국가간 무한의 경쟁을 벌이는 대신, 식민지를 포함하여 자국내의 농지를 최대한 활용하여 농업생산을 늘림으로써 국가의 부를 증가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들은 동양에서 농업이 높은 생산성을 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배경을 이루는 정부의 무위사상 (자유방임정책)에 깊이 매료된다.
무위사상은 정치경제차원에서 “자율”을 뜻한다.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들은 정치경제철학의 핵심인 개인의 자율을 목표로 삼고 무위사상을 번안한 자유방임(laissez-faire) 사상을 서양에 도입하였다. 무위사상과 자유방임은 “자율”이라는 펀더멘털을 공유한다. 자율을 정치경제체제의 핵심으로 삼아야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자율을 무시하고 정부가 경제 정책에 집착하여 간섭을 시작하면 이러한 경제체제는 결국 소멸하게 된다.
프랑스 중농주의자들은 도교의 무위 사상을 “레세페르”라고 번역하면서 자유방임 사상이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레세”는 저절로 라는 뜻이고, “페르”는 만든다를 의미하므로 “레세페르”는 “저절로 만들어진다” 라는 뜻이다. 중농주의자들이 어떻게 무위사상에서 새로운 개념인 자유방임주의 사상을 서양에 전파하였는지 최근에 서양인들에 의하여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중농주의자들에게는 어떻게 국가의 간섭을 작게 하고 개인의 생산적인 능력을 키우는 것이 경제에 중요하다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 뒤에는 해외정복 보다 자연과 농업을 중시하여 국부를 키우자는 철학이 깔려 있다. 이때 도교의 무위사상이 프랑스 중농주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서양의 철학자 듀란트는 “우리가 동양에서 받은 유산”(Our Oriental Heritage)이라는 책에서 자유방임주의의 생성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프랑스의 중농주의자 들은 도교와 노자, 장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무위(無爲)사상, 즉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를 신봉하였다. 249
정치경제 차원에서 프랑스의 중농주의 철학자들이 중국의 농업제도와 이를 운영하는 정부의 윤리적인 역할, 그리고 이에 담겨 있는 경제철학, 무위사상에 심취하였다. 이를 자유방임주의라는 사상으로 묶어서 서양의 계몽시대에 유행시키게 되었다:
현명한 지도자는 정치를 할 때 상당 부분이 그대로 내버려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요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철학은 바로 동양 도교의 무위(無爲, wuwei)사상에 내재 되어있다. 이것을 프랑스 사람들이 자유방임주의 (laissez-faire)로 번역하여 서양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 무위사상이 케네를 감동시키고, 케네에게서 배운 아담 스미스를 통하여 서양 근대 정치경제학의 기초를 이루게 된다. 250
프랑스의 중농주의자 들은 국가의 부가 농업에서 온다고 보고, 농업은 정부의 간여 없이 자연의 섭리를 따라 또 시장의 메커니즘을 따라 인간이 일할 때 가장 커다란 효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하였다. 중농주의(Physiocracy) 라는 어휘는 “자연적” 그리고 “관리” 라는 뜻의 합성어다. 국부를 농업처럼 자연에 의지하여 관리하자는 생각이다. 대표자 프랑수아 케네 (François Quesnay, 1694– 1774)가 중농주의 정책과 함께 자유방임 사상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251 프랑스 중농주의자들은 “자유방임과 자유통행, 그러면 세상은 저절로 돌아간다” 라고 주장했다. 道의 철학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정부가 간섭을 많이 할 수록 백성은 힘든 생활을 하게 된다” 라는 생각이 그들을 지배했다.
18세기 서양의 정치 문화적 중심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에서 서양역사에서 처음으로 정치경제를 생각하는 철학자들이 등장하였다. 케네는 국가내의 경제의 움직임을 살피는 “경제표”(Economic Table)를 1758년 발표한다. 그는 서양 최초의 정치경제 철학자가 된다. 케네는 프랑스 중농주의의 태두로서 18세기 서양에 근대경제학의 기초이념인 자유방임(laissez-faire)을 중국의 무위(wuwei)사상으로부터 도입한 인물이다. 케네는 무위를 프랑스어로 자유방임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보았다.252
당시 자유방임이라는 새로운 사상에 기초를 둔 케네의 이러한 주장은 혁명적이었다. 프랑스 중농주의 사상가들이 내세운 레세페르 라는 사상은 영국으로 전파되어 영어로 프랑스 표현을 그대로 쓰기 시작하면서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시장 경제체제에 직접적이고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253 실제로 아담 스미스는 1760년대에 파리로 케네를 방문하여 자유방임사상에 대하여 협의를 가진 바도 있다.254 이처럼 중요한 자유방임이라는 개념은 케네 이전에도 17세기말 18세기 전반에 프랑스 사업가들 사이에 일부 사용되기도 하였다.255 그러나 자유방임 사상에 도교의 무위사상에서 받은 직접적인 연관성은 부인하기 어렵다.
프랑스 중농주의 사상가 들은 꼭 남의 것을 빼앗아 와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진 농토에서 많은 작물을 생산하는 것이 국부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혁명적인 발상이다. 중상주의는 군사적 정복을 통한 식민지에서 금과 은을 최대한 확보하여 국부를 키우자는 것이다. 중상주의라는 개념에 담긴 뜻을 확대해서 보면 알렉산더, 카이사르, 중세의 샤를마뉴, 스페인의 중남미 정복, 영국과 유럽국가들의 식민지 정복 등이 모두 중상주의와 핵심 개념을 같이 한다. 많은 금과 은을 차지하는 국가가 강국이 된다는 것이다. 즉 국가의 다른 나라의 정복 역할이 국부를 위하여 최대한 중요해진다. 국가내의 개인의 생산력은 아무런 개별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서양의 고대, 중세, 근세의 정치철학적 개념이다.
반면 중농주의 철학은 “자유방임! 자유통행! 세상은 저절로 돌아간다!”을 외치는데, 이는 정복국가나 중상주의 철학이 외치는 것과는 반대의 정치철학의 개념이다. 중상주의 철학은 도교의 철학, “자유방임 함으로써 백성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와 같은 내용이다 (도덕경 57장). 중농주의 철학의 주장인 “자연에 맡겨라!” 는 구호는 도교의 “하늘의 道는 이롭게 할 뿐, 해롭게 하지 않는다”는 철학과 그대로 들어 맞는다 (도덕경 81장). 중농주의의 슬로건인 “지나친 통치는 금물!” 이라는 주장은 도교에서 “자신의 계획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지도자는 국가에 해악을 가져온다” 라는 생각과 같은 표현이다 (도덕경 65장). 무위사상은 유교에서도 공감하고 있는 철학이다: “하늘이 무엇을 말하랴? 사시(四時)가 운행되고 만물이 잘 자라는데 하늘이 무엇을 말하랴?” (논어 17-19)
케네의 제자, 드구르네 (Jacques Claude Marie Vincent de Gournay, 1712 –1759)는 자유방임주의를 서양에 널리 전파한 인물이다. 케네와 드구르네 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중국의 발달된 농업과 이를 운영하는 정부의 자유방임 정책, 그리고 도교의 자연주의 철학 개념들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프랑스 사상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들의 영향으로 명백한 도교의 사상인 “지나친 통치는 금물!” 이라는 모토나 “자연에 맡겨라!” 라는 구호가 널리 프랑스 지식인 사이에 유행하였다. 이에 의거하여, 또 스승 케네의 가르침에 따라, 드구르네는 자신의 신념인 상업과 산업에 대한 국가의 규율을 제거하기 위하여 “자유방임, 자유통행!” 라는 슬로건을 열심히 유포하였다. 그의 슬로건은 “자유방임, 자유통행, 세상은 저절로!” 라는 보다 발전된 형태로도 프랑스 사상계에 유행하게 되었다.
뒤이어 쁘와브르(Pierre Poivre, 1719-1786)는 4년간 중국 지방을 광범위하게 여행하였다. 그는 서양보다 발달된 농업경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부의 자유방임정책과 역할을 경험하고 이를 프랑스에 알린 인물이다. 실제로 케네와 프랑스 중농주의자들은 중국의 농업과 그 철학적 기둥인 유교-도교사상에서 서양 정치경제의 미래와 모델을 보았다. 케네는 쁘와브르에게서 많은 정보를 입수하고 그와의 접촉에서 서로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쁘와브르는 중국의 농업과 도교 사상에 관하여 목격자로서의 생생한 정보와 생각을 케네에게 주었으며, 케네는 쁘와브르를 중농주의 철학자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쁘와브르는 원예농업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젊은 시절 천주교 선교사로 중국에 파견되어 광주와 마카오 지역에서 일하게 된다. 쁘와브르는 북경에 거주하면서 유교에 집중한 다른 예수회 신부들 과는 달리 원예농업에 관심을 가지고 두 번에 걸쳐 4년간 지방을 널리 여행하면서 농업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는 이어 동남아, 아프리카, 중미에서도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정리하여 “한 철학자의 여행”(Voyages d’un Philosophe) 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쁘와브르는 이 저서에서 중국의 농업경제를 관찰한 후 이를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리고 유럽의 농업상황과 비교하면서 모두 중국의 효율적이고 생산성 높은 농업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결론 지었다.256 그는 농업예찬론자였다. 그는 당시 중상주의 테두리 안에서 유럽 제국이 생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통상에 의한 경쟁에만 집중하여 정치경제정책을 운영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면서, 농업에 의하여 생산량을 크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점에서 쁘와브르는 중농주의 사상가 케네와 뜻이 통하게 된 것이다.
쁘와브르는 그의 저서에서 “중국은 나라의 기간인 농업의 번성은 간명한 윤리와 규정의 덕분인데 이 윤리와 규정은 자연과 이성이 명하는 바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기술하였다. 당시 서양의 규범적인 정부정책을 중국의 자연적이고 방임적인 정부정책과 비교하여 비판하면서 중국의 이러한 정부 자연적인 정책과 국민의 활발한 근로의식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백성들이 다른 사람을 속이고자 하는 교활한 자들이 만든 의도가 숨어있는 의심스러운 규정이나 정책을 따르는데 이는 중국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고 기술하고 있다. 257
그는 중국의 농업과 사상체계가 자연을 본받아 자연의 길을 따르고 있으며, 이러한 방식이 정부의 지지를 받아 정부는 개개인의 경제활동에 가능한 대로 최대한 간섭을 삼가고 세금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러한 중국의 정치경제 사상이 도교의 道와 무위개념에 응축 되어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군주가 국민경제에 간섭하거나 이를 지도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백성들은 스스로의 길 즉 道를 따르도록 것에 집중하고 있다고 관찰하였다.258
프랑스의 중농주의 사상가들은 매년 봄에 중국의 황제는 백성의 근로의식을 함양하기 위하여 솔선수범하는 차원에서 파종의 시범을 보이는데 이것은 자연을 존경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동양문명에서 자연에 대한 존경은 서양의 종교처럼 자연이 신성하거나 성스러운 것이라는 함의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중국 사상체계 내에서는 초자연적인 것을 신성시하는 철학을 존경하지 않았고 오히려 경멸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동양문명은 자연에 존재하는 법칙에 따라 작용하는 스스로를 규율 하는 체계가 최선의 방안이라고 보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두에게 최대한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지배자는 백성을 위하여 솔선수범하는 것 외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최상의 지배방법인데 이것이 바로 무위사상이다.
계몽시대 사상가들에게 무위사상의 중요성은 케네, 드구르네, 쁘와브르 등 중농주의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들은 법률과 정치경제 사상이 모두 자연철학과 무위사상을 본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은 “법을 제정하는 사람과 법이 모두 자연의 길이라는 원칙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의 이상적인 행동양식인 무위”를 본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중국에서는 무위사상이 바로 정부 정치경제의 중심사상이다.” 라고 평가하였다.259